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함을 영접하라? (눅 9:40-48)



(눅 9:40, 개역)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눅 9:4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눅 9:42, 개역)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눅 9:43, 개역)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눅 9:44, 개역)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눅 9:45,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눅 9:46, 개역)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눅 9:47, 개역)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눅 9:48,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선물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기쁨이란 심적으로 볼 때 상승작용입니다.

반대로 슬픔은 심적으로 하락작용입니다.


기분이 업 되고 격양이 되면
기쁨이 되고 웃음이 되고 신나는 즐거움이 됩니다.

노래가 그런 식으로
아픔을 잊을 정도로 작용하는 고통을 싹 잊게 하며

즐거움이 되고 합니다.

아무리 주변 상황이 웃음이 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미소와 웃음이 나오도록 노래가 되며 즐거운 신나는 기쁨이 된다는 것은

그때의 환경의 전복

즉 기쁨의 요소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전혀 이 두 요소가 안 맞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이 그러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슬픔입니다.


죽는데 누가 기뻐해 보세요

누가 웃어 보세요

예의도 아니며 버릇없고 싸가지 없음이 되는

반대의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죽는자가, 죽는 본인이 웃음과 기쁨으로 가득찼다는 것은
그 죽음을 보는 자나
스데반을 죽이는 자나
그 내용을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사람들이나
다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웃어라 라는 겁니다. 울지 마라 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그 상황에서의 외적인 곳으로부터 온 선물 때문일 것입니다.
은혜 곧 창조가 그러합니다.

그야말로 기쁨과 웃음으로만 가득합니다.
선물 받는 자 중에 우는자도 화내는 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로

여성이 아이를 낳을때에 창조자의 기쁨이 덮쳐진다고 합니다.

즉 생명의 탄생이

소위 인간의 고통 7에 해당하는 그야말로 너무 너무 아픈 와중에도

생명을 안았을때에

그 고통은 언제 그랬냐는둥 싹 잊게 됩니다.


남성이 그 모습을 보면 도통 이해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 속에서의 또 다른 인간이 나올때에

마치 내장이 다 튀어나올 듯이 참으로 역겹고 처참한 상황이겠지만

생명이라면 이것은 다른 의미가 되는 겁니다.


어둠 속에서 나오는 빛을 향한 어둠을 뚫고 나오는 해방이요

구원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은 이 선물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여자 혼자서 아기를 생산 할수 없기 때문에

아기라는 선물로 통해서 창조의 기쁨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여성이 아기를 낳는 주체가 되는게 아니라

반대로 아기가 이런 여성에서 선물을 선사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말입니다.

오히려 고통만을 7을 당할 뿐인데도 말입니다.
첫아이의 출산 고통이 7.5인데 그 보다 큰 기쁨의 8이상이어야 싹 잊게 되는 겁니다.

결국 히스테리는 이랬다 저랬다 아픔과 기쁨이 오락 가락 하는 것은
고통 지수와 기쁨의 지수가 서로 들락 날락 하기 때문인 겁니다.


그러니

여성 몸 자체는 이 선물을 받고자 하는 몸으로써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끊임없는 생명력인 선물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을증으로 빠지게 됩니다.
우울증은 바로 생산력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남성은 그런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남성은 전쟁할수 있는 몸으로써 태어난 겁니다.


말투, 행동, 언어, 눈으로 인지하는 시각적인 모든 의식들 등등
모두가 다 전투에 동원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몸 즉 기계(기능)입니다.


즉 강박증은 무조건 적을 이겨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성으로 치면 생산력입니다.

즉 적으로부터 전쟁에 승리하여 그 전리품을 선물로써 주는 역할입니다.

이 전리품이 없으면 여자도 아기를 키울수 있는 환경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이 육체라는 기능에 갇혀서 발산하게 되는 한계점입니다.
베드로는 금과 은 나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내게 주니 곧 나사렛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라고 합니다.


아니 이름이 여성의 출산력과 남성의 전리품 획득을 훨씬 넘어서서
죽은자를 일으키게 되는 창조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즉 기쁨이요 선물인 겁니다.


두 여성이 있습니다.

두 언약입니다.


아들 준다 해서 받은 선물이 하나는 이스마엘이요

또 하나는 이삭입니다.
그런데 이 잉여의 선물이

잉여가 잉여를 침으로써 더욱더 잉여성을 만개시키는 방식이 십자가 라는 선물입니다.


분명 아버지는 하나 입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두 아내가 각각의 아들을 선물 받음으로써
이 잉여가 충돌하게 됩니다.

잉여가 잉여를 치는 방식이

분명 모든 민족은 땅에서 난 음식만을 먹도록 되어 있는데

유대인만큼은 하늘에서 내린 음식을 먹은 유일한 민족입니다.

만나입니다.


그 만나 라는 선물을 아무리 축적할려고 해도 축적이 되지 않는

하루 살이 같은 하루치 양식, 일용할 양식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유대인에게 새로운 양식이 주어집니다.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이 살과 피를 먹으라 라고 했을 때

내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했을때에


기적으로 보고 그렇게도 많이 따르던 유대인들이

만나를 먹었다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어떻게 먹냐고 거부하고

다 등돌리고 돌아서 버리는 겁니다.


즉 만나를 먹고도 너희 조상들은 죽었지만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죽지 않는

영생케 하는 양식이다 라는 말에


만나라는 잉여를 주의 살과 피라는 잉여가 치는 겁니다.

주께서 내 주께

주가 주를 치시는 겁니다.


그림자(만나)를 몰아내지 않으면

실상(주의 살과 피)을 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만나를 먹었기에

주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더욱더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그 반대로 오히려 만나를 먹었다는 이유로

주의 살과 피를 절대로 못먹게 되는

유대인들이 가장 반발하는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방인이 이 주의 살과 피를 맛나게 먹는 겁니다.


형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되었고

동생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된 것이

이런 상황과 같은 겁니다.


이 갈라짐은 그 어떤 이유로도 하나로 일치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가르고자 하는 토기장이의 의도 때문입니다.


자 지난 시간에 귀신쫏아냄이나 병고침

또 베드로처럼 앉은 뱅이를 일으키는 기적 등등은

그 출처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의 살과 피를 넙쭉 넙쭉 마심 때문입니다.

피를 발라주심이요

은혜를 베푸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마셨을 뿐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의미는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았다 가 아니라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것도 행동을 한 것이지요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지켰으니까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이시는 그 일하심에


그 어떤 보탬을 준게 일체 없다 라는 겁니다.


여성은 생산력 (히스테리)

남성은 전리품 획득 (강박증)


이런 요소가

십자가 가 다 이루어졌을때에 그 어떤 보탬도 된 적이 없는


그저 따로 독자적으로 각각 펼쳐졌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는 전혀 나와는 무관했다는 겁니다.

나의 아이디어도 아니요

내가 의식한 적도 없고


그저 나는 평상시대로 즉 육체대로 히스테리 부렸고 강박증에 시달렸을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데

이 십자가 라는 선물이 뚝 하고 하늘에서 떨어져서
꽝 하고 부딧히세 되었으니

가루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선물이라고 하니

왜 선물인가를 예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일으키고 엘리야를 일으켜서

자신의 죽음 곧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내려오자

제자들은 그 변화산 아래에서

그 관경을 보고 자기도 무슨 소리를 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신비함에 빠져 집 세채를 짖겠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기쁘다는 표현입니다.

선물을 봤다 라는 거죠.


그런데 그 기쁨이 싹 사라질 정도로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가 제자들에게 아이를 고쳐달라고 했을때에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면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의 차이를 격어야 하기에

패역한 자리

믿음이 없는 자리에 놓여져야 하는 겁니다.

욕먹는 자리죠.


기쁨도 잠시

도저히 귀신들린 아이를 고칠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고서는 아주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자 여기까지 사건이 이상하게 중첩이 되어 있습니다.


1 변화산 예수님 얼굴이 변형 됨

2 모세의 예수님에게 죽음 요청

3 베드로의 집 세채 바치겠다는 본인도 모르고 나오는 외침

4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의 간청

5 제자들 못 고침

6 책망 당함

7 귀신을 쫏아내고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심


이 사건이 후다닥 지나가는 겁니다.

위의 순서대로 후다닥


분명 뚝뚝 끊어지는 단절의 별개의 문제인데

어떻게 하나로 연결 지을수 있습니까?

왜 이런 순서로 나열이 되는 겁니까?


왠지 지그재그 식으로 사건이 나열이 됩니다.

순서가 문제가 아니라

저는 생각해 보기를 하여튼 안 맞게 잘 어울리지 않는 사건전개이다는 겁니다.

어떤 순서를 해도 마찬가지인

참으로 잘 안어울리는 사건 전개이다 라는 취지로 말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관통하는 주체는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겁니다.

변형되심도 그렇고

귀신을 쫏아내어 병고침도 그렇고

제자들이 책망받는 이유도 그 근원이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고

자꾸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연관 시켜서 말씀하시는데

인간은 일단은 죽음은 별개의 문제로써 따로 떼어놓고 있다는 겁니다.

전혀 의식을 하지 않는 소홀히 여긴다는 점입니다.

의식을 해도 마찬가지 소홀히 여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몸 자체가 그러니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책망 받는 것은 필연적이고

예수님의 죽음은 아무리 우리 쪽으로 인간 쪽으로 제자들 쪽으로 끌어당겨 본들

우연이다는 겁니다. 안 잡혀요 안잡혀

포착 불가능인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선물은 이 포착불가능한 예수님의 죽음 곧 십자가로부터

빼앗김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잉여를 치는 잉여를 누려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만나(잉여)를 치는 예수님의 살과 피(잉여)를 먹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 그런 입장에서 큰 자 논쟁이 또 전혀 사건진행에 안어울리게 마치 별개의 문제로써 사건이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안 곧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는 아주 아주 오히려 더욱더 자연스럽게 증거 되고 있습니다.


(눅 9:44, 개역)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눅 9:45,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눅 9:46, 개역)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인자의 죽음을 깨닫지 못하게 숨겨버립니다.

말했는데 말한 것이 숨김이 되는 겁니다.

말하면 공개되는 것인데 도리어 숨겨지게 되는 것이니

이 얼머나 단절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나라 비유가 다 그런 식입니다.

분명히 말했는데 더욱더 숨겨진 비밀이 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수수께끼 비밀이 되는 거죠.


말을 함으로써 더욱더 은폐가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서는 또 전혀 무관한 제자들 간의 누가 크냐 라는 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자 그런데

은폐된 말 곧 숨겨진 비밀이 되었기에

제자들의 누가 크냐 라는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이

무능한 어린아이를 하나를 그들 가운데 세우시는 것입니다.


누가 크냐 즉 남자들의 강박증과 같은 그 싸움에
아이란 멀리 멀리 동떨어진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반대로

전쟁에 젖먹이를 그 가운데 세웁니다.


젖먹이 보다 강한자 있으면 나와보라 라는 겁니다.

진짜 전쟁은 강한자 한 명으로 게임 오바 됩니다.

평화 곧 전쟁을 종결시키는 최종 종결자는 강한자입니다.
그것이 바로 젖먹이 라는 겁니다.


그럼 웃죠

애들은 가라! 어떻게 전쟁에 참여 자체가 안되는데?


(시 8:2, 개역)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런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라고 하니까

어린아이 행동 하면 어린아이가 되는 겁니까?

그럼 어른의 입장에서 어린아이는 과거에 자신이 거쳐갔던 모습입니다.

과연 과거로써의 어린아이 입니까?

자신이 경험했던 그런 과거의 어린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겁니다.

이 어린아이가 크다 작다 라는 논쟁을 종식시키는 

전쟁의 종결자 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결국

이렇게 어렵고 헷갈리고 도통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만나를 먹었던 자도 다 거부하고 등돌리고 가 버리게 하는 

그 소리들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보면

하나도 어려운 말들이 아닌 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이 출처로써 듣지 못하면

도통 무슨소리인줄 모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모두다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써 하시는 이야기이다는 겁니다.

그럼 그 소리들이 귀에 들린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연결된 자들인 겁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서야

베드로는 금과 은이 없어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치는 겁니다.

또 아나리아 삽비라 부부도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래놓고 자신은 이방인과 함께 손으로 먹는 것이 역겨워 피해버린 것을

새파랗게 젊은 사도바울에게 책망 당하기도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는 전혀 모순이 되지 않는 일이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 살아서 펼치시는 일들이기 떄문입니다.

자기 일들이 없어요 없어

피가 살아서 펼치는 일이니

피 속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피 밖에서는 모순 천지요

도통 안 맞는 일들 뿐인 겁니다.


즉 피가 거부하고

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처음자리

처음사랑이

즉 십자가죠

십자가가 안 알려주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성령이라는 선물을 받지 않는 이상

이 모든 것은 무슨 소리인지 알길이 없는

비밀언어로만 채워져 있으니

괜히 풀겠다고 나서는 순간

믿겠다고 나서는 순간

미끄러져 버리는 겁니다.


마귀 쫏아냈다고

마귀의 유혹을 이겼다고 외친 순간

시험 들어 제명이 되는 거죠.


유대인들이 먹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훨씬 능가하는 선물인데

그 무한 선물인 실체 앞에

그림자 선물 즉 포장 껍데기를 들이대고 있으니

기쁨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기쁨은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유가 있으면 기쁨이기는 커녕 슬픔일 뿐인 피곤함입니다.

모든 상황을 전복시켜버려서

그 어떤 아픔도 슬픔도

순식간에 엎어버리는 겁니다.


언제 그랬는냥 즐겁고 신나게 노래 부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

기쁨의 노래를 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노래를 들어버렸기에

남들이 듣지 못하는 그 노래를

주께서 부르시는 그 아름다운 노래에

두 패로 갈려져

우리는 화답할 수 밖에 없어서

너무 너무 기뻐서 아니 부르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런 어린아이의 호산나 찬양에

그런 두 소경의 청년의 다윗의 자손이여 라는 기쁨의 외침에


비로소 화내고 짜증내는

시끄럽다고 불쾌감을 드러내는 자들이 발생하는 겁니다.


분명 별개의 문제였는데

십자가에서는 반드시 나타나야만 했던 구조였던 겁니다.


이 모든 바탕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죽음을 충실하게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를 충실하게 다 이루시고

또 그 십자가를 증폭시키심도 오직 예수님 자신의 숙제만으로써 오늘도 충실하십니다.


아무도 여기에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누가 크냐 작냐 라는 그런 속내만을

이 죽음의 충실함 앞에서 들통나는 선물을 받을 뿐입니다.


(눅 9:48,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이 어린양의 죽음을 영접할 자 누가 있겠습니까?

없기에
아무도 없기에

어린양은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으로까지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섬김을 무시하지 않도록

그 젖먹이라는 강한자를 영접할수 있도록

내 눈을 내 귀를 고쳐 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세(죽음)를 소홀히 여김 (눅 9:35-45)

2013/12/06 18:33 in 성령행전(피활동,인간극복)

 

예수님의 별세(죽음)를 소홀히 여김 (눅 9:35-45)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심



(빌 2:8, 개역)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개역)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개역)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개역)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눅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 9:36, 개역)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눅 9:37, 개역) 『이튿날 산에서 내려 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눅 9:38, 개역)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 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눅 9:39, 개역)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눅 9:40, 개역)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눅 9:4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눅 9:42, 개역)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눅 9:43, 개역)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눅 9:44, 개역)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눅 9:45,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지난주와 이번주에 걸쳐서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가짜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의 차이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짜와 진짜가 있다니?

아마 마귀가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라고 보겠지만

아닙니다 라고 했습니다.


가짜 하나님을 만드는 원인자는 바로 예수님 곧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입니다.

가짜는 아무나 가짜를 만들어 낼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언약적으로 가짜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유대인을 충분히 이해해야할 입장이어야 합니다.

즉, 도저히 예수님 쪽으로 넘어갈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막아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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