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 칠병이어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마 15,21-28)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9,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마 15:30, 개역)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마 15:31, 개역)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 15:32,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마 15:33, 개역)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마 15:3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마 15:35, 개역)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마 15:36, 개역)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마 15:37, 개역)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마 15:38, 개역)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마 15:39, 개역)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마 15:29, 새번역)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갈릴리 바닷가에 가셨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으셨다.』
(마 15:30, 새번역) 『많은 무리가, 걷지 못하는 사람과 지체를 잃은 사람과 눈 먼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과 그 밖에 아픈 사람을 많이 데리고 예수께로 다가와서, 그 발 앞에 놓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 15:31, 새번역) 『그래서 무리는,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지체 장애인이 성한 몸이 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걸어다니고, 눈 먼 사람이 보게 된 것을 보고 놀랐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마 15:32,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그들을 굶주린 채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마 15:33, 새번역)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여기는 빈 들인데, 이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무슨 수로 구하겠습니까?"』
(마 15:34,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물고기가 몇 마리 있습니다."』
(마 15:35, 새번역)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나서,』
(마 15:36, 새번역)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주었다.』
(마 15:37, 새번역)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나서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
(마 15:38, 새번역)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도, 남자만 사천 명이었다.』
(마 15:39, 새번역) 『예수께서 무리를 헤쳐 보내신 뒤에, 배에 올라 ㉦마가단 지역으로 가셨다. / ㉦다른 고대 사본에는 '막달라' 또는 '막달란'』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마 14장)가 아니라 물고기 두 마리와 빵조각 다섯 덩어리가 아니라
물고기 두 마리와 빵조각 일곱 덩어리 칠병이어(마 15장) 입니다.

마가복음도 오병이어는 막 6장에 칠병이어는 막 8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숫자가 틀리다고 시비를 걸기도 하던데
오병이어는 5천명을 다 먹이고도 남은 것이 12 바구니가 남았고
칠병이어는 4천명을 다 먹이고도 남은 것이 7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자 문제는 우리가 12 광주리가 남았을때에 이것이 남은 찌끄래기 잉여가 이스라엘 이라고 했는데
그럼 일곱 바구니가 남으면 이건 뭐냐 말이죠?
그야 당연히 일곱 교회 라는 역시나 이스라엘의 의미 이다고 말하겠죠

그러나 하나 빠졌습니다.

오병이어와 다르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광야에서 사흘 동안 머무르게 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일곱의 의미입니다.
일곱은 단독적으로 홀로 따로국밥처럼 나오는게 아니라
일곱 되신 예수님과 연관성이 있는 것이 일곱교회인 새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 광야의 사흘은 뭡니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잃어버리게 하는
쫄딱 망하는 죽음의 자리로 몰아가는 심판을 말하는 겁니다.

계시록에서 일곱 되신 예수님 이라고 자꾸 일곱을 강조했는데
그냥 일곱이 아니라
숫자 개념도 아니라 기능입니다 존재가 아닌 기능
인간은 숫자 개념으로 항상 상징성을 따지다 보니
마치 부적처럼 럭키 세븐처럼 행운의 숫자로 착각하는데
정작 기능으로 보면 정반대입니다. 존재인 인간에게 붙일수가 없고
기능으로써 인간에게 붙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일곱은 완벽한 심판이자 동시에 완벽한 거룩입니다.

즉 심판과 거룩(구원)은 앞 뒤가 모순 되잖아요
이것을 인간이 해결할 길이 없는 겁니다.

자 그래서 광야 사흘이라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쫄딱 망하는 자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인간은 죽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치 풍랑을 일으켜서 베드로를 빠뜨려 죽이는 식입니다.

그렇게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사흘이라는 간극 곧 단절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기능의 의미를 다시 상기 시켜 주시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굶겨 죽이시지 않겠다 라는
주님의 결심에 의한 겁니다.

맹세 곧 약속인 불쌍히 여겨주심이라는 긍휼 곧 인애와 자비입니다.

사흘도 못 버티고 죽어야만 하는 무능한 인간이기에
마땅히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사흘이라는 광야 속에서는
윤리적인것도
손씻어 깨끗해 짐도
거룩하게 살아왔다는 것도

그 어떤 것도 다 무용지물인 그저 죽음 사망이라는 권세에 다 죽어야 함을 격도록 체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네 맞습니다.
녹음을 통해서 또 우리가 이사야 에스겔 말씀을 나누면서 자주 접했습니다.
바로 내가 여호와 인줄 알리라 라는 주님의 자신의 맹세 때문입니다.

야곱을 부르시겠다 이스라엘을 부르시겠다 라는 자신의 음성이 이미 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비로소 깜짝 깜짝 놀라면서
여호와가 누구신줄
창조주가 누구인줄

주여 라고 비로소 주 여호와 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부르게 됨을 격게 되는

이 사건을 벌리시겠다는 의미에서

지금 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이 광야 사흘이라는 단절을 격게 됩니다.

우리가 그 동안 잘못해서도 아니요
미래의 죄인 앞으로의 죄를 씻기 위함도 아닌

그저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먼저 떴기에
우리는 그 증상으로써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 죽는
사흘 만에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단절을 격게 되는 겁니다.

바로 앞 주에서 에스겔이 보여줄 이상한 행동
갑자기 이사짐을 싸서 행구를 이동해 피난민처럼 보이고
밤에는 성벽을 뚫어서 포로 잡혀가는 모습을 보였고
또 두 번째 징조는 식물을 급하게 깜짝 깜짝 놀라면서 먹는
그야말로 쫄딱 망해서 포로 잡혀가는 상황을 보여주라 라고 하듯이 말이죠

이 깜짝 놀란다 라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룬다 라는 것은
그야말로 이사야의 주제 이거든요
허걱 헉 거리면서 놀라 자빠지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이다 말이죠
쫄딱 망해 심판받는데
그 심판 속에서 구원이라니??

심판에서 구원으로 이동 시키는 자가 바로 임마누엘 구원자 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듯이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그 이유로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광야 속에 사흘 동안 굶주림 속이라는
죽음 속
또는 심판 속
진노 속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 15:30, 개역)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마 15:31, 개역)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지난 주의 귀신 들린 딸의 어미의 심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귀신 들린 딸에 비하면 마찬가지 이지요
또 오늘 본문인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죽음 속에서 있었던 것을 사흘 동안 우리는 같이 격게 되는
집단 금식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그래서 소경의 자리에서 앉은뱅이 자리에서 귀머거리 자리에서
왜 희년 인지를
왜 여호와인지를 알아라 라는 겁니다.

주님은 인간을 이렇게 소경 앉은뱅이 귀머러기로 보시는데
인간은 자꾸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의인으로 자꾸 출발 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그 의인 됨을 더더욱 의인 되게 할려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가득 채우는 겁니다.

결국 이런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있으나
그래서 자기 의를 더더욱 쌓으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망하더라 라는 거죠
즉 자기가 왜 쫄딱 망해야 하고
아주 아주 나쁜 죄인 중의 괴수임을 모르기에

인애와 자비를 모르고
번제와 제사를 찾게 되는 겁니다.

즉 아주 아주 썩어 죽일놈처럼 그렇게 나쁜놈인 마땅히 죽어야 할 자를
살리시는 인애와 자비인 7에 70번 용서를 받아야 할 정도로
그 정도로 원수 중의 원수인 것을 모르기에

자꾸 남을 7번 용서 할려고 그래서 8번 9번 도대체 몇 번 용서해야 시험에 합격하냐고 묻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냐 라고 말이죠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고 어른들은 물어도 부자청년 말이죠
어린아이는 그렇게 예수님에게 묻는 아이는 없더라 말이죠

가버나움이라는 레바논 여성으로써 배우이자 감독인 나딘 라바키 감독이 만든 영화를 봤는데

주인공 아이가 어렴풋 12살 정도로 추정이 된다고 하더라 말이죠
12살에 예수님의 기록이 성경에 나왔거든요

몰입도가 높아서 끝까지 지루하지 않게 봤는데요
지금 현 시대에 예수님이 오시면 어떻게 될까?

가난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노리개가 되는 겁니다.,
마치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이
성경 박사들인 바리새인들의 실험 교재물인 노리개깜이 되듯이 말이죠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또 어른이 되어도 가난 자체가 그렇게 된다 말이죠

빤스 목사에게서는 교인들은 성노리개 이듯이 말이죠

그런 인간들 속에 아무리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도
소용이 없는 이유는

그 기적을 자신은 망하면 안된다는 취지로 보고 있는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으로 보기 때문에
소용이 없는 겁니다.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 11:20, 개역)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1, 개역)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 11:22,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러니 가버나움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이유 없이 나는 망하면 안된다는 그 이유로써
예수님의 기적 또한 자신은 마땅히 살아야 한다는
그 가치에 덧붙이는 식으로 보고 있으니

여전히 그 가난이라는 죽음
사망이 왕노릇하는 그 죽음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아무리 부유해도 성노리개 중독에 빠져 있으니 말이죠

부자청년 보세요
얼마나 가난한지 주님이 들추어내신 겁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누굽니까? 이스라엘 밖에 없어요
즉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밖에 없어요

양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반드시 목자와의 관계성에 놓여진 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만이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입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놀랍게도 이스라엘 여자가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이였습니다.
이 여인 만이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서 예수님에게 
다시는 목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달라고 합니다.

아무도 예수님에게 그렇게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말이죠
더군다나 유대인들은 더더욱 그렇게 말 하는 자가 없었다 말이죠

예수님은 바로 이런 자
목 마른 자에게만 의미가 있다 말이죠

목마르지 않은 자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마치 환자에게만 의사가 의미 있듯이 말이죠

자 그럼 목 마르지 않은 자
절뚝발이가 아닌자
소경이 아닌자
불구자가 아닌 자
벙어리가 아닌 자
로써 따라온 무리를
사흘동안 광야에서 굶겨 죽이심으로써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즉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아는 자는 이스라엘 밖에 없거든요
그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고자

주님 자신의 의로움을 펼치시는 겁니다.

(마 15:30, 개역)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마 15:31, 개역)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 15:32,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이 의로움이 바로 계시록에서는 일곱
곧 완벽한 심판이자
우리를 이유 없이 쫄딱 망하게 하십니다.
그래놓고 완벽한 거룩 구원이시다 말이죠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이 십자가의 간극이라는 공백을 사흘을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를 만들어서
그 속에서 태어나게
십자가에서 태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세상의 미말에 아무리 찌끄래기가 되어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예수님의 피 용서인 십자가의 사랑만 외치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창조주입니다.
왜 창조를 하셨을까요 우리가 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을까요?
아무리 죽음 속이고
아무리 성노리개가 되는 자본주의의 가난 속이고
아무리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인 저주 속에 놓여있을 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 라는
새노래를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어야만 했고
이 땅에서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멋들어진 인생 아닙니까
감히 부정한 입술인 주제에 주님을 찬양할 수가 있다니 말이죠

찬양이란 직업꾼들인 가수에게는 노래가 하나의 돈벌이 수단인
기술 테크닉 곧 행함이자 일이 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일이 아니라 행함이 아니라 가정부가 월급타야하듯이 노동의 댓가가 아니라

그야말로 즐기고 누리고 기뻐하는 겁니다.
행함은 눈치를 봐야 합니다.
어느 누가 돈을 더 많이 주고
어떤 누가 가장 힘이 세어서
그 사람에게 더더욱 아부를 하고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인정받도록 하고자 하는
눈치를 보는 불안 불안 하기 짝이 없는 일거리
수고로움 짐진 자가 되는 것이지만

찬양은 그런 행함이 아니라 즐기고 누리고 기뻐하는
깜짝 깜짝 놀래서 손에 쥐고 있던 일거리 
행주거리
총과 칼 등등을 모조리 다 놓게 만들어 버리는
눈 녹듯이 다 녹여버리는

마침이 되는 전쟁을 종식 시키는
행함을 종식 시키는
불과 같은 사랑입니다.

모조리 다 태워버리니까
손에 쥔 일꺼리들이 다 녹아 버려서
심지어 처음 아담인 나 조차도 다 녹아 버려 사라져 없어져 버려서

이 사흘이라는 광야에서 다시 태어나는
찬양자가 되는 겁니다.

제발 노래 하지 말고 즉 가수 라는 직업꾼이 되지 말고
노래하는 자로 이미 태어났음을 종말소리꾼으로 태어났음을 누리라 말이죠

눈치 볼 것 없이
마음껏 말이죠

이 찬양자로 만드시고자
일곱을 만드시고자

찌끄래기 부스러기로써
다윗의 자손 곧 인자를 노래하는 자로 삼으시는 겁니다.

노래가 뭐냐구요? 음악이 아닙니다.
노래란 사건입니다.

총과 칼을 눈 녹듯이 다 녹여버리는 사건 말이죠

귀신 들린 딸의 어미는 이렇게 노래 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는 이 찬양 외에는 다른 노래를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광야 속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춤 추고 노래하는 것 외에는 할게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태어난 겁니다.

(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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