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는 만군의 여호와 뿐([주께서 내 주께] 만의 방식 뿐임) (사 47, 1-15)


우리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니라


(사 47:4, 개역) 『(우리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니라)』

(사 47:4, 새번역) 『우리의 속량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주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삼상 14:6, 개역)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시 3:8, 개역)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시 37:39, 개역)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렘 3:23, 개역)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욘 2:9, 개역)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사 47:1, 개역)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칭함을 받지 못할 것임이니라』

(사 47:2, 개역)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갈라 면박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사 47:3, 개역) 『네 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수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사 47:4, 개역) 『(우리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니라)』

(사 47:5, 개역) 『딸 갈대아여 잠잠히 앉으라 흑암으로 들어가라 네가 다시는 열국의 주모라 칭함을 받지 못하리라』

(사 47:6, 개역)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사 47:7, 개역)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사 47:8, 개역)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사 47:9, 개역) 『한 날에 홀연히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이 두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네가 무수한 사술과 많은 진언을 베풀지라도 이 일이 전히 네게 임하리라』

(사 47:10, 개역)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사 47:11, 개역)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라』

(사 47:12, 개역)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진언과 많은 사술을 가지고 서서 시험하여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원수를 이길 수 있을는지』

(사 47:13, 개역) 『네가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로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케 하여 보라』

(사 47:14, 개역) 『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치 못할 것이라 이 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

(사 47:15, 개역) 『너의 근로하던 것들이 네게 이같이 되리니 너 어려서부터 너와 함께 무역하던 자들이 각기 소향대로 유리하고 너를 구원할 자 없으리라』


(사 47:1, 새번역) 『"처녀 딸 바빌론아, 내려와서 티끌에 앉아라. 딸 ㉠바빌로니아야, 보좌를 잃었으니, 땅에 주저앉아라. 너의 몸매가 유연하고 맵시가 있다고들 하였지만, 이제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 ㉠또는 '갈대아'』

(사 47:2, 새번역) 『맷돌을 잡고 가루를 빻아라. 얼굴을 가린 너울을 벗고, 치마를 걷어 올려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사 47:3, 새번역) 『알몸을 드러내고, 네 부끄러운 곳까지도 드러내 보여라. 내가 복수할 터이니, 어느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다."』

(사 47:4, 새번역) 『우리의 속량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주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사 47:5, 새번역) 『"딸 ㉡바빌로니아야, 잠잠히 앉아 있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라.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너를 민족들의 여왕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 ㉡또는 '갈대아'』

(사 47:6, 새번역) 『전에 내가 나의 백성에게 진노하여, 나의 소유, 나의 백성이 곤욕을 치르게 하고, 그들을 네 손에 넘겼다. 그런데 네가 나의 백성을 가엾게 여기지 아니하고, 노인에게도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사 47:7, 새번역) 『㉢너는 언제까지나 네가 여왕으로 군림할 것이라고 믿고, 이런 일들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않았으며, 이후에 일어날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또는 '너는 네가 권좌의 여왕으로'』

(사 47:8, 새번역) 『그러나, 방탕한 여인아, 이제 너는 이 말을 들어 보아라. 네가 평안히 앉아서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나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 나는 과부가 되지 않을 것이며, 자식을 잃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하였지만,』

(사 47:9, 새번역) 『자식을 잃고 과부가 되는 이 두 가지 일이 한 날에 갑자기 닥쳐올 것이다. 너의 주술이 아무리 능하고 너의 마술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하여도, 이 일이 너에게 반드시 닥친다.』

(사 47:10, 새번역) 『네가 악한 일에 자신만만 하여 '아무도 나를 감시하지 않는다' 하였다. 너의 지혜와 너의 지식이 너를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였고, 너의 마음 속으로 '나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사 47:11, 새번역) 『불행이 너에게 닥쳐와도 너의 점술이 그것을 막지 못할 것이며, 너에게 재난이 덮쳐도 네가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생각하지도 못한 파멸이, 순식간에 너에게 이를 것이다.』

(사 47:12, 새번역) 『자, 네가 젊어서부터 부리던 마술과 여러 가지 주술을 가지고 버티어 보아라. 혹시 그것들이 너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너의 대적들이 그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할지도 모르지 않느냐!』

(사 47:13, 새번역) 『너는 오히려 너의 많은 조언자들 때문에 지쳤다. 자, 하늘을 살핀다는 자들, 별을 보고서 점친다는 자들, 매달 초하루마다 너에게 닥쳐올 일을 알려 준다는 자들, 그들을 일으켜서 너를 구원하라고 하여라.』

(사 47:14, 새번역) 『보아라, 그들은 검불같이 되어서, 불에 타고 말 것이다. 그 불은 빵이나 굽는 숯불이 아니고, 손이나 따뜻하게 하는 화롯불도 아니다. 그 불은 너무나도 뜨거워서, 그들 스스로를 그 불에서 구하여 내지 못할 것이다.』

(사 47:15, 새번역) 『바로 네가 애써서 공들였던 자들이 너에게 이렇게 되며, 네가 젊었을 때부터 너와 거래하던 자들도 각자 뿔뿔이 도망 칠 것이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다."』




13절에 이런 말씀이 눈에 띄이네요

즉 소위 구원자로 나서는 자들

곧 조언자, 모략은 일종의 지혜자 모사 책략가 안내자 등등

오늘날로 치면 철학자 신학자 목사 점쟁이 땡중 신부 사제도 포함해서멘토 등등


(사 47:13, 새번역) 『너는 오히려 너의 많은 조언자들 때문에 지쳤다. 자, 하늘을 살핀다는 자들, 별을 보고서 점친다는 자들, 매달 초하루마다 너에게 닥쳐올 일을 알려 준다는 자들, 그들을 일으켜서 너를 구원하라고 하여라.』

(사 47:13, 개역) 『네가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로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케 하여 보라』


이런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구원하라는 말이 있듯이

반드시 주의 이름은 곧 약속

주께서 내 주께 하시는 맹세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맹세는

반드시 저들과의 차이로써 한세트를 구성하기에

반드시 맞물리면서 벌어지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이란 십자가 만을 말한다 말이죠


과연 인간의 꾀인 지혜가 구원하는지

아니면 십자가가 구원하는지 함 해보자 라는 것이

오늘 본문에 주님이 주님자신을 계시하시는 방식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방식이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오히려 거꾸로

인간 쪽에서 주님을 찾는 방식이 되다 보니

이미 전제를 까는 것이

나는 우상숭배자가 아니다 라고 해서 나오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거보세요 저야 말로 우상숭배자가 아닌거 맞지요 라고

십일조 내잖아요 이레에 두 번 금식하잖아요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키잖아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잖아요 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찾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 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계시 하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죄악이 들통나지 않는 방식이니

구름타고 오시는 예수님 일 것 같으면 바리새인도 다 영접하게요?


유대인 조차도 거부하는 방식으로 예수님이 오시는 방식은

자기 이름을 계시하시는 모습은

반드시 모든 인간이 우상숭배자임을 아예 단정지어 놓고서

그런 자들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고 나서시는

주님의 숙제로만 펼쳐지는 방식이기에

반드시 우상과의 차이로써우상을 거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소위 교회 환경에서 자란

뭐였죠? 용어

아 맞다 모태 신앙처럼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우상이라는 의미는 전혀 모를 것 아니겠냐 말이죠

오로지 하나님만 믿어왔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러니 이런 모태신앙이라는 용어까정 만들어 가면서

이들에게서 하나님은

우상을 거쳐서 나오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그게 바로 가짜 하나님이요 우상이다 말이죠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가 없어요

실제로 그런 자들을 만나보면 그래요

우상인지 하나님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똑같더라 말이죠


자 그래서 욥기가 고마운 겁니다.

앞의 글에서도 다루었지만


또 녹음파일에서도 나왔던 내용인데

어떤 논쟁 속에서 소위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느냐 라는 주제를 놓고

서로 공방하는 가운데서

어떤 누가 욥기를 보고 놀랐다고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 맞는지 

사단과 내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사단하고 뭐가 다른지

차이점을 모르겠다고 하더라 말이죠

역사적인 안목으로써의 모든 지혜를 끌어와 살펴봐도

욥기 자체를 해석할 길이 없다 말이죠

모든 시선이 1234 해석이니

4321로 오는 해석을 할 수가 없다 말이죠


원인을 찾고 결과를 내는 안목에서는

묵시란 그냥 원인 자체가 없는 채로 떨어지는 결과 밖에 없으니 말이죠

예만 예고 아니오면 아니오 라는 오 O, 엑스 X 밖에 없다 말이죠


그 나머지는 악으로 좇아 나온 것이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마 5:33, 개역)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4,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마 5:35, 개역)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마 5:36, 개역)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 5:37, 개역)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즉 헛맹세이다는 거죠

예와 아니오는

무조건적인 원인 없는 결과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예는 예수님은 무조건 예 옳습니다 라는 것 뿐이고

아니오는 예수님이 무조건적인 예이기에 나는 무조건 아니오 틀렸다는 것 뿐이다는 것이곧 뭘 해도 나는 의인 아닌자 건강한 자가 아닌자 일 뿐인뭘 해도 죄인이다는 겁니다.

즉 원인 없는 결과 뿐이다는 거죠

그러니 아니오는 예를 더더욱 예 밖에 없음을 외치는 환자의 자리에서 의사를 외치는

오늘 본문의 내용인 구원자를 외치기 위해서

죄인의 자리

곧 오늘 본문은 그 죄인의 자리를 고아 과부의 자리에서 외치기에

이 고아 과부를 본문에 언급하신다 말이죠


(사 47:8, 개역)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사 47:8, 쉬운)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이제 들어 보아라. 너는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이르기를 ‘이 세상에는 오직 나뿐이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나는 과부가 되지도 않을 것이고, 자녀를 잃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사 47:8, 한글킹) 『그러므로 이제 이것을 들으라. 환락에 내어 준 너는 태평하게 살며 마음 속에 말하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주저앉지도 않을 것이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도다.』

(사 47:8, 현대인) 『편안히 살면서 쾌락을 사랑하는 자여, 들어라. 너는 너와 같은 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과부가 되거나 자녀를 잃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 47:8, 현대어) 『그러나 너는 이제 똑똑히 들어라. 너는 항상 호화롭고 태평하게 살면서 `이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 나와 겨룰 이가 아무도 없다. 나는 과부가 될 염려도 없고 자녀를 잃고 외롭게 살 염려도 없다.'고 떵떵거렸으니 이제 똑똑히 들어라.』



이것이 원인 없는 결과인

약속의 내용을 까까득 채우고 있다 말이죠


그럼 과연 고아 과부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구원자인지 아니면 우상인지 그 차이가 나타나는 겁니다.


마치 강도 만난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듯이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통해서 그 차이를 저절로 알게 되듯이 말이죠

(모든 인간은 결국 강도만난자를 피해가는 자이지강도만난자를 마치 남을 7번 용서하듯이 대하지는 않습니다그렇다면 도리어 본인이 강도만난자로써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위치에 재배치 당해야 하는 겁니다.)


우상과의 차이 

곧 헛맹세 와의 차이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하나님의 자기맹세완성인

[주께서 내 주께] 이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헛맹세하는 자들에게서는 이 고아와 과부가 걸리적 거리는

귀찮은 존재인 거죠


일부러 그런 자를 바리새인에게 붙이십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을 바리새인에게

탕자를 맏아들에게

부자청년을 가난한 자와 대조를 시키면서 말이죠

또는 본문상으로는 어린아이인데

어린아이는 아무도 그럼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는 질문도 안할뿐더러

그럼 누가 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부자라는 모범생이 탈락인데 라고 되묻는

어린아이는 없다 말이죠

누가복음에서는 오히려 그 다음장 삭개오 라는 부자와 대조시켜보면

부자청년은 구원자 되신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그저 의인이요 건강한 자다 라고 우길 뿐이지

예수님을 말하는 환자는 아닌 셈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고아 과부 라는 자리는

인간의 근본 위치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너희들이 다 이랬다 라는 본래의 위치 말이죠


그런데 다들 고아 과부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을 목적으로 살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헛맹세를 하는 우상숭배자들인데


과연 고아 과부가 아니다 라고 자신만만해 할수 있겠냐 라고

너희들 헛맹세 하는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고아로 과부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원래의 위치가 바로 고아 과부였다 말이죠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은

바로 약자보호법 이웃환대법 등등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염두한 의미이다 말이죠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이 사랑의 대상인 자리인

고아 과부에서 벗어나서


고아와 무관하게 과부의 위치와 무관하게 살줄 알았는데

그것이 우상의 삶인데

도리어 고아를 압제해야 고아에서 벗어나고

과부를 신원치 않아야 과부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그래서 인생의 멘토로 나서는 자들이 다 이런 내용

곧 어떻게 하면 복 받죠

즉 어떻게 하면 고아의 자리에서 벗어나죠

과부의 자리에서 벗어나죠 라고 점쟁이에게 묻더라 말이죠


이런 배경을 깔고서 주님이 자신이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저들이 벗어나고파 하는 사람의 근원 자리인 고아 과부를

도리어 벗어나기는커녕

헛맹세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나서시는 겁니다.


그러니 구속자는 여호와 뿐임을 말하기 위해서

진짜 복음을 말하시고자

다른 복음 곧 가짜 복음에 빠져있는 자들의 모습을 들추어내시면서

그들과의 차이로써 증거되는 겁니다.


그러니 자 질문하나 던져 볼께요

그럼 주님이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자는

자신의 구원자임을 말하고자 내세우는 자는

그럼 고아에서 과부에서 벗어난 자일까요

고아 과부 그 자체일까요?


자 거보세요

여러분의 답이

스스로 말하고 있잖아요

그럼 성화론자들의 성화 되고자 하는 모습은

오히려 점쟁이의 조언을 따르고 있는

헛맹세를 따르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어쩌면 그리도 사생아 같은지요???


자기가 자기인생을 손봐서 성화되고자 한다 말이죠


앞의 녹음에서도 말했듯이

완악한자와 남은자의 대조는 마치

우상과 약속의 대조로써 한세트를 구성합니다.


그럼 완악한 우상숭배자는 남은자 운동을 하는 자들인 거죠

스스로가 불에 타다가 남겨진 자로써 행세를 해요


그런데 진짜 남은자는 아예 다 태워 죽여요

남은자 운동을 할 꺼리가 아예 없어요

그리고 삼일 만에 다시 조금 살려내서

무엇을 외치느냐?

조금 살려둔 자들이 글쎄 외치는 내용이 달라요

사랑이라는 두려움 없는 사랑을 외치는데

그 사랑이 바로 높고 낮음을 없애는 평평하게 평탄케 하는

시온에서 나오는 돌삐를 외치는 것이

남은자의 특징인데


가짜 남은자 곧 남은자 운동을 하는 자는

남은자 자체가 이미 높아진 선민의식인 거라

그러니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고

남은자 자체가 높아진

사랑이 없음을 오히려 스스로 드러내 놓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들이 고아와 과부 라는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반드시 스스로 발로 차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이상하죠

예수님과의 충돌을 일으키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 등등의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보면


예수님으로 인해 다들 실족해서 다리 걸려 넘어지더라 말이죠

안 넘어지는자가 없어요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을 알아보는 처음자리에 놓여지는게 아니라

더더욱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스스로 발로 차서


고아 과부를 신원하러 오신

희년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일을 막고자

헛맹세를 하는

예수님을 죽이기 전 까지는 잠도 안잘것이고

밥도 안 먹겠다고 하는 사도바울을 죽일려는 40명과 다를바 없이

유대 사회 전체가 예수 라는 굴러들어온 돌을 빼 낼려고 발악을 하더라 말이죠


고아 과부의 자리에 놓여지지 않으니

자신들과 정면 대치하게 됨으로써

절대로 예수 뜻대로

고아 과부 자리에 놓여지지 않겠노라 라고

헛맹세 하는

오늘 본문의 우상숭배자들의 모습을 취하더라 라는 겁니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뉘 자손이냐

다윗의 조상이냐 

다윗의 자손이냐 라고

예수님의 질문은 답 맞추라는게 아니라

다윗의 조상으로써의 예수님이든

다윗의 자손으로써의 예수님이든

약속의 완성 이신

주께서 내 주께는


오히려 정반대로 나의 위치를 새롭게 정립해 준다는 겁니다.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자리로 위치를 재정립해 준다 말이죠

이스라엘을 아예 팍 낮추듯이
목이 곧은 백성을 다시 처음자리로 높은자를 낮추듯이
처음 위치로 빠꾸 시키듯이


호세아를 통해서 사랑으로 평평케 하고자
음란한 아내에
음란한 자식인 
이스르엘 곧 김심판
로 루하마 곧 안용서 안긍휼
로 암미 곧 노백성 안백성의 자리에 놓아서

백성 아니다 라고 선언해 버린 그 자리에서
다시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찢으셨으나 싸메어 주시고
잃어버렸으나 다시 되찾는
죽였다가 다시 삼일만에 살리시는 이 의를 나타내시고자

처음자리로 첫사랑으로 
인간의 근본자리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상에 익숙한 자들이 당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는

그 처음자리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남은자만 돌아오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보니

기쁜소식이 아닐수가 없는 겁니다.

그야말로 희년 곧 복음이다 말이죠


그런데 자신의 자리를 처음자리로 정립해 주지 않게 되면

예수님이 아무리 다윗의 조상이라손 치더라도

다윗을 건지시는 다윗의 주가 된들

나는 다윗처럼 건짐을 받는 자가 못 되고


아무리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써

이삭의 제물처럼 되셔서 아브라함의 모든 허물을 덮듯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다윗의 모든 허물을 덮는

꺽으신 뼈가 되시는 예수님 곧 다윗의 자손이어본들


나는 다윗처럼 그 어떤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대신 죄 값을 치르지 않는

화목제물이 없는 자가 된다 말이죠


왜냐하면 여전히 나는 의인이요 건강한 자요

저 세리와 같지 않은

고아 과부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오늘 본문의 외침처럼

고아 일리가 없어 라고 고아로 만들어 버리고

과부가 될 리가 없어 라는 자리 에서 과부의 자리에 놓여지는

이런 자들을 이끄는 점쟁이 철학자 모사 등등을


저들의 뜻을 다 파괴하면서 나타나는

구속자를 보게 된다는 겁니다.


자 이런 하나님을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으로만 머물지 않고

열방에게서 까지

우상숭배자들의 세계에 침략해서

저들의 우상까지 다 치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해서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로 계시를 개시 출발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로부터 곧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출발해서 전세계를 월드투어 하시는 겁니다.

다 깨뜨리겠다는 거죠


어떤 자를 깨뜨립니까?

고아 아니다고 하는 자

과부 아니다고 하는 자


인간의 처음자리에서 벗어난 것이 복이라고

어떻게 해서든 벗어날려고 지혜를 찾는자


이런 자들에게 십자가는 이런 속임수와 맞물려서

밝히 보이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 스스로가 벌리시는 사건에서는

반드시 인간의 속임수가 드러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곧 헛맹세인 우상들이 낱낱이 들통나는 거죠


아무리 우상을 제거했다고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마

선지자 노릇했고 마

귀신도 쫏아냈고 마

많은 능력을 느그 서장과 함께 했어 마

라고 우상을 제거해 본들

어차피 본인이 우상이 되어버리는


몽둥이 앗수르처럼

바리새인들은 이 헛된 의문의 반복을 하더라 말이죠


이런 완악한 자와의 대조로써 십자가의 다 이루심과의 차이를 나타내는

십자가 사건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 앞에서 우연히 다 타다 버린 

광야라는 죽음 속에서 생명수가 쏫아나듯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내듯이

남은자들이 십자가라는 주님의 거룩을 외치고자 

나타나더라 말이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님의 의를 말하고자

고아 로써 과부로써 나그네로써 

곧 죽은자로써 말이죠


거기에 상대적으로 반드시 맞물려서 나타나는 산 자의 등장이 바로

나는 저런 고아가 안될 거야

저런 과부나 안될 거야 라는

부자청년

맏아들

실로암소경의 죄가 자기 죄인지 부모죄인지를 따지는 바리새인 등등이 등장하는 겁니다.

(웃끼죠 바리새인 자기의 위치가 날때부터 소경인데 소경이 아니다고 하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실로암 소경이 외치는 주님을 못 보는 소경인 겁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사가 큰 계명 두 계명을 지키는 높은 자가 되고 싶지

본인이 강도 만난 자인줄 모르니까

다들 지나쳐 간다 말이죠

본인이 지나쳐 갔듯이 말이죠


그럼 나의 원래 자리인 처음자리인 그 강도만난 자의 자리에서

누구를 만나야 구원이 되겠습니까?


구원자는 만군의 여호와 뿐이잖습니까?

누구를 만나야 구원이 되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다윗의 자손을 만나야 합니다.


이 임마누엘 한 아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들 한 아기를 구할려고 다가오는 자는 아무도 없고

그저 헛맹세를 이 한 아기 앞에서 도리어 외치고 있으니


한 아기가 그래 그래 너가 가지고온 그 헛맹세를 해결할 자인

우상을 제거하는 유일한 약속은

바로 젖먹이 뿐이다 라고


모든 인간을 깨뜨리니까

비로소 인간들이 의로움과 광명한 천사의 탈을 들켰다고 비로소 본색을 나타내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모든 가면이 다 탈로가 나게 되더라 말이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자리

즉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개같은 이방인의 자리가


자신의 본래 자리인줄도 모르고


나는 고아의 자리에서

과부의 자리에서

나그네의 자리에서 벗어났다고


거짓영들의 꾀임에 빠진 우상숭배자들은


약속을 구하지 않는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는 자들로써


이 약속에 의해

다 걸려 넘어져 실족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이는 현실인 역사에서는

이런 일들이 안 벌어져요


그러나 묵시의 세계에서는 이미 끝나버려 완성이 되어 끝났데요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말한 예수님 본인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잖아요 허무하게


우상은 허물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시대가 흐르면 흐를수록

누구 말 마따나

악만 더 넘쳐나는데?


예수님도 허무하게 죽었지?


앞으로의 세상은 점점점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질 않으니


지금 이사야 본문인 이사야 서를 봐도 그래요

뒤의 역사에서는 다 망해요

포로되어 다시 귀환해도

역시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우상이 다 쓰러진 세계를 접하기는커녕

오히려 로마 제국과 밑도 끝도 없이 싸워야 하고

그 뒤의 역사도 만만치 않게 히틀러에게 잡혀 죽임 당해야 하고

지금 현대도 저 녹녹치 않은 중동 지역에서 얼마나 척박하게 살아야 하는

약속의 땅이 졸지에 총과 무기를 들지 않고서는 살수 없는

척박하기 그지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그러니 스스로 장벽을 세워서 스스로 우상을 따르는

고립된 섬

바다의 섬도 아닌 육지의 섬처럼 살아가야 하니


약속이 역사 속에서 보이기는 보이냐 말이죠

우상이 점점더 높아지는 것 밖에 안보이는데?

아니 지금 현대 이스라엘 전체가 우상숭배 그 자체 덩어리인데?

무신론자가 아무리 세계 1위라 해도 그 자체가 우상숭배자이다는 거 아니냐 말이죠


유대인도 이런 판국에

약속을 이미 벌써 냅따 버린 판국인데


누가 


인간의 본래 자리인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에서


이 약속의 완성을 바라보겠냐 말이죠


모든 인간의 대표성인 유대인도 안되는데??


제자들이 놀랄만 하죠

부자청년처럼 모범생이 없다 말이죠

저 사람도 어떻게 하면 구원 얻겠냐 라고 다가갈 때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처음자리를 제시하니까


땡 탈락


저 부자청년도 안 되는 판국에 누가 구원 얻겠냐 말이죠


높은자가 안되면 낮은자는 더더욱 안된다 말이죠

이것이 우상화된

마귀에게 이미 벌써 장악당해서

소돔과 고모라가 벌써 된

예수님을 전혀 볼줄 모르는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깨닫거나 알수 없는


진짜 소경이 누구냐 말이죠


자신의 근본자리를 어떻게 하면 벗어나고자

예수님에게 까지 높고 높은 것들을 내밀었던

부자청년을 통해서 우리는 모조리 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이용해서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한

우상숭배자로 들통나더라 말이죠


부자청년아 너의 처음자리는

저 전재산을 다 나누어 주어도 해결될수 없는

저 가난한 자가 너의 처음자리야


벗어난 줄로 알고 좋아라 했지? 구원인줄 알았지?

저 처음자리에서 벗어나는게 구원이 아니라

도리어 저 자리 속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야?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될까봐

등 돌리고 근심하고 돌아서는 겁니다.


사랑을 안 쳐다보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겠노라 라고

우상숭배를 끝까지 하겠다는 겁니다.


우상을 제거한 기특하지 짝이 없는 자신이 도리어 우상이 된 것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킨 기특하기 짝이 없는 본인이 우상이 되었다 말이죠


그 우상을 깨뜨려서

너의 처음자리는 예수님이 피 흘려 죽지 않으면

십자가의 피 용서로 씻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너의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가 아니면

너는 구원 없어

사랑 없어


계속 이유 없이 높아질려고 하기에

그 우상에서 벗어날길이 없어

우상에게서 빼앗기지 않겠다고

우상을 깨뜨려 주시는데


왜 처음자리를 외면하고

등돌리고 가느냐 말이죠


그런 예수는 싫고

자기만의 예수를 따로 만들어서

그 높고 높은 것을 여전히 손 못 놓겠다고

가짜를 만들어 섬기더라 말이죠


그래서 확증편향골라먹는 재미가 있다고

보고픈 것만

듣고픈 것만

믿고픈 것만

하고픈 실천하고픈 것만 골라서

지 마음대로 하는 자들이 성화론자들인데

우찌된 심판인지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으로 대중에게 인식 된다는 자체가


우리는 이런 우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올수 없는

곤고한 자이다는 겁니다.


어서 어서 이 우상에게서 건져 달라고 외치는

과부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아니냐 말이죠


여전히 불의한 재판관인지

정결한 재판관인지를 따질정도로

여전히 배부르고

여전히 내 쪽에서 가려야 만 하는 그 정도로 피곤한 인생일 줄이야


정결한 재판관은 없어요

조언자 모략자는 다 거짓이다 말이죠


오로지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모습으로만 오신다 말이죠


나 라는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인 이 불의한 죄인에게 

충성하시는 분은 정결한자가 아닙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않는데 어떻게 정결한 것에 충성하겠냐 말이죠

이 도장 도장끈 지팡이에 충성하시는 분은

불의한 재판관인 예수님 뿐이다 말이죠


나를 반드시 처음자리인 고아로 만드는 불의한 재판관

나를 반드시 처음자리인 과부의 자리로 위치 재배정 시키는 불의한 양반

나를 반드시 처음자리인 나그네의 자리로 위치 선점하는 부조리한 십자가 야 말로


오히려 처음자리인 고아에서 벗어나고자

과부의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나그네의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자들이

영원한 지옥으로 


보내시는 분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 곧 우상을 깨뜨리는 분이시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 자신의 맹세

만군의 여호와 자신의 맹세가


우상에게서 빼앗기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자신의 맹세로써 한번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침바 되고

다 이루신바 된


높고 낮음이 없는 두려움이 없는 사랑으로써


우상을 짜르고자 나타나시는 겁니다.


이 사랑 앞에

모든 무릎이 꿇듯이

우리 또한 이 사랑 앞에

모조리 다 허물어 지는 기쁨을 누리고자


어서 어서 심판해 달라고 부르짖읍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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