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불편한 거룩한 자 (15)

 

두 패로 갈라서 단절시키는 거룩의 반복

 


(
15: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15:2, 개역)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15:3, 개역)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15:4, 개역)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15:5, 개역)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시 15:1, 공동) 『야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시 15:2, 공동) 『허물없이 정직하게 살며 마음으로부터 진실을 말하고』

(시 15:3, 공동) 『남을 모함하지 않는 사람, 이웃을 해치지 않고 친지를 모욕하지 않으며,』

(시 15:4, 공동) 『야훼 눈 밖에 난 자를 얕보되 야훼 두려워하는 이를 높이는 사람, 손해를 보아도 맹세를 지키고,』

(시 15:5, 공동) 『돈놀이하지 않으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 이렇게 사는 사람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지난 시간에 옳치 않은 예수님, 나쁜 예수님, 마땅치 않은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즉 이단 보다 더 나은 이단 예수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은 한 쪽으로 치우쳐져서 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자들인데

여기에 예수님은 더 더 더 막살아 버리니까

인간의 입장에서는 나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인간들 본인이 나쁜놈이요 옳지 않은자임을 모르기 때문에

가해자들이면서 피해자라는 망상에 빠져 살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로 그런 가해자들 보다 더 나쁜 놈으로 비쳐져서

인간 자신들의 거울로써 인간 보다 더 인간적인 분신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너가 달려 죽어야 할 십자가의 저주에

내가 대신 달렸다는 겁니다.


내가 바로 너다. 쌍둥이 권법. 너가 달려 죽어야 할 십자가에 내가 달렸다. 즉 너가 십자가에 달렸다 라는 겁니다.
 

그 옳지 않은 십자가가,

그가 나 보다 더 옳았다는 겁니다.

 

자 이것이 세상과의 단절 시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걸림돌이지요

즉 옳지 않아 보이는 겁니다.

 

처음에는 오독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다음에는 정독이다는 겁니다.

 

나 보다 더 옳다 라는 겁니다.

 

나쁜 놈에게서 마저도 나쁜 놈으로 여겨지는 예수님만이 진짜 옳으신 분이다는 겁니다.

나쁜 놈들도 싫어하는 십자가

걸림돌

부딧히는 돌(바위) 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나쁜 인간이라는 전제성이 깔리는 겁니다.
아니 그런데 누가 자신을 날때 부터 악한 자이다 라고 규정할 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만 보이시겠다는 겁니다.
남이 아닌 [바로 너]에게서,
곧 나에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 나에게서 규정되는 나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은 소급해서 시편의 다윗이라는 인물이 바로

이스라엘 전체의 걸림돌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다윗의 고백은 바로 예수님만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두 패로 갈라놓는 겁니다.


사실상 두 패 이기는커녕

한 패거리의 일방적인 압도적인 승률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vs 딸랑 한 명 다윗이니

두 패라고 볼 수 [없다]는 겁니다.

일방적인 선언이요 이것은 역전이 불가능한 상태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없음]을 가시화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두 패로 갈라놓아서

지옥이 땡기는 자와

천국이 땡기는 자로 가르는 의미인 겁니다.


불가능성 보다 더 더 더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이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의 시편 14편과 오늘 15편도 마찬가지

 

아니 다윗은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까부냐 말이죠

이스라엘 전체가 다 치우쳐져서 내어버려둠을 당한 판국에

지 혼자 두 패로 갈라졌다는 이 거룩을 찬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데

 

지 혼자 말이죠.

감히 겁도 없이 뻔뻔스럽게 이런 노래를 부른다 말이죠. 마치 마리아의 찬양 같습니다.


(눅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현실은 이스라엘 전체가 이 다윗 왕 하나 죽일려고 다 달려들고 있는 판국에

이런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고

 

지금 거룩이 이 두 패로 갈라놓았다고 자신만만 뻔뻔스럽게 노래 부르고 있다는 겁니다.

 

뭘 믿고 말이죠?

 

두 패는커녕 국가인구의 백성 모두가 한 쪽 그리심산이고

다윗 지 혼자 딸랑 에발산에 올라간 입장인데

 

거기서 시온을 노래하고 있으니

이 참담한 현실을 다윗은 오히려 더 신나게 지루박을 땡기면서 노래부르더라 말이죠.

 

이스라엘 전체 인구는 다윗을 죽이지 못해서 배아파 씩씩거리면서 궁시렁 거리는데 말입니다.

 

제가 이런 내용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코메디 종류에 슬랩스틱 코메디가 있는데

이 슬랩스틱 코메디가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할려면

아주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 피식 나오는 웃음이라는 얼룩으로 대반적이라는 전복이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웃음의 기능은 전복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앞과 뒤가 명료하게 또렷히 갈라질때에

구별이라는 분리라는 거룩성이 분명해 진다는 겁니다.

 

흔히들 성령을 개방성이라고 우기는데

얼마나 모호한지

성령이라는 거룩한 영은 오히려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선이 또렷히 구분이 되는 선명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마리아가 아무런 원인이 없이 배가 불러오니까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율법을 쥐었다는 티를 낼려고 돌삐를 들었다는 겁니다.

 

졸지에 돌삐에 맞아 죽어 마땅한 신세가 된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와 다를바가 없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만 생각하면 늑대탈을 쓴 양무리가 권씨 생각나는데요

이 사람이 지도 여자인줄도 모르고 일종의 율법(말씀)을 쥔 허세를 허구를 쫏다 보니

남자와 같이 다시는 죄를 짖지 말라고 말씀을 인용하면서 지도 그렇게 주장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 사람은 죄가 뭔지를 모르는 겁니다.

죄란 이 혼자 지을수 없습니다.

손뼉소리도 짝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부딧혀야 소리가 나는 겁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증상일 뿐입니다.

배후세력은 따로 있는 겁니다.

그 여자를 잡아서 예수님을 시험해 보겠다는 배후세력을 들추어내지 못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을 쫏은 겁니다.

 

그런데 딸랑 독자적인 홀로 너는 다시는 죄 짖지 말라는 그 사람 개인행동을 잘하면 된다는 식이

 

바로 율법을 쥔 뱀의 후손인 남자들의 해석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여자의 후손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묻듯이 너의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겁니다.

 

너를 책임져줄 남자가 있느냐? 라는 겁니다.

너를 끝까지 책임져줄 신랑이 있냐 라는 겁니다.

다들 속이고 도망쳐 버린 아담의 속성들 뿐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무모하게 나서는 당당함을 보이는

이 관계성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배후세력이다는 겁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 졌어요 라는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증상이다는 겁니다.

그 어른은 사회의 증상이고 구조의 증상이니 소급해서 올라가면

모조리 다 육의 세상 곧 악마의 세상의 증상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뛰어들었다는 겁니다.

배후세력을 들추어 내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돌삐 들고 남자들이 치사하게 여자 하나 돌삐 던져 죽일려고

마리아에게 달려들어 돌을 던지듯이 뒤 쫏습니다.

마리아는 도망치면서 얼마나 억울해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슬랩스틱 코메디의 채널돌리기는

그 심각한 상황을 웃음으로 만듭니다.

 

성령을 받아 마리아가 기도를 하게 되니

이제는 도리어 마리아 혼자서 엄청나게 큰 불타는 바윗덩어리를 들고

짱돌을 들고 쪼잖하게 돌삐던질려는 자들을 도리어 쫏아가면서 던질려고 하니

머슴아들이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쁘다 라는 겁니다.

 

이런 역전이 바로 땅에 뭐라 뭐라 쓱쓱 쓰니까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돌삐 던질려는 자들이

하나 둘 씩 도망쳐 다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슬랩스틱 코메디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장면처럼 말이죠.

채플린이 도둑으로 몰려 도망치다가 오히려 이제는 경찰이 채플린이

 

배후세력을 밝히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이라는 분별성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들 악마들이 주장하는 성령은

그저 자신의 옳음을 어떻게 내세우고자 하는 취지(도와주는, 배터리 충전, 초인으로 변신)이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라는 겁니다.

예수 라는 용어만은 남발하겠지만 말이죠.

그것도 자신이 옳음을 내세우고자 하는 가면으로써 예수(모호한, 의문의)

내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성령이 증거하는 예수님은 옳치 않은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 맞물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와 맞물려야 하고

배후세력인 악마를 들추어내면서 증거되는

밝히 보이는 또렷한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옳다 라는 육의 인간의 주장에 그 옳음을 나쁘게 만들면서

바로 그들에게 옳치 않다 라는 나쁜 예수님으로 취급받는 예수님이어야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10:3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제대로 된 또렷하고 명료하고 선명한 두 패로 갈라버리는 거룩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결국 거룩은 인간의 손에 다루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기어코 성화론자들은 거룩도 인간이 하기 나름이다

성령만이 도와주면 인간도 할 수 있다 라는 식인 양다리 걸치기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성령이 뭔지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세상 사람보다 더 악한 모습인

악한 세대가 기적을 바라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단절성 곧 성령의 방법은

요나의 표적 곧 걸림돌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겁니다.

이 불편성을 숭고라고 합니다. 거룩은 거룩인데 불편한 거룩이 숭고라고 합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자 이야기를 통해서 이웃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자기를 옳게 여길려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이웃 개념을 비켜가는

오히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웃의 의미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 본인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배후세력을 들추어내는 참이웃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심각한 것이 전복이 되고

(오히려 마리아가 수 많은 돌삐 든 남자들을 뒤 쫏아가고 남자들은 도망치고)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런 나쁜 짖을 예수님은 또렷히 하는 겁니다.

 

나쁜 인간 보다 더 나쁜 예수님의 십자가지혜가 더 옳다 라는 겁니다.

 

 

(15: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15:1, 공동) 야훼여! 당신 장막에서 살 자 누구입니까? 당신의 거룩한 산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

(15:1, 쉬운)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다윗의 시> 여호와여, 주님의 거룩한 장막에 살 자가 누구입니까? 주님의 거룩한 산에 살 자가 누구입니까?

(15:1, 킹흠정) (다윗의 시) 주여, 누가 주의 장막에 머무르리이까? 누가 주의 거룩한 산에 거하리이까?

(15:1, 한글킹) 다윗의 시, 주여, 주의 장막에 누가 거하며 주의 거룩한 산에 누가 거하리이까?

(15:1, 현대인) (다윗의 시) 여호와여, 누가 주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으며 누가 주의 거룩한 산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15:1, 현대어) [하나님이 내리신 조건; 다윗의 노래] 여호와여, 그 누가 주님의 장막에서 살으오리까? 그 누가 주님의 거룩한 산에서 머무르오리까?

 

거룩한 자가 누구냐 라고 다윗이 외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 본인도 이 거룩한 자를 누구이냐 라고 묻는 입장인 겁니다.

 

그런데 이거 아니고 이거 아니고

뭐뭐 아니고 뭐뭐 아니고 라는 식으로 아닌자 이다고 구별 단절 시키는 식인 겁니다.

 

부정의 표현으로써 말입니다. 이래야 또렷하게 분별이 됩니다.

 

이상하게 이것을 못하는 것이 악령받은자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긍정을 표현해야 모호해짐으로써

모호한 [자기가 옳다] 함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밝히 보이는 십자가 보다

모호한 흐릿한 의문의 자기를 주장하는 겁니다.

어떻게든 의문의 자기를 집어 넣는 것이 개혁주의요 성화론자들인 겁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인물을 찾는데 정신 없는 겁니다.

옳은 교회

옳은 목사를 찾는 거죠.

 

그것이 무너지면 오히려 모호한 것들이 사라지고

또렷한 것이 나타나는 겁니다.

 

즉 성령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다 죄입니다.

배후세력이 악마 이다는 겁니다.

 

거룩한 산에 누가 오릅니까?

 

이러 이러한 자는 아니다 라는 겁니다.

 

아니다 라는 불편성을 들이대는 겁니다.

 

거룩은 바로 이런 불편함을 주장하는 겁니다.

 

그 불편함을 조건으로 보고 그 조건을 갖추면 과시하고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불편함이 오히려 옳았다 라는 겁니다.

오죽 하면

얼마나 못나고 못난이였으면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무가치

무능

가망없는

사망의 그늘에 주저 않은 자

흑암의 백성

개같은 이방인

 

에게만 그 귀에 응한 희년 곧 복음이다는 겁니다.

그들에게만 의미 있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죄인만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불편한 예수님입니까?

 

오죽하면

얼마나 불편했으면 세리와 죄인과 창녀의 친구라는 별명이 있습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죄인의 친구 말입니다.

 

이것을 또 역으로 이용해서 불편함을 제거하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먹보에 술꾼 이라고 예수님을 표현하는데

이 역시나 성화론자들이 쓰는 수법과 같은 겁니다.

자신의 술 먹기를 정당화 할려고 하니 말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동도 심지어 모든 인간이 인정하는 거룩한 착한 모습일지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더럽다 라는 겁니다.

그 모든 행동에 대한 불편한 예수님

옳지 않은 예수님

나쁜 예수님

마땅치 않는 예수님이다는 뜻인데

 

오히려 그것마저도 자기 행동을 정당화 하는데 역이용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양무리가 주장하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자신들의 옹호이지

예수님이 왜 그런 행동을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겁니다.

숨어있는 악마를 들추어내는 불편한 예수님을 말하기 싫은 겁니다.

 

양무리가 단순히 개인 작은 집단이 아니라

결국 한국의 전체 자칭 정통 집단을 대표하는 식이기에

전체 구조로 봐야 하는 식인 겁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로부터 공격받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거룩성이라는 단절성

곧 두 패로 나누어짐의 명료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2:34, 개역)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2:35, 개역)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누가복음을 보면 또 성령행전 즉 사도행전을 보면

성화론자들의 주장이 순 엉터리임을 보게 됩니다.

 

단 하나도 인간이 성령 받아서 하는 행동들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성령이 인간을 배치시킴으로써

성령 혼자 일을 다 처리하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오히려 인간이 보고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것이지

마치 인간이 성령을 소유하듯이 조건을 갖추면 된다는 성화론자들의 주장은 아예 없는 겁니다.

 

설사 그런 성화론자들의 주장들이 눈에 보이는 교회와 사람들에게 먹혀 들었다 손 치더라도

얼마나 모호했으면 그런 내용은 감사하게도 성경에는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인 겁니다.

 

마치 단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적이 없는 부자청년의 모습과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이 없다는 탕자의 형 맏아들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러했다는 겁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다 더러운데 왜 자꾸 옳게 보일려고 하느냐 말이죠.

거기에 대한 강박증이 일종의 예수님에 대한 복수심처럼 작용하는 일관성 동일성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바로 이런 인간성에 맞물린 불편한 복음이다는 겁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나쁜 복음이다는 겁니다.

 

뭐뭐 아니고

뭐뭐 아니고

 

안 걸리는 것이 없이 다 걸리는 겁니다.

 

결국 남는 것은 예수님 뿐입니다.

 

아들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본 것은 결국 예수님의 때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자로 성경을 보는 자는

결국 자기에게로 귀결 되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 보란 듯이

 

단 한번도 성경을 본 적도 없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조차 모르고

여호와가 누구인지도 알지도 못했던 자들이

 

오로지 성령(원인 없는 결과)으로 인해 천국 갈때에

 

그들은 반발할 겁니다.

 

저 놈이 천국 간다면 나는 안 갈 꺼다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나는 저 놈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저 놈이 천국 갈꺼면 나는 차라리 지옥 갈꺼다 라고 떠벌리면서 장담할 때에

 

 

바로 저 놈에 해당되는 불편한 자가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 불편한 예수님을 다윗은 지금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잃어버린 자도 결국 예수님이요

죄인도 예수님 뿐이였으며

죽은 자도 예수님 뿐이였던 겁니다.

 

인간은 그저 자기 잘난 것에 예수든 하나님이든 다 스폰지처럼 빨아서 흡수시킨

동일성 추구였던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차이성으로써 너가 거부하는 그 거부성

그 단절성에 정확하게 또렷히 명료하게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가 지독스럽게 싫어했던 그 모습

 

바로 옳지 않다 라는 그 모습에

 

옳지 않은 예수님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바로 그 옳지 않은 예수님이

나 보다 더 옳다 라는 명료함이다는 겁니다.

왜 명료하냐? 내가 거부했던 것이 명료했기에 말입니다.

이것이 걸림돌입니다. 요나의 표적입니다. 악한 세대가 구할 수 없는 표적인 겁니다.

나의 죄악성이 맞물려서 예수님이 옳치 않다고 주장하여 불에 태워 화형시켜라고 내 입으로 외친 그 대상이 바로 예수님이였다는 그 예수님 옳다는 겁니다.

 

내가 불태워 죽여라 라고 분명히 선언했던 그 며느리 다말이

 

누구 보다 제일 싫어했던 그 예수님이

 

나의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이다는 명료성인 겁니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한 진짜 사랑입니다.

 

(고전 16:22, 개역)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ps)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누가 봐도 악하다고 소문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

 

십자가라는 불편한 걸림돌 (싫어버린바 된 나쁜 예수님)

 





https://www.youtube.com/watch?v=cEujIhCa_0o

 

(24:3, 개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24:4, 개역)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맘 깨끗한 자 라는 가스펠인데




 

 


물론 이런 찬양도 잘못 된 거죠
. 시편을 그대로 못 담았습니다.

 

다윗의 찬양을 제대로 살릴려면 그냥 깨끗한 자가 아니라

손 안 더러운 자 라고 해야겠지요 ㅋㅋㅋㅋ

 

부정성의 의미를 담아서 갈라내는 불편한 거룩을 가미시켜야 겠지요

물론 육의 한계임을 아니까 그냥 넘어가고 이런 것은 찬양이 아닌 것을 아니까 말입니다.

 

그냥 인간들 자기들 좋아라고 부르는 가요요 팝입니다.

 

불편함이 없기에 복음이 아닌 겁니다. 성화론자들과 똑같죠.

성경말씀에 더하거나 뺀 모습이다는 것

 

개사를 하면 이렇게 하면 좋을 듯 싶네요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안 더러운자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안 악한자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안 부패한자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아니 요동한 자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아니 행악한자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이웃에게 훼방치 아니한자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배신치 아니한자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혀로 참소치 아니한자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변리치 아니한자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자기유익을 구하지 아니한자

주의 산에 오를 자 누구랴 등등

 

이것이 구약의 시편에서 신약의 누가복음으로는 이렇게 바뀝니다.

 

저 노래가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이렇게 부릅니다.

나는 저 세리보다 토색치 아니했으며 라고 말입니다.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런데 세리는 내가 바로 저기(시편 15)에 해당된 거룩의 반대인 자입니다.

 

주여 그 거룩으로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거룩을 제대로 본 자의 고백이요 찬양입니다.

 

시편도 결국 율법으로써 누구 라는 인물을 겨냥하고 있는 몽학선생입니다.

 

거룩이 누구다 라고

 

그런데 바리새인은 거룩이 누구다 라고 주장하는게 아니라

자신은 거룩을 지켰기에 시편 15편에 해당되는 거룩한 자가 나 맞다고 주장한 거죠.

 

거룩을 내부에서 찾으니까 의문만 반복이요 또렷함이 없는 겁니다.

거룩이 자신을 배제 시키는 것인줄 몰랐던 겁니다. 단절성인줄 ~~~

 

그러나 세리는 다윗의 고백처럼 자신은 거룩에서 배제된 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거룩을 찾는 겁니다. ? 자신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이 명료하고 또렷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으로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겁니다.

 

아들만이 거룩할 뿐이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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