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 해야만 한다는 부조리


욥과 다윗이 자신이 태어난 생일을 저주하고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고 한다.

태어난 것 자체가 부조리 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깨달아서?


아니다.

태어남의 반대인 누구의 죽음을 보고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욥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태어남의 부조리를 알게 된다.


숨쉬는 것도 부조리요
살아있다는 것 자체도 부조리임을 말이다.


다윗은 더 심하다.
이스라엘의 왕 다움을 펼치기 위해
율법대로 4배가 갚으라고 적용한다.


지젝은 다윗은 결국 딸같이 여기는 가난한자의 양을
부자의 손님이 아닌 마귀라는 손님을 대접하고자
가난한자의 딸 같이 여긴 양을 죽였다고 했다.


주를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는
양을 죽였다. 예수님을 죽였다.


비로소 부조리를 알았다.
율법을 지키겠다는 자체가 부조리요
모친에게서 태어난 자체가 부조리였음을


이 부조리 때문에


예수님은 부조리 보다 더 한 부조리인 십자가로 일관하신다.


죽으면(부조리) 죽으리라(부조리)


부조리의 부조리


인간은 뛰어넘지 못하지만
주님은 능히 하신다.
부조리 그까이거 뭔데?


부조리의 바닥 한번 뜯어봐????


없네!! 별거 없네 뭐 !! 뭐가 심각한데? !!!


예수님은 괴물이다.


인간의 부조리의 바닥까지 다 뜯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생존해야 한다는 부조리
나는 태어났다는 부조리


이런 말도 안되는 부조리에


이것보다 더 심각한 부조리는
그런 나의 죄(부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부조리
그런 나의 모든 죄(부조리)를 허물치 않겠다는 십자가의 용서라는 부조리


곧 피의 부조리 이다.


부조리의 부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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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제사와 시공간성(역사)


가인이 왜 가엽게 보이는 것일까?

가룟유다가 왜 애처롭게 보이는 것일까?


만약 존재에게 부과된 시공간의 시점에서 본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충분히 만회할 가능성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공간을 빼버리게 되면
이것은 불가능이요
단절이 되는 셈이다.


시간을 줘봐라
기회를 줘봐라
환경의 공간을 줘봐라
그러면 인간은 달라질수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이다.


성령을 안 받아서 그렇지 성령을 받게 된 시대는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성화론 그것도 자칭 아주 아주 수준높은 성화론자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성령은 결국 가능성의 세계를 연 것이다.


그런데 성령 자체가 시공간을 누락한
단절의 세계이다.
불가능성의 세계이다.


이것이 가능성의 세계 보다 더 초과과잉의 가능 능치 못할 일이 없게 하신다.


왜?
단절이기 때문이다.
용서의 왕 일만달란트 탕감은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보여준 사랑이다.


그런데 이 사랑을 정작 받을 재간이 인간 쪽에는 없다는 단절이다.


용서 받는 자는 누락된채 용서의 왕만 부각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용서 받을 만한 죄인의 괴수 곧 하나님의 원수가 없다.


다들 잘 난 의인들 뿐이다.


믿을만한 믿고픈 것만 골라 믿으면서
용서 될 만한 것만 골라 용서 운운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원수요, 죄인 중의 괴수임은 들통나지 않은채


취사선택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유라고 강요된 선택에 빠져있다.


성경 전체의 성화는 거부한채
골라 먹는 성화만을 따로 챙긴다.


어떻게 보면 성화론은 가인 제사의 반복을 주장하는 고집이다.


그냥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 되는데 말이다.


어느새 교회의 지위가 올무로 작용한 것이다.


빨랑 누락 되어야 할 것인데
사수할려고 하니 더더욱 완고해질 뿐이다.


그래서 가인은 제사를 멈출수가 없다.
마침도 없다.
그저 의문의 짖을 그 모호한 짖을 계속적으로 해야만 하는
시지프스의 신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만약 가인이 그런 운명에서 벗어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가능한 기회를 가졌다고 치자 곧 시간으로 공간으로 본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아주 아주 간단하다. 두 운명 뿐이기 때문이다.


아벨처럼 죽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생 아벨에게 죽어야만 한다.


결국 불가능이다. 미래완료의 소급이기 때문이다.


미래완료가(묵시)가 역사라는 존재 곧 가인의 존재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벨은 이유없이 예수님을 쳐다본 운명이고
가인은 그 수천년 뒤의 인물을 볼 재간이 없는 운명일 뿐이다.


처음부터 그런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들 존재 보다 먼저 앞서 있었던 두 나무의 기능처럼 말이다.

선악나무와 은혜나무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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