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종
2011-06-16 09:42:58 이근호 목사
방종이란 ‘자기 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내 교회’가 따로 있다고 여기며 “남의 교인들은 방종해도 상관없지만 내 교인들은 방종 하는 것을 용서치 않겠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 또 ‘내 가정’이 따로 있다면, “남의 자식이 방종 하는 것은 신경 쓰지 않지만 내 자식이 방종 하는 것은 용서치 않겠다”는 의식이 들게 마련이다.
이런 ‘나의 것 의식’이 곧 비-언약이며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게 된 것은 바리새인들이 사두개인들이 ‘내 나라’, ‘내 민족’, ‘나의 백성’ 챙기는데 예수라는 작자가 방해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 11:50)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과 협의해서 예수님 처리에 관해서 결론을 내리는 대목이다.
즉 예수라는 작자의 활동은 모세 율법에 토대를 둔 이 유다 나라에 있어 방종에 해당되고 그 방종을 도저히 묵과할 수 있다는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전혀 예수님의 안목을 접수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모세 율법에 관해서 바리새인들과 종교전문가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방종 유발 요인’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모세 율법에 직접 관여하신 예수님의 의견은 다르다. 도리어 바리새인들이 모세로부터 단단히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 5:45)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모세 율법 해석의 원리가 무엇이었기 정작 모세로부터도 정죄를 당해야 하는가? 그들은 모세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지를 못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밑 종이를 뗀 상태에서 호빵과 호만두는 겉으로 봐서 모르게 되어 있다. 쪼개봐야 한다. 안에 팥앙코가 들어있으면 호빵이요 야채가 들어있으면 호만두다. 즉 모든 말씀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는 것을 알면 모세로부터도 정죄당하지 않지만 율법 안에 그냥 인간의 행함을 요구하는 명령과 규칙으로만 이해하면 모세 율법으로부터 정죄를 당한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베드로라 할지라도 모세 율법을 그냥 인간들이 성의 있게 정성을 다하여 지키는 규칙인 줄 알았다. 하지만 보자기에 이방인들을 담겨 내려오는 환상을 보고 난 뒤에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또 하늘로부터 두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행 11:7-9)- 비로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깨끗한 거룩임을 알게 되었다.
즉 이방인이 깨끗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라도 먹으라”고 하신 그 말씀 자체가 깨끗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로 하여금 이러한 대립되는 사태 속에 끌어당긴 것은 베드로를 통해서 인간들의 말씀 이해와 해석이 얼마나 자기 행함 중심으로 일관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쉽게 말해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 식으로 방종인 것과 아닌 것을 일방적으로 구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작 말씀을 주신 예수님의 취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처럼 방종을 언급하는 자는 본인 자체가 제멋대로, 곧 방종 상태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본인들이 실컷 방종으로 살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남의 방종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교인들이 하는 방종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예배 꼬박꼬박 참석하는 방종, 돈을 함부로 쓰지 않고 아껴두었다가 십일조나 감사 헌금하는 방종, 정기적으로 Q. T하는 방종, 열심히 전도하는 방종, 심방 가는 목사의 방종, 성경공부에 빠지지 않는 방종, 때마다 기도하기에 게을리 하지 않는 방종, 세상의 음란과 방탕에 빠지지 않는 방종, 물질이나 시간 바쳐 남이 하지 않는 힘든 일을 도맡아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방종, 혹은 이상의 것들을 전혀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방종 등이 있다.
이런 행위들이 방종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작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세워 일하시는 그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취지가 사정없이 충돌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즉 교인은 자신의 행함이 성령에 의한 희생적인 봉사라고 우기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너의 성질대로 막 살은 방종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니 상호 충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의 행함에는 어떤 방종적인 속성이 들어있는가 하며는, 말씀이란 나의 행함이 첨가되지 아니하면 결코 그 말씀은 현실적으로 드러날 수 없는 죽은 것이 된다고 바리새인적인 관점이 버티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발상이 곧 ‘모든 말씀에는 십자가 들어있다’와 정면충돌을 일으키는 방종이 되는 것이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정면으로 모독하게 된다. 인간은 그 어떤 행위를 해도 그것은 제멋대로 행동하고 제멋대로 해석한 죄악된 결과가 된다. 바로 이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성령님의 기능이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모든 의로움과 거룩함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예수님의 행위에만 근거되어 있음을 알려주신다.
예수님의 행위가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주어지면 성도는 시도 때도 없이 죄와 의와 심판의 기준점에 대해서 평생토록 책망을 받게 된다.(요 16:8) 왜냐하면 인간 속에서 끊임없이 바리새인적이고 “보자기에 담긴 더러운 것을 결코 내가 먹지 않겠습니다”고 베드로의 성질이 솟아올라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함이 ‘자기 것’을 사수하려는 의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려한다. 그래서 남의 교인들이 방종해도 신경 쓰지 않지만 자기 교인들이 방종하면 용서치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뭐라고 되어 있는가? 과연 ‘네 교인’과 ‘내 교인’이라는 구분이 있는가? 모두 그리스도 한 몸에 속한 자일 경우에서만 교회라고 지칭할 수가 있다. 즉 성경에서 ‘교회’라는 표현은 오직 그리스도의 몸에만 사용되기에 그 앞에서 ‘너’와 ‘나’의 구분은 허용되지 않는다. 즉 “나는 방종 안하는데 너는 방종하고 있다”는 네와 나의 구분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담겨 있기에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말씀을 영적으로 해석이 불가하다. 따라서 성경 말씀은 영적 해석을 하는 자와 육적 해석을 하는 자를 구분 짓는 멋진 계기로 작용한다. 즉 그 어떤 말씀 가지고도 십자가 앞에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 들추어내지 못한 말씀 해석은 모두 엉터리며 악마적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한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때문이다.(행 1:8) 반대로 우수한 자신의 방종 안함과 늘 신중하고 긴장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성령 받은 열매로 대견스럽게 여기는 것은 악마가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다.
곧 ‘나의 구원’은 어디까지나 ‘나의 것’이고, ‘나의 몸’도 따로 ‘나만의 것’이라는 의식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내 식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성경을 실천에 옮겨 나가겠다. 왜냐하면 내 몸 구원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속한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크게 외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구원은 예수님에게 속한 그 분의 고유 권한이다. 나의 구원은 나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나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행함을 방해한다. 주님이 행사하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는 오늘도 내게 속한 구원인 줄 착각해서 자꾸만 나의 구원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따라서 성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것이 죄인 줄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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