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골과 휘장이 찢어짐 그리고 정녕 의인이였도다 (23:32-49)

 

 

(23:32, 개역)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23:33, 개역)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23:35, 개역)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23:36, 개역)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23:37,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23:38, 개역)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23:40, 개역)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23:41, 개역)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23:42, 개역)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23:4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23:44, 개역)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23:45, 개역)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23:46, 개역)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23:47, 개역)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23:48, 개역)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23:49, 개역) 예수의 아는 자들과 및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참과 거짓, 의와 불의를 가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솔로몬 왕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 라고 물었을때에

참과 거짓을 구별할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즉 이것은 솔로몬 개인의 소유하고픈 의미로써 원하는 것을 말한게 아니라

솔로몬은 지금 예수님의 임시성을 보여줌으로써

진정으로 예수님만이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지혜자임을 나타내는 소모품으로써 작용한 겁니다.

 

자 그림자가 이렇다면 실상인 예수님이 지혜자로써 참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까요?

 

의인과 악인을 어떻게 구별하느냐 말이죠.

 

이것은 지혜자가 지혜 스스로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라는 겁니다.

즉 이 말은 그 어떤 누구도 악인과 의인을 가려낼 지혜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기적을 요구하고 이방인은 지혜를 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유대인은 경험적 신체성 추구이고 이방인은 이성적 합리적 신체성 추구인 겁니다.

 

(고전 1: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개역)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개역)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우스께 삼아 표현하자면 유대인은 기관없는신체(초인)를 추구하고

이방인은 신체없는기관(괴물)을 추구하는 듯합니다.

양쪽 다 만만치 않은 존재들입니다.

 

즉 예수님 스스로가 미련해 지심, 어리석어 지심이 바로

 

차이의 간극을 제대로 보여주는 갈라짐이 되는 겁니다. 초극대의 간극입니다.

비로소 구별 차이 거룩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비교도 못할 거룩을 말입니다.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가는 와중에 여인네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울고 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놓고 악마적이다 라고 표현하니까

우리 어머니께서 몰라서 그렇지 않느냐 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 순화 시켜서 표현하신 거죠.

여인의 특징인 겁니다.

여자의 이런 특징 때문에 아이들은 남자의 딱딱한 근육의 품에서 자랄수 없고

아기들은 푹신한 여자의 품에서 자랄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눈을 마주치면서 옹알이 하는 언어를 다 알아먹을수 있는 겁니다.

남자는 백날 들어봐도 아기의 특성언어가 무슨소리인줄 못 알아먹는 겁니다.

그래서 눈도 마주치고 조그마한 반응에도 초과잉적으로 대웅해주고

박수를 치면서 응 그랬어요 라고 말을 걸어주고 끊임없이 소통을 해주기 때문에

아기를 그런 속성에서 자라나는 겁니다.

그런 따뜻한 온기가 없으면 아기는 그 어떤 자력도 없기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의 품에서는 못 자라나는 겁니다.

 

그렇기에 눈을 마주쳐주고 동조해주고 조그하만 움직임에도 감탄사를 날려주면서

주고받는 관계성을 맺는 그 신체성으로 예수님을 보고 안타까워 우는데

예수님은 차갑게도 째려보면서 나를 위해 울지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서 울어라 라고 합니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아기를 품은 그 경험이 전혀 없는

젖을 물려본적이 없는 여자, 수태를 해 본 적이 없는 그런 여자

꼭 얼음공주 같은 여자가 오히려 종말때에 더 복이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즉 이 말은 주님께서 자신의 복음의 의미를 이런 속성을 가지고서

단절 시키면서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쩔수 없는 악마성에 놓여져야만 하는 겁니다.

그 행동 자체를 잘잘못을 따지는 식이 아니라

그 악마성에 장악된 그 신체성을 가지고서

그 차이로

그 구별로써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뭔가 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아주 아주 좋은 재료로 삼으시는 겁니다.

잔소리를 듣더라도 우리는 섭섭해 할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초과잉적인 믿음의 차원이 뭔가를 보자 라는 거죠

육체에서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은 흔하게 우리가 접하는 것이니

잠시 접어 두고서 말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불속으로 뛰어드실려고 하는 겁니다.

다들 불 속에 들어가는 죽으니까 안타깝네 괜히 정부에 달려들어서 개죽음당하노

저주 받았구나 또는 연민에 의해서 죽지말지 라는 등등으로

다들 한결같이 차이성이 없는 즉 거룩하지 않는

보편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겁니다.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불 속으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제가 희한한 표현을 쓴다고 어머니께 미리 공지를 하면서 이런 표현을 섰습니다.

 

불 속에 들어가시면서 불 속에 들어가는 자는 정작 사는데

불 바깥에 있는 자들은 다 불이 떨어져 죽는다는 것을

그런 취지로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어라 라는 겁니다.

 

걱정해줘서 울어주고 있는데

도리어 예수님이 더 걱정해 주고 우시는 겁니다.

 

아이구 너와 너 자식에게 떨어질 불의 심판을 우찌 피할려고 하니?

 

아니 예수님!! 우리가 불 속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불 속에 들어간다니깐요

 

지금 너무 상처받아서 정신이 혼미하신가 본데 지금 예수님이 불 속에 들어간다니깐요

 

예수님은 오히려 나는 살러 가는데 너는 왜 죽게 되는 불심판을 어떻게 피할려고 하니?

 

누가 누구를 도대체 걱정하는 셈인지 모를 정도로

예수님은 인간의 반응에 일체 양보가 없으신 겁니다.

 

경험론 즉 기적의 차원에서도 이것은 더 이상의 기적이 없는 십자가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합리론 즉 이성적 지혜의 차원에서도 이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즉 양쪽다 빼도 박도 못하는 기적도 아니요 지혜도 없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니

그런 시선에서 보는 인간들의 입장은 예수님은 그야말로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자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그래야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가 주인공이 되는 상황이다는 것을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해 주고 있느냐 라는 차원인 겁니다.

 

우리는 현미경 속에 우리가 잡은 벌레를 관찰하여서 들여다 보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우리가 잡은 그 벌레가 우리를 도리어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겁니다. 이 내용이 지젝의 책에 자주 인용이 됩니다. 유물론적 시선인 거죠.

 

그것이 닭의 세 번의 울음입니다.

 

똑같이 오늘 본문에 두 강도가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금 모든 자들이 그 어떤 누구도 예수님의 편에 설 수 없는

정치적인 권력이 맹렬함 속에 있는 가운데에

 

아무도 한 쪽 강도의 말을 귀 기울이지 않는데서

유일하게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주고서 라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하는 자가 나타난 겁니다.

 

이것은 주님의 마음을 주님께서 심어서

좌편과 우편이라는 양 쪽 강도를 갈라서 차이나게 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을 제가 거룩이 입혀졌다 라고 어머니께 설명했습니다.

거룩이란 말씀지켜서 깨끗한 행실과 마음을 행하고 실천하는게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의문의 의문을 낳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흡함일 뿐이지만

단번의 제사 라는 더 나은 제사 초과잉적 완료는

거룩이 입혀지는 것인데 그것이 이 쪽과 저쪽과의 차이성을 드러냄으로써 갈라버리는 것이 거룩이다 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사랑입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 겁니다.

이 둘을 아무리 남들이 구분 못 할 쌍둥이라고 해도 영원히 갈라버리는 그 차이가

바로 거룩이며

거룩이 임하니까 한 쪽은 미움 한 쪽은 사랑으로 갈라지는 겁니다.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잘못 만난 겁니다.

잘못된 만남인 거죠.

 

거룩이 원인 없이 일방적으로 갈라놓은 차이성이지

두 인간에게는 그 원인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함이지

그들 인간의 구원은 의미 없습니다.

 

[예수 안]만 구원이지 개인의 구원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인 거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숙제인 [예수 안]은 이 이스라엘을 책임지시는 겁니다.

어떻게 계속해서 탈락 누락 제외 소외 시키시면서 말이죠.

 

이것이 바로 오늘 처음 부분에 언급한 죽음으로써 진위를,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취지인 겁니다.

 

자 지금까지 들어보니 결국 무슨 소리 입니까?

맞습니다. 그겁니다.

 

십자가 라는 어리석고 미련함으로써 거룩이라는 차이성을 드러내겠다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여인네들의 눈물이란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지시러 가시는 것을

곡해한 결과인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바로 잡아 주시는 것이 너와 너 자녀를 위해 울어라입니다.

왜 심판을 무슨 수로 피할려고 하니 라는 염려인 겁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니까 깔려죽은 자가 9?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다들 혀를 찹니다 얼마나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벌받았냐고

하필이면 예수님이 옆에 있어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어서 저런 형벌을 받은 겁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현미경으로 벌레를 관찰하는게 아니라

발레가 우리를 관찰하는 식이다고 실재계의 표현을 하시는 겁니다.

즉 그 다음 차례는 너의 차례인데 우짜지? 과연 피할수 있을까나?

이건 뭐 놀리는 것도 아니요 완전 살벌하기 짝이 없는 예수님의 발언입니다.

 

또 유대인들의 제사에 빌라도의 폭력으로 인해 유대인의 피가 제사제물에 묻었다고

이런 일이 있으면 안된다고

예수님은 구원자라고 자칭 이야기 하니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실겁니까? 라고

정부의 폭행에 어떤 행동을 취하실 것인지 말해달라고 하니

 

나도 빌라도 손에 죽으러 왔는데

뭐 심각한게 있니?

뭐가 심각한데 라고 하니

믄 말을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참으로 기가막히고 코가 막히죠

다른 한 쪽 강도의 심정이 이런 식입니다.

아니 구원자라면서 자기도 못구하는데

무슨 남을 구원하겠냐고?

지금 당장 너와 우리를 구원해 봐라 라고 한 쪽 강도가 비웃습니다.

 

그 정도로 심각하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요쪽 강도와 둘이 짞짝꿍 공명이 되어서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오냐 내가 진심으로 진심으로 말한다 오늘 너와 함께 나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마치 마귀들이 우편에 앉으시는 예수님을 봤다 라는 소리에

비로소 격분해서 돌을 던져 살인을 펼치는 모습과 똑같이

 

이 말 너와 내가 함께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는 소리에

 

이것들이 완전 돌았구나 우와 살다 살다 이런 개그는 처음본다고 악함과 분함을 노출시키는데 주저함이 없이 자동적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아니 해골의 언덕에서 이 무슨 희한하기 짝이 없는 대화입니까?

 

거룩이라는 차이가 얼마나 지독하게 이 둘을 갈라놓는지

아예 극과 극으로 갈라놓습니다.

 

인간 쪽에서 그 어떤 제사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해골의 언덕 골고다에서의 단번의 제사입니다.

 

? 인간이 드리는 제사는 거룩한 장소도 정작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고

예수님을 죽여도 예수 말 마따나 될까봐 성전 밖에서 잡아야

성전 안에서 잡는 것이 아니게 되니까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을 의식하는 모습들입니까?

이런 것들이 다 인간의 제사에 다 들어가 있는 살인의지인 겁니다.

7번 용서 했는데 몇 번 더 용서할까요 라는 것도 결국은 살인의지인 겁니다.

물론 모르지요 모른다고 정당화 될 수 있는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참과 거짓이라는 진위를 전적으로 예수님 앞에 내려놓을때에서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되는 거지요.

아니 그것이 밥벌이 인데 어떻게 내려놓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예 그 속에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지혜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리어 갇혀 버려서 지혜자의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진위가 아니면

도저히 빠져나올수 없는 그런 상황에 놓여버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는 것을 떠나서

지혜자의 지혜를 직접 목격하는 목격자 증인이 되는

더 나은 초과잉의 770번 용서당함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진위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나의 숙제에서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손을 때어버리는 상황이 되는 것이겠죠

 

누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벼랑 끝에서 손을 땔 수 있는가 라고?

과연 그렇게 말한 자신은 과연 그렇게 하고서 말을 하냐고 말이죠

이미 그 사람의 강의 속에서는 때려죽어도 안한다는 것이 나타나더군요

그런데 왜 지도 못하면서 남에게 강요하듯이 하냐 말이죠

 

그 사람의 주장은 그 정도로 주체자 곧 자유자가 되어라 라는 취지인 겁니다.

노예로 살지 말고 말이죠.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사람도 단 한번도 자유를 1초도 누린 적이 없다 라는 사실입니다.

주체자도 되어 본적도 없다 라는 거죠.

 

그저 노예같은 상황이 보이니까 화풀이 하는 거죠.

나는 내 멋대로 사는데 왜 남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왜 자꾸 노예로 살까

노예로 살면서 불평불만인 노예근성을 나타낼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는 그 사람은 자유자일까요? 자유자가 아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철저하게 갇혀버린 겁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누구든지 다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강요된 선택에서의 자유갈망인겁니다.

갇혀도 너무 너무 갇혀 버린 겁니다.

인간중에 가장 뛰어난 지혜로써 남을 7번 용서한 수준 인 겁니다.

맞습니다. 인간 중에 가장 뛰어난 것 맞습니다. 앞으로 89번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모호하다는 겁니다.

의문스럽기 짝이 없다 라는 겁니다.

과연 그런다고 주체자가 되고 자유인이 되느냐 하는 거죠.

자기최면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본인도 그런 생각 자체가 강요된 선택에 의한 것인데??

 

진짜로 뛰어내렸다 맞다 나는 자유인 맞구나 내가 주체자가 되어서

내 마음껏 한 번 해 봤구나 라고 해도

 

곤고함은 또 그렇게 자유한 만큼 더 몰려 옵니다.

오호라 나는 자유하고픈데 내 육체에 또 다른 법이 있구나 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것을 해내어서 뛰어내려서 자유자가 되어버린 원인이 되어 버리면

그 원인 때문에 더더욱 곤고해지는 겁니다.

자유해지기는커녕 더욱더 얽매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또 뛰어내려야 할까요?

 

그래서 그런 선불교사상은 초인이 되고픈 그냥 자기가 보기에 그것이 깨끗하고 깔끔하게 보이고 또 보이길 원해서 그러는 겁니다.

구질 구질하게 노예로 산다는 것 자체가 그 머문 자리가 너무 더럽고 추잡스럽더라 말이죠.

굽신 굽신 거리면서 원치도 않는 삶을 사는 노예

머문 자리도 오염이 될 정도로 위생적으로 다 죽음의 그림자만 여운으로 남기는

 

그래서 그게 싫으면 깔끔한 거룩을 한 번 누려보자 라는 식인 겁니다.

 

그런 초인과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 정반대인 겁니다.

초인의 지혜와 정반대로 어리석고 미련한 길로만 골라 갑니다.

 

? 초인 조차도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아무리 초긍정을 다 끌어모아서 깔끔하고 완벽성을 추구해도 말이죠

자꾸 뒤돌아볼 수밖에 없는 뒤끝이 찜찜하게 남게 되는 것이다는 것이죠.

단번에를 아무리 꿈꾸어도 소용이 없이 늘 여운을 남는 겁니다.

하도 못해 최면을 걸어도, 처세술을 부려도 안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성소의 휘장을 찢을수가 없거든요

이 쪽에서는 안되는 겁니다.

저쪽에서 찢고 와야 거룩이 저쪽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겁니다.

단 번에 다 이루는 겁니다.

더 이상 초인이 될 필요도 없이 초인되기를 할 필요조차도 전혀 없이 그냥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자유 말입니다. 개인의 자유란 전혀 없거든요.

 

왜 안되냐? 사랑이 없기 떄문입니다.

사랑의 주체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휘장도 못 찢을뿐더러 의문의 증서도 못 찢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초인되기 자유자가 되기 주체자가 되기 자체가

의문의 의문을 더욱더 낳게 되는 겁니다.

 

사랑도 없으면서 사랑이 넘치는 열정을 불태우고 싶은 겁니다만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 앞의 자신을 불태우는 모세의 열정일 뿐인 겁니다.

 

모세는 자기에게서 사랑이 거짓임을 알고 변화산에서 진짜 사랑에게 비로소 제발 죽어주시옵소서 라고 외치는 겁니다.

 

자신의 사랑이 되도 않는 말짱 거짓음을 제대로 안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래서 화목제 곧 죽으러 왔다 라는 겁니다.

헬라인의 최고의 지혜로 아무리 이 십자가를 풀려고 해도 안 풀리는 이유 인 겁니다.

죽으러 오신 겁니다.

 

참과 거짓의 진위는 결국 죽음에서 결정나는 겁니다.

 

벼랑에서 뛰어내림으로써 결정이 나는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것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그러면 천사들이 두 손으로 받쳐 줄 것이다 라고 하는

두 번째 마귀의 시험과 같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경제 사회요 두 번째는 종교요 사랑문제요 세 번째 문제는 정치 문제이듯이

선불교는 뛰어내려라 라고 교리 플러스 실천을 자꾸 요구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적 없습니다.

지금 왜 너는 너 자신을 구원 못하냐 라고 자꾸 두 번째 내용을 들먹이는 겁니다.

주체자 라메? 자유자 라메? 뛰어내려라??? 구원자 라메???

 

제대로 조롱하는 거죠.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23:35, 개역)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23:36, 개역)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23:37,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23:38, 개역)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23:39, 개역)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는 자는 이런 조롱을 안 받습니다.

조롱 받을 이유가 없거든요

자유자 이니까 말이죠.

 

우와 나도 저렇게 단 1초라도 자유롭고 싶다고 부러움을 싸죠

 

그런데 자유와 전혀 무관하게 철저하게 복종하십니다.

 

그러니까 선불교는 바로 저렇게 사기를 친다고 노예로 만든다고 욕을 합니다만

 

아니 입을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 말이죠

아니 누가 노예가 되어 본 적이라도 있던가요?

단 한 사람도 복종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즉 의인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유는커녕 복종 즉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앞으로 인간은 예수님께 복종하라? 천만의 말씀

 

예수님의 취지는 복종하라 라는 취지가 아니라

교리 플러스 실천

말씀 플러스 행함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불교가 되고 선불교가 되고 인간의 손으로 지은 기독교가 그런식이고

백날 해 본들 자유는커녕 더욱더 옭아매는 노예만들기죠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선불교가 지금 자유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하면서 다들 노예로 만듭니다.

결국 누워서 침뱉기일 뿐인거죠.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래는 식이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복종하신 것은 너희도 복종하라가 아니라

이미 복종이 덮쳐졌기에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리라 라는 겁니다.

 

행하라가 아니라 보게 된다는 겁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보는 자는 살고 행하는 자는 죽는다는 겁니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그냥 다 죽어 마땅하다 라는 심판을 부으신다는 겁니다.

복종은 심판을 붓는 겁니다.

인간의 복종은 백날 복종해 본들 심판을 부을수 없는 겁니다.

신이 되어버린 인간은 연민에 빠져있기에 심판을 부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남들은 못해도 나는 할꺼다 라고 고집 피울려고 하지 마세요

인간의 손에서 떠난 문제인 겁니다.

 

바로 요점은 이겁니다. 인간의 손에서 떠난 문제를 자꾸 손을 대고 싶은 겁니다.

자유에 대해 손대고 픈 겁니다.

의에 대해 거룩에 대해 깨끗함에 대해

 

지금 현시대에의 결핍은 자유 아닙니까

현대인의 결핍인 자유를

자꾸 손을 대고싶은 겁니다.

 

인간 손을 떠난 문제라고 해도 어쩔수 없이 그 단절성을 성령론이든 뭐든 하여튼 할 수 있는 것 다 동원해서 손댈려고 하는 겁니다.

 

생명나무는 철수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심지어 생명되신 예수님 마저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니 확정의 확정을 제대로 직시해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단절의 단절인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결핍스러워서 더욱더 갈급하는 겁니다.

지옥간 부자가 말도 안되게 천국간 거지나사로를 부려먹을려고 하듯이 말입니다.

지옥간 것 조차도 모를 정도로 직시를 못하는 상황이

단절의 단절인 겁니다.

 

자유자를 줘도 우리의 어두운 눈은 그릴 죽여버린 겁니다.

이제 그 분에게 맡겨진 바 일 뿐입니다.

시도조차 하지 마세요

복종도 하지 마세요

뛰어내리지도 마세요

그냥 가만히 계세요

그냥 생긴대로 사세요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에서 인간을 규정한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의 징후입니다.

그냥 그 증상을 누리세요

막사세요 라는 겁니다.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왜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까

이제 더 이상 7번 용서에서 8번 용서를 욕심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반대죠 770번 용서당함를 누리는 겁니다.

 

이것을 증상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증상을 즐겨라 누려라 막살아라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십자가 라는 진짜 거룩만이

우리에게 즐겨라 라고 하지

그 어떤 누구도 즐겨라 라고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누가 저에게 질문하기를 주님이 주시는 재미가 뭐냐 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단번에 주신 피 흘리심을 누리는 겁니다.

즉 용서 받는 것 외에는 다른 누림은 없는 겁니다.

세상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딱 하나 이것만은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다 주신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입니다.

우리는 이 죽으심만을 누릴 뿐입니다.

곧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7번의 행함을 버리고

이 십자가의 770번의 용서, 십자가의 일만달란트의 용서를 누리는 것 뿐입니다.

 

그래야 나는 죄인이고 즉 나는 무조건 틀렸고

예수님만 정녕 의인이였다 즉 무조건 옳았다는 겁니다.

즉 내가 구지 의인일 될 필요가 이제 없어졌다는 겁니다.
의인이 되어 본들 또 의문의 의문의 꼬리로만 계속 찝찝해 질 뿐입니다.
의인이 될 필요가 없이 이미 의인 됨을 누릴 뿐입니다.

누구 때문에?

유일하게 의인 되심을 이룬분 때문에 말입니다.
그 분만 의인 되시면 된 겁니다.

명료한 겁니다.

이것 보다 더 또렷하고 완료된 것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즉 다른 것은 다 흐릿한 불분명한 것 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만 옳았다는 것만을 외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는 겁니다.

 

이 명료한 피 흘리심 외에는 다 모호하고 흐릿하며

의문의 제사들 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에서 명료한 자신의 사랑을 또렷하게 보여주십니다.

 

정녕 의인 이였고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드러나는 명료한 증거 증상입니다.

 

또한 그 증거로 당신은 지금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누리고 맛보고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피흘리심의 용서 때문에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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