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맺은 사랑

2011년 4월 1일 금요일 오전 1:17:56  김대식


Here after.2010.720p

잔잔한 영화다

영매들 곧 무당들 이야기라서 뭐 이런게 있나 싶어 지나칠려다가
죽음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공부하는 맘으로 끝까지 봤다.

죽음을 그 어떤 인간도 해석 할 수 없다.
그저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다.

죽음도 해석 못하는 인간은 이미 죽은 인간이다. 우리는 이미 죽은 자 이다.
죽음도 해석 못하는 주제에 생명을, 또는 삶을 해석 할 길은 없다.

마귀도 해석 못하는 주제에 예수님을 어떻게 해석 할 수 있는가?
죄도 해석 못하는 주제에 의(사랑)을 해석 할 길은 없는 것이다. 차단 당했다.

도리어 죽음으로부터 해석 당할 뿐이다.
죄로부터 해석 당할 뿐이다.

요 몇 달간 지인들과 말씀을 나눌 때 너무 너무 행복했다.
누구 말마따나 얼어붙어 버린 교회라고 투덜 거렸지만
우리는 성령이 불타는 성전을 누렸다.

지인이라고 해 봐야 강이네 가족과 나의 어머니 뿐이다.

꿈만 같았다. 그런 말씀이 덮칠 줄을 미쳐 몰랐다.

말씀을 지킬 것이 없다 라고 하면서
항상 마귀 보란 듯이 이 말씀이 주어졌다고 했다.

예수님은 항상 마귀를 겨냥해서 나온 행동 행위 이며 믿음이다.
그러나 인간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귀를 겨냥한 행위와 믿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행위와 믿음이란 마귀를 거쳐서 나와야 한다.
마귀를 시기케 못하는 행위와 믿음은 인간의 자랑일 뿐인
십자가의 저주를 전혀 통과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마귀를 시기케 한다.

십자가의 피 만이 마귀가 의식하지 인간의 믿음 따위나
말씀 실천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못 들어간다.

방금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능력과 기적을 제자들이 행했고 그런 고대하고 고대하던 기적들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전혀 아랑 곳 하지 않는다.

마귀가 시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귀가 시기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장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방적인 편애다. 조건 없다. 교회의 특이성이란 특이성이 없다는 것이 특이성이다.

그런데 저 마다 다 특별한 구색들을 갖춘다.

봉사, 헌신, 헌금, 충성, 자기 쪽에서 뭔가를 제공했다는 구색들 말이다.

좋다 그래 좋다 제공해서 뭐 어쩌란 말인가?
천국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오냐 그럼 천국 들어가고프면 지옥을 통과해 보라는 것이다.
지옥 통과하지 못할 꺼면 천국 아예 오지 말라고
그 살벌한 지옥의 맛을 한 번 보라는 것이다.

과연 자기 쪽에서 제공했다는 것이 그 지옥에 먹히는지?
그래 놓고 우리는 천국을 탈취 할려고 한다.

천국은 침노 당한다.

그러나 정작 침노 당하는 그런 멍청한 천국은 없다.

도리어 침투 한다. 자 이렇게 되니 천국이 이제 더 이상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다.
지옥으로써 천국이 이 땅에 침투 한다.

누구 말 마따나 우와 지옥 같다. 지옥 같은 경험을 했다 라고 한다.
( 히 이번 일본의 지진은 아무리 살아 남았다 하더라도 매일 흔들어재끼는 그 땅에서 맨정신으로 버틸수가 없다. 속이 매쓰꺼울 정도로 흔들린다. 바다도 아닌데 바다 같다. 배도 아닌데 배 탄 느낌이다. 도저히 울렁 울렁 거려서 먹는 것이 불가능하다. 몸이 병들 뿐이다.)

그 사람은 지옥이 아니라 천국의 침투를 경험한 것이다.

자 이제 용어를 바꾸어서 지옥을 바알세불로 인격화 하고
천국을 예수님으로 인격화 해 보자

바리새인들이 제대로 봤다. 예수님을 바알세불 곧 마귀의 대왕으로 봤다.

정말 정말 제대로 본 해석이다.

예수님을 지옥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천국을 침노하는 공격받는 천국 곧 하늘의 자녀로 본 것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기가막히고 코가 막힌다.

아니 누구 마음대로 자신들의 영역이 천국이고
예수님을 지옥 취급하는가 말이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말이다.

이런 환각과 마약을 교회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해 왔으니
예수님은 기가 막힌 것이다.

(마 12:28, 개역)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9, 개역)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 12:30, 개역)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마 12:3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개역)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누가복음에서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성령을 주시겠다고 했다.
성령 줘 보면 안다. 십자가의 영을 줘 보면 평화롭던 분위기가 파토 난다.

마귀들이 들썩 들썩 거리면서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사람의 일은 마귀를 시기케 못하며 마귀만을 겨냥한 일을 하지 못한다.
성령의 일만이 마귀를 시키게 하며 오직 십자가의 말씀은 마귀만을 겨냥한 주의 일을 한다.

곧 피 흘리심 이다.

이 피 흘리심을 계속 계속 증식 시키신다. 누가? 도저히 인간은 못한다.
인간은 자기 믿음만 증식 시키고 바리새인처럼 성경지식만 증식시키는데 미쳐 있다.

오직 성령님만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십자가 사건을 증식 시킨다.

여기에 마귀는 무효화 시키는데 총동원 한다.

주의 주 되심이란 주님 자신이 주님 자신을 치셔서
계속 피를 흘리신다.

주님 자신이 주님 자신을 부정하셔서 부인하셔서 상한심령이 되셔서
이 긍휼의 피를 영원히 영원히 증식 시키신다. 우주 끝까지 말이다.

이 사랑 외에는 없도록 죽음으로써 다가 오신다.

오직 죽음으로 맺은 사랑이다. 어떤 누구도 끊을 수 없다.

예수님은 마귀만을 상대 하신다.

욥 이야기를 하면서 마귀를 내기하시고
마귀에게서 자신의 목숨 값을 팔아서
그 목숨 값 30냥을 받아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상한심령으로 (밧세바 겁탈, 우리야 장군 고의로 죽이기, 이름없는 아기 회개로 살려내지 못함)

오직 예수님 쪽에서 30냥을 죄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다.

세간(살림살이 재물)은 오직 죄 값을 치름으로써 사는 것이지

인간에게서 나오는 믿음 따위나 행함으로는 마귀에게서 살 것이 없다.
부도난 수표로 종이로 뭐? 노예를 사들여?

빚진자는 빚을 갚을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이 죽음으로써 목숨 값을 만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사랑을 만나는 길은 죽음 뿐이다.

자살 하라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
내 죽음이 아니다. 나의 죽음 따위는 죽음으로 쳐 주지도 않는다.

죽음이란 예수님에게만 부여된 의미이다.

그 죽음으로 만나는 것이 유일한 사랑이다.


십자가란
예수님의 죽음이란
죄인을 무조건 용서한 그 사랑의 접촉이다.

바벨탑(노아 방주를 흉내낸 제 2의 방주)를 세우는 발상에서 도저히 나올수 없는
유일한 길이다.

죽음과 죽음으로써 만나는 사랑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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