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퉁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09-26 17:49:19,
신앙은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적인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다면 저 세상에 가서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합니다
주님이 이루신 과정을 우리도 겪어야 하며(이것이 그 다음 우리다라는 말과 상통한것 같습니다)그 모든것을 통과 하고 육이 끊어지고 주님과 하나될때 비로소 우리는 이땅에 있지만 하늘의 삶을 사는것이다 그때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은것이다 하거든요
답변 : 피안(현실 밖의 세계 = 깨달음의 세계 라는 의미)
무슨 불교의 도 닦는 깨달음의 세계인가요?
그게 종교의 장난 아닙니까?
예수 흉내내기 따라하기 라는 종교 취미 삼는 자들 말이죠.
얼마전에 어떤 백인이 1년 동안 성경의 예수님의 명령 문자 그대로 살아 봤다고 합니다.
결론은 십자가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넘치는 겸손과 무한한 유익들을 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성경 문자 그대로 따라하는 자도 이 정도인데(자기 자랑이고 육의 자랑 뿐입니다.)
종교꾼 치고는 도 닦기의 수준이 좀 낮은 것 같네요,
그래서 성화론도 (인간의 행함을 근간으로 하기에 늘 변명과 변색이라는 처세를 부립니다. 정치죠. 늘 조율하니깐요) 그런 모순에 미리 방어책을 마련한 겁니다. 행함에 등급제를 붙이는 식이지요. 수준 낮은 저급 성화론과 수준 높은 고급 성화론이 있다 라고요. 많이 많이 성숙한 자일수록 수준 낮은 성화에 머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치 구원도 부끄러운 구원이 있다 라고 인간의 손의 영역에서 자꾸 구원문제를 다루고파서 나온 용어이듯이 그런 말을 자꾸 만들어내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 라는 마치 도닦기의 해탈의 경지 같네요
죽어도 살아도 내 안에 예수님이 드러난다 라는 것은 반드시 나의 바로 그런 생각들이 왜 아닌지를 약속의 간섭을 통해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나를 이기신, 죄를 이기신) 차이를 드러내는 구별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율법을 그런 취지로 준 것인데 거룩한 율법 마저도 삼켜버리고 이제 예수님이 율법을 다 완성하니까 예수님의 공로 마저도 삼켜버리는 식으로 성화론이 펼쳐지는 겁니다. 늘 미완료로 남겨두는 것은 없는 자아에게 자발적인 선택권을 주는 겁니다. 자아에게 의미를 두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믿음이요,(자기부인이 아닌 자기인정의 믿음 뿐이고 그게 성화이고, 성화를 위한 자기부인이라는 미션 단계를 수행하는 식이니까 마일리지 쌓기죠 그게 무슨 자기부인입니까?)
복음은 그 반대인 반드시 인간을 배제시킨 단절로 가장 가까이 근접한 베르도 마저도 꼬끼오 x 3 불가능의 언약 곧 새언약 되신 [예수님이 믿음이다] 라고 하는 이유는 유일하게 자기를 부인한 이 불가능을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곧 의란 예수님의 독보적인 독점적 행함인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입니다. 반드시 어리석죠,
이 어리석음이 걸림돌이 되기에 유대인 곧 종교꾼들은 어리석음을 빼버리는 식으로 복음을 가공하는 겁니다. 가공식품인 다른 복음은 가능성만을 제시하는 그야말로 인간 지혜의 창작품인 모방품입니다. 짝퉁
-----------------------------------------------
2008-09-26 18:00:58,
신앙은 피안으로 도망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사건을 통해 겪는것들은 다 구원의 재료들이다 전리품을 얻어가지고 나오는것이다 양식을 먹고 육을 죽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 맞는 말인것 같거든요
답변
거봐요 자꾸 구원이라는 용어를 놓치지 않지요 구원에 집착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자꾸 강조 합니다.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심판의 재료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리새인들이 뭐든지 인간 구원과 연결해서 예수님에게 질문하고 답을 하고 그 모든 인간의 행동과 생각들을 바리새인을 앞세워 대리 발언케 하신 겁니다.
뭐든지 구원과 연관 시키는 겁니다. 신앙도 믿음도 행함도 신학도 선택도 제자들이 서로 큰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크냐 라는 싸움의 일관성도 마찬가지 베드로의 용서 몇 번 더 많이 할까요 라는 양적 수준 높이기 또 예수님같은 영웅이 죽으면 안된다는 둥 등등의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 그 모든 것은 동일하게 구원집착입니다. 하나님 나라 정복입니다. 바벨탑 사고방식
그러나 주님은 정작 심판의 길로 갑니다. 십자가죠
자 이렇게 설명을 해도 또 십자가 마저도 자기 구원의 길로써 해석을 해버리니
이런 인간에게 정말로 질려버릴 정도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안되는 겁니다. 물론 말귀를 못 알아서가 아닙니다.
알면서도 듣기 싫은 겁니다. 약속을 인간의 뜻으로 바꾸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신 죽음의 길도 다시 산 길도
다 가능성으로 교체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내가 중요하기에
이런 멘트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하나 하나인 성경 문자 하나 하나가
자기를 살리는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 하나 하나가 바리새인들에게는 돈으로 다가온 겁니다.
그래서 평생을 돈 사랑하는 자임을 남들에게 들킨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아예 못 밖듯이 판결을 내리니
예수님만 없애버리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광고 카피 문구의 예수님의 한 말만 빨간색으로써 남기면 그것 또한 돈이 되기에
이 좋은 장사를 놓칠 리가 없는 거죠.
전쟁의 전술 병법 중에 하나가 바로 적을 공격함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자기 편으로 만든 자기가 끌어안음으로써 적을 이기는 전술
(공격하면 할수록 더욱더 내성이 생기는 더욱더 두텊게 방어를 하기 때문에)
곧 그 유명한 햇볕 정책으로 요리하는 겁니다.
종교꾼이 먹고 살려며는 무슨 짓인들 못합니까? 이중 간첩 삼중 간첩 양쪽세계 나라 다 팔아먹어서라도 자기만 악착같이 살릴수만 있다면 뭐든지 손잡고 열심히 일을 하는 겁니다.
-----------------------------------------------------------
2008-09-26 18:06:27,
신앙은 지금이고 오늘을 사는 것이다 피안이 아니다 이것도 성화구원의 특징인가요
답변 :
과거도 오늘도 미래 라는 것도 사실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이 결국 자아 이거든요 자아가 규정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란 지금 현재의 자기가 끄집어낸 기억의 산물이고
현재란 과거가 등떠밀어서 과거의 산물이 짜깁기 한 것이고
미래는 자아의 확장의 영역으로 미지의 정복대상일 뿐입니다.
어떤 것이 주어져도 자기를 위한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측정할 뿐입니다.
신앙이란 오늘이라는 나의 역사 곧 공간과 시간을 어떻게 계시가 무너뜨리는가를 통해서 오늘이 결정이 납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그 순간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 하루가 천년이 하루 같은 하루입니다. 그 오늘은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인간의 우상성(자기를 위한)을 깨뜨리십니다. 성도에게는 바로 이 하루 밖에 없습니다.
(벧후 3:3, 개정)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벧후 3:4, 개정)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5, 개정)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 3:6, 개정)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7, 개정)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벧후 3:8, 개정)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천년이라는 역사 밖의 세계인 묵시가 역사라는 하루를 조져 버리는 식으로 침투(마11:12)하는 겁니다. 하루는 천년에게 박살이 나야지요 - 이 내용은 잠언 강의 두 구조 물의 구조 불의 구조 로 설명이 되었고 (십자가마을 2008 여름수련회) 같은 의미로 생존층과 약속층의 대립이라는 의미로 우리교회 2008 여름 수련회 호세아 강의에서 다루었습니다. 참고하세요. 음성이 부담될까봐 동영상을 올린 겁니다.)
나를 위한 공간 시간으로 지은 허상의 집에다가 예수님은 그 허상을 깨뜨리고 그 깨드린 흔적을 그 터위에서 예수님 자신의 집을 짖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피조물 이전 것이 지난
더 이상 허물치 않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주님의 터입니다.
바로 당신 속에다 새집을 짖는 거죠. 마치 에얼리언이 시고니 위버의 뱃속에 약속을 심어버리듯이 말이죠. 그 약속이 시고니 위버를 야금 야금 갉아먹고 점령하듯이 말이죠. (헌 집은 무너지고 버려져야 하는 겁니다. 새술은 새부대에만 담아야 하거든요) 이 의미가 바로 십계명의 첫 계명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 (곧 선악을 아는 자아)을 네게 두지 말라
이 숙제를 예수님이 푸시는 방식입니다.
------------------------------------------
2008-09-26 18:07:34,
아까 말한 신앙은 지금이고 현실이고 오늘이다 이 말이 미래를 앞당겨 사는자들 아닌가요
답변 :
그러니까 예수님이 규정한 악한세대와 충돌이 되기 때문에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내 입장이 못되고 도리어 예수님을 죽인 이 세상의 감추어진 속성인 예수님을 살해한 살인의지를 실감나게 격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입니다. 미래란 인간의 손이 탈수 없는 고유영역입니다. 불가능성의 세계입니다. 그런 영의 세계를 성령은 약속으로 채우고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에게 채우고
반대로 종교꾼들은 그 미래를 자기구원을 채우는데 정신팔려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육과 영의 충돌이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미래를 십자가 사건이라는 지뢰밭으로 깔아놓았습니다. 원치 않는 그 길의 지뢰를 밟을때마다 나의 죄가 터져나오고 그 죄 마저도 용서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사랑이 터져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으로 몰고가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분이 진짜 예수님이고 약속이고
우상 곧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허상을 증거하는 자는 죽음이 아닌 심판이 아닌 자기 유익을 쫏는 길로 인도하는 겁니다.
--------------------------------------------------------
2008-09-26 19:03:26,
야곱의 부분을 보면서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창세기 부터 보여준 그리고 님과의 대화에서 봤던 부분인데 계속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안 보였네요
주님이 눈을 가리니 어쩔수 없죠
그래도 이렇게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할밖에요
아직 다 이해 못했지만 주님이 섭리하실거라 믿고 갑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답변 :
다 보여줬는데 못 봤다고 한다면 안됩니다.
주님은 다 줬는데 안줬다 라고 변명치 못하도록 십자가를 홀로 가신 겁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자기 목숨을 준 겁니다.
목숨을 주었다면 모든 것을 다 준 겁니다.
내가 못 깨닫는 것이 주님이 막아서입니다. 라고 변명도 못하도록 목숨을 걸었다니깐?
나의 무지함 나의 막힘이 문제가 아닌 내가 아닌
예수님이 다 줬다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겁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늘 회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 주었고 주시고 또 주셔도
정말 정말 무감각한 나 자신 밖에 몰라서 없는 허깨비 자아에게 갇혀서 한 발짝도 못 빠져 나오는 지독한 자기 사랑에 한탄해야 합니다. 특히 종교꾼들은 구원 지식만 챙기기 때문에 더 심각하게 자아도취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라는 그야말로 인간의 악마성(선악을 아는 하나님처럼 된 법으로 포장한 자아)을 드러내야만 하시는 겁니다.
(롬 8:32, 개정)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십자가)만 예정=편애, vs 선악(자아)을 단절=강퍅케 (1) | 2008.09.28 |
---|---|
하나님의 절대주권 교리 라는 마귀사상 (0) | 2008.09.27 |
예수님 외엔 구원 받을 자 없다 (0) | 2008.09.26 |
팔을 엇갈리게 (3) | 2008.09.25 |
참이스라엘 나다나엘과 조건갖추는 종교꾼 니고데모 (0) | 2008.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