마가복음 11: 미끼되는 은사(소모품=약하심)와 vs 덮썩 무는 마귀의 정체
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오전 10:19:55 김대식
(막 3:7,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막 3:8, 개역)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막 3:9, 개역)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막 3:10, 개역)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막 3:11, 개역)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막 3:12, 개역)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막 3:13, 개역)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막 3:14, 개역)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 3:15, 개역)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6, 개역)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막 3:17, 개역)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막 3:18, 개역)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
(막 3:19, 개역)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러라』
(막 3:20, 개역)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막 3:21, 개역)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약하심의 확대가 은사 라고 했습니다. 즉 미끼 됨입니다.
즉 상대적인것입니다. 미끼란 누구 보란 듯이 주어지는 겁니다.
우리 좋아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약하심 또한 상대적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귀 들린 채 있습니다. 즉 강함을 추구합니다.
왜 마귀 들렸고 왜 강함을 추구하는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고
더욱 더 먹음직 스러운 것을 찾고
더욱 더 보암직 스러움 것을 찾고
더욱 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을 찾아서
자신의 신체에 내장 곧 숨길려고 먹을려고 하는 겁니다.
곧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모든 인간은 마귀 들린 겁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인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은 이런 인간이 마귀 들려 있음을 들추어내어야 합니다.
마귀 들린 것을 감추고 내장하고 숨기는 방식을
예수님은 약하심으로써 그것을 들추어 내고 바깥으로 돌출 시켜야 하는 겁니다.
이 약하심에 동참 동행케 된 것이 12 제자들이 세워지고 마귀 쫏는 권세가 주어지는 겁니다. 곧 은사입니다. 미끼가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착각 하면 안됩니다.
그동안 12제자 모두 마귀의 밥 이였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마귀 밥이 도리어 예수님의 선택으로 인해 마귀를 쫏아내는 능력을 부여 받게 되니
마귀가 비로소 의식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행위(믿음)는 우리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 보란 듯이 마귀를 의식하고 펼쳐지는 행동(믿음)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동기부여를 해 줘도 이미 마귀 아래 가두신 분이, 죄 아래 가두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 겁니다. 죄 아래 가둘려고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싸우는 가를 봐야 합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일하심을 봐야 합니다.
우리가 일하는 것은 없습니다.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결국 도저히 하나님의 일에 참여 불가, 동참 불가를 뼈저리게 실감하며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제대로 펼쳐진 겁니다. (롬4장))
예수님의 믿음이 인간의 믿음과 그 어떤 부분에서도 어떤 한 톨도 일치성, 맞는게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조리 다 틀렸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마귀에게 사로 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도 못 믿고, 보내신 자의 하나님의 일하심도 못 믿는 판국에
뭐 하나님의 일 ~~~~~~~~~
하나님의 일 ~~~~
하겠다 굽쇼? 믿겠다 굽쇼? 마귀 쫏아내겠다 굽쇼?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출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저는 가만히 서서 라는 의미가 그냥 가만히 있는 아 그럼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구나 라고 또 그 가만히 서는 행동을 조건인냥 갖추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아예 죽이시는 겁니다. 죽인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 아래 가두어서
단순히 죽음의 권세가 아니라 부끄럽고 고개도 못들고 부끄부끄 러울 정도로 수치 속에 가두는 원수 됨 또는 방해꾼 또는 각기 제 갈길로 가버리는 양 같음 등등의
주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는 상황이 바로 가만히 서서입니다. 무능자
예로 예수님이 물 위를 걷도록 베드로를 만들어 놓고 물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약 그렇게 되면 베드로 소우너에 딱 맞는 예수일 뿐이니 가짜요 우상일 뿐입니다. 그런 선악의 예수 라는 환상을 깨뜨려) 물에 빠뜨려서 예수님과의 동행을 성사 시킵니다. 죽은 놈이 물에 빠진 놈이 무슨 만남을 성사 시키고 동행을 이루겠습니까?(내가 아예 삭제 당하고 나 라는 존재 조차도 없는데? 그래서 새로 만드는 것이 동행입니다. 미끼로 새로 만들고 약함으로 새로 만드는 겁니다. 이전 것으로는 동행이 안됩니다. 미끼나 약함이나 낮아짐이나 특이성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밖아 죽임을 당할 때 새것입니다.)
예수님이 손 내밀지 않으면 건지시지 않으면 방금전 까지의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물 위를 걷도록 하셨을까요?
예 맞습니다.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마귀 쫏는 권세를 주신 겁니까? 빠뜨리기 위해서입니다.
미끼 되게 하시는 겁니다.
약함을 자랑 하는 겁니다. 뻔뻔 스럽게도 말이죠.
우리는 전혀 자랑 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마귀 밥 이 될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또 밥이 되라굽쇼?
애굽의 종 된 우리는 끄집어 낸 여호와가
다시 우리를 애굽의 종 으로 삼아버린다면 인간은 화를 냅니다.
그런데 진짜 화를 내었습니다.
알고 보니 애굽의 종이 아니였고 마귀의 종이 아니였고 마귀였습니다.
(애굽의 종 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종으로 삼을려는 애굽 그 자체임이 들통나서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예수님을 자기 노예로 삼고자. 천국도 자기구원의 노략물로 삼고자. 여호와도 자기 노리개로 우상으로 삼고자 하는 속내가 들통난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숨겨진 것들을 다 폭로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자꾸 광야에서 약하게 약하게 약하게 만드는 특이성을 부을 때 마다
마귀의 종된 모습이 아니라 마귀성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것 주님이 꺽고 짤라내고자(단순히 성형수술하듯이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죽여버려서 새롭게 만듬, 이전 것은 지나가게 함 그래야 새것이 됨을 보는 영광을 주님 혼자 딸랑 누리는 겁니다. 그러니 원망이 튀어나올 때 마다 주님은 앗싸 성공이라고 외치시는 겁니다. 우리는 역거운 타는 냄새를, 그 공포를, 주님은 육체가 불타고 죄가 타버리는 그 향기를 앗싸 냄새 좋다 라고 향기 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마귀임을 그 정체를 들추어내고자 꼬깃 꼬깃 숨겨놓은 들추어내는 광야 곧 죽음 속으로 몰아 넣는 것입니다.
자 이 하나님의 일 곧 예수님의 믿음 곧 구리 놋뱀으로 달리심을 쳐다 보기 싫어서
자신이 마귀 임을 뱀임을 쳐다 보기 싫어서
나왔던 애굽 다시 도로 들어가는 겁니다. 자 이러니 마귀의 종이 아니라
마귀 맞죠
차라리 마귀의 종 이였다면 그 종 됨에서 빼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볼것이고
그 피로 고침을 받을 것인데
종 아니다 라고 하니 마귀 그 자체 였던 겁니다.
그러니 마귀 잡는 미끼로 삼는 일에 거부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일부러 거인족을 배치시키는 이유는
왜 미끼로 삼는 지, 왜 약하게 만드시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거인족을 배치시켜서 알게 하시는 겁니다.
맞습니다. 주님이 강하시기에 보호자 싸움이지 우리 싸움이 아니다 라는 것을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라고 외치기 위해서 미끼 되는 겁니다. 미끼 삼는 겁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제 어머니와 식사 중에 대화를 하다가 우연히 나누게 된 내용입니다.
뉴스가 나오는데 군 비리에 대해서 뉴스가 나옵니다.
(권력 곧 힘과 강함이 집결해 모인 곳에는 항상 비리가 있습니다.)
대뜸 이런 생각이 떠올라 질문을 했습니다.
어머니 ! 왜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가
바리새인의 미끼요 예수님의 미끼가 되는 이중첩자가 자신도 모르게 되는 줄 아십니까?
한 쪽은 감추고 숨길려고 미끼를 사용하고
또 한 쪽은 들추어 내고 까발릴려고 미끼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막상 바리새인이 자신들의 완악함을 감추고 숨기고자
미끼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들추어내고 까발리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무조건 인간의 반대로 하시기 때문에 시험 들 리가 없습니다.
도리어 저들의 완악함게 걸려주심으로써 미끼가 된 여인을 그저 불쌍히 여기십니다.
왜 저번에 이런 이야기 어무이 한테 했잖아요 (약간 응용한 이야기)
실로암 소경을 지나 개나 다 줘 팼는데 팻어도 아무것도 못 보는데
막상 예수님이 고쳐버리니까
날때부터 소경인 이 자가 나를 예수님이 고쳤어요 라고 기뻐서 온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자랑하고 다니니까
아무도 그 자랑과 그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다들 덜커덕 놀라면서 나 너 때린적 없다 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피하더라 말입니다.
아니 누가 물어 봤냐고요? 그거 이미 지나간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금 이 순간 날 고치신 나를 눈 뜨게 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퍼트리고 있는데
다들 지숨 지숨 감추기 시작하고 불편해 지기 시작하고 퍼뜩 퍼뜩 숨기기에 바쁜 겁니다.
예수님이 눈 뜨게 하심이 이렇게 불편스럽고 거북스럽기 짝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일 하심이!, 예수님의 믿음이! 인간들의 믿음의 동산에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숨길려는 믿음쌓기인데 감출려는 신념인데 그것을 확 삭제 해 버리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의 믿음의 등장 때문입니다. 그 미끼로 실로암 소경이 눈치도 코치도 없이 자랑하고 다니니 불편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질 않는 겁니다.
그럼 마귀 쫏는 권세를 주시는 것도 마찬가지 겠죠? 미끼 삼기죠.
그런 이유로 예수님이 땅에 글자를 쓰기 시작 합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율법을 쥔 아주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 행위
그 당당함 뭐 하나 꿀릴 것이 없는 그 행동에
갑자기 땅에 도대체 뭘 썻길래
아주 아주 자연스럽게 돌삐를 들었던 자들이 아주 아주 거북스럽게 얼굴을 감추면서
불편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그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현장을 내빼듯이 도망치는 겁니다. 냅따 줄행랑 치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다윗을 예로 들었습니다.
어무이요 왜 하나님이 다윗에게 일부러 우리야 장군 아내를 범하도록 하신줄 아십니까?
군 부대에서 제일 높은 계급의 상급자에게
바로 밑의 하급자들이 자꾸 자꾸 눈먼 돈이 있습니다 라고 알려 줍니다.
처음에는 에헴 에헴 그런 소리 하지말라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 하급자들이 그 소리 고지곳대로 안 듣습니다.
상급자를 생각 하는 자는 없습니다. 정작 하급자들이 그 눈먼 돈을 먹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다리 걸치는 것이 바로 상급자의 동참 요구입니다.
점점 금액이 작다면 유혹 꺼리가 되지 않지만
점점 금액이 커질수록 점점 상황보고는 빈번해 지고
결국 그 돈을 왕의 자리에 있는 상급자는 넘볼 수밖에 없음으로써
하급자는 그 권력의 힘을 나눠먹는 정치 분배를 하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왕의 자리요 율법의 자리요 육의 자리임을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앞당겨 다윗에게 실행해 버립니다.
미끼로 인해서 다윗이 걸려 듭니다.
빨리 매 맞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윗이 그 미끼가 되는 겁니다.
다윗이 약해지니까 고난속에 있으니까 이스라엘이
자신이 그렇게 율법을 잘 지켜서 이스라엘을 이끌겠다던 그 이스라엘의
진짜 숨어있던 속성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애굽나라 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미끼로 삼았던 다윗은 그 속에서 끄집어 냄을 당한 것입니다.
구원입니다. 끄집어 냄을 당한 판국에 놓여 빼내임을 받았을 때에 휴 하고
저 지옥 속에서 빠져 나왔다니 너무 너무 기쁠것이고 감사할 것입니다.
미끼 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휴 하고 십년감수했다는 식으로 저 지옥에서 빠져 나오라고 주시는 겁니다. 은사란 약함이란 상대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저 세계가 심지어 교회도 이스라엘도 저 세계가 지옥이라는 것을 휴 휴 헉 말도 안돼 저 속에서 빠져 나오다니 라고 롯처럼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나오듯이 격는 겁니다.(결국 약함이란 상대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입니다. 약함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조건인냥 갖출 수 없습니다. 저 상대방쪽이 약함을 추구하면 우리는 강함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약함입니다. 저 상대방이 다시 강함을 추구하면 상대적으로 우리는 어쩔수 없이 약함을 추구할 수 밖에 없도록 하시는 것이 약함입니다. 약함의 의미가 유동적이다는 겁니다. 특이성이란 포착불가능 하다는 겁니다. 매끈한 표면은 빈자리 라서 아무도 그 자리를 앉을 수 없습니다. 쭐꺼덕 미끄러지는 굴욕이 됩니다. 그 굴욕이 우리에게는 은혜이고 저들에게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겁니다. 저들이 좌 하면 우하고 저들이 우 하면 좌 한다는 의미가 바로 약함이라는 특이성의 의미입니다.)
율법을 지키겠다고 다들 한 율법 하는 그 속의 현장이 정작 악마소굴이였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전혀 특이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특이한냥 특이성을 포착할려는 것이 특이성을 제거하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율법 지킨자 치고 예수님이 잃어버린자를 앞장세우면 버럭 화를 냅니다. 결국 살인의지가 비로소 약함 때문에 발생되는 도출이 됩니다. 가인의 제사란 결국 죄의 소원이 덮친 속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벨 제사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어려운 것 같아서 또 한 예를 들었습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중년 남자가 같은 교회에 다니는 여인을 성추행 했습니다. 하도 빈번한 일이되어버려서 이제는 양심의 가책도 없고 별 뉴스 꺼리 조차도 되지 않을 정도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하니 아들도 그 여인을 건드렸다는 것이 뉴스화 이슈화 된 것입니다. 점점점 깊숙이 들어갑니다. 점점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는 식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예를 든 것이 바로
제일 높은 놈이 건드려 주기를 밑엤놈들은 바라는 겁니다.
제일 윗 놈이 한번 건드리면 다들 따라서 다 건드립니다.
어떤 누구도 보호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건이 발생 합니다. 사건이란 바로 강함과 약함의 충돌로 등장합니다.
힘의 균등이 비슷하면 사건화 되지 않습니다.
우리 어릴적에 각 동네 마다 약간 정신병자 같은 누나들이 미친갱이처럼 동네에 꼭 있었는데
미쳤다고 그냥 방치 하는 식이라서 아무도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윗사람이 한 번 건드리면 그 밑의 동네 청년까지 다 건드리는 식이 빈번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자가 상대적으로 여자 보다 힘이 있고
정상적이다 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비정상적인 자를 강함으로써 과시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바로 그 인간의 악마성을 담은 증거물인 미끼가 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잡을려고 미끼로 삼았으니 도리어 걸려든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돌진함으로써
예수님 자신의 신체를 하나의 증거물로 미끼로 삼는 겁니다.
미끼란 자신의 신체로 하나의 알리바이? 증거물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마치 광야 라는 죽음 속에서 인간의 원망을 하나 하나 담는 그릇인 증거궤 속에 담듯이)
목베인 영혼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막 6:16, 개역)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계 20:4, 개역)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목 베일 정도로 약했다는 뜻이고(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약함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강함을 들추어내는 약함이라는 특이성입니다.) 약했다는 조건 때문에 그리스도와 동행의 천년왕노릇이 아니라, 동행 자체가 약하심이라는 특이성을 그리스도께서 부으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약함을 연기하는 척하는 약한척은 상대방 강함을 들추어낼수가 없습니다.
곧 그리스도가 약했다는 것입니다. 순한 순, 새싹 , 그루터기(단4장), 남은자, 찌끄래기, 잉여, 잔여, 볼품 없음, 싫어버린 바 됨(특이성), 부스래기, 낮아지심, 버림받음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6:13, 개역)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곧 주의 주 되심의 영광은 약하심으로 이루신 겁니다.
이 미끼 되는 영광을 부으신 것이 바로 선지자 되게 하듯
마귀 쫏는 권세를 12제자에게 부으십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또 착각하는 것이 강했다 라는 의식을 강하게 어쩔수 갖게 되는데
감사하게도 성경말씀은 바로 브레이크를 잡아버립니다.
마귀 쫏는 권세를 주심으로써 시몬과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에게는 이름이 더하여 집니다. 시몬은 베드로로, 야고보와 요한은 우뢰의 아들로 이름을 덧 붙입니다.
(막 3:14, 개역)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 3:15, 개역)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 3:16, 개역)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막 3:17, 개역)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즉 이것은 누구 보란 듯이? 이름을 더하는 겁니다. 마귀입니다. 마귀 보란 듯이, 마귀 약올릴려고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주님은 마귀 때문에 그들에게 이름을 덧 붙여 더하십니다. (믿음 좋고 강하면 덧 붙일 이유 없습니다. 주님의 수고와 동행이 이런 죄인 중의 괴수도 주님께서 넉넉히 숙제 완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숙제를 못이루고 밑도 끝도 없이 그저 숨길려고 할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로부터 더욱더 미움의 대상, 시기와 공격의 대상이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의 신부에게만 부어지는 특이성입니다.
너 딱 내 신부 맞다 라는 겁니다. 베드로와 우레 라는 의미는 이미 완료 된 교회를 의미입니다. 미완료 교회 아닙니다. 오늘날 기존 교회의 교회론은 완료를 향한 이미와 아직의 교회라는 교회론으로 사기치는 집단일 뿐이고, 완료라는 이미 넉넉한 완료의 교회라는 겁니다.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너 교회 맞어. 어떤 교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곧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넉넉한 사랑 때문에 더욱더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음부의 권세는 사랑을 못 이깁니다.
즉 이름을 더해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약하심을 부으셨고
그것으로 완료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더 미끼가 되는 거죠.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마귀 쫏는 권세를 받은 자가 아니라
정작 마귀 쫏는 권세를 부으신 분 , 주체 되신 예수님이
얼마나 초라하고 볼품 없는 모양새로
미친자 취급 받으면서 쫏겨 납니다.
그것도 예수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는 친척인 가족들이
야 야 예수야 너 또 무슨 짖을 꾸미고 다니노 라고
이 종교적으로 볼때에 아주 근엄있어 보이고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과 같은 중요한 부분에서
분위기 썰렁 하게 만드는
헐 ~~~~~~
야 이 미친놈아 그만 호작질 하고 다녀라 라고
제발 좀 그만하라고 말리고 말리고
정말로 친족들이 얼마나 심각했으면 미친놈 말리듯이 심각 했습니다.
왠지 코메디 개그 같은 반전으로
분위기 확 떨어지는 기분으로
(막 3:20, 개역)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막 3:21, 개역)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분위기가 반전 됩니다.
앞의 분위기 어땟나요?
마귀 물리치고 훈장 붙여주듯이 이름 더하고 병고치고 귀신들이 후드득 떨어지고
얼마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장면 아닙니까?
그런데 미친놈 취급 받고
마귀라는 존재 자체를 또 다시 숨겨버리듯이
넌 그저 우리 친족인 육일 뿐이야 하고
육체의 가문 속에 예수도 기여이 포함시켜 숨길려고 합니다.
미친놈이니 없던 일도 합시데이 라고 친족들은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말립니다.
가문의 수치일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분위기를 와전 시키는 듯이 부정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오히려 그만큼 누구보다 예수님을 걱정하는 것은 친족입니다. 동시에 가문의 수치도 제거하는 것도 말이죠. 이것이 인간의 믿음이요 인간이 평생 하는 일입니다. 미친놈 감추기 숨기기입니다. 예수님은 이것 마저도 이런 인간의 악마성도 미끼로써 담으셔야 합니다. 전혀 자신들은 마귀와 상관 없다고 여기는 그 악마성 조차도 말이죠. 얼마나 주님의 하시는 일이 빈틈이 없는지요, 수셔버릴 것은 다 수셔 버립니다. 주님 앞에 감추어 지는 것이 없이 다 드러납니다.)
그러나 의식하는 놈들이 있습니다.
캥기는 놈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안 그런척 하면 친족들이 아무리 숨겨도 숨겨도 아무리 감추어도
드러나야 할 것은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아벨제사 인데 상대적인 가인의 제사가 짝으로써 그 차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응수 해야 합니다.
친족들이 윗 대가리 라고 여기는 그 위의 놈들 곧 강한 자들은 의식합니다.
강한자들이야 말로 약하다 라는 미끼를 배가 고파서 먹지 않고는 못배기기 때문입니다.
덮썩 뭅니다.
그것이 다음 본문입니다.
(막 3:22, 개역)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막 3:23,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막 3:24, 개역)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막 3:25, 개역)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막 3:26, 개역)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막 3:27,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막 3:28,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막 3:29, 개역)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막 3:30, 개역)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막 3:31, 개역)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막 3:32, 개역)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33, 개역)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막 3:34, 개역)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막 3:35, 개역)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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