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속에서의 구원 (시편 55편)
배신(이율배반, 모순, 버림받음) 속에서의 구원
(시 55:1, 개역)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시 55:2, 개역)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시 55:3, 개역) 『이는 원수의 소리와 악인의 압제의 연고라 저희가 죄악으로 내게 더하며 노하여 나를 핍박하나이다』
(시 55:4, 개역)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시 55:5, 개역)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시 55:6, 개역) 『나의 말이 내가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시 55:7, 개역)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리로다(셀라)』
(시 55:8, 개역)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푹풍과 광품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시 55:9, 개역)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저희를 멸하소서 저희 혀를 나누소서』
(시 55:10, 개역) 『저희가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중에는 죄악과 잔해함이 있으며』
(시 55:11, 개역)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궤사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않도다』
(시 55:12, 개역)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시 55:13, 개역)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시 55:14, 개역)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시 55:15, 개역) 『사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며 산 채로 음부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저희 거처에 있고 저희 가운데 있음이로다』
(시 55:16, 개역)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시 55:17, 개역)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시 55:18, 개역)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저가 내 생명을 구속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
(시 55:19, 개역) 『태고부터 계신 하나님이 들으시고(셀라) 변치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치 아니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리로다』
(시 55:20, 개역)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시 55:21, 개역)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시 55:22, 개역)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3, 개역)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38:11, 개역) 『나의 사랑하는 자와 나의 친구들이 나의 상처를 멀리하고 나의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시 41:9, 개역)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앞에서 친구의 배신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즉 아들 압살롬의 배신이지요.
특히 압살롬은 내 떡을 먹던 자로써
나의 가까운 친구로써
나 다윗을 대적하여 발꿈치를 들었다 쿠테타를 일으켰다 라는 거죠.
다윗의 아들이 다윗을 죽일려고 말입니다.
이런 속성은 사울왕 개인만의 속성이 아닌
순식간에 이스라엘 전체에 퍼져서
솔로몬 왕이 죽고 난 뒤에는 더더욱 노골적으로 성전 중심의 살인으로 벌어지니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되고
여전히 멈추어지지 않아서 결국 둘다 다 망하게 되는 지경까지 갑니다.
결국 지난 시간에도 강조했지만 다시 한번더 강조를 하면
인간 개인의 원수 개념은 성경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 까지나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떻게 원수를 새삼스럽게 만들어내시느냐?
전혀 예상 못한 자들이 원수에 놓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사울왕 개인이 사실상 이스라엘 전체의 잠재된 속성을 톡 하고 건드려준 셈입니다.
즉 이 말은 시간의 역순으로 생각해 보면
사울왕은 이스라엘 전체의 증상물로써 미리 맛배기로 보여준 셈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누가? 죽입니까? 누가 못 박으라고 외칩니까?
유대인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
그 증상물 중에 하나가 사도바울(청년 사울)도 있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울왕 속에는 개인의 마음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의 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 속에서 또 다른 이스라엘을 뽑아내시는 주님의 작업은
남은자 또는 숨겨놓은자로써 다윗을 뒤로 빼돌리는 작업을 하시는데
즉 구원작업이지요.
그 구원이 바로 배신 속에서의 구원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다윗이 졸지에 이단으로 몰리고 마귀로 몰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인으로 몰리는
이스라엘로부터의 철전지 원수로 몰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윗에게는 배신이겠지만
이 배신이 정작 주님의 입장에서는 구원인 셈입니다.
원수들과의 구별 짖고 차별 차이를 내고 갈라서게 하는 방식이니까 말입니다.
다윗은 물론 낙망하지요
믿었던 사람인 친구, 동료, 사랑하는 자들, 함께 했던 이웃이 원수로 변해버렸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도리어 원수취급받으면서 다윗은 쫏겨나고 다윗은 도망치고
피난처를 간구해야만 하는 다급한 처지에 놓여지는 겁니다.
저들은 그런 다윗을 보고 비웃고 비아냥 거리면서 하하하 웃습니다.
너의 구원자가 어디있느냐?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고
있다면 너를 그렇게 내버려 두느냐?
야 이 버림받은 자야?? 너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것이다 라고 놀려먹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다윗은 이렇게 격음으로써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신체 전체가 몸뚱아리 전체가 예수님을 외치고 있습니다.
참 왕 꼬라지가 거지 보다 더 못한 신세가 된 겁니다.
잃어버림 당해도 뭐 이렇게까지나 잃어버림 당할 수가 있냐 말이다.
보통 싫어버림바 된 게 아닙니다.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치 피 흥 남녀노소 전부다 말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지금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게 아닙니다.
본인도 몰랐죠 뭐
이런 처참한 신세에 예수님이 뛰어들 줄 말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전체 또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하나님의 백성)은
사울왕이라는 증상물로써 나타났고
반대로 예수님의 증상물은 다윗이 지금 이런 상황에 놓여짐으로써
다윗이라는 증상물이 나타나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두 세계 곧 천국과 지옥의 모습인 겁니다.
누가 천국입니까? 누가 봐도 사울왕입니다.
누가 지옥입니까? 누가 봐도 다윗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이것이 역전이 되어서
천국은 마치 에덴동산처럼 휙 사라지고
모조리 다 지옥처럼 땅이 들썩 들썩 거리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처참한 지옥을 맛보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제 다윗도 없고 솔로몬도 없는 이스라엘은
결국 사울왕이 톡하고 건드려준 촉매역할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섬기는 왕이 없는 그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게 지옥입니다. 자기들 손으로 천국을 지옥이라고 몰아 버려서 죽여 없애 버렸으니
(오히려 참선지자들은 더 많이 죽여보렴이라고 목을 내 놓을 정도이니
거짓선지자들이 함께 해 주니까 맘 놓고 죽였는데
아뿔사!!
지옥이 천국이였고 천국이 지옥이였던 겁니다.)
자기 손으로 죽인 섬기는 왕이 없는 나라 꼴은 마치
지옥과 같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스스로 자청해서 지옥백성이 될려고
그렇게 용을 쓴 꼴이 된 겁니다.
참선지자도 다 죽여버렸지요
거짓선지자가 자기들 편이 될 줄 알았는데
섬기기는커녕 다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주님이 다 없애버렸거든요.
결국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는 이유는
섬기는 왕이 없으니
사울왕과 같은 놈들이 죽은 사울왕을 잇고자
사울왕은 벌이 7배 일진데 나 이스라엘 왕을 건드리는 자는 벌이 77배일 것이다 라고
그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 정당성과 합리화를 챙기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릴려고 하니
백성은 죽어나고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나라가 두 조각 나고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반복이 되는 겁니다.
더 복잡하게 참선지자 거짓선지자가 등장해서
더 더 더 증폭 증식 확장이 되어서
결국 나라가 쫄딱 망하는
이제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남의 나라에 포로되어 노예 신세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누워서 침뱉기 했기 때문인 겁니다.
왜?
이유는 딱 하나
섬기는 왕의 부재입니다.
아무나 섬기는 자가 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다들 등쳐먹었던 겁니다.
거지선지자가 왜 거짓선지자이겠습니까?
거짓말을 누구든지 다 눈치채고 알아채기 때문에?
아니지요
그럼 거짓선지자가 아니지요.
아무도 모르도록 거짓영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니 다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참선지자는 왜 참선지자인지 아시겠지요?
네 맞습니다. 남이 아닌 내 손에 죽기 때문에 참선지자인 겁니다.
이스라엘은 사울왕의 속성대로 다윗 죽이기를 했듯이
참선지자는 아예 목을 내 놓고 외칩니다.
다윗이 저렇게 당한 판국에
너희들은 나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아예 죽었구나를 외치는 겁니다.
그러면 왜 너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냐
우리는 너를 죽일 마음이 전혀 없다 라고 합니다.
이 무슨 상황과 똑같습니까?
예수님이 삐닥하게 외쳤던 상황 아닙니까?
너희는 날 죽일려고 할 것이다 라고 말이죠.
싱크로율이 백프로입니다.
오늘 본문에 눈에 어쩔수 없이 확 띠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건 뭐 말이 괜히 어렵고 헷갈리고 무슨 말인지
한번 꼬인 것 뿐인데 저절로 눈에 확 띱니다.
(시 55:12, 개역)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시 55:13, 개역)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시 55:14, 개역)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괜히 어렵게 보이는데 다른 번역을 보니 금방 알수 있는 내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것은
반복해서 보이고 읽고 생각하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되니까 말이죠.
적이 아닌데 적이고
미운자가 아닌데 미운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차라리 적이였다면 참을수 있을 것이며
차라리 미운자 였다면 내가 피해버리면 그만인데
친구가 적으로 변해 버리니 참는게 아닌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사랑스러운 자가 미운자를 따라하니 이건 뭐 피할 수가 없어 회피는커녕 매일 매일 맞닿아 부딧히면서 싸움과 전쟁을 벌려야 할 판국이니
이건 뭐 나도 빼도 박도 못할 뿐만 아니라
저들도 빼도 박도 못하는
왜 말려드느냐 친구들아 라고 안타깝기 그지 없어서 탄식의 탄식을 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원수 중의 원수가 되어버린 관계를 직시한 겁니다.
이것이 다윗 개인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다윗이 죽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이스라엘 역사 전체에 계속 반복이 되는 문제로써 본 것이다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섬기는 왕이 만약에 만약에 다시 온다면
그 섬기는 왕이 종식 시키지 않는 이상
영원히 끝나지 않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다른말로 하면
안식의 주인은 바라지도 않고
안식일 지키기 라는 그 모호한 의문만을 지키는데 밑도 끝도 없이 영원히 지속될 판국이니
이런 지옥 중의 지옥이 없다는 겁니다.
안식일 지키기가 지옥이라굽쇼?
안식(주일)성수 지옥이다, 왠 말이냐!
말도 안되는 소리다!
안식성수 지옥인줄 알았더라면
교회 땡땡이 치고 천국 가겠다.
십일조, 건축헌금
내 돈 모두 돌려달라~~~~
돌려달라 돌려달라
여러분 더 이상 말로 해서 안된다고 생각하는 바 ~~ 입니다 ~~~
이렇게 말이 안통할 때 행동으로 우리의 안식성수를 쟁취해야 생각하는 바 ~~ 입니다 ~~~
섬기는 왕이 없는 백성이기 때문에
안식의 주인이 없는 안식일 지키기 때문에
지옥이 따로 없는 겁니다.
다윗에게 피하지도 숨지도 도망치지도 못하도록 만들고
원수 곧 적군과의 싸움처럼 전쟁도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듯이
이제는 거꾸로 우리가 다윗에게 행했던 그 짓을
우리가 예수님께 행했던 그 짓을
고대로 우리가 도로 당하는
빼도 박도 못하는
그 지옥을 격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저주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저주를
도리어 우리가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 다윗이라는 섬기는 자를 원수로 몰아버렸고
예수님을 원수처럼 바알세불 걸린 마귀의 대왕이라고 몰아버렸는데
똑같이 우리가 원수가 되어버렸고
우리가 마귀가 되어버린
그 심판을 그 저주를 격게 된다는 겁니다.
지금 본문에 다윗이 당하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윗을 핍박하는 사울왕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섬기는 자를 없애 버렸습니다.
그 자리에 다들 지나 개나 소나 다 앉고자
끝도 없는 전쟁을 벌리는 겁니다.
성전 그것도 솔로몬의 황금성전 중심으로 피비린내 라는 싸움이
그칠날이 없을 지경으로 다들 미쳐서
그 권력의 왕자리
그 빈자리를 앉고자 백날 백날 피를 흘려고
쭐꾸덕 미끄러질 뿐입니다.
섬기는 자가 없어서 ~~~~~~
다른 말로 할까요?
가룟유다가 왜 자살을 했겠습니까?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가룟유다를 대신해서 울어줄 닭 한 마리가 없어서입니다.
열 마리도 아닙니다.
다섯 마리도 아닙니다.
셋, 둘도 아닙니다.
딱 한 마리가 없어서입니다.
그럼 똑같은 짖을 한 베드로는 왜 천국갔습니까?
우리가 늘 무시했던 그 닭 한 마리만의 세 번 울음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인도처럼 소를 우상화 하듯이
닭을 우상화 하라는 뜻입니까?
정작 내가 귀하다고 취급해서 십일조 안식일지키고 교회섬기고 했던 그런 것들은
여러분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작 나를 구원하는 것은 평상시 내가 늘 무시했던 겁니다.
안식일 지키는 자가 역설적으로 평상시 늘 무시했던 것은 안식의 주인입니다.
예수 믿는 자가 역설적으로 평상시 늘 무시했던 것은 믿음 되신 예수님입니다.
내가 믿으면 되지 예수님의 믿음이 왜 필요하냐 말이죠.
내 숙제가 귀하지 예수님의 숙제는 하나도 귀하지 않은 겁니다.
그 예수님의 숙제가 내가 거들또 안 보니
아니 의식할래야 전혀 의식할 수 없는
가장 미천한 그 닭이 나를 위해 울어줄 때
닭이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이 자존심 상하는 구원이 진짜 구원입니다.
오죽 하면 십자가에 달려
그것도 우리의 저주를 모조리 다 끌어 모으듯이 다 받으셔서
십자가에 저주스럽게 죽은 그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까?
그 정도로 걸림돌이여 거리끼는 불편한 십자가 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쁜소식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대 절대 네버 네버 기쁜소식이 될 수 없는 불가능한 기쁨이
불가능한 기쁨 그 자체로써 기쁜소식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신했는데 그 나의 배신때리기에
예수님은 더더더 배신함으로써 그 배신이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 불륜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지혜를 다른 말로 꾀
모사
기묘
전쟁용어로써 뭘 해도 이긴다 라는 겁니다.
즉 무조건 나를 틀리도록 만들어 버린다 라는 겁니다.
나를 무조건 가짜로 만드는 자요
무조건 예수님 자신을 옳게 만든다 라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비범한 다말 생각나지요.
말도 안되는 지혜인 솔로몬의 아이를 반 갈라서 둘로 나눠 두 여인에게 나눠주라 라는
비범함입니다. 아주 역설적인 전술입니다. 숨어있는 마귀를 들추어내는 방식입니다.
인간의 꾀에 더한 꾀다 라는 거죠.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부정의 부정)를 펼치니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셨기에 십자가에 달리시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용서가 다 완성하심으로써
뭘해도 우리는 죄고 (죄 아닌게 없고)
뭘해도 주님은 의가 되는 겁니다. 뭘 해도 ~~~~ (의 아닌게 없습니다.)
우리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은
주님은 뭘 해도 의가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기에
기쁜 소식입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나 다 해결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뭘 해도 죄가 된다는 말이 얼마나 기쁜 말인줄 모릅니다.
왠 은혜인지
왠 복음인지
이 불가능한 복음을 우리는 누리는 겁니다.
역설적이게도 절대로 막살면 안되는 안식일 지키는 자가 사실상 막사는 자요
뭘해도 막사는 자가 역설적이게도 사실상 구원받은자 이다는 겁니다.
지키면 지키는 자신을 없애버리지 않는 이상 절대로 못 잊습니다.
아니 자신을 없애버리는 자살을 해도 절대 못 잊습니다. 삭제해도 삭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막사는 자는 자기 꼬라지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뭘 해도 다 죄 뿐인데 그 배설물을, 그 똥 덩 어 리를 쳐다볼 이유가 없으니 말이죠.
그런데 왠 은혜인지
더 좋은게 졸지에 나타났거든요.
이제 절대 빼앗기지 않지요.
다시는
안식일 지키기 라는 의문을 쳐다 보지 않거든요.
그 똥 덩 어 리를 쳐다볼 바보는 없으니까 말이죠.
교회는 이상하게도 죄인은 없고
다들 의인들 뿐이라서 마약 곧 이 똥덩어리를 쳐다보는 마약꾼들 밖에 없어요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말이죠.
오로지 십자가의 꾀, 불륜의 꾀만 쳐다보는 겁니다.
그 꾀가 아무도 예상 못했던 닭의 울음이였습니다.
그 닭의 울음이 이제 무엇으로 변이가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평상시 저들처럼 다윗을 갑자기 적, 원수로 삼다가
또 다윗을 미운자로 삼아 놓고서는
꼴에 구원 받겠다고 평상시 내가 가장 무시했던 것을 찾아서
날 대신해서 울어주라고 준비하고 예비하고 미리 세팅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무시를 무시하는 꼴이니 말이죠.
그렇게 되면 정반대로 내가 무시하지 않고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들이
날 대신해 울어야 할 판국이 되니
준비한 것이 무엇이 되겠냐 말이죠???
바로 이렇게 미리 준비했던 안식일 지키기가
안식의 주인 앞에서 뭐가 되겠냐 말이죠!!!
뭘 해도 죄요 늘 막살고 있을 뿐인 죄 아닌 것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자의 구원이
구원자의 섬김을 바라보는 것이지
내 행함을 내 믿음을 일체 쳐다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것들은 나를 속일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윗을 우리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어떻게?
쪼매만 참아 너가 그렇게 된 것이 주님의 구원하심이야 라고 말이죠.
참 다윗에게 차마 할 말이 아니다고 여기겠지만
이것이야 말로 다윗을 구원하시는 섬기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섬기는 자가 없는 자들의 모습을 봅시다.
다윗 하나 어떻게 잡아먹을려고 환장을 한 늑대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양을 잡아 먹으면서 즐겁게 잔치를 벌리고 있는데
우리는 이제 그것이 보이는대로 보이지 않고
잔치가 아니라 천국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지옥 중의 지옥의 모습인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섬기는 자가 없다 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의 섬기심이 다윗에게는 징계로
그러나 저들에게는 주님의 섬김이 없기에 매가 없이 그냥 내어버려 두심이다는 겁니다.
어느것이 더 무섭습니까?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라고 했습니다.
어느 것이 더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까?
매와 징계과 고난 받음입니까?
아니면 그 어떤 잔소리도 없는 내버려두심입니까?
(시 55:5, 개역)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황공함이 나를 덮었도다』
(시 55:5, 공동) 『무서움과 공포가 온몸을 뒤덮어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시 55:5, 현대인) 『두려움과 떨림이 나를 둘렀으니 내가 무서운 공포에 사로잡히는구나.』
(시 55:5, 현대어) 『무서움에 사로 잡혀 벌벌 떨려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공포에 사로잡혀 죽을 지경입니다.』
(욥 4:14, 개역)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다윗은 저들보다 지극히 편하적인 편애를 받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정반대로 보이는 저 사랑을
우리는 부러워 하고 부러워 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친구의 배신, 사랑하는 자의 배신 마저도
이제 감사함으로 넉넉히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 배신이 다윗을 구원하는 겁니다.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미 확정된 찬양 (시편 57편) (0) | 2015.11.23 |
---|---|
착고에 상한 다윗에서 쇠사슬에 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시편 56편) (1) | 2015.11.13 |
주께서 원수 갚으시리니 (시편 54편) (0) | 2015.11.09 |
천국은 빼앗는 자의 것이다. (1) | 2015.11.09 |
[송곳]과 [자본주의라는 종교] (0) | 2015.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