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관계란 없다 그리고 씨 뿌리는 비유

2010년 11월 27일 토요일 오후 2:34:16   김대식


(창 3:4, 개역)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개역)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개역)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7, 개역)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 3:8, 개역)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움

이것이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된 마귀의 실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감추어졌다.
밖으로 표출이 되지 않기에 숨어서 장악한다.


그래서 그 반대로 생명나무가 인간이 된 유일한 모습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정반대이다. (그 이전에는 알 길이 없다.)

먹음직? 스럽지 않다.
보암직? 도 않다.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는커녕 미련하고 어리석다.(고운 모양도 없고, 싫어버린바 되고, 질고-질병과 고통 뿐이며 또 퍼트리는 민폐 뿐이다.)

그 어리석은 제사를 가인은 삭제하고 없애 버렸다.
여전히 자신의 제사와 믿음인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할만큼 탐스러운 것을 사수하고
확대 확장 시킨다. 거기에 동원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이마표 이다.
(구지 미래완료를 쳐다볼 필요가 없다. 뭐가 부족해서? 그때 그때 결핍은 하나님도 내 편 만들기로 때우면 된다.)

건드리지마! 퍼지도록 냅뚸!
건드리기만 해 봐라 벌이 7 배야!

그 구조를 확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고맙게도 가인 건드리면 벌이 7배지만 나 라멕 건드리면 7에 7이야 라고
어느새 확장에 확장을 거듭한다. 7을 덧붙여 7은 곧 인간역사다.
수치를 가리워 숨기는 것이 역사다.
(그러나 피(생명)는 그것을 밀끄덕 미끄러지게 하는 것이다. 전쟁 곧 자기부인이다.)

(창 4:24, 개역)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그런 자들이 영웅이 되어서 더욱더 확대의 무한증식을 펼친다.
다들 부러워 한다. 와 부럽다 나도 저래 되었으면? 하나님도 보우하사 라멕 만세

그래서 다들 왕이나 영웅이 되면 보디가드가 겹겹이 철벽수비의 난공요새처럼
에덴동산을 떠난 생명나무처럼 철통보완을 접근 불가를 흉내내고 모방하기 바쁘다.
(애굽의 10가지 재앙은 우상이라는 신을 인간의 손으로 제작해서 그 신들은 겹겹이 인간방어막으로 겹겹이 쳐진다. 그것을 하나 하나 벗기는 것이다.광야이스라엘 조차도 하나 하나 벗기니 10가지 이상의 원망만 튀어나온다.
그러니 양쪽다 길가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단지 한 쪽은 긍휼의 피(유월절 어린양 피)가 없고, 다른 한 쪽은 피가 발렸을 뿐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도리어 원망 뿐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희한한 특이한 것인가?)

성은 겹겹이 쌓이고
보호막은 첩첩이 중첩이 되어
매끈한 평지에 주름이 생긴다.
(구원! 구원? 까짓것 마음대로 살지 뭐 ! 그러나 노아심판으로 졸지에 결핍이 생기니 이제는 구원집착으로 구원의 통로를 손으로 직접 제작한다. 피라미드, 국가, 성전)

(창 11:1, 개역)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2, 개역)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창 11:3, 개역)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개역)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창 11:5, 개역)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창 11:6,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창 11:7, 개역)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 11:8, 개역)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졸지에 시날평지를 인간은 뾰족한 성곽 세우기로 흡집을 내면서 개간한다.
(마치 솟대 사상처럼 흩어진 분리의 방지인 결집이요 단결이다. 그것이 남근의 기능처럼 법으로 작용한다. 질서 잡기 이다. 동시에 수치다. 모든 수치는 남녀성기를 중심으로 평생 숨기기 가리우기 수치감추기를 행한다.)

그 보호막의 확대가 바로 바벨탑이요, 국가요, 애굽나라요,

인간의 지상낙원 건설이라는 에덴동산의 잔상인 천국에 대한 결핍을
이유없이 건설하는데 평생 매진하고
이유없이 그 결핍을 채울려고 한다.

그것은 더욱더 곤고하게 하기 위해
자기 이름을 내고자 동원이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종교이다. 남근기능이다.


왜 성관계는 없다 라는 제목을 달았는고 하니
어떤 책 제목이기도 하다. 아직 잃어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책 [신체 없는 기관] 의 저자가 쓴 글에 짤막하게 나오는 부분에서 
자주 많이 언급이 되길래

그냥 책 제목만 차용해서 씨 뿌리는 비유와 비교해서 생각해 봤다.
(사실 육적인 생식 번식의 생명 개념이 아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그 육의 방식의 반대인 차이로써 생명의 확장이다. 곧 피로써 이룬,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이룬 생명이다. 마치 안식이 단절이라는 전쟁으로써 평화를 이루듯 말이다.)

어떤 다큐를 보다가
바닷물의 성분을 살펴 보니 피의 성분 구조와 같다 라는 것을 듣고는 바로 꺼버렸다.

내 생각이 억지로 알레고리로 역은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 생각이 떠나질 않는 이유가

최근에 또 다른 다큐를 보다가 옥수수의 위협이였던가?
결국 아무리 인간이 먹어도 옥수수를 입에 댄적이 없어도
결국 옥수수만 먹은 꼴이였다는 것이다.
이유는 동물들이 먹는 사료가 다 옥수수 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닭 그리고 계란 모두 옥수수만 먹은 꼴이다.
어류 양식 또한 사료로 먹이면 같은 결과다.
곡물 또한 옥수수 비료? 영양제?

광야에서 고기 먹고 싶다고 외쳤던 이스라엘의 원망이 생각 났다.
결국 인간이 아무리 고기를 먹고 싶다고 외쳤어도
그 근원은 바로 예수님의 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인간은 예수님의 피에 대해 기겁을 할 정도로 거부인가?
중간에 뭐가 있었길래? (물론 살과 피란 우리가 먹는 입으로 감각할수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모든 근원의 뿌리이다. 리좀처럼 말이다.)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9, 개역)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요 6:60, 개역)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1, 개역)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2, 개역)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 6:63, 개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4, 개역)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요 6:65, 개역)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 6:66, 개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결국 먹고 냠냠하는 양식이 아니라, 소욕으로써 다른 소욕을 거부하기 위한 양식 곧 생명이다. 생명이란 66절에 생명아닌 것을 배척함으로써 증거 된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과 먹는 개념으로써 비로소 임금 삼고자 따라오니 일부러 도망치신다. 결국 따라잡자 왜 도망치냐고 하니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임금 삼고자 한다는 것을 거부하기 위함이다. 곧 양식으로써 인간의 정치성 기적성(종교성) 경제성으로써 내장되어 숨어있는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것이 참 양식 참 생명이다. 그로인해 비로소 속내가 밝혀져 들추임 당한 그들은 다시는 예수님과 동행치 않는다. 양식이란 함께 먹과 함께 마시는 같은 운명의 생명성이다. 거기에 대한 거부 곧 다시는 함께 다니지 않는다 라를 것을 들추어내심으로써 차이성을 드러낸다.)

쓸데 없는 것이 중간에 썩였다. 또 수치와 연관 된다. 숨기고픈 부끄러움과 연관된다.

마치 야곱의 아내 리브가의 태중에 다른 것이 들어가 있듯이 말이다.

그 다른 것이 대세를 장악하고 확정짖고 모든 것을 아무리 소유해도
아무리 부인 못할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없앨수가 없는 것이 피 다.

생명이라는 근원이다.
(도리어 그 수치를 들추어내는 참생명을 만났음에 기뻐해야 할 것이 아닌가? 참생명이다는 증거다. 근원적인 죄를 지적할 줄 모르는 자들은 거짓이다. 그저 변두리 것만 이야기함으로써 삥만 뜯을 뿐이다.)

피(생명)을 부인 못하는데 부인 할려는 무리수를 둘려고 하니 참신기할 정도이다.(실로암 소경은 봤는데, 정작 소경 아니다는 다른 자들은 보고도 안 봤다는 무리수를 둔다)
우리의 삶이 다 이런 식이다. 신앙 한다고손 치면 신앙 할수록 더 심하다. 안 봤단다.
사실 안 본게 맞다. 전혀 생명 같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은 실로암 소경에게만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생명도 아닌 것들이 더 설쳐댄다.

선악을 아는 마귀가 인간이 되니

벗었다(부정)는 것으로 연약한 인간이 부끄러운 실패자 임을 보게 된다.아니 그럼 그 이전에는 벗었는데 왜 수치로 부끄러움으로 개의치 않았는가?
그래서 그 에덴동산에서 이질적인 행동이 나왔다. 벗었다는 것이다.
수치를 보게 되는 눈이 열려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저히 그 벗었다는 수치를 알게된 밝아진 눈으로는 에덴동산에서 살수가 없다.
아니 에덴동산의 구조가 그들을 쫒아낸다.

자발적인 나감이라면 미련을 두지 않거나, 인정을 할 것인데, 쫏겨남은 도저히 용납못한다.
눈은 밝아져 버렸고 쫏겨났다는 의식은 갖게 되니 (같은 양상)
만회 할려는 반감으로 결핍의 흡집인 상처 트라우마로
늘 꿈 속에서 에덴동산 복귀를 보란 듯이 이루겠다는 잔상만 여운에 남게 된다.)

눈이 밝아져 벗었다는 것을 통해 비정상적인 것이 생겨난다.

그 수치를 카바 덮고자 비정상적인 행동이 바로 가리우는 것이다. 숨기는 것이다.
수치를 숨기는 것이다.

이것이 구체화 되는 것이 가인의 제사이다.

그래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들이 여기에 동원된다.

사실 모든 원천은 피 다 라고 했다.

그런데 피 채로 먹지 말라고 하신다. 생명이기에 건드리지 말라고 한다.

(창 9:4, 개역)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먹는 문제가 갑자기 죽음문제로 운운 된다.

(창 9:2, 개역)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창 9:3, 개역)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 9:4, 개역)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창 9:5, 개역)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창 9:6, 개역)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창 9:7, 개역)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그럴 것이면 말라꼬 고기를 먹도록 하는가?

피를 그냥 안 주시고 고기를 거쳐서 피를 언급하신다.

피도 그냥 피가 아니다. 목숨이 붙어 있다고 그냥 생명이 아니다.
목숨 자체는 우리에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만 해당 되는 사항이다. 곧 생명은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그것에 대한 반발이 바로 수치심에 눈 뜬 것으로 그것을 가리우기 위한 비정상적 행동들이다. 인간의 믿음도 여기에 해당된다. 행함이다. 로마서 4장에 그래서 상대적인 믿음은 예수님에게만 해당 되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믿음은 무조건 열매 없다.
그러나 상대적인 예수님의 믿음은 무조건 이유없이 열매 맺도록 되어 있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성은 그 생명 자체로써 생명 다워서 생명이 아니라 생명이기에 무조건 생명이다.

그러나 수치에 눈이 밝아진 인간은 그 수치를 짤라내지(할례=십자가) 않는 이상 그 시선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그래서 반대로만 온다.

한쪽은 수치를 가리우는데 급급한데 (육의 소욕)
다른 한 쪽은 수치를 들추어냄을 당하는 발가벗겨지는데 급급하다.(성령의 소욕)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찌 낙심이 도리어 될 것을 낙심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믿음(약속 곧 생명) 때문이다.
불가능성이요 우발적이며 부정적 집단 판대기며 매끄러운 빈자리 라고 한다.

곧 원천인 첫사랑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말이다.
즉 이 말은 뭔가를 했다는 것은 의식을 했고 그 의식은 수치를 가리우는 선악적인 것이다. 그리고 평? 평? (우발성의 반대말) 당연성이다. 운명적이다 라고 행함에 운명을 건다.
수치를 가리고 숨기는 비정상적인 것에 운명을 건다.

아 우발 우연의 반대말이 필연이다. 필연

단어 사전 검색해 보니 목적필연성은 그 원인에 따른 당연한 필연적인 결과 라고 나왔다.
사건은 결국 그 필연의 결과 때문에 온다는 것이다.
원인의 결과다 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반대이다.
사건은 우발성 때문에 발생한다.
사건 자체를 목적으로 우발성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열매는 원인 없는 결과다. 우발이다.

이 우발이
원인 있는 결과들인 길가 돌짝밭 가시밭 보다 30 60 100배의 결실인

더 나은 제사 곧 십자가 다 라는 것이다.(죽은자 같으나 산자 다, 그것이 십자가 다)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개역)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개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개역)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개역)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23, 개역)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개역)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개역)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나 인간은 백날 해도 길가 돌짝밭 가시밭만 맴돈다. 구조이기 때문이다.

역사 구조는 마치 그 내부의 고인 물로써 가진 것으로 쭈물딱 쭈물딱 만들어 내어 버티기를 할 뿐이다. 외부의 공급이 없다.

그래서 그 외부의 공급인 묵시 구조 조차도 역사 구조로 끌여들여서 흉내 모방만 할 뿐이지
실상의 믿음인 외부의 공급은 일체 없다. 그 묵시 운동 흉내낸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 곧 유대인이 아닌가? 외부의 공급을 제거해 버리는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다.

우리라고 다를소냐? 우리도 마찬가지 이다.
본 것 경험치, 먹은 것 경험치, 지혜롭다고 탐스러워 내부에 숨겨 저장한 경험치
그 경험치로써 사건(창조)에 대웅하겠다고 하니
그것 바닥 치지 않는 이상 사건을 제대로 볼 리가 없다.

그러니 선택이 도리어 방해가 된다. (선민사상, 선택론, 구원론, 믿음 등등은 살인의지로 변한다.) 

다 겹겹이 수치 곧 발가벗음을 숨기고 가리우는데 이용했는데 동시에 남을 속이는 거룩한 일을 했다고 칭송꺼리가 되기 때문이다.

율법은 바로 그 경계선에 배치 된 것이다. 법과 법 사이에 말이다.

그 증거가 로마서 7장이다.

(롬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래 놓고 8장으로 넘어가면 무조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원인 없는 결과 이다. 우발성이다.

만약 왜 결코 정죄함이 없는지에 그 원인을 따지게 되면
그 결과는 또 육의 소욕이 되기 때문이다.

원인 자체가 내게 있을 필요가 없음을 알았다는 뜻이 로마서 8장이다.


자 그럼 왜 원인이 왜 내게 있어야 하는가 하는 집착이 왜 생긴 것일까?

고기를 먹어도 고기 먹고 그 맛을, 그 고기 맛을 모른다면 고기가 개입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중간에 고기가 개입된다. 맛을 볼 수 밖에 없도록 한다.
자 이렇게 되면 좀 더 맛 있는거 거기에 조금 더 더 맛있는 것

그래서 먹음직한 것이라는 구조에 가두어지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쓸데 없는 것들이 중간에 개입해서

왜 피와 바로 직통연결이 아닌 자꾸 점점더 그 반대의 위치에 놓이게 하는 것일까?

보암직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생명나무를 보고 피를 보면 되는데
이미 눈이 밝아진 입장에서는 생명나무가 바로 곁에 있어도 생명나무를 못보고
피가 바로 옆에 있어도 못 본다.

예수님이 아무리 인간 속에 같이 있어도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했다.
있는 것은 그 있는 것도 빼앗겼다 라고 하셨다.

즉 눈이 어두웠던 것인가?
아니다 밝아져서 이다.
밝아져서

눈으로 포착 되지 않는 예수님은
눈이라는 사진기 소유자. 그림 판독기에 해독 판독되지 않는다.
도리어 예수님에 의해 판독 당한자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신다.

나타내심의 여부 이다.

눈이 어두운 소경(부정)
단 한번도 눈 뜬 적 없는 자에게만 보이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A (바리새인),  B (실로암 소경)
A : 아니 우리는 뭐 눈도 없는가? 봐도 모르게?
B : 맞다 봐도 모른다.

A : 넌 좀 빠지고 눈이라는 것이 무능(무기능)한 자는 끼어들지 말고
B : 나 봤거든 !

본 자는 아무도 말릴수 없다.
봤다는 것을 부정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의 부정이다.


눈이 무능한 소경이 봤다면 진짜 본 것이다.
고장난 사진기에 선명하게 찍혀 포착되었다면 진짜 찍힌 것이다.

왜냐하면 그 뒤에 일들이 진짜 사건화 되기 때문이다.
(찍힐 수 없는 사진기에 찍혔으니, 사진기의 기능은 여전히 무능한데 그 무능함을 전체로 찍혀준 그 대상물이 도리어 고장난 사진기를 대상화 했다는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건화 다, 가로지르기, 빗금긋기, 쥐어짜기, 비틀기, 잉여, 비로소 순수 원본이 접점을 우발적으로 발생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성능좋은 뛰어난 기능의 사진기는 복사본만 대량복사할 뿐이다. 기계만 가치성을 교환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눈이라는 기능은 의미 없는 것이다. 생식능력도 마찬가지 이다.)

(요 9:24, 개역)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요 9:25, 개역)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요 9:26, 개역)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요 9:27, 개역)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요 9:28, 개역)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요 9:29, 개역)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요 9:30, 개역)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요 9:31, 개역)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요 9:32, 개역)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 9:33, 개역)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 9:34, 개역)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요 9:35, 개역)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요 9:36,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요 9:3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8, 개역)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요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개역)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건 (귀가 있어도 소용 없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건 (눈이 있어도 소용 없다)

이런 특이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지금 현재도 우발적으로 특이점 곧 응축점으로 군대 군대 펑펑 터진다.
A : 아니다 우리 눈 있다. 그래서 성경 볼 수 있다.
B : 아냐 우리는 눈 없어. 봐도 성경 몰라

A : 그럼 왜 눈이 붙어 있는데? 봐 봐 눈 있는거 보이잖아 눈 만져봐 있지! 있지?
B : 있어도 볼 수 없는 무능한 눈임을 알아라고 준 것이야 ! 그것이 구조요 곧 육에 갇힌, 죄에 갇힌 육체라는 것이야, 죄의 눈이야,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 나무랄 입장이 못되는 우리가 날 때부터 곤고한 자 라는 것이야. 그 필연성은 왜 거부하고, 왜 그 곤고한 저주, 부정은 왜 거부하느냐 말이지. 가리개로 아무리 버텨본들 고인물은 점점더 썩은내 날 뿐이야. 바울이 그 증거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했어. 똥 쳐발랐다는 것이야. 치매 안 걸릴려고 했던 것이 도리어 치매 걸린 현상이라는 것이지. 비정상.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차라리 라는 의미는 부정의 부정, 바닥의 바닥이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부정 속에서 태어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처음자리가 부정)
이제는 이스라엘이 애굽이 되어버렸으니
그 애굽으로부터(애굽이 된 이스라엘) 부정당한 부정함 취급 당하는

누가 봐도 소경이요 본인의 입으로도 소경이라고 하는 자

그 자가 바로 잃어버린 양이다. 곧 예수님 뿐이다.


인간의 지혜란
탐스러운 것들 곧 기능이다. 기술이다. 육체가 영웅으로 또는 하나님으로 취급 받을 수 있는 것들을 내장하고 저장한다. 그래서 숨기고 숨긴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세 번째 시험에서 나온다. 엎드려 절하라 경배 하라는 것이다.
남을 꺽고 이기는 정치와 그로 인한 전쟁 승리는 바로 지혜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쌓고 쌓고 쌓아서 그 지혜를 발휘하고자 고이 고이 축적에 축적
메모에 메모, 기록에 기록, 저장에 저장, 남기고 남기는 것이다.
그 축적된 경험치가 바로 역사 라는 창고이다. 부자다.

그러나 정작 그 유업을 나눌 자가 없다.

놀랍게도 역사는 기업이나 유업이나 생명으로써 즉 잉여로써 나누어 줄 꺼리가 되지 못한다.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약이다 독약, 배설물

(눅 12:13, 개역)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 12:14, 개역)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5,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2:16, 개역)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눅 12:17, 개역)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눅 12:18, 개역)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눅 12:19, 개역)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개역)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1, 개역)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반대로 묵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럴 가치성 여부도 가지지 않는다.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어 찾아보니 구지 마태복음 6장이 아닌 바로 밑에 22절에 이어서 나온다.

(눅 12:22, 개역)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눅 12:23, 개역)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눅 12:24, 개역)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눅 12:25, 개역)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눅 12:26, 개역)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눅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눅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 12:29, 개역)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눅 12:30, 개역)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눅 12:31, 개역)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눅 12:32, 개역)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33, 개역)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 12:34, 개역)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동행이다 함께 하여주심이다.
내어 주심이다.

이것이 바로 두 세계의 차이성으로써 나타나는데
그것을 가시화 시키는 것이 전쟁이라고 했다.

전쟁은 죽음 곧 자기부인의 목적이다. 그래야 특이성이 드러난다.
곧 동행 곧 내어주심이 비로소 드러난다.

그래서 공중 나는 새들도 창고 없이 사는데
그렇게 사니까 염려하지 말라 라고 하시는데
아 그럼 사는 것이구나 라는 것이 그 산다는 것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내일 던질 아궁이에 던질 백합화도 오늘 귀히 입힌다 라는
그 심판성이 특이성이라는 것이다.

자기부인에 동참되는
저들과의 차이성이
곧 창고도 없는
염려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는 동행 당하는 자들이다는 것이다. 공중의 새다. 피조물이다.

괜히 선악에 또 눈 뜨면 결국 엿먹으라는 소리 아니냐 라는 소리다.

맞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영광이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때려 죽어도 그것이 은혜가 될 수 없다. 동행은커녕 버림받는 저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그것이 영광이다고 아 그럼 영광 받기 위해 버림 받아야 하는구나 라는 조건 갖추기가 되면 또 저쪽 김 모 목사 식이다. 또다른 성화론이다.

주의 주 되심에는 우리의 소유성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인데
묵시 운동을 펼치는 바리새인처럼 아 또 그 조건을 갖추면 된다는
또 행함이 또 나온다. 믿음이 없기에
곧 미래에서 소급해서 덮쳐지는 완료가 없기에
지금 현재의 나의 어떤 행위 여부로 자꾸 연결 부합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원인 없는 결과인데 우발성의 사건인데
또 필연화 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쪽에서의 선택인 것이다.
모든 언어는 기호는 선택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선택할 권리 조차도 애초에 없다.

성관계란 없다 라는 말은
남자 라는 것도 주를 위해서
여자 라는 것도 주를 위해서
고자로 혼자 독신으로 산다고손 치더라도 주를 위해서 이다.

모든 우주 만물이 주를 위해서 배치된 구조이다.
천국에 가면 남자 여자 라는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자꾸 생명의 생산 여부를 내 쪽에서 따진다면
결국 인간은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를 따지게 된다.

나에 대해서 눈 떠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 뭐 나에 대해서 눈 이미 떳으니 어쩔수 없겠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눈 떠 본들 소용 없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가능성이 있는 그 조건하에 가능하도록
고때 고때 전부를 거는 생사를 건다.

이빨이 늙어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때가 되기 전까지는 고기를 마음껏 뜯는 가능성을 마음껏 누려 본다.

아니 그렇게 해 본들 어차피 고기 먹는 것이 아니라
옥수수만 먹었다는 것인데

왜 고기 라는 맛이 왜 개입해서 점점 더 맛있는 더욱더 맛있는 것을 찾는가 말이다.

아니 이빨 빠져 고기 못 뜯는 날이 되어도 피는 여전히 공급 된다. 외부에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는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이미 고기 맛을 알아버린 나를 거부 할 수 없기에

그 시뮬라시옹을 거부 할 수 없기에 고기 맛에 밑도 끝도 없는 멈출 수 없는 맛을 찾아 찾는 허상에 뜬구름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물론 고기 맛 아니면 그 다른 대처물이 다양하다.

신도 인간의 입맛에 좌우 되는 식이다.
지식도, 지혜도, 먹고 마시는 의식주도,

이유없다 무조건 바벨탑 세우기를 노아심판의 잔상처럼 이유없이 세우고
천국의 문을 제작하는 성전 세우기 또한 에덴의 잔상처럼 이유없이 손으로 만든다.

믄 짖을 해본들 밑도 끝도 없다. 발악을 한다.
기업도 유업으로도 생명이 아니기에 발악 뿐이다.
생명 아닌 티를 점점 더 낸다.

차라리 (부정의 부정) 소경이였더면
나 생명 아닙니다. 생명은 누구십니까? 내가 그 로다 라고 대답하신 분
그 분만이 나에게 사건(창조)을 벌리신 의미가 되신 비로소 내가 꽃이라 불리게 하신 그 원천이 바로 생명입니다 라고

부정의 부정 자리에서 외치게 되는 것이다.
생명 아닌 저주의 자리에서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남들이 다 가는 생명이라는 그 큰길이 아닌
부정의 부정인 자리인 십자가 라는 좁은 길에서 생명을 보도록 하신다.

씨 뿌리는 비유는 생명이 누구냐 라는 의미이다.

그 생명을 볼려면 곤고한 자리에서 보라는 것이다.

그래야 그 차이성을 알게 된다.

율법이 가입된 이유도 구약의 옛언약을 거쳐서 보도록 하시는 이유도 그러하다.

죄 아래 갇혀서 죄 속에서
물에 빠진(물 위로 걷는 물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물 속에서 보라는 것이다.

눈 뜬 자가 아닌 소경의 자리에서

부정의 부정

그 빈자리에서 누가 그 빈자리 라는 매끄러운 미끄러운 자리를 앉는지?

지나 개나 다 한 번씩 앉다가 쭐끄덕 미끄러진 그 수치의 자리를 누가 앉는지

비로소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비로소 피조물의 자리에서 묻게 되는 창조주의 자리에 앉은 이를 만났을 때

외치는 것이다.


씨 뿌리는 비유는 생명의 부재성의 자리에서 즉 소경의 자리에서

눈 뜬 자들로부터 거부 당하는 부재성으로 오신 분을


비로소 생명은 당신 뿐이군요 라고 무조건 이유없이 30배 60배 100배 임을

생명으로부터 찜 당해서 죽었던 자가 나야 말로 소경인데 눈 뜨게 하신 분이 저분이 생명이다 라고 아니외칠수 없는

반칙의 반칙, 무시험 합격품으로써,(우발성, 가로지르기, 뒤틀기, 매끄러운 빈자리)

모든 눈 있다. 소경 아니다(필연성) 라고 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십자가의 피를 예수님 홀로 증거하신다.


그 증거의 화답으로 찬양이 우발적으로 발생한다. 새창조다.

(막 4:23, 개역)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막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막 4:25, 개역)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것이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 빼앗기는 방식이다.


고장난 사진기 만이 찍은 생명이요.
벙어리 만이 외칠 수 있는 외침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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