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3. 시형제결혼법(율법거룩)에서 시아버지결혼법(십자가거룩)으로 빼내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2011년 6월 3일 금요일 오후 10:02:20 김대식
말씀을 폐하게 하는 거룩 지키기 강박증 집착증 (사람의 유전 : 성화론)과
거룩해질 마음이 추호도 없는 거룩을 부정함으로 들추어내는 십자가라는 부정적인 사랑
(막 7:1, 개역)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막 7:2, 개역)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막 7:3, 개역)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막 7:4, 개역)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막 7:5, 개역)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막 7:6, 개역)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막 7:7, 개역)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8, 개역)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9, 개역)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 7:10, 개역)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막 7:11, 개역)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막 7:12, 개역)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막 7:13, 개역)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 7:14, 개역)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5, 개역)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막 7:16, 개역)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막 7:17, 개역)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막 7: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막 7:19, 개역)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막 7:20, 개역)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21, 개역)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막 7:22, 개역)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막 7:23, 개역)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오늘 본문에 그 당시에 가장 거룩한 자 라고, 거룩을 삶에 실천하는 자 라고 대중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바리새인을 가지고서 예수님께서 거룩과 더러운 부정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성화론자의 삶의 거룩성 또는 새생명의 삶, 열매맺는 삶에 대한 실천생활과 대비해서 거룩과 더러움을 비교하면 되는 겁니다.
일단 바리새인은 거룩을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실천가능한 거룩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가능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성화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인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설명하실까요?
(레 11:44, 개역)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 11:45, 개역)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 1:16, 개역)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비유로 설명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말귀 알아먹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패스워드를 걸어버렸다는 겁니다.
비밀이고 모사이기 때문에 주님이 알려주시는 자만 말귀 알아먹는 겁니다.
그래서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성화와 곧 거룩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거룩의 차이성을
양쪽의 더러움 부정과도 대비해 가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늘 말씀을 나누다가 실컷 설명을 하고 난 뒤에 삑사리 나듯이 내용과 상관없는 말을 곧잘 내뱉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이 모든 관심사 이기 때문에 말씀에 있어서 당연히 튀어나와야할 의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말씀에 이렇게 나오잖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러니 선하게 살아야 한다.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사도바울도 그렇게 말했다 라는 겁니다.
실컷 이야기 하니까 안듣다가 그런말 하니 김빠지지만 오히려 잘 됐다 싶어서 앞의 이야기 했던 것과 연결 시켜서 설명을 했습니다.(이중분절로써 그 질문으로 앞의 것을 바닥뜯기에 가장좋은 겁니다. 역으로 소급해서 설명하면 딱입니다.)
목사들이 설교를 할 때 현실적인 문제인 자본과 연결해서 대비시키면서 이야기 해야 하듯이
왜냐? 자본 자체가 결국 신체와 맞딱드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대비가 결국은 신체와 연결된 입장에서 설명하면 쉽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신체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룩도 결국 신체 문제와 결부된 셈이지요. 누구와 합쳤는가?입니다. 누구의 짝인가?
그래서 대답을 하기를 이스라엘이란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없습니다. 없는데서 생겨난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멜기세덱의 반차에서 나와야 하듯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족보 없는, 유전 없는 약속에서 나오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약속과 짝입니다. 약속의 거룩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이지
이스라엘 자체성의 혼자만의 거룩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만의 거룩 쌓기를 유전이라고 합니다. 유전과 짝이 된 겁니다.
교회가 그러합니다. 만약 교회가 족보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유전화 된 것입니다.
발생적 우발성의 단체가 교회이기에 교회란 역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역사(유전)의 의미를 부여해 본들 의미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이 야곱의 허리에서 나오는데 제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남자는 생명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생명을 낳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여자는 남자의 생식기처럼 돌출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움푹 파여진 홈이 페여져서 굽이 갈려졌듯이 갈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그 갈라진 틈으로 아기가 나오는 겁니다. 생명이 태어나는 겁니다.
항상 말했듯이 갈라졌다 나누어졌다 라는 것은 창조의 원리 곧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창조가 우리가 쉽게 납득이 되는 창조 같으면 지나개나 다 믿겠는데 그 창조라는 생명이 항상 부정성 곧 심판성에서 중거된다는 점에서
악마가 심어버린 선악적인 사고방식과 충돌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여성의 생식기를 음부라고 합니다. 음부라는 것은 지옥 개념으로 자주 쓰이는데 왜 그런고 하니 저주나 심판 받은 것처럼 블랙홀에 빨려들어가기 때문에 빠져나올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여자에게 하와 라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말고 지옥 심판 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되는 것 아닐까요?
문제는 다시는 빠져나올수 없어야 하는데 도리어 아주 아주 신비롭게 생명이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아기 라는 생명을 아담은 처음 본 것입니다.
(아기란 무능합니다. 무능한데 생명이라고 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성숙아로 태어나서 자기가 직접 엄마젖을 찾아가서 먹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인간만이 미숙아로 태어나는 겁니다. 외부에서 물려주지 않으면 곧 바로 죽습니다. 누구와의 결부성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것이 형상이라는 겁니다. 형상 회복이라는 인간의 성화론 운동도 정작 도저히 형상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라는 죄인의 형상을 보여줘야 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니까 독자적인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도 아니요 하나님의 형상도 아니요 버러지 짐승형상인 겁니다.)
그래서 그냥 생명 이라고 붙인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서는 아기 라는 생명이 나올수 없다는 의미에서 대비해서 생명 곧 하와 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분명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가 나왔습니다.
그렇디면 생명이 계속 갈비뼈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갈비뼈에서 나오지 않고
또 남자에게서는 안 나오고 왜? 죄가 가입한 상태가 되다 보니 이제는 생명 단절입니다.
즉 심판입니다. 블랙홀입니다. 음부의 상태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 지옥백성의 상태 부정한자 심판받은자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희망은 곧 약속(희년)인데
뱀의 후손 곧 자손의 번성과 여자의 후손으로서 전쟁에 의해서 약속이 성취 된다는 것이 말씀을 통해서 증거 되고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그 죄로 인한 결과 즉 심판은 심판대로 남자는 종신토록 땅을 갈아서 땀흘리고
여자는 아기를 낳는 고통을 형벌로써 받게 됩니다.
이 심판은 곧 죽음과 결부된 것이고 그 죽음은 곧 음부의 세계와 연관된 겁니다.
어 그런데 막상 여자에게서 그것도 아기 낳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속에서 아기가 태어난 것을 보고서 아담은 약속을 기억한 겁니다. 단순히 아기를 낳은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생명을 낳은 것이 아닙니다.
(혼자만의 독자적인 여자의 아기낳기 기능이 아니라, 누구와 결부되었다는 외부 누구의 개입이다는 겁니다.)
아담은 나누어졌다 라는 의미를 알게 된 겁니다. 창조가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비록 심판 중에 죄와 저주의 형벌 속에 있지만 약속이 개시 되었다는 것을 안 겁니다.
아담은 결국 하나의 그릇이요 통로인 겁니다. 계시 전달자와 같은 긴파이프 통로인 셈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최초의 살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정작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빠져 있습니다. 아니 없습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에 부모로써의 어떤 참관성이 전혀 없는 배제성입니다. 도리어 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살인 사건은 아담이 알게 된 약속의 개입 창조의 개입의 첫 신호탄인 셈입니다.
아니 아기가 나오니까 하와 생명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결과를 실질적으로 보게 된 겁니다. 아니 살인 사건이 왜 생명이라고 붙여졌는가의 결과라니?
이게 제가 말해놓고도 믿겨지는 이야기 입니까? 말도 안되잖아요.
여성의 생식기 자궁의 갈라진 틈에서 생명이 나왔으면 그 아기는 계속 생명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같은 자궁 곧 매트릭스라는 구조에서 또 한명의 생명이 또 나옵니다.
두언약입니다. 여성성이라는 구조에서 즉 두 여자에게서 두 언약이 나오는 겁니다.
이중분절이 되었다는 겁니다. 두 생명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중분절이 됨으로써 하나는 약속 하나는 비약속을 보여주는 하나의 통로로써 창조언약을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창조란 무엇입니까?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거룩이란 무엇입니까?
가인과 아벨 둘 다 저주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둘다 심판 속에 있는 형벌의 상태입니다.
음부의 권세 아래에 있다는 겁니다. 블랙홀의 심판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 블랙홀에서 빠져나오는 방식인 약속이 덮쳐졌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그 블랙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빠져못나오는 것도 억울한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혹시나 빠져나올까봐 아예 적극적으로 죄의 소원이 더욱 겹겹으로 겹쳐져서 아 정녕죽으리라 라는 것이 구체화 된다는 겁니다. 말씀대로 언약대로 약속대로 말이죠.
그러나 정작 누가 죽고 누가 삽니까? 아벨은 죽고 가인은 삽니다.
꺼꾸로죠
그러나 꺼꾸로가 아닙니다. 제대로 된 겁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곽 같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뭐가 선하고 뭐가 악하다 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선악의 방식의 반대가 되면 되는 겁니다.
그 선악의 방식의 반대 라고 하니까? 아 그러면 악하면 되겠네 라고 합니다.
선악 속에 악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악하게 되겠네는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원래 그대로죠.
흔히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니까 행함의 반대말을 안행함 이라고 행하지 않으면 되겠네 라고 또 선악을 주장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언어 곧 기호는 이중분절로써 진행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기적을 예로 들었는데 기적인데 인간들이 기적이라는 기호 문자에 그릇으로써 담는 내용물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적이라는 단어에 담는 내용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차이를 낼려면 앞의 인간들이 사용하는 기적은 확실하게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하는 기적 이라는 그릇도 확 깨뜨려야 합니다.
양쪽 기호의 기적 이라는 단어를 확 깨뜨리니까
기적이라는 내용물이 같아야 하는데 영 딴판의 내용물이 깨어진 기적이라는 기호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런 의미를 이중분절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확대시켜 몸이라는 개념을 대비해 보면
인간의 몸이나 예수님의 몸이나 그 몸이 그 몸 뚱아리 라고 별차이 없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막상 그 몸을 찢어보니
한 쪽 몸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가짜 몸이고 그러니 창조한 적도 없는 몸이고
그래서 무덤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또는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땅에 묻히는 몸이고
몸이 두 몸이다 몸이 다르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을 찢어보니 다시 사는 몸이다는 겁니다.
무덤이 없습니다. 땅에 묻혀져야 하는 몸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몸이다는 겁니다.
몸이 이중분절이 된 겁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통해서 이중분절이 벌어진 것을 보고
육으로는 안타깝겠지만 그러나 영으로는 약속의 성취가 된 것을 보고 기뻐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나누어진 상태 라는 겁니다. 분리 작업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의 차원이 바리새인이나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차원과는 완전 딴판인 겁니다.
결국 인간이 말하는 거룩 또는 성화와
약속(성령:십자가의 영)이 말하는 거룩과 성화는 완전 정반대가 되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인간이 거룩을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그 결과물에 무조건 반대를 하는 식으로 하시니 정반대가 되는 겁니다.
아 그러면 정반대 이니까 이래 이래 하는 인간의 거룩에 반대인 이래 이래 하는 부정을 하면 되겠구나 라고 머리를 굴려도 그 머리 굴린 결과물에 다시 분절로써 사건이 발생이 되면 결국은 성령의 거룩과 반대된 처사만을 벌린 꼴만 나열케 된 헛짓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말귀가 안통하는 겁니다. 소통 단절입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 이라고 하니까
안행함 행하지 않기 로 생각하는 식입니다.
그게 아니라 행함의 반대는 믿음입니다. 안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또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 결과로써 행한다 라는 것인데
이 말을 또 듣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노? 라고 또 행함을 말하고 있으니 제자리에 맴도는 식입니다.
(결국 믿음이 뭔지 모른다는 겁니다. 믿음이 뭔지 모르면 거룩도 모르고 거룩이 뭔지 모르면 죄가 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거룩도 죄도 믿음도 행함도 다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그 빈터를 이유없이 채우는 겁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라고 했을때에
너가 핍박하는 예수 라는 답변과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물음이 짝이 되는 것이 거룩인데
거룩이 없으니 가짜 거룩을 채우는 겁니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나타나서 물을수 있는 외부인의 개입이 없으니까 물음이 발생하지 않고 물음이 없기에 그 빈자리를 안물음으로 채우는 방식이 자기만의 독자적인 거룩 믿음 죄인 십자가 온갖 쓰레기를 다 채우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런 맴도는 인간들의 속내를 들추어 냄으로써 그동안의 거룩을 행했다는 둥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둥 등등이 순 엉터리였음을 드러내십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이란 [행함이 아니다] 라는 의미에서 행함에 대비해서 나온 것입니다. 원인 있는 결과로써의 행함이 원인 없는 결과의 믿음과 대비되는 겁니다.
이 대비 당하는 것을 믿으라 라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까요? 아버지께서 보낸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라는 겁니다.
결국 믿음의 출처는 예수님이고
행함의 출처는 인간이다 라는 지적을 받는 그 차이성을 아는 것이 믿음이 지적해준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래 그래 니 잘낫다. 나는 행할 수밖에 없고 믿음이란 있을수 없고
예수 니는 행함이 아닌 믿음이 있으니
니는 니 대로 나는 내 대로 라는 갈라지자 라고 반발하여서 나누어지는 현상 자체도 믿음 때문에 벌어졌다 라는 겁니다.
사람 완전히 약올리는 식이지요,
그러니 가인은 제사를 잘 드려야해, 못 드리면 안돼 라는 선악이 강박증으로 덮치는 겁니다.
문제는 잘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사를 안 받아버리면 비로소 속에 있던 것이 튀어나옵니다.
그것이 하나님입니다. 속에 있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곧 자기가 투사한 자기 섬기기입니다. 이것이 더러움입니다. 인간의 마음입니다. 자기를 투시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더러움인데 거룩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인간 속의 짝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인간 속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것이 팍 하고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약속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약속(믿음)은 아벨 속에서 아벨을 확 깨뜨리니까? 일단 죽어버렸지 당장은 안 보입니다. 그것을 비밀로 했기에 안보이는데 흐릿하게나마 힌트가 주어지는데 즉 비유 곧 감추어진 은폐성의 증거물이 주어지는데 그것이 아벨의 족보입니다. 뭐뭐 대신에 라는 족보입니다.
나중에 그 아벨 땅콩을 깨어서 뭐가 들어있는고 보니 예수님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안들어 있고 말이죠. 하나님과는 인간들이 친합니다. 자기투사이니까. 그런데 예수님과는 일치성이 단 한 개도 없습니다. 여기서 충돌이 발생하는 겁니다.
결국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셔야 밝혀지는 겁니다. 그 이전 까지는 절대 공개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공개 이전에 인간들의 제사는 모조리 다 가인의 제사에 해당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제사(거룩)는 엉터리로 드려서, 더러운 짖을 해서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 너무 제사를 잘 드려야지 했던, 거룩한 삶을 제대로 살아야지 라고 했던 그 거룩이 도리어 죄의 소원이 덮쳐진 결과이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너무 너무 거룩 너무 너무 깨끗해서 너무 잘 드려서 그것에 도취되었기에
유전화 시켰기에 왜? 다른 정답은 다른 거룩은 없을 정도로 완벽했기에
바로 그것이 악마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 곧 자기투사 라는 겁니다. 이것이 외부의 개입이 없이 상상임신인 겁니다. 상상성화입니다. 인간이 성화론은 바로 상상성화입니다. 자기좋으라고 하는 자기투사성화 자기투시거룩인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멋들어진 무화과나뭇잎이지요. 먹음직 보암직하죠 더군다나 지혜롭게할만큼 탐스럽죠. 탐스럽게 하는 겁니다. 부정성이 없습니다. 부조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상상과 짝이 된 겁니다. 마약을 먹으면 거룩하고 싶다가 꼿혀버리면 밑고 끝도 없이 거룩을 추구하는 겁니다. 한가지가 꼿혀버리니까요. 예로 농구선수가 마약먹으면 농구기술의 최고기술이 저절로 발휘가 됩니다. 그거 한번 맛보면 계속 마약하지요. 왜 운동선수가 약물에 중독될까요? 그 기능이 몇몇배로 증가 되기 때문입니다. 달리기 선수는 더욱더 빨라지듯이 말이죠. 자기가 자기에게 중독시키는 방법은 자기투사로 하나님을 설정하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성화론입니다.
그러니 죄의 힘 곧 선악으로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의 힘을 이기지 못하면 너는 그 선악의 하나님으로부터 포로가 될 터이니 그 힘을 이겨야 벗어나는 선악을 다스리게 된다 라는 겁니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공동)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잘못 먹었다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릴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죄에 굴레를 씌워야 한다."』
(창 4:7, 가톨릭)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창 4:7, 킹흠정) 『네가 잘 행하면 어찌 너를 받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네가 잘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 4:7, 한글킹) 『네가 바르게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시니라.』
(창 4:7, 현대인) 『네가 옳은 일을 했다면 왜 내가 네 예물을 받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이다. 죄가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여도 너는 죄를 이겨야 한다'』
(창 4:7, 현대어) 『네가 잘하였다면 어째서 내가 네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어째서 고개를 들지 못하느냐? 네가 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죄가 네 마음의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다가 급기야는 너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리라.'』
(창 4:7, 쉬운)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좋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할 것이다. 죄는 너를 다스리고 싶어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
결국 두 인간의 행위 또는 행함의 결과로써 이런 얄궂은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덮쳐지니까 거룩이라는 분리 현상 나누어지는 창조 생명의 현상이 벌어졌다 라는 겁니다.
아벨의 죽음도 이해가 안되는 판국에, 왜? 믿음으로 사니까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도리어 아벨의 죽음도 이해 안되는 판국에
도저히 가인의 살아있음도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죄의 소원이 덮쳤다고 하니까 말이죠.
아무리 번식해도 이것은 완전 선악의 강박증에 그것도 자자손손 집착한 모습이 실제로 나오니까 말이죠. 라멕의 찬양을 보면 가인은 벌이 칠배 이지만 자신은 77배 라고 하니까 웃기죠 웃기잖아 그러나 정작 우리 모습이 이렇다 라는 겁니다. 날 건드리는 놈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 다 죽여 버리겠어 쪼포 쪼포 쪼포 라는 것은 결국 일맥상통하다는 겁니다.
결국 한 쪽 아벨은 거룩이 덮쳐져서 가인으로부터 빼내기 마이너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가인에게서 빼내시는 방식입니다.
어떻게 저런 제사의 방식에서 빼내시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윗이라고 했습니다.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데 그것을 드린 사고방식에서 주님이 빼내시는 방식이 즉 나누시는 거룩이 덜치는 방식이 바로
상한심령 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유일한 거룩인데 왜냐하면 모세로부터 내려온 검증된 기적을 추구하니까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더더욱 악하다 음란하다 라고 예수님만 유일하게 악하고 음란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준에서는 무조건 악하니까 말이죠.)
그런 기적에서 빼내시는 방식 이중분절의 방식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캬 이겁니다. 이것이 기준이였던 겁니다. 요나의 표적의 입장에서 보면 악한게 음란한게 더러운게 맞습니다. 번제와 제사는 인애와 자비의 입장에서는 거룩한게 아니라 더러운 겁니다.)
결국 요나의 표적이 덮치치 않는 이상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믿음이고 (믿음의 주체는 예수님이고, 주 예수 그리스도)
그것을 저지하고 막고 훼방하는 방식이 바로 행함 이라는 겁니다.(행함의 주체는 믿을 구석은 오로지 나 뿐이다. 구원도 따내는 방식도 거룩도 남이 거룩실천이 아닌 내가 실천해야할 내 숙제로 보는)
이 양 쪽으로 갈라서 나누는 방식이 바로 창조가 빗금을 그어서 즉 쪼개서 홈이 파이고 그 홈으로 인해서 양 쪽이 갈라져서 이 쪽과 저쪽으로 나누어지는 현상이 바로 거룩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말은 나누어진 결과물이다 라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거룩을 실행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냥 거룩의 결과만을 통보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자궁은 갈라진 틈에서 갈라진 나누어짐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생명이 나오듯이 생명이 나옴으로써 거룩이 덮쳐지는 겁니다. 이중분절입니다. 이중분절이란 자체적인 분절이 아니라 그것은 딱 한번 밖에 갈라지지 않고 분절 뿐이고 더 이상 갈라지지 않는 이중분절은 없는거져. 결국 누구와의 짝이 되는 것으로 이중분절은 외부의 개입으로 무한대로 갈라지는 겁니다.
그러면 아기 낳으면 다 거룩한 겁니까? 아니죠. 도리어 부정하다고 남자보다 2배나 더 부정한 자로 취급하지요. 그것은 거룩이 나누심에 의해서 거룩함을 당하는 즉 지적받는 결과이니 도리어 기뻐해야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조차도 이해를 못하다 보니(물론 인지를 할 수 있는 그런 지식이 발달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불도져처럼 진행됩니다. 인간이란 그저 통로일 뿐입니다. 땅콩 껍데기. 그럼 오늘날 현대 시대의 높은교육과 지식발달로 인해서 그럼 인지가 잘 될까요? 도리어 더 안믿겨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아라는 주체는 과거 보다 더 또렷해졌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성화론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똑같이 처해있는 문제이며 더욱더 심각합니다. 그 당시만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은 더욱더 몇천배로 기적을 바라는 악하고 음란한세대가 더욱더 심층으로써 깊어진 겁니다. 거룩도 더 합니다. 오늘날 성화론자들을 보며는 완전중독입니다. 마약의 몇배나 강한 자기를 투사하니 하나님 같이 된 정도가 아니라 나만 하나님이다. 나는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야 현대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겁니다. )
그 당시의 사람들은 더 심각할 겁니다. 그런다고 약속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어느정도로 양보치 않는고 하니 아예 불임여성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누가? 믿음이 말이죠.(믿음은 인격이 아닌데 누가 라고 붙이고 정작 누구 라는 인격은 운운하는 인간을 믿음은 사물 또는 추상으로 취급해 버리는 겁니다.)
아니 불임여성이 되고 싶어서 불임여성이 되나요?
불임여성이다는 말은 곧 순풍순풍 임신여성의 대비가 된다는 겁니다. 이중분절인 셈이지요.
그러니 또 가인과 아벨의 상황이 또 재현이 되는 겁니다.
덮쳐져서 말이죠.
왜? 이스라엘 속에서도 또 가인의 제사를 여전히 우기는 자들이 있기에
거기에 대비해서 아벨의 약속을 개입 시키는 겁니다.
아이를 잘 낳는 여자가 있으니 상대적으로 너는 저주 받았어
생산이 없고 창조가 없는데 니가 무슨 여자냐? 인간 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
나는 여자다. 아이를 낳는 여자다. 라고 한나를 괴롭히고 훼방하는 브린나가 등장해야 하듯이
이스마엘을 낳는 하갈이라는 여자가 등장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 사래의 불임을 더더욱 확장 시키는 겁니다. 그 부정성을 확장시키는 겁니다. 바닥을 치기 위해서 말이죠.
막상 바닥을 뜯어보니까 이스마엘에게서는 약속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톡 하고 깨뜨려서 땅콩 껍질을 벗겨보니 즉 바닥을 쳐보니 약속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겁니다. 회수 하는 방식이 바로 불임여성이였던 겁니다. 할례였던 겁니다.
멜기세덱 허리에서 아브라함이 나오고 아브라함 허리에서 이삭 야곱 레위까지 이어지죠. 무능한 잉여다 라는 겁니다. (그 무능한 잉여에게서 거룩이 나오고 그 거룩으로 거룩성을 유지하는 겁니다. 대제사장 책임제라는 것은 죄를 담당한다는 겁니다. 대신 말이죠. 책임제)
특히 야곱을 허리를 퍽 하고 깨뜨리니 이스라엘이 쏙 하고 그 허리 갈라진 틈에서 튀어 나오는 겁니다.
나누어져서 거룩이 덮쳐서 쪼개어져서 나온 것이다 해서 거룩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원인 없는 결과를 율법을 지켜서 지킨 나를 내세우게 되니
도리어 죄의 소원이 덮친 꼴입니다.
그럼 언제 그 속의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고 하니 예수님이 오시기 까지는 절대 안 벗겨지는 겁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좀 설명을 해야 합니다.
야곱의 허리를 똑 하고 깨뜨리니가 없었던 민족이 태어난 겁니다.
허리란 힘의 원천입니다. 곧 생식기 주변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의 별명이 뭔고 하니 바로 하나님의 군대 라는 겁니다.
신을 이기는 자 라는 별명입니다.
아까 말한 하나님을 이기는 자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을(선악)
무조건 반대하는 약속으로 인해 태어난 즉 결성이 된 군대 라는 겁니다.
결국 군대란 상대적인 마귀 라는 군대의 대립적인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마귀 보란 듯이 졸지에 생겨난 존재 라는 겁니다.
신부도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라는 신부는 마귀 보란 듯이 등장한 겁니다.
그래서 마귀 곧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라고
아예 약을 올려요 약빨이 잔뜩 오르도록 말이죠 보란 듯이 상대적인 의미로써 대비시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거룩이라고 하는 나누이시는 창조의 생명의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심판 속에서 말이죠. 즉 부정성 부조리입니다.
그래서 나누이시는 두패로 쪼개는 방식이 또 빼내시는 방식이 불임이요 부정성이요 심판성이요 종말성이요 바닥의 바닥 부정의 부정의 방식의 이중분절이다는 겁니다.
참 또 빼먹을뻔 했네요
결국 이스라엘은 마귀를 상대로 한 군대인데
아니 웃기는 것은 군대면 군대 다워야 하는데 힘없는 군대입니다.
힘이 없는데 무슨 군대 입니까? 별명은 그럴싸 하게 군대 라는 군인 이라는 멋진 표현으로 붙여졌지만 마치 불임여성처럼
할례를 반드시 해서 전쟁에 나갑니다.
(할례는 생식기 기능을 짤라내는 삭제 시키는 분리 시키는 거룩이 임해 버립니다.
힘의 원천이 날라가버립니다. 생식능력 창조능력이 사라지는 무능하게 되는 겁니다.
남녀 성기 불능자로써 무능한자로 죽은자로 아예 없는자로 만드는 겁니다. 이 없음을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 바로 거룩이다는 겁니다. 처음자리로 되돌려 버리니까요 넌 힘이 필요 없어)
이것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차이내고 나누이시는 차이성 나누임이라는 의미입니다.
저쪽은 힘을 의지하고
이 쪽은 그 힘의 단절로써 전쟁에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니 게임이 되겠냐 말이죠.
어 그런데 게임이 됩니다. 전쟁에서 승승장구 하더라 말이죠,
참으로 희한한 전쟁인 겁니다. 전쟁에서 이길 요건이 전혀 없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래 이래 작전을 잘했기에 그 원인의 결과로써 전쟁에서 승승장구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이긴 상태여서 승리를 주서 먹듯이 아무 힘도 안들이고 이겼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전쟁이라는 겁니다, 행함이 아닌 믿음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행함이 가입이 되어버리면 거룩한 전쟁은 깨어지는 겁니다.
결국 적군의 행동결과로써의 반대되는 결과로써의 상대적인 승패가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거룩의 상태로써 승패가 좌우가 된다는 겁니다.
그 거룩의 상태란 거룩을 지키는 개념이 아니라. 지킨다 라는 것도 이중분절을 해야지요.
거룩의 덮침에 거부냐 안거부냐 라는 겁니다.
할례를 한 사람이라도 안 했다면 무조건 지는 겁니다.
정말 정말 참으로 희한한 기가막히고 코가막히는 전쟁인 겁니다.
내가 할례해도 소용 없습니다.
남이 안하면 지는 겁니다.
내가 백날 말씀 지켰다는둥 행했다는 둥 소용없습니다.
딱 한 사람이 그것도 의도적인게 아니라. 무의식 중에 못하면 무조건 지는 겁니다.
즉 개인적인 거룩행함은 의미가 없습니다. 집단성입니다. 한 사람 어기면 다 어긴 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부조리가 과연 이스라엘에서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실행 된 적이 있을까요?
그래서 어쩔수 없는 방책은 개인 거룩생활입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의미 자체가 분파된 갈라진 형태입니다. 그러니 그 자체로 비거룩인데 거룩을 완벽하게 추구한다는 자체가 이미 모순입니다. 집단은 비거룩한데 혼자로는 또는 당파로는 깨끗하다고 하니 이스라엘 전체를 보고 있는 예수님은 뭐가 되나요? 그래서 죽여버리는 겁니다. 전체의 죄악을 감당하시고자 십자가를 즉 거룩을 추구하시는 분을 말이죠. 대제사장 책임제 말이죠.
이런 말도 안되는 거룩을 주님은 무조건 이유없이 불도져로 밀어붙입니다.
이게 무슨 멋들어진 군인 이라는 표현을 쓸수가 있겠습니까?
힘 없고 빽없고 힘 도리어 빼내는 것도 모잘라서 말도안되는 거룩을 밀어붙이니
그렇다고 시키는대로 안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빼도박도 못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괜히 됐어 괜히 됐어 뾰로롱
이것은 저들의 힘의 사고방식에 무조건 반대라는 의미인 겁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죠.
여리고성 싸움이 대표적입니다. (아이성에서 대패 하죠.)
아니 기드온 전쟁이 더 쉽겠네요.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멋들어진 표현으로 적들을 향해 사기를 칩니다.
칼이 없거든요.
횃불 항아리 나팔 뿐입니다.
아니 전쟁하는데 칼을 들어야지 이게 무슨 짖입니까?
이것을 거룩 이라고 설명하면 말귀 알아먹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즉 사람 몇이 아닌, 아예 있는 사람도 못 알아먹도록 하겠다는 심뽀입니다.
그것도 뒷걸음질 합니다. 아주 가관입니다. 가관
할례전쟁은 저쪽이 힘으로 전쟁하면 일부러 어리석음으로 전쟁한다는 겁니다.
젖먹이 전쟁이라는 의미가 이런 의미입니다.
(시 8:2, 개역)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 11:20, 개역)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1, 개역)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 11:22,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어린아이란 무능하다는 겁니다. 어른은 상대적으로 기능이 있다 유능하다는 겁니다. 대비시키는 나누이는 방식, 빼내시는 방식, 차이내는 방식이 바로 거룩한 전쟁이다 라는 겁니다. 천국전쟁 천국의 침노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희한한 별명 하나님을 이긴 자 라는 하나님의 군대인데
인간들의 신이라는 신은 모조리 이스라엘 앞에서는 무조건 지도록 되어 있다 라는 이미 승리한 자로써의 이스라엘인데 그 전쟁이 희한하게 전쟁을 하는데 기존의 어떤 전쟁기술도 아닌 희한한고 알수 없고 도저히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전쟁을 하는데 그것이 거룩이다 라는 겁니다. 나누이는 방식입니다.
자 그럼 남자가 생명 곧 거룩 곧 나누이고 빼내시고 차이를 내는 방식은 바로 할례고
여성에게서는 모든 여자가 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자궁은 있으니까 여자에게서 다시 여자로 분열 시키는 차이내고 나누이는 창조의 생명의 방식은 불임의 방식이였습니다.
둘다 생식기로써 생명에 무능한자로 죽은자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생산성에, 생성성에, 생명성에, 창조성에 무능한 도리어 심판성을 가득 안은 자이다는 겁니다.
부정하다는 겁니다.
어떤 누가 죽은자를 찾는다고 하고서는 정작 자신은 단 한번도 죽은자가 되어본적 없고 도리거 그 표현으로써 인기를 끌고 자기도 흡족해서 그것을 아직까지도 유지할려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유전입니다 유전
그렇다고 저도 죽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죽은자란 죽은자라고 자기 스스로 말하는 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자입니다. 예수님 뿐입니다. 이중분절 곧 인자입니다.
(인자란 사람으로부터 늘 훼방받습니다. 아니 훼방 받는 짖만 골라서 합니다. 그러나 그 인자는 성령을 곧 바로 연결해 버립니다. 그러니 성령훼방자는 사함이 없는 겁니다. 이중분절이기에 인자는 결국 미끼처럼 성령에게 일러바칠려고 온 겁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선지자가 아예 부정함 당할려고 왔듯이 미끼로서 일러바치는 고자질하는 존재로서 오는 겁니다. 그 노선에 예수님도 인자로써 오시는 겁니다.)
남은자를 찾습니다 라고 해놓고서는 그렇게 말한 남은자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자가 진짜 남은자입니다. 쌍둥이 권법입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뿐입니다.
가인의 제사에서 [참 제사를 잘 드린자를 찾습니다]. [더 나은 제사를 찾습니다] 라고 해놓고서는 그렇게 말한 더 나은 제사를 드린자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자가 바로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자입니다. 예수님 뿐입니다. 아벨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결탁이 되는 커플을 이루는 겁니다. 연합 곧 세례인 겁니다. 성령의 개입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부정성의 십자가입니다.
거룩한 자를 찾습니다 라고 구호를 외치는 그 거룩한자의 손에서 죽는 자가 바로 거룩한 자입니다. 예수님 뿐입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차이내고 나누이는 방식입니다.
인간이 차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기껏 해석하는 눈에 파당짖는 정치성 뿐입니다. 최종적으로 그 정치는 힘으로써 나타납니다. 힘으로 눌러버리면 차이와 나누임은 종결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정치성은 그 힘의 정치성에서 빼내는 정치입니다. 인간들의 장난이 정치인데 거기에 더 장난에 장난을 치시는 겁니다. 빼내기 로써 말입니다. 거시에 반대되는 미시로써 말이죠. 그런데 또 인간이 미시를 한다고 하면 거시가 되어버립니다. 미시란 예수님만 하시는 겁니다. 노무현이가 개혁주의를 추구했고 소박한 이스라엘을 꿈꾸웠던 가룟유다도 성화론을 추구한 겁니다. 결국 자살입니다. 자살 조차도 거시적으로 하는게 인간입니다. 미시 적인 자살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말귀를 못알아먹는 겁니다.
얼마전에 살펴본 요한을 죽이는 방식이 그러합니다.
문제는 그 죽음에 예수님이 뛰어드는 겁니다. 결국 요한에게 덮쳐지는 겁니다. 포개어 지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인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덮쳐주시거나 포개어주지 않는 이상은 다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항상 어리석은 무능의 방식입니다. 십자가 방식 뿐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길게 설명해 놓고 이제야 본문 들어갑니다.
거룩의 방식은 십자가 뿐입니다. 다른 통로의 거룩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거룩을 처음 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나무에 달인 자 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자 이다 라는 그 십자가를 질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거룩해 질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거룩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 소원이 덮쳐버렸는데 그 거룩을 대신할 가짜 거룩을 취하는 방식이 바로
도리어 예수님에게 걸려든 거룩에 걸려들어서 나누어지고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방식을 취하더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거룩과 더러움의 해석과
예수님의 거룩과 더러움의 해석이 차이가 나버립니다.
바리새인의 거룩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하는 손 씻기
더러움은 예수 당신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쫒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다. 라는 겁니다.
에수님의 거룩은 장로들의 유전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구출하기 빼내기
즉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 준수를 차이내기 저들은 합치기 인데 예수님은 나누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더러움은 장로들의 유전을 지킬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이 말도 안되는 기준에 반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언제 그랬냐? 언제 버렸냐?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억지를 부릴려면 좀 제대로 부려라 무조건 뒤짚어 씌우지 말고
라는 반발에
예수님은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듭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이 저마다 다 그렇게 하고 있는 진짜 말 그대로 습관화 된 장로들의 유전을 당연시 하면서 지키고 있기 때문인데 그것이 아주 당당하기에 장로들의 유전을 안지킨다고 지적을 했는데 그 법이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딱 걸린 겁니다. 마치 율법에 의해 돌삐 들은 남자들이 예수님에게 제대로 걸려들어서 딱에 삑사리언어를 쓰니가 하나 둘 씩 돌삐 내려놓고 한 놈(남자)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돌삐를 드는 그들의 습관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빼내시기로써 나누이는 것이 거룩 곧 창조입니다. 여인아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 라고 말이죠.
자 그럼 그 예가 그 습관이 오늘 본문에서 나옵니다.
또 하나님의 게명을 저버리는 행동이 뭐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저들에게서 탈출 구원시키는 방식입니다. 그게 뭘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막 7:7, 개역)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8, 개역)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 7:9, 개역)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 7:10, 개역)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막 7:11, 개역)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막 7:12, 개역)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막 7:13, 개역)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 7:11, 새번역)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막 7:11, 공동) 『너희는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해드려야 할 것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라는 뜻으로 '코르반'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막 7:12, 공동)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막 7:11, 가톨릭)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막 7:11, 쉬운) 『그러나 너희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드리려던 것이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다'고 하면 그만이라고 한다.』
(막 7:11, 킹흠정) 『너희는 이르기를, 사람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무엇이든 내가 드려 부모님을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예물이 되었나이다 하기만 하면 그는 의무를 면제받으리라, 하고』
(막 7:11, 한글킹)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나로 인하여 유익을 받게 될 것은 무엇이든지 코르반, 즉 예물이라고 하면 그만이라고 해서』
(막 7:11, 현대인) 『그런데 너희는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고르반', 곧 `하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하고 말하기만 하면』
(막 7:11, 현대어) 『그런데 너희는 부모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부모님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진정으로 부모에게 아무 것도 해드리지 못하게 하고 있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계명 곧 거룩을 장로들의 유전에서 탈출시키는 빼내시는 방식입니다.
(막 7:13, 개역)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 7:14, 개역)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막 7:15, 개역)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막 7:16, 개역)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막 7:17, 개역)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그리고 더러움에 대해서 이야기 하십니다. 사람의 입 밖에서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더럽게 하지 못한다 절대로 더럽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에 들어가지 않고 배에 들어가서 뒷간으로 나오기 때문에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
그래서 이 두 개의 설명 곧 하나님 계명을 곧 거룩을 장로들의 유전으로부터 구원 탈출 빼내기 하시는 것과 더러움은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모든 악이 나온다 라는 것이 믄 말인지 어려워서 제자들이 다시 설명을 요청하는데
정작 더러움은 사람의 안에서, 속에서 나오는, 마음을 거쳐서 나오는 것은 더럽다. 모든 악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안과 밖의 경계선의 기준 설정에 인간과 정반대이다는 겁니다. 외부의 더러운 요소가 들어오면 그것을 씻는 방식으로써의 거룩을 인간은 거룩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입니다. 그런 기준이라면 인간 자체가 거룩하다 깨끗하다 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 바리새인 아니 인간의 주장에 예수님은 반대를 하고
정작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은 무조건 다 깨끗하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반발은 아니 더러운 것은 더럽다 라고 인간은 주장하는데
왜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주장을 더럽다고 하시는고 하니 인간 자체가 이미 더럽다 라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외부적인 요인으로써 더럽다 라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더럽다 라는 겁니다.
마치 개그맨 남하당 남자는 하늘이다 라는 남하당 대표가 여자가 거룩이라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더럽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지 무지 억지지요. 억지. 부조리
이 이야기를 구약에서 힌트로 삼으면
다윗 이야기도 그러합니다만
(율법 지키겠다는 자체가 더럽다 라는 겁니다. 성화 운운한다는 자체가 음란하고 세속적이다는 겁니다. 번제 제사를 운운한다는 자체가 심판이다는 증거입니다. 기적을 바란다는 자체가 악하고 음란하다 라는 겁니다. 기적 바라는 것 자체가 말이죠. 계명 지겠다는 자체가 이미 계명을 저버리고 말씀을 폐할려고 하는 유전을 따른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용서 7번 하겠다는 자체가 지 주제도 모르고 도리어 490번 남 용서가 아니라 너나 용서 받으세요 라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뭘 드리겠다고? 너나 좀 받으라 참으로 기가막히고 코가막힌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드린바 되었으니 할 일 다했다 라는 취지가 도리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려는 짖만 골라서 했다 라는 취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효도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다고 하나님께 드린바 되는 삶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이미 악하기 때문에 계명을 지킬려는 그 자체가 이미 계명을 어겼다는 겁니다. 계명은 그것을 알려주는데 말이죠. 넌 더러워 넌 이미 더럽다니깐? 그런데 뭐 거룩한 일을 지키겠다고? 그러니까 더럽지 라는 겁니다. 말장난 치는 화용론처럼 듣기는 겁니다. 화용론 맞나? 하여튼 그거?)
시아버지 유다를 예로 들면
그는 약속을 마치 유전처럼 생각했습니다 마치 혈통 이스라엘의 특징인 선민사상처럼 말이죠.
(사실은 유다는 절대로 유전처럼 생각 안합니다. 믿음으로 생각하니까 더더욱 유전이 된 거죠. 사실상 우리 모두가 다 이렇다는 겁니다. 결국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외부의 개입 곧 짝이 와야 하는 겁니다.)
자기는 이유 없이 그냥 깨끗한 겁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죽자 시동생 둘째는 맏며느리에게 줘서 시형제 결혼법을 지킵니다. 약속이라는 거룩 차원이 아니라는 것은 그 뒤에 둘째가 죽자 막내까지 죽을까 싶어서 못주는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마치 다윗이 율법적으로 4배나 갚으라 라고 법을 제대로 적용하고 그 나쁜놈을 심판하라 그것이 율법의 의도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는 그게 바로 너다. 너가 죽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율법 좋아하시네 율법 운운하니 너가 바로 범죄자 이다 라는 겁니다. 율법 곧 심판을 적용할 대상은 남이 아니라 그렇게 심판을 운운하는 너가 바로 심판대상이다는 겁니다.)
오난의 악함은 그 뿌리가 바로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나온 것임을 역추적해서
아무리 봐도 다말 며느리가 더럽다 왜 출신자체가 개같은 이방여자 이니까 상대적으로 나는 이스라엘 출신이니까 라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한 전쟁처럼 붙이십니다. 붙이시고 빼내시고
뭘 빼낼까요? 안과 밖을 뒤짚어 엎어버립니다.
내 아들 둘이 죽은 이유도 저 더러운 여자 때문일 거야 라는 겁니다.
(추호도 자신의 악함과는 무관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그것이, 이방여자 라는 것이 하나의 빌미가 되어서 자신의 악함을 전가 시키는데 유리하게 작용한 겁니다. 여기에 일방적으로 다말은 당할 수 밖에 없는 무능한 상태가 되고
그래서 시형제 결혼법으로 인해 구제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선민사상 약속을 안다면 이 상황에 도리어 딱 맞으니까 더더욱 그러해야 하는데
역으로 자식들의 악함을 덮는 계기로 삼고 자신도 무죄함을 도리어 다말이라는 이방여자에게 딱 뒤짚어 씌우기에 가장 좋기 때문에 딱 기가막힌 찬스가 되어서 뒤짚어 씌웁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 억울한 누명을 쓴 다말을 오해를 풀도록 서로 서로 좋게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오해하도록 반드시 죽음의 순간까지 몰아간다는 겁니다. 이 죽음의 순간까지 몰아가버리는 그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나요? 말로 하면 다 되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러면 갈라지지 않습니다. 차이내고 빼내고 나누이는 창조가 발휘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심판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래야 창조가 되는 겁니다. - 되기가 되는 겁니다.
다말이 중요한게 아니라 유다가 중요한 겁니다. 유다를 사랑하는 방식이 심판하는 것이 사랑하는 겁니다. 그 지혜로움 속에서 빼내어 어리석음 부정하고 더러운 다말에게 접붙임하는 겁니다. 부정한 부조리(십자가: 도장 도장끈 지팡이 = 불륜) 자에게 접붙이는 겁니다.
다말은 이중분절로써 태어난 존재입니다. 행해서 지켜서가 아니라 말이죠. 유다의 행동이 저절로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니 단순히 이웃사랑차원에서 약자보호법에서 약속을 곧 율법을 곧 거룩을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즉 시형제 결혼법 지키세요 약자를 보호하세요 이웃을 사랑하세요 라고 율법 거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형제 결혼법을 쪼개어서 더 나은 이중분절로써 시형제가 아닌 시아버지 결혼법으로 아예 목숨을 걸어버립니다. 시형제는 불륜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불륜이 됩니다. 시형제결혼법은 다말 자신이 약자가 되는 방식입니다. 율법에 거슬리지 않습니다. 율법을 가로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아버지 결혼법은 다말이 약자가 아니라 유다가 약자가 되는 겁니다. 이웃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과연 시아버지 유다가 그것을 용납할까요? 베드로가 주여 절대로 가시면 안됩니다 라고 십자가에 비로소 죽여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지옥행을 용납할까요? 상상계가 다 깨어지는데? 그래서 보호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 곧 상상계 우상을 생각하는 구나 그거 이중분절 쪼개어 버리겠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쪽에서 사랑하겠다 라는 것은 파토가 납니다. 꼬끼오 부정 3번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사랑이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3번입니다. 여디디야입니다. 결국 율법 외에 한 의가 덮쳐져서 이중분절이 나타나는 것이 거룩입니다. 시형제결혼법이 거룩이 아니라 시아버지결혼법이 거룩이다는 겁니다.
거룩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너가 거룩의 대상에 거룩이 덮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중분절이 된 의미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또 붙잡아서 일체화 시키니까 이중분절 시켜버리는 겁니다.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자꾸 주체가 될려고 하니까 말이죠.
시형제결혼법에 그 모호한 법에 짝으로 접붙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혼케 만들고 시아버지 결혼법 곧 미흡하고 모호한 의문성이 없는 또렷한 사랑에 접붙이는 겁니다. 그것만이 야곱의 죽음과 결탁이 되는 겁니다. 죄와 피의 결합 짝을 이루는 겁니다. 창녀가 되어서라도 결합을 하는 겁니다. 시아버지 결혼법 완성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이미 율법을 다 다 모두다 이룬 겁니다. 외부의 개입 문제입니다. 내부의 자가발동 문제가 아니라 말이죠.
다윗을 번제나 제사에 접붙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빼내기 위해서 죽은자 꺽은뼈 상한심령에 접붙이는 겁니다. 그래야 죄의 소원에서 건져내는 거죠. 인애와 자비에 접붙입니다. 짝이 됩니다.
고르반 이라고 외치면 그것은 나는 하나님께 바친바 되었습니다. 하나님게 드렸거든요? 그러니 부모님께 드릴 것 없네요 라고 한다는 자체가 너무 너무 제사를 잘 드리고 있으니 나는 문제 없다 라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것 자체가 악하다 라는 겁니다. 음란하다 라는 겁니다. 사실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빼내시기를 주님은 딴제사로 딴 몸으로 딴 거룩으로 하시는 겁니다. 도저히 거룩 같아 보이지 않는 싫어버린바의 모습으로 말이죠.
이것이 가인의 제사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행함입니다. 행함의 주체는 나이고 나로 출발해서 하나님께 드린바 되면 되었다는 식이니 나로 귀착 도착 종결이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의식에서의 거룩 개념입니다. 거룩 하냐 못하냐 라는 것도 나의 숙제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거룩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거룩의 주체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거룩이 덮쳐지면 예수님과 짝이 되는데 어떤 짝 커플이 되는고 하니
어리석은 부정한 십자가로써 연합되는 할례되는 세례되는 짝이 된다는 겁니다.
(시형제 결혼법도 결혼 개념 즉 짝 커플 개념이고, 저번에 말한 여자는 두 번 결혼한다는 의미로써 글을 적었습니다. 전남편 율법과 새 남편 예수님 곧 율법 외에 한 의와 차이성 갈라짐 나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반드시 전 남편과 이혼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전남편으로부터 장악 당한 입장에서 이혼이라니 얼토당토 않지요 전남편이 죽는 무효화 되는 입장 뿐입니다. 그것이 새남편의 등장 뿐이다는 겁니다. 즉 이중분절입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넣듯이 말이죠. 결국 결혼 개념은 인간 좋으라는 취지가 아니라. 이중분절의 의미로써 십자가와의 연합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는 짝이 없습니다. 자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거기에 들러리로 하나님이 받아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가 투사시키고 자기가 조작한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씀 그대로 조작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놀랍게도 그런 자신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의 들러리인 하나님이 바로 가짜요 참이스라엘 곧 예수님으로 부터의 공격대상인 적이 되는 겁니다. 분리 대상이 되는 겁니다. 나누이는 두 패로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 사랑이 바로 내어주사 라는 죽음입니다.
결국 인간의 율법지키기는 혼자만의 마일리지 쌓기입니다. 사랑도 쌓기요 다 쌓기입니다. 그 결과는 자기자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율법지키기 곧 믿음은 사랑은
짝이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즉 율법 안 지킨 것이 없이 다 이루었기에 빠뜨린 것이라던가? 부족하다는 것이던가? 미흡한 것들이 일체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율법 지키기는 마일리지 쌓기 라는 혼자놀이가 되기 때문에 남이라는 짝이 없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곧 중독이 됩니다. 모든 중독은 독자성을 띤 겁니다.
왜 종교꾼이라고 욕하는 고 하니 거룩 조차도 죄인과 결부된 입장에서 거룩의 의미가 나와야 하는데 자기혼자만의 깨끗한 짖을 하게 되니까 그것 자체가 중독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일종의 게임이요 마약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전 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나누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빼내기도 없습니다.
거룩을 죄인을 빼내이고, 두 패로 나누이고, 차이내고, 분리시키고, 라는 차원에서 거룩을 실천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성화론의 문제점(개혁주의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정작 성화가 되었다면 그 성화된 자는 타인의 부정함을 잔뜩 뒤짚어 씌움 당해서
욕 먹는 부정한 자, 불임여성처럼 저주받은자. 할례인간처럼 고자, 무능한자. 잘믿는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자 등등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도 자신의 죄가 아닌 타인의 남의 죄를 몽땅 뒤짚어 씌움당하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성화 뿐입니다. 그런 억울함을 3초 2초 격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 나는 거룩한 자가 될 수 없는 죄인이구나 도리어 이런 죄인에게 거룩으로써 나의 모든 죄악을 대신 감당하시고자 아들을 내어주시는 그 사랑이 거룩이구나 라고 거룩을 쳐다보는 것이
거룩과 짝이 되는 겁니다. 율법이란 우리보고 지키라고 준게 아닙니다.
누가 지키고 다 완성했는가를 보라고 준 겁니다.
여기에 마귀가 어떻게 율법을 활용하는지 거룩을 활용하는지를 그 차이성까지
나누이는 창조성을 당함으로써 우리는 그 분리 속에서
그 빼내임 속에서 거룩이 덮쳐져서 차이를 내는 무능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 어리석은 지혜로 인해 거룩이 거룩 속에서 뽑아내는 이중분절로써 거룩임을 보게 되는 겁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레위기는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으로 나누이는 방식이 굽이 갈라졌다라든가 등등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심판성을 곧 부정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정작 정결한 짐승은 그 부정성 곧 심판성을 뒤짚어 씌여져서 증거하는 입장이고
부정한 짐승은 그 부정성 심판성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입장에서 부정한 짐승인 겁니다.
굽이 있다는 것은 신발입니다. 땅과 맨살이 닿지 않는 신발이 있다 분리 나누어짐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땅에서 떨어져서 떠나야 할 자이다는 겁니다. 신발 신어라.
굽이 갈라짐은 일종의 신발이요 빨리 달릴수 있는 이 땅에서의 방랑자 객이 된
이 땅에 머리 둘곳 없는 나그네의 모습입니다. 물고기로 치면 비늘이 있는 빨리 빨리 퍼뜩 퍼뜩 떠나야 할 자들이다는 겁니다. 분리 된다. 심판한다. 애굽을 빨리 뜨자. 허리에 띠를 띠라
그리고 되새김질은 밴또 도시락입니다. 나그네이다는 겁니다. 급히 먹어라
즉 이 세가지 요건은 출애굽의 요건입니다.
그럼 세가지 조건에 부합되면 즉 율법 지키면 될까요? 여기에 최종적인 바닥 뜯기인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결합이 되어야 합니다. 즉 죽음입니다. 피입니다. 부정함입니다.
너희가 아니라 내가 사랑해서 뽑아낸다. 갈라지게 한다. 나누이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입니다. 왜? 거리낄까요? 우리 손으로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겁니다. 왜요? 전혀 지혜롭게 할 만한 힘되고 자랑스럽고 긍정적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부끄 부끄 부끄 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결탁시킵니다. 피와 죄인을 하나로 묶어서
환자를 부르러 온 의사요
죄인을 부르러 온 구원자 의인이요.
부정한 자를 부르러 온 정결한 거룩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룩을 부정한 우리에게 때려부어서 정결의 제사를 이루시는 겁니다.
죄인으로써 짝이 되지 거룩한 자로써 짝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라는 거룩을 추호도 원치 않는 것이 거룩이 추호도 없는 우리 마음인 겁니다.
그래서 새로 창조하시는 거룩으로 그 속에서 빼내시고 건져주시고 나누이시고
없던 거룩을 때려부어서 새로 창조로 나누이시는 겁니다.
누구 보란 듯이 마귀 보란 듯이
그러나 인간의 거룩 행하기는 마귀가 전혀 시기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시기하는 거룩은 베드로의 사랑을 차단하고 주님 쪽에서 사랑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 부조리 만이 왜? 나의 사랑이 일체 들어갈수가 없기에 부조리입니다.
그 부조리 만이 나 아니오 예수님만이 옳았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룩으로 덮어버리는 겁니다.
주님 나의 거룩은 쓰레기 이고 주님의 거룩인 내가 싫어했던 그 십자가만을 그 부정한 거룩만을 뒤짚어 씌어서 죄의 소원으로부터 건져주시옵소서
수많은 거룩들이 광명한 거룩으로와서 유혹합니다. 그 속에서 빼내어 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거룩이 없는 우리 마음을 심판하여 주시고
거룩을 추호도 따를 생각이 없는 이 어리석은 마음을 불태워 주시옵소서
이 병들고 더러운 마음을 고쳐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 = 원수의 성문을 열다(선악을 넘어서) (0) | 2011.06.07 |
---|---|
광야교회란 원망담기이다 (1) | 2011.06.07 |
나를 가로채는 또 [다른 나] 로써의 인자 (이중분절) (1) | 2011.05.30 |
잔혹한 사랑 (내가 주께만 범죄 했사오니) (0) | 2011.05.29 |
마가복음 22. 너를 위해 죽으마 (표적) (0) | 2011.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