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교회란 원망담기이다.

2011년 6월 7일 화요일 오후 6:52:47  김대식


원망을 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싸움을 붙인다. 이것이 성령의 일이다.

그 끊임없는 이중분절로써 자기도 꿈에도 몰랐던 죄를 발견하고서는
깜짝 깜짝 놀란다. 나에게 대해서 일말의 기대도 다 빼앗긴다.
그와 동시에 그런 나도 용서 못할 죄악을 그 상상도 못했던 죄악을
흰 눈 보다 더 희게 용서하신다. 그것이 상한심령이다.

감히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라는 것은 상상밖의 실재문제임을 직시하게 된다.
곧 죽어서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힘 빼기가 아니면 절대로 못 들어가는 곳이다.
원망을 담는 이유도 그러하다.

목이 곧은 백성 맹글어 놓고 목을 꺽어서 들여보내신다.
허리를 치신다. 이중분절이다.

마치 낙랑공주가 자기 아군의 유일한 비밀무기인 자명고를 찢지 아니하면
힘이 그대로 유지하고서는 절대로 결혼 짝이 안된다. 사랑이 안된다.
사랑이 될려면 자기백성 자기 가족 자기아버지 임금 자기 신 다 배신해야 한다.

자 이래놓고 뻔뻔스럽게

내가 주께만 범죄 했사오니 나를 정결케 하오리다.

자기는 그렇다 치자
그 땜에 수 많은 자기백성들은 다 죽어야만 하는가? 이보다 더 이기심은 어디 있는가?

참으로 기가막히고 코가 막히는 뻔뻔스러움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것만이 전쟁의 종식인 샬롬이 오는 것이다. 유일한 사랑이다.
죽음마저도 이기는 사랑이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 곧 신부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쟁종결인 샬롬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이 샬롬 만나서 안죽고 살아난 것이 영광인줄 알아라 이다. 양쪽 다 죽이시니까 말이다.

평행선을 이루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완성도 없고 의문스럽고 모호하며 언제 깨질줄 모르는 불안 그 자체이다.

반드시 한 쪽은 다른 한 쪽으로부터 정복당하는 패배가 있고 한쪽은 다른 한쪽을 정복하는 승리가 또렷하게 벌어지는 것이다. 차이내고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차이내기 위함이 바로 죄인만들기 원망하는 인간 만들기로써
원망을 담고자 서로 삐치도록 싸움을 붙이는 것이다.

모세는 시껍한다. 뭐 이런 백성을 구원할려고 그런 개고생했나? 집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그래서 모세 마저도 원망토록 만드신다.
바위를 두 번 친다.

그래야 예수님이라는 그릇에 담기는 것이다.
오죽하면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는가?

그래야 날 쳐다보지 말고 저분 쳐다 보라는 것이다.
나는 너의 원망을 담을 그릇이 아니라 저분이 너의 원망을 담아서
다시는 죄를 안보시겠다고 피를 뚜껑에 뿌리시는 분이다 라는 것을 외치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마음껏 원망을 담으신다.

우리는 죄 짖고도 죄를 못 짖는 우리의 죄를 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신의 피에 부합되는 죄만 원치 않지만 골라 골라서 담겨지도록 되어 있다.

그것도 누구 보란 듯이? 마귀 보란 듯이
하만 보란 듯이 (에스더)
사울왕 보란 듯이 (다윗)
에서 보란 듯이 (야곱)
맏아들 보란 듯이 (탕자)
가룟유다 보란 듯이 (베드로를 3번 부인케 만들어 용서하신다.)

이것을 거룩 곧 나누기 라고 한다. 유일하게 구별짖는 차이내는 나누임 곧 창조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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