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악인(죄인) 삭개오 집에 들어가 대접받는구나 (19: 1-10)

 

(19:1, 개역)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19:2, 개역)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19:3, 개역)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19:4, 개역)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19:5, 개역)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19:6, 개역)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19:7, 개역)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19:8, 개역)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19:9,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9:7, 개역)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19:7, 공동)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19:7, 쉬운)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19:7, 킹흠정)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하더라.

(19:7, 한글킹) 무리가 그것을 보고 모두 수근거리며 말하기를 "그가 죄인과 더불어 손님이 되어 들어갔도다."라고 하더라.

(19:7, 현대인)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저분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대접을 받다니' 하며 모두 수군거렸다.

(19:7, 현대어) 그러나 군중은 `그분이 소문난 죄인의 집 손님이 되시다니' 하고 투덜거렸다.

(19:7, 가톨릭)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죄인 곧 율법에 근거한 악인은 경계 대상 1호가 되는 겁니다.

그들과 접촉 만남 사귐 대화를 한다는 것은

곧 거룩한 말씀인 율법을 거스리는 행동인 것과 동일한

결국 악인과 함께 하는 악인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 근거가 되는 겁니다.

 

악인을 쫒지 말며

악인과 함께 하지 말며

악인과 갈라서라 라는 것이 율법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율법 곧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아주 아주 본으로 누가 어기고 있는고 하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율법을 어기고 거스리는 예수님 이다는 겁니다.

? 악인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리새인이 놓칠 리가 있겠습니까?

 

? 하필이면 안식일날 당신의 제자들은 이삭을 잘라 먹느냐?

왜 율법을 어기느냐 라고

바리새인 바로 코 앞에서

아예 시비를 걸으라고

율법 어겼다는 그 증거를 아예 알리바이를 형성해 줄려고

오히려 예수님 쪽에서 더 노골적으로 제발 잡아라 잡아라 율법 어긴 증거 여기 있잖아

잡아라 잡아라 잡아라 ~~~~~~~(커져라 커져라 커져라) 궁민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일부러 더 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 마나 한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일부러 하심으로써

저들의 [의미] 있다는 것에 상대적인 반대를 위한 반대를 펼치실까요?

 

결국 상대적으로 누가 율법과 자기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뭇사람들 이라고 했습니다.

늘 제가 바리새인 곧 유대인의 대표성으로 표현한 바리새인이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은 뭇사람들 즉 대부분의 군중이라는 의미인데

좀더 세밀하게 말하면

 

아주 아주 적나라하게

이 소문난 악인 삭개오 빼고 모든 인간인 셈입니다.

 

x-1(삭개오)=뭇사람들

 

[의미 있음] 이라는 뭇사람들 곧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 할려는 자들

[의미 없음] 이라는 삭개오의 대립으로써 예수님은 그 둘 사이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의도적으로 어기시면서 이 [의미없음]을 통해

간극을 만들고 있습니다.

 

삭개오 라는 소문난 악인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번주에 제가 어머니와 함께 미련한 복음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어머니는 말씀을 나누고 난 뒤에 기뻐하셨습니다.

 

말씀 나눈 내용에서 무엇이 가장 많이 나온고 하니

욥에 관한 이야기 였습니다.

 

오늘 본문과도 연관이 되는데

 

구약에서 시편과 잠언 전도서 그리고 예레미야서 이사야서

등에 악인에 대해서 무지 무지 많이 나옵니다.

 

특히 욥기에 이 악인에 대해서 엄청 많이 나옵니다.

 

어머니와 말씀을 나누면서 욥기가 갑자기 왜 언급이 되었는고 하니

미련한 복음은

우리가 너무 너무 똑똑해서 이 미련한 자리로 옮기고자 하는 주님의 열심이

욥기에 너무 너무 과잉적으로 나타나더라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미련함 어리석음 수준낮음은 십자가와 무관한 것이고

주님께서 미련함 어리석음 수준낮음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한 생명을 건지고자 하시는 주님의 열심(행함,믿음)과 피와 연관이 된다는 겁니다.

 

즉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목숨까지 버리시면서 까지

우리를 똑똑하고 지혜로운 자리에서 어리석은 자리로 옮기고자 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의인의 자리에서 악인의 자리에로 이행시키고자 하는 십자가의 피 이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욥의 의로움이 아니라

욥의 악함을 예수님의 피와 결부시키고자 하는

바로 피의 기능을 부각시키고 함이다 라는 겁니다.

 

자 여기서

인간은 너무 너무 똑똑합니다.

똑똑하니까 구지 지혜자가 올 필요가 있느냐 할 정도로

너무 똑똑한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런 욥을 꺼내시고자

미련한 자리에 놓고자

 

주님은 반드시 마귀를 끌어당긴다는 겁니다.

 

마귀는 주님으로부터 호출 당해

의도하지도 않고 원치도 않는 내기에 참여케 됩니다.

강요된 선택이지요

 

마귀야! 욥을 봐라 라는 겁니다.

이 욥이 얼마나 의로운지를 보라 라는 겁니다.

 

마귀는 항상 맞는 말만 합니다.

그거야 하나님이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마귀말 맞죠

 

아니다 내가 뒤를 안 봐줘도 그는 의롭다 라는 겁니다.

 

에이 하나님이 손 때면 절대 그는 의로움이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여기에 내기가 성사가 되는 겁니다.

 

마귀가 멍청하지 않습니다.

지는 게임을 할 리가 없습니다.

 

뒤를 다 봐주는 게임에 누가 내기바둑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마귀를 유혹합니다.

 

참말로!!! 유혹이라는 말이 마귀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았죠?

절대 아닙니다. 유혹은 오히려 주님에게 해당 됩니다.

 

마귀는 시키는 짖만 하지 독자적일수 없습니다. 다만 독자적이고 싶어 할 뿐이지요.

그것이 자유의지라는 둥, 인간이 말려드는 이유입니다. 있지도 않는 자유를 말입니다.

강요된 선택입니다.

 

마귀를 유혹하는 주님입니다.

마귀를 핍박하는 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마귀 입장에서는 그것이 악한 겁니다.

결국 예수님 입장에서는 그것이 선하심입니다.

주님을 악을 모르십니다.

 

주님이 다 하셔놓고 마귀에게 뒤짚어 씌운 거죠.

 

그래서 유혹은 백이면 백 넘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너무 너무 똑똑해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50:50이 되어야 게임의 승산이 있지

마귀가 미쳤다고 지는 게임을 할 리가 있겠냐 말이죠

마귀야 말로 얼마나 정정당당한지 모릅니다.

이런 모습이 바리새인에게 그대로 투영됩니다.

 

절대로 자신의 유익이 되게 40(하나님) : 60(마귀)으로 승부걸지 않습니다.

뒤 탈이 난다는 것을 마귀가 더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 같이 그런 반칙은 안 벌린다는 것이 마귀의 신조입니다.

그래서 정정당당 50 50으로 승부를 겁니다.

즉 이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요 부조리요 반칙인줄 마귀는 백날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겁니다.

 

50수 물려서 게임 시작 자체가 이미 반칙인데요 뭘!!


주님의 반칙을 막고자 자신이 이미 부조리를 추구하는 겁니다.

율법과의 동일시 자체가 이미 이런식의 불법입니다.

 

유대인 오늘 본문의 뭇사람들이 사실상 이미 불법이라는 둥지 구조에 이미 속했다는 겁니다.

 

이 둥지라는 구조의 간극을 무시한채로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켜왔다는 둥 하는 자체가 이미 불법인줄 모르는 겁니다.

둥지의 구조 간극을 무시한 겁니다.

 

그래서 간극을 확 벌려 버리는 겁니다.

부자청년 너가 무시한 그 간극을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키라고 준게 아닌 간극 즉 보이지도 않는 간극을 보라고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 겁니다.

 

한번은 양탈늑대무리에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라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이 옳타구나 이것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바리새인이 말려들고 있습니다.

그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니까

이 구절을 글자크기를 크게하여서

반박을 하는 겁니다.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잖아 라고 말이죠.

얼마나 뿔따구가 낫으면 히스테리를 부리는지

 

(8:3, 개역)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8:4, 개역)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8:5, 개역)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8:6, 개역)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7, 개역)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8, 개역)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8:9,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8:10, 개역)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8:11, 개역)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실컷 알려줬더니만 다행스럽게도 고침을 받을까봐 걱정이 되었는데

역시나 귀가 없어서

선한사마리아 비유를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라고 역시나

율법과 일치 시켜버리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내용을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이것이 말씀이니 말씀을 무시한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앞부분의 말씀을 양탈늑대무리가 다 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즉 구조라는 간극을 무시하니까

자꾸 말씀과 자신을 동일시 하고자 실천 실천 실천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뭇사람들과 바리새인 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결국 강도가 제 발 저려서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곧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 라고 말씀의 언어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실천을 하자 라고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이것이 불교입니다.

불교는 교리가 있고 그 교리에 실천을 합치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은 교리가 없고 지킬 필요 없이

행할 필요 없기 그 자체 라고 했습니다.

 

천재와 사도의 차이라고 했지요?

 

바로 주님은 욥을 [의미 있음]의 자리에서 [의미 없는 진리] 곧 미련한 복음의 자리에

이행하시고자 마귀까지 끌여들여야만 하시는 겁니다.

 

마귀가 이 [의미 있음]의 자리를 꽉 잡고 있거든요

그래서 나 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이 특심이다는 둥

7번 용서 했는데 몇 번 더 할까요?

어릴적부터 지켰는데 뭐가 더 부족한가요?

자꾸 의미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의미 없는 진리]의 자리로 이행시키고자 마귀를 반드시 동원 시키는 겁니다.

그래야 남이 아닌 내가 원수로써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는 겁니다.

의미 있는 내가 될려고

예수님을 더더욱 의미 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다는 겁니다.

 

사랑은 내가 의미가 없어도 남이 의미가 있도록 살리고자 하는 자기목숨 내어줌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미 없는 진리]입니다. 어리석은 십자가입니다.

 

? 이것을 의미없게 만들어야 내가 의미가 있어 지니까 말이죠.

아벨이 괜히 죽은게 아니죠

제사 잘 드리는 바람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허무입니다.

 

이 죽었더라 족보와 가인의 족보가 대립이 되어

평생 간극을 이루는 겁니다.

아니 천국과 지옥의 간극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똑똑한 욥을 미련한 십자가를 쳐다보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마귀를 끌어들임으로써

적어도 50수를 물려서 바둑게임을 하는 겁니다.

50%의 확률 반반을 줘야 게임에 돌입할 테니 말입니다.

 

뭐뭐 비겁하니 정정당당하지 않니 그런거 없습니다.

게임은 무조건 이기면 그만이니까 말이죠

 

이미 막살고 있는데 막살지 않겠다는 것이 불법이다는 겁니다.

 

지금 보면 누가 유혹자 마귀 같고? 누가 어리석게 시험에 말려드는 겁니까?

 

바로 이것이 제가 말하려는 취지인 겁니다.

 

욥은 중간에 낑긴 경계인이 되어서

두 배후의 축구공처럼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일 뿐인 장기알입니다.

하나님께 말려든 마귀가 마음껏 농락하는

그야말로 그의 아내가 너의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려라 라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순식간 다 사라지는 제일 밑바닥으로 추락케 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단절당하게 됩니다.

아내도 죽고 자녀들도 다 죽고

모든 재산도 다 날라가 버립니다.

친구들도 말이 친구이지

식상한 종교적인 발언으로 자꾸 약만 올리듯이

회개하라 회개하라 라고만 합니다.

 

교리 플러스 실천 실천 실천만 강요하는 자들입니다.

 

분명 욥은 똑똑하다고 했습니다.

회개할 만한 짖을 했다면

회개를 안 할 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어리석은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이기에

도저히 알길이 없는 애매하고 모호한 재앙입니다.

당황할 뿐

회개라는 행위로 카바할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종교꾼들이야 그것으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식이겠지만 말이죠.

 

그들 종교꾼도 역시나 보통 똑똑한 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무조건 용서를 빌라 라는 취지이니 엄청나게 똑똑한 신학박사들이다는 겁니다.

 

모든 연결망이 다 끊어지고

심지어 주님과도 끊어진 버리움을 당한자처럼

잃어버린자처럼 된 욥은

 

이 문제를 바로 여호와와 직결시키는 겁니다.

 

주시는 이도 여호와요 취하실 이도 여호와요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자작극 임이지

 

자신의 행동 유무,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만이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마귀가 아니면 이 일을 할 자가 없습니다.)

 

이 알수 없는 애매한 고난에

그 자작극에

자신은 누락 되어 있기에 도통 알고 싶어도

(물론 알수 없도록 누락(단절)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알수 없는 상황인줄 뻔히 알지만

자신은 누락되었지만 단절 되었지만

그래도 이 몸의 고통이 어쩔수 없이 외치고 있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주님은 욥에게 미련한 예수님의 지혜 십자가를 증거하십니다.

욥은 비로소 입이 천개나 있어도 할 말이 없어서

내가 밤새도록 박박 끍어서 낫게 해 달라고 한 모습이 부끄러워

감히 머리도 못 들고 재를 뿌리고 죽여달라고 하는 겁니다.

 

도대체 뭘 봤기에

 

초과잉을 봐 버렸습니다.

 

자신의 고틍은 그에 비하면 새발의 피요 뻔데기 앞의 주름이였던 겁니다.

 

그야말로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은 나의 모습이여야 하는데

도리어 주님이 이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에 충성하신 모습을 보고 그만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고

재를 뿌리고

태어난 생일을 저주하면서

땅에 바짝 머리를 쳐박는 겁니다.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나는 손에 조그마한 비일똥 말똥한 가시 찔려서 온 몸을 오바 액션하면서 발을 동동 구불면서 온갖 엄쌀을 부리고 있는데

 

주님은 내 때문에 창자국 못자국을 그리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자

상상도 못할 고난을 당하시면서까지 침묵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앞에서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 창자국 못자국이 이렇게 견고한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양사방으로 악마들이 갈기 갈기 찢어버려도 든든하게 그 고난을 받는 모습 앞에서

 

부끄러워서 감히 입을 못 띠게 할 정도로 견고한 모습 앞에서

눈 놋득이 녹아버리는

나의 고통은 쥐 뿔도 아니였다는 겁니다.

 

이것이 미련한 자리에 놓게하시는 이행이였다는 겁니다.

 

 

고통이 심하면 다들 자살해 버립니다.

그 정도로 근접해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자초한 일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자초했더라도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무능의 자리에 옮기시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똑똑하면 우을증 걸리고 자꾸 자살할려고 합니다.

나 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자살 방지케 하실려고 거리두기 간극을 벌리시는데

그것이 바로 초과잉적 숫자 7천명입니다.

 

그러니 교리 플러스 실천을 아예 포기하라 라는 겁니다.

그냥 그 자체로 주님이 감당하시겠다는 겁니다.

이 든든하고 견고한 미쁘심 앞에

감히 모호하기 짝이 없는 나의 [의미 있음]

사랑으로 십자가의 미련함으로 어리석은 지혜로 무너뜨리는 겁니다.

 

자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소문난 악인 삭개오가 예수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키가 작다는 겁니다.

 

안 보인다는 겁니다.

 

즉 이 간격을 자기 쪽에서 좁힐수 있는 그 어떠한 조건이 자기 쪽에서는 없다 라는 겁니다.

 

자 여기서 다들 오해하는게 삭개오가 영접한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삭개오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접으로 인해 상대적인 반발을 삭개오가 아닌 예수님께 퍼붓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겁니다.

삭개오가 교리 실천하듯이 영접했다면

다들 삭개오를 공격할 겁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이미 소문난 악인이고 세리(매국노)이며 나라를 팔아먹는 민족의 배신자요

하나님백성의 원수입니다. 사마리아인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앞에서 말한 부자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보다 더 어려울 정도로

예수님 입에서 나온 그 부자들과 동일한 부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스로 어기듯이 행동하는데 있어서

삭개오 외의 뭇사람들은 이 찬스를 놓칠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 쪽에서 노리고 삭개오를 영접한 겁니다.

키도 작아서 단절 되었겠다

소문난 악인이어서 단절 되었겠다.

세라 매국노 라서 단절 되었겠다.

부자 라서 단절 되었겠다.

 

이 단절된 자를 주님 쪽에서 어떻게 이 불가능성을 해결하느냐 라는

주님 자신의 피의 능력

곧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를 높이고자 동원하는데

이 양쪽 간극에 이들을 배치시키는 겁니다.

그것도 극(악인 삭개오)과 극(유대인)의 가장 알맞은 인물로써 말입니다.

 

이 단절된 상황을 누구 보다 누가 심각하게 갈망하고 있는고 하니

 

삭개오입니다.

 

보고 싶어도 못 보는 키 아주 작은 키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갇혀버렸기에 부정한 자로써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예수님과의 거리감 때문에 가까이 할 수도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영접하자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치듯이 행동합니다.

그 정도로 간극을 실감했던 자였다는 반증으로써 너무 너무 기뻐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삭개오를 두고 잃어버린자 라고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을 해 버리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핵심포인트입니다.

 

자 위의 내용에서 잃어버렸다 라는 것을 감지할 만한 내용이 과연 있던가요?

 

없었습니다.

 

갑자기 뿅하고 날벼락처럼 떨어진 선물인냥 뚝 떨어진 내용이요

편파해석이요 일방적인 해석으로 붙여버린 새로운 개념입니다.

즉 그렇다면 기존의 개념은 이 새로움 앞에 다 엉터리 헌 것으로 판명이 되는 겁니다.

 

새로움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새로움 그 자체입니다.

 

먼저 선취적으로 새로움을 붙여 놓고

자동적으로 뒤(후차적)

기존의 앞의 것들이 이 새것 때문에 후차적으로 역시나 편파해석으로 붙여집니다.

헌 것이다고

이전 것은 지나가버린 똥 떵 어 리 배설물이라고

 

이제 새로운 것 때문에 모조리 재배치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눈치 채셨겠지요?

 

새로운 하나님 이라는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기존의 엘로힘 하나님 속에 있던 욥을 이행시키는 겁니다.

 

욥은 알수 없는 원인 없는 고통 때문에

졸지에 이 잃어버림을 누려야 했던 겁니다.

지키는게 아닙니다. 그냥 그 자체로 누리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은 엘로힘 하나님에게서는 나오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 곧 어리석은 십자가(질투와 시기의 사랑) 때문에

새로운 하나님에 재배치 되어야 할 자로써 선취를 누리는 겁니다.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어리석고 미련한 복음 속에 집어 넣고자 하는 취지를 비로소 욥은 알게 된 겁니다.

 

바로 잃어버림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는 이 잃어버림을 되찾는 누락으로써 무능함으로써의 주님의 대상물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신앙 대상물로써의 신이 아니라(그런 엘로힘 하나님 즉 교리 플러스 실천이 아니라)

 

잃어버림 그 자체로써의 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능합니다.

자기 쪽에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없는 갇혀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로지 불쌓이 여겨주심 밖에 없는 겁니다.

 

주님의 어리석음으로써 받지 말아야 할 자를 받아주심이다는 겁니다.

 

자기 피를 흘리실 필요도 가치도 없는 자를 대신 피 흘려주심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림을 찾는 주님의 인간 의 똑똑한 지혜 보다 더 지혜로운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과연 똑똑하고 지혜로운 선비가 있기는 있을까요?

이 세대의 변사과 과연 있기나 할까요?

 

섬기는 대통령 왕도 없습니다.

다들 조금 똑똑하면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정신팔려있지

아니 완전 광기적으로 미쳐있지

아무도 섬기는 자 가 없습니다.

 

선한 사마리아라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자

너도 그와 같이 하라?

라고 말씀 운운해서 교리 플러스 실천을 강요하지만

정작 그들은 사랑은 없고 등쳐 먹는 강도 짖을 이제는 선한사마리아인이 되자 라는 구호로 바꿔서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불가능성이라는 간극을 말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얼마나 간극을 무시하면 단어와 교접을 시도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도 삭개오처럼 되자 라고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삭개오는 나는 갇혔어요 단절 되었어요 라는 자 라는 겁니다.

그것 마저도 외칠수도 없는 거세 당한 목소리 거세 당한 단절된 자 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이 예수님의 섬김이지

 

삭개오 쪽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할 재간이 아예 상실당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기능이 이 삭개오 라는 잃어버린자에게 부합되었다는

 

바로 에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데

막힘이 없이 충만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리 찾아봐도

이런 잃어버린자가 없다 라는 겁니다.

아쉬운게 없는데

예수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는 말씀에

그들이 배치되고 있다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제발 고쳐주소서 라고 외치는 자는

소경 뿐이였듯이

 

오늘 본문에는 삭개오 뿐이였다는 겁니다.

 

단절되었다는 간극을 직시하고 실감하는 자

 

삭개오는 부자청년처럼 영생을 무엇을 하면 받느냐는 둥

천국에 어떻게 가느냐는 둥

구원을 어떻게 받는냐는 둥

그런 배 부른 소리를 하는게 아닙니다.

 

마치 소경이 지금 당장 나의 갇혀 있음을 포로되어 있음을 해결해달라는

이 간극을 이 단절을 외침으로써

소경은 단순히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저들에게는 전혀 필요도 없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것을 원하고 있는 겁니다.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죄인이듯이

예수님의 기능에 딱 필요한 말을 하는 겁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키기 작아서 뽕나무에 올라갈 지경이니

천국 구원 영생 그 딴거 종교꾼이 바라는 것이 아닌

그저 보고 싶다 라는 겁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예수님의 얼굴

 

그저 만져 주기를 바라는 어린아이 라는 겁니다.

 

배불러서 어릴적부터 율법 지켰으니 영생을 어떻게 얻냐 라는

모든 인간들과 반대되는

 

무능하고 미련하고 어리석게 그저 보고 싶다 라는 것 뿐입니다.

 

보그 싶음 [그 자체]입니다.

간극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그 자체]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안 버릴께~~~~~~
안 튀길께~~~~~~~

안 죽일께~~~~~~~~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죽이는 겁니다.
그 자체를 무시하니까 말이죠
간극을 당해야 할 자들이 잃어버림 받은 자인데
간극을 오히려 자기가 벌리고 있는 겁니다.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예수님 안 버릴께 라고
그것도 간극입니까? 꼴에 십의 이조를 하고 이레에 두번 금식하고 그것도 간극이예요?
인간의 믿음은 간극벌림 당하기가 아니라 너무 너무 똑똑해서 자기가 남과의 간극 벌리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복수심이지요. 인간의 행함 곧 믿음은 다 사기요 복수심입니다. 간극당하기가 아니라 간극벌리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듯이 나만 남았다고 하니 7천명을 들이대셔서 그것도 간극이니?
억수르 ~~~ 소박해 ~~~

7번 용서 ? 그것도 간극이냐? 적어도 천국과 지옥의 간극이 7에 70은 되어야지?

[저 여자 때문에 우리 집안이 되는 일이 없어] 그것도 간극이냐?
적어도 도장 도장끈 지팡이를 획득한 여인이 진짜 간극아니니? 너 한 번 해봐?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간극 못 만들지??

일만달란트의 간격과 겨우 백데라니온의 간격
24조원과 2천만원의 간격입니다.

무조건 하루 일당 1데라니온으로 계산하면 됩니다. 요즘 10원으로 잡으면 (막노동)

100일 3개월과 16만년의 간격입니다. 하루 품삯으로 말이죠.


비교도 안되는 간극을 간극이라고 하지 도토리 키 재는 것은 간극도 아니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나만 남았다는 둥 내 열심이 특심이다는 둥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안 버린다는 둥

7번 용서했다는 둥

어릴적 부터 율법을 지켰다는 둥

그것은 간극 축에도 끼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간극은 마치 공기처럼

인식 자체가 불가능한 [그 자체] 입니다.

공기를 누가 [나는 공기 마실꺼야] 라고 마시는 인간이 어디있냐 말이죠?

그냥 믜이 없이 마십니다. 이것이 진리요 이건이 진짜 간극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지만 우리의 허물을 그에게 감당시키는 것이 진리이다는 겁니다.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진짜 간극이요 진짜 진리이듯이 말입니다.

내가 의미를 두고 내가 의식하는 것은 간극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너무 똑똑한 자리에서 빼 내실려고

실패로 돌아가도록

성령으로 돌아가도록

자리를 없애버리시는 어리석은 미련한 복음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말씀을 지켜라는 둥

말씀 플러스 실천이라는 둥

 

얼마나 간극을 무시했으면

복음을 교리로 바꾸냐 말이죠.

돈 때문입니다.

 

무능이 아닌 너무 너무 똑똑해서 말입니다.

 

우리도 이런 악마성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갇혀있는바입니다.

 

그래서 엃어버림을 주님은 강조하시는 겁니다.

 

내가 만져주지 않으면

내가 영접해주지 않으면

내가 770번 용서해 주지 않으면 7번 용서에서 빠져나올수가 없다 라는

철저하게 갇힌바 되었다는 단절의 간극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간극을 그대로 입고서(원수된 죄수복을 입고서) 특별사면이라는 빨강 합격 도장을 박은 그 옷 그대로

[그 자체]로, 그 모습 그대로, 그 꼬라지 그대로,

주님의 용서만을 바라고, 이 눈에 아무 증거 안 보여도 긍휼만을 바라보고 가는 겁니다.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9:10, 개역)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7:28,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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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벼락 처럼 내려온 선물



개념 뿌리들 택배로 내일이나 모레 도착할거예요.
아니 강이아빠 저에게 왠 이런 선물을 저는 아무것도 해드린것도 없는데 뻔뻔스럽게 넙쭉 받아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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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일에 욥에 대해서 미련한 복음을 나누었다.

욥은 너무 너무 똑똑했다.
그래서 주님은 미련한 자리에 앉히고자

가장 똑똑한 마귀를 끌어들여서 내기유혹을 하신다.


그리고 욥은 이 알수 없는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애매한 고난에서

그 간극에서 그만 예수님의 죽음을 봐 버리고서는

이 간극을 미련스럽게 감사함으로 제사드린다.


베드로도 너무 너무 똑똑해서 7번 용서에서 8번 용서하겠단다
엘리야는 나 만 남았다고 너무 너무 똑똑해서 시위데모를 한다.


이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방법은 십자가의 피 뿐이다.


곧 너희들도 오늘 당장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안되는
그 갇혀버린 자리
포로된 자리
억눌린 자리
긍휼을 바라보는 흑암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이 어리석은 십자가를 바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자리에 놓아야

마귀의 권세로부터 빼내시는 주님의 섬김을 보게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렇다 간극이였다.


나의 똑똑함은 이 간극을 무지 무지 무시해 버린다.
그래서 십자가는 의도적으로 어리석다. 미련하다.


어느 정도로 어리석은가?


일만달란트 빚으로써의 초과잉적이다.
7번 용서에 상대적인 7에 70번 이다.
나 만 남았다에 상대적인 칠천명이다.
(우을증 자살은 숫자가 상대적으로 작다. 그 정도로 근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인 초과잉적 숫자다. 괜히 숫자를 뻥 튀기는게 아니다.
인간 속의 악마를 염두한 것이다.)


왜 숫자가 이렇게 상대적으로 초과잉적일까?


이유가 있다.


숫자 세는 손가락 부러뜨리겠다는 것이다.
이 과격함(폭력성)이 바로 사랑이다.


나의 똑똑한 자리 완전 박살 내겠다는 것이다.

7번 용서가 뭐냐? 참 소박해 ~~~~~ 7에 70번

아이구 나의 딸 마르다 병원 몇 개 사줄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18:35-43)

 

주여! 저는 단절된 자 맞습니다.

이 저주받은자도 주의 긍휼로 먹고 살지 않습니까? 고쳐주소서.

잃어버린자를 되찾는 희롱 능욕 침뱉음 받는자

 

(18:31,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18:32, 개역)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18:33, 개역)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18:34, 개역)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18:35, 개역)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18:36, 개역)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18:37, 개역)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18:38, 개역)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8:39, 개역)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18:40, 개역)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18:41, 개역)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18:42, 개역)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18:43, 개역)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음성이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그런 음성이 아닙니다.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음성이다는 겁니다.

그럼 귀 있다 에 또 포인트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아니 귀 없는 자가 누가 있냐 말이죠?

 

그러니까 [귀 있음] [존재하는 귀]에 포인트가 있는게 아니라

그 정반대로 음성이 귀를 새롭게 만들기 때문에 새로운 귀

그 새로운 귀 있는 자에게만 이 음성이 들린다는 겁니다.

고로 음성이 우리의 평상시 귀로는 못 듣는 음성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음성] [그 소리] [그 목소리]는 결국 [소리 없음]
단절된 소리

없는 소리

곧 세미한 음성

 

있으나 마나 한 소리

하나 마나 한 소리

아무 의미 없는 소리

들릿듯 말 듯 아무리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렇다고 없다고 부정은 할 수 없는

[부재로써의 소리]

 

거세당한 소리

무능한 소리

그럼에도 그 어떤 능력의 소리 보다 더 뛰어난 소리이다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제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쾌하고 찝찝해서 빨리 지워버리고 싶고 삭제하고픈 소리

 

응시로써의 음성이다는 겁니다.

얼룩으로써의 소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롱 능욕 침뱉음 당함으로써 삼일이라는 그 간극 속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인자의 찢겨지고 매맞고 못박히고 찔림을 당함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27:14, 개역)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15:5, 개역)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23:9, 개역)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주님은 죽는 그 순간 까지도 이 간극 만들기에 전념하십니다. 침묵으로 일관 하십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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