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의식의 이중화에서 사랑(정념:배신,질투)의 이중화로 옮기심
2011년 5월 12일 목요일 오전 9:32:44 김대식
(요 5:24,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인간은 떠나야할 사명으로 만들어진 신체구조이다.
몸 구석 구석 하나 하나가 그런 의미로써 구성되고 조직되고 만들어졌다.
즉 메신져다. 몸 신체 구석 구석의 모양과 의미와 그 모든 것들이
누구를 말하기 위한 메신저로써 그 내용을 담은 편지다.
몸은 곧 편지다.
반드시 도착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몸이 두 개다. 몸이 나누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편지의 내용이 두 개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편지 내용은 선악나무로써 선악이 만들어낸 편지요.
또 하나의 편지 내용은 생명나무로써 생명을 담은 편지이기 때문이다.
종이란 나무로 만들었듯이 편지로써 내용을 담은 신체는 이 두 구조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럼 선악의 편지는 무엇을 담았는가?
이것이 바로 선악 과 편지의 포개짐으로써의 이중화다. 여기서 이중화란 둘이 포개어져 하나가 되었고 그 하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일치성이다. 결혼 커플성이다. 누구와 결혼 합체 결합이 되었다는 뜻이다. 선악 과 편지 곧 책으로써의 이중화(일치)가 바로 의식 이중화다.
그것은 의식을 담았다. 의식을 담은 책이다. 곧 행위 책이다. 선악(율법)과 행함의 결혼이다.
원인의 결과로써의 의식이다. 의식하고 염두하고 연연해서 나오는 행위들이다. 그것은 배반이 아니라 속임수이다. 속임수란 의식한 것이다. 이러면 선이고 이러면 악이 된다는 법적인 의식
그렇다면 그 반대인 생명의 편지는 무엇을 담았는가?
선악과의 포개짐인 이중화가 아니라, 배신을 담은 편지로써의 이중화(커플: 짝)이다.
배신은 곧 사랑이다. 배신이란 정념적 이미지로써 의식적이지 않다. 법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도리어 법을 배신하는 것이다. 법이라는 테두리를 훨씬 넘어서는 것은 배신 뿐이다. 곧 사랑이다. 베드로가 의식적으로 즉 법적으로 예수님을 가로막는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그 사람의 일이 의식적이면 하나님의 일은 정념적 즉 배신이다. 그 사람의 일을 배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배신의 세계로 집어 넣는다. 즉 삑사리로 집어넣는다. 랑그라는 법이 아니라 빠롤이라는 삑사리 곧 배신으로 집어넣는다. 곧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이다. 어 분명히 내가 무시했는데? 내가 무가치하게 여겼는데 그 무가치가 배신때리고 가장 지혜롭다. 어리석은 것을 택하사 지혜롭다라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배신이다.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선악을 말이다.
법칙을 위배하고 법 바깥 외부의 의에 [한 의]에 기대를 건 것이다. 법을 어기는 배신에게 기대를 걸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기생라합은 딴 신을 기다렸다. 즉 자기의 하나님을 배신했다. 자기를 위한 하나님 말이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자기의 하나님을 배신하는 불륜을 다말 덕분에 알게 되었다.
다윗은 꺽으신 뼈로 인해서 더 이상 번제와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번제와 제사의 하나님을 배신하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는 여디디야의 하나님을, 상한심령인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쳐다본다. 베드로는 자기의 열심으로 사모하고 사랑하는 그 열심이 예수님을 삼키는 것을 미천한 닭의 배신의 울음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 배신의 닭 울음 때문에 건짐 받는다. 그 지적이 옳았습니다 라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로 바뀐다. 그 배신이 아니였다면 자기사랑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자기를 미워하는 자기를 배신하는 이미지 때문에 그 닭의 울음 때문에 안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인 배신을 아는 것, 그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의 질투를 당하는 것이다. 그의 투기와 시기를 당하는 것이다. 마귀 보란 듯이 말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인 배신을 아는 것, 그 사랑을 아는 것이다. 그의 질투를 당하는 것이다. 그의 투기와 시기를 당하는 것이다. 마귀 보란 듯이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너의 그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 하나님을 배신하고 딴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즉 하늘에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 곧 우상과는 완전 딴판이다.
정반대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
(요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 6:27, 개역)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 6:28, 개역)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3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개역)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개역)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4, 개역)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요 6: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6,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 6:37, 개역)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8, 개역)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 6:39, 개역)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개역)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1, 개역)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요 6:42, 개역)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요 6:4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요 6:44, 개역)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45, 개역)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 6:46, 개역)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 6:47,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9, 개역)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요 6:60, 개역)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1, 개역)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2, 개역)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 6:63, 개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4, 개역)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요 6:65, 개역)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 6:66, 개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7,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이것을 하나님(법)을 배신 하는 예수님이다.
내 쪽, 인간 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모조리 다 우상이다. 그 증거를 제시한 것이 구약이다.
괜히 구약이 있는 것이 아니다. 법으로 인간은 구약을 포장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이 그런 조작을 하든 말든 구약은 바톤을 신약으로 옮겨버린다. 배신한다.
구약이 인간을 배신할 줄이야?
성경말씀이 인간을 배신할 줄이야? 구약도 배신하는 판국에 신약은 그럼 그 배신을 밥먹듯이 할 것 아닌가?
그러든 말든 인간은 구약만을 붙잡기로 한다. 사람의 일이다. 의식체제다.
(왕이란 역사(시간)를 창조하고 성전이라는 공간(그릇)을 창조한다. 바벨탑은 구원의 통로다.
그러나 배신은 그 역사를 배신하는 묵시를 창조하고, 성전을 배신하는 빈자리인 그리스도의 머리만을 주장한다.)
어쨌든 저쨋든 구약만큼은 그런 신의 배신을 참아내었고 노아의 심판을 견뎌내었기 때문이다.
(참기는 뭘 참어? 견디기를 뭘 견뎌? 그런 신념이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못박아라 라는 외침으로 한꺼번에 튀어나온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은 못 밖는 것이 마땅하다는 법 체제 그 자체가 의식화 된 신체다. 도리어 그 신체를 못 밖는 것이 십자가다. 믿음이 불가능하다.)
그 참고 견디고 기다림 조차도 배신해 버리는 신약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믿음을 믿은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속임수 곧 의식 다중화다.
이것을 연장선까지 놓는 자들이 있는데 역사화 시키는 공간화 시키는 자들이다. 개혁주의다.
어쩔수가 없다. 그것이 그들에게서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배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배신하는 짓을 차마 할 수가 없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 믿는 자기자신을 미워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심령이다. 즉 배신의 심령이다.
그것을 인애와 자비라고 했다. 곧 용서 뿐이다.
용서 받을 짖을 골라서만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그러나 의식형상은 용서 받을 짖을 골라서만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 반대의 의식형상을 이룰려고 한다. 약속도 못 지키는 미흡 허무 흐릿한 모호한 형상인 우상의 형상이다. 곧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 하는 형상을 이룰려고 한다. 이웃사랑실천하는 형상을 이룰려고 한다. 우상이미지다. 의식을 담은 편지다. 행함을 담은 그릇이다. 행함책이다.
이 두 차이를 예수님은 비유 곧 삑사리 언어인 방언으로써 비밀로써 십자가언어로써 성령으로써 들을 귀 있는 자와 들을 귀 없는 자를 가르시는 창조를 하신다. 말씀으로써 말이다.
곧 성전에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바리새인 또 하나는 세리다.
하나는 독립군이요 또 하나는 매국노다. 하나는 제사장 레위인이요 또 하나는 개같은 이방인 사마리아인이다.
그리고 행함책 곧 의식 다중화인 선악의 편지와 또 다른 하나인 생명책 곧 배신의 사랑(죄인을 부르러 온 의인, 의사) 다중화인 생명의 편지와의 차이성 내기가 바로 성전 안에 두 사람의 두 기도 이다.
의식은 법을 이래 이래 지켰다 라는 것을 더더욱 의식적으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에
감사 감사 또 감사를 드린다. 의식한 것이다. 법이 이러 이러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배신자인 세리는 자신이 이미 법에서는 배신자일 뿐임을 안다.
그 어떤 법도 자신이 배신자 아님을 증거하지 않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뻔뻔스럽게 배신을 요구한다. 법에서는 도저히 사함이 없기 때문에
용서가 없기 때문에 그 용서를 법 바깥에서 요구하는 것이다.
그 법 바깥은 자신조차도 의식할 수가 없다. 그저 엎드릴 뿐이다. 긍휼을 간구할 뿐이다.
더 이상 법이 없는 모호한 행함이 없는 그 세계를 요구한다. 참 뻔뻔스럽다.
그러나 자기자신이 배신자임을 너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같은 이방인, 흑암의 백성 즉 마귀자식,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 영원한 앉은뱅이
이런 자신이기에 이런 배신자이기에 그 지옥 속에서 건져 달라고 참 낮짝 두껍게도 외친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았다.
곧 독생자를 버리심이다. 배신하심이다.
원수들의 손에 넘기우심이다. 원수에게 넘기는 배신이야 말로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이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사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성령의 은사는 서로 서로 내어주는 것이다.
서로 서로를 배신하는 것이다.
의식적인 원인결과를 따져서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정념이미지로 말이다. 곧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인 은사는 죽음에 넘기우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따라할 수가 없다. 고후 4: 11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는 의식적으로 가룟유다처럼 돈 가이사형상으로 바꿀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성령으로 넘길수도 없어서 그저 절대로 그런일은 없습니다. 남들은 다 배신해도 저 만큼은 배신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자체가 의식적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모세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변론한다. 빨리 죽어주셔야 하나님의 일인 배신 이미지가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변화산 아래의 베드로는 여기가 좋사오니 아파트 세 채를 각각 짖겠다고 의식적으로 추구한다. 두 소욕의 차이성이다. 고기토라는 이성은 즉 자아(의식)는 정념적인 광기(인人)을 추방한다. 그것이 푸코의 이성의 역사를 광기의 역사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마귀 군대를 돼지떼 속에 집어넣어 바다에 몰살케 하는 그런 미친짖을 하는 예수님을 그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가 없다. 추방이다. 인간을 거슬리는 천국은 핍박받는 천국이다.)
(고후 4:1, 개역)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후 4:2, 개역)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고후 4:3, 개역)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고후 4:4, 개역)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5, 개역)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 4:6, 개역)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개역)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7, 개역)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사도바울은 방금전까지 자신이 오호라 곤고함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고 고민해 놓고서는 정작 자신은 빠져나와서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고 해 놓고서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율법 속으로 집어넣는다.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해 보라는 식이다. 왜 하라 하지말라 라는 의식 체제가 아닌지를 말로는 설명못한다. 직접 율법의 정죄 속으로 집어넣는 길 밖에 없다. 배신 때리기 이다. 그래야 자신이 원수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야 율법의 정죄 아래에서 벗어난다. 의문의 증서를 찢는 십자가의 세계다. 심판에서 벗어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즉 원수에게 팔아 넘기는 것이다. 나단이 말한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뭐? 내가 주께만 범죄했다고? 나를 깨끗게 하셨다고?
그 원수가 바로 나 다. 나 다윗이다. 원수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외치는 그 다윗이 원수다.
원수는 다윗 자기자신이였다.
이것을 밝혀내고 들추어내는 것이 바로 정념이중화 곧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다 이루셨다. 그래서 십자가에 뛰어드신다.
원수는 남이 아니라 자기자신임을, 그 정과 육을 못박고자, 우상을 못 박고자
십자가를 이루신 것이다. 이것이 우상이 아닌 약속 못이루는 것이 아닌
약속 성취다. 이것이 찬양이다. 고백이다.
결국 내 속에 사랑이 없기에 모든 것이 원수 곧 우상이라는 의식적 선악인 행함이
주를 사모하는 열심으로써 주를 삼키는 것이다,
이제 그 짐을 벗기우시고
번제와 제사가 아닌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닌
주께서 나를 사랑하심의 영원한 용서인 배신으로써
불쌍히 여기심으로써 도저히 용서 할 수 없기에 용서를 하시는 그 배신 이미지로써
행함에서 생명책으로 옮기는 작업을 십자가의 피로써 이루신 것이다.
더 이상 딴 제사는 없다.
화목제물인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 라는 배신(모순)의 편지가 우리다.
이것을 커플적 정념 이미지인 검은 구멍 블랙홀 배신 이미지인 빈자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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