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 애가(슬픔), 애곡(잿더미), 재앙(근심)을 기록한 말씀을 먹는 인자 와 패역한 족속 (겔 3, 1- 7)

(겔 2:8, 개역)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겔 2:9, 개역)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겔 2:10, 개역)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사 35:10, 개역)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겔 3:1, 개역)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겔 3:2, 개역)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겔 3:3, 개역)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겔 3:4, 개역)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겔 3:5, 개역)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겔 3:6, 개역)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겔 3:7, 개역)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겔 3:1, 새번역) 『그가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알려 주어라."』
(겔 3:2, 새번역) 『그래서 내가 입을 벌렸더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먹여 주시며,』
(겔 3:3, 새번역)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너의 배를 불리며, 너의 속을 그것으로 가득히 채워라." 그래서 내가 그것을 먹었더니, 그것이 나의 입에 꿀같이 달았다.』
(겔 3:4, 새번역) 『그가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가 하는 바로 이 말을 그들에게 전하여라.』
(겔 3:5, 새번역) 『나는 너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낸다. 어렵고 알기 힘든 외국말을 하는 민족에게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겔 3:6, 새번역)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알기 힘든 외국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에게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너를 그들에게 보내면, 그들은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겔 3:7, 새번역)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너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 족속은 얼굴에 쇠가죽을 쓴 고집센 자들이어서, 나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이사야로 치면
마치 지난주 본문처럼
오늘도 두루마리 말씀을 먹는 장면인데
이사야로 치면 마치 임마누엘을 구하라 라는 모습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처럼 이스라엘이 듣지 않을 것이다 라고 미리 예견하신 것처럼 말이죠

왜냐하면 아하스 왕에게서는 하나님과 우상이 이미 섞여진 상황이고

바로 그런 우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임마누엘을 구하라 라고 하니까 안 하겠다고 하듯이

오늘 본문에 인자인 에스겔이 두루마리 말씀을 먹음으로써
애가 애곡 재앙이 기록된 말씀을 먹음으로 인해서

바로 이런 모습이 주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모습임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은 거부하는 마음이 강퍅한 모습으로 패역한 모습으로 거부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마치 출애굽 이후에 광야로 데리고 가서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 만한 곳으로 인도하심은

목이 곧은 백성을 낮추시기 위함이듯이 말이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인간상은 결국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듯이 말이죠

모든 인간이 떡으로 사는 마당에 왜 하필이면
떡으로 사는 인간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인간을 만드실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부자청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냐 라고 예수님에게 다가올 때
이 부자청년의 그런 모습이
우리 모든 인간의 모습을 대변해서 대표성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곧 구원받는 인간은 선한 인간이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인간은 악한 인간이다는 거죠

네 맞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숙제를 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의로움으로 선악이 판가름이 난다고 본다는 겁니다.
곧 원인이나 조건을 갖추면 그 결과가 나온다고 말이죠.

이것이 완악한 마음과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악마의 생각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로써 사는 겁니다.
곧 인애와 자비이다 말이죠.
원인이 없이 용서라는 결과로만
곧 말씀으로만 사는 겁니다.

이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사야 때의 아하스 왕은 우상과 하나님이 섞어졌기에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다 라고 하고
(주여 저에게는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긍휼의 마음이 없습니다.
원인을 백날 갖추어도 즉 부요함 말이죠.
그런데 나누어 줄수 있는 마음이 안 생겨요
결과가 없어요
그래서 울어야 하는데
애가를 부르고 애곡 울어야 하고 재앙 잿더미를 뒤집어 쓰고 머리를 처박고 생일을 저주해야 하는데

원인만 대따 갖추다 보니 결과가 없는 겁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제가 도리어 가난한 자입니다 라고 
이 긍휼의 마음을 구하지 않더라 라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말이죠. 

즉 부자 라는 여유로움에서 나온 가능성으로 가능성을 이을려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그래서 아예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바벨론 포로 속에 집어넣으니까
이제는 반대로 다들 지레 포기를 해 버리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가능성을 믿고 행동에 나서라 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누가 무슨 일을 지금 벌리시고 있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어 에스겔 그것도 패역한 백성 중에 패역한 에스겔을 불러서

왜 애가 애곡 재앙이 기록된 말씀 두루마기를 먹이시는 것일까 라고 말이죠

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것일까?
떡으로 살지 않는 것도 불가능한데 말씀으로 사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데

왜 이런 일을 벌리시느냐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에 대한 예견은

애가 애곡 재앙이 기록된 말씀을 먹은 인자인 에스겔을 거부하는
패역한 백성의 모습을 보이도록 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아니 왜 이스라엘은 에스겔을 거부할까요?
그리고 왜 에스겔은 뻔히 거부할 줄 알면서도
애가 애곡 재앙이 기록된 말씀을 먹는 것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억지로 먹이신 겁니다만
뭔가 효율적인 결과를 나타내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면
거부할 것 뻔한데 말라꼬 이런 일을 벌리시냐 라는 겁니다.

먼저 왜 이스라엘이 에스겔을 거부하냐 하면
패역한 백성이기에 그렇습니다.
곧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이것이 또 말이 안되는 이유는
목이 곧은 백성이 안되고자
패역한 백성이 안되고자

십의 일조를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부자청년은 어릴 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고(그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고)
또 얼마나 겸손하면 혹시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만 해 주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지키겠다고 했다 말이죠

아니 이런 모습을 완벽하게 갖추었는데
어떻게 목이 곧은 백성이고
패역한 백성이냐 말이죠

원인을 갖추었는데 말이죠

문제는 결과가 안나오더라 말이죠
분명 부요한 자가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말이죠
그런데 안돼요
이상하게 안돼요
원인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떡으로 사는게 아닙니다.
떡을 먹은 원인을 갖추면 살게 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미래완료인 말씀이 거꾸로 덮쳐짐으로써
원인 없는 결과로만 사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인간상을 주님이 원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들이내미는데 바로 인자인 에스겔이다 라고 앞장 세우 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 에스겔이 내 던져지는 겁니다.)


이미 바벨론 포로 속에 놓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잔소리 꾼 예레미야 울음의 선지자의 더 이상의 울음도 안 보는 데 있어서
속이 시원하지만
거짓선지자의 말을 쫓아서 포로 됨에 있어서
참선지자의 말이 맞다고 잘못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 지긋 지긋한 참선지자를 잇는 에스겔 선지자가 나타나서
또 울어대는 겁니다.

어쩌면 바벨론 포로 된 것이 잘 된 것인 줄도 모른다 말이죠
하나님의 말도 안되는 임마누엘을 구할 빠에
차라리 자신들의 속성과 잘 맞는 우상숭배의 나라에서
어차피 못 고칠 병인 우상숭배를
그것도 최고의 강대국에서 노예로 살면서
굻어 죽지 않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냐 말이죠

나도 책임 질게 없고
남도 나를 책임져 줄자 없으니까 말이죠
그냥 먹고 살다 죽자 라고

아무리 부활의 골짜기 예루살렘에 살아도

묵시의 골짜기 환상의 골짜기에 살아도
어차피 역사만 보이니까 
어차피 내일 죽을꺼 실컷 먹고 마시다 죽자 라고 했던 것처럼

어찌 보면 잘 된 거다 말이죠

아 문제는 주님 쪽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철거머리처럼 에스겔이라는 선지자를 또 세워서
또 간섭을 하고
또 징계를 하고
또 잔소리를 한다는 점에서

절대로 너를 포기 하지 않겠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 말을 또 개인구원으로 보면 안 되고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개념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피를 발랐고
약속을 심었기에
그 약속 
그 피를 되찾겠다는 거죠.

그러니 내 쪽에서 
인간 쪽에서
나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예요 라고 노래하는 성인이 되었다는 노래처럼
날 이제 더 이상 내버려둬라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
나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아니 할란다
날 그만 포기 해라 라고 해도

주님 쪽에서 그런다고 봐주지 않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갑자기 오늘 본문이 마치 스토커의 사랑 같은 느낌이 팍팍 든다 말이죠

그야말로 집요하기 짝이 없는 사랑이다 말이죠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너의 타락이 
너의 패역함이
너의 목이 곧은 백성 됨이
너의 완악한 마음이
너의 강퍅한 마음이
너의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고집 센 마음이 센지

그것을 반드시 용서하겠다고 다가오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써
누가 더 폭력적인지 보자 라는 식이다 말이죠

아니 포로 잡혀 와서
이제 끝났잖아요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마귀에게 포로 잡혔으니 끝났다 말이죠

아 그런데 여기서 새 일을 벌리시겠다 라는 겁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스올 곧 지옥에 끌려가 이미 지옥백성이 되버렸다 말이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이미 지옥 백성이 되었다 말이죠

광야 불뱀에게 물려 다 죽게 이미 되어버렸다 말이죠

이미 끝났는데

아니 거기서 비로소 이제 시작이다 라고 새로 시작하시더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라는 용서가 또렷히 밝히 보이는데
언 놈이 막을소냐? 언 놈이 속이겠냐 라고 말이죠.

자 이러니
이 십자가라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다 이루셨다 라는
완성의 말씀
약속 성취를 에스겔 입에 꾸역꾸역 다 집어넣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느냐 라고
뭘 해서 구원이 되는 구원은 이제 없는 겁니다.
그런 원인을 갖추어서 얻는 구원은 모든 종교가 외치는 구원이라는 탐욕
곧 우상숭배인 666 짐승이다 말이죠

그 반대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구원이 되는 구원만을 펼치시겠다고
그래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먹이시는 겁니다.
이런 인간상만이 이스라엘로써

이런 인간상을 만들어버리겠다고 다가오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만들 듯이 말이죠

베드로 쪽에서는 아예 불가능한데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도리어 베드로는 음부의 권세에 넘어가도 한참을 넘어갔다 말이죠
아 그런데 그런 창녀 고멜을
끝까지 사랑하시겠다고

시온에서 나온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라는 뜨인돌로
제로 평준화 일반화 시켜 버리니까

이것을 주님 쪽에서 십자가로 다 완성을 해 버리니까

뭘 해도 예가 되지 아니오 함이 없는 겁니다.

원인이 없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우는 자가 복 되도다 라고

말씀을 먹이심으로 인해서
애가 애곡 재앙
곧 슬픔을 당하고
잿더미를 뒤집어 쓰게 되고
근심 속에 놓여지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게 하시는

원인은 도리어 거꾸로인 슬픔 재 근심인데
애가 애곡 재앙인데
우는 자 인데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인데

결과는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게 되는
주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그 인간상이 되더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병에 주의 눈물을 담고자 한다고
이것만이 말씀에 기록이 되었다 라고

그러니 우리가 완악해야만 완악해 지는게 아니라
마음이 강퍅해야만 강퍅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노력을 하지요
십의 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말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겸손하게 원인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악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주님이 원하는 인간상이 아니다는 이유인 겁니다.

이미 결과 곧 원인 없는 결과는
인자로써 규정이 되어버렸으니
미래 완료로
원인 없는 결과로
예수의 마음이 참인간상으로
이스라엘로 규정이 되어버렸으니

이것이 아닌 이상은
다 완악하고
목이 곧고
고집이 세고
뭘 해도 패역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도리어 세리처럼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완벽한 심판의 주이시자 완벽한 거룩이신
일곱 이신 당신을 보니
나는 인간도 아닌 가짜 인간입니다.,
저에게는 참 인간상이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정직한 영
예수의 영을 주옵소서 라고

우는 자가
보기를 원하는 자가
저 소경입니다 고쳐주소서
저는 환자입니다 의사 선생님 고쳐주소서 라고 하는 자가

주님이 찾으시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다는 겁니다.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율법과 선지자는 이런 의미에서 일점 일획도 떨어지지 않는
주님이 기어코 찾고야 말겠다는

우리 고집 보다 더 센 고집이다는 겁니다.

이 고집이 센
남겨둔 한 씨가 아니였다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다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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