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다

질문에 대한 답을 보충하면서

(창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참이스라엘은 예수님 뿐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예수님 자신이 누구를 겨냥해서 싸우는가 라는 전쟁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은 고지곳대로 하나님과 싸우기 위해서 무조건 시비를 먼저 걸어오신다.

여기의 전쟁구도에 어떤 인간도 벗어날 수 없다.

심지어 예수님의 자신의 12 제자 속에서도 그들 속의 하나님과의 전쟁에 아주 적극적으로 먼저 선방을 날려서 공격해 들어 온다.

이것은 마치 자기 교회 목사가 자기 성도에게는 그 선방을 유보하는 모습과는 전면으로 배치된다.

가장 사랑하는 수제자를 가장 배도한 인물로 만들어서 공격하신다.

그렇게 해서라도 인간을 장악한 하나님을 공격하고 들추어 내고 박살내겠다는 것이다.

이 모습은 마치 약속을 이루지 못하는 하나님을
약속만을 이루는 하나님을 앞세우고
유다의 하나님을 겨냥해 공격해 들어오는 다말의 하나님과 같다.

두 사람의 같은 하나님 문화 속에서 차이나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다말을 적극적으로 공격해 들어온다. 오히려 싸움을 피하고픈 자는 유다이고 저절로 자멸하는 기회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다말은 자멸하든 말든 약속만이 옳다 약속만이 실행하는 행동주체자이다 라고 무식하게 몰아붙인다.

그러나 유다의 하나님은 이미 고정화되어서 정지해 버렸다. 그 고정된 유다에게 포착된 하나님은 유별나게 설치는 온동네 수시고 소동케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 유다의 이미지에 부합되고 일치가 된 유순하기 짝이 없는 엄위가 있는 유별스럽지 않는 어떤 실수도 흘러 버리지 않는 자기가 이미 자기에 만족해 버린 하나님의 이미지 이다.

바로 그런 하나님을 공격하는 하나님이 바로 다말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마치

아브람의 하나님 곧 아브람과 하나님이 일치된(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죄) 그런 이미지 상을 (우상 조각가) 의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쪽에서 다가와서 그런 아브람의 하나님(욥기에서는 엘로힘)을 와작 와작 씹어버리듯이 공격하고 찢어버리는(의문의 도말을 찢어버리듯) 그 언약의 하나님이 따로 이삭의 희생제물에게서 나타난다.

여기에 비로소 아브람의 하나님은 찢겨지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인 약속이 승리를 성취하는 약속 외에는 모든 거짓부렁이는(아브람-나무의 믿음 = 열매인 이스마엘) 철저하게 거부됨을 보고 그 차이성으로써 희생제물이 된 이삭의 죽음의 제사에 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함을 받게 되는가? 그것은 죽음 속에서 생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십자가의 제물의 희생이 그에게 덮쳐버렸다. 그 제물의 믿음이 덮쳐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방적으로 계속 전쟁을 걸어오던 여호와 하나님은 너가 나를 믿는줄 이제 보았다 라고 선언한다.

무슨 근거로? 여기에 어떤 학자도 답을 달 수가 없다. 오히려 인신 제사의 모습으로만 보이기에 도저히 이런 하나님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다시는 성경말씀을 대하고 싶지 않는 외면성을 비로소 드러낸다. 마치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고 또 창세전에 아버지가 예정하신 자 아니면 내게로 올수 없다 라고 2중 3중적으로 태클을 걸어 넘어뜨리는 실족케 하는 그 예수님의 하나님 앞에 당신만이 나를 긍휼히 여길자 라고 다가온다면

이는 마치 개같은 이방여자가 맞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그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긍휼로써 먹지 않습니까 라는 되발아진 자신이 죄인의 뻔뻔스러움을 나 환자요 의사 없냐고? 나 같은 병마에 빠진 의사 없냐고 다가오는 겁니다.

사실상 다가온게 아니라 바로 그런 죄인이 없기에 일부러 만들어서 죄인을 새로 창조해서 만들어서 자신의 의사됨을 창조주 됨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에게 포착당한 모든 하나님은
불의한 청지기와 불의한 재물과 창녀 세리 강도의 친구 되신 예수님의 하나님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법의 간격을 더욱더 극과 극으로 벌려 놓는 겁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은 눈을 떳습니다. 놀랍게도 그 아브라함을 눈뜨게한 믿음이 다윗에게도 찾아오니 다윗도 비로소 눈 뜹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공짜인 은혜로 왔다고 (롬 4장)

자기 믿음을 비로소 손 놓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그렇게도 우상조각가 답게 신만들기 곧 믿음 만들기라는 하나님 같이되기(일치)라는 본능이
예수님만의 하나님에 의해서 와르르 무너진 여리고성과 같이 된
아브라함은 비로소 누가 나를 허물어 버렸는가를 비로소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반드시 우상조작가로써 뽑힌 이유는 믿음에 대해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믿음의 대가와 말씀인 약속이 직접 보여주는 믿음과 차이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비언약과 언약의 대립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대립입니다. 또 율법에 흠없는 행함의 대가인 사울과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보는 초대교회의 온갖 밉상을 받는 사도바울의 십자가 피의 대립의 차이로써 성경은 일관되게 증거한다.)

그것이 바로 그 원망을 모두 담고서도 인간의 비거룩인 하나님을 담고서도
그 가짜 하나님인 곧 나 자신을 다시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나를 지워버리는 지우개인 피가 덮여져셔 그 뚜껑에 피가 발린 거룩만을 그 예수님만이 증거한 하나님이 실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영의 활동이요 그 영의 활동인 전쟁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활동의 주체이고
유사 영이라고 우기는 인간의 머리에 포착된 성령의 활동도 모조리 다 육의 활동으로 취급하고 도리어 아주 적극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겁니다.

이런 밀어붙이는 사랑이 아니면 가짜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인간의 단단한 껍데기는
깨어질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편애는 인간의 어떤 해서에서도 풀려지지 않는 비밀입니다.

도리어 인간이라는 감추어진 죄의 비밀을 낱낱이 까발려지는 해부작업이 십자가의 사랑에서
밀어붙이는 액션만이 비로소 이겨낼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이다.

결국 우리는 이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님에게 공격 당하는
가나안 족속의 우상숭배자일 뿐인 죄인이다.

이 참 이스라엘 되신 예수님만이 원수의 성문을 여시고
우리는 그 원수의 성문이 열리지 못하도록 끝까지 사수하는 입장이다.

이 성문이 공격 당함으로써 함락되는 영의 영역에서
비로소 피가 터져 나오며 그 피가 옳았음을 찬양케 만드신다.

결국 찬양(기도)이란 부정한 다말이 옳았다 라는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전쟁을 걸러 오는 사랑의 전리품이 유다이다. 이렇게 당했습니다. 앞으로 이 십자가에 까불지 맙시다 라는 종말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 부정한 십자가의 피를 마귀는 끝까지 막는 역할만 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마귀와 예수님의 내기장기에, 인간은 눈에 보이는 교회에 정신팔리도록 하여서
인간과 인간의 비교에 빠지도록 한다.)

십자가는 넉넉한 승리이다. 자신의 승리를 죄인에게 퍼붓는 모습을 처음부터 다가왔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죄인이며 그런 죄인에게 허물치 않고 정죄하지 않는 사랑을 보여준다.
이런 피가 주인공이 되는 자작극에 우리는 조연도 아닌 엑스트라다 소품이 되었다는 이유로
무조건 주인공인 십자가가 미운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미움을 유발케 하기에 주인공인 것이다.

이런 미움의 유발케 하는 편애는 더욱더 불난 집에  기름 붓듯이 모든 공로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에게 돌려 버리면 인간이 행했다고 하는 사랑은 졸지에 거짓임이 드러나는 식으로 증거하시는 겁니다. 즉 이런 독자적인 예수님의 사랑만이 미움을 드러내지
인간의 사랑의 실천은 미움과 죄를 들추어내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원수의 성문을 이 참 이스라엘만이 열수 있고 열기뿐만 아니라 넉넉하게 승리하기에
늘 시비를 걸어오시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인 하나님은 미움도 지옥도 심판도 없는 인간의 망상의 에덴동산만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라는 틀에서 못 벗어나도록 세뇌시키는 마귀들의 장난이 성화론자들에게서 벌어지고 있다.

바벨탑의 진짜 속성인 뚜껑을 열지 못하면 교회는 교회 자체로써 약속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교회를 뚜껑 열어보면
피가 없고 인간의 성화된 육의 자랑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교회를 피가 없던 있던 상관 없이 허물어서
다시 피를 유발케 한다면

누가 뚜껑 열지 말자고 할 것인가?
뚜껑 열지 말고 다만 마귀의 3가지 정체인 서로 서로가 높여주기 작업만을 가득 교회에 채우자 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만민이 기도(찬양-유다의 사고방식을 교체되는 영의 일= 십자가의 미련한 지혜)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각종 자기만의 하나님을 가득 채운 아지트)로 만들었느냐 라고 뚜껑의 실체를 열어 보자고 적극적으로 자기 죽음을 목숨을 담보(유다-은잔시험-창 43:9/ 44:32)로 해서 사랑이 누구냐 라고 믿음의 도박을 걸어오십니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자 여기서 내가 포착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의 차이가 극과 극으로 벌어지면서 차이가 납니다.

나의 하나님은 이런 담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걸어서 자신의 죽음을 밀어 붙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이 실상을 실제로 걸어오시지만

인간의 믿음은 죽으면 그 뒤를 이끌어 줄 자가 없기에 그런 자기의 하나님이 가짜 임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당당하다 이끌어 줄자도 없으면서 왜 안다고 왜 사랑을 실천한다고 왜 행한다고 왜 믿는다고 우기냐고 자기 믿음 외에는 모조리 거짓으로 취급해 버린다.

이런 사랑이야 말로 사랑이다.

모든 타인의 사랑과 행함과 하나님을 모조리 다 가짜 취급하는 이 사랑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의 하나님을 이겨내는 참이스라엘 곧 예수님 뿐이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