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실수와 간극(믿음) (17:11-19)

 

무익한 극소차이를 벌리는 희년(은혜의 날)

 

(17: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7:12, 개역)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7:13, 개역)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7:14, 개역)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7:19, 개역)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지난 시간에 무익한 종이란 하나마나 한 것을 원하는 자 라고 했습니다.

즉 실패로 돌아가자 사도에게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실패해야 시선이 바뀌는 겁니다.

실패가 곧 성령이다는 뜻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다른노선을 보자 라는 겁니다.

 

그 다른노선인 차이나는 노선이 바로 세미한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엘리야에게 자신을 나타낼 때 큰 지진 큰 폭풍 큰 위로에 함께 하시지 않고

세미한 음성 곧 듣기나 마나 한 있으나 마나한 소리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극소차이 곧 차이나는 간격이라는 겁니다.

실패를 통해서 그 실패 속에서 피어나는 차이성을 발견하는 겁니다.

전혀 다른 노선이 있었다는 겁니다.

세미한 음성이 있었다는 겁니다.

 

큰 지진 큰 폭풍 속에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의 노선이 바뀌어

전혀 다른 세미한 음성 속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유대인 전체의 사고방식을 사실상 뒤짚어 엎는 겁니다.

마귀가 장악한 유대인의 하나님에 대한 사고방식은 바로

큰 지진 큰 폭풍 큰 기적 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표적이고

주님이 보여주시고자 하는 표적인 요나의 표적이라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는 걸림돌입니다. 원치 않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 마나 한 것이다는 겁니다.

 

그 있으나 마나 한 것은 인간들은 필요없다고 건축자들이 쓸모없는 돌로써 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돌이 머릿돌이요 모퉁이 돌이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건축기술자들이 쓸모가 없어서 버렸는데

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느냐 말이죠.

 

이것이 모순이요 배신이요 간격이다는 겁니다.

 

 

내가 아무리 봐도 쓸모없다고 죽여버린 자가

그것도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는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자이기에

연자맷돌에 사실상 빠뜨릴 정도로 그 정도로 무가치한 자였는데

그 가치 없는 무가치한 자가

 

나를 창조하고 나를 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지옥바다에서 건져내실자 이다는 겁니다.

 

이 모순의 간격을 그 어떤 이유로도 좁힐수가 없고

그 원인 없는 결과를 원인을 찾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용서인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복음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다면

이 이방인을 저 유대인과 차이를 내는데 있어서

이 이유없는 무조건적인 용서에

즉 이방인에게 곧 지옥백성이요 흑암의 백성 사망에 주저앉은자에게

희년 곧 은혜의 날을 베푸는데 있어서

 

유대인의 반발성은 그들의 정통성에 그 뿌리는 둔다는 겁니다.

결국 이방인은 그냥 들러리고 주체는 희년으로써 희년 자체가

예수님 나라 비유 자체가 유대인의 정통성을 뒤짚어 엎는데 있어서

반드시 동원이 되어 주어야 할 입장에 놓인

차이를 말하기 위한 도구로써 동원이 되는

희년 반대편인 겁니다.

 

희년은 이방인에게 베풀어지고 그것을 다시 희년을 거부하는 자는 유대인으로써

그 차이의 간격에 동원이 되는 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긍휼을 설명하고자

야곱은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된 것처럼 말이죠.

 

그럼 우리는 자꾸 사랑 받냐 못 받냐만 신경 쓸게 아니라.

지옥간 부자에게 아브라함이 말한 그 내용을 더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보이지도 않는 큰구렁이 또는 큰 홀 큰 구멍 큰 간격을 말하는데 있어서

왜 이것이 지금 현대의 종교인이나

또는 지옥간 부자나

또는 지금 누가복음에서의 유대인이나

다들 한결 같이 보이지 않고

무시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인데

 

그 이유는 요나 본인도 이것을 무시하다가

자살시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본다는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불가능하다고 정당한게 아니라

못 보면 우리의 눈은 가짜 눈이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짓의 눈이며

엉터리 눈으로 타인을 인도하겠다고 나서게 되는 꼴인데

그 대표성이 바로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요

바로 우리의 모습인게 된다는 겁니다.

 

요나 니 도 못 보면서 무슨 선지자냐 라는 겁니다.

 

선지자가 할 일은 딱 하나 이것 밖에 없습니다.

회개시킨다는 의미도 이것 하나 만을 말하는 겁니다.

 

바로 간격을 말하는 겁니다.

 

자꾸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있어야 한다는 있음을 주장한다는 데 있어서

엘리야든 요나든 다들 한결같이 주장을 합니다.

 

그것은 간격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 거죠.

 

간격이 주체인데 엉뚱한 것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실패케 만드시는 겁니다.

주체를 다시 설정하라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주체를 주체로 설정하지 말고

그 반대를 위한 반대로 주체를 설정하라는 겁니다.

 

그것은 엉터리 가짜 예수 라는 겁니다.

그 가짜 예수 속에 인간은 자신을 반드시 투사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진짜 하나님은?

남이 아닌 나를 누락 시켜 버리는

나를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만드는 그 당사자

곧 배신자죠 그 배신자가 바로 진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남이 아닌 나를 치시는 자이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남이 아닌 나를 적으로, 원수로 삼는 자입니다.

저들 악마들 저들 적들을 하나도 손대지 않고

도리어 나를 제일 먼저 치시러 돌격하는 나를 돌파하는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나를 구멍을 뻥뻥뻥 뚫어버리는 거죠.

 

그러고 난 뒤 아무런 가치가 없을 때

무익한 종이 되었을때에

 

나를 친 근거로

왜 우리 아들 건드리로 라고 저들을 치시는 겁니다.

우와 뻔뻔스럽죠

도대체 누구편 입니까?

 

저들 적군 편이면 적군 편이던가?

아니면 내가 하나님 편에 서서 일하면 나와 함께 하시던가?

 

그런데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닌 히스테리 하나님처럼

요랬다 조랬다

 

거기서 그만 엘리야나 요나가 시위 안하고 싶어도 시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맞습니다. 속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잔머리로는 도통 이해 할래야 이해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배신과 속임수를 당하면 아예 마귀 편에 서 버리던가

나는 그냥 그 꼴 보기 싫어서 콱 죽어 자살해 버리고

이러면 참 좋을텐데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고 반드시 끝까지 나를 살려내시고

내가 보는 코 앞에서 마귀와 그의 편들을 아작을 내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또 입이 쑥 들어가 할 말이 없게 만드시는 겁니다.

 

입이 있어도 눈이 있어도 귀가 있어도

소용 없게 되는 셈입니다.

나의 정당성을 확보할려다가

괜히 나 혼자만 심각했던 겁니다.

 

엘리야가 그런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라는 계시적인 존재물을 자꾸 인간의 시선으로 파악하지 말라는 겁니다.

나를 내 스스로 내 존재를 파악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이란 뭔가 자신의 가능성을 느끼면 맘껏 자신감을 부렸다가

뭔가 꺽여서 극도의 결핍을 느끼면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식입니다.

 

그러니 그런 인간에 일을 맡긴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 가계를 맡기는 식이 되는 거죠.

 

그런 고양이인줄 뻔히 알면서 왜 맡기시는 것일까요?

 

뻔히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닭울기전에 부인할 것인줄 뻔히 알면서도

왜 수제자로 삼으셨냐 말이죠.

 

바로 그 이유로 수제자 삼으시는 겁니다.

즉 세 번 닭 울기 전에 부인 할 줄 아셨기에 수제자 삼으신 겁니다.

 

이것이 우리는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납득이

즉 납득이 가 되길 바란다는 자체가

간격을 좁히고 싶고

주님과 나 사이에 그 어떤 트릭이나 속임수 거짓이나 사기쳐 등쳐먹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믿음으로 다져지길 바라는데

바로 그 믿음이 정작 사기이다는 겁니다.

 

주님은 주님의 믿음만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간격입니다.

간격 좁히는게 아니라 간격을 벌림으로써 그 간격 속에서

우리를 우리 답게 지탱케 하시는 겁니다.

 

즉 그 간격이 뭐냐

닭의 울음입니다.

닭의 울음이 베드로를 지탱케 해주는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닭의 울음을 빼먹고

그 걸림돌을 거추장스럽게 치워버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성질이 급한 요나는 3일 길을 하루 만에 니느웨 성을 다 돌아 뺑뺑이 도는 겁니다.

 

그 간격 따위는 필요가 없다는 거죠.

 

무시 받은 겁니다.

 

그 무시 받은게 바로 이루 말도 못할 초과잉의 잉여였던 겁니다.

그 간격이 니느웨 백성을 회개케 했고

요나도 자복케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것이 더 더 더 나쁜것이다고

나는 그 나쁜 짖에 동참할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큰 물고기 뱃속에서 건짐 받아서 구원은 여호와께로 찬양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줄 몰랐다는 것이 바로 요나의 삐치는 사건 속에서 그대로 나타나니까 말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항복시켰습니다. 라고

왜 귀신이 주의 이름에 항복한 것인지 알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이름이 졸지에 주문이 되어 버리고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효험있는 법궤 뒤에 숨으면

경험 속에 있던 그 경험이 다시 반복이 된다고 믿었던 겁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나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주의 이름을 붙들고 주의 언약궤를 붙들었으니 말이죠.

 

이것이 우리 속에 늘 끊임없이 반복되는 종교성 아닙니까?

자기투사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주님 스스로가 배신 때리지 않으면

누가 빠져 죽겠습니까?

연자맷돌에 빠져 죽게 될 판국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이런 식입니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서로가 서로에게 연자맷돌 씌우고 있는 겁니다.

 

다 지옥에 빠져 죽자 라고

 

답답한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래서 닭을 세 번 울게 하신 겁니다.

 

이 비천한 닭이 우리를 깨우는 겁니다.

들을 귀 있도록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못 보는 것을 닭이 대신 보고서 울어야만 했던 겁니다.

당나귀 사건 아시죠?

당나귀가 오죽 답답하면 말을 다 합니다.

 

안 돼 ~~~~~~~~~~~~~~~~~~~~~~~~~~~

 

 

나는 보이는데 왜 나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은 왜 못 보고 있느냐 라는 겁니다.

검을 들고 있는 주의 사자 안 비이니?

 

그래서 나 보다 비천한 자가 대신 울어야만 했던 겁니다.

 

다윗 왕을 소경의 자리에서 눈뜨도록 눈을 열어준 것은

왕 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세미한 음성 곧 다윗 왕이 부자처럼 마귀를 대접하고자

가난한 자의 딸 같이 여기는 어린양 곧 보잘 것 없고 전재산이며

가족 같이 여기는 그 어리다 어린 양 한 마리가

 

수백마리의 살진 양을 가지고 있던 부자인 다윗이 마귀를 대접하고자

강도짖을 하는 그 다윗을

 

어린양이 눈뜨게 하고 못듣던 세미한 음성을 듣도록 닫힌 귀를 열어주는 겁니다.

 

그 보잘 것 없는 있으나 마나 한 박넝쿨 잎사귀 하나가 요나를 살리는 겁니다.

 

니가 보기에 저들 니느웨 백성이 보잘 것 없는 마땅한 망해야 할 개같은 이방인 백성이고

너의 뜻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신경써서 이스라엘만 회개케 만들어 주의 뜻을 행하소서 라고 바라지만

 

나는 너가 보는 저 니느웨 백성도 아낀다 라는 겁니다.

 

즉 용서의 용서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이 박넝쿨로 너 같은 보잘 것 없는

있으나 마나 한 너 요나도 박넝쿨로 살리겠다는 겁니다.

 

주님이 아끼겠다는데 니가 왜? 힐문하느냐 라는 겁니다.

 

즉 너도 용서 받아야 할 대상물의 위치이지

남을 용서하거나

유익한 종이다고 따질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마땅히 무익한 종일 뿐이다는 겁니다.

있으나 마나 하나 마나 한 존재인데

그 어떤 자신의 정당성이 아예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도 마땅히 용서 받아야 할 입장인데

구원 받았다는 전제를 깔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의 구원이다는 겁니다.

 

에이 그런 구원일 것 같으면 싫타 있으나 마나 한 구원 아니냐?

마땅히 당연한 구원 달라 라는 식이 요나의 시위였던 겁니다.

 

사실상 이런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는 더 확대 확장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역시나 현재의 우리에게서도 수시로 벌어지는 사건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십자가를 무시하기 때문에

십자가 스스로가 우리의 대상물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주체자로 나서서 우리를 무익한 종으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수시로 만드는 사건을 벌인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자 그럼 본문으로 들어가서

 

반드시 성령의 일은 간격입니다.

 

저쪽과 이 쪽이 갈라져 분리 되었다고

내가 진노의 그릇이 아니라

긍휼의 그릇 쪽에 놓였다고 손 치더라도

 

주님은 관심사는 그 사이의 간격이다는 겁니다.

이 간격을 양쪽 둘 다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 안 보이니까 말이죠. 무슨 수로 세미한 음성을 듣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시꺼리 불가능성을 거쳐서 오라는 겁니다.

이것을 내부로부터 온 괴물(7천명) 이라고 합니다.

 

이 괴물 곧 닭의 세 번의 울음소리를 거쳐오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체라는 겁니다.

이 간격이 주체인데 오늘 본문이

 

이 보이지도 않는 간격을 누가 봤는가 누가 의식하는가?

아니 누가 보이도록 섬겼는가?

누가 의식케 하도록 이런 사건을 벌렸는가? 라는 점입니다.

 

왜 이 간격을 보여주실려고

보이지도 않는데 보여주시고

듣기지도 않는데 들려주시고 하시는가 라는 점에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한 촌에서 열명의 문둥병자를 만납니다.

 

(17:12, 개역)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7:13, 개역)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7:14, 개역)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긍휼 곧 용서해 주옵소서 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들이 보이도록 고쳐주시면 됩니다.

그런데 안 고쳐주시고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라는 것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러 갑니다.

 

누가 봐도 제사장들에게 떠맡기는 모습입니다.

? 당장 문둥병자 본인들이 보이도록 고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사장들을 끌어들여서 율법대로 라는 규칙성을 먼저 상기시키시는 겁니다.

문둥병 담당이 제사장이거든요.

 

그래서 문둥병자들이 가는 도중에 그만 병이 고침을 받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제가 지금 예수님은 안 고쳐줬다고 따지는 판국이였는데

전세가 역전이 되듯이 고침을 받아버리게 된 겁니다.

 

이것은 곧 간격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안 고쳐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제사장을 끌어들어야만 하는 배경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직접 나서서 어이구 불쌍해라 그래 내가 긍휼히 여겨주마 라는 식이 아니라

 

반드시 간격을 거쳐 오라는 식이다고 했습니다.

즉 차이죠.

 

차이가 발생하지 않으면 고쳐 본들 의미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용서를 받아놓고도 무시하고 취소시켜버리듯 하지만

주님은 자신의 피 발림의 그 용서를 절대로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드시 인간은 이 용서를 무시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끌여들입니다. 예수님 자신과의 차이성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제사장에게 보이러 가는 도중에 깨끗하게 입음 당하게 되면

졸지에 누가 고친 격이 됩니까?

 

제사장이 고치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오히려 예수님을 더 빨리 잊어버리도록 하게 하는 결과입니다.

 

캬 예수님 본인이 하신 일 마저도 있으나 마나

하나 마나 한 일로 취급하시는 판국인데

문둥병자는 오죽 더 더 더 있으나 마나 하나 마나 하지 않겠냐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한 명이 눈을 떴습니다.

 

문둥병을 고치는게 문제가 아닌

눈을 뜨느냐 하는 문제였던 겁니다.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2:37, 개역)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12:38,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12:39, 개역)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12:40, 개역)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12:41, 개역)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예수님의 관심사는 문둥병이라는 병을 고치는게 목적이 아니였던 겁니다.

제사장이 할 일이였기에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했던 겁니다.

 

아주 당연한 말이요 하나 마나한 말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 그런데 아뿔싸 문둥병 고치는게 문제가 아닌 눈을 떳다는 불가능성의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못 듣도록 못 깨닫도록 못 고침 받도록 했는데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그만 한 사람이 실수로 제사장이 자신을 낫게 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낫게 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만드셨다는 겁니다.

 

할례 보다 더 나쁜 마음판의 할레로

 

할례의 실패가 마음판의 할례이듯이 이것이 더 나은 제사이듯이

 

그만 실수로 사마리아인이 그만 눈치를 채버린 겁니다.

 

아뿔사

 

예수님 실패

 

10명 모두 제사장이 낫게 했다고 착각케 만들어 버렸는데

그만 한 사람이 눈 떠버린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실패로 인해 졸지에 간격이 생겨 버린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는 겁니다.

 

지금 나머지 아홉이 자기에게로 안 돌아와서 섭섭해서 하시는 소리입니까?

그 반대죠.

 

앗싸 성공 했다는 거죠.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7:19, 개역)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리고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합니다.

 

결국 믿음이 뭡니까?

 

지금까지 믿음이라고 들어 왔던 것 다 자기투사였으니 다 엉터리로 여기고

 

아예 믿음이 뭔지 전혀 모른다고 여기고

지금 믿음이 아주 낯설기 짝이 없이 쳐들어 왔다고 봅시다.

 

종교꾼은 믿음은 아예 자신과 일치 시키고자 얼마나 습관화 시켰고 반복했겠습니까?

그런 입장이 아닌

 

아예 믿음은 우리가 아주 아주 싫어하는 괴물로 여기고

이 괴물과 맞딱들였다고 여길때에

 

이 낯선 괴물인 믿음이 뭐냐 라는 문제에 막다른 낭떠러지에 몰렸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믿음이야 말로 진짜 진짜 무섭기 짝이 없는 거다는 겁니다.

 

그 믿음을 지난 시간에 사도들은 더하여 달라고 합니다.

 

즉 없기에 달라고 합니다.

아니 사도들도 없는 판국에 우리인들 주시겠습니까?

 

안 주시는 것은 당연한데

아니 아예 작정하고 안 주시겠다는 것인데

그만 실수로 하나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이 사마리아인이 그만 덮썩 물게 된 겁니다.

 

사실은 실수로 떨어뜨린 믿음이 주체가 되어 이 사마리아인을 택한 거죠.

 

고래잡이 작살처럼 그 작살에 사마리아인에게 꼿힌 겁니다.

 

아홉은 어디 있냐 말이죠.

 

아니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신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떨어뜨릴려고 작정해서 떨어져 나갔는데

아홉이 돌아오길 바랬다는 겁니까?

아닌 거죠.

 

속으로 앗싸 가오리 성공 이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 또한 이런 마음으로 앗싸 가오리 할 입장에 놓여있진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용서의 대상물이지 용서를 베푸냐 안베푸느냐 할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신났습니다.

차이를 내고 간격을 내었다는 겁니다.

 

자신의 기능에 기뻐하신 겁니다.

 

그저 한 사람만 실수로 빠져나온 겁니다.

 

주님은 고침을 받을까봐 두려워 떠십니다.

 

그런데 마침맞게 한 사람이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또 마침맞게

 

즉 나쁜데 더 더 더 나쁘게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실수는 더 더 더 실수인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더 나은 제사요

제사보다 나은 순종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하나님관 구원과 용서관 모조리 정반대로 비켜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체 일치할수 없도록 동일성을 커녕

원수 같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돌아와버렸으니

 

걸림돌도 보통 걸림돌이 아니요

실족케 함도 보통 실족케 함이 아닌 겁니다.

 

더 더 더 나쁘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 육의 일에 반대 되기 때문에

 

내가 싫어하던 놈이 예수님의 긍휼을 더 받더라 말이죠.

 

내 보다 더 나쁜 놈이 주님의 사랑을 받더라 말이죠.

 

무슨 이야기와 딱 맞나요? 그렇죠 탕자 비유와 딱 맞잖아요.

 

우리는 열명의 문둥병자 이야기를 들으면서

돌아온자와 돌아오지 않은자로 나누어서

돌아온자가 되고 돌아오지 않은자가 되지 말자 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안되는 겁니다.

중간의 간격을 지옥간 부자처럼 무시한 겁니다.

 

정작 이야기는 예수님이 중간에 간격을 벌렸는데

그 간격을 봐버린 자가 예수님의 실수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겁니다.

 

나머지 아홉은 예수님의 뜻대로 드디어 지옥 보내는데 성공했고 말이죠.

 

즉 예수님이 문둥병을 고쳐준다는 것은 지옥 보내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어차피 악한 세대는 기적을 요구할 뿐이지

요나의 표적은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뿐이기에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세요 라고 하면 끝입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했을 뿐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의사한데 가서 몸을 보이세요 라고

그 당시에 누구나다 다 하는 소리를 했을 뿐입니다.

아이구 의미 없다 마이너스 100점 땡 탈락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했을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이의 간격을 졸지에 사마리아인이 봐 버린 겁니다.

아니 안 보이는 투명한 것을

없는 것을 봐 버렸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실패죠.

사실은 예수님의 배신이요 반칙이였던 겁니다.

이 반칙이 그만 자신을 고쳤다고 외치는 이상한 사람이 한 사람 생겼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다 정상인데

그 사람만 비정상인 겁니다.

 

즉 성령으로 돌아간 사람이다는 겁니다.

 

 

천재와 사도와의 차이는

천재는 생각이 끊임없이 분절하는 창조성이 있는 사람으로써 지극히 더 정상적인 사람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는 다릅니다. 사도란 아무것도 아닌 자로써 비인간이다는 점입니다.

마치 사도는 외교관처럼 국가를 대신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아니라 국가체제를 대신하는 축소된 국가라는 점에서 비인간이요 비개인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자이다는 겁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로 돌아가자 실패로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라는 말은

아무것도 아닌 빈 공백으로써 주체의 대변인 메신져 우편배달부 역할일 뿐이다는 겁니다.

 

비유에서도 종종 나오는 포도원 주인이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12:1, 개역)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12:2, 개역)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12:3, 개역)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2:4, 개역)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12:5, 개역)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12:6, 개역)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12:7, 개역) 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12:8, 개역)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종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저 메신져일 뿐인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왜 있어야 하는가?

 

빈공백이라는 주체

 

이 주체를 상기 시키기 때문입니다.

 

지옥간 부자가 늘 무시하는 빈공백이라는 간격

 

종은 이 간격이라는 주체처럼

마치 자신의 운명인냥 있으마 마나 한 존재로써 취급을 받는 모습 뿐입니다.

무익한 종이다는 겁니다.

 

그 하나 마나

있으나 마나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일이요

 

십자가는 이 있으나 마나 한 모습으로써

반드시 베드로는 닭울음소리를 거쳐야 하듯이

우리는 이 십자가가 벌리는 그 간격을 거쳐야 하는 겁니다.

 

? 있으나 마나 보일랑 말랑 한 세미한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시한 십자가였는데 나를 건지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나 또한 십자가와 똑같은 운명으로써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취급받는

하나 마나 한 소리인

 

세미란 음성이라는 주체를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들의 죽음이 무의미해 보이지만

그 무의미한 하나 마나 한 죽음 속에

예수님이라는 아들의 죽음 또한 그 노선 속으로 온다는 겁니다.

 

사실상 주님이 먼저였다는 거죠.

 

그러니 더 더 더 이 나쁜 것 곧 나쁜 것 보다 더더 나쁜 것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한

 

목에 탁 걸려서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는 중간에 낑긴바 된 것을

 

원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이런 존재로써 우리는 이 무익한 일을 원해야만 하는 겁니다.

 

거지나사로가 되자가 아니라

 

거지나사로의 있으나 마나한 것에 충성한 그 있으나 마나 한

 

그 간격을 우리는 주체로 주인으로 보고

그 빈공백의 종으로써

 

마땅히 당연히 해야할 바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취급했듯이

니느웨 백성 망하든 말든 우리 가족 우리 이스라엘만 건져달라는

그 엉터리를

오히려 있으나 마나한 니느웨 백성의 회개처럼

있으나 마나 한 박넝쿨처럼

꼬끼오 라고 세 번 울음을 터트리는 닭처럼

 

그들 하 찮은 것 조차도 주님이 아꼈다는 그 용서하심만을 우리가 바래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용서의 주체자는 우리가 아닌 예수님만이 용서의 주체라는 것

 

우리가 무시하고 무시했던 그 용서의 주체자 라는 것

 

우리 또한 무시받는 아무것도 아닌 이 용서에 목숨걸어서

 

비로소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의 실수로 고침받으면 안되는데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를 바래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용서는 아무에게나 가는게 아니고

회개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실수로 우리에게 덮쳐졌다는 사실

 

그 실수가 나를 살린다는 것

 

 

주여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 떨어진 콩꼬물로 살지 않습니까?

 

주님은 냉소적인 분입니다. 절대로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닌

심판을 퍼붓고자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냉소적인 분의 실수로 인해 우리는 긍휼을 입는 겁니다.

 

그것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냉소함에 배신때린 모순적인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곧 간격입니다.

 

도저히 그 모순의 간격을 벌릴수가 없습니다. 아니 좁힐수가 없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우리는 다 죽어 마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스스로가 배신 때려서

따로 아껴서 뒤로 빼돌리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실수를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15:21,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무익한 것을 원하기 (17: 1-10)

 

실패로 돌아가자. 성령으로 돌아가자

 

(17:1,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17:2, 개역)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17:3, 개역)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17:4, 개역)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17:5, 개역)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17:6,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17:7, 개역)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17:8, 개역)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17:9, 개역)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7:10,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17:1, 공동)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악의 유혹이 없을 수 없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하다.

(17:2, 공동)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 죽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17:3, 공동)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17:4, 공동)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17:5, 공동)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니까

(17:6, 공동)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7:7, 공동) "너희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 하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7:8, 공동)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실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고 나서 음식을 먹어라.' 하지 않겠느냐?

(17:9, 공동)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17:10, 공동)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이제 그 다음 이야기가 오히려 제가 더 궁금해 질 정도로 빠져버리게 됩니다.

꿈을 꿧는데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그것은 거지나사로가 무시 받았다는 겁니다.

 

개가 상처부위를 혀로 햩을 정도로 무시 받았다

 

그런데 아침에 어머니랑 식사를 하면서

그럼 개에게 개 혓바닥으로 상처부위를 혓바닥 햩음받음 당하면 다 고난이요 무시받음 일까요?

 

물론 아닌 거죠.

고난이란 원인 없는 결과로 일방적인 편파해석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스스로가 자신의 기록의 모순됨을 부각 시키면서 믿음을 외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구약에는 애굽왕 바로왕이 무서워 도망쳤다고 기록하고서는

신약 히브리서에서는 바로왕을 무서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맞섰다고 합니다.

노골적인 거짓말이요 모순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간격을 좁힐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 부각 시키는 겁니다.

 

고난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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