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인간 (벡터인간: 방향성인간: 복의 사람)

2011년 3월 19일 토요일 오전 9:55:35  김대식


복이란 소유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이미 저주의 사람의 특징이다.
복이란 소유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이미 복의 사람의 특징이다.

그것은 복이란 흐름 곧 방향성이기 때문이다.

방향이란 차이를 내겠다는 화살표인간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않든 의식을 하든 말든 상관 없이
푯대를 향하도록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푯대에 꼿히도록만 되어 있는 화살이지
화살 스스로가 방향을 정할 수가 없다.
푯대가 화살의 운명을 결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푯대를 자기가 원하는 화살을 자신의 푯대에 꼿히도록만 만들었고
원치 않는 화살은 절대로 꼿히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복이란 화살이고 그 화살의 방향성은 인간을 보여준다.
천국(푯대)이 원하는 자는 천국의 방향성을 띠는 인간 화살로 만들었고
지옥이 원하는 자는 지옥의 방향성을 띠는 인간화살로 만들었다.

그래서 복은 반드시 못때빠진 모습으로써 저주를 항상 동반해서 자신의 차이성을 드러낸다.
그것이 바로 저주인데 왜 저주인고 하니 방향성 곧 소유성이 다른 차이성 때문에
반드시 저주를 동반해야 한다.
마치 예수님은 자신의 복된 말씀을 반드시 저주가 되는 마귀를 동반해서 증거하심으로써
그 차이성으로써 복을 더욱더 복 되게 하는 것이다.

더 나은 제사란 사실상 차이나는 제사이기 때문에 더 나은 제사이다.

만약 그냥 제사가 없다면 더 나은 제사도 없다.
가인의 제사가 없다면 아벨의 제사는 무의미하다.
반드시 가인의 제사를 동반해서 더 낫다 라는 차이성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가인의 제사는 뭔가?
방향성이 항상 자기에게 향하고 자기에게 꼿히도록 되어 있다.

아벨의 제사는 무조건 방향성은 십자가다.
예수님이 드리는 제사 곧 십자가의 다 이루심만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더 나은 제사이고 복이며 복의 기준이 된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이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은 방향성을 보여주는 인간이다. 화살인간

너가 좌 하면 나는 우하고 너가 우하면 나는 좌 하겠다는 것은

(창 13:6, 개역)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창 13:7, 개역)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창 13:8, 개역)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창 13:9, 개역)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10, 개역)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과연 복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소유에 있지 않은 것이 복이다.
복은 방향성이다. 벡터 인간이다. 이것이 저번 요한복음을 다룬 수련회에서 흐름으로 표현되었다.

복은 차이성이다. 왜 방향성과 차이성이 복인가?

바람은 잡을 수 없다. 소유할 수 없다.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길수가 없다. 복도 마찬가지이다.
그저 바람은 모래를 뿌리거나 깃발을 달아서 높이 세워보면 안다.
무엇을 아는가?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 그 방향성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방향성은 부는 쪽이든 흐르는 쪽이든 가보면
그 차이성을 알 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차이 말인가?

방향성을 따라 이동하게 되면 방금 있었던 그 자리에 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일어나서 지옥이 되었다면
졸지에 그 사건 때문에 이동하게 된 그 흐름 방향 자체가 복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빼내기를 하셔서 이동케 되었다. 반대방향에서 그 나라를 쳐다보게 되니
모든 국가가 부러워 하는 1등 국가, 전세계가 그런 나라가 소유한 힘을 크든 작든 가지고파서
부러워 했던 그 자리가 막상 그 속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바람이 불어서 재수 더럽게 없게도 날려서 죽음의 홍수 앞에서 서게 되어 보니
그 나라는 지옥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차이가 났다.

그리고 방향성은 계속 계속 죽음을 향해서 돌진한다. 이미 복된 인간인 벡터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천국이라는 푯대에, 십자가라는 푯대에 꼿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흐름(불기둥 구름기둥 : 성령)을 양탄자 자가용처럼 올라탔기 때문에
무조건 그 흐름에서 벗어날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차이날 수 밖에 없는 복의 인간 곧 마이너 인간이다.

그래서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는 차이나는 인간이다.
이 차이나는 벡터인간이 되기 싫어서
이 방향성이 싫어서
이 방향이 아니면 반대 방향 뿐이니
분명 지옥임을 증명해준 10가지 재앙을 보고서도
애굽이라는 망상이 그를 땡기기 때문에
그 사람은 끝까지 복과 저주의 차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애굽에 꼿혀야 한다. 애굽화살인간, 애굽벡터인간이기 때문이다.
약속의 화살이 아니다. 약속에 꼿히는 벡터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광야속에서도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도다 라는
말씀을 성취 하기 위해서
또 택함이라는 복을 차이내기 위해서 반드시 청함을 받은(저주의 인간)을 동반해서

참 쉽게 증거하신다.

10가지 재앙을 뽑아내서 차이나게끔
다시 10가지 원망 속으로 집어넣어서 피를 뿌린다.
벡터인간 되기 이다.
그런데 이 방향성(차이성)에 반드시 인간은 반항한다.

사건(약속 십자가의 언약)의 개입으로 졸지에 차이가 나버린 돈이 있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이다. 돈으로 두 사람의 방향성을 곧 차이성을 벌려놓는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다. 계산하기 쉽게 1 만원 정도로 치면,
백 데나리온은 백만원이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면 1만 달란트는 6천 동그라미 3개에다가 4개를 더하면 60,000,000 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루 품삯 계산하기 쉽게 1만원, 평균 5만원, 좀 되면 10만원 곱하면

60,000,000  곱하기   10,000     =                       6천억
60,000,000  곱하기   50,000     =                       3조  
60,000,000  곱하기  100,000     =  6,000,000,000,000  = 6조
자신의 하루 일당 곱하기 6천만


애굽 나라에서 6조의 값을 치르고 노예에서 빼 냅니다.
우리 좋으라고 빼낸 것이 아니라 방향성 차이나게 하는 피라는 약속 때문이다.

피 만을 드러내는 방향성 곧 차이성을 드러내는 인간 되기 벡터 인간 방향성 인간 만들기 곧 죄인 만들기 인데

과연 이 용서의 피 값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힘빼기를 곧 차이성을 또 부여한다.

자신에게 100데라니온 빚진자를 속 집어 넣어 본다.

구스 여자 라는 제일 못생긴 문디 어중이 떠중이를 모세의 아내로 삼는다.

그러니 그여자는 안된다고 모세 너가 왕인데 왕비 꼬라지가 신부 꼬라지가 저러면 안된다고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 정작 자신은 문디 이면서

그래서 미리암을 똑같이 문디 만든다.
그리고 다시 그 차이인 저주를 자신의 몸 신체에서 격게끔해서
긍휼을 바라는 용서를 기다림으로써
다시 새살을 주니 그 할머니 피부가 헌살을 밀어내고 저주를 밀어내고
새살을 복을 받게 되니 할머니가 아기 피부가 되어서야
비로소 구스여인이 받은 긍휼을 새롭게 보게 된다.
이 미리암이 격은 사건을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 시킨다.

헌살을 밀어내고자 10번 원망할만 곳으로 인도한다.
긍휼을 뽑아내기 위한 차이내기 사건이다.

그래서 일만달란트 빚진자 속에 약속이라는 긍휼을 빛내기 위해서(피 죽음 값)
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집어 넣는다. 구스 여인을 집어 넣는다.

넣어보니 우리는 복(천국)을 소유하고자 예수님을 임금삼는 자임이 들통나는 식으로 목이 곧은 백성임이 발각 당한다. 그래서 힘 빼기 위해서

자꾸 자꾸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죽을 곳 원망하는 곳으로 방향의 흐름을 약속에 잡아버린다. 그 자체가 복이다. 차이나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이난 인간이 복 이다. 왜? 그 나머지는 모조리 저주이다. 아무리 돈과 건강을 부요하게 소유해도 소용없다. 좋은믿음 이웃사랑실천 아무리 소유해도 이미 저주다.

차이가 나지 않는 방향성의 인간이 아니기에 지옥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또 아무리 차이나게 만들어 본들 백 데나리온과 구스 여인 곧 십자가를 집어 넣어보면 그 인간이 약속의 피가 땡기는 방향의 벡터인간인지?
지옥의 진노가 땡기는 벡터인간인지? 알 수 있다.

기준은 율법이 아니다. 율법 외에 한 의 다.

오로지 십자가 라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미련한 싫어버린바 된 피다.

이 약속의 기준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기준으로 영원히 차이가 나는
양 갈래로 갈라지는 구별 분리 나누임을 거룩완성이라 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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