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계시의 기준(심판의 기준) (1: 1- 3)

 

천국 빼앗기, 종말 빼앗기, 세상 빼앗기


(마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1, 개역)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1:2, 개역)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1:3, 개역)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오늘부터 요한계시록을 시작합니다.

오늘 수요일부터 한달에 한번으로 하자 라고 정했구요

시편 끝나면 매주 할 것 같네요.

 

다행히도 참고로 삼은 계시록 설교가 오전예배에 적용된 거라 쉬울줄 압니다.

http://crosslamb.tistory.com/62

http://www.woorich.net/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amworship&page=23&page=23&wr_id=598

http://www.woorich.net/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amworship&page=23&page=23&wr_id=599

 

왜냐하면 이근호 목사의 설교가 오전예배가 가장 쉽게 표현이 되어 있고

수요설교가 가장 어렵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오전예배를 너무 쉽게 한다고 투덜 되던 자도 있었을 정도였는데

아마 많은 사람들을 염두한 입장이라

나이드신 분들도 또 어린 학생들도 듣는다는 입장에서 쉽게 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오전설교를 다들 쉽게 하거든요.

 

오늘 본문에서 특이한 점이 바로

우리가 예상하는 즉 계시록을 전혀 모른다는 점에서

처음 접했다 치고

처음 읽는다고 했을때에 특이한 점이

 

심판으로 시작할 것 아닌가 하는 점인데

사실상 그 심판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심판, 그런 종말이라는 마지막때의 사건들 아니겠습니까?

그럼 계시록의 시작도 그러할 것 같다 말이죠.

왜냐하면 세상의 종말을 운운하는 것들이 다 그런식의 출발이다 말이죠.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치 종말의 상황에서 어떻게 잘 피하고 살아남아서

종말을 극복하느냐 그 사람이 복 받은자이다 라는 식의 해석에

다 말려듭니다. 거짓선지자들이 그런식이지요.

 

그런데 정반대로 종말을 도리어 펼칩니다.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때려부어서 작살을 내어

원수 갚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빼내시는 겁니다.

그 뿐만아니라 가나안 땅을 정복하시는 겁니다.


결국 종말이란 천국을 빼앗듯이 침략하고 빼앗고 정복하는 의미가

요한계시록에서의 종말입니다.

그럼 종말은 결국 인물이 되는 겁니다.

참선지자는 이 인물에만 초점이 있었지

종말을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관심 없었다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마치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재현하는 것 같고
신약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하는 것 같다 말이죠. 계시록이 말입니다.

며칠 전에도 언급했듯이
역사를 빼앗는 겁니다.
역사 곧 묵시의 반대말이지요.
역사가 인간들의 주인노릇하고 있는 입장에서
인간의 사고방식은 역사 곧 시간, 공간에서 못 벗어나는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역사가 주인 노릇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 주인을 작살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도둑은 주인(역사)을 결박시켜야
새간을 빼앗는다 말이죠.

그러니 역사가 주체, 주인 노릇하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죽음 보다 강한 사랑
죽음에 대한 시기 질투심이 바로 사랑이다고 앞의 글에서 이야기 한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시작 출발을 예수님이라는 인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묵시 자체가 종말 자체가 인물이다는 겁니다.

뭐 새삼스러울 것 없다고요?

제 말은 종말이라는 어떤 세상 끝에 관한 궁금증이나

세상 끝이 어떻게 벌어지고

나는 그 속에서 어떻게 되는가?

그래야 궁금증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인물이 되면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말이죠.
그 인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 말이죠.
쉽게 말해서 하나도 안 기쁘다 말이죠.

왜냐하면 그 인물만 인물이냐 나도 인물이다 라는 거죠.
하나도 안 기쁘고 하나도 안 궁금한데 말라꼬 보겠냐 말이죠.

내가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하지

어떤 인물이 등장하든 말든 그 인물이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것 뿐이다면
그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에 계시록을 볼 이유가 없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 이라는 인물로 시작이 되면

소위 모든 종말론이 다 깨어진다는 겁니다.
역사가 만들어 낸 종말론을 다 깨부셔버리는 겁니다.

그게 믄말?


왜냐하면 모든 종말론은 사실상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겁니다.
역사가 주체가 되어서 만들어낸 조작된 거다 말이죠.

아니 왜? 돈이 되거든요.

종말 장사 말이죠. 1990년대 였던가요? 92년 부터 주장하던데!
하여튼 9가 나오면 끝일줄 알아요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가 이 휴거를 주장 해서
전재산 많이들 바치더라 말이죠.

 

즉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종말론에 의해 강요된 선택으로 종말에 대한 궁금증을 만들어 조작해 내지

예수님이라는 인물에서는 전혀 전혀 종말 같지도 않아서 관심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를 말라 죽게 해야 그저서야 관심가질까 말까 하지
전혀 관심 없다 말이죠

 

그 인물이나 나나 별 다를게 없는 인물이니 말이죠.

그런데 사실상 나 라는 인물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인물이니
사실상 없습니다. 자아란 [없는 허구] 입니다.
그것을 인정 못하니까 진짜 마지막 아담을 허구로 만들어 버린것 아니겠습니까?

오로지 이 인물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그 속에서도 돈 되는 가치를 추구하냐 이고

즉 종말 속에 살아 남는다는 것은 곧 돈의 값어치를 하는 인물로써 살아남은 거고

종말 속에서 죽게 될 운명이라면
아 결국 돈 없이 가난뱅이로 죽는구나 라는 겁니다
.
자나 깨나 돈의 가치로 따지는 겁니다. 죽어도 돈돈돈
조건 조건 조건을 따진다 말이죠.

그러니 구지 종말을 맞이해야 그런게 아니라

종말이 안 닥쳐도 이미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런 존재로만 있다는 거죠.

종말 개념만이 아닌, 성전, 구원. 심지어 찬양, 믿음, 행함, 이 모든 것이 나를 가치 있게 하느냐? 그렇지 않냐? 로 규정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인물로 시작한다는 말은
도대체 주체가 왜 그딴거로 되어 있느냐에 대한
주인 주체를 뻬앗는 겁니다.
기준을 바꾸는 겁니다.

인간들의 모든 판단기준인 자본이라는 기준에서 예수님을 바꾸는 겁니다.

모든 기준이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결국 종말도 예수님이다는 거죠.

심판도 예수님이 기준이 됩니다.

 

심판을 부정적으로 볼게 아니라

거룩이라고 보시면

거룩의 기준이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인물 때문에 세상의 끝이 벌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은 바로 예수님 때문에 끝장 나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인한 실수로 핵무기 버튼을 잘못 눌렀다거나

아니면 악으로 자처하던 세력들이 세뇌를 시켜 핵무기를 쏘아 올리게 해서 지구종말을 맞이하게 된다거나

세상 전체가 너무 악해서 환경오염과 그로인한 질병으로 인해 서양귀신 인간실패 개념인 좀비화 되어서 지구멸망 인류멸망이라든가 등등

그런거로 종말을 출발하는게 아니라

이런것들이 모조리 다 자본주의가 조작해낸 종말이다는 겁니다. ? 그것으로 또 돈되는 장사를 한다 말이죠.


그럼 종교는 다른 시각이다
?

천만의 말씀 종교 또한 똑같습니다.

종교란 철저하게 자본주의가 종교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슬람 근본주의가 얼마나 자본주의를 공격합니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들 근본주의들의 수뇌부들은 자본에 미쳐있는 놈들이다 말이죠.
그러니 자본이 돈이라는 주인이 그들을 쥐락펴락하고 있지
그들이 돈을 소유하는게 아닙니다. 돈이 그들을 가지고 논다 말이죠.

자본이 
유대교 불교 천주교 기독교를 만들어내었다 말이죠.

마치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어느 종교가 가장 인기 있는 다수를 차지하느냐로

돈 되는 종교

돈 안되는 종교 식으로

자본주의가 서열을 매긴다 말이죠. 얼마나 좋냐 말이죠. 다양하게 골라먹는 재미가 있으니?

 

그런데 예수라는 인물이 기준이 되어서 종말이 벌어지면

우리가 영화로 봤던 그 블랙버스터 같은 그런 장면들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자본주의가 돈 되라고 만들어낸 공상과학 재난 영화의 장면이 하나도 없다 말이죠.


아니 무슨 소리냐 모든 종말 영화는 성경을 보고 만들고 있는것이 헐리우드 영화인데?

그런것 일체 없고늘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오던 일들이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일어났었고 일어나고 했었을 뿐이다 말이죠. 

그럼 재난 재해 대비를 할 수가 없다 말이죠.

교육도 안되고

학습도 안되고

훈련도 안된다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냥 간단합니다.

그 예수라는 인물을 그냥 빼면 됩니다.

자본주의가 그래서 이미 벌써 그 예수라는 인물을 빼놓고

종말장사를 벌써 시작을 했고

거기에 기독교도 천주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 인도교도 유대교도 다 거기서 놀아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인물을 빼놓은채 말이죠

 

물론 자본주의가 멍청이가 아니라 기독교 천주교에서는 예수라는 인물을

즉 정통성을 반대해가면서 하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인물을 절대빼놓지 않아요

그 대신 유대교에 맞섰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그들이 절대로 율법과 성전을 빼먹지 않았듯이

똑같이

대체물로써 예수라는 인물을 삽입 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샘샘이가 되니 전혀 문제 될 것 없이

장사는 계속 할수 있게 된다 말이죠.

 

자 그럼 누가 이런 자본주의의 종말 장사를

상을 뒤엎어버리면서 강도의 소굴이라고 지적할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요?

 

예수님도 자본주의가 조작해 낸 예수만 기독교가 믿고 있다 말이죠.
자본주의 에서 기독교가 나온 겁니다.

결국 그 예수도 돈 되는 예수이다 말이죠.

그러니 그 예수는 심판의 기준이 거룩의 기준이 안됩니다.
인간에게서 구원의 예수, 심판의 예수는 결국 자기에게 돈 주는
돈 되는 예수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참으로 총체적으로 난국입니다. 이리저리 다 막혔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어쩌죠?


자 무슨 수로 계시록을 시작하냐 말이죠. 지금 요한 계시록 시작부터 막혀 버렸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아는 예수는 순 가짜 예수인 자본주의가 조작해낸 예수 밖에 몰라요.

 

이 단절성을 무슨 수로 극복하면서 요한계시록에 들어갈수 있겠냐 말이죠.

시작 부터가 브레이크가 걸려서 들어갈수가 없다 말이죠.

 

즉 시작 부터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앞의 글 시편 89편에서 다윗을 찾아낸 예수님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낸 다윗의 기쁨이 아니라 말이죠.

오로지 주님 쪽에서 찾아내시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다윗 찾아내심 처럼
우리를 찾아내셔야 함 이다는 겁니다. 역시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말이죠.
같은 말이 종말 빼앗기 입니다.

 

이것을 힌트 삼아서 보면

 

예수님이라는 인물로 시작한다는 말은

오로지 다윗을 찾아내시듯이

 

그 잃어버린 다윗을 찾았을때에

그 때부터

 

예수님이라는 인물의 시작이 된다는 겁니다. 종말이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쪽에서 출발한다는 자체가

자본주의의 강요된 선택에서의 출발이니 어차피 가짜이고

종말론만 궁금해 할 뿐이지

? 돈 되냐 안되냐 만 따질 뿐이지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게 되는 종말론일 뿐이다는 거죠.

 

종말론이란 사실상 불가능성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종말론은 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어서

즉 돈으로 바꾸어서

나는 얼마 정도의 돈이냐, 얼마의 가치냐

가치가 높으면 안정적이라서 세이브 ~~~~

가치가 떨어지면 아웃 탈락 불안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재난 영화를 통해서 점검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인물과 연관 됩니까

처음부터 나만 살아남느냐 로 출발하는 거지요.

 

실제로 요한계시록을 운운하는 많은 목사들을 보면

다 그렇게 출발하는 겁니다.

자본주의의 개 노릇을 하고 있다 말이죠.

 

내 구원으로 출발한다 말이죠.

 

그러나 다윗언약 보시라 말이죠.

다윗 도 짤렸어요

왕 자리에서 탈락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인물로써 시작한다는 말은

나 라는 인물 곧 나의 구원은 이미 탈락이다 라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반응이 나는 구원도 안 될껀데 말라꼬 계시록을 볼 이유가 뭐가 있느냐 라는 겁니다.

 

거 보세요

처음부터 예수 라는 인물로 출발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증거인 겁니다.

막혔습니다. 불가능이요 단절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이것을 가능성으로 바꾸어서 말하기 때문에

여느 다른 종말과 같은
결국 내 구원을 목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강요된 선택을 펼친다는 겁니다.
남들은 종말에서 다 죽어도 주인공은 살아남더라 말이죠.
이것이 재난 영화의 강요된 선택 아닙니까?

그게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이기도 하구요.

인간의 대표성인 유대인이 그러면 우리 또한 역시나 같은 속내이다는 겁니다.

 

자 다시 강조하면

처음부터 막혔어요

요한계시록을 들어가야 하는데 길이 모조리 차단 당했습니다. 어쪄죠?

길이 없어요 길이

막힌 담벼락 뿐입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계시록을 다루는 입장이 아니라

계시록이 나를 다루는 입장인

계시록이 나에게 찾아와

나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나를 빼앗아야 합니다.
주인을 결박하고서 말입니다.

 

찾아야 한다는 것은

곧 내 쪽에서 그 어떤 조건을 갖출수가 있다? 없다?

계시록에 나오는 상황을 내 쪽에서 갖출 그 어떤 원인을 만들어 낼수가 있다? 없다?

아예 없는 겁니다.

 

아예 없으면 그게 시작입니다.
이것이 기쁨입니다.

만약 있으면 그 사람은 인물로 시작 못하는 거죠.


내 쪽에서 출발 할수 없다는 자체가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이것을 다른 말로 종말의 종말이다는 겁니다.
인간 쪽 즉 역사가 만들어낸 종말을 깨는 인물(종말)만이 복음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인간 신학이 만들어낸 종말론을 깨지 못하는 종말은 가짜이다는 겁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꼭 종말 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율법에서 못 벗어나도록 율법 아래에 가두었듯이
율법을 깨는 의문의 증서를 찢는 또 다른 율법의 완성자 라는 인물이 등장해야
그 인물이 율법에 갇힌 나를 찾아내어야 이것이 기쁜소식인 겁니다.
안그러면 챗바퀴처럼 의문의 증서에 말려든채로 모호하고 흐릿한 의문만을 반복만 할 뿐인 겁니다.

역사를 깨지 못하면 묵시가 아니다 말이죠.

묵시 묵시 하니까 또 유대인들의 묵시운동의 달인들이 생각나죠?

그들은 묵시를 인물 곧 예수님으로 때려죽어도 못 봅니다.

그러니 종말 운동 묵시 운동 하나님나라 운동들만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 아닙니까? 오늘날 개혁주의자 성화론자들 말입니다.


되도 않는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것을 마침이 되도록 하지 못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누가 합니까? 인간 중에서는 아무도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래서 사랑 조차도 인물로써 그 인물이 와서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무화과 나무 잎이 말라 죽은 것을 보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겁니다.

왜? 이제 모든 의문의 것이 또렷하고 명료한 것에 의해 폐해야 하니까 말이죠.

이제 무대 뒤로 빠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보통 기쁨이 아닙니다. 드디어 의문의 것이 폐해야 함은 곧 실상이 드디어 왔다는 겁니다.

그림자는 뒤로 빠지고 이제 실상만이 제대로 나타남이 되니

얼마나 시원하냐 말이죠. 또렷하고 명료하고 초고화질 UHD 방송으로 보는 것 같다 말이죠.

 

바리새인 보다 낫지 못하면 절대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 라고

이것은 바리새인의 담벼락이 높이가 높아도 보통 높아야지요?

바리새인 같이, 목사들처럼 시간이 남아 돌아야 성경을 읽고 알고 말씀을 지키고 해서
그리고 두루 두루 돌아다니면서 선교를 하고 전도를 하고 말이죠.
다 할 짓 없는 놈들이 심방하러 돌아다닌다 말이죠.

그래야 말씀을 지킨 놈들이 담벼락이 저렇게 높은데

무슨 수로 그들을 넘어서서 더 나을수 있냐 말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벌기 바쁜데

돈을 벌어야 자식들 입에 조금이라도 더 들어가 먹여 살리고 경쟁사회에서 뒤쳐지지 않게 하는데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자 이렇게 저들이 높아지도록 누가 그렇게 저들을 키운 겁니까?
그럼 원수를 누가 갚는 겁니까?

또 마침 누구의 글에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


OOO

11시간 


나는 불꽃이다

한화광고 카피지만

그렇게 라도 암시하지 않으면

세상살이에 도저히 못 버티겠나 보다

좀 적게 벌고, 덜 경쟁하고, 몸을 덜 괴롭히며 사는 게

지혜롭다는 걸 젊었을 때 모르나, 그 시기가 지나면 알지

자신을 불꽃으로 태우지 못해 안달이 나 앞뒤 가리지 않고 살다가 잃어버리고야 정신 차리지

불꽃처럼 살아도 마지막은 우는 날이니

태어날 땐 왜 우는 지 몰랐지, 웃으며 태어날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니 어찌하겠나


울어라 우는 자가 복이 있을지어다


이미지: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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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김대식

 

모세가 자신을 불태워 소진시켜가면서 까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도

그 자체가 이미 헛된 짓임을

 

도리어 뭘 해도 죄 뿐임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를 알게 하시고자

가시떨기나무의 불꽃으로 나타나시는 겁니다.

 

소진되지 않는, 가시떨기가 타들어가지 않는 불꽃이다는 거죠.

 

자신을 불태웠노라고 자신을 쳐다보지 말고

가시떨기 나무에 붙은 여호와의 불꽃을 보라는 겁니다.

안 그러면 나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이러기요?

라고 엘리야 컴플렉스에 빠지게 되는 거죠.

 

너는 너를 불태워 다 없어지지만

여호와의 불은 가시떨기나무를 태우지 않고서

일하시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고로 인간의 구원은 헛되다는 겁니다.

 

(60:11,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08:12,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 입니다.

 

나대지 말고 그분께 맡겨라 ~~~~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0:30, 개역)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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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O

 

가시떨기나무의 불꽃이라

불꽃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생각케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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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가시떨기나무는 잃어버린 원인인 모세 자체가 잉여로써 무능해야 하는데

자꾸 자기 능력을 불태워서라도 이 원인을 구원자의 조건에 맞는 원인으로 만들고자 해서

이게 아닌데 ~~~ 이게 아닌데 ~~~ 라고
넌 무능한 가시떨기나무야 햇빛에 비추이기만 해도 자연발화가 되는 연약한 가시떨기나무야

이 연약한, 미약한 이스라엘에 충실하신 분이
여호와의 불꽃으로 오시는 예수님이고

반대로 육적인 이스라엘은 힘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해방코자 하는 총칼로 독립운동을 펼치는 해방독립군이 된 거죠.
그 대표가 독립군 해방군인 가룟유다처럼, 여호와의 불꽃과 관련 없는 독자적인 존재가 된 겁니다.

그러니 아무런 힘이 안되는
이스라엘 독립에 전혀 힘이 안되는, 돈이 안되는, 총알이 안되는 무능한 예수
잃어버린 대의에 충실하신 예수를 팔아 넘기는 거죠.

끝까지 힘으로 달성하겠다는 것

그러니 가시떨기 나무에 충실하신분은 이스라엘도 아닌
예수님 본인으로써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겁니다. 
99마리 내 버려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 만 충실하신 목자

잃어버린 한 므나의 비유 곧 천국 비유 죠.

 


---

천국이 처음부터 막혔어요

담벼락이 높아도 너무 높아요

장대높이 뛰어넘기의 달인 올림픽 금메달 선수도 안되요.

남자는 6.14미터가 세계기록이고

여자는 5.06미터가 세계기록

 

하늘에서 보면 언제 장대높이 뛰기를 했지? 티도 안납니다.

 

얼마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가 금메달을 땃는데

2009년도에 자기가 세운 958을 아직도 못 깨고 981로 그쳤는데

 

분명 인간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막혔다 말이죠.

계시록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복음서에서 그 인물 때문에 안 막힌게 없을 정도로 다 막혔다 말이죠.

그래서 졸지에 이 인물 하나 때문에 졸지에 걸림돌이 된 인물로 인해
자꾸 넘어지는 겁니다. 실족하는 자들이 막생겨나요

(마 11:2, 개역)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개역)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 11: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마 11:5, 개역)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그렇게 멀쩡하던 인간이 마귀로 변해버렸다 말이죠.

원래 마귀였던 것이 양의 탈을 쓴 것으로 그 가면을 벗겨버림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들은 이 인물을 다들 싫어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내 가면 벗기지 마세요 라고 거부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아예 가면 제작소인 성전을 헐어버리라 라고 하니까
드디어 흩어진 힘들을 하나로 모아서 죽이기로 작심하는 겁니다.

때려죽어도 내 교회 만큼은 너 예수는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어 라고

마치 [달콤한 인생] 이라는 영화에서 김영철 조직보스가 부하 이병헌이에게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라고 합니다. 이것을 패러디 해서 개그에서 유행어로 만들었죠.

넌 나에게 트라우마를 줬어. 방어기제를 줬어 ~~~

예수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왜 다른건 다 건드려도
건드리지 말았어야 할 것을 건드려부렸어

그게 바로 교회 곧 성전을 건드린 겁니다.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19,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이 성전을 빼앗지 않으면 사랑 아닙니다.

오늘날 세상의 성전이 뭡니까?

인간의 몸 아닙니까?

그럼 예수님이 진짜 종말이라면 뭐를 건드리겠냐 말이죠?

무엇을 빼앗고자 다시 오시겠습니까?

인간의 천국은 결국 그 몸입니다.

이 몸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이 인간의 천국인 이 몸을 빼앗고자 오시는 분이 인물이 종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뭐 그 몸을 종말에서 구원시켜 보겠다고 요한계시록을 봐?

그 사람은 반대로 본 겁니다.
모든 인간들이 성경을 반대로 보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거꾸로 보고 있다 말이죠.


주여 저를 어서 멸망시켜주소서 당신의 몸만이 옳았습니다.

내 몸은 가짜 입니다 이런 자에게만 종말이 보인다 말이죠.

이것이 요한 계시록의 시작이요 출발이 되어야 하는데

곧 인물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그런 고백이 나오죠.

 

이게 보통 기쁨이 아니다 말이죠.

되도 않는 의문의 것 곧 몸이 마침이 되는,
몸을 폐하는 새 몸의 등장이 이전것의 몸을 빼앗는 종결을 보여주는

확실한 것의 등장이 바로 종말이라는 인물이다는 겁니다.
죽었다 3일 만에 살아난 몸 만이 종말이다 말이죠.

곧 다른 몸 곧 다른 인물을 만났다는 것이 너무 너무 기쁜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윗 자기를 찾아낸 예수님의 기쁨으로 인해

얼른 이스라엘 왕의 자리를 반납해 버리는 겁니다.

주여 당신이 진정한 이스라엘 왕입니다.


오호 그래 이 모습 방금 이 상황을 기준으로 해서 이스라엘을 해체시키고 더 나아가서 주변 이방나라들도 해체시키는 겁니다.
쫄닥 망해도 상관 없습니다. 새이스라엘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벌써 완성했으니 말이죠.

 

이 종말은 싫어하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종말은 아주 재미있어 환장을 한다 말이죠.

돈 되니까?

바리새인이 왜 성전에 율법에 미쳐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해서? 아닙니다.

돈 때문이다는 겁니다.
먹고 살기가 되고

심지어 돈의 가치와 일치하는 자기자신의 존재 가치가 되기 때문이다는 거죠.

 

저 세리 처럼 토색치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가 돈 되더라 라는 겁니다.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이 고난 속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돈 벌러 들어가는 거다 말이죠.

그래야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돈 준다 말이죠.

서커스 원숭이인 겁니다.


(행 16:16, 개역)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행 16:17, 개역)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행 16:18, 개역)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 16:19, 개역)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사도행전에서 살펴봤지요?

여자 점쟁이가 사도바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욕하는 장면

알고 보니 그 여자 점쟁이의 포주가 있었던 겁니다.

그 여자 점쟁이는 꼭뚜각시이구요.

배후세력이 있었다 말이죠.

모든 인간의 배후세력은 바로 돈입니다. 곧 세상임금 마귀다 말이죠.

돈을 예수님은 하나의 인물로 취급했다 말이죠. 주인 주체라고 하셨다 말이죠.
즉 그 어떤 인간도 돈에서 못 벗어나도록 돈을 주인으로 만드셨다는 겁니다.
돈을 인물로 해석하는 분은 예수님 뿐이다 말이죠.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오죽하면 인물대하듯이 섬긴다고 할까요?

옛날 나무조각이나 돌조각을 우상으로 섬기는 미신이라고 현대인들은 놀려먹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유식한 현대인들은 그런 미신가들 보다 더 심해졌다 말이죠.

더 심해요 심해 ! 그런 현대인들은 돈에 미쳐 있다 말이죠. 역시나 같은 도찐개찐

 

자 이런 입장에서 예수님이라는 인물로 시작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막힌 길이다는 겁니다.

다른 길이 없어요

다 막혔어요

무슨 수로 요한계시록을 출발하죠?

출발만 가능하다면 이미 끝은 벌써 도착한거나 같은데

시작 자체가 불가능하니 말이죠.

 

다윗언약에서 다윗이

이스라엘 속에서 잃어버림을 당합니다.

 

제가 이것을 어머니께 이게 말이 안된다고 했습니다.

늘 다윗을 지켜보고 옆에 두시고 가까이서 관찰하고

뭐하나 빠뜨린 것 없이 늘 함께해 왔다 말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잃어버렸다고 자꾸 외치시고
또 그래놓고 언제 그랬냐는 둥

찾았다고 하니까

주님이 일부러 거짓말을 하시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이라는 배경 속에서 다윗을 볼 때

다윗은 잃어버린 자이다는 겁니다.

그럼 누구를 상대적으로 삼아서 표현한 말씀입니까? 마귀 들으랍시고 외친 거다 말이죠.
상대적인 표현인 겁니다.

마치 요셉처럼 다른형제들에게서 구덩이 파 묻혀 버림 당하는 것과 같다 말이죠.

아버지 야곱은 떼떼옷이 찟겨진 것을 보고

잃어버렸다 라고 합니다.

 

저들의 거짓부렁에 넘어간거죠.

이것이 그대로 다윗에게 적용이 되고

이것이 그대로 다윗의 자손 예수님에게 적용이 됩니다.

 

다윗이 잃어버림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다윗에게서 버림받은 예수님이

그 다윗을 찾아낼때에만 이 다윗언약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결국 다윗은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었고

역시나 누락이 되는 겁니다.

다윗을 깨뜨려야 그 속에 다윗의 자손이 있다는 겁니다.
이 인물을 다윗이 보고 주여 라고 했다 말이죠.

어떻게 자손에게 주여 라고 하냐 말이죠.

뉘 아내냐 말이죠? 뉘 자손이냐 말이죠? 역사(시공간) 뒤틀려 버리는데
예수님의 시계는 거꾸로 흘러요
다윗의 시계도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라는 영화 보셨죠?
 
역사가 조작해 내는 부활과 진짜 부활 되신 묵시 곧 묵시란 모조리 인물 개념인데
부활 되신 인물과
누가 진짜 부활이냐 말이죠. 그러니 부활도 빼앗는 부활이 진짜 부활이다는 겁니다.
가짜 부활을 죽이지 못하는 부활은 사랑이 아니다 말이죠. 종말도 마찬가지 성전도 마찬가지.

종말을 빼앗지 못하는 종말은 종말이 아닌 거죠.

(마 22:41, 개역)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개역)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개역)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그럼 왜 그 많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예수님은 다윗을 찾아내었을까요?

다윗은 밧세바를 취했고 우리야 장군을 죽였고 이름없는 아이까지 죽게 된 원인이 되었는데 말이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베드로를 찾아내셨던 겁니까?
너가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했다 말이죠. 왜?

그 잃어버린 베드로를 찾아내신 겁니다. 드디어 말이죠.

 

이것이 바로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을 완성하심이다는 겁니다

 

다윗언약은 다윗에게서 완성되는게 아니라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에게서 완성 됨으로써 다윗은 그 혜택을 입는 겁니다.

 

이것이 새언약의 기준으로써

심판의 기준이요 거룩의 기준이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는 기준으로써

종말의 인물은 예수님의 시작으로

요한계시록이 출발하는 겁니다.

막혔는데????

 

여러분 이런 장난 어릴적에 한 적 있죠

개미를 가지고 가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다른 길로 개미가 갑니다. 또 막아버립니다.

또 다른 길로 갑니다. 또 막습니다.

마지막 방향이 남아서 그 길로 갑니다. 또 막습니다. 다 막아버린 겁니다.

개미가 이제는 담을 올라 기어서 올라갑니다. 뚜껑을 막아버립니다.

 

자 이제 다 막혔죠? 무슨 수로 출발합니까?

아주 아주 간단합니다.

 

막았던 그 주체가 담을 헐어버리면 됩니다.
주인이 막았으니 주인이 열어주는 길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럼 누가 막았다 를 알면 된다 말이죠.

누가 막으시는 분이다?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개미에게는 길이 막혀서 길이 없지만

막았던 주체에게는 길이 있다 말이죠. 있거든요.

그러면 하늘에서 길을 열어주듯이 위에서 손으로 들어서 담을 타 넘어

개미를 옮겨놓으면 개미는 잘 갑니다.

 

개미에게는 없지만 막아버린 그 당사자에게는 얼마든지 있다는 말을 제가 하고픈 겁니다.

막은 자에게 있다는 거죠.


(출 20:1, 개역)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 20:2, 개역)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결국 막은 자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자본주의 종말론은 있었던 종말론을 가지고 돈 되는 장사로 만들 것 뿐입니다.

시작을 누가 했는지 모른다 말이죠.

 

왜 예수님으로부터 요한계시록을 시작할까요?

예수님이 막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어떤 공간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천국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시공간을 비틀어서 해체시키는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인물이 천국이다 말이죠. 종말이. 천국이

고로 천국은 인물입니다. 이 인물과 만나지 못하면 인간이 말하는 천국은 허구임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우상천국인거죠. 우상은 약속이 아니다는 겁니다.

결단코 천국에 못들어간다고 누가 막으면서 천국에 못들어간다고 했을까요?

그 천국이가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천국 자기가 자기에게 못 오도록 막겠다고 하는 겁니다.

말이 맞잖아요

 

그런데 천국을 가지고 장사하는 놈들은 자기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도록

중간에 가로막고서 삥을 뜯는 겁니다.

마귀가 그 역할을 부여 받았거든요.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다 이 짖을 하도록 부여받은 겁니다.

 

자 그럼 천국이라는 인물 곧 종말이라는 인물은 항상

그렇지 않은 인물로써 대조와 차이로써 우리는 알게 됩니다.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먹을길이 없는데 말이죠.

앗 저분이다 라고 눈치 채는 경우는 오로지 다른 인물과의 차이 뿐이다는 겁니다.
그럼 항상 그 다른 인물이 대장질을 하는 가운데서 그분의 등장을 보게 됩니다.

그 다른 인물 속에 나도 포함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가 되는 거죠.

 

오로지 당신 만이 즉 이 인물만이 천국이요, 이 인물만이 종말인데

이 인물만이 다른 인물과의 차이로써 제대로 막는 분이고

제대로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분이고
제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분이다는 것을

차이로써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럼 그 차이를 나의 의지로 발견할수 있는가?

물론 없지요.

그가 알려줄때만 알지요.

 

결국 역시나 불가능하고 막혔다는 소리네

네 맞습니다.

야 장난하냐 퍽퍽퍽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안그러면 차이를 발견할 수가 없는데

다른 인물과 다를게 없는데

그렇게 되면 시작이 안되는데

 

시작이란 시작이 안되는 것이 시작이다 말이죠.

시작이 되면 그것은 막혀서 시작 자체가 없다는 거죠.

시작은 불가능해야 시작이다는 겁니다.

막혔다는 것을 알아야

막아버린 그 분이 열어재끼는 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말은 시작 자체도 인물이 되는 겁니다.

사물이 되는 겁니다.

시작은 어떤 상태이지 명사가 아니잖아요.

제가 문법을 몰라서

[시작]을 [형용사] 라고 하나요?

그런데 명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더더더 안되게 대명사 까지 아예 이젠 인물로써 표현하게 되면

이것은 문법이고 뭐고 다 개판된다 말이죠.

 

믿음은 예수님이다

 

이래 말하니까

가능성으로 만들어놓은 언어체계를 다 망쳐버린다 말이죠

 

시작은 예수님이다.

 

언어시스템을 겨우 겨우 오이디푸스화 해서 권력화 해 놓았더니만

아예 거세를 시켜버려서 바벨탑처럼 언어 하나만 톡 건드려도 그만 허물어지는 해체되니까

소통은커녕 단절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바벨언어를 새로 만들어야 해 ~~~

요즘 바벨 뭐뭐 라는 프로그램 보니까 처음엔 배꼽잡았는데

점점 재미없어지더라구요. 바벨 250

 

그러니 통할수 있는 소통이 가능한 바벨언어를 새로 구상을 해야하고

거기에다가 힘을 실어주면 그제서야 통한다 말이죠.

힘을 안실어주면 언제 와해가 될지 모른다 말이죠.

영어가 세계인에게 가장 잘 먹히는 이유는

가장 힘이 센 국가 때문이다 말이죠.

우리나라가 만약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강국이라면

토익 시험 안봐도 된다 말이죠.

돈 때문이다 말이죠.

 

요즘도 아니다 근래 50년 사이에 사어 곧 죽은 언어가 된 히브리어? 등등이

다시 부활하는 이유는 자꾸 사람들이 힘을 실어주니까 그런거다 말이죠.

예수님 때문에가 아니라

힘이 있는 자들이 힘 된다고 여기니까 말이죠.

 

아는 동생이 경제가 부활하면 과거에 죽었던 문화들이 다시 되살아난다고 하더군요.

 

? 돈 되니까 힘을 실어주는 자들이 생기는거니까 말이죠.

 

아무튼 예수님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기에

인간들은 엉뚱한 다른 방법들을 찾아내는 겁니다.

 

시작 자체가 예수님이다 라면

우리는 그 어떤 권리도 없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시작 자체가 내가 아니라

인간이 아니라

다른 인물도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이다는 것이 얼마나 기쁨인지

 

계시록의 시작이 예수님이래요!

그래요?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이신 분이시죠?

네 맞아요.

아 그렇다면 다른 인물이 아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네요!

왜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 뿐이니까

다른 인물이 되면 안되니까 말이죠.

맞아요 맞아요.

 

자 계시록의 시작이 예수님이고

시작이라는 인물도 예수님이고

심판이라는 인물도 예수님이고

거룩이라는 기준도 예수님이라는 인물로써 모든 기준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계시록은 우물가에 여인에게 물을달라고

느닷없이 찾아온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계시록 자체가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자본주의 영향아래에서 외쳐지는 종말의 재난영화의 조작된 종말이 아니라

 

물을 달라고 직접 찾아온 예수님

삥 둘러 사마리아 구역에는 아예 오지도 않고 피해가는 그 지역에

직접 찾아와서 물을 달라고 하시는 그 예수님으로 시작하는

 

나를 찾아낸 예수님의 기쁨으로 시작하는 계시록이다는 겁니다.

 

계시록이 나를 느닷없이 찾아와 물을 달라고 한다 말이죠.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맺어버리는 관계로써 시작한다는 겁니다.

 

도대체 왜 계시록은 나를 찾아온 것일까요?

왜 예수님을 나를 찾아와서 계시록을 시작하시는 것일까요?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심일까요?

그 음성을 들어보자 말이죠.

 

반칙으로 다음시간에 할 것 미리 이야기 하자면

거룩을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우겠다는 겁니다.

 

물론 거룩이란 십자가 사건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잃어버렸다고 주님은 선언하고

또 다시 되찾았다고 주님은 선언합니다.

그 와중에 그 사이의 간극에 또 뭔가가 걸려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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