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노 당하는 거룩한 시온 성(예루살렘) (시편 48)

 


(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48:1, 개역)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48:2, 개역)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48:3, 개역)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48:4, 개역)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음이여

(48:5, 개역) 저희가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갔도다

(48:6, 개역) 거기서 떨림이 저희를 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48:7, 개역)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48:8, 개역)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셀라)

(48:9, 개역)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48:10,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나이다

(48:11, 개역) 주의 판단을 인하여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48:12, 개역)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48:13, 개역)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48:14, 개역)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당한다" 라는 표현을 누구랑 대화를 하면서 힌트를 얻게 되었는데

저는 "불가능성을 누린다" 라는 표현으로써 사용했고

그 분은 "즐긴다, 누린다" 라는 표현보다 "당한다" 라는 표현으로

 

이 불가능성 이라는 의미를 이해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천국은 [침노 당한다] 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1:12, 공동) "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 어떤 사본에는 12, 13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12]침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애써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 [13]그 나라에 대하여는 요한까지의 모든 예언자와 율법이 이미 예언했던 것이다."

(11:12, 킹흠정) 침례자 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늘의 왕국은 폭력을 당하며 폭력배들이 강제로 그것을 빼앗느니라.

(11:12, 한글킹) 침례인 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폭력으로 탈취되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힘으로 그것을 차지하느니라.

(11:12, 현대인)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침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침략하는 사람이 그 나라를 빼앗는다.

(11:12, 현대어) 침례 요한이 설교하고 침례를 주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공격 받아왔고 공격하는 자들이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였다.

 

언뜻 이해가 안됩니다.

어떻게 천국이 침략 당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더 웃기는 것은 천국은
천국을 침략 해서 빼앗는 자의 차지이다 라고
침략한 자의 것이다 라고

마치 소유물처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물론 불가능성입니다.

 

불가능성이니까 나와 상관이 없으니 딴데 관심을 둘 수가 과연 있느냐 하면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누가 가능성으로 바꾸는게 아니라

누가 불가능성을 불가능성 그대로 누리는가? 즐기는가? 또는 당하는가? 라는 것을

봐야 하고 목격해야 하고 목도한 것을 증거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못 벗어납니다.

 

그럼 천국은 마치 구약의 가나안땅 곧 약속의 땅을

누가 침략해서 차지하느냐 라는 문제와 연관이 됩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의미를 이스라엘 본인 조차도 이해 못한
해석불가의 의미였던 겁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실패 했다고 취소 될 문제이고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아도 되는 문제로 취급할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나와 상관이 없다구요? 천만의 말씀

실패해도 취소 되지 않습니다.
절대 취소 되지 않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달랐던 겁니다.
참 이스라엘 되신 예수님 홀로만이 이루었던 처음부터 완성 완료의 의미였던 겁니다.

 

이상하죠


처음부터 그랬다면 왜 이스라엘은 실패해야만 할까요?

이것 또한 비밀인데 실패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누가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완성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실패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상스럽게 성경 전체에서 이 구약의 가나안 땅을 침략해서 빼앗는 것에 아주 아주 집착을 하는데

구약으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신약은 더 심하디 심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집요하게 이 땅 곧 가나안 땅 약속의 땅 그 중에서 시온인 곧 예루살렘 땅에 대한
집요하디 집요한 의미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실패해서 몇백년이 지나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포기 안하십니다

마치 천국을 누가 빼앗느냐 라는 의미는 예수님에게서는 새롭게 재기 되는 식입니다.

 

침략이라는 침노 라는 표현도 사실상 부정적이고

빼앗다 라는 것도 마치 부정적인 의미로 표현 된 겁니다.

 

누구 입장에서?

빼앗는자 입장입니까? 아니면 빼앗기는 즉 당하는 입장입니까?

도대체 누가?

천국을 의인화 해서

천국이가 그렇다 라고 표현하냐 말이죠.

 

천국이가 침략 당하는 겁니다. 폭력 폭행 당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구약에서는 가나안 땅이고 좀 더 구체화 시키면 여부스 땅입니다.

예루살렘이지요. 시온 산

 

그럼 신약에서는 그런 구약의 그림자로 표현된 천국의 의미가

실재적으로 침략 당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침략하는 겁니까?

앞의 누가는 천국이가 라고 이미 말했고(천국을 의인화 해서)

그럼 뒤의 누가는 누구입니까?

 

아무나 천국을 침략하지 않습니다.

누구입니까? 지난 시간에???

 

네 맞습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혼자 침략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럼 빼앗는 것도 예수님이지요.

 

여기에

이 침노 전쟁

침략 전쟁

빼앗는 전쟁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자들은 누구 입니까?

마치 가나안 땅 주민처럼 예루살렘의 주민들 아닙니까?

 

그럼 우리가 잘 아는 여리고성 사건

등등의 가나안의 많은 사건들, 전쟁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활동, 전쟁, 소동과 연관이 됩니다.

그림자의 실상 곧 실체가 나타나는 거죠.

 

구약은 영화 무비요, 신약은 그 영화의 스크린을 찢고서 실재로 그 경계선을 넘어서 쳐들어 오는 실재계처럼 말입니다.

 

구약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곧 유대인에게만 실상이였습니다.

다른 민족은 그저 영화 보듯이 할 뿐입니다. 그림자요 영화 스크린

아무도 저 구약이 실재로 현실 구석 구석으로 넘어오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특히 이방인에게는 더 그러합니다.
오로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 될 뿐이고

이스라엘과 역이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구역에서 역인 나라가 한 두 나라가 아니요

한 두 민족이 아닙니다.

그래도 자신들만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무리 설쳐도 눈 하나 깜짝 안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런 경계선이 모조리 다 무너져 버립니다.

세상 어느 장소든 가릴 것 없이

어떤 민족 어떤 사람 가릴 것 없이

십자가의 사건은 2천년 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우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 되어버린 겁니다.

심지어 유대인에게도 이스라엘에게도 말입니다.

당하는 입장에 놓여진 겁니다.

 

지금 마침 더빙이 된 투모로우 라는 헐리우드 재난영화를 보고 있는데요

누가 묻더군요.

이런 재난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저는 미국은 유럽과 다르게 짧은 역사 밖에 없어서 내세울 인물들이 별로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짧은 역사에 사람들 뇌리에 박히게 할수 있는 인물은 오로지

영웅 밖에 없다는 거죠. 짧은 역사에 효과적인 거죠.

그러니 재난 영화의 재난은 시다바리 보충물이고
정작 주인공은 영웅이라는 초인을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재난이 주인공이 아니라 인간이 주인공이다는 겁니다.

 

유럽에서는 재난 영화 잘 만들지 않거든요.

 

그러니 재난영화가 아니라 슈퍼영웅 영화이다는 거죠, 어벤져스 아이언맨 슈퍼맨 등등

결국 절대로 자본주의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런 영화의 주제이다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파도와 쓰나미 태풍은 영화 스크린 속의 이야기이지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그 좌석에 쓰나미는 오지 않는다는

그 경계선을 알고 있기 때문에

즐기고 누릴 뿐이다는 겁니다.

구약을 영화 보듯이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약은 그 스크린을 찢고서 실재로 엄청난 파도가 영화관람석을 덮쳐서
위기를 초래할 정도로 덮쳐온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는 누린다 즐긴다 라는 표현 보다는 당한다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요.


즉 주인공은 침략자 곧 파도 허리케인 쓰나미 지진이 주인공이 되고

인간은 졸지에 주인공의 자리를 박탈당해
오히려 주인공을 위한 보충물로 자리잡게 되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슈퍼맨이라는 영화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거꾸로

그리고 일본 쓰나미 처럼 실제상황이 됩니다.

슈퍼영웅은 실제상황이 되지 않거든요.
절대로 스크린을 찢고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경계선을 못넘어선다는 겁니다.

신약은 이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 해당 되는게 아니라

실제 현실로
모든 민족 모든 국가가 다 당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진짜 현실, 참 현실이 되어버린 겁니다.

분명 천국은 침략을 당합니다.

누구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말입니다.
결국 천국은 예수님의 것이 된 겁니다.
빼앗아 차지한 자는 예수님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천국을 빼앗은 자를 통해서 저 분이 바로 구원자임을 봄으로써

엎드려 찬양합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항복하면 됩니다.

그 앞에서 감히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남을 7번 용서 했다는 둥
그딴 것은 경계선을 못 넘어온다는 배부른 입장에서 논하던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거 말할 분위기가 아니다는 겁니다.
스크린을 찢고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넘어온 실재이다는 겁니다.

 

그런 딸랑 혼자만의 일하심의 완성이요

우리는 그것을 영화 보듯이 구경만 하면 그만일 것인데

졸지에 나 자신이 예루살렘처럼

침략을 당하는 입장에 놓이듯이

모든 인간이 이런 상황을 격게 된다는 겁니다.

 

영화 화면 속의 쓰나미가 과연 스크린 뒤에 있냐 말이죠?

없잖아요?

화면 뒷 편에 과연 태풍이 있고?

강력 추위로 모든 것을 1초만에 얼게 만드는 기상이변이 스크린 화면 뒤에는 없습니다.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실재계가

현실이라는 공간에 침략하듯이 쳐들어와서

화면 속의 쓰나미가

어떻게 스크린을 찢고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람객과 그 관람 좌석부터 모조리 다 물에 다 잠기도록 흘러 넘치느냐 말이죠.

 

그럼 죽음당해 마땅한 입장 뿐이다는 겁니다.

모든 권리 모든 권한 숨쉴 능력 조차도 모조리 다 빼앗기는 판국인 겁니다.

일본 쓰나미를 티비에서 보셨잖아요

그 사람들이 어떤 권리를 그 쓰나미 앞에서 내세울수가 있던가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실재계는 실재계에서만 놀지

왜 상징계의 세계에 침범하냐 말이죠.

 

시편 48편을 보고 느낀 점이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같으면 이렇습니다.

저도 할머니 한테서 들은 이야기인데요

처음 텔레비전이 생겼을때에

마을에서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가서

티비를 보고 난뒤에

할머니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다들 아시는 이야기죠?

아니 저 조그마한 상자 안에 사람들이 들어가 있나 보네

그래서 난장이 인가? 싶어서 자꾸 이제 나오세요 라고 했다는 겁니다.

 

물론 안 나오죠.

그 속에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비추어져서 자꾸 사람을 보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주 당연했다 말이죠.

 

한참 설명을 듣고 난 뒤에는 아 그렇구나 하지만

자꾸 반복적으로 익숙해지지 않는 이상은

그런 생각을 바꾸기에는 흔하지 않았던 텔레비전이다 말이죠.

 

그래서 기억을 조작하면 되는 겁니다.

지금 스마트 폰의 원리 그 복잡한 원리를 아는 자 없습니다.

그냥 사용하다 보니 익숙해져버리는 겁니다.

 

절대로 텔레비전 속의 사람들이

텔레비전 상자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을 보는 우리의 시선입니다. 곧 하라 하지 말라의 시선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은 졸지에 막 넘어 오는 겁니다. 묵시가 역사를 막 뚫고서 막넘어오는 겁니다.

텔레비전의 화면들의 사람들 짐승들 재난상황 등등

 

다니엘서에서 손가락이 벽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글자를 막 쓰는 겁니다.

환상의 세계, 꿈의 세계의 것들이

화면 밖의 넘어와서는

현실을 간섭하듯이 불쑥 불쑥 튀어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침노 침략 이라는 의미의 표현들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었던 가나안땅 침략으로 과거로 취급해 버리는 역사 문제가 아니라


지금 현재 역사 속으로 침략하는 겁니다.
역사는 오히려 시공간이 찌끄러지고
왜곡되듯 블랙홀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씽크홀처럼 말이죠. 막 빠져 버리고 사람들이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땅이 꺼져 버리니까
땅을 발판으로 삶을 지탱하고 살아야만 하는 인간은 마치 삭제되듯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물론 땅을 발판으로 살지 않는 천사 같은 존재들은 땅이 꺼져버린다고 해서 삻이 영향받지 않습니다.
날개 곧 묵시가 있거든요.

(창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나 땅을 근본하는 사는 인간은 발 디딜 곳이 없으면 발목이 짤린 상황과 같은 겁니다.
공중에서 붕 떠서 살아야 할 판국인 겁니다.

묵시로써 지금 현재에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언제 어디서 터질줄 모르는 사건 개념이 되어 버린 겁니다.

역사가 아니라 박물관이 아니라

현실 문제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닌 겁니다.

연관 되어도 너무 너무 연관이 있을 정도로

실제상황으로 닥친 문제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쟁탈하고 빼앗는 문제가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냐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곧 사랑의 문제요, 정치(종말의 종말)의 문제인 겁니다. 아무도 못 벗어납니다.)
 

신약에 아주 아주 무시 무시한 혼인잔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벌린 비유인데

이것이 천국비유(종말의 종말 비유)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겁니다.

결국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이 아니다는 거죠.

 

천국 가기 싫다고 난 애초부터 지옥 갈래 라고 하는 자도

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천국 비유에 졸지에 연관이 되는 겁니다.

 

비유란 비밀이잖아요

누가 저에게 왜 십자가의 용서가 비밀이냐 라고 물었는데

제가 비밀 아닙니다 라고 답해 놓고서는 곧 바로 비밀 맞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하냐 말이죠 ㅋㅋㅋ

그 비밀이 아닌 것을 반드시 아무도 못 알아 먹도록 비밀로 해 버린다고 했습니다.

패쓰워드 걸어버려서 다 알던 이야기를 도통 믄소리인지 모르도록 하시는 겁니다.

 

믄 말인지 모르겠죠?

혼인잔치 비유를 예를 들지요

 

혼인잔치를 이해 못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 압니다. 아이들까지도 말이죠.

결혼식을 이해 못할리는 없거든요.

 

그런데 그 혼인잔치가 졸지에 비밀이 되어버리니까

도저히 이 혼인 잔치를 이해할 자가 아무도 없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비유입니다. 비밀

 

분명 흔해 빠진 이야기의 의미인데

그 흔한 이야기요 다들 알아먹는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졸지에 패쓰워드를 걸어버리니까

아무도 못 알아먹게 된다는 겁니다.

 

제가 알아먹게 이야기 해 볼까요?

못합니다.

어느 정도이냐 하면

 

제가 지금 여러분 공기를 들여마셔서 숨쉬세요 라고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려운게 아닌 본능적으로 저절로 되거든요.

 

아무도 신경 안씁니다.

공기를 마시는 것을 지키자 해서 지키는 자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졸지에 공기를 다 없애 버렸다 칩시다.

그렇게 되면 그 흔해 빠진 공기가 희박해져 버리니까

공기 마셔야 한다는 것이

졸지에 심각해져 버린 겁니다.

 

멈추면 안돼 공기 마셔야 돼 라고 자기가 자신에게 외치면서

절대 포기하면 안돼 라고 외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역사 속에 묵시가 침략했을때에 벌어지는

불가능한 상황이다는 겁니다.

물론 말도 안되지요

그런데 은연중에 다들 그런 공포가 자리잡고 있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자는냥 그런 영화가 판타지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비록 영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다들 저런 불가능이 현실 속에 나타날것만 같은 생각을 은연중에 다들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공포를 활용하는 것이 영화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신약은 그 예상을 실재로 벌리는 겁니다.

 

그러니 졸지에 구약도 이제는 마구 마구 스크린을 찢고 막 쏟아지듯이

역사 라는 현실의 땅바닥을 다 물젖듯이 다 젖어드는 겁니다.

 

그럼 그것이 실제상황이 되는 거죠.

 

즐겁디 즐거운 결혼잔치 혼인잔치에 마침 일거리가 있어서

사정 사정을 하고서 못 참여하게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만 그런게 아니라

우연히도 다들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임금은 화가 날 수 밖에 없고

그 화냄을 통해서 살육잔치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럼 혼인잔치가 졸지에 살생이 벌어지는

진노의 날이 되어야 하는데

즐거운은 사라지고 기쁨은 사라지고

눈물과 슬픔의 잔치가 되어버린 것인데

 

전혀 전혀 혼인잔치에는 영향받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혼인잔치 다운 기쁨을 발산하고

혼인잔치를 돋보이도록 하는 보충물로써 그런 무시 무시한 살육들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괜히 살육당한 그런 자들만 하필이면 혼인잔치날에 새롭게 새삼스럽게 생긴 겁니다.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혼인잔치에 참여했던 자 조차도

잔치집에서 준비한 예복을 안 입었다는 이유로

지옥에 던져 버려서

반드시 그 지옥에서 이를 갈도록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혼인잔치를 무시하고 각자의 저마다의 삶을 따로 챙기는 외설을 펼친 겁니다.
그 외설적인 법에 진짜 외설 한 번 당해 보라는 겁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게 되었으니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지 않았느냐 라고 여기는 순간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우짜지? 외설에 더 나은 외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이 천국이다는 겁니다.

천국이라는 혼인잔치로써 증거하시는 비유 비밀이다는 겁니다.


반드시 천국 혼자만을 독단적으로 펼치는게 아니라
천국 때문에 지옥의 속성을 들추어내면서 천국을 설명하는 보충물로써 증거하는 비밀 으로써의 예수님 나라이다는 겁니다.
 

이 비유, 이 비밀

무슨 의미인지 말귀 알아먹겠습니까?

 

똑같이

 

용서의 왕의 가장 최고의 용서의 왕 비유가 천국비유로써 증거 하시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일만달란트 비유입니다.

 

용서받는 입장만 있다면 다들 그 긍정성을 자기쪽으로 끌여당겨서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이야기가 되는데

 

문제는 용서 받고

탕감받고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졸지에 그 다음 이야기 때문에 패쓰워드 걸려 버린 겁니다.

 

도리어 그 용서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일부러 눈 앞에 내 돈 300만원 백데나리온 때먹고 도망친 놈을 지나가에 하니
안 잡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반드시 잡아서 족쳐서 감옥에 집어넣어버린 겁니다.

우리의 모습과 별 다를바 없는 모습에 대한

그 모습을 들추어내면서

용서라는 비밀을 패쓰워드 걸어버리는데 있어서 보충물로써 그 다음 백데나리온 이야기를 반드시 집어 넣는 겁니다.
그래야 그 외설에 더 나은 외설인 일만달란트가 빛나는 겁니다.

이 말도 안되는 일만달란트 용서를 더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서 보충물로써 백데나리온 이야기를 반드시 말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최고의 왕 중 왕 다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더 나은 외설은 우리의 외설성을 들추어내지 않고서는 증거하지 않는 겁니다.

반드시 우리의 외설성을 들추어내시면서 증거되는 말도 안되는 일만달란트 탕감이다는 겁니다.

 

그런 자를 반드시 심판하심으로써 용서가 용서 답다 라는

 

정작 용서받은 자는 없어져 버렸고

싱크홀에 빠져 버리듯 삭제 당해 버리고

 

용서 라는 주체만 홀연히 남아버린 겁니다.

 

이상하죠?

 

이상하자 이상하자


말도 안되죠?
불가능하죠?

단절이죠?

요즘은 백선생 땜에 죠가 아닌 쥬로

말도 안되쥬?
불가능하쥬?
단절이쥬?
 

용서받은 자는 없어져 버린채

용서 만이 덩그라니 홀로 남아버린 겁니다.

 

이 이상한 상황이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침노 당하는 예루살렘은 마치 용서받은 일만달란트 탕감받은자 같은데

정작 사라져 버리고

 

침략한 자

용서한 자

 

 

남아버리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버린 겁니다.

 

만약 이 이상한 상황 이 자체만으로 기뻐할수 있겠냐 말이죠..

 

하나도 안 기쁘죠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은 바로 이렇게

나 또는 인간에게는 하나도 안 기쁜 소식입니다.

 

오로지 신나고 기쁜자는 예수님 혼자 뿐인 겁니다.

 

전혀 예루살렘이 비밀 스럽지 않은데

비밀 스럽게 만드는

 

진짜 비밀의 주체 그 실체는

예수라는 비밀이다는 겁니다.

 

성도는 전혀 비밀스럽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특별한 것 아무것도 없는 찌끄래기일 뿐인데

예수님은 비밀로 만들어 버리니까

 

개도 부스러기를 먹지 않냐 라는 그 여인이

졸지에 비밀이 되어버린 겁니다.

비밀되신 예수님의 증상으로써 말입니다.

 

(48:8, 개역)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셀라)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또는 예수님을 신앙대상으로 삼아서나

 

그 어떤 방법을 다 동원해도 비밀로 만들어낼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다양성이라는 둥
개방이라는 둥
가능성이라는 둥

그 반대로 행할 뿐이지

 

비밀로

불가능으로

단절로

차단으로 만들어 낼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예루살렘 시온을

곧 신부를 영원히 비밀로 견고하게 하십니다.

심지어 마귀보란 듯이

마귀가 도저히 못 푸는 비밀로 말입니다.

 

마귀가 밀까부듯이 초정밀 조사를 해서 잡아온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당당하게 잡아

욥기처럼 마귀자신이 내기게임에서 이겼다고 의기양양 할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어떤 과거도 묻지않고

오로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은

베드로의 신앙이 아니라

베드로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의 사랑이었기에

물으시는 겁니다.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마귀보란 듯이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 비밀 속에 비로소 푹 잠기게 됩니다.

그 동안 그 비밀을 푸는데만 신경쓰고

이해할려고 해석할려고 문제풀이를 했는데

이제는 포기해 버린 겁니다.

어차피 실패할게 뻔하니까 말입니다.

그냥 그 비밀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십니다

 

참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비밀을 풀수가 없어서

베드로를 더 이상 추궁할 수가 없게 됩니다.

 

누가 송사 하겠습니까?

 

누가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겠습니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이 된 상황이

오히려 이 비밀의 향기를 더욱더 크게 퍼트리고 만취케 만드는 겁니다.

마귀가 괜히 건드린 셈인 겁니다.

예수님 좋으라고 한 셈인 겁니다.

베드로 좋으라고 한 셈인 겁니다.

그렇게 열심히 베드로를 드디어 잡았는데 말이죠.

 

누가 끊겠습니까?

? 위협? 사망? 질병?

 

그 어떤것도 끊을 수 없도록

비밀이 우리에게 덮쳤습니다.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 뿐인 겁니다.

우리는 이 말도 안되는 비밀을 당하는 겁니다.
거룩 용서 무조건 적인 용서를 덮친 당한
침략 당해 예수님께 모조리 다 빼앗긴 인생은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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