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을 위한 이방인 취하기 (행 15:12-21)


(행 15:12, 개역)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행 15:13, 개역)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행 15:14, 개역)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행 15:15, 개역)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행 15:16, 개역)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행 15:17, 개역)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행 15:18, 개역)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행 15:19, 개역)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행 15:20, 개역)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행 15:21, 개역)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사도행전은 그야말로 이방인의 탄생을 말하는 시작인 셈입니다. 곧 완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판짜입니다. 그야말로 이방인은 원인 없는 결과 입니다. 처음자리요 무조건적인 사랑이니까요.

즉 이방인을 취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 입니까?


원가지인 이스라엘을 상대적으로 한, 의미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가 바로 잡족이요 이방인이요 고아 과부 나그네 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작 앞에서 이방인 구원은 때려죽어도 못 받아들이는 시기와 질투 문제가 대두 되는 겁니다.

즉 참 제대로 사랑하셨으면(무조건적), 참 제대로된 희년완성이면, 제대로 된 강퍅함이 드러나는 겁니다.


주님이 달라졌어요처럼 (예수님께서 주가 되셨어요? 너희가 죽인 예수님이 주가 되셨다.)

주님이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주의 주 되심을 이루심을 드러내기 위해
온 우주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래서 그 주의 백성 조차도 바뀌게 됩니다. 백성이 달라졌어요입니다.
이제는 주의 주 되심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의 하나나님으로 확장되는 겁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인 이라고 합니다.

즉 그렇다면 심판 조차도 확대 됩니다. 구원만 확대되는게 아니라,

온 우주의 주가 되심을 드러내심입니다. 주의 주 되심입니다.


즉 종말(신약,다 이루심)이란 온 우주까지, 보이지도 않는 마귀까지도 확대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구약은 하나의 뻥튀기 전의 옥수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기계 곧 십자가의 기계 속에 집어 펑튀기를 하니까

온 우주에 이 팝콘이 퍼지기는 것입니다. 웰컴투 동막골의 유명한 장면처럼 말입니다.


이방인을 취한다는 것은 주의 이름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의 기능이 온 우주에까지 그래서 이방세계에 까지 확대되는 겁니다.
심판과 종말의 확대입니다.


이방인까지 구원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이방인을 구원하는게 아닙니다.

원가지도 아끼지 않았듯 이방인도 아끼지 아니하겠다고 합니다.

(롬 11:21, 개역)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즉 이래나 저래나 주의 이름만 주님만 관심두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상대적인 이름 곧 인간이름이나 마귀라는 존재를 염두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귀가 장악한 유대인을 당연히 짤라내는 것은 마땅하다는 겁니다.


마귀가 세뇌시켜서 유대인의 하나님이 가짜임이 예수님으로 인해 들통났습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의 기능입니다.


이 이름만 높이기 위해 이방인(이미 항상 죄인)을 취하게 됩니다.
즉 이 이름에 부합되지 않은 유대인은 짤렸다는 겁니다.
피조물만을 찾지 신이 된 인간은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이 이름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상으로 삼는, 믿음의 대상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을 위해 이방인을 취했듯이

도리어 주의 이름의 대상물이 이방인이다는 겁니다.

유대인도 도리어 새로운 주의 이름의 대상물로써 그 처음자리를 새롭게 봐야할 판국입니다.
그 대표성이 놀랍게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은 사도바울입니다.

이 사도바울이 바로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지는 겁니다.

결국 사도행전의 처음출발선상에서 사도바울이 이 주의 이름 때문에 세워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유대인과의 정면충돌이요 육의 소욕과의 정면충돌인 성령의 소유성을 말하는 겁니다.

과거 구약때에 이방나라가 외칩니다. 아이고 이스라엘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치는구나 꼴좋다
그런 하나님을 말라꼬 믿냐? 너희들을 멸망시키는데? 꼴좋구나 꼴 좋아!!

그 다음 너희 차례거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의 희년완성은 이 성령의 소유성에서 그 차이로 육의 소유성을 대립시키는 겁니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의 소유성을 유대인들이 몰라서 다시 새롭게 드러내는 것일까요?

네 맞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르는 겁니다. 새로운 기준에서의 육의 소유성이기에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소유성에서 뻔뻔하고 당당하게 성령께서는 이 이방인들을 성령의 소욕으로써 당당이 들이대십니다. 유대인들이 당연히 비웃죠!! 아니 육의 소욕이 뭔지를 잘 아는 달인들에게 들이대다니요? 마치 어른에게 어린아이를 들이대시는 것과 같습니다.

골리앗에게 소년 다윗을 들이대시듯 성령 자신의 소유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가 주의 이름을 위한 주의 주 되심을 증거하겠다고 합니다.

개같은 이방인을 앞장세워서 말이지요.


이것은 마치 애굽때에 그 당시 최고의 강대국 애굽 앞에, 노예 중의 노예인 이스라엘을 들이대면서 여호와 라는 이름을 들이대시는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비웃죠. 여호와가 누구관데? 여호와가 누구시냐구요?

이 부재의 민족과, 부재의 나라, 부재의 신, 부재의 신 이름을 들이대는 겁니다. 

없는데 그 없음이 그것도 가장 없음 중의 없음이놀랍게도 가장 있음, 그것도 있음 중의 있음인 그 으뜸의 있음에게 들이대는 겁니다.

말릴까요? 안 말릴까요? 이것이 전쟁입니다. 즉 소욕 단절 충돌이라는 거룩성입니다.

이와 똑같이 동일하게 사도행전 누가복음에서도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 모든 이방인이냐?

여기서 항상 인간은 숫자에 민감해져 버립니다.

즉 숫자에 평생 얽매여 살아 왔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무서워 해 평생 죽음의 종노릇 하듯
그런데 이 숫자개념을 0 제로로 만들어 버립니다. 곧 없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서는 이 없음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없다!! 영구 없다 라고 해도 영구 없다 라고 외치는 영구는 있는 겁니다. 불교가 이 숙제 풀겠다고 난리죠.


이 제로 0은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다.

부재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자들에게 이 예수라는 이름을 들이대보십시오.

피식 콧 방귀를 낍니다. 그런데 자기 이름 곧 인간 이름을 들이대 보세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앞으로 교회 다니세요 라는 등등 상대를 해 줍니다. 소통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이 된다는 겁니다. 상대를 해 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런데 예수 라는 이름은 부재성의 이름입니다. 소통 자체가 안되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종말에서의 단절은 바로 이 예수라는 이름이요 주의 주 되심이란

단절의 단절, 단절 중의 단절이라는 바닥을 향해가는 겁니다.

그러니 이 이름만 들어가게 되면 모든 소통은 단절이 되는 겁니다.
도리어 소동이 일어납니다.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도
예수 라는 이름이 들어가게 되니까 싸움이 밑도 끝도 없이 벌어집니다.

바로 십자가는 그런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증거할 거야 라고 하면 이 십자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겨줘서

많은 사람들과 소통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

철저하게 도리어 배신때리기가 난무하는 단절의 단절을 격게 되는 겁니다.

사도로 뽑히는 이유가 뭘까요? 소통하라고? 천만의 말씀!

단절입니다. 그 단절을 거침으로써 예수 안에서만 소통이 되는 겁니다. 본격적인 전쟁입니다.


즉 예수 라는 이름이 단절이기에, 단절 안에서만 소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말이 안되기에, 행함도 불가능 하다는 겁니다.

단절인데 무슨 소통이냐?

자꾸 단절 단절 카는데 단절이 뭔데? 전쟁이라는 겁니다.


할례 가 바로 이 단절성 끊어냄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끊어내니까 연합이 되는 겁니다. 세례!
홍해가 가로 막혀 단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바짝 다가 와야 합니다.
그래서 애굽군사를 통해 영광받습니다. 홍해가 갈려져서 세례가 베풀어질때에
동시에 애굽군사라는 육들은 끊어짐을 당하는 겁니다. 한 쪽은 살려줌, 다른 한 쪽은 죽음
이 두 소욕이 동시에 드러나야하는 것이 세례의 의미 입니다.

(고전 10:1,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고전 10:2, 개역)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3, 개역)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고전 10:4, 개역)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5, 개역)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세례란 싸움의 본격적인 양상이다는 겁니다. 내것이니까 내것 아닌 것은 꺼져 라는 겁니다.
십일조도 결국 소유성 싸움입니다. 초태생은 다 내 것, 거룩한 것은 이유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 것.

(사 43:1, 개역)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곧 성령은 이 단절성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오로지 성령으로만 교통케 만들겠다는 겁니다.


육이 흉내 낼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초반에


일부러 약올리듯이


유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아닌 

또 여러 이방인 중에 한 명의 이방인에게


복음이 간다고 합니다. 보내심바 되었다고 합니다.


즉 한 번 단절 곧 유대인을 단절 시키고

또 두 번째 단절인 여러 이방인 중에 곧 여러 이방인도 단절


이 이중 단절을 거쳐서 단 한 명의 이방인 과부

단 한 명의 문둥병자 나아만에게


선지자가 보냄을 받게 되는 겁니다. 예수 라는 이름이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럼 그 과부가? 그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이 이 이름 때문에

소통을 격게 됩니까? 아니면 단절을 격게 됩니까


물론 단절을 격게 됩니다. 자기 아들이 죽게 됩니다.

또 7번 똥물에 담그라 합니다.


너는 무자한 과부이다는 겁니다. 넌 문둥병 나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단절 속에서 

오로지 주의 이름 때문에. 보이지도 듣기지도 않은

찾은 적도 없고 부르심바 된 적도 없는 그 이름 때문에


졸지에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 부재의 이름이

죽은 아들을 살리고, 7번 만에 깨끗케 되는 희년 기쁜소식을 듣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름의 기능입니다. 자신의 이름만을 부각 시키기 위해서

철저하게 인간은 대상물만 되는 겁니다.

즉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이 예수 라는 이름만을 드러내기 위해서

태어난 창조물이다는 겁니다. 왜 사느냐? 주의 이름을 위하여 라는 답 뿐입니다.

왜 태어났느냐? 주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아닌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닌 여러 이방인 중의 이방인 한 이방인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어야 합니까?
이 말은 곧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과의 단절을 말하는 겁니다.


한 마리로 말해서 인간에게서의 신이란 인간이다는 겁니다. 레알? 레알!

리얼리? 올레!!


인간에게서의 신이란 인간 자신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이중적인 부재성으로써 예수라는 인자야 말로

이 인간이라는 신을 겨냥한 단절성 곧 종말을, 끝장을 말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은 시므온 선지자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사도 야고보의 의견처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신다고 합니다.


(행 15:14, 개역)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또 선지자 곧 선지서 아모스서에서의 기록을 통해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행 15:15, 개역)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행 15:16, 개역)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행 15:17, 개역)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행 15:18, 개역)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암 9:11, 개역)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암 9:12, 개역)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행 15:18, 개역)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즉 이것은 야고보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서는 파격적인 겁니다.

얼마나 배타적으로 그들에게 대했습니까?

그런데 그 몸에 배인 방식을 하루 아침에 바뀐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베드로의 실수를 계속해서 지적하는 사도바울의 입장은 베드로 라는 개인을 지적하는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사건의 대표성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 지적은 지극히 관계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야고보의 해석은 이방인이 주님께서 찾으신바 되었다는 것은

이방인을 이뻐하라는 취지가 아니라

이방인이 주께 돌아오는 것은 바로

주의 이름을 위한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성령에 적대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일인 겁니다. 본인들도 예수님의 제자라서 사도가 된게 아니다는 겁니다.

제자 중에 가룟유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사도가 안되고 예정된 대로 자살합니까?

그것을 인간 쪽에서 찾을수가 없는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왜 만약 그 원인을 찾으면 야고보와 다른 제자들 곧 다른 사도들 조차도

그 원인이 될 수가 없는 예수님을 부정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이라는 그 부재성에 원인을 두고자

성령이라는 처소를 마련하신 겁니다.

이유없이 무조건 용서하겠다는 겁니다. 왜? 주의 이름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은

유대인 교리가 다 박살이 난다는 겁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90년대 초중반부터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느냐 라는 문제가 한국교계에 이슈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문제는 교회 안과 밖의 기준인 교회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고

과연 구원을 교회가 언급할 권한이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대부분이 뻔한 해석이 나오는 분위기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라고 하니까


교회라는 조건은 날라가고

구원의 주도권이 주의 이름이라는 그 부재성에 달려 버리니까


이 말은 결국 유대교리 자체를 부정하는 식이 된다는 겁니다.

상대적인 의미로써 말입니다.

누가 가장 분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당연히 유대인이겠지요.

그리고 마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처음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렇게 대두가 된 것은

이로인한 사건과 또 헷갈림 또 흔들어대심에 대한

오로지 관계성만 쳐다보기라는 겁니다.

즉 처음자리 보기 라는 겁니다.

그러니 흔들어 대심이 도리어 미쁘신 든든함이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든든합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모른 겁니다.

기존의 질서를 다 깨뜨리는 겁니다.

마치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고

교회가 위기감을 느끼는 겁니다.

사실은 주님의 이름은 전혀 손해 보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위기스럽게 느끼는 겁니다. 불안한거죠.


주의 이름이 멀리 떨어져 있어야 불안하지 않는데


너무 가차이 있으면 이렇게 생계에 위협이 생겨버리게 되는 겁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교회 장사는 쫑났다 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미쁜지 모르는데

자꾸 내 구원, 내 교회, 내 성공, 내 생명이라고 연연하니까 불안 불안한 겁니다.


주의 이름은 그야말로 처음자리입니다. 미끈합니다. 매끄럽게 빠다 기름 발라서

누구든지 이 이름에 앉아버리면 미끄러져 자빠지는 굴욕을 격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이 주의 이름을 치면서 주의 주 되심을 이루십니다.

처음자리가 처음자리를 치면서 그 처음자리를 처음자리 스스로가 유지하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자리가 부재한 겁니다. 없는데 있습니다.
분명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없다 라고 부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이 주의 이름입니다.


이방인은 더러운거 맞습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데 있어서

그 기능을 발휘하는데 이방인처럼 좋은 재료가 없습니다.


그 기능이 뭡니까? 누락입니다. 잃어버림입니다.

그럼 되찾기의 도사가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의 기능에 잃어버린자 죽은자 고아 과부 나그네가 가장 잘 부합이 되는 겁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찾으러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반발하는 교계의 세력을 무지 무지 많이 보아왔는데요

물론 대부분의 교회입니다.

자꾸 죄인이라는 조건으로 보니, 죄인 죄인 카지 마라 의인이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바로 이런 걍퍅함이 바로 죄인도 의인도 하나의 조건으로써 죄인이냐 의인이냐 라고 따지는 겁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돌삐로도 아브라함 자손을 만듭니다.

즉 인간이 자꾸 그것에 부합되어야할 조건으로 보시면 안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죄인이어야 한다. 아니다 의인이어야 한다 라고

자꾸 인간을 넣지 말고

차라리 빼버리세요

인간 빼버리고 돌삐를 넣어버립시다.

그러면 아주 간단합니다. 주의 이름만이 부각이 되는 겁니다.

결국 부재가된 주의 이름이 어떻게 부각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집약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문제이 오늘의 본문에 제대로 모범답안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방인이라는 죄인이냐? 유대인이라는 의인이냐? 라고 따지는게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둘 다 감당이 불 감당이 되는 겁니다.

더욱더 강화가 되는 이중분절의 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의미가 퇴색한다고 걱정하는 척 죄인 죄인 카지 말라 라고 하거나

의미가 달라진다고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풍성케 되는 겁니다.

처음자리가 사라지게 아니라 더욱더 강화가 되는 겁니다.

처음자리가 처음자리를 쳐 버리면 처음자리가 사라지는게 아니라

더욱더 강화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더 나은 제사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 야고보의 시선은 그야말로 종말의 시선인 성령의 시선인 겁니다.


그러니 의미가 퇴색하거나 사라지는게 아니라


도리어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세워지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이 된다고 하니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개판이 된다고 

오늘날처럼 같은식으로 개판이 되고 질서가 파괴된다고 우깁니다.

교회 무너진다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소욕에서는 반대입니다.

오히려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다시 세워지는 겁니다.


왜 이방인을 취할까요?

무너진 다윗 장막 세우기입니다.

즉 주의 이름을 거부한 유대인 짤라내고 이방인을 취해 주의 이름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여기에 어디에 교회를 확장하거나 교세를 확대시키는 것이다 라고 나옵니까?

하도 돈으로 확장하다 보니 교회가 부도가 나서 빚져서 망한 자들이 한 둘이가 아닙니다.


주의 이름이 더욱더 매끈하게 미끄러지게 하는 그 부재의 이름이 세워지는 것이

바로 주의 이름을 위한 이방인 취함입니다.


왜 유대인은 이 의미를 거부합니까?

왜 오늘날 교회는 복음을 거부합니까?


충분히 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무너져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세워버리는 이 주의 이름의 의미를 모르는 겁니다.


그 이름에 의해 충분히 무너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베드로 보세요 무너진 사람입니다. 얼마나 미쁜지 제대로 자빠졌습니다.

사도바울 보세요 무너진 자입니다. 얼마나 미쁜지 제대로 자빠졌습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 앞에서 작살이 났기에

그 이름만 쳐다보는 겁니다.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외칩니다.


교회가 구원한다고요 ? 웃기시네

목사가 구원한다고요 ? 웃기시네


유대교가? 웃기시네


그거 다 시도해 본 자가 베드로 바울 아닙니까? 12사도 아닙니까?

그래서 충분히 망해봤기 때문에

충분히 무너져 봤기 때문에


누가 꾀더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충분히 무너지라고 오히려 사도바울은 싸움을 붙입니다.


충분히 무너진 자에게만 의미있는 이름이기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주의 이름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상처는 그 찌른 창에 의해서만 치료된다고 하는 겁니다.


충분히 찔리지 않아서

치료가 안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 죄인 카지마라 라고 하는 겁니다.

아직 배 부른 거죠.


그 다음 너 차례다 라고 예수님도 빌라도에게 찔려 죽으러 왔는데 말입니다.


충분히 창에 푸우욱 찔려서 깊숙이 박혀 도저히 살수 없는 상황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바닥의 바닥 치는 겁니다. 다른 희망 없습니다.

오로지 나를 찌른 그 주의 이름만이

나를 제대로 찔러서 죽게 만든 그 주의 이름만이

이방인을 취한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충분히 바닥을 쳐버린 그 이방인자리에서
처음자리에서 그를 취하시는 겁니다. 바닥의 바닥을 다 쳤기에.
남 용서 7번 해야 합니까? 라는 그 7번이 바닥쳐버렸으니 이제 용서할 한 번의 기회도 사라진 겁니다.
베드로 인생 쫑난겁니다. 충분히 바닥치게 되는 겁니다. 닭이 3번이나 울어줘야할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490번 용서 받을 길만 남았습니다. 무한대 입니다.
예수님의 목숨 값(일만달란트)인 십자가의 피 가 발려져야 할때까지. 충분히 발릴때까지는 못 깨닫죠.
이것을 비극이라고 합니다. 허무주의 니힐리즘. 그런데 이 비극이 유일한 산 소망이 되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쫑나야, 바닥쳐야, 충분히 피 발리지 않으면 안될정더로 나쁜놈이라는 것을 알아야 은혜속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까? 그냥 용서에 깔려 죽어야 할 정도로 처음부터 이미 항상 죄인이였던 겁니다.
무한대의 용서를 받아야 할 판국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용서의 창에 푸우욱 깊숙히 충분히 찔려야 하는 겁니다. 이미 처음부터 용서 받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내가 십일조이다(예수님이 십일조 되심) 라는 말귀를 못알아먹는 자들이 많습니다.
관계성의 언어인 사귐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문법을 따지는 바벨탑언어에서는 무슨소린지 모르죠.
나의 십일조(개념언어)가 날라가 버려 쫑나야, 주님의 십일조(십자가언어) 되심이 보일테니까 말이죠.
나의 사랑이 쫑나야, 너희가 사랑한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는, 넘어오시는 사랑을 보게 되죠.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것을 응용해 버리면 주여 십일조 얼마낼까요? 7만원?
그것은 베드로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는 겁니다.
70만원만 버니까 7만원 내니 나는 정당하다는 겁니다.
70만원에 7만원 맞죠 맞죠? 주여 난 틀린게 아니죠?!!  이게 사귐입니까?
적어도 사귐이 될려면 이 7만원 맞죠를 거들내면서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 7만원 맞죠 틀린게 아니죠. 저 십일조 제대로 냈습니데이를 지근 지근 밟아버리지 못하는 질투는 사랑이 아닙니다.
왜! 외설성을 밟아버리는 더 나은 외설성이어야 제대로된 사귐의 관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한대 오지기 쥐어 박습니다. 내가 십일조다 이놈아.
내 목숨값 피 값 너의 죄를 단번에 치른값 피 값 일만달란트 이다. 뭐 7만원? 뭐 7번 용서? 장난하냐?
야 이놈아 십일조 490만원 내라 라고 합니다. 일만달란트 내놔!  5천억 내놔! 5천억번 용서 내놔봐!!

무너진 다윗의 장막 세워봐? 세워 보라니깐? 거봐 거봐 못 세우잖아! 내가 3일만에 세우겠다.
이것이 십일조 곧 부활의 첫열매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일조 입니다.
뭐 국어 용법에 안 맞다고? 가이사의 용법에 틀렸다고? ㅋㅋㅋㅋ

(마 22:21, 개역)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요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요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 2:22, 개역)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마 26:61, 개역)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마 27:40, 개역)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막 15:29, 개역)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무너진 장막 곧 죽어버린 몸을 3일만에 세우지도 못하는 주제에? 뭐 십일조 내겠다고?
성전을 사수하고, 뭐 율법을 지킨다고? 에라이 무너져라. 막 성전을 마구 마구 파괴시킵니다.
엉터리인 외설성에 더 더 더 심한 외설성입니다. 육체 해체. 십일조는 육의 소욕 파괴, 성전해체입니다.

7번 용서하겠다는 그 탐심(육소욕)을, 490번 용서의 소욕(성령소욕)으로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불가능으로 말입니다. 불가능성만 제시 하는 것이 복음(선물)입니다.

이것을 어머니께 선물이라는 의미와 막살아라 라는 의미로 알려드렸습니다.

그런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시는 겁니다. 어 490만원 우에 내노?

아뇨! 이 말의 취지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70만원 밖에 못 버는 자가 우찌 490만원 내겠습니까?

너는 도리어 내가 십일조이기에 너는 이 십일조를 받아라 라는 겁니다.

매달 매달 490만원 받는 겁니다. 이 말은 너는 나에게 평생 빚을 탕감받아야 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남 용서할 입장이 아니라 십일조 내어야 할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용서 받아야할 십일조 받아야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일만달란트 비유입니다.
2013년 3월 기준 한국 노동자 월평균 217만원, 
7만원X천데나리온X일만달란트=7천억 천만일의 노동, 2만7천3백9십7년

내년 최저임금 시간당 5210원 일일 5만2천백원  월161만원
5만원X천데나리온X일만달란트=5천억 천만일의 노동, 2만7천3백9십7년

이런판국에 도리어 빚갚아도 모자랄 아니 모잘라도 한참을 모자르는
120년도 못살고 죽는 판국에? 2만 7천년?

그런데 도리어 빚 보다 몇배나 되는 월 490만원씩 받는다고? 십일조 내는게 아니라 십일조 받아?
매일 15만원씩 이나?  월 월급이 4천900만원 받는다고? 그런 직장 있남?
이 말은 그 정도로 너는 용서받아야할 못난이 중에 못난이 이다는 겁니다.
무가치 중에 무가치 하다는 거죠. 선물이란 무조건입니다. 잉여입니다.

즉 일만달란트든 490번 아니 7에 70번 용서는 모조리다 다 예수님의 목숨 값 이라는 겁니다.
이 목 숨 값을 받으라 라는 겁니다. 죄 값 치르는 피 값 입니다.
아낌 없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 값 입니다. 얼마나 더 나은 외설적인 값입니까?

그런데 자꾸 가치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서 겨우 7번 용서하겠다고 구라를 치는 겁니다.

7만원 십일조 내겠다고 구라를 치는 겁니다. 

그럴빠에 490만원 십일조 내겠다고 구라를 치는게 낫습니다. 어차피 둘 다 못내기는 마찬가지이거든요.

네? 적다구요? 네 천억원 십일조 내겠다고요? 네 막 내세요. 9천억 십일조 작정하세요. 어차피 구라인데!
그 정도로 용서 받아야 할 입장이니 말입니다.


백데나리온 빚진자는 빚진게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빚진게 아니기에 용서를 못 보는 겁니다.
충분히 상처 나지 못했기에 그 찌른 창에 의해 치료 받을수가 없는 겁니다. 덜 죽은거죠.

(충분하다는 것은 철학에서는 마주침이라고 합니다. 즉 두 차가 들이박았는데
내 차가 아직 덜 찌그러지니까, 상대방을 못 보는 겁니다. 제대로 충분히 찌그려졌다면
상대방 차가 얼마나 대단하면 이라고 상대방차를 보는 거죠.
우리는 예수님의 목숨값과인 십자가의 피용서 차와 꽝 하고 박아버린 겁니다. 잉여죠. 선물)

이런 성령의 소욕인 입장에서 이방인이 왜 구원되느냐? 라고 따지는 입이 싹 다물어 지는 겁니다.
너도 이방인처럼 이방인의 자리, 처음자리, 용서의 자리,
일만달란트 탕감의 자리에서 건짐받을 입장인데? 뭐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아직 떨 찔렸구나!!! 창에 충분히 깊숙히 푸우욱 사단의 가시에 찔려 봐야 하는데!!
불뱀에게 제대로 물려 제대로 죽게 되었음을 모르기에 뭐 약달라? 쳐다안보겠다? 아직 배 부르구나!

왜!!! 그 다음 차례가 우리 유대인 차례인데? 우짜지?

예수님도 빌라도에게 죽임 당하러 왔는데?

너도 이방인의 자리(쥐뿔도 아무것도 아닌자의 자리) 바닥친 자리에서 다시 구원받아야 할 판국인데?
뭐 이미 구원 받았다고? 배부르구나!!  그럼 가지고 있는 구원 다 거들나 봐라!!!


그러니 교회가 얼마나 배부른 입장이 되었으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느냐 라고 배불러 터진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하게도 얼마나 미쁘신지

그 당시 이후로 교회는 곤두박질 치면서 문 닫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여유로울때는 그런 배부른 소리로

저 실로암 소경이 부모 죄냐 자기 죄냐 라고 신학문제 따지고 하더니

문닫게 될 상황에 처하니까

자기 스스로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진작 그카지 말입니다.

그래서 수제자 베드로는 심심하면 물에 빠뜨려 죽이시는 겁니다.

주의 이름만 쳐다봐야할 판국에

자신의 성경지식 쌓기, 신비체험 쌓기, 구원의 알리바이를 형성하기가

주의 이름 때문에 바닥이 나는 겁니다.

주여 몇 번 용서할까요? 7번?

주님이 확 벗겨버리는 겁니다.

완전히 배불러 터졌구나

너 지금 용서 받아야 할 판국인데

뭐 남 용서하겠다구? 뭐 7번?

내가 그 7번 지워버리고 삭제 시키고 도리어 용서 받음이 490번 무한대가 되도록 하마


그래서인지 베드로는 실수 투성이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놈 사도바울에게 욕 먹질 않나!


그 실수 때 마다 주님의 미쁘시게 490번을 충분히 채우시는 겁니다.

사도 되어도 안 변합니다. 그래서 또 충분히 용서를 채우시도록 하시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완벽합니까? 아닙니다. 여러철학자들이 오히려 가룟유다 보다 더한 모습으로써 철저하게 충분히 바리새인적인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그와 상대적인 주의 이름을 증거합니다.


즉 수시로 충분히 십자가의 반대편에 서서 행동합니다.

그래놓고 주의 주 되심을 외치니

자신들의 행동을 주시하는 자는 올무에 걸리게 되고

십자가의 무조건 적인 은혜를 쳐다보는 자는 도리어 유대인에게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뭐 충성 봉사 하겠다고요? 아직 배불러 터졌군요.

아직 충분히 주님으로부터 섬김을 당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충성봉사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충분히 주님의 섬기심 즉 실족당해 모든 것을 빼앗겨 보면

그때는 충성봉사 하지 말라고 말려도 하게 됩니다. 그것도 기쁘게 말입니다. 억지가 아니라.

그러니 주님의 섬김을 받는 자는 안해도 되는 겁니다. 오직 넉넉히 죽으시리라 만 주의 이름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주의 이름이 이방인을 취한다고 하니

주의 이름을 안 쳐다보는 자는 이방인을 취함이 걸림돌이 되고

주의 이름에 충분히 미끄러져 본 자는 오히려 미쁘심에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둘 다 주의 이름이 벌리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예가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의미로 야고보서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시험하는 분이냐?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험 자체가 시험하지 않는다는 미쁘심이다는 겁니다.


믄 말이지? 시험 자체가 미쁘심이라고?

매를 대심 자체가 사랑이다는 겁니다.

남들은 다들 너 저주 받았구나 매를 대시니까 라고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최고의 사랑이다고 잠잠히 그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잠잠히 묵묵하게 십자가를 지시는 겁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의 최고의 사랑이기에 말입니다.

아니 버리시는게 사랑이라구요? 버림받는게 사랑이라고?


네 사랑입니다.


시험 받는게 어찌 미쁘심이냐? 미쁘심의 반대말이 시험이라고 너가 말했지 않았느냐?


(약 1:2, 개역)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12, 개역)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약 1:13, 개역)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 1:14, 개역)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버림받는데 우찌 기쁘게 여깁니까?

시험받는데 어떻게 미쁘게 여깁니까?

저주받는데 어떻게 복받는 것이다 합니까?


예수님이 나도 버림받으러 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도 시험받으러 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도 저주받으러 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이름이라는 기능입니다.


이방인은 유대인이 하지 못한 

주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이 기능 때문에 취함바 되는 겁니다.


버림받지 못한자들에게 충분히 버림받은바 되는 주의 이름을 위해

시험받지 못한자들에게 충분히 시험받은바 되는 주의 이름을 위해

저주받지 못한자들에게 충분히 저주받은바 되는 주의 이름을 위해


이것이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세우는 주의 이름의 기능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세울 길이 없습니다.

남을 용서할 입장, 그것도 7번용서 할 입장 조차도 못됨에도 불구하고

건물 성전이 있다는 것으로만 성전이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충분히 성전 파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면을 쓴겁니다. 외식합니다.

그래서 충분히 무너뜨리고자 성전을 헐라 라고 합니다.

3일 만에 세우겠다고 합니다.


충분히 저주 받아 본적이 없는 자는 복받을 수 없습니다. 주의 이름이 가로막습니다.

충분히 무너진적이 없기에 다시 세움받을수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유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무용지물이요

오히려 유대인들이 보기에 무용지물인 이 이방인을 취하시는 겁니까?


주의 이름에 충분히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중에 이방인을 찾습니다. 한 이방인.
그래서 여러 문둥병자 중에 한 문둥병자를 찾습니다. 한 문둥병자.
이것은 이중성 이중분절이라고 합니다. 단절의 단절이다는 겁니다.

유대인은 충분히 주의 이름에 충분히 버림받아본적이 없기에
다윗의 장막이 무너져 세우지도 못하면서 꼴에 성전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다시 세우지도 못하면서 그것 붙잡고 있기에 주님이 헐라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3일이라는 간격에 거리두기를 충분히 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거꾸로 보고 있는 겁니다.
단절 당해야 할 자가 도리어 남을 단절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너진 다윗 장막의 다시 세우심의 일에 누락이 되는 겁니다.


이방인처럼 충분히 버림받은바 됩시다. 아멘
그 자리가 우리의 처음자리가 되게 하시는 십자가의 지혜의 은혜인 겁니다. 


(행 2:16, 개역)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개역)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 2:19, 개역)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사 65:2, 개역)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사 65:3, 개역)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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