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이중성(무한반복)



일단 이중성이라는 의미는 위선적이고 모순적이다는 의미가 아니라
(물론 십자가를 대상화[동일성-일치성]로 삼은 자들에게는 반드시 위선적이고 모순적이어야만 한다. 그런 기능 조차 십자가의 십자가 즉 바닥의 바닥처럼, 십자가의 이중성이 반드시 십자가의 자기영광을 위해서 발현시키고자 상대적으로 충돌시키는 것이다.)

반복성이라는 의미로써 [십자가의 십자가] 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십자가의 이중성에 대상이 된[차이성] 자는 이 부조리가 옳았다고 외친다. 이 스캔달이 아니면 선악구조[지옥]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은혜로 들어갈 방법이 없다. 그래서 여디디야3(긍휼,꼬끼오3,무시.무능,잉여.어리석은지혜)라는 미래완료만이 그를 작살에 꼿아 잡아땡기는 것이다. 원인없는 결과로써 말이다. 이 부조리 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다. 그래서 마귀는 이 부조리의 십자가만을 겨냥하는 십자가의 이중성에 충실한 역할만을 할 뿐이다. 다른 것을 할 줄 모른다. 벗어날수가 없다.)

문자란 그 배후의 세력을 들추어내면서 표현된다. 기호는 징후이며 증상이기에....
자신의 주인(주체)이 누구입니다 라고 드러내면서 말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모든 언어는 이중적이다. 예를들면 사람은 사랑을 사랑한다 라고 했을때에 항상 사랑이 이중적으로 표현된다는 의미이다. 강조의 의미로 본다면 두 번째 사랑이라는 표현에 의미를 두어서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겠지만 정작 첫 번째 단어의 사랑이 사랑 자체의 주체로써 이중분절적으로 대상화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차이를 내는 이중성이다 라는 것이다.
(닭이라고 인간이 명명한 대상이 된 닭이 있는데, 종말의 구조에서는 닭이 주체가 되어 그 닭으로부터 무시받아야할 닭 울음에 대상물이 되어버리는, 졸지에 팔이 어긋맞게 되는 구조의 인간이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던 것을, 그 울음이 주체가 되는 순간에 비로소 하늘이 찢겨지는 것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막 15:34, 개역)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5, 개역)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막 15:36, 개역)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막 15:37, 개역)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결국 사랑 자체가 스스로 주체적으로써 사랑이 대상화 되는 것과의 구별성 차이성을 갖고자
스스로 차이성을 낸다는 의미이다. 이 차이성이 이중성이요 곧 반복성이다.

차이의 차이 곧 차이의 반복이라는 뜻이다. 십자가의 차이, 십자가의 반복, 즉 십자가의 십자가 라는 의미이다.

보통 이미 이런것들을 다양성으로 일반화 되어 있다고들 하는데
정작 십자가 라는 주체는 다양성으로 인식되는 [대상화]를 거부한다.
대상이 되면 곧 바로 고인물처럼 썩어버리는 정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상이 되지 않고 주체성을 스스로 발화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분화한다.
그래서 다양성이라고, 대상화이라고 되지 않고
n승 이라고 무한반복성이라고 한다.
십자가의 n승, 십자가의 무한반복, 십자가의 무한차이, 십자가라는 창조의 무한반복 이다.


성령의 은사도 다양성이 아니라,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 자체가 주도권을 쥔 채로, 주체로써 오히려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을 가지고 논다.
그래서 기계라는 표현을 쓰는데 반복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기계는 기능이 부여됨으로써 무한반복을 실행하는 도구가 된다.
긍휼의 그릇이라는 도구는 끊임없는 무한 긍휼을 반복하고
진노의 그릇이라는 도구는 끊임없는 무한 진노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처음부터 사랑하기로 작정이 된 야곱이며
처음부터 미워하기로 작정이 된 에서이다.

여기에 하나님 자신 또한 이 기능의 주체로써 대상화 되지 않는 기능(이중성)을 구체화 한다.
즉 하나님의 하나님, 하나님의 이중성, 하나님의 차이성, 하나님의 반복성이다.
곧 차이나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다.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 되지 않는 포착불가능한 예수님이다.
도리어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해 끊임없는 십자가의 사건의 반복이 벌어진다.

예수님의 무한반복이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의 무한반복이다. 예수님의 피 사건의 무한반복이다.

자 그렇다면 반드시 이 차이성에, 이 이중성에 반대되는 의미가 나타나야 그 차이성을 더더욱 또렷하게 구별된다.
그 차이의  간격을 벌려줌으로써 어린아이도 쉽게 알수 있는 분명하고 확실한 차이성으로,
입이 있어도 변명치 못할 확정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것들은 사라진다.
남는 것은 유일한 십자가의 피 뿐이다.

바로 십자가의 차이성으로써 나타나야만 하는, 십자가를 대상으로 삼는 것들이 차이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펼치는 자작극이다. 다이나믹한 극화이다.

마귀의 등장 없이는 예수님과의 차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진노의 그릇의 무한반복을 통해서 긍휼의 무한한 용서의 무한반복을 차이로써 격게 된다.

그렇다면 마귀의 무한반복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 마귀가 도저히 벗어날수가 없는 그 맡은바의 일은 무엇인가?
십자가의 무한한 은혜에 대한 거부이다.
긍휼의 거부는 곧 행함의 댓가를 정당화 하는 것이다.
곧 행함과 자신과의 동일성 일치성인데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과 하나님과 같이 된 일치성이다.

이 십자가의 무한반복을, 더 이상 반복되지 않게, 차이나지 않게, 십자가의 십자가로 이중분절 균열 분화 발화 리좀화 욕망화(성령의 소욕) 주체화 되지 못하도록 대상화 로 만드는 것이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은 결국은 성령을 대상화 하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대상화 되는 것을 거부하는, 성령이 주체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또렷하게 정반대로 성령을 대상화로 삼고, 그 성령을 대상화로 삼는 육체의 소욕(나=자아)를 주체로 두고자 하는 것이다.)

자 이렇게 될 때 모든 것은 인간이 주체가 된, 인간의 인간, 인간의 n승, 인간의 무한반복, 인간의 차이성이, 십자가의 반대급부에 자리하게 된다. 극과 극이요 물과 기름 구조요 건널수 없는 간격의 구조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을 못 박는다. 못박는 구조이다. 뚫어버리지 않고서는 다른 소통은 없다. 다른 구조는 없기 떄문이다.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성령의 소욕은 반드시 그 열매를 무한적으로 낳는다. 이중적으로 발현한다. 무조건적으로 열매를 무한반복으로 양산한다.

어떻게 무한 반복이 되는가?

사랑으로써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희락으로써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화평으로써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오래 참음으로써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자비로써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양선으로써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충성으로써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온유로써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예로 모세의 온유 때문에 미리암의 속내가 돌출된다. 그 격리로 다시 구스여인에게 부은 긍휼 처럼,  그 차이성을 실감하고, 즉 심판을 직시하고 다시 긍휼을 베푸니 우리 미리암이 달라졌어요 가 된다. 그렇게 심판 속에서 집어넣어서라도 그 온유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취지이다.)

절제로써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이 9가지 성령 자신의 주도권으로써 인간의 소욕을 말살한다. 늘 실족케 한다.

이것을 감히 가로막을 자가 없다. 금지할 법도 없다.

이것을 다양성이라고 대상화 하는 그 마귀의 시도 조차도 헛된 짖이다.
말씀은 대상이 되지 않는다. 끝까지 주체이다.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런 십자가의 무한흐름 무한차이 무한반복의 적극적인 파괴 앞에서
우리의 육체가 쓰나미에 추풍낙엽처럼 보잘것없이 무능하고 허무하게,
허망하게 쓸려 내려감이 마땅한 것임을 직시하는 것이
구원받은 한 쪽 강도가 죽음속에서 졸지에 뛰어드신 예수님 때문에 보게된
인생 끝자락에서 만난 대박이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종말의 구조였음을, 다 이루셨다 는 미래완료였음을,
육체를 찢는 그 십자가의 이중성 때문에
만나게 된 것이다.

(마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개역)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개역)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2, 개역)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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