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의미 2  08.07.24 22:24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07-23 08:46:00, 미래
 
렘15:1~4절을 얘기할때 14장에서 그들이 잘못을 깨달아 회개하는것 같았지만
 
그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자신들이 어려움을 당하기에 어려움을 모면해 보고자 하는 회개였고
그 회개는 하나님의 진노를 더 사게 했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기근 염병이 더 추가 되었구요
 
이스라엘의 진정한 마음이 없었기에 하나님은 렘15:1~4절의 말씀을 하실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답변 :
 
아닙니다. 인간의 진정한 회개의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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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08:49:18,
 
더불으 중보기도에 대해서도 중보기도가 미치는 한계가 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악한 행실을 고치치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고자 하는 사람에겐 중보기도가 필요하다
 
약한자에겐 중보기도가 잠시 돕는 역할도 하지만 그것도 전부가 아니라고 하거든요
 
예레미야의 경우가 예가 되겠지요
 
답변 :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기도를 하는 겁니다.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원망을 듣고 다 싹슬이 할려는 여호와 하나님께 긍휼을 요청하듯이 말이죠.
 
(출 32:32, 개역)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
(출 32:33,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출 32:34, 개역)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출 32:35, 개역) 『여호와께서 백성을 치시니 이는 그들이 아론의 만든 바 그 송아지를 만들었음이더라』
 
모세의 말을 안 들으면 너희들은 작살이 난다는 것인데, 물론 잘 들으면 복을 받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는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들으면 작살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 말씀을 안 들으면 작살내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조차도 그 기도의 몫은 예수님의 몫이듯, 자꾸 인간의 행동을 요구하는게 아니라, 그 행동을 유발케 해놓고 자꾸 한 인물을 초점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그분의 행동과 비교를 해 그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얼나마 어설픈지를
그래서 나 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분이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가지도록 자꾸 몰아가기 위해서 현재의 미흡한 모든 미완료를 부정해 버리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기도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성부와 성자간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모든 인간의 기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기도 외에는 안 듣겠다는 것을
예레미야가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그럼 우리가 하는 기도란 나의 기도 안 받고 주님의 기도 대로 된다는 것을 믿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나의 내부의 기도가 아니라(문자적인 법일 뿐), 나의 외부에서 기도하시는 분(마음 곧 영의 기도를 드리는)의 기도가 옳았음을 바라는 기도를 하기 위한 것이 예레미야가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육과 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겁니다.)
 
예수님 이라는 분 외에는 일체 기도 안 받고 예수님의 기도만 받겠다는 취지의 예레미야의 증거하고 몰아 붙이기에 더더욱 저쪽은 오해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모세의 긍휼을 바라는 기도를 정작 했지만 그 긍휼은 도리어 원망을 부채질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증거궤 안에 그 원망 덩어리를 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즉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원수됨을 만들어야 하듯이 말이죠.
 
결국 예레미야는 미움 받을 짓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기도도 그런 취지입니다.
 
나 밖에서 기도하시는 분을 보기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나 말고 다른 분이 기도하고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듯이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는 나의 기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기도하듯이
내 기도 아니요 주님의 기도가 옳았습니다. 정말로 주님의 기도 대로 실행이 되는 군요 라고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기도를 안 받습니다. 자 안 받는다고 하니 인간은 대뜸 그럼 말라꼬 기도하느냐 라고 나오지요. 그렇기 때문에 편애란 반드시 미움을 유발케 하듯이
주님의 생명나무의 사고방식은 반드시 인간의 선악의 사고방식(법적 사고방식)을 유발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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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08:56:35,
 
지금 이스라엘은 은혜를 넘어서 하나님이 이미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주셔서
알것을 다 알기에 스스로 고쳐야 될것이지 누가 기도해서 될것이 아니다 하거든요
스스로 자기를 고쳐야 한다고 말이죠
 
이것도 주님이 선악으로 다가오시는거군요
 
따라 올테면 따라와봐 하고 말이죠 하하
 
답변 :
 
당연하지요 상대방에게 선을 요구하는 듯이 보이면 인간은 선을 갖추어 버립니다. 그래서 지적받을 꺼리를 미리 다 제거하고 거룩을 갖추어 버리면 더 이상 매 맞을 일이 없을 것이다 라고 여기게 되죠. 그렇게 되면 주님 또한 선으로 응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갖춘 그들이 싫어하는 저주 받는 모습을 갖추어서 고발하는 겁니다. (매 맞을 일을 다 제거했는데 대신 매 맞는 모습으로 오게 되니 걸림돌이 되는 거죠. 괜히 그냥 걸림돌이 아니라 상대방의 그런 모습을 반대하고자 등장하는 걸림돌입니다. 그거 무조건 가짜라고 나오면 상대방은 아무리 참을 갖추어도 거짓이 되니 이 일방적인 영의 일에 당하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떤 방책이 없는 겁니다.) 마치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 매국노와 죄인이라는 타락한 자들의 친구요 배후자요 보호자로 등장하게 되니 누가 반발합니까? 남이 아닌 바로 선을 가장 열심으로 갖춘자만이 발끈하게 되는 겁니다. 이유는 딱 하나?
 
아벨의 제사 곧 예수님의 제사만을 받기 위해
모든 인간이 드리는 제사를 가인의 제사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자기의 제사를 포기하도록 하고 왜 주님의 제사가 아니면 거짓인가를 보기 위해서
그 차이를 발견케 하는 겁니다. 우리의 제사는 법적이고 사랑이 없습니다. 남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남 보다 낫다라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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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09:18:44,
 
그리고 중보란 자기 백성을 위해 때려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를 할수 있는 사람이
올바른 중보자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제는 손을 떼고
보내라고 하신것이다 라고 하거든요
 
렘 15장 6절에서 염증이 났다고 하신 부분도
성도가 하나님을 거역하는것이 계속되고 반복되어질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제제를 가할수 밖에 없다고 하니
성화로 밖에 나올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변 :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죄 만을 상대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착각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하나님을 상대하고픈 겁니다. 그래야 사랑 답고 그래야 긍휼 답다 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선악으로 다가오는 방식을 한 두 번 속아준게 아닙니다. 마치 사사기에서 보김이라는 장소에서 울어버리니까 그 눈물로 무기를 삼는 이스라엘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착각하듯이 말이죠. 도리어 믿지 않고 울어버려서 망한 곳이 바로 보김이라는 곳입니다.
 
같은 식으로 구원을 그런식으로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바라보는 시각도 그러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이라는 일관된 모습으로 다가오게 되니
내가 돌이키는 것 보다 하나님이 돌이키기를 바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소유할려는 발상입니다. 나의 원대로 되는 장난감 하나님을 말이죠.
 
그래서 걸림돌로만 일관하는 겁니다. 절대로 그런 장단에 놀아주지 않는 겁니다.
 
지금 그 목사는 중보자 개념을 자꾸 인간의 중보로 착각하는 모양인데 인간 중에는 중보자 없습니다. 중보자란 싫어버린바 된 걸림돌만을 제시하는 곧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십자가에 밖힌 당사자인 예수님 뿐입니다.
 
그것을 마치 우리도 가능한냥 중보 기도라는 둥 중보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우기지만 정작 되도않는 중보를 해놓고서는 대접받을려고 한다는 사실에 성화론자들은 지극히 적그리스도적입니다.
 
염증이 났다는 의미는 상대적으로 주님이 이것 외에는 양보하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상대적인 인간의 것에 지긋지긋한 더러움과 위선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미래의 완료된 영광입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적인 현재의 미완료를 붙들고 있는 것들의 거짓됨을 예레미야는 밝혀내어야 하는 겁니다.
 
왜 그것들(과거 현재의 미완료성들)이 미래의 영광과의 비교에서 왜 거짓되는지를 말이죠,
 
그래서 예레미야는 문자라는 옛언약과 마음이라는 새언약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예레미야는 고난 곧 이스라엘이 받는 심판 속에 같이 들어가야만 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원수된 유대인과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처럼
실질적으로 예레미야는 심판하소서 라고 해 놓고서는 자신도 그 심판 속에 같이 심판을 받는 모습으로 일관하게 되는 겁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거역하는것이 계속되고 반복되어질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제제를 가할수 밖에 없다고 한다 라는 말이 어패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동 여부로 하나님의 제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완료가 있기에 그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 쪽에서 거역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자그렇게 되면 불합리한 하나님의 모습이지만 주님 쪽에서는 너희의 선을 받거나 보는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이미 완료한 하나님의 영광을 쳐다보게 하기 위한 취지입니다. 그게 사랑인데. 이 사랑 외에 따로국밥처럼 사랑을 갖출려고 하니 그것이 성화라는 말도 안되는 인간의 처세술 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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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10:09:22,
 
목사들이 한없이 축복의 말을 폭포수같이 쏟아내고 있지만
그것이 다 자신을 속이는것이다 성도들도 목사에게 속은게 아니라 자신에게 속은것이다
 
예레미야도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하나님이 속인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 생각때문에 속은것이다
 
백성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예레미야에게도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문제가 있었기에
하나님은 예메이야에게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하시려고
 
15장에서 예레미야를 한번 뒤집어 놓은것이다 합니다
 
답변:
 
지금 당장 그 부분에 대해서 찾지를 못하겠는데 예레미야의 원망 부분은 제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른 식으로 해석한 것 같은데 아무튼 이 부분은 좀더 제가 살펴봐야 겠구요. 전체적으로 예레미야의 원망은 원망이라기 보다는 버림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돌아오라는 부분은 전에도 말했지만 돌아오라는 취지가 아니라 도리어 너희들은 때려 죽어도 못 돌아온다 라는 걸림돌을 제시하는 취지요 약올리는 식인 겁니다.
 
그렇다면 누구만 돌아오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쪽에서 꼿아서 땡겨 이끌어 내서야 합니다. 누가 자발적으로 지옥 속에서 그 지옥을 빠져 나올수 있겠습니까? 그 지옥을 누가 집어 넣었는데 말이죠.
 
아 15장의 부분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레미야가 심판이라는 저주를 퍼붓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저주의 심판에서 제외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 속에서 참예 되어서 그 심판을 격음과 동시에 긍휼을 바라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 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불평하듯이 보이지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고 그 버림받음에 순종을 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시자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들은 자기 죄를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눅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행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고후 5:19, 개역)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자 이것이 바로 문자(법=옛언약)와 마음(영=새언약)의 차이입니다. 결국 영이라는 사랑은 육이 판단하기에 철저하게 모순 됩니다. 반대로 육은 철저하게 일관될려는 모습을 갖춥니다. 그 이유가 지적받을 것이 없도록 갖추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의 일은 늘 지적받을 것만을 나열하는 식으로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 모순인 저주가 도리어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즉 걸림돌이라는 모순만이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곧 십자가의 피입니다. 모든 인간을 원수로 삼은 그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말이죠.
 
스데반은 상대방을 자극 시켜 놓고서 저런 말 하는 영의 일에 덮쳐졌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그렇게 막고자 했던 십자가의 증거를 도리어 자기가 증거하고 돌아다니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짓을 골라 하셨습니다. 그래 놓고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합니다. 자 이런 영의 일의 일관성은 바로 현재의 모든 것을 미완료로 취급하는 겁니다.
 
다말이 창녀의 모습으로 유다를 구원하기 위해서 물증 3가지를 들고 불 속에 대신 지옥의 저주 속으로 뛰어드는 그 심판이 도리어 유다를 살리는 것이 되듯, 이 스캔달 불륜만이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자기 소유의 확보로 구축해놓은 참되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정의롭고 선한 것들은 모조리 다 거짓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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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10:11:30,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이기에 그 이상을 원해서는 안 된다
 
거짓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기 생각으로 전하며 미혹하는 자다 하는데
다 맞는말 같지 않나요
 
 
답변 :
 
아닙니다. 거짓선지자란 예수님에 의해서 결정이 되지, 거짓선지자 본인과 인간의 생각 여부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미혹하는 것 조차 주님의 각본대로 되는 겁니다. 미혹케 하는 영을 누구에게 집어 넣을까 라는 천상회의의 모습은 바로 인간 스스로의 자발적인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일체 없다는 겁니다.
 
악령을 집어 넣고 미혹케 하는 영을 집어 넣는 것은 주님에 의한 소관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누구에게든지 주님은 미혹케 하는 영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모든 한국교회의 신학과 교리는 반대 합니다.
 
인간 쪽에서 어떤 반발성 마저도 소용없게 되니깐요.
 
오로지 주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애굽의 바로 왕을 강퍅케 하시고 애굽 군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처럼
 
주님의 관심사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냄이 목적이지 인간 구원에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이 주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그런 취지도 관심 없습니다.
 
주님 본인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데 있어서 우리는 당하는 입장이고 그것에 옳았습니다 라는 나 아니요 만을 외칠 뿐인데 인간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고 하면서도 모조리 다 자기 영광으로 돌려버리는 육의 자랑에 빠져 있기 때문에 영광 돌리겠다는 자체가 바로 주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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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07-23 18:44:52, 미래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은 무조건적이지 않다 분명한 목적과 조건이 있기에
그 백성들에게 해야할 의무와 책임을 함께 주셨기에 그것 때문에
자기백성에게 심판하시고 저주를 이야기 하시고 협박성 발언을 행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어떠하든지 구원해주셔야 하고 우리가 어떠하든지 축복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답변 :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은 무조건 적이기 때문에
목적과 조건을 갖춘 것들을 상대적으로 대조 시키면서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비언약입니다.
 
예를들어 하나님의 용서의 왕 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일만 달란트 탕감하는 임금의 용서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비언약적인 자를 예를 들어서 증거하십니다. 언약을 말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비언약과의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자 주님의 용서를 말하기 위해서 일만 달란트 탕감의 용서를 받은자를 철저하게 지옥 보내시는 비유를 드십니다. 이게 용서입니다.
 
사랑이란 죄를 일체 허용하지 않고 철저하게 공격하고 질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질투를 무시하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의 갖추는 조건들이 의무와 책임이라고 우깁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의무와 책임을 지켰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것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의무와 책임을 지키고 갖춘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의무와 책임을 왜 내가 아닌 예수님만이 제대로 지킬 수밖에 없는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그런 의무와 책임을 갖춘 나의 손에서 죽으시는 겁니다.
 
의무와 책임을 지켜본들 소용없는 이유가
남의 죄를 대신 감당하는 모든 것을 내어주는 마음 곧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로 부자청년이 아무리 율법을 그 때보다 더 제대로 더 많이 더 완벽하게 지켜도
남을 위해 그 지킨 것을 다 줄 수 있는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랑입니다.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율법 지키는 자는 없습니다. 의무와 책임을 갖추고 지키는 자 없습니다. 그럼 왜 갖추고 지킬까요? 자기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만은 버리지 말라는 구원의 알리바이(법적대응의 자구책)을 마련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 사랑도 없으면서 율법을 지킨 나를 사랑해 달라는 그 죄성이 들통당하니까 뒤돌아서서 등 돌리고 가버리는 겁니다.
 
마음 판에 새기는 사랑은 일체 없으면서
눈에 가시적인 법적 행동의 완벽성을 갖추어서 자기를 사랑해 달라는 그 모순을
주님을 일체 허용 못하고
그것을 주장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도저히 넘어 올수 없도록 걸림돌인 십자가의 사랑만을 주장하시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의 무조건 성을 반드시 조건화 임무화 책임화 할려는 법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밀어 붙이시는 겁니다. 조건화 임무화 책임화 한다는 자체가 미래의 영광 보다 지금 자신의 행동으로 갖춘 것을 주장하고픈 이유인 겁니다. 그러니 부자청년을 반드시 근심케 만들어 돌려보내 버리시는 겁니다.
 
피 외 다른 것을 주장하고 다른 것을 개입 시킬려는 헛짓을 확 까발리는 겁니다. 피와 대비된 비언약을 드러내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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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18:47:50,
 
하나님은 조건이 있기에 책임과 요구를 하시기 때문에
자기백성을 다루는데 있어서 이방백성보다 다른 민족들 보다 더 심하게 철저하게 다루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규례를 지켜야 하고 늘 생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이고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우리를 뽑아 내신 이유다
 
답변:
 
만약 하나님이 뽑아 내신 우리가 또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게 되면 주님은 실패하신 것인가요?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조작해 내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또 유대인 바리새인의 한결같은 주장이고요.
 
여기에 예수님은 인간의 실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완성만을 주장하십니다.
 
자신의 약속 성취를 말하기 위해서 상대적인 인간의 행위들을 대조적으로 늘 비교시킵니다.
 
완료가 왜 완료인지를 미완료를 대조 시켜서 그 차이를 드러내듯이 말이죠.
 
그리고 우리를 선택 했다 라는 그 말에 그 목사는 선택에 아주 문자적인 강조를 하는데
선택이라는 문자를 자꾸 소유할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강조하는 겁니다. 유대인이 그런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 자신의 선택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선택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항상 선택도 소유 개념으로 생각하고 그 선택을 안 빼앗기고자 도리어 남을 해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남이 다름아닌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선택을 모조리 빼앗아 가버리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러니 선택 사상에 완전히 목 내놓은 자들이 다름 아닌 유대인이기에 유대인이 바로 예수님을 죽이는 악마의 자식들임이 드러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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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18:51:49,
 
출 19장에 보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셨다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
심판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을 만드는 방법이고 제사장 만들기 위한 훈련 방법이다
 
거짓선지자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무와 책임을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만 강조한다
 
렘 18장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데 너희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주권은 강하게 역사할 것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답변 :
 
바로 그렇게 주장하는 거짓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공격하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그 제사장의 의미와 거룩함의 의미를 오로지 미래의 예수님에게만 두고 있기에 지금 눈에 보이는 제사장과 거룩하다는 백성을 모조리 거짓으로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예레미야 18장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자 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자 라는 그 당사자들에게 의해서
선택과 버림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주님 마음대로 토기장이의 권한으로 긍휼과 진노를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자 그럼 주님 쪽에서의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이 바로 예레미야 자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버려버리고 심판하고 저주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고편으로 보여줍니다.
 
왜 예레미야가 저주와 심판을 받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이 예레미야가 당하는 저주와 버림과 심판을 모르는 자는
주님은 모른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을 저주와 버림과 심판을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때문에 저주와 버림과 심판을 받는 겁니다.
 
우리 이스라엘의 죄악을 그 예레미야에게 감당하고 짐을 지우게 되니까?
저들은 더더욱 그 비밀을 해석하고 풀이할 수가 더더욱 없는 겁니다.
 
결국 피할 길을 주는게 아니라 피할길을 막기 위해서 주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런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기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자 이런 영의 일에
그 목사의 해석은 육의 숙제로 또 해석하는 겁니다.
 
토기장이의 일을 본인이 모르면서
토기장이의 뜻을 자기가 아는냥 우기고픈 겁니다.
 
만약 그 교회 사람들의 죄악을 그 목사에게 담당 시키면
그 목사는 순종할까요?
 
어떻게보면 미리 순종하기 싫어서 인간의 숙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목사가 할 일을 딱 하나입니다.
 
내가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자 십자가를 진 적 없고
오로지 예수님만이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라는 말 외에는 외칠 것이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목사로 세운 것인데. 딴 짓만을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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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18:56:26,
 
그리고 계시록에 보면 먼저 익은것들은 7년 대환란을 겪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진다
그 다음 두 번째는 고난을 받아야 하고 마지막에 익는 것은 고생은 고생대로 다하고
창고에 들어가지만 영광은 없다
 
그나마 창고에 들어가면 다행이지만 짐승의 밥이나 새들의 밥이 될수도 있다
기왕이면 먼저 익은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선 일등을 강조한다
 
답변 :
 
전형적인 성화론자들의 주장입니다. 심지어 과거의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피할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러니 날 알아달라 라는 취지입니다.
 
먼저 익은자 나중 익은자를 인간 쪽에서 설정할 재간이 없습니다.
먼저 익든지 나중 익든지 그들 또한 주님의 주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 그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먼저 익은자 나중 익은자 라는 표현 조차도 성경에 없고요 인간의 행동 여부에 결정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는 자들의 표현들입니다. 먼저 된 자 나중 된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지 인간에게 그 조건들을 갖추라는 취지가 아닙니다. 얼마나 소유하고 싶었으면 그런 탐심을 부릴까요?
 
제대로 익은 성도교인을 만들어 내고 싶은 탐욕 이것이야 말로 목사들의 소망이요 꿈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마귀의 3가지 시험에서 나왔듯이 마귀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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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18:59:22,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계획을 번복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는 모양이 나오면
고난은 그칠것이지만 만약에 원하는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면
 
다시 짓이겨서 새롭게 만드는 고난의 과정을 계속 반복하실것이다 하는데
이것도 주님의 주권이고 주님이 이미 예정대로 하실것인데
 
우리의 숙제가 아니고 결국 주님이 하실것이고 우리는 주님이 굴리시는데로 당하는 수 밖에 없지 않나요
 
답변 :
 
고난도 일종의 형벌로 취급하고 그 형벌을 인간이 당하냐 안 당하느냐 의 여부로 따지는 것이 바로 마귀들린자들의 협박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3가지 시험에서 드러납니다.
 
고난이란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지, 인간이 그 고난을 당하니 마니의 문제는 성경에 없습니다.
 
마치 죽음이란 인간의 죽음을 말하기 위한 내용은 성경에 없습니다.
 
정녕 죽으리라 라는 형벌은 결국 예수님에게서 비로소 죽음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인간은 죽음 조차도 받은적 없이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 겁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 고난을 당해야만 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
예레미야도 욥도 참선지자도 그 고난에 동원되는 겁니다.
 
그저 고난 당하냐 안 당하냐 라는 여부로
그 고난을 피할 길의 방법론을 펼치는 것은
 
마치 면죄부를 팔아서 눈에 보이는 체제 시스템을 더욱더 견고하게 쌓을려는
인간의 이름을 흩어짐을 면하자 라고 바벨탑을 쌓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 바벨탑 조차도 노아홍수라는 주님의 일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노아홍수를 의식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예레미야가 받는 고난과 저주를 의식해서 더 이상 저주 받을 짖을 하지 않도록 하자 하는 취지는 여전히 예레미야를 왜 먼저 때리시고 버리시고 저주하고 심판하는지를 여전히 회피하고 자기 살 길만 추구하자 라는 전형적인 종교만이 하는 짓인 우상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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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19:00:04,
 
그런데 렘 19장 5절에 보면 이것은 내 뜻이 아니다란 말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성경이 아직 저에겐 어렵네요 ㅡ.ㅡ
 
답변:
(렘 19:5, 개역)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번역 본을 보시면 이해가 좀 더 쉽겠지요
 
(렘 19:5, 새번역) 『그리고 그들은 제 자식들을 바알에게 번제물로 불살라 바치려고, 바알의 산당들을 세움으로써, 내가 그들에게 명한 적도 없고, 말한 적도 없는, 내가 상상조차도 하여 본 적이 없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렘 19:5, 우리말) 『그들은 또 바알의 산당들을 지어 자기 아들들을 불로 태워 바알에게 번제물로 바쳤다. 이것은 내가 명령하지도, 말하지도, 내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았던 일이다.』
(렘 19:5, 공동) 『바알에게 제단을 쌓고 저희 자식들을 불에 살라 번제로 바친 죄벌이다. 이런 일은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다. 그런 일을 내가 생각인들 하여보았겠느냐?』
(렘 19:5, 쉬운) 『그들은 바알의 산당들을 세워 놓고 자기 자식들을 불살라 바알에게 번제물로 바쳤다. 나는 그런 일을 말하지도 않았고, 명령하지도 않았으며, 그런 일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렘 19:5, 현대인) 『또 그들이 산언덕에 바알의 단을 세우고 자기들의 아들을 제물로 불에 태워 바쳤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며 내가 마음 속으로 생각한 것도 아니다.』
(렘 19:5, 현대어) 『그런데 그들은 심지어 자기들이 낳은 자식들까지 불에 태워 바알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나는 그런 제물을 바치거나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한 적도 없고 그런 요구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이렇게 더럽고 추악할 정도로 상상도 못했을 정도이다 라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주님 쪽에서 이미 아벨의 제사 곧 완료를 받아 버리니까(이것을 예레미야가 외치니까 더더욱 미움 받을 수밖에 없고 미움 받을 짓만 골라서 하게 됨)
 
이스라엘 쪽에서 하는 짓 꺼리는 그 아벨의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해 볼려는 취지에서 드리는 제사들이 늘 가인의 제사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 신앙심 모든 것을 다 아는 대로 끌어모아서
신을 자기 편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방법의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백날 해봐도 이미 아벨의 제사는 완성 되었습니다. 그 아벨의 제사를 예레미야가 보여줘도 도리어 예레미야를 미워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아벨의 제사를 예레미야가 또 반복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인은 반드시 등장하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질문을 보아서 그 목사가 이 가인의 제사를 드리자 라고 발광을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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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로스08.07.25 03:39
  
참 속고 속이는 것은 남탓이 아니요 자기 문제이다 라고 그렇게 보도록 그 목사가 말하고 있는데 좁게 보는 겁니다. 속고 속이는 문제 조차도 예수님이 개입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빼버리면 안됩니다. 즉 모든 주체자는 예수님 입니다. 미움도 지옥도 죽음도 저주도 심판도 예수님이 주체자가 되고 실행자가 되심으로써 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인간의 문제 꺼리로써는 파악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죽음 마저도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빼버리고 자기만의 문제로써 풀려고 하기 때문에 상대적인 구원문제도 자기 행함의 문제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러니 성화에 목 맬수 밖에 없고 성화 외에는 다른 해결점을 찾기 못하기 때문 입니다. 그들에게는 피가 믿겨지지 않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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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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