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59강 사람의 선택

피/피 2012. 8. 29. 10:48

피59강 사람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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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59강 사람의 선택

[11 대구강의 21] - [피 59] - 인간의 선택

                                                   11,11,2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죽음이 승리했노라 !!

오늘은 교재 186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 죽음으로 가는 자의 존엄성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죽음이 기지개를 켜고, 죽음이 아기의 탄생과 함께 배태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의 시작에 불과하다. 죽음은 점점 생활 안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전 생애를 관통해버리고, 결국 '죽음이 승리했노라!' 라고 외치게 만든다.

여기에 보면, "죽음이 승리했노라" 라고 하는데, 보통 싸움은 누구와 하는가? 우리 사람들끼리 하는 것인데, 그런데 여기에서는 죽음을 하나의 싸움의 대상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죽음에 대해서 졌다고 한다는 것이다.

◈ 야곱의 경우에 !!

그러면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것은, 물론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것도 되지만,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과 씨름한 것이 되는고 하니, 자신의 죽음과 씨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과 말이다. 그렇게 해서 이겨놓고는, "나는 승리를 얻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바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접선하는 순간 죽음 속에 갇혀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평소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죽음에 휘말려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데, 야곱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나서 죽음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그러면 거기서 야곱이 알았던 것은 "하나님의 사자 = 죽음의 찾아오심" 이라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다는 것은 죽음을 맞닥뜨렸다는 것인데, 그러니 결국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자기의 죽음을 만났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자기의 죽음 앞에서 과연 그 죽음을 이길 수 있는가?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사자와 야곱과의 만남에 있어서, 야곱은 무엇을 집어넣어서 이 죽음을 이겼다고 할 수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축복' 이라는 것이다. 즉 야곱은 "나를 축복해주고 가세요. 그냥 가면 나는 죽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난 뒤에, 자기는 죽어서 마땅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야곱 자신이 요구할 수 있는 것 말이다. 야곱은 아예 죽음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음 안에 있는 존재가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더욱 더 자기의 죽음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더욱 더 유발시키는 요인이 자기 속에서 계속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자기 죽음을 자기가 어떻게 이기려고 해보려고 해도, 그렇게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자기의 죽음을 더욱 더 현실화시키고, 또한 구체화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무리 이기려고 노력을 해도 말이다.

◈ 야곱 - '나를 축복해주세요' !!

그래서 여기서 야곱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지만 그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축복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셔야만 자기는 살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고 그냥 가게 되면 야곱은 죽은 상태가 되는데, 물론 여기서 죽은 상태는 저주받은 상태이고, 혹은 죄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죄가 있으면 그 죄를 찾아서 죽음이 오게 되어있고, 또한 그 죽음이 찾아오면 나는 그냥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은 축복을 주시려고 오셨지요? 나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니, 그런 입장에서 무엇을 주시려고 왔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것을 나에게 주고 가세요" 라고, 그렇게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 기존 세계관의 붕괴 !!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나서 알게 된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자기 입장을, 즉 자기 형편과 자기 처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존의 모든 세계관의 붕괴'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어제 오전설교가 바로 그것에 관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즉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잘못된 세계관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인데, 즉 자기의 세계관이 붕괴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존의 세계관에는 두 개가 있는데, 첫 번째 세계관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죽음 속에 갇혀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그 안에서 애를 쓰면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즉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짜 맞춘 세계관이란 말이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말이다. 옆 사람이나 이웃이 아니고, 오직 자기가 살기 위한 세계관을 가지고 자기가 있다는 것이다.

◈ '나' 중심의 역사 !!

그래서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당신이 이 세계를 어떻게 보십니까?" 라고 하면, 그 속에서 무엇이 나오겠는가? "나는 이렇게 해서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 자기 세계관만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 중심의 세계'가 아니라, '나 중심의 역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라는 것이 잘못이고, 매우 위험하다는 말이다.

자기 중심의 역사관, 즉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자기 나름대로는 잘 살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세계관인데, 즉 '나를 산 자로 만들어내는 세계관' 이라는 것이다. 

◈ 나까무라 덕분에 !!

예를 들어서, "내가 17살 때 나까무라라는 일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으면 나는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 그러니 그 나까무라가 없었다면 너희들도 이 자리에 없는 것이야" 라고 하는, 그게 우리 할아버지가 매일같이 하시던 말씀인데 말이다(ㅋㅋ).  

우리 할아버지께서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이 하는 쌀집의 점원노릇을 했는데, 그렇게 해서 공부도 하면서 장사기술을 배워서 돈도 좀 벌었는데, 물론 나중에 한국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지만 말이다. 일본 사람 밑에서 돈을 벌어서 한국 사람에게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을 보고 "당신은 어떻게 살았는가?" 라고 하게 되면, 당연히 자기 중심의 역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역사' 라는 것은 자기를 위한 세계관이지, 그것은 예수님이 보는 세계관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보는 세계관이 말이다.

야곱의 일생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그의 한 평생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자기만 편하고, 자기만 부자가 되면 되는, 바로 그런 세계관이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어릴 때 형과 싸워서 장자권을 빼앗고" 라고 하면서,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말이다.
 
◈ 죽음은, 인간 세계관과 하나님 세계관이 만나는 지점 !!

그런데 그렇게 나오다가, 자기의 세계관과 예수님의 세계관이, 즉 자기 세계관과 하나님의 세계관이 만나게 되면, 그 마주치는 지점에서 등장한 것이 곧 죽음이라는 말이다. 즉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역사를, 오히려 자기가 사는 역사로 보고 오해해서 엮어내었다는 것이다.

어제 오전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우리가 그동안 기존의 공간과 시간과 너무나도 친하게 지내었는데, 그게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수리가 만나는 곳에 주검이 있는데, 그러니 독수리와 시체, 시체와 독수리 외에 달리 하늘나라와 이 세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시체를 알아야만 독수리의 존재를 알 수 있는데, 즉 "아하, 주님이 독수리구나" 라고 말이다.

실제로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서 인도했다" 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러면서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홍해를 걸어서 건너왔는데, 그런데 주께서는 그것을 두고 "내가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나왔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출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위에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너희가 받을 수 없다" 라고 하시는데, 또한 요한복음 8장에서도 "나는 위에서 났으니 위의 것을 이야기하지만, 너희는 땅에서 났기에 땅의 것을 말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골로새서 3장에서도 "너희는 이미 죽었으니, 모든 것이 하늘에 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요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8: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 기독교는 이원론(二元論), 그래서?

이렇게 모든 것을 땅과 하늘로, 즉 하늘과 땅으로 구분하는데, 그것을 철학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겨서 무엇이라고 비아냥거리는고 하니, "기독교는 이원론(二元論)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조롱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실 "우리가 모르는 소리를 건방지가 왜 너거들이 하는가?" 라는 것인데, 즉 "우리가 아는 이야기를 하면 인정해줄게" 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살 궁리밖에 하지 않는 세계관 속에, 왜 주님이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왜 피조물의 세계에 창조주가 굳이 동의를 해주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는데, 엄마 아빠가 가서 거기에 같이 장단을 맞추어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의 소꿉놀이는 엄연한 현실인데, 즉 밥도 하고 빨래도 해야하고, 그렇게 바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것을 흉내내어서 놀이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인간들이 흉내를 내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버리고 인간들이 흉내를 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에 협조를 하라고 하는 것은 전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창조주를 모르겠다" 라고 하면 몰라도, "그것은 이원론이다" 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웃기지도 않는 소리라는 것이다.

당연히 이원론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니 말이다. 물론 그들도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분명히 신의 세계가 따로 있고 인간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원론인데, 그게 무슨 트집을 잡을 일이냐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 나라가 따로 있고, 인간의 나라가 따로 있는데 말이다.

그동안 하나님 나라와 인간의 나라가 따로 그렇게 서로 잘 있었는데, 서로 간섭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평온하게 사니 인간들은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마지막 여호와의 날에 완전히 이 세상이 그야말로 완전히 폭발을 하고 만다는 것이다.

◈ 주님은, 왜 일곱 폭격기를?

요한계시록의 보면, 일곱 천사가 폭격라인을 형성해서 완전히 지상을 초토화를 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말이다. 처음에는 3분의 1을 조지다가, 나중에는 왕창 다 박살내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상에서는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고 원망을 하고 난리인데, 그것을 가락교회에서 강의시간에 했는데 말이다.

그렇게 인간들을 공격하게 되니 어떻게 되는고 하니, 사실은 인간들을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 세상을 공격하게 되니, 그동안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간들을 지배했던 용과 옛 뱀, 악마,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그런 것들이 비로소 자기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진작에 나오지 말이다.

주님께서 폭격기를 동원해서 이 세상을 폭격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은 필요 없고, 우리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것들을 모아서, 산나물이나 채소나 쌀과 같은, 그런 것들을 대충 모아서 살다보면 인간 중심의 역사가 나온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의지한 것들이 양 사방에서 그만 '뻥, 뻥, 뻥' 터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가기가 힘들게 되었다는 말이다.

◈ 뻥, 뻥, 뻥 !!

요즘 지구가 대머리가 되어간다고 난리인데,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온난화 현상이고 말이다. 지구의 북극과 남극에 오존층이 있는데, 그것이 태양에서 오는 자외선을 막아주어서 대기가 안정적이고 좋았는데, 그런데 그것이 그만 점점 얇아져서 그것에 구멍이 나니, 지구에 해로운 것들이 우주로부터 들어와서 사람이 살기가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에서 폭풍이라고 일어나게 되면, 남태평양에서 생기는 태풍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도 태풍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태풍이 지구로 날아오게 되면, 지구가 그만 정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 엄청난 태양의 전기 에너지를 지구에서 감당하지 못해서 말이다. 그렇게 지금 이 세상이 아슬아슬하다는 것이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태양을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는지, 이 제상을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는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당장에 이 세상이 살기 좋으니 자기 역사를 따로 뽑아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뻥, 뻥, 뻥' 구멍을 내어서, 이제는 이 세상도 더 이상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가는 것이 갈수록 힘이 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의 인구만 해도 이 지구의 절반이 되는데, 그들이 옛날에는 가난해도 좋다는 사고방식으로 살았는데, 그런데 이제는 어떠한가? 자기들도 선진국 사람들처럼 한번 잘 살아보자고 해서 남아있던 자원들이 다 날아가게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후세에 좋은 것을 남겨주고 싶어도, 그렇게 남겨줄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석유도 앞으로 얼마 더 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50년 정도라고 하는데 말이다. 또 태양열은 효율이 떨어져서 곤란하고 말이다. 사실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그렇게 퍼먹지도 않고, 마치 티벳불교처럼 사람들이 도만 닦고 있으면 참 좋겠지만, 하지만 이제는 티벳 사람들도 자동차를 타려고 한다는 것이다. 후진국들이 과거처럼 그냥 가만히 있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자기들도 한번 잘살아보자고, 그렇게 우리나라의 새마을 운동과 같은 것을 배워가니 그게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 '나' 중심의 역사관 !!

아무튼 이 첫 번째 세계관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여기서 '나' 중심의 역사관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첫 번째 세계관의 대표주자 격인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 나서 무엇을 느꼈는고 하니, 처음부터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했음을, 즉 이 세계는 처음부터 죽음이 승리한 세계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인간의 선을 넘어섰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아직은 당장에 죽을 나이는 아니지만, 하지만 90살이 넘고 100살이 넘어서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다고 하면 어떠하겠는가? 죽음이 전혀 남의 일이 아니고 현실임을 실감나게 느낀다는 것이다. 즉 죽음이 자기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하나님의 사자는 결국은 우리가 전설의 고향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저승사자' 라고 할 수 있는데, 검은 모자에 검은 도포를 입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눈에는 다크서클이 엄청나게 강렬하고, 또한 입은 튀어 나와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저승사자의 침범은 이미 출애굽 때 현실화가 되고 말았는데, 즉 죽음의 사자는 동화나 만화가 아니라 실제상황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항상 저승사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니 "어디, 그럴 리가 있겠어?"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늘 찾아오지 않는 죽음의 사자를 늘 현실화를 시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죽음의 사자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증거, 즉 문설주에 발랐던 '어린양의 피' 라는 것이다.

◈ 피와 저승사자 !!

바로 그 피가 있음으로 인해서, 죽음의 사자가 우리를 찾아왔다는 것이 계속 현실이 된다는 말이다. 즉 '어린양의 피' 라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라는 말이다.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집안에 죽음의 사자가 침범하지 않도록 문설주에 피를 발라서 방지를 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래서 이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나라의 제사 안에서 계속해서 되풀이가 되는데, 그렇게 해서 외부에서 오는 모든 적들의 세력이 다 방지가 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 속에는 어린양이 !!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게 민수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말이다. 여기 이스라엘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이스라엘 속에는 어린양이 있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린양은 어떤 환경 속에 놓여있는고 하니, 죽음의 사자의 방문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살아난 것이 바로 이 어린양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설주에 바른 그 어린양의 피가 아예 이 이스라엘 가운데 내장에 되어서 이스라엘과 함께 있게 되면, 어린양과 관계하게 되는 이 외부환경이 전부가 다 무슨 환경인고 하니, 이스라엘을 노리고 있는 죽음의 사자가 조성되어있는, 그런 죽음의 바다라는 것이다. 그런 죽음의 바다에 이스라엘이 하나의 섬처럼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바로 우리라고 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이, 즉 가정과 직장과 국가와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죽이는 환경으로 배치되고, 배열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가 없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세계관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모두 다 관계가 되고 배열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어린양의 피와 그 구조 !!

그러니 이것이 만약에 'S' 극이라고 하면, 다른 것은 모두가 다 'N' 극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곧 구조인데, 즉 어린양의 피로서 성도 주변에 배치되어있는 모든 환경들은, 바로 그 어린양을 죽였던, 혹은 예수님을 죽였던 그 세력의 하수인들로서 배치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기드온의 경우에, 그의 주변에 있던 수십만의 미디안 군대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입장인데, 즉 우리가 기드온이라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미디안 군대와 같은 우리를 죽이려는 죽음의 세력들이란 말이다.    

성경말씀을 이렇게 보면 굉장히 쉬운데, 그런데 철학자들은 또 이것을 가지고 이원론이라고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쳐들어오면 이원론이 될 수밖에 없는데, 사실은 예수님 자신이 이원론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빌라도가 말하기를, "당신이 나에게 잘 보이면 살려주겠다"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지금 당장이라도 하늘의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나를 구할 수 있지만, 내가 너에게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죽는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원론이라는 말이다. 

(요 18: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 '이원론' 이라는 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까, "같은 장소에 통하는 원리가 두 개다"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두 개의 원리가 서로 같은 하나의 원리로서 섞일 수가 없어서 이원론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같은 원리가 되면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이 된다는 말이다.

◈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일원론 !!

그런데 복음은 이원론에서 출발해서 일원론으로 바뀌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통일이 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으로 일원론을 주장하는데, 그런데 그만 예수님께서 다른 원리를 들고 오니 이원론이라고 욕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중심이 아닌 예수님 중심으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일원론, 즉 원리가 하나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통일되는 오직 그 하나의 원리 말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러니 기존의 자기 중심의 세계관은 결국 죽음의 사자를 이기지 못하는데, 그야말로 허약한 세계관이고, 부질없는 세계관이고, 또한 전혀 소용이 없는 세계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그러한 것이 전혀 허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우리는 그 안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 3층 아파트가 무너지면 !!

예를 들어서, 여기에 이렇게 3층 아파트가 있다고 하면, 여기가 터기의 동부지역이라고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지진이 일어나서 그만 폭삭 무너지고 말았는데, 그러면 이 3층짜리 아파트가 그만 납작하게 되어서, 이렇게 1층, 2층, 3층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밑으로 내려앉았으니 유리창이고 뭐고 다 깨지고 엉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1층에 살던 어떤 아저씨가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빠져 나왔다면 구원을 받았을 것인데, 하지만 나오지 못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가 지금 무너진 1층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냥 1층의 벽이나 천장에 발린 도배지 외에 다른 것은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볼 수 있는 시선의 최종지점이란 말이다.

그가 우리가 평소에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이, 즉 "요즘 물가가 너무 비싸서 못 살겠다. 돼지고기 값이 폭등을 하더니, 휘발유 값도 그렇고, 또 양념 값도 너무 비싸. 그리고 한미 FTA는 또 왜이래?" 라고 하면서 그냥 평소에 무심코 이야기하는 것들이, 즉 그렇게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들이 묻어있던 자기 세계의 벽이나 천장에 발린 도배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도배지에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은 무엇인가? 기껏 해봐야 이런 좁은 구석에서, 즉 "니가 뭐 국회의원이야? 니가 개그맨이야?" 라고 해도, 그것은 결국에는 다 무너진 것이란 말이다. "국회의원이 되기가 참 쉬워요. 어렵지 않아요. 2억만 주면 돼요" 라고 하다가 고소를 당했다는 것이다. (제시한 돈의 액수가 너무나 적어서 고소를 당한 듯, ㅋㅋ).

◈ 그런데, 그 무너진 동네에서 !!

그러니 이렇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살아가는 곳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이미 무너져 내린 동네라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서 제 아무리 각자의 역사를 끄집어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무너짐, 즉 죽음 안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바로 이 무너진 동네에서, 즉 얍복강가에서 첫 번째, 즉 넓은, 하나밖에 없는 세계관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세계관을 알고 부터는 자기 세계관이 무너지게 되는데, 그래서 그 순간 자기 세계관을 포기하고 주님의 세계관에 자기 자신을 입적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입적(入籍)' 이라고 하니 중이 생각나는 모양인데, 그렇게 자기 이름을 어린양의 이름에 새기듯이 자기 자신의 이름이 주님의 생명책에 입적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아하, 나의 태생은 세상에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이미 예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 일부러 나를 방문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교회 - 죽음에서 벗어난 자들 !!

야곱이 바로 그것을 깨달았는데, 그 야곱이 가지고 있었던 경험을 확장시키는 나라가 무슨 나라인고 하니, 곧 '이스라엘' 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이스라엘의 완성이 두 글자로 '교회' 인데, 그래서 신약에 오면 진짜 이스라엘, 다른 말로 하면 '온 이스라엘' 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교회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미 죽음에서 벗어난 자들인데, 하지만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가 있는가? 여기 1층에서 벗어나려고 손톱으로 뜯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아까도 말했지만, 죽음조차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게 곧 '어린양의 피' 라는 것이다. 그 피를 바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 온통 주변에는 원수들만 !!

그러니 십자가 안에 들어온 자라고 하면 이미 죽음은 이긴 자이고, 동시에 그 사람은 무엇을 발견하는고 하니, 자기 안에 있는 'S'극인데, 즉 그 'S'극으로 인해서, 그 'S'극을 겨냥해서, 그 'S'극을 모독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였던 그 세력이, 자기 자신이 아닌, 자기 안에 있는 그 주님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방식으로 주변에 깔리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수십만의 미디안 군사들이 진을 진 것처럼, 그렇게 배치가 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가 시기나 나서 그렇고, 때로는 우리가 부러워서 그렇고 말이다. 즉 "너거들은 어떻게 막 살아도 구원을 받나?" 라고 하면서, 그것이 그렇게 부럽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도저히 그것이 믿어지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자기들은 막 살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여기니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완벽한 그 행함을 지키지 않아도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그것이 부러워 죽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지켜지지도 않으니 말이다.

◈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그러니 우리는 복음으로 기뻐하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니가 만일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난 것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는데, 왜 그렇게 쉬운 것을 놔두고 왜 자꾸만 그렇게 행함을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무엇이 믿어지지 않았기에 그러하냐는 말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남을 믿으면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가는데, 그렇게 쉬운 것을 두고, 왜 쓸데없이 행함에 집착하느냐는 것이다. 그게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그러한가? "이것도 폐하지 말고, 저것도 폐하지 말라" 라는 원리에 의해서 그러한가? 무슨 그런 핑계가 다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믿음이 없어서 그러한데 말이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무튼 어린양의 십자가가 들어가게 되면 성경말씀에 나오는 모든 행함은 무엇을 겨냥하는고 하니, 예수님이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로서 명령들이 이어져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이, 즉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라는 말씀도 그렇고, 또한 빌립보서 4장에 나오는,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라는 말씀도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 주님만을 의지하는 바로 그 모습 !!

이런 말씀들이 바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겨냥하기 위해서 기록되어있다는 말이다. 즉 "아하, 우리가 주님만을 의지하는 그 모습이 바로 무엇이든지 정결한 모습이고, 또한 무엇이든지 사랑할 만한 모습이구나"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서 사랑하고 정결하게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자기에게 끄집어내는 것은 여전히 어느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인가? 자기가 지금 죽었다고 여기지를 않고 살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자기 세계관에서 끄집어낸, 그런 상식적인 윤리와 도덕에서 나오는 사랑이고 정결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엄매, 기죽어 !!

하지만 어린양과 함께 있는 사랑할 만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오직 예수님의 복음이, 그것이 그렇게 사랑할만한 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 안에 들어있는 모습이 주님이 보시기에 정결하고 거룩한 모습이고 말이다. 한번 생각을 해보라는 것이다. 자기보다 더 깨끗하고 더 멋있는 분이 함께 있으면, 우리는 그분 앞에서 기가 죽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렇게 기죽는 모습이 얼마나 겸손한 모습이냐는 말이다.

"내 아이가 말을 잘 들어요" 라는 TV프로가 있는데, 그게 무슨 내용인고 하니, 집에서 그렇게 아빠 엄마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가 있는데, 말썽꾸러기 7살이란 말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심해서 부모가 도저히 대책이 없어서 전문가에게 맡기는데, 그런데 특별한 전문가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프로레스링 세계 참피언에게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이왕표?).

그 사람이 있는 체육관에 데리고 가니 아이가 그만 기가 죽어서 꼼짝도 못한다는 것이다. 선수들이 서로 운동을 하는데, 서로 업어치고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집에서 그렇게 왕초처럼 까불던 아이가, 그 사람 앞에서 그야말로 얌전하게 기가 죽어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온유하고 자비롭고 겸손한 모습이냐는 것이다.

◈ 십자가가 없으니 깽판을 !!

그것이 바로 성경말씀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인데, 십자가 앞에서 주님만 생각하니 자기에는 아무런 자랑거리도 없다는 것이다. 전혀 자기 잘난 척을 할 수 없는데, 그런데 십자가가 없으니 교회에 와서도 깽판을 치고, 또 십자가 마을에 글을 올려서 욕을 한다는 말이다. 7살도 그런 7살이 없는데, 그야말로 철이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깡패와 같은 횡포를 부리고 있는데, 그런데 정작 주님을 만난 사람은 어떠한가? 너무나도 조용한데, 어디 욕을 할 줄 몰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을 생각하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그냥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님이 없는 것들은 마치 개가 설치듯이 그렇게 설쳐댄다는 것이다. 자기를 알아달라고 말이다. 이게 그리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딱 보면 안다는 것이다. 주님이 안에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말이다.

◈ 우리의 세계관과 예수님의 세계관 !!

다시 말씀을 드리면, 첫째로 그 출발이 우리 자신의 세계관인데, 즉 자기가 살아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세계관인데, 그러한 세계관에서는 기존의 자연을 의지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의지한 것이 요한계시록을 보면 뻥뻥 뚫리면서, 그래서 도저히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는, 즉 사실상 우리가 마귀를 의지했음이 들통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 우리 세계관에서는 도저히 죽음을 이길 수가 없이 드러나고 말았는데, 여기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역사' 라는 것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중심의 계시는 개혁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것인데, 개혁주의 신학에서의 모토가 역사인데, 물론 그것이 곧 바리새인들의 신학이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과거에서 진리라고 여기는 것에서 계속해서 진리라고 규정이 된다는 것이다. 역사상으로 말이다. 즉 "어제의 진리가 오늘도 진리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는 죽음을 전혀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몸은, 이 세상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몸 !!

두 번째로 나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세계관이란 것이다. 이 예수님의 세계관은 예수님의 시간과 공간인데,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의 세계관과 인간의 세계관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 인간의 세계관은 우리 몸 중심인데, 즉 자기 몸을 살리는 세계관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계관은 누구를 살리는 것인가? 누구의 몸인가? 예수님의 몸인데, 즉 예수님의 몸을 '주(主)' 라고 섬기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세계관이 곧 예수님의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 어려운 게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몸은 어떤 몸인고 하니, 죄 많은 이 세상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몸이라는 것이다. 즉 마리아의 몸에서 나온 세계관이 예수님의 세계관이라는 말이다.

◈ 아니,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테러를?

그래서 예수님의 몸에는 창자국과 못자국이 있는데, 사람들에게 당했던 말이다. 즉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것인데, 그것도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피조세계는 희망이 없는데, 때려죽인 놈이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것이다. 착해도 구원을 받기가 힘드는데, 폭력을 행사한 놈들이 어떻게 그 폭력에 당한 자에게 구원을 시켜달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이러한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세계관 속에는 "인간은 지옥에 가도 마땅하다" 라는 것이 포함되어있는데, 예수님의 세계관은 그런 몸으로 펼쳐진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관 속에는 지옥이 있는데, 또한 주님의 사랑으로만 가는 천국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옥과 천국은 우리 세계관에서는 나올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몸에서만 나온다는 것이다.

◈ 그러면 천국과 지옥은?

우리 세계관에 의한 천국과 지옥은 극락과 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불교를 보면 잘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어떤 사람이 극락에 가는가? 그것은 인간의 몸에서 나왔는데, 인간은 몸은 5가지의 관계로 구성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가 부모와의 관계이고, 그 다음으로는 형제관계, 부부관계, 자식관계, 그리고 친구와의 관계인데, 이 5가지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좋으면 극락에 간다는 것인데,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부모를 섬기면 극락에 간다는 것인데, 그러면 극락에 가면 무엇이 보이겠는가? 막 살지 않고 자기가 착한 일을 한 것이 그대로 공로로 남아있는 동네가 곧 극락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천국관이 사람에게 먹혀들어 가는데, 왜냐하면 악령을 받았기 때문인데, 이 악령은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차단시키는 것이 악령의 할 도리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는데, 그래서 마귀는 마귀의 역할에 충실해줘야 하는데, 즉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즉 마귀는 기어이 지옥에 갈 자기 사람들을 데리고 가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교회에도 당연히 마귀가 와서 지옥에 갈 사람들은 다 데리고 나가줘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5가지 인간관계에 자신이 있는 자들은 극락에 간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자들은 극락에 보내면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의 몸은, '자기 의(義)'로 가득해 !!

그러니 인간은 성령을 받지 못하면 자기 몸의 행함에서, 그런 자기 행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착한 일을 하는 것을 누가 지켜보는가? 자기가 엄연히 지켜보고 있는데, 그러니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착하다는 것을 자기가 항상 보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나는 잘났다" 라고 하는 자기 변명과 핑계로, 그런 의로움으로 언제나 가득하게 차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힘써 세우기 위해서 말씀의 좋은 것은 모두 집어넣었는데,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서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구경해야 천국에 가고, 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가든지 상관이 없이, 자기 눈앞에 있는 십자가를 믿으면, 즉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즉 복음의 말씀이 구원을 준다는 말이다. 

(롬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롬 10: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거지 나사로의 경우에 !!

거지 나사로의 경우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여준다고 해서 부자의 형제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말씀, 즉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사람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연결을 시켜놓았는데, 즉 장차 천국에 가는 사람과 지옥에 가는 사람은 꼭 여기가 천국이고 지옥이라고 미리 견학해봐야 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과 연계시켜놓은 것을 성경말씀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해석을 할 때 천국과 지옥을 미리 염두에 두고 보라는 말이다.

그러니 그 성경말씀을 통해서 거지 나사로의 믿음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지금 천국을 보고 지옥을 봐도, 그 사람은 천국에 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가 어디 미리 천국에 가본 적이 있는가? 아브라함의 품에 말이다. 전혀 없는데, 그러니 거지 나사로가 구원을 받은 것은 자기가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눅 16: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눅 16: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눅 16: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눅 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성경말씀을 통해서, 언약과 자기와의 관계를 미리 !!

그러니 구원을 받은 것은 미리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즉 기적을 맛보아야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 성경말씀을 통해서 언약과 자기와의 관계를 미리 앞서서 정리해보는 것이란 말이다. 언약 앞에서, 즉 "우리는 아브라함 언약 앞에서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구나" 라고 말이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약속을 믿음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이다.

아브라함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믿는다는 말인데, 아브라함의 씨가 누구인가?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예수님인데, 즉 아브라함의 약속대로 씨가 올 것이고, 그 씨가 우리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의인이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렇다고 하면 나사로의 경우에, 자기가 병자라는 것과 거지라고 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과 상관이 있는가? 물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 내용이 성경에, 즉 하나님은 왜 나사로를 거지로 만들었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앞집에 살고 있는 부자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상관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을 그냥 평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부자와 거지' 라고 하는, 그렇게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쪽에서 인생을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러한 것조차도 상관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언약으로만 구원이 된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신다는 것이다.

◈ 반성은, 또 하나의 '숙성된 죄' !!

그래서 제가 어제 오전설교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우리가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사는데, 그러니 제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즉 자기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반성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성은 또 하나의 '숙성된 죄'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제가 의존교회 사이트에 올려놓았는데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몸에는 하늘의 소식만 담겨있는 몸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수난을 받고 죽었다고 하는 것이 현실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님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인데, 여기에는 역사가 없고 묵시만 들어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공격하는 묵시만 말이다.

그러면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 자기 몸 중심으로 될 때만 역사가 있는데, 그래서 "아, 나도 과거에는 참 잘나갔었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그리고 미래는?" 라고 하면, "미래는 가보지 않아서 모른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똑같다는 것이다. 현재나 미래나 동일하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지난날들 중에서 가장 젊은 날이 언제인고 하니, 그것은 곧 오늘인데, 그렇지 않은가? 나이가 90이든 100이든 간에, 지금 이 순간이 지난날들 중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젊음의 날인데, 즉 항상 현재뿐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187페이지를 살펴보자.

** 사람이란 죽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죽음 때문에 사람이 존재 !!

이것을 조금 설명해야 되겠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죽는다" 라는 것은 틀린 말이고, "죽음이 사람 안에 있다" 라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즉 죽음이 주체가 되고, 사람은 그 죽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즉 죽음을 위해서 존재하게 된다는 말이다. 죽음 때문에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몸 때문인데, 조금 전에 예수님의 몸이 무엇이 들어있다고 했는가? 예수님의 몸에는 이 세상의 모든 죄가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죽음도 들어있고 말이다. 그런 예수님의 몸이 온 우주를 지배하는, 그러니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이라는 것이다. 즉 원리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원리는 무엇인가? 이 세상은 오직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인하여, 의하여, 위하여' 말이다. 전적으로 이 세상은 그렇게 그분의 나라로서, 그분을 인하여, 그분을 의하여, 그분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

그러므로 사람의 경우에도, 사람으로 출발하면 안 되고 그 이전으로 가야하는데, 즉 사람을 있게 한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과 사람 사이에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은 매우 간단하게 실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 라고 주장한다면, 주님도 역시 '나' 라고 주장해서, 그렇게 해서 '나'와 '나'가 되어버리면 둘 다 이원론이 되어서, 그만 "니는 니대로, 나는 나대로" 라고,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각자 갈 길로 갑시다" 라고 하는 대결구조라는 말이다. 

◈ '나'와 '나'의 관계가 아닌, '너'와 '너'의 관계 !!

그런데 사람이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즉 먼저 '너' 라는 주님을 생각하게 되면, 그렇게 주님을 먼저 생각해주게 되면, 주님도 역시 우리를 '너' 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다. 즉 '나'와 '나'의 관계는 대립관계이지만, '너'와 '너'의 관계는, 그렇게 '너'를 불러일으키는 관계는 곧 사랑관계라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가 먼저 '주님을 위하여' 라고 나오면, 주님도 역시 "주님을 위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셨다" 라는 것을 비로소 그 사람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너'와 '너'의 관계인데, 그것이 곧 사랑의 관계라는 말이다.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을 여러분이 집에 가서 당장 실험할 수 있는데 말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권사님의 남편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데, 그래서 할아버지가 "당신, 바쁜데 왜 이렇게 병원에 와있지?" 라고 하면, 권사님은 "당신, 너를 위해서 이렇게 와있잖아요"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너 때문에 사는 거야. 당신과 같은 여자를 만나서 너무 기뻐" 라고 하는데, 그러면 실험이 당장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권사님의 표정을 보니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는데, "목사님, 지금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무슨 그런 일을, 그것은 말도 안 됩니다" 라고 말이다(ㅋㅋ). 권사님, 그렇지요?

◈ 빙신아, 그것도 몰랐나?

만약에 경상도 사람이 그런 실험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내가 "여보, 나는 당신 덕택에 지금까지 너무나 행복하게 잘 살았어" 라고 하면, 남편은 뭐라고 하겠는가? "빙신아,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건데,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나? 이제야 그것을 알았어" 라고, 오히려 목소리를 한껏 높여서 말이다(ㅋㅋ).

그러니 한쪽에서 '너' 라고 나오면, 상대방에서도 '너'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데 '너'가 아닌 '나'가 튀어나오니 그게 무슨 사랑의 관계냐는 것이다. 오히려 이용을 당할 관계이지 말이다. 그것도 말도 곱게 하지 않는데, '야, 이 빙신아!' 라고 시작하니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옛날 남자들은 스트레스를 마누라에게 다 풀어버리는데, 즉 자기가 바깥에서 인간답게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을 집안에 와서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이나 마누라에게, 그런 약자에게 모두 풀어버린다는 것이다. 저도 그렇게 남들처럼 바뀌어야 하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우리 인간은 끝까지 '나'를 고수하게 되는데, 그것을 사람뿐만이 아니라 주님에게 가서도 '나'를 그렇게 고수한다는 것이다.

◈ 선택과 배제 !!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선택을 하고 일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보면, 이렇게 한 쪽을 선택했다는 것은 다른 쪽은 배제했다는 말인데, 그렇게 배제를 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에게는 그것이 필요치 않다고 본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 다른 곳에 가서는 다른 것과 매치가 되어서, 그것이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선택으로 인해서 반대편에 있는 저쪽은 배척을 받았지만, 그런데 오히려 그러한 우리 자신의 배척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그렇게 그렇게 배척을 받은 그 나라와 그 구조 속에서 우리 자신이 오히려 배척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에서는 성전개념으로 나오는데, 즉 성전의 모퉁이 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 모퉁이 돌이 하늘에서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돌이 오히려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버림을 당한 돌이 말이다.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인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러니 선택의 출발을 사람으로부터 먼저 하면 안 되는데, 즉 보이지 않는 창세 전의 예수님 안에서의 선택으로,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런데 문제는 성령을 받지 않아서 이 주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자기부터 출발하게 되는데, 그렇게 자기 자신인 '나'로부터 출발하니, 그러한 '나' 속에서 예수님조차도 '너'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예수 당신도 나를 위해서 죽으란 말이야" 라고 하는데, 마치 자기가 시키는 것처럼 오해를 한다는 말이다.

◈ 우리가 선택을 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누구를 선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서, 자식이 이렇게 두 명이 있으면,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 쪽은 미워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택을 함으로서 다른 쪽은 배제를 당하게 되는데, 과연 그렇게 배제를 당하는 것이 자기에게 쓸모가 없는 것이냐는 말이다. 자기에는 쓸모가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모아서 오히려 우리의 죄가 발각을 당하게 되는 도구로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재료로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막 살지 않고 착하게 살았다" 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자기가 착하게 살기 위해서 떨어져 나간 것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것들을 모아서 "니가 이래도 의인이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택의 출발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는데, 그러면 어떻게 선택을 해야하겠는가? 물론 예수님을 앞장세우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예수님을 앞장세우는 방법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 반드시 '죽음'을 건너야만 !!

왜냐하면, 인간에게서 예수님으로 가고, 또 예수님에게서 인간으로 올 때는, 거기에는 반드시 무엇을 건너뛰어야 하는고 하니, 여기서는 '죽음' 이라는 것을 건너야하기 때문에, 그래서 멀쩡한 우리 자신이 멀쩡한 예수님을 만나고, 또한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만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에게 건너올 때는 어린양이라는 죽음을 당해서 오고, 우리도 예수님을 만날 때는 자기의 개인적인 죽음을 당해서 만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먼저 죽었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경우에, 그가 순교를 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닌데,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자기 안에서 자살을 하든지, 아니면 순교를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베드로의 순교를 막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고 할 수 있는데, 즉 "베드로야, 너는 순교를 해도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 라고 하기 위해서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이 곧 처소의 문제인데, 즉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으면 베드로가 들어갈 하늘나라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 극락과 천국 !!

물론 우리 생각에는, 조금 전에 극락을 이야기했는데 말이다. 그 극락개념은 장소가 텅텅 비어있는데, 그래서 착한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들어와서는 마치 잔디밭에 텐트를 치듯이, 그렇게 하면 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소개한 천국은 무엇인고 하니, 장소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있는 장소에 아무나 끼어 들면 되겠지" 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60년대에 우리가 살 때처럼, 즉 방 하나에 열 명이 다같이 살았던 방식인데 말이다.

◈ 과거 우리는 흥부네 식구처럼 !!

그때는 '내 방' 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는데, 그냥 방 하나에 남자는 남자대로 모여서 자고, 여자는 여자대로 모여서 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을 잘 때 "너거들끼리 알아서 잘 덮어라" 라고 하면서 이불을 하나 던져주면, 아이들도 군말을 하지 않고 서로 이불을 당기면서 그렇게 잠도 자고 말이다. 물론 아침에 일어나면 힘이 센 놈은 이불을 온 몸에 칭칭 다 감아있고, 힘이 없으면 그냥 맨 몸으로 자다가 감기에 걸리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서 어릴 때부터 질서를 배우는데, 70년대를 지나면서 아이를 하나만 낳자고 하면서 자기 방이란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책상도 자기 것이 생기고, 그 뒤에는 컴퓨터도 등장하고 말이다. 그러니 그 이전까지는 일종의 합숙생활을 했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살았지 싶은데, 여자 형제들이 많은 경우에는 속옷도 다 물려서 입었지 싶은데 말이다. 교복은 당연하고 말이다. 그래서 언니와 동생이 매일같이 싸우는데,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유산 때문에 싸우고 말이다.

◈ 반드시, 자기 부인이 있어야 !!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는데(ㅋㅋ), 아무튼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항상 '나'에게서 '너'로 건너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저는 주님 때문에 삽니다" 라고, 즉 "나 때문에 주님이 죽었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주님 때문에 자기가 존재한다고 하는, 즉 '나'에게서 주님에게로 건너가려고 하면, 반드시 자신에 대한 부인이 있어야 하는데, 즉 자기의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설교하면서 누가복음 17장 33절의 말씀이 나왔는데, 즉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라고 말이다. 성경말씀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왜 자꾸만 이런 구절을 의도적으로 피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디 피할 말씀이 따로 있지, 이러한 십자가를 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눅 17: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 그러면 '둘째 사망' 이란?

그러면 여기서 둘째 사망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조금 전에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사람을 죽인다" 라고 했는데, 즉 '죽음' 이란 것이 예수님께서 계신다고 하는 것을 앞당겨서 보여준다고 하면, 그런 죽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중죽음'이 되어야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그냥 사람으로 태어나서 늙어서 죽는 그 죽음이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수명이 다된 기계를 처분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런 일반적인 목숨이 끊어지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죽음이 전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죽음도 일종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런 윤회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흙이니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인데, 그 뒤에 다시 개나 소로 태어나면 태어나는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의 모든 것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 왜 '윤회설(輪回說)'이 등장했는가?

이 '윤회설(輪回說)' 이라는 것은 인도철학에서 처음 나오게 되는데, 왜 나왔는고 하니, 그냥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하면 사회질서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돈을 달라고 해서 주지 않는다고 죽였다고 하면, 그 죽음은 무엇인가?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너는 50년 뒤에 어차피 죽을 목숨이야" 라고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공동체의 질서가 전혀 잡히지 않는데, 즉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면서 한다는 말이, "아버지는 어차피 죽을 건데, 내가 미리 죽여줄게. 지금 건강도 별로 안 좋아서 고통스러운데, 그러니 아버지는 나에게 고마워하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자체가 말은 맞는데, 하지만 사회가 너무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강한 자들에게 약한 자들이 짓눌려서 힘이 들어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끼리이라도 어떻게 편하고 원칙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여기에는 '도덕' 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은 도덕이라기보다 윤리인데, 즉 윤리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개인적인 성품과 관련이 되면 도덕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윤리와 도덕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비를 우리 인간이 만들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비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인데,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하늘에서 주신 것을, 즉 땅에 자란 것을 먹었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지만, 하지만 윤리와 도덕은 인간이 해야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도덕은 자기와 관계된 것이고, 또한 윤리는 이웃과의 관계인데, 굳이 따진다면 그렇게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같은 것으로 봐도 되고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인데, 즉 우리 인간이 짐승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입을 것은 입고, 또 걸칠 것은 걸쳐야 한다는 것이다.

◈ 루소의 '사회계약설' !!

그렇게 해야 사회가 역사를 이루면서 대대로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말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한, 그렇게 서로 서로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방안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우리 인간에게 자연을 주었지만, 윤리와 도덕은 누가 만드는가? 인간들끼리 협의해서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루소는 '사회계약설' 이라고 했는데, 즉 인간들끼리 서로 서로 계약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낚시 동우회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여기 낚시 동우회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계약을 맺고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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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계약설 [Theory of social contract, 社會契約說] - 고대에서도 보여지고 있는 설(說)이지만(예를 들면, 맹자,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의 견해), 이것이 사회 사상으로서 널리 퍼진 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대두기, 곧 17~18세기의 유럽에서이다. 이 설에서는 개인(個人)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存在)로서 전제되고, 개인이 국가의 성립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의 근거를 명확히 하려고 시도하였으며(이 경우 사회와 국가는 동일시되고 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당시의 봉건적 절대주의 지배에 대항하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 대표자로는 홉스, 로크, 스피노자, 루소 등이 있다. 국가 권력의 성질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점에서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공통적인 기조는 자연적 상태에 놓인 개인은 무제한적인 자유상태에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따라서 필연적으로 상호 대립하는 투쟁 속에 놓이게 되는데, 이에 대해 서로의 안전, 개인의 재산 및 기타 각 개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서로 계약을 맺고 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근대 시민계급의 정치 권력에 대한 요구, 사유재산의 보호 및 개인들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하는 등 시민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였다. - 철학사전(임석진 외 편저) 2009, 중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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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계약설에 의하면, 윤리와 도덕은?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 계약설에 의하면 윤리와 도덕은 어떻게 되는가? 누군가 답변을 좀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윤리와 도덕이 성립하는가? 성립하지 않는가? 어느 쪽이냐는 말이다. 이것이 제법 어려운 문제인데, 물론 자기들끼리는 그것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가정'을 예를 들어보면, 이렇게 네 식구가 있는데, 즉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여동생인 '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피아노 콩쿨이 있어서 엄마가 오빠에게 뭐라고 하는고 하니, "지금 니 여동생이 대회가 있어서 피아노를 집에서 쳐야하니, 시끄럽더라도 좀 참아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빠는 지금 시험공부를 해야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계약에 의해서 투표를 해야하는데, 그런데 결과가 3대1로 동생에게 유리하게 나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가족끼리는 사회계약이 이루어지니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아파트 위층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피아노 소리에 시끄러워서 죽는다는 것이다. 아래층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사회계약이 자기들끼리는 좋은데, 다른 사람들과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보편적인 진리가 되겠는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 프랑스에서 이슬람의 여성들이 뒤집어쓰는 '히잡' 이라는 것을 쓰지 못하게 법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게 이슬람 사회에서 보면 용납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말이다.

◈ 주일성수 ??

일요일에 국가 공무원들의 시험을 치는데, 그게 용납이 되는가? 시험을 치는 자들과, 또한 그 시험을 감독하는 자들은 쉬지도 못하고 말이다. 그래서 토요일에 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그 장소를 빌려주는 학교는 또 골치 아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요일에 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안식일을 지켜라" 라는 계명을 가지고 주일성수를 강조하는 목사들의 경우에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있어서 "안식일을 지켜라" 라는 법이, "어디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부득이 안 될 경우에는 지키지 마라" 라고, 그렇게 했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은데, 하지만 그 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내려준 법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바깥으로 나가서 강요할 수 있는 법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주일성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것들만 골라서 하는데, 그리고 그것조차도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는 전혀 통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마구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주일에 교회에 나오시면 안식일을 지킨 것으로 해주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자기들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다. 즉 "공무원 시험과 같이 특별한 경우에는 예외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이다.

◈ 아버지, 내 인생을 책임져 !!

어떤 목사는 자기 딸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주일에 치는 교사임용고사 시험을 거부해서 학교 선생님도 포기했다고 자랑을 하는데, 그런 경우가 의외로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현대판 심청전도 아니고,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딸이 희생을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자기 인생을 대신해서 살아주는 것도 전혀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그게 살아가는데 너무 손해가 막심하니 뭐라고 하는고 하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교회에 나오면 그것으로 인정해주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특별한 경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결혼식도 여기에 포함이 되는가? 70주년 기념여행은 어떻게 되는가? 교회에 오다가 자동차가 펑크가 나서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린 것도 인정해주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ㅋㅋ). 어제 우리 정 집사님은 집에서 동영상을 보면서 사도신경부터 시작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데, 그것으로 안식일을 지킨 것으로 우리도 쳐주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되느냐는 것이다.

◈ 인간 - '나는 나다' !!

왜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행함의 의(義)를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쥐려고 하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그 출발을 주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절대로 너가 되기 싫다" 라는 것인데, 즉 "나는 나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인데, 그러니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티를 팍팍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지, 결코 남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즉 "나는 나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지, 예수 때문에 사는 것은 결코 아니다" 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나 때문에 사는데, 거기에 예수가 도와주면 나도 믿어주겠다" 라는 것인데, 단지 그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무슨 믿음이고 신자냐는 것이다. 자기 종교에 자기 신자가 된 것이지 말이다. 즉 자기가 교주가 되고, 자기가 신자가 된다는 말이다. 자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모두 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사망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

그렇게 하면서 살다가 죽으면, 그것에 대해서 "봐, 인간은 이렇게 죽잖아" 라고 하면, 그들은 뭐라고 하는가? "그래, 내가 곧 진리이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도 역시 진리대로 죽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용감하게 죽겠다. 그러면 죽음도 이길 수 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나오는 것이 곧 불교라는 것이다.
즉 "어차피 죽는 것이니, 장렬하게 죽겠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죽는 것도 역시나 진리라는 말이다. 그래서 죽는 것도 자기가 진리가 되는 하나의 증거물로서 삼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 죽음으로는 되지 않고 따블죽음, 즉 '이중죽음' 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번째 죽음이 동원되는데, 그러면 이 두 번째 죽음은 어떤 죽음인고 하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비로소 죽었다가 살아난 그것이, 물론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 죽음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죽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부활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첫 번째 죽음이 자연스러운 죽음이라고 하면, 두 번째 죽음은 모든 사람이 의로운 부활되지 못하도록 저주를 퍼붓는, 그런 저주의 죽음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 그날이 되면 !!

그래서 예수님은 한 번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첫 째로 나타나신 것은 인간들이 세계관에서 있던 일이고, 두 번째는 인자의 세계관, 즉 예수님의 몸 중심의 세계관이 우리에게 덮치는 그날이 되면, 비로소 '나'로부터 시작하는 그 자체가 전혀 오류였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나'보다 더 앞서서 있었던,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진 그 모든 것을 '나'로부터 시작해서 보았으니, 그것이 잘못이었음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거기로 우리가 건너가지 못하는고 하니, 우리는 첫 번째 죽음으로 우리 스스로를 소멸시키려고 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첫 번째 죽음이 아니라 따블 죽음으로, 즉 예수님은 부활로 다가왔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부활을 생각한다고 하면, 우리는 '나' 중심의 세계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죽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미 죽었다. 그런데 다시 손을 댄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죽었다가 손을 대면, 그렇게 죽은 사람이 스스로 손을 댈 수 있는가? 예를 들어서, 자기가 죽었는데,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죽을 때 상의 단추를 미처 다 잠그지 않았다고 하면, 죽은 체로 몰래 손을 슬 올려서 단추를 마저 잠그고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느냐는 말이다.

◈ 살리는 권한은 이미 인자가 되시는 예수님에게 !!

그게 안 되는데, 왜냐하면 죽은 자는 이미 해골인데, 에스겔서 37장에 나오듯이 바짝 마른 해골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그 해골이 어떻게 살겠는가? 살리는 권한은 이미 인자가 되시는 예수님에게 넘어간 상태인데, 바로 그것을 모든 인간에게 적용을 시킨다는 것이다. 즉 죽을 영혼은 죽고, 살 영혼은 사는 권한은 오직 예수님에게 있는데, 왜 그런가?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되어있기 때문에 말이다.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 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 영에 속한 자, 육에 속한 자 !!

다시 말해서, 누구는 사랑을 받아서 천국에 가고, 또 누구는 미움을 받아서 지옥에 가는, 그런 모든 것은 창세 전에 이미 예수님 안에서 다 예정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즉 예수님의 두 가지 속성 가운데 한 가지 속성을 증거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은 그 둘 중에서 하나의 분류로서 이 땅에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에 속한 자로서, 혹은 육에 속한 자, 그렇게 분류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대비되는 언약 속에서 한 가지 노선으로서 자리를 잡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즉 약속에 속한 자녀가 있는 반면에, 또한 육체에 속한 자녀가 있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하갈 쪽의 자식인 이스마엘과 사라 쪽의 자식인 이삭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식들을 말이다. 즉 저주를 받아야 될 자는 저주를 받고, 복을 받아야 될 자는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든 권한은 오직 예수님께 있고 말이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187페이지를 보자.

** 진짜 생명의 삶은 이생이 아니라, 이생의 삶이 끝나야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이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 모세가 예수님을 알았다구요?

여기 히브리서 11장 26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과 애굽의 모든 보화가 비교되고 있는데, 그런데 모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 알았는가? 그때는 아직 예수님이 태어나기 이전인데 말이다. 여기에 있는 말씀대로 하자면, 이미 모세가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모세 본인의 세상관 속에 언약을 통해서 예수님의, 즉 모세가 선택한 그 세상관 이전에 예수님의 선택이 모세의 세상관에 '뻥, 뻥' 구멍을 뚫고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의 세상관으로 보기에는 애굽의 금은 보화가 좋아 보였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세상관에 합류된 체로 살았다는 것이다. 합류, 즉 '세례' 라는 말이다.

모세가 그것을 어디서 알았는가?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홍해를 건너온 것을 두고서 "세례을 받고" 라고 했는데, 그것은 홍해를 건너올 때는 이미 죽은목숨이란 말인데, 즉 "우리는 주님이 아니면 이미 갔어.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주님 때문에 살고 있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것이 모세를 뒤덮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모세에게는 애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이미 애굽을 떠났는데 무슨 애굽이 있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고전 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계속해서 교재 188페이지를 보자.

**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평소 입장이 결코 인간들이 이승에서 저승을 보는 시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 증거가 된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일들은 십자가를 가운데 두고, 저승과 이승의 자리를 뒤바꾸어놓기 위함이다.

(마 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 저승과 이승의 자리를 !!

예수님의 피가 이렇게 인간들이 이승에서 저승을 보는 시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 증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승에서 저승을 내다보기 때문에, 그 선에서는 전혀 포착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저승과 이승의 자리를 뒤바꾼다" 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우리 인간이 선택을 하게 되면, 그 선택한 것은 자기에게 속하고 나머지는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버림받은 그 선택의 자리에서 주님은 무엇을 만드시는고 하니, 저승, 즉 내세의 세계를 만들어서 침투해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 내가 만든 천국과 주님이 만든 천국 !!

인간의 선택은 자기 역사의 끝자락에다가, 즉 인간은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의 끝자락에다 자기의 천국을 배치해놓았다는 말이다. 그렇게 천국을 배치한 것으로 인해서 선택을 하게 되는데, 즉 바로 그 선택으로 천국을 건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택을 당하지 못하고 버려진 쪽에서 천국이 만들어지게 되면, 이 인간의 선택해서 만든 천국과 버려진 쪽에서 만들어진 천국이 서로 대립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선택이 만든 천국은 주님의 천국에 의해서 가치 없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피' 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 피 안에서 인간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 너는 나를 좇으라 !!

이제 진짜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살펴보겠는데, 여기 마태복음 8장 22절에 나오는, 즉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라는 말씀 가운데서, 여기서 이 '너' 라는 것은 과연 죽은 자들이라는 그룹 가운데 포함이 되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을 시켜서,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아무개 집사님, 따라 오세요" 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 포함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포함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고 하니, 어떤 사고방식들이 모여서 주님으로부터 '죽은 자' 라는 소리를 듣는지,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하, 저런 세상관, 저런 사고방식, 저런 인식들이 곧 주님으로부터 죽은 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구나. 내가 저기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의 인생관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예수님 중심으로서 새롭게 인생관이 구축되어간다는 것이다. 자기 중심이 아닌 예수님 중심으로 말이다.

◈ 성도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부름 받은' 인생 !!

그렇게 자기 중심이 아닌 예수님 중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거기에는 항상 무엇이 있는고 하니, '부름 받음' 이라는 것이, 즉 '선택을 당했음' 이라는 것이, 그런 특수한 신분이 되었다는 것이 빠질 수가 없다는 말이다. 즉 자기를 증거하는 인생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부름 받은 인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부름을 받기 이전에 무엇인가? 로마서 8장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도저히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마치 자동차가 브레이크도 없이 내리막길을 달리듯이, 그렇게 마구 달리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도저히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멈출 수가 없는데, 즉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영화롭게, 그렇게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이 곧 주님이 중심이 된 부활의 세계에서만 주어지는 혜택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그동안 '나, 나, 나' 라고, 그런 '나' 자신밖에 모르고 선택했던 사고방식에서, 그런 잘못된 버릇에서, 이제는 "주님이여, 왜 저가 이렇게 있습니까?" 라고, 그렇게 예수님에게 우선권을 드리면서,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새겨볼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2,1월1일 오전 1시 40분에 마침.

                                           새해를 말씀을 생각하는 가운데 맞이하게 해주시니, 탱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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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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