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에 공의를 베푸시고 섬들은 십자가의 지혜를 앙망하리라 (사 42, 1- 4)

55 남은자와 가라지 (사 42, 1- 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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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 이방인(우상숭배자)은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반대로 이스라엘은 울리는 꽹과리(우상을 섬기는)를 모으고

이 말도 안되는 공의를 펼치시는 나의 종 나의 기뻐하는 자를 이방에게 주리라

(마 21:28, 개역)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 21:2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 21:30, 개역)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사 42:1, 개역)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사 42:2, 개역)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사 42:3,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사 42:4, 개역)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 42:1, 새번역)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사 42:2, 새번역)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사 42:3, 새번역)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사 42:4, 새번역)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5절도 중요하다 싶어서 한번 올려보겠습니다

(사 42:5, 새번역)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만드시고, 거기에 사는 온갖 것을 만드셨다. 땅 위에 사는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땅 위에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주셨다.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 42:6, 새번역)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너의 손을 붙들어 주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니,』

즉 예수님은 이 세상을 선악으로 창조한게 아니라
긍휼로써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은 말이 되는 선악으로 모든 것을 해석합니다.

곧 생명 보다 의복이 중요하고
몸 보다 음식이 더 중요하고
목숨 보다 소유의 넉넉함이 더 중요하다는 해석으로 꽉 차 버린 겁니다.
이것이 앞의 글 가라지 비유처럼

원수 마귀가 그렇게 보도록 심어버렸기에 이런 시선에서 벗어날수가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바로 종말의 비유인 셈입니다.
끝을 확 끌어 당겨 봅시다

의복이 백날 많아도 소용이 없는 물거품과 같이 됩니다.
종말에서 말이죠
하나님의 심판의 불 앞에서 말이죠

즉 주 하나님 이라는 정답은 이 세상을 선악으로 창조한게 아니라
사랑으로 곧 은혜로 창조 했기에

의복 보다 생명의 가치를 높이고자 종말이라는 죽음을 확 끌어당겨 버립니다.
자 이렇게 되면 갑자기 의복을 쫓던 자도 졸지에 생명의 가치를 높게 보게 됩니다.

그럼 왜 그 동안 선악의 가치에서 즉 마귀가 심은 가라지처럼 우리는 놀아나게 된 것일까?

결국 나의 목숨 조차도 스스로 가치 없는 저 의복처럼 취급한 것을
도리어 얼마나 생명이 의복보다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베드로의 목숨을 건지고자 자기 목숨을 원수들에게 내어주셨다는 겁니다.
이 시선이 바로 십자가의 피 용서의 시선입니다.

이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울리는 꽹과리에 놀아나는 겁니다.

너튜브를 통해서 한국의 먹방 문화가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던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심지어 어린 여학생 조차도 라면이든 떡볶이든 30인분 40인분을 한 꺼번에 먹는 모습을 보고
열광을 하는지?

알고보니 그 배후에는 배고픈 청춘들에게 목숨 보다 귀한 음식이라는 자본이 깔려 있다 보니
재미 있으면 돈이 되거든요
돈 벌려고 해요
돈 안주면 때려죽어도 안해요
그런데 누가 돈 줍니까? 보는 사람이 돈 안줘요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
다수의 사람이 본다는 이유로 광고가 붙어서 이것이 그만 돈으로 입금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이들을 욕할 입장이 못 됩니다.
이미 이런 구조 속에 갇혀 버린 겁니다.

이 구조를 이미 자본이 되어버린 이 역사라는 시공간을 찢어버리는 길은
오로지 종말 밖에 없어요

그래서 종말의 비유인데 역시나 마찬가지로 말이죠
갑자기 두 아들의 비유를 하십니다
물론 그 위에는 강도의 소굴이라고 성전에서 환전상을 뒤엎어버리시고
양과 소를 비둘기를 채찍으로 막 쫏아내시고
바리새인이 무슨 권리로 이런 일을 하냐 라고 막 공방이 벌어지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어린아이 찬양소리에 소동이 일어나고

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해서 말라 비틀어 죽게 하고
왜 이렇게 되냐 라고 제자들이 묻자 기도 외에는
즉 믿음으로 하면 다 된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그래놓고 다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니까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 라고 따지니 누가 가르치는 권세를 줬냐 라고

그럼 나 예수도 너희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묻자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냐 사람에게서 왔냐

하늘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믿지 않는다 라고 들통당하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이 무서워서

답은 모르겠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나 예수는 너희 제사장과 장로에게
무슨 권세로 누가 준 권세로 성전에서 가르치는지
알려주지 않겠다 라고 하시면서

갑자기 갑분튀
두 아들의 비유를 하시는 겁니다.

즉 저들이 하나님의 집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 정도로
선악으로 마귀가 심어버린 가라지처럼

생명 보다 의복을 중요시 여기는
안식일의 주인 보다 안식일 껍데기를 중요시 여기는
이 선악으로 가득찰때에

예수님은 종말을 확 끌어 당겨 버립니다.

두 아들의 비유는 
가라지 보는 앞에서
알곡을 이방인으로 규정해 버리는 종말의 상황을 지금 이 순간 펼쳐 버리겠다는 겁니다.

창기와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간다 라고

왜? 이들은 이 심판을 이 종말을 받아들이거든요

이것이 사랑임을

그런데 맏아들은 생명 보다 의복이 더 중요하다 고 우기기에
사랑 보다 울리는 꽹과리를 요란스럽게 성전에 가득 채워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세례가 즉 종말이 어디서 왔느냐? 가
이제는 예수님의 공의가 어디서 왔느냐 로써

끝구절이 중요합니다

바로 옮겨 보죠

(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마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자 보세요 세례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에
예수도 무서워서 즉 선지자로 여기는 백성이 무서워서
속내는 죽이고 싶은데 겉으로는 억지로 참는 모습을 들통내시는 겁니다

(마 21:32, 개역)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4, 개역)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 21:35, 개역)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 21:36,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 21:37, 개역)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마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마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마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아니 이 모습이
못땐 짖만 하는 딴나라당에게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서 예수님이 시비를 거시는게 아니라
그 반대인 정의실천 검찰개혁 이라는 구호아래 춧불시위자들에게 예수님이 시비를 건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론 딴나라당은 당연하고요
예외 없이 저 딴나라당 악마들 뿐만 아니라
양의 탈을 쓰고 있는 촛불시위자들에게

창기와 세리(매국노)가 먼저 너희들 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 라고 해 보세요

지금 천국 가기 위해서 하는 짖들이 뭐가 됩니까?

말짱 도루묵 헛짖
의문의 반복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왜? 생명 이라는 알맹이는 관심 없고
의복 이라는 껍떼기 곧 선악에만 미쳐 있으니까 말이죠

마귀가 심었거든요
가라지 비유에서 언급했듯이 말이죠

그래서 종말을 확 땡겨 버리는 겁니다.

이 종말이 되기 전까지
상한 갈대를 꺽지 않겠다고 잠시 유보한다는 겁니다.
꺼져가는 불을 끄지 않겠다고 잠시 유보 한데요

왜? 하나님의 진노인 심판이 이방인에게 다 증거 될 때까지 말이죠

그러면 유대인들은 더더욱 속이 빢빡 끌게 됨을 당하는
더더욱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을려고 하는 완고함에 휩싸이게 되지

누가 저 개같은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냐 말이죠

분명 개같은 이방인은 죽은 자입니다. 생명이 없어요 그래서 죽은자 개 취급해 버립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생명이 있는 자 답게 산 자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 아닙니까?
아 그런데 이것은 개같은 이방인 죽은자 보다 더 못해요
생명은 개뿔 생명은 발로 뻥 차버린지 오래고
그저 의복에 미쳐있고
소유의 넉넉함에 미쳐 있고
목숨 보다 음식에 미쳐 있는 겁니다.

소위 요즘으로 치면 교회 다니는 자들이 말이죠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못 하다는 겁니다.

안식일 날 보세요
손 마른 자를 고쳤다 라고
죽은자를 살려 놓으니까
왜 안식일날 살리냐 라고 따지는 겁니다.
평일 실컷 내버려 두고서
왜 하필이면 안식일날 고쳐서 안식일에 일하냐 라고 말이죠

이 놈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요
지금 이 상황을 종말인줄 모르는 겁니다.

누가 손 마른 자를 고칠수 있겠습니까?종말 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곧 손 마르게 하는 병을
주님은 진노 하시고 
이 더러움을 거룩으로 옮기는 제사장의 기능을 하셨다 말이죠
그래서 안식일날 고치신 겁니다. 일부러

이게 사랑인데

이것이 사랑으로 창조한 세계인데

마귀들이
가라지를 뿌리다 보니
사랑이 아니라
선악을 따지는 겁니다.
왜 안식일을 어기느냐 즉 악을 행하냐 왜 막사냐 라꼬 말이죠
안식일 지키는 선을 행해야지 즉 절대로 막살지 않아야지 라고 말이죠

이 껍데기에 미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죽은자 이방인을 살려 버리고
즉 더러운 자를 거룩하게 만들어 버리고

반대로 살아 있다고 우기는 껍데기에 미쳐 있는 유대인들을
마귀
곧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긍휼을 베푸시는 이 종말을 통해서
약을 바짝 바짝 올려서
반드시 예수님을 죽이도록 해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게 하는
말도 안되는 이 종말을 펼치시겠다고
아예 죽을려고 환장한 사람처럼
예수님은 대제사장 손에 죽고자
속을 빡빡 긁어 대시는 겁니다,

도대체 뭘 믿고?
내 말이
그게 바로 믿음 곧 종말이다는 겁니다.,

종말을 끝을
역사라는 시공간을 찢는 이 종말을 확 끌어당기는 겁니다.

기도 외에는(과부의 헌금이 종말을 땅기듯이 돌 위에 돌을 남기지 않기 위한 과부의 헌금)
믿음 외에는(껍데기 선악 앞에서 과연 누가 생명인지 보자 라는 겁니다. 저 분이 정답인데
왜 정답도 아닌 것들이 정답인척 하냐 라고 이들의 조직이나 규칙들을 다 찢어버리시는 겁니다.)

우와 예수님이 진짜 미쳤죠?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할담비 할배 보다 더 미쳤어요

한 낱 천둥벌거숭이로 태어난 단 한명의 인간일 뿐인 이 예수 라는 단 한 명이
무슨 수로 이 수천년의 역사를 한 꺼번에 다 찢어버리는
종말을 끌어 당길수 있냐 라는 겁니다

무슨 수로 건축자들이 수 천년에 걸쳐서 건축한 문화와 국가와
성전과 역사
무구한 역사와 전통을 단 하루 만에
그것도 때도 아닌데 무화과 나무를 열매를 맺지 못한다 라고 말라 죽게 하듯이
죽여 버리는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기지 않게 허물어 버리겠다 라고 하냐 말이죠
예수님 똘아이 아니냐 말이죠

이 말은 역설적이고 하나님이 창세기 6장 이였던가요
인간을 지으심을 후회한 것처럼

단 한번도 인간은 생명을 귀하게 여긴적이 없이
그저 의목에만 가치를 두어서
생명을 단 한번도 귀히 여긴적이 없는

내가 지은 창조한 사람이 아니고
마귀가 심어버린 가라지 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종말을 확 땅겨 버리니까
더럽다 죽은자다 라고 했던 창기 세리 강도가 먼저 천국가고
깨끗하다 살아있다 라고 한 자들은 도리어 죽은자로 지옥에 가는

이 공의를 펼치시겠다고 하시더라 라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예요

종교에서 말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 신념은 오기처럼 붕 뜨는 마약이고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이고

믿음은 이처럼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실제적인 것이다는 겁니다,

아니 생명이 또렷합니까 의복이 또렷합니까?
자 그런데 마귀는 이 세상을 생명은 흐릿하게 가치 없게 만들어 버렸고
의복이라는 껍데기만을 가치 있게 만들어 버리니까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친 것을 법적으로 고소고발 하는 겁니다.
이 원수들 손에서
이방인들을 구출 하시는 겁니다.

더러운 창기 세리 강도를 구출 하시는 겁니다.

이런 구원을 선민이라는 유대인이 받아들일수가 없는 겁니다.
거리끼는 걸림돌에 탁 하고 걸려 넘어지니까 말이죠

유대인이 절기에 금식하고 있는데
그 코 앞에서 치맥을 시켜 먹고

먹보에 술꾼에 창기와 세리와 강도인 죄인들과 친구 라고
바리새인들이 의도적으로 정치적으로 별명을 붙이는 겁니다.

마치 딴나라당 애들처럼 기승전결 조국 이라고
구호를 붙여야 대중들을 공포로 몰아가는 최면 마약을 심을 수가 있으니까 말이죠

괜히 그렇게 별명을 붙인게 아니다 말이죠
다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서
언론에 퍼트리는 겁니다.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죄인의 친구 예수 라고
신문 1면에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은 의로움 이래요 글쎄
자기들이 예수님을 더더욱 전파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죠
종말을 끌어 당긴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의문의 반복으로 예수님을 다룰려고 하니
선악으로 예수님을 다룰려고 하니

아무리 생명을 선악으로 다루어도
생명을 아무리 의복으로 만들려고 해도
안 통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인간을 상대 한게 아니라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 라는 마귀를 상대한거다 말이죠

바로 이렇게 생명은
의복과의 차이로써
선악과의 차이로써
자신의 긍휼인 의로움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이 듣는 그 코 앞에서
이방인을 구하겠다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아니 우리를 멸망시키는 저 이방인을 도리어 구원하시고
우리는 저들의 손에 멸망 당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냐 말이죠

쉽습니다 그럼 이방인이 되면 됩니다.
더러운 이방인이 되면 되요

그런데 유대인치고 저 더러운 이방인이 되고자 할까요?
막사는 저 더러운 이방인으로???
베드로도 오죽하면 못 먹겠다 라고 합니다.

생명 보다 
껍데기에 미쳐 있었던 역사가
묵시 보다 더 깊게 자리 잡았기에

뼛속까지 껍데기로 가득차 있는 겁니다.
생명이 아니라, 목숨이 아니라, 몸이 아니라
소유의 넉넉함이 가득차 있었고, 의복이 가득차 있었고, 음식이 가득차 있었던 겁니다

사도바울이 오죽하면 이런 배설물이 자신에게 가득차 있었음을 실토 하겠냐 말이죠
다들 부러워 죽는 스카이 캐슬 중에 스카이 캐슬을
바울은 배설물 똥 떵 어 리 라고 하니

그 정도로 껍데기에 미쳐 있었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 고백 즉 회개 하는 순간부터

고난이요 핍박 뿐인

남은자 라는 증상물이

사랑이 먼저 떴기에 나타나는 겁니다.

정작 개같은 이방인이 핍박 받아요
유대인들로부터 말이죠
예수 믿는다고 말이죠

그들은 이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지금도 몰라요
그저 지금도 껍데기에 미쳐서
전세계의 으뜸 머리가 되고자 꼬리가 되지 않고자

전 세계의 모든 학문과 정치 경제 과학 역사 까지 다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히틀러 당시의 유럽 보세요
유대인들이 다 살려냈다 말이죠
근대 유럽은 유대인이 일으켜 세운 겁니다.
거지 중에 상거지 였거든요

지난주 책을 읽어드립니다에서 징비록을 했는데
도망가는 조선의 왕의 시선에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남이 (명나라 군사)가 술 쳐먹고 토하는 그 토하는 것을 받아 먹을려고
달려들 정도로
오죽하면 사람들 까지
이웃까지
자기 자식 까지 잡아 먹을 정도로
얼마전 북한에서도 그랬죠
25년 전에 그랬다 말이죠

성경에도 나오죠 너는 자식을 잡아 먹을 것이다
에이 설마 그럴리가요
누가 자식을 잡아 먹겠냐 그럴 리가 없다 라고
그랬는데 잡아 먹잖아요

(레 26:29, 개역)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렘 19:9, 개역) 『그들이 그 대적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핍을 당할 때에 내가 그들로 그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를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고기를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레 26:29, 개역)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레 26:30, 개역)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레 26:31, 개역)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레 26:32, 개역)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레 26:33, 개역)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렘 19: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렘 19:2, 개역)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렘 19:3, 개역) 『이르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무릇 그것을 듣는 자의 귀가 진동하리니』
(렘 19:4, 개역)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케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열조와 유다 왕들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
(렘 19:5, 개역)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렘 19:6, 개역)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다시는 이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
(렘 19:7, 개역)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계를 무효케 하여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렘 19:8, 개역) 『이 성으로 놀람과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을 인하여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모욕할 것이며』
(렘 19:9, 개역) 『그들이 그 대적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핍을 당할 때에 내가 그들로 그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를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고기를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5305546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 것을 제대로 보라 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이 꺾으신 뼈로 기뻐한다는 것은 아이를 잡아 먹은 겁니다
마치 사사기의 사사 입다의 딸 곧 이름 없는 딸이 인신제물로 바쳐지듯이

이렇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시는 것처럼 밀이죠 

징비록에 류성룡이 유땡민 조상 아닙니까
류성룡이 더 기이하게 여긴 것은
사람을 잡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게
꺼림직 하게 여기지 않았다 라고 그게 기이하다 라고 기록 할 정도로
그 정도로 이 세상이 어떤 곳임을 처참함을 보여주는 겁니다.

https://youtu.be/wtbc0_ebg5E


너가 그 입장 되어 보라 말이죠

그 다음 니 차례인데 우짤래 라고 나오면 우짤겁니까?

그래서 공의가 이미 나타났기에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십자가라는 긍휼의 간극이 이미 먼저 떴기에

이스라엘은 망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 망하는 자리에서

여호와가 누구인줄 제대로 보라 라꼬

선악을 따지는 마귀인지
긍휼로 세상을 만드신

그래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방인에게 공의를 베풀어
주 여호와를 앙망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시는지

마치 예수님이 창기와 세리가 먼저 이들 유대인 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 라고
일부러 의도적으로 유대인들 보란 듯이

과연 생명이냐 아니면 의복이냐
무엇이 더 중헌디 라고 나오시는 

이 종말
이 비밀
이 예수님의 나라를 확 끌어 당기시는 믿음을 펼치실때에

마귀는 안돼 라고 발악을 하듯이
모든 인간은 반발하면서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 라고 예수님을 버림으로써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이 말도 안되는 종말의 현상

곧 역사가 찢겨지는 상황

묵시의 침범
천국의 침략을

예루살렘 성에서 말씀이 나오는 것을
도리어 이방인이 기뻐하고 앙망한

더러운 자가 먼저 천국가는

창기와 세리가 먼저 천국가는

이 의복 보다 더 귀한 생명을 펼치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 생명 앞에
죽은자로써 이방인은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불쌓히 여겨 달라고 했지만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들은 끝까지 생명 보다 의복을 외치는
아니 그들에게는 도리어 생명이 가치 없는 의복이고
의복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생명으로써 눈의 비늘이 벗겨지지 않은채로

이 종말의 사람이 거꾸로 선악의 사람이 된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고
도리어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자들로부터 죽은자 더러운자로 취급 받는
창기 세리 강도가
이 더러운 이방인이 종말의 사람 곧 남은자가 되어서

남방여왕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회개한 니느웨 백상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이 종말을 주님은 사랑으로써 펼치시는 겁니다.

모든 선악은 이 사랑앞에서
모든 울리는 꽹과리는 이 사랑 앞에서
무릎 꿇도록 되어 있기에 말이죠

포로된 자 갇힌 자 억눌린 자 만이 이 희년 기쁜소식을 바랬고 바랬던 겁니다
창기와 세리가 그 정도로 천국을 기다렸고 기다렸기에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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