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5 :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막 8:12)

2011년 6월 14일 화요일 오후 11:23:02  김대식


(막 8:1, 개역)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막 8:2, 개역)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막 8:3, 개역)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막 8:4, 개역)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막 8:5, 개역)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막 8:6, 개역)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막 8:7, 개역)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막 8:8, 개역)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막 8:9, 개역)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막 8:10, 개역)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막 8:11,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막 8:12, 개역) 『예수께서 마음 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막 8:13, 개역)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막 8:14, 개역)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막 8:15, 개역)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막 8:16, 개역)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막 8:17, 개역)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막 8:18, 개역)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막 8:19, 개역)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둘이니이다』
(막 8:20, 개역)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막 8:21, 개역)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막 8:22, 개역)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막 8:23, 개역)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막 8:24, 개역)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막 8:25, 개역)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막 8:26, 개역)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막 8:27, 개역) 『예수와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노중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막 8:28, 개역) 『여짜와 가로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막 8:29, 개역)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30, 개역)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막 8:31, 개역)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막 8:32, 개역)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막 8:3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4, 개역)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 8:3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6, 개역)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7, 개역)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막 8:38, 개역)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께서 표적을 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요청인 하늘의 표적을 보여달라는 시험에 대한 답변입니다.

방금 전 까지 사천명을 먹이신 칠병몇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사천명을 먹이고 일곱 개의 광주리가 남은 사건 뒤에 바리새인의 시비로 이어진 내용입니다.

표적이란 일종의 기호입니다. 문자 싸인 흔적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얼굴성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 기호는 과연 뭘까요?

예수님 에게의 모든 물건 사물들 그 어떤 물질들도 모두다 주님의 일하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떡이 각각의 인물들에게서 시선이 집중되는 문제로 부각이 될 때에

그 사물을 예수님은 자신의 일하심과 연관시킵니다.

그래서 떡을 가지고서 그 속성과 의미를 저 바리새인과 대비시켜 버리면서 시비를 거는 식입니다.

그것은 물론 바리새인도 똑같은 입장입니다. 손을 씻지 않는 것인 어떤 형태 사물 행동 그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한 것으로써 사용하는데 있어서 거룩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참 재미있게도 신과 신의 싸움이 되는 겁니다.(정치성)

신이란 선악의 주도권을 쥐는 자입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기준입니다. 기준

그런데 그 기준이 두 개가 되면 곤란해 집니다.

어느 기준에 움직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의 하나님=일치성=파시즘]과 [두 개의 하나님=아버지와 아들 외에는]의 차이성을 운운하는 이유도 그러한 겁니다.

기준 쟁탈전입니다. 그러니 신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사물도 하나의 아이템이 되어서 신이라는 기준의 쟁탈전이 벌어지는 겁니다. 떡 하나로 바리새인을 꼭 걸고 넘어지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떡으로 인한 속성인 누룩 개념을 저 바리새인의 위선에 빗대어 시비거는 겁니다.

얼마나 유치찬란합니까?

그러나 그 유치찬란한 모습이 아니다면 그 차이성은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아주 세밀하고 작은 것 하나 하나 까지도 분리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유치찬란하게 가장 작은 사물 하나까지도 시비를 걸면서 저들과의 차이를 내는 간격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런데 죄 하나 하나, 사소한 모든 것 하나 하나에 예민한 이 거룩이라는 분리 작업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은 빵이 없어서 저러시나? 빵 갖다 드리자! 라고 딴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책망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음이 굳어졌구나, 눈이 있어도 못 보구나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막6장에 빵 다섯 개로 오천명 먹여 몇 광주리 남았느냐? 12입니다.
그럼 방금 일곱 개 빵으로 사천명 먹였을 때 몇 광주리 남았느냐? 7입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리고서는 다시 눈이 안보이는 소경을 의도적으로 활용하셔서 눈을 보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흐릿하게 보이니까 다시 고쳐서 또렷하게 보이도록 고치신 후 당부하십니다.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얼굴에 대표적인 눈을 하나의 사물로써 거룩작업의 분리성 곧 심판성을 부여합니다. 즉 예수님의 얼굴성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나누어짐의 분리 곧 거룩이라는 창조 입니다. 그래서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 하십니다.)

빌립보로 내려가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누구라고 사람들에게 불리우는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언자 (예수님의 얼굴에 대한 시선들을, 보는 눈들을 파악합니다.)

그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보느냐?

주님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라고 답변을 하니까

예수님이 또 예민하게 반응하십니다. 아무에게도 자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뭐 알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언제는 떠벌리듯이 공개적이더니
갑자기 그 답변에 예민하디 예민하게 쉿 쉿 쉿 비밀이야 비밀 이라고 하십니다.

아니 이미 다 아는 상황인데 비밀이야 라고 갑자기 수그려 엎드리 라고 하면 오바 아닐까요?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얼굴을 그 당시 사람들은 다 볼 수 있습니다. 또 보고 있고 또 봐 왔습니다. 그런데도 그 공개된 얼굴을 가리우십니다. 이미 다 봤는데 가리우다니요? 또 그래놓고 자신의 얼굴을 자기 백성에게만 보이십니다. 이것을 얼굴성 곧 정치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얼굴을 제자들 역시 못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얼굴이 고통의 얼굴이기에 자기부인하지 않으면 그 얼굴을 봐도 못 보는 겁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은 이런 취지 입니다. 공개되어도 비공개의 비밀이요. 비밀인데 의도적으로 이쪽에게만 알려주는 겁니다. 이것을 부정성 곧 부조리라고 하며 그 부조리를 근거로 사물 하나 하나에 은사 곧 심판성을 담아서 물건 하나 하나로 아니 인간 자체도 물건 취급해서 예수님 자신의 얼굴성(하나님나라)을 반영하십니다. 그것이 표적을 저 쪽에는 안 주고, 이 쪽에게만 주시는 방식 입니다.)

그리고 아주 예민하디 예민한 위험한 발언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갑자기 심각한 분위기에 동조 됩니다.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인자가 많은 고통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받고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비로소 비로소 이야기 하십니다. 비밀을 알려준 겁니다. 표적을 주시는 겁니다.
(에이 이게 뭐가 표적입니까? 죽는다는게? 모세가 뱀을 든것 같이 인자가 들려야, 달려야 하리니? 에이 이게 무슨 표적이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짝이 되게 하기 위해서 불뱀에게 물린 상황을 만들어야 쳐다볼자와 안쳐다볼자를 가르듯이 제자들에게 수갑을 채웁니다. 수갑을 채워보면 예수님의 얼굴이 공포의 얼굴임을 압니다. 심판성을 담은 얼굴입니다. 곧 마귀가 이 세상을 장악하고 모든 인간이 불뱀에게 물려 있는 갇혀있는 존재임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미물 하나 하나로 물건 하나 하나마저도 스파이무기기계로 삼으시는 겁니다. 표적 곧 가르기 위한 싸인 흔적으로써, 꼼짝마 넌 내꺼야? 범인 잡았다. 쇠고랑 수갑 채우기. 이 자체가 표적 입니다.)

아니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저 라도 말리겠습니다.

그러나 사단아 물러가라 라는 욕을 바가지로 먹습니다.

사단아 썩 내 뒤로 물러가라 넌 나를 가로막는자다.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그리고서는 사람들을 불러서 말씀을 공개적으로 하십니다. 언제는 비밀인 비공개이더니 이제는 공개 입니다.
그러니 표적(비유=부조리=부정성=심판성)이 아니고서는 말씀하시지 않는 겁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나오너라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고 자기 목숨을 나와 복음을 위하여 버리는 자는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냐?
자기 영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이 악하고 음란한 죄악된 세대에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너무 너무 낯설고 느닷없으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까?

너무 너무 어렵지 않나요?

그래서 표적에 대해서만 오늘 살펴 봅시다.

표적이란 결국 인자가 죽는다는 것에서
우리의 사단성 원수성 악마성을 코끼어서 실족케 하듯이 다리걸어 넘어뜨리듯
하나의 연결 고리에 걸어넣는다는 겁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오늘 재미있는 내용을 티비에서 봤는데요
미워도 다시한번 이라는 케이블 티비 프로그램인데 점심먹고 난 뒤에 잠시 편안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아주 웃기는 장면이 뭔고 하니 부부애정전선이 위기가 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서 화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 오늘 보니 부부에게 수갑을 하나의 고리로 채워 버립니다.

수갑을 채워 버리면
아무리 떨어 졌던 두 사람이 이제는 이유도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조건적으로 하나로 행동해야 합니다.
안그러면 더군다나 원수지간이 되었는데 더더욱 원수지간이 되겠지요. 너무 너무 불편해서 미션을 수행할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 다 라는 취지 이겠지요.

참 저렇게 하면 화해 되겠네 라고 제가 웃으면서 생각했는데
수갑을 풀자 마자 미션수행할 때 그렇게 하나된 마음이였던 부부가 또 다시 냉전의 원수지간이 된 겁니다.

또 한 부부는 거의 반말로 야 야 야 왜 왜 왜 아기가 있는 앞에서도 냉기는 사라질줄 모릅니다. 그런데 춤이라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둘이 딱 달라붙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희죽 희죽 웃으면서 둘이 춤추기를 하는 겁니다.

물론 골이 깊어서 아예 안되는 부부도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쉬쉬쉬 하면서 뭔가 비밀을 말하실려나 보다 라고 몸을 움츠려서 우리도 반작용적으로 귀를 기울릴려고 조용히 조심 조심 바짝 다가가게 동기유발을 시켜놓고서는 갑지기 수갑을 채워 버리십니다.

자 이렇게 되면 빼도 박도 못하는 같은 운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표적이 바로 이거다 라는 겁니다.

누구와 짝이 되느냐 라는 겁니다. 

참 유치하지요?

아니 제가 짝이 되어 드릴께요? 뭐 그리 유치하게 수갑차고 이러십니까?
얼마든지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이 열려있습니다.
괜히 뭔가 대단한 것인줄 알았네?

그러자 마치 남하당 대표 김영진 대표가 말하듯이

그 소리를 듣고

야~~~~~~~~~~~~~ 사단아 물러가라? 나의 십자가를 매도하지 마 ~~~~

라고 갑자기 고래 고래 고함을 치시면

우리가 얼마나 당황하게 될까요?

이런식이다는 겁니다.

주님은 지금 예민합니다.
무엇에 예민한고 하니 물질 하나 사물 하나 그 모든 것 하나 하나를 가지고서
분리시키고 나누이시고 차이르는 내시는데 무지 무지 예민하신 겁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거룩

아니 그럼 도대체 무엇과 그리 분리 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죄입니다.

죄에 예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과 분리 시키실려고 하는데 우리는 자꾸 사단과 일치된 생각을 나열하니까 그 분리성에 있어서 제대로 그 일하심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을 떡으로 활용해서 분리 시키듯이
바리새인을 통해서 차이를 내시는 겁니다.

그 바리새인이 말한 표적과의 분리로써의 차이나는 표적은 뭘까요?

인자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베드로에게 비밀로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인자의 죽음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표적으로써의 기호입니다.

인자의 죽음  이꼬르 = 그리스도

라는 엄청난 기호로서의 표적인 겁니다.

그리고 세세히 알려줍니다.
인자가 많은 고통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 율법학자들에게 배척 당하며
죽임까지 당해서 삼일 뒤에 살아나야 한다 라는

사물 하나 하나 인물 하나 하나 시간 공간 모든 배치물들을 아주 세밀하고 자세하게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호인 표적입니다.

이 기호가 졸지에 베드로를 자극했습니다.
듣자 마자 반응을 일으킨 것입니다.

안됩니다. ~~~~

얼마나 베드로가 놀랬을까요?

이 표적은 베드로의 이런 반응을 끄집어 낸 겁니다. 그러니 표적 답지요.

그리고서는 사단아 라는 눈에 보이지 않던 숨어있던 기호를 끄집어 내십니다.

사단이라고 말이죠. 사탄 악마 마귀입니다.

야 마귀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자 아까 제가 수갑을 채운다고 했습니다.
왜 수갑을 채울까요?

둘이 떨어진 것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표적인데

수갑인데

막상 수갑을 채워보니

얼마나 수갑을 제대로 채웠으면

베드로 속에 있던 악마가 발악을 하는 겁니다.

둘이 하나가 될려고 하니까 정작 하나가 될려는 거룩 작업에
엉뚱한 다른 하나가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툭 하고 튀어나오는 겁니다.

십자가란 바로 이겁니다.

이미 인간 속에 하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자꾸 제가 아는척 한다고 파시즘(전체주의)이라고 꼴에 문자 좀 써먹고 있습니다.

저도 지금 이 순간에 우기지만
모든 사람도 그러합니다. 지금 이 순간 자기 속에 악마가 들어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정신병자로 취급받는 자 중에서 스스로 외칠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자라도 모든 인간 속에 악마가 들어가 있다고 여기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 우깁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얼마나 얼마나 유치하기가 찬란할 정도로 조심 조심 쉿 쉿 쉿 하시는지
평상시와 다르게 하니 얼마나 낯선 모습입니까?

결국 수갑 채임을 당하는 겁니다.

그 조심이 그 쉿 쉿 하시는 예민한 모습이 나를 잡기 위함입니다.
내 속에 있는 악마를 잡을려고 움크리고 조심 조심 다라하도록 해놓고
요놈 잡았다 라고 수갑을 채웠다고 마치 형사가 범인 검거한 그 기쁨을 외치듯이 말이죠.

그리고서는 갑자기 쉬 쉬 쉬 조심 조심 하던 모습은 오 간데 없고
모든 사람들을 불러 놓고
수갑채워서 잡았다고 자랑하듯이
크게 크게 외칩니다.

형사가 범인의 팔을 뒤로 꺽어서

너는 묵비권이 어떻고 저떻고 변호사는 선임할 수 있으며 어떻고 저떻고

사람들 앞에서 범인 잡았고 자랑하듯이 보이는 장면처럼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올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고 자기 목숨을 구하면 잃는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나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라고 외치시는 겁니다.

여기서 자기 목숨을 구하는 자는 잃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자는 구할 것이다 라는 표현은

우리가 앞에서도 자주 언급한 부조리 의 의미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부조리가 현실화 되는 것이 표적인 겁니다.

십자가가 구체화 될려면
바로 사단성 원수성 즉 수갑채임을 당하는 짝이 되는 것입니다.

괜히 예수님께 낚인 것입니다.

누가? 베드로가? 자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어떤 사건이 뒤 따라 연상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세 번 꼬끼오 닭이 우는 사건이 중첩되듯이 포개어지는 겁니다.

원수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인한 우리를 자기 부인케 하시는 표적입니다.

캬 제가 지금 무지 무지 위험한 발언을 합니다.

자기부인이라는 회개가 소위 주님께 잘못했습니다 라는 반성이나? 유턴 등등의 의미로써 자기반성의 의미가 강합니다. 어쨋던간에 전과 후의 다름을 추구하는 것이 자기부인 부정입니다.
자기를 긍정해서 생긴 것을 자기를 부정해서 다르게 보이겠다는 뉘우침 등등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자기부인이라는 것이 그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부인은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닭 울기전에 세 번 부인한다는 예언이 실행이 되는 것을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자 그럼 대뜸 어 그럼 자기부인은 내 숙제 아니네? 야호 자기부인하지 말자. 라고 나오겠지요.

그런데 그것조차도 행함입니다. 시이소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아니 주님께서 자기부인케 만드신다는 주님의 숙제가 덮치는 겁니다.
그 주님의 숙제가 바로 닭 울기전에 꼬끼오 세 번 바로 직전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자기부인이라는 겁니다.

자 어렵죠

제가 말하고픈 것이 바로 이겁니다. 자기부인을 혼자 한다는 것은 그 속에 마귀와 짝이된 모습인 겁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죽으시러 가시면 안됩니다 라고 베드로가 외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결국 짝이란 둘 뿐입니다. 마귀와 짝이냐? 예수님과 짝이냐?
마귀와의 짝은 예수님이 죽으시면 안된다는 것을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짝은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을 세 번 닭 울기전에 부인하는 것이 에수님과의 짝이 됨으로써 자기부인케 하시는 겁니다.

분명히 저는 혼자서 자발적으로 하는 자기부인이란 없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해본들 그 자기부인이 자기 기준의 부인 부정이기에 얼마나 모호합니까?

그래서 짝이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이 짝이 딱 둘 뿐입니다. 마귀냐 예수님이냐?
어 그런데 마귀와의 짝은 선악이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막습니다. 죽으시면 안된다고

그런데 예수님과 짝이되어서 자기부인이 나오는데
우리가 상상 가능한 그것이 안나오고 세 번 부인하는 것이 자기부인으로써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나의 원수를 나의 발 아래에 둘 때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는 것입니다.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히 1:13, 개역)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히 10:13, 개역)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눅 20:41,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눅 20:43, 개역)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4, 개역)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

(행 2:29, 개역)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행 2:30, 개역)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행 2:31, 개역)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행 2:32,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 2:33, 개역)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개역)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히 10:9, 개역)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히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1, 개역)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히 10:12, 개역)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 10:13, 개역)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 10:14, 개역)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 10:15, 개역)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히 10:16,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 10:17, 개역)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8, 개역)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 10:19,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 10:20, 개역)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즉 단 번의 제사가 바로 자기부인 인데
내가 주께만 범죄했음으로 순전케 된다는 다윗언약의 완성인데


그 자기부인이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예수님의 원수로써 예수님을 팔아넘김으로써 세 번 닭이 우는 것을 지적당하는 그 원수성의 들추임이 나의 발등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우편에 앉으신 이의 음성을 듣는 것이 바로 자기부인이라는 십자가의 용서가 바로 표적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호 흔적인데 (표시 표적 싸인)

제가 이것을 강이아빠랑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인해 잉태하고서 찬양케 되는데
마귀와 예수님의 싸움을 붙여놓는 뻔뻔스럽고 건방지고 살벌한 찬양을 성령을 통해서 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인 마리아가
마치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자궁을 성관계하듯이 통과한 것처럼 지나간 것을

그것을 하나의 흔적이라고 표시 싸인으로 해석한 설교를 들었던 것을 이야기 했는데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05강-눅1장46-56(마리아의찬양)-luk091206.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05강-눅1장46-56(마리아의찬양)-luk091206.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05강-눅1장46-56(마리아의찬양)-luk091206.hwp)


이것이 바로 율법으로부터 정죄 받아 마땅한 죄악이지만
정작 그 모호한 율법을 찢는 단번의 제사가 되는 사랑의 완성임을 보여주는 표시 싸인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뱀이 여자와 원수가 됨이 여자의 후손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후손은 남성의 육을 통하지 않습니다. 육이 아니라 영으로써의 탄생입니다.
이로 인해 뱀과 육으로부터의 원수가 되는 여자 마리아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원수성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율법으로부터 법을 쥔 남성으로부터 돌삐 맞아 죽어 마땅한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마리아 만큼은 흔적이 있습니다. 즉 표적인데 수갑입니다.

(갈 6:17, 개역)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여기서 또 생각난 것이 예레미야 설교를 처음 시작할 때 쯤에 이근호 목사가 저 보고 여호와하나님으로부터 강간 당할수 있냐 라는 발언을 들었을때에 깜짝 놀랬습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라는 저의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난 남자인데? 그래서 안되고 물론 남자들끼리 하는 뭐더라? 소돔 고모라의 동성연애가 있지만 대뜸 떠 오르는 생각이 난 남자인데? 그리고 하나님이 할 짖 그렇게도 할 짖이 없을까? 라는 대뜸 떠오르니 아무리 생각해도 성립 자체가 안된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내용인 즉슨 예레미야가 어린 20살 쯔음에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강간을 당하듯이 여호와 하나님으로의 폭력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을 쥔 저들 이스라엘과 차이나는 흔적을 표적을 이제부터 예레미야는 딸랑 혼자서 저들을 십자가로 몰아가는 사명을 표적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이였습니다.

결국 표적은 율법을 쥔 자들에게서 원수성으로써 자리 잡고 있지만
정작 예수님이 우편에 앉히심을 보는 것은 원수의 자리에 앉음으로써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지나간 자리로써의 흔적인 표적 곧 십자가의 흔적이
모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결국 마귀를 잡기 위해서 마귀가 쥐고 있는 율법으로 부터의 원수가 되는 것을 주님께서 실행을 하시는데 그것이 표적인데 그것이 바로 자기부인이다 라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으로부터 돌삐 맞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겁니다.

그렇다면 그 원수성에서 벗어나는 길을 뭐 밖에 없습니까?

율법으로는 안되기 떄문에 율법 지킴은 안됩니다. 뭐 밖에 없습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용서 라는 흔적입니다.
흔적이라는 의미를 말하기 위해서 자궁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을 몸이라고 표현하거나 어떤 자기자리 라고 표현해보면 특히 옷이라고 표현해보면
옷이 더러워 졌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몸이 더러워 졌습니다.
그 더러운 옷 마귀가 송사 합니다. 원수가 되었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 옷 주님께서 새옷을 준비했다고 하니 도리어 누구가 웃싸거리가 되는고 하니 송사했던 마귀가 웃싸꺼리가 됩니다.

율법 외에 한 다른 의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율법으로부터의 원수가 되도록 하십니다.
나를 원수 삼으시고 내 속의 죄인 마귀를 잡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낙랑공주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짝이 되어서 배신이미지 곧
휘장을 찢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에 저축 받는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는 몸으로써
우리는 늘 마귀를 잡기 위한 미끼로서의 원수성에 놓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들뢰즈는 두 성전의 파괴 시점인 비씨 몇 년 스룹바벨 성전이 무너진 해
또 에이 디 몇 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때 이것을 기호체제라고 하던데
막상 이 부분을 4월 쯤에 다 읽어보니 어려워서 검색도 해보고 찾아봤는데
정작 어디선가 이미 들었던 이야기 였습니다. 수련회때 강의 내용 중에 위로 올라가면서 뺨때기 때리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심심하면 뺨때기 때리고 한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 하는 부분이였습니다. 일종의 흔적입니다. 이동하면서 뺨 때리듯 하는 하나의 기호 표식 기표를 남기는 흔적입니다.
(겨우 찾았네요 검색해 보니 09여름수련회 7강에 나옵니다.) 다니엘 스가랴 환상속에그대가 있다 네요)

마귀에게 저촉받는 몸으로써 물론 이미 장악당한 것이지만
그 율법으로 부터의 저촉받는 몸에서의 탈출은

미리 앞당겨 주님으로부터 원수취급받는 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죄인의 몸으로 원수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마귀에게 정죄 받는 것 보다 예수님에게 정죄 받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입니다.

간음이란 혼자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남자가 반드시 있어야 더렵히든 더렵혀지든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남자는 이미 도망을 쳤습니다.
아니면 남자가 당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몸의 흔적은 증거물은 여성의 몸에서 더 또렷한 겁니다. 남자는 씻으면 그만이겠지요.

그러니 율법을 쥔 사람들 곧 마귀들이 원수잡았다고 잡기에 딱입니다.
그 원수를 통해서 저들은 예수님을 잡을려고 테스트 시험 합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 간음한 여성을 통해서 즉 원수를 통해서 예수님은 저들의 악마성을 잡습니다.

두 싸움에 낑긴 미끼였던 것입니다.

그 원수성에 율법의 원수성에 놓여지는 것이 바로 주님이 짝이 되셔서 벌리시는 자기부인 곧
십자가입니다. 그것만이 표적입니다. 흔적입니다. 우리는 이 흔적으로 인자를 부끄러워 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너무 너무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 두려움증이 가득한 사람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짝이 있고 수갑이 있기에 나의 육체적인 속성과 무관하게 벌리시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로 저들에게는 표적을 주시지 않기로 하신 겁니다. 즉 흔적입니다.

둘 만이 주고 받는 짝 커플의 싸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 이 십자가의 흔적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이 십자가의 저주를 거두지 말아주시옵소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악마를 감추고 숨기고자 행함이라는 육의 법에 빠지고
또 행함이라는 표현 떄문에 시스템에 적응하고자 삶이라는 용어로 우리 스스로 아무리 바꾸어 봐도

정작 우리는 사단아 물러가라 라는 주님의 지적을
그 표적을 그 흔적을 받을수 없습니다.

이런 우리를 장악한 죄의 심각성을 주님의 세밀하시고 예민하신 지적으로써
어떤 칼날 보다 예리한 말씀의 운동력으로 우리를 찢어주시고 싸매어 주셔서 우리 속에 있는 악마를 끄집어 내어 주시옵소서

나 스스로 자기부인 할 수가 없사오니
주님께서 짝으로 오셔서 수갑을 채워 주옵소서

내가 주께만 범죄했사오니 주께서 순결케 하셨음을
이 십자가라는 흔적 표적으로 긍휼을 허락하옵소서.

저들에게는 표적을 주시지 않겠다 라는 말씀을 기쁘게 외치도록 하여 주옵소서

이 흔적 이 십자가의 표적
이 약속을 임신한 교회가 가는 곳 마다 원수의 성문을 겁도 없이 벌커덕 벌커덕 성령으로 열어 재끼는 복을 그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지옥의 문도 죽음의 문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 때문에 갈라지게 차이나게 하시는 믿음인 것을 알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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