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붙이시는 신나는 종말 (죽음, 심판, 전쟁)
성령의 소욕은 육을 후패케 하는 것이다.
즉 육의 소욕을 겨냥하는 심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신나게 달려가셨다.
모든 인간의 육을 이 십자가에 붙이기 위함이다.
과연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심판을 이 육의 소욕들이 통과할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육이 통과하는 꼴을 못 보겠다고
아예 십자가를 모든 인간에게 붙이셨다.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저주를 통과해야 한다.
교회 수십년 죽도록 충성 봉사 했다도 소용없고
수천명을 예수님께로 인도했다고 자부하는 목사의 복음전파도 소용없고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쫏아내었습니다 도 소용없고
그 어떤 것도 인간 쪽에서 내미는 것들이 무용지물임을 소용없도록 하는
이 십자가를 당사자 본인들이 통과해 보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경계로 마귀만이 이 십자가를 못 통과하고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이 십자가를 통과했음으로 인해
십자가는 심판의 기준이 된다.
예수님이 끌어당겼든
마귀가 끌어당겼든
이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기준으로 해서
이 쪽과 저 쪽으로 갈려지는 분류 구분 구별이라는 거룩이 펼쳐진다.
이 참되신 거룩 앞에서, 인간의 행함으로 이룬 거룩 같지도 못한 거룩
죽음도 심판도 저주도 통과하지 못하는 가짜 거룩은
이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를, 이 참거룩이 펼치는 붙이심의 심판에
순금처럼 오로지 피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불순물의 인간의 행함(찌끄래기, 배설물)만이 나타날 뿐이다.
라캉과, 헤겔리안 지젝은 진정한 생산(잉여=유일한 생명인 나눔, 사귐, 소통)은
생산기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배뇨기관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즉 생산기관을 바로 선택해 버리면 필히 실패할 수밖에 없고
배설기관을 선택해야 성공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유대인의 탈무드에서 인간의 눈동자가 왜 검은지에 대한 의문에
인간은 어두운 곳에서 빛을 보라고 인간의 눈동자가 검다고 한 것과 같다.
이런 성화론(개혁주의) 사상은 이를 반드시 실천해 옮기겠다는 마귀적인 발상이다.
실천해버리면 이미 생식기관을 자력으로 선택해 버린 것이다.
결국 도저히 인간은 배설기관을 선택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따나 이것이 더럽겠지 라고 선택해 버리면
이미 잉여를 노리고 선택해 버린 셈이기 때문에
더러운 것을 선택한게 아니라 벌써 잉여를 선택해 버린 것이다.
잉여 자체가 찌끄래기 쓰레기 라는 의미이다. (잔여물 = 배설물)
예수님께서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라고 했다.
내가 아무리 죽음을 선택해서 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 보겠다고 해 본들
이미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살고자 함을 선택하는 꼴이다는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에스더 이야기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지
인간 스스로가 자살을 선택하듯이 자신의 죽음을 가시화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음을 나타낼수 없는 육의 죽음은 정녕 죽으리라 라는 하나님의 저주와 무관하다.
하나님의 저주와 연관된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뿐이다.
감히 어따 가짜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계시킬려고 하는가 말이다.
이방인 나아만 장군에게
그 심각한 피부병을 고쳐달라는 간절한 호소에
똥물에 7번 담구라 라고 하나님은 지시하신다.
즉 6번만 꾹 참고 담궈서 기적처럼 낫게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7번은 예수님의 죽음과 연계된 문제다.
나아만 장군은 그 피부병을 나을 자격조차도 없다는 뜻이다.
그것을 예수님의 죽음과 접촉됨으로써 알게된다.
예수님의 죽음이 넘어온 것이다.
예수님의 회개, 자기부인이 넘어오신 것이다.
그것을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이스라엘 앞에서
이방인을 그렇게 접붙이듯이 다루신다.
이스라엘과의 하나님의 전쟁이다.
이것이 진짜 죽음이다.
이스라엘이 외면했던 전쟁은
여우 피할려다가 호랑이 만난 꼴로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이다.
자신들이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저주 곧 거룩과 대면케 만들도록 한 그 역할이 그 기능이
도리어 자신들에게 향하는 저주로 변하고 말았다.
십자가의 죽음을 저들에게 붙이심으로써 거룩을 펼치는 성령의 소욕이
도리어 이들이 외면함으로써 이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버린 것이다.
이것을 외면하고 그들은 율법을 붙잡는 것으로 대치한다.
성전을 붙잡는 것으로 외면해버린다.
늦게나마 독립운동을 펼침으로써 이 십자가의 죽음을 외면할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미리 제자들에게 이 십자가의 죽음을 매일 매일 공생애 동안 보여주신다.
그러나 제자들도 예수 당신 따라가 줬잖아 라는 것으로 대치해 버린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외면 당할 뿐이다.
그래놓고도 거룩이다고 우기니 원
이 거룩과의 단절
십자가는 이 거룩과 단절된 육의 소욕이 된
마귀의 소욕이 된 자를
십자가의 피로 그 불가능한 소통을
예수님의 믿음으로만 이 불가능한 접촉을 시도한다.
그래서 자꾸 자꾸 죽음으로 내 몰린다.
이 신나는 종말은
우리를 매일 매일 심판으로 몰아넣는다.
누구의 죽음을 보라고?
썩어버린 너희 때문에 소금처럼 녹아져야 했던 그 분을 보라고
어딜 감히 교회를 쳐다보고 자신의 믿음을 쳐다보는가 말이다.
어두워진 너희 눈 때문에 빛으로 오셨어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달려가야만 했던 그 분을
주님은 그 거룩한 분을 죽여서 부정한 우리의 눈을 고치시는 것이다.
이 신나는 종말에 우리를 붙이시는 것이다.
주님이 나의 생명의 은인이듯이
그 빚진 사랑을 계속 계속 매일 매일 보이시고자
주님은 오늘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도하신다.
죽음이 아니면 생명을 알길이 없고
저주의 심판이 아니면 사랑을 알길이 없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을 감사하게도 매일 매일 붙여주신다.
참생명되신 예수님 만을 쳐다보도록 하시는
성령의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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