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만 이어야 하는 복음 ( 35: 1-10)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사막이어야만 피는 백합화! 소경이여야만 뜨게되는 눈!

 

( 35:1, 개역)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 35:2, 개역)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 35:3, 개역)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 35:4, 개역)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 35:5, 개역)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 35:6, 개역)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35:7, 개역)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 35:8, 개역)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 35:9, 개역)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 35:10, 개역)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 35:1, 새번역)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 35:2, 새번역)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 칠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 피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

( 35:3, 새번역)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 35:4, 새번역)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 35:5, 새번역)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 35:6, 새번역)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 35:7, 새번역)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 35:8, 새번역) 거기에는 큰길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 35:9, 새번역)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

( 35:10, 새번역) 주님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이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 12:12, 공동) 『㉠그러므로 여러분은 힘없이 늘어진 손을 쳐들고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 이사 35:3.

 

 

사람이 왜 태어나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사람 자체에서는 찾을수 없습니다.

 

사람이 원인이 되어서는 답이 안나온다는 거죠

그럼 그 답을 어떻게 찾을수 있는가?

그 답을 미리 앞당겨 보시면 됩니다.

곧 끝을 미리 당겨보자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로써 그 결과를 미리 당겨 보니까

그 답이, 그 결과가 바로

주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누구는 긍휼의 그릇으로

누구는 진노의 그릇으로 말이죠

 

곧 주님의 의 되심을 외치기 위해서 인간은 태어나는 겁니다.

 

그 의란 바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으시는

목자의 음성이 바로 의입니다.

정의, 공의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 의에 인간이 자꾸 자신의 의를 자꾸 가미시켜 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의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이 없어요

그것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오는 것인데

인간 자체가 존재이기 때문에

기능이 아니기 때문에

원인 있는 결과를 추구하다보니

거기서 갇혀버렸기에 빠져나올수가 없다 보니

죽은 땅인 광야에서 샘을

사막에서 꽃길을 못 내어놓는다는 거죠

과연 인간의 의로움이다고 내세우는 것들을 보면

유에서 유이지

무에서 유가 아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로움은

사막에서 백합화를 내지 못하고 동시에 즐거워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다들 광야에서 원망하기 바빴다 말이죠

 

바로 이겁니다

인간의 신앙은 곧 원망입니다. 살인의지라고 했지요

원망 밖에 없어요

여기서 벗어날수가 없어요

그것을 인정할 수가 있겠냐 말이죠

여태껏 신앙했던 모든 것들은 사실상 원망이였고 복수심이였다는 거죠

 

또 누구를 신앙의 모범으로 보고 따라해봐도

그 사람을 아무리 멘토로 삼아도 그 사람 역시도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었을 뿐이였다는 거죠

 

그러니 의는 남이 아닌 내 자신이

주님의 의에 의해서 물에 빠뜨림 당해 죽었다가 다시 건져주심이 아니면

의를 못 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앞의 이사야 34장에서 완전히 모조리 다 이스라엘이든 주변국가든 모조리 다

심판 속에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왜 이방나라만 심판하지

왜 이스라엘 까지 심판하시느냐?

바로 주님의 의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기능 때문이다 말이죠

 

왜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 죽이실까요?

자신의 의로움을 늘 염두하고서 예수님의 의와 결합시키고자 하는

모든 인간의 욕망을 베드로를 통해서 대변해 주고 있는데

그런 베드로를 물에 빠뜨려 죽이시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건져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무능하지 짝이 없는 자로 만들어 버린다 말이죠

 

아니 물위를 걸었을때에 무능하기는커녕

예수님 덕분에 자신의 능력이 높아질줄 알았는데

그렇게 백합화 꽃을 피울려고 했는데

오히려 물에 빠져 죽게 되는

광야

죽음 사막

소경됨을 격게 되더라 말이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이 물에 빠짐 속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수가 있겠는가?

 

내가 내 의로움으로 내 가치 높아짐으로써 구원이 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심판 받아 마땅함 속에서 한치도 못 벗어나는 구나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바로 이것이 주님의 의가 먼저 떳기에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자로 만드심이다는 거죠

 

긍휼히 여기기 위해서

사막으로

광야로 만드시는 겁니다.

 

그러나 진노의 그릇은

바로 이 주님의 의가 먼저 떳어도

못 보는 겁니다.

 

그러니 그 앞에서 황폐함을 격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임을 외치는게 아니라

도리어 십의 일조 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자꾸 자신의 의로움을 자꾸 내세우더라 말이죠

 

그런 자에게 무슨 놈의 예수님의 의로움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리시는 이 정의 이 공의가 뭐가 필요하겠냐 말이죠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의사되신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고자 말이죠

 

그런데 다들 건강한 자이라고 하니

주님은 한 과부에게만

한 문둥병자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쓸데 없는 그 실상을 저들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십자가라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그 죽음에

사라져 버리니까

 

누가 이 십자가를 노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시편처럼

주님의 인애와 자비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 136: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2, 개역)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3, 개역)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4, 개역)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5, 개역)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6, 개역)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7, 개역)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8, 개역)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9, 개역)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10, 개역)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11, 개역)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12, 개역)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13, 개역)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14, 개역)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15, 개역)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16, 개역)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17, 개역)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18, 개역)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19, 개역)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20, 개역)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21, 개역)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22, 개역)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23, 개역) 우리를 비천한 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24, 개역)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25, 개역)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136:26, 개역)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슬픔 대신 희락을

재 잿더미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을

이 의를 노래하더라 말이죠

 

바로 아름다움의 극대화가 바로 꽃인데

그냥 꽃이 아니라

그냥 아름다움이 아니라

바로 도저히 아름다울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라는

구체적 보편적 진리로써의 꽃 곧 백합화 곧 아름다움이다는 겁니다.

 

이 아름다움이 바로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계시록에서 신부를 아름답게 하시고자 어떻게 하실까요?

바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의를 입히시는 겁니다.

 

기존의 아름다움은 곧 그냥 보편적 진리는

인간 쪽에서 충분히 행할 수가 있고 갖출수가 있는 조건

곧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누가 봐도 가장 더러운데

분명 더러운데 아름답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어떻게 하나님이 저주인 십자가가 어떻게 무한 영광이 되냐 말이죠?

 

이것은 영원한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요 그 영원함이 산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 쪽에서 행해서 갖추는 조건으로써의 아름다움은 영원한게 아니라

잠시 잠깐입니다.

 

누가 솔로몬의 영광을 아름답게 보고 있지

누가? 들에 핀 백합화를 아름답게 보고 있겠냐 말이죠?

 

그러니 인간과 정반대입니다.

예수님만 그렇게 외칩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잠시 잠깐이고

이 들에 핀 백합화가 영원하다고

이 영원성을

어머 놀래라 이제야 알겠네요

왜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데 왜 귀하다고 하는지

오히려 영원성이 아니잖아요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데 그게 무슨 영원합니까? 오히려 소멸

그것도 솔로몬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소멸 아니냐 말이죠

그야말로 허무 그 자체이다 말이죠

 

바로 이겁니다. 너거가 보기에도 솔로몬의 영광이 훨씬 낫지

누가 내일 아궁이에 던질 풀을 거들또 보겠냐 말이죠

 

그런데 거들또 보시면서 귀하다 라고 의미를 붙이더라 말이죠

즉 아름다움을 인간 쪽에서 규정하는 것과

주님 쪽에서 규정한

꽃이라고 불러주니 꽃이 되더라 라는 겁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물은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포도주가 된다는 것은 의미를 두었다는 겁니다.

누가?

 

계시록에 나오는 신부가 (세상에서는 가치가 없어요 왜 죽임을 당할 정도이니까 버린바 되는데)

오히려 주님께서 언급하시는 계시록의 신부는

흰옷을 주님께서 입히시잖아요

그래서 비로소 신부가 순결 깨끗 의롭게 되는 거룩하심을 입은

기쁨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다는 겁니다.

 

( 1:31, 개역)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요 내 기뻐하는 자로다

 

( 2:23, 개역)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즉 물이라는 무의미를( 물 자체가 아닌 상대적인 포도주에 대조해서)

그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는 유의미로 포도주로 만드시니까 가치가

의미가 아니 없고는 못 배기는 거죠

이것이 바로 구체적 보편적 진리이다는 겁니다.

분명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천한 계집종이였는데

왕비가 되도록 지혜가 펼치니까

세상이 견디지 못하고 격동하는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것이 구체적 보편적 진리이다는 겁니다.

 

이 지혜에 보탬이 된적이 없다는 거죠

사도바울 조차도 오히려 반대자였는데

최전방의 공격수였는데

적군이였는데

그 적군이 등돌려서 이 십자가를 외치게 되니

사도바울이 아니라 십자가가 했다는 겁니다.

여기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공짜로 선물 받아버렸다는 거죠

 

그러니 이 십자가가

이 하나님의 저주인 심판인 이 십자가가 아름답고

십자가 만이 유일한 기쁨이요 즐거움이다는 겁니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개역)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개역)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분명 성경 스스로가 십자가의 도 곧 지혜는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이 어리석음이 어떻게 지혜가 되며

미련한 것이 어떻게 지혜가 되는지

 

그리고 실질적으로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망시키지 못하는 십자가의 도는 가짜가 되며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수 없다면 가짜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또 실질적으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미련한 자를 반드시 택해서 지혜있다는 자를 부끄럽게 만들어야 진짜 십자가 이고

약한 것을 택해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진짜 십자가 이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 믿는 십자가는 우찌된 심판인지 이런 상황이 하나도 안 벌어져요

 

역시나 마찬가지로

누가 꽃을 보고

꽃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광야에 가는 자 봤나요? 그것처럼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게 어디있습니까?

 

즉 기존의 아름다움이란 저 광야 저 사막과 아무런 연관성이 일체 없어야 한다니깐요

마찬가지로 십자가로 기뻐하고 즐거워 하고자

누가 사막 또는 광야 즉 의미상으로는 심판 하나님의 저주 속이지요

죽음 속에 누가 들어가고자 하겠습니까?

 

그냥 기존의 아름다움을 광야에서 찾을려고 하지 않듯이

그래서 아름다운 모양이 없다고

풍채도 없다고 다들 고개를 돌려버리잖아요

싫어버린바 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겠냐 말이죠

 

우리가 분명 싫어했는데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는데

어떻게 그렇게 해놓고서는 당신이 옳았습니다 라고 노래하며 동네방네 외칠수가 있을까요?

자기가 살인한 자가 다기 살아났다고 저 분이 다시 사셨어요

내가 분명히 죽여서 살인했는데 다시 사셨다고 기뻐하면서 즐거워 동네방네 외치고 돌아다닐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내가 그 분을 살인한 이것이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탁 걸려 넘어져

문지방을 넘을수가 없는데 어떻게 외칠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베드로는 살인자 배신자 부인한자 만들어서 외치게 만드는

이 의가

이 십자가가 아름답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여러분 물을 포도주 되게 만들어 보세요

자기도 안 믿을 뿐더라

물론 말도 안되는 불가능이지만

실상은 이것으로 인해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

형제와 부모자식간의 본격적인 원수지간이 되는 계기가 되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를 누가 원하겠냐 말이죠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아름다움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아름다움 이다 말이죠

기존의 것에 더 더 더 언져서 더 많은 기존의 것을 소유하고픈 것이지

 

전혀 새롭고 낯설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요나의 표적으로써의

기적 곧 구체적 보편적 진리는 아무도 원치 않아요

주변 사람들과 원수지간이 되어버리니까요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꽃 곧 아름다움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핀 꽃 구원 아름다움만이 진짜 영원한 아름다움이다는 거죠

곧 정의요 의로움이요 거룩함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해산치 못한 여자가 복되도다 라고

기쁨과 즐거움이

젖을 많이 물려본 여자가 아니라

남편 있는 여자로써 많은 자식을 낳은 여자가 복된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죠 남편 있는 여자로써 많은 자식을 낳는 여자가

세상에서 복되는데

 

그게 복이 아니래요

그게 아름다움이 아니래요

의로움이 거룩함이 아니래요

 

오히려 누가 봐도 저주 받은 자가 복 되데요

 

(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 4:27,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54:1

 

( 54:1, 개역)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서를 보면 꼭 제2의 마태복음 같아요

유대인의 모든 사상을 깨뜨리면서

너가 동 하면 나는 서 하겠다는 식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쪽이 산자의 하나님이고

유대인 쪽은 아무리 봐도 죽은 자의 하나님이더라 말이죠

 

부활과 과부를 이 극과 극을 이을수가 없어요

오히려 반대로 한 쪽을 떼어 버리죠

사두개인은 시형제결혼법으로 과부는 남겨두고서는 부활을 떼어 냅따 버려버리고

반대로 바리새인은 부활은 남겨두고서는 과부를 냅따 떼어서 버려버리지요

둘이 극이라서 양립할 수가 없더라 말이죠

 

교회와 십자가가 양립할 수가 없는 이유는

불가능성으로써 양립해야 하는데

 

가능성으로써 양립시킬려고 하니

십자가(부활)를 주장하는 쪽은 곧 구원이지요 교회를 떼어버리고(환자 죄인 하루살이를 떼어 버리고) - 바리새인들이 이런 식입니다. 물론 십자가도 결국 냅따 버려요

눈에 보이는 교회 중심주의 보다는 교리 실천을 우선시 하는

말씀실천, 거룩하게 되기, 선교, 전도, 사회봉사, 독립운동, 묵시운동, 하나님나라 운동 등등

 

반대로 교회를 주장하는 쪽은 곧 교회를 구원으로 보는 자들은 십자가라는 주님의 의를 떼어버리더라 말이죠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님의 의를 냅따 버려요

그럼 뭘로 채우느냐? 뭘로 대신하느냐 인간들의 의로움으로 채우더라 말이죠 강도의 소굴이지요

-바리새인 외의 성전중심 종사자들 대제사장 레위인 서기관 율법사 등등

 

물론 이 둘을 적절하게 잘 썩어서 하는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모습이고요

 

계시록에서 성전측량 곧 거룩측량의 의미에서

십자가는 교회를 발로 뻥 차서

십자가(하나님의 영광)과 가장 가차이 있는 대제사장을 의로움으로 여기는게 아니라

거룩으로 보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베드로 수제자를 가장 가까이 12 제자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수제자를 발로 뻥차서

가장 멀고도 먼

측량해 보니 문둥병자 보다 더 먼

물에 빠져 죽은자로 만들어서

거룩을 입혀버리니

 

무엇이 아름답냐 말이죠

무엇이 사랑이냐 말이죠

 

대제사장 입니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외치는 베드로가 아름다운 신부입니까?

 

자 그럼 이사야가 왜 이스라엘을 바벨론 포로 만들어

마귀 입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외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이 심판을 기뻐하는 자는 이사야 밖에 없어요

이게 구원이거든요

 

그런데 누가 이 기쁨을 이 즐거움을 누리느냐 말이죠

이사야만 아주 아주 신났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라고 어린아이처럼 노래 부르고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반대로

이 이사야의 삐딱한 부정한 외침을 어떻게 해서든 긍정적으로 만들려고

거짓선지자 곧 점쟁이들을 찾아 나서는 모습

 

그런다고 주님의 구원계획이 취소 될까요?

 

자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공포의 무서움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기쁨과 즐거움의 최 정절인

그야말로 혼인잔치이다는 겁니다.

 

뭐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을 다들 가나 혼인잔치라고 다들 아시고 계시잖아요

 

예수님의 출발 자체가 결혼으로써

일방적인 이 사랑에

 

그 증상으로써 첫 번째 피조물이였던 타락한 천사 마귀가

이 사랑에 반발하고 나서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이 사랑의 아름다움 기쁨 즐거운을 막을 길이 있다 없다

 

오히려 마귀의 활동은

특히 계시록의 악마의 세력들은

이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십자가의 지혜를 더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 동원이 되는

어두움이다는 겁니다.

 

이 어두움과의 차이로써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명료하고 이미 다 완성된

이 십자가의 사랑 덕분이

그 어떤 속임수도 다 보게 되더라 라는 거죠

 

왜 사막에서 주님은 꽃을 피우시고

그런 꽃만의 아름다움을 기뻐하시고 즐거워 하실까요?

 

이 기쁨 이 즐거움을 나누어 주고 싶어서 주님은 안달을 하실까요?

다른 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의 만이

산 자의 하나님에게서 나온

주님의 인애와 자비인 불쌍히 여겨주신 긍휼입니다.

이 긍휼인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 의를 배웁시다

 

주님의 도를 배우고

주님의 의를 배우고 ~~~~

주님의 길로 행하니 ~~~~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

 

 



 

==========


완벽한 심판 속에서 피는 아름다운 꽃  (시온의 남은자(사 4: 1- 6)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음과 수치를 면케함 (시온의 남은자( 4: 1- 6)

 

기뻐하심을 입은 자, 아름다움을 입은자, 복 된 복을 입은 자 =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거룩하다 칭함을 얻은 자

다운로드
 

( 4:1, 개역)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 하라 하리라

( 4:2, 개역)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 4:3, 개역)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 4:4, 개역)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 4:5, 개역)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 4:6, 개역) 또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 4:1,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애원할 것이다. "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챙기고, 우리가 입을 옷도 우리가 마련할 터이니, 다만 우리가 당신을 우리의 남편이라고 부르게만 해주세요. 시집도 못갔다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 4:2,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이 아름다워지고 영화롭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 안에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 그 땅의 열매가 자랑거리가 되고 영광이 될 것이다.

( 4:3, 새번역) 또한 그 때에는, 시온에 남아 있는 사람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곧 예루살렘에 살아 있다고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거룩하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 4:4, 새번역) 그리고 주님께서 딸 시온의 부정을 씻어 주시고, 심판의 영과 불의 영을 보내셔서, 예루살렘의 피를 말끔히 닦아 주실 것이다.

( 4:5, 새번역)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는, 시온 산의 모든 지역과 거기에 모인 회중 위에, 낮에는 연기와 구름을 만드시고, 밤에는 타오르는 불길로 빛을 만드셔서, 예루살렘을 닫집처럼 덮어서 보호하실 것이다.

( 4:6,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그의 영광으로 덮으셔서, 한낮의 더위를 막는 그늘을 만드시고, 예루살렘으로 폭풍과 비를 피하는 피신처가 되게 하실 것이다.

 

 

오늘 본문은 시온의 남은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드시 남은자로 똑 떼어서 보는게 아니라

반드시 시온에서 남은자입니다.

 

그럼 시온은 뭡니까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지요

곧 거룩입니다.

완벽한 거룩

 

이것이 계시록에서는 일곱이라고 했습니다.

완벽한 거룩이기에 그 자체로 완벽한 심판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완벽한 거룩 앞에서

완벽하게 거룩치 못하면 어차피 타 죽거든요

타 죽는 함량미달인 상태는 저절로 심판이 되는 겁니다.

(이사야가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외쳤다 말이죠

천사도 안 타죽을려고 여섯날개로 온 몸을 가리우는 판국에

천둥벌거숭이인 인간이 뭘 안다고 그 앞에서 안 타죽을 길이 어디있겠냐 말이죠

그러니 안 타죽은 사람이 샬롬이라고 외치잖아요

간밤에 주님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고 살아남아 생존했다고

그게 남은자인데 시온에서 율법을 만나고도

하나님의 거룩한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었다면

그것보다 샬롬이 어디있겠냐 라는 거죠)

 

저울에 달아서 모자르게 되면 자동적으로 심판인 거죠(앞의 글 이사야 35장 글에서 계시록의 성전측량 거룩측량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듯이)

함량미달 곧 666 종교는 함량미달이니까

종교라는 사기

믿지 마세요 다 사기입니다.

울리는 꽹과리만 쓰잘데 없이 배설물처럼 모으기만 할 뿐이다 말이죠

그리고 보니 제가 여지껏 만나본 모든 교회 사람들이

다 종교꾼들 밖에 없었고 나 또한 종교꾼으로만 살 수밖에 없었더군요

벗아날 길이 없이 갇혀버렸다 말이죠

뭘 해도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아무튼 이 시온의 남은자는 결국

앞의 글 이사야 35장처럼

 

사막 속에서 피는 꽃과 같다는 겁니다.

이런 꽃 만이

기뻐하심을 입은 자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인

시온의 남은자

예루살렘의 남은자가 되는 겁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찬송가 233)

 

1.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구속함의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2.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그의 영광 볼 때에

모든 괴롬 잊어 버리고 거룩한 길 다니리

3. 마른 땅에 샘물 터지고 사막에 물 흐를 때

기쁨으로 찬송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4. 거기 악한 짐승 없으니 두려울 것 없겠네

기쁨으로 노래 부르며 거룩한 길 다니리

5. 거기 죄인 전혀 없으니 거룩한 자 뿐이라

주가 주신 면류관 쓰고 거룩한 길 다니리

후렴거기 거룩한 그 길에 검은 구름 없으니

낮과 같이 맑고 밝은 거룩한 길 다니리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아니 글쎄 태양빛에도 타 죽을 판국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도 안 타죽는 이

사막의 백합화

황무지의 장미꽃

이 아름다움

이 거룩

이 기쁨을 입히시고자

 

주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저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오신

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기적이 없는데

 

이 기적을 외치고 있는 우리는

이 심판이 얼마나 기쁘지 않겠냐 말이죠

기적 중의 기적인데

사랑 중의 사랑인데

 

어떤 누가 질문을 해서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남자로써 고추 짤리면

이것 보다 저주가 어디있겠냐 말이죠

남자 강남 강한남자로써

여자가 되는 것이야 말로 그야말로 수치 아니냐 말이죠

요즘은 뭐 동성애? 뭐 이런 것 땜에

아니다 동성애 카면 또 덤빌라 ㅋㅋㅋ

트래스젠더? 아무튼

자발적이겠지만

 

죽기보다 더 싫은 남자로써의 자존심인 고추를 짤라 할례를

단순이 포경수술이 아닌

평생을 허리 부셔져서 목발 짚고 쩔뚝거리며

지팡이를 의지해야만 하는 그런 마음판의 할례를 당해 버리면

 

이것 보다 더 수치스러운게 어디있겠냐 말이죠

 

그런데 오히려 성경말씀은 이게 오히려 수치를 제거하는 식이 된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울리는 꽹과리를 요란하게 주렁 주렁 달고 다니니

누가 그 수치를 가려주겠냐 말이죠

 

우리가 계시록에서 이 수치에 대해서 살펴봤잖아요

 

(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즉 심판이 아니면 이 수치를 가려야 하는구나 자체도 모르게 되고

또 내 쪽에서는 수치를 가릴수 있는 방법이 없고

흰 옷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겁니다.

 

심판이 묻지 않는 옷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옷

아름다운 옷 밖에 없어요

불에 안 타죽는 옷

이 옷을 입히시고자

우리를 심판 속에 집어넣을 때

얼마나 기쁠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 아름다운 옷을 싫어버린바 해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되도 않는 불에 잘 잘 잘 활활활 잘 타는 옷만 골라 입더라 말이죠

육을 막 막 입어요 육을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닌

죽은 자의 하나님을 막 믿어요 유대인들처럼

 

오히려 개같은 이방여자

맞습니다 맞고요 저 개 맞습니다 라고 외치는 이방여자가 산자의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도대체 팔을 어긋맞게 해도 완전 백팔십도 정반대로 하실 정도이니

 

(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1:13, 공동)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이 지혜가 얼마나 아름답지 않나요?

정말 다이나믹한 복음 살아 움직이는 복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마치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이 아닌

탕자를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삼아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시는 이 지혜 말이죠

 

(벧전 2:6, 개역)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7, 개역)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개역)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개역)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벧전 2:6, 새번역)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골라낸 귀한 모퉁이 돌 하나를 시온에 둔다. 그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28:16(칠십인역)

(벧전 2:7, 새번역) 그러므로 이 돌은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집 짓는 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이요, /  118:22(칠십인역)

(벧전 2:8, 새번역)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  8:14

(벧전 2:9, 새번역)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  43:20;  19:5-6;  43:21

(벧전 2:10, 새번역)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복음이 움직이기는커녕 저 구석 교회 창고 지하실에 꾸욱 쳐박혀 있다 말이죠

 

날선 검이긴 커녕 무뎌서 무 도 못 밸 지경이니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그러니 사람들의 관심사가 그저 산당들처럼

울리는 꽹과리 잔뜩 모으기의 경쟁에 빠져버렸다는 거죠

그 증상으로써 나타난 것이 명땡교회이듯이

한국교회의 증상이다는 겁니다.

 

아니 목사라는 놈이 젊어서부터 복음 보다

나 목사다를 외치는게 더 많으니 그게 무슨 목사냐 말이죠

 

그리고 심심하면 이단감별사 로 나서는 그 모습들도 다 장난질 탄로가 나더라 말이죠

 

차라리 정통이라고 우려먹지 말고

이단 중의 이단

그냥 이단 되지 말고

이단 중의 이단이 되라 말이죠

 

죄인 중의 괴수가 되라 말이죠

이 십자가만 외칠수 있도록

이 의사만 외칠수 있도록 환자가 되라 말이죠

 

이것이 공적인 자유를 외치는 공무원 아니냐 말이죠

교회 곧 성도 곧 새이스라엘 아니냐 말이죠

새노래를 부르는 14 4천명 아닙니까

오늘 나오는 표현으로 하면 시온의 남은자 아니냐 말이죠

예루살렘의 생존자 중에 생명책에 기록된 거룩하다 칭함을 입은자 아니냐 말이죠

 

율법에 의해 심판 받지도 않는데 무슨 수로 외치겠냐 말이죠

 

이 아름다운 소식을 심판을 통해서 이사야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막에서 백합화를 피우게 하신다 말이죠

그냥 꽃이 아니라

그냥 용서가 아니라

말도 안되는 일만달란트 용서가

곧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다는 겁니다. 아름답다 기쁘다 즐겁다 라는 겁니다.

 

(살전 5:15, 개역)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 5:16, 개역)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개역)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개역)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9, 개역) 성령을 소멸치 말며

(살전 5:20, 개역) 예언을 멸시치 말고

(살전 5:21, 개역)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살전 5:22, 개역)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23, 개역)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4, 개역)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5, 개역)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살전 5:26, 개역)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살전 5:27, 개역)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살전 5:28,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일곱 여자가 한 남자에 매달리는 상태가 그 날이다는 거죠

그 날 곧 심판의 날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는 날인데

 

그런데 그 날인 심판의 날인 동시에 구원의 날

곧 예루살렘에서 말씀이 나오는 날인데

남겨둔 씨가 나오는 날인데

 

아무리 봐도 이게 무슨 놈의 아름다운 모습이겠습니까?

일곱 여자가 한 명의 남자에게 매달리는 상태가 뭐가 아름답냐 말이죠

이게 무슨 놈의 의로움이요 거룩입니까?

 

오히려 처참하기 짝이 없는 심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말이죠

 

맞습니다. 일곱여자는 남편이 죽은 과부의 모습이 된 겁니다.

이런 과부에게 아름다운 소식이요 희년인 복음은

새남편이 나타나서 자신의 죽은자와 같이 된 모습을 책임져 주는 새남편이 생기는 겁니다.

이것만이 수치가 물러나는 제거 되는 모습이다 말이죠

 

자 그렇기에 율법을 지켜서 의를 갖추고 거룩을 갖추어서 구원받는 길은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통해 심판받는 저주 받은 모습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갇힌바 된 모습이다 말이죠

 

그러나 동시에 이 심판받는 모습이 도리어 전남편이 율법과 이혼케 되는 모습이다 말이죠

그러니 새남편이 아내로 삼아 주지 않는 이상

전남편인 율법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지요

 

( 7:1, 개역)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 7:2, 개역)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 7:3, 개역)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 7:4, 개역)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의다 말이죠

죽여놓고서 다시 살리는 의

 

베드로를 고추 짤라 여자로 만들지 않는 이상

(남자로서의 베드로는 죽었고 여자로 다시 살리는 거죠

물에 빠드려 죽였다가 다시 살리듯이)

베드로는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 해놓고서는 배신할 수 밖에 없는 이 모순

이 의문의 법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추 짤라서 여자로 만들어서 신부로 삼아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듯이

 

이게 베드로 개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아들을

패역한 딸로 만듬에 있어서

오히려 아들이 평생 오이디푸스에 시달려 못벗어나는 트라우마로 자리잡듯이

오히려 딸로 만들어

고추를 짤라 버림으로써

전남편에게서 벗어나고자 만드는

주님 쪽에서 외설적인 매듭을 끊어버리는

더 나은 외설적 매듭인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더 이상 추궁 받을 필요가 없는

딸로

패역한 딸로써

일곱여자로써

심판의 불 속에서 나오는 자로써

 

한 남자가 있어

널 너무 사랑한

 

한 남자가 있어서

모든 것을 책임지심으로써

모든 허물을 다 덮는

그 수치를 제거하는

아름다운 옷을 입히심으로써

 

시온에 살면서도 안 타 죽고

예루살렘에서 살면서도 샬롬 평화 평화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도 안 타죽는

불쌍히 여겨주심 덕분에 말이죠

 

(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누가 이 평화의 복음

아름다운 소식

막힌 담을 허는 평화를 증거할래?

 

막힌 담을 헐었다고 평화로다

 

(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였던 자였는데 안 타죽고 살아남아 생존한자

심판받아 죽어야 하는데

그 죽음 속에서 살아남은자

 

이 아름다운 소식을 입은 자

평화의 복음을 입은자가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가 떳다는 그 증상으로 나타나

주님의 그 날을 외치더라 말이죠

그 날 속에서 시온의 남은자가 나오니까

얼마나 기쁜 소식 희년이 아니고 무엇이겠냐 말이죠

 

평화 ~~~~ 평화로다 ~~~~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 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 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내 맘 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갈 자 그 누구랴 안심 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내 영혼을 덮으소서

 

 

자 그렇기에 이 평화의 소식을 전하고자

동방박사가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을 구석 구석 다 수셔대고 돌아다니니

안 소란이 일어나고 배기겠냐 말이죠

 

평화의 왕이 떳는데

그 증상으로 나타나야만 하듯이

이사야서가 꼭 마태복음 투 버전 같아요 글쎄

이사야는 온 이스라엘을 수셔대면서

소동이 일어나도록

 

이 아름다운 소식의 증상으로

평화의 왕이 떳다는 증상으로써

시온의 남은자가 이미 벌써 완료되었기에

 

아주 아주 신나게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시길 바랍니다.

 

이 기쁜 소식을(179)

 

1. 이 기쁜 소식을 온세상 전하세

큰 환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주믿는 성도들 다 전할 소식은 성령이 오셨네

 

2. 만왕의 왕께서 저 사로 잡힌자

다 구원하시고 참 자유주셨네

승리의 노래가 온성에 들리니 성령이 오셨네

 

3. 한없는 사랑과 그크신 은혜를

늘 의심하면서 안 믿는 자에게

내 작은 입으로 귿 증거하리니 성령이 오셨네

 

후렴: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내 주의 보내신 성령이 오셨네

이기쁜 소식을 온세상 전하세 성령이 오셨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