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심 (배신의 형상 만들기)
군주 이미지 vs 정념 이미지
2011년 5월 4일 수요일 오후 12:38:39 김대식
정념이라는 용어 때문에 한 달 가량 끙끙 거렸다.
머리는 나쁘지, 믄 말인지 이해를 안 되지
그렇다고 부지런히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지
그런데 가만히 보니 너무 너무 쉬웠는데
안 쓰던 문자 단어라서 괜히 어려워 했다.
작년 여름부터 뼈속 까지 하나 하나 일일이 지금까지 체험 당해 와 놓고서는
그 증거가 나의 신체에 하나 하나 새겨서 완성체로 주셨건만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하다니? 아이구 이 바보야
늘 삑사리 인생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 동안 너무 너무 행복했다.
정념이라는 말의 뜻은 억제를 하지 못하고 곧 바로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즉 욕망 또는 충동 또는 우발적
좀 더 쉽게 말하면 욱 거리는 성질머리
다혈질적 등등이다.
자 그렇다면 상대적인 반대말을 생각하면 그 차이 때문에 더욱더 쉬워진다.
그것이 의외로 전제군주 체제다 라고 철학책에서 소개를 했다.
전제 군주라? 즉 신의 얼굴처럼 고정적이고 불변적이고 오디푸스(남근:선악법)처럼 침범불가의 영역이다.
결국은 신의 자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의 자리 라는 것이 신의 얼굴이라는 것이 얼마나 웃기게도
모든 인간의 체제인 바벨탑 체제가 모조리 다 신의 자리이다.
특히 바벨탑이 모태로써 낳은 것이 국가이다.
국가란 왕의 자리요 신의 자리로써 모든 권력이 집중이 된다.
집중이 되지 않으면 개판이 된다.
전쟁과 폭력을 통해서 그 반란과 무질서를 재압해 버린다. 곧 법이다.
그것이 바로 전제 군주 이미지다.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욕망이 특히 개혁주의 신학의 욕망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다.
곧 전제 군주 이미지 회복이다.
이것이 오늘날 기업 국가 사회 종교 어떤 단체 집단이든 이런 하나님의 자리의 형상을 추구한다. 바벨탑 쌓기의 강박증은 어딜 가지를 않는다.
여기에 소위 바리새인 운동처럼 노마니즘 운동이 곧 묵시운동이 펼쳐지는데 그것이 바로 정념 이미지 이다. 새생명의 삶이라는 이미지로 다시금 고정시켜버린다. 결국 묵시운동 조차도 역사운동이 되는 육의 자랑이 되고 만다. 육에서 나온 것은 어디까지나 육이니까
이런 신학 운동은 전제군주의 이미지로써 다시금 철학운동이라는 정념 이미지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왜 인간들은 신학을 할려고 할까? 왜 인간들은 철학(지혜)를 찾을려고 할까?
신의 이미지를 회복 하겠다는 그 자리 회복은 왜 벌어지는 것일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서 죄의 소원은 이 신의 이미지를 회복할려는 망상에 빠진다.
잃어버린 형상을 찾겠다는 그 취지가 과연 옳을까?
찾겠다는 그 취지로써 정작 정념이미지를 핍박하는 것은 왜 일까?
주를 향한 열심히 주를 핍박한다.
특히 성전을 사모하는 열심은 더더욱 주를 죽음으로 몰고간다.
그것이 두 성전 파괴 사건이다. AD 70년과 B.C. 587년
내 열심이 특심이면 특심일수록 그 자체가 기념비가 되는 육의 자랑이 되는 군주이미지다.
그러나 여호와의 형상은 삑사리 형상이다. 채널돌리기 하니 7천명이나 남은자가 있었다.
남은자 라는 잉여 형상은 삑사리 형상이다. 흐물 흐물 형상이다.
(왕상 19:1, 개역)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왕상 19:2, 개역)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왕상 19:3, 개역)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왕상 19:4, 개역)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왕상 19:5, 개역)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왕상 19:6, 개역)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왕상 19:7, 개역)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왕상 19:8, 개역)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왕상 19:9, 개역)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10,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1,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 19:12, 개역)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3, 개역)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14,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주의 전을 사모하면 사모할수록 내사랑이 가득한 성전, 내 충성 내 열심히 가득찬 성전만 가득하다. 그 성전사랑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광인 곧 바알세불 걸린자로 몰아간다. 두 주인을 섬길수가 없기 때문이다. 두 소욕은 있을 수 없다.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가인의 기표는 곧 바로 이 신의 이미지에 대한 집착에 빠진다. 편집증에 빠진다.
모든 장소와 모든 것에 기표를 붙인다.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하나님이 복 내리신 것,
그것이 영웅의 자리로써 전제 군주화 된다. 곧 가인의 족보 이다.
그러나 정념 이미지는 쉽게 말해서 배신 이미지다. 그 전제군주 편집증을 깨는 더 미친짓인 편집증이다. 배신으로써 말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기 이다.
전제 군주 라는 그 이미지에 상반되는 배신 때리기 이미지다.
상대적인 이미지이기에 그 어떤 이미지도 기존의 메이져(주류)로 자리잡을 때
반드시 비주류로써 마이너 기능으로써 배신을 때린다.
배신 이라는 말은 앞의 전제로 주류를 이룰때에 발생 된다.
이것을 쉽게 이해를 하면
애굽의 바로왕 체제가 바로 전제 군주 체제이다.
그리고 모세의 이스라엘 체제가 바로 그 전제 군주 체제에 배신 때리기를 펼치는
정념이미지 즉 우발적 발생 이미지, 배신 이미지 이다.
그들 정념 이미지는 말씀이 기표화 된 신체로써
배신 때리기 전쟁을 펼친다. 그것이 거룩 전쟁이다.
거룩은 떠돌이다. 배신이다.
그러나 비거룩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그 영역에 고정화 되어버린다. 이것이 가인의 표다.
그 자리에 빗금그어버리는 홈페임의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홈페임 속에서 나타나는 존재가 바로 정념이미지다.
이 정념 이미지에 다시금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일종의 세례이다. 그것이 할례 다.
이 할례 라는 정념이미지의 아이디어 가 바로 잉여인데 잉여란 배신 이다.
절단이다. 무조건 군주이미지의 단절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형상의 충돌이 되는 셈이다.
바리새인이라는 정념이미지를 추구하는 그 운동에
다시 정념이미지에 반대하는 정념이미지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이 출현한다.
자 이렇게 되면 그 어떤 자도 그런 운동을 펼칠 수 없도록 하신다.
오로지 예수님 홀로만의 운동인 십자가 만이 운동하는 것이다.
그 십자가에 당하는 자만 출현할 뿐이다.
이것이 배신 이미지 로써의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즉 할례가 세례가 되고 그 세례란 십자가이다.
곧 죽음의 형상이다.
이 죽음의 형상만이 유일하게 산 형상이고
죽음의 형상이 아닌 것은 모조리 죽은 형상인 우상의 형상이다.
죽음을 이긴 것은 십자가 뿐이다. 다 이루었도다 라고 외친 것은 십자가 뿐이다.
그래서 십자가란 배신 이미지다. 모든 것을 파토 내는 매일 매일 무로 돌려 버리는
죄인의 형상이다.
죄인 중의 괴수의 형상이 바로 배신의 형상, 우발의 형상, 십자가 형상인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정념이미지를 실제로 행하고자 실천하는 그 바리새인 속에서
죄인 중의 괴수를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속에서 만들어 낸다.
전제 군주 이미지인 하나님 형상 회복 운동 속에서
즉 율법으로써 그 신체에 말씀을 새겨 인간신체 그 자체가 책이 된 그 속에서
이제 더 이상 지키고 행할 것이 없는 예수님의 완료인 율법의 완성 자체가 덮친
책 속의 책으로써 그리스도의 형상이 출현한다.
할례를 행하지도 않고서 할례인간으로 출현하고
세례를 행하지도 실천하지도 않고서 세례인간으로 출현하고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실천하지 않고서도 십자가인간으로 출현한다.
앞의 것은 전제 군주적인 이미지인 편집증적 이미지이고
뒤의 것은 정념적 이미지인 배신 이미지이다.
전제 군주 이미지는 파라오 애굽 왕처럼 아무리 가인처럼 미친인간이라 할지라도
재산 관리와 질서유지와 국가 체제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아주 아주 정상적이다.
다윗 왕이 그러했다. 나단 선지자가 알려준 이야기로 율법적으로 4배나 갚으라 라는 정확한 율법적인 해석인 그야 말로 전형적인 전제 군주 이미지 이미지다.
그러나 정념적 이미지는 저런 부르조아에 비해 매우 매우 충돌적이며 늘 말썽을 피우는 사건유발자요 사건으로 인해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제압이 되지 않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펼치는 미친자들이다. 주로 노동자 농민 하급계급이다.
다윗 왕의 반대인 다윗왕의 하급계급인 우리야 장군이 그러했다.
그의 우발적인 행동인 정념이미지로써의 거룩한 여호와 전쟁에 충성스러움은 다윗 왕의 감추어진 악마성을 더더욱 충돌질한다. 제대로 그 가면을 벗기는 것이다. 전제군주이미지 라는 얼굴을 벗겨버린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야 하급계급의 역할인 정념이미지가 덮쳐진 즉 아벨처럼 아벨의 제사를 열납해 버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반발성이다.
그리고 나단선지자로부터 그 우상의 이미지인 군주이미지가 바로 너다 라고 지적받음으로써
꺽으신 뼈가 출현하고(그리스도의 형상=상한심령) 그 기호상자인 표적에 그 흔적에서
그 홈페임 속에서 여디디야 곧 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전제군주이미지가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했다(배신 이미지: 그리스도의 형상) 라는 사랑을 이룬다.
그 속에서 태어난 것이 여디디야요 홈페임 속에서 즉 전제군주이미지의 죽음 속에서 그 홈페임 속에서 태어난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까지 사도 라는 기능은 멈추지 않고 증식 된다.
30배 60배 100배 라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멈추지 않는다.
유일한 운동은 그 말씀 자체의 운동인 그리스도의 형상인 배신 이미지다.
그 운동력은 전제군주이미지인 율법형상이면 금상첨화로써 그 효과를 제대로 발휘한다.
깨어지고 부서지고 찔려질 꺼리를 깔고서 그 차이성을 드러낸다.
이 배신 이미지야 말로 인간들이 가장 거부하는 이미지(형상)인 그리스도의 괴물성이 아닌가?
마귀의 형상인 우리가 가장 싫어할 수 밖에 없는 태양빛에 검게 타버린 얼굴
풍채도 없고 질병의 얼굴이요 째찍질 받는 어린아이부터 남녀노소 모두가 외면하는 얼굴이다.
이 얼굴을 이루신다.
탕자를 받아주는 배신 때리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맏아들은 아무리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어도 그 배신이라는 부조리 형상에
비로소 강퍅성이 드러난다.
십자가라는 부조리야 말로 인간의 악마의 얼굴을 드러내는 유일한 뿔이다.
역사는 이 두 소욕의 마당터이다.
숨어있는 전제군주이미지를 도출시키기 위해
역사의 흐름은 느부갓네살의 금신상 체제로써
경제 정치 종교 사회 문화 등등의 모든 흐름들이 세상 구석 구석 한류가 펼쳐지듯
군주이미지가 펼쳐진다. 이제는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대장금이라는 드라마를 보듯이
구석 구석 그 이미지가 배경으로 깔려서 그 때가 찰 때에
그 상대적인 배신 이미지가 등장한다.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광기 이미지가 정념이미지이고 이성의 이미지가 전제군주이미지인데
이성이 광기를 사회에서 배제하게 되니 더 이상 신의 심판을 전하는 메신저는 없어지고 오로지 왕이라는 자본의 힘을 축적하고 집결시키는데 매진하게 된다. 광인을 배제 시킴 곧 감금 추방 결박 시킴으로써 신의 심판을 배제 시키는 이성이라는 신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이 광기를 없애버린 광기의 역사인 이성의 역사가 된다.)
인자의 이미지는 그런 인간들이 동경하는 시스템의 체제가 허구임을 드러내는데 등장하는
유일한 기호인 요나의 표적이다.
예수님이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 뿐이고
인간이 원하는 기적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인 군주이미지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마 12:3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6:4, 개역)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눅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곧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걸림돌 형상이 바로 배신때리기 형상인 그리스도의 형상이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이방인: 오늘날 현대철학자 들뢰즈 지젝 라캉 같은자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기 짝이없는 마이너, 도저히 믿고 싶어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너무 너무 지혜롭지 못하는 죽음의 형상이 바로 배신자형상인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정착이 불가능한 떠돌이 형상이요 볼꺼리가 전혀 전혀 네버 네버 절대 없다.
지혜일 수가 없다 라고만 외면 받는 형상이다. 곧 괴물형상인
국가체제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죄인형상이다.
국가를 전복시켜버리는 형상이 죄인의 형상인 죄인 중의 괴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갈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20, 개역)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유일한 자유의 형상이다. 두 자녀 싸움 곧 두 소유욕의 싸움터가 역사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배신의 이미지, 속임수 이미지, 은폐의 이미지, 안알려주는 반칙이미지, 불륜이미지
이것이 바로 십자가 형상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가장 전제군주의 이미지는 바로 육이라는 신체이다.
곧 나 다
이 나를 배신하는 이미지야 말로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나를 속이는 이미지야 말로 불륜의 이미지다.
바리새인은 그 당시 비주류에 해당되는 마이너운동을 펼치는 자들이다.
오늘날 개혁주의나 또는 신학운동 하나님나라 운동 하나님형상 운동 회복하는 모든 종교는 한 통속이다. 표적을 구하기 때문이다. 기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로서의 군주이미지다.
또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듯이 오늘날 모든 철학은 비주류를 펼친다는 자기주체를 결국은 못버리는 주류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자신을 배신할 수가 없다. 코뮨주의 노마니즘 운동 유목주의 운동 모조리 다 성화론에 해당되는 운동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셨다.
군주이미지에 대항하는 정념이미지 운동을 펼치는 그 바리새인 노마니즘 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셨다.
정념이미지를 무한대로 깨는 운동을 하는 그들 자신을 자기부인 할 수 있는가?
그 운동(행함 실천)을 펼치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에게 미련이 더 커지는 법이다.
자기 부인, 자기 부정, 자기 속이기, 자기를 배신하기는
그야 말로 육의 바깥인 외부에서 육을 공격하면서 펼치는 성령 홀로만의 운동
곧 말씀이 운동력이 있는 말씀 스스로의 운동 뿐이다.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형상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형상 뿐이다.
믿었던 자기 자신 마저도 배신해 버리는 것은 약속한 성령 뿐이다.
이 군주의 자리에 늘 오를려고 하는 자기를 배신케 하는
성령의 소욕이 아니고서는 구원 받을 길이 없다.
오죽 하면 구원이 없겠는가?
코뮨운동 노마니즘 펼치면 구원 될꺼 같으면 저런 소리 하실 이유가 없다.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
자기 자신의 모순을 십자가의 형상으로 인정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배신 때리는 것이다.
늑대 무리 속에 양을 보낸다.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늑대는 양으로부터 핍박을 받는다.
성전에서 천년을 기다리고 도 닦고 이제 하루만 버티면 인간이 될 수가 있다
천년 동안 마늘만 먹고 살아 왔기에 더 이상은 살생을 하는 피 흘리는 일이 없게 했다.
그런데 딱 하루 남겨 놓고 양이 쳐들어 오게 되니
그야말로 기가막히고 코가 막힌다.
천년이 하루 같이 지나왔건만
이제는 그 남은 하루가 천년처럼 길다.
늑대에서 인간으로 환생하고자 하는 이 숭고한 이미지를 깨뜨리는
가해자는 누구인가?
양은 가해자다.
늑대를 괴롭히는 가해자다.
그 가해자 형상이 바로 십자가의 형상이다.
모든 운동을 파 하신다.
이 폭력보다 더 한 폭력은 없다.
죽음이라는 폭력 즉 권세 보다 더 강한 폭력은 사랑이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배신자 형상, 속임수 형상, 가해자 형상, 폭력 형상, 죄인 중의 괴수인 괴물 형상
불 형상, 소멸 형상(모조리 다 태어버리는), 시기 형상, 투기 형상, 화로다 형상, 심판 형상, 망하게 되었도다 형상, 입술이 부정한 형상, 제단 숯불에 입술 지져진 부정한 형상, 곤고한 형상, 너거 하나님과 내 하나님은 다르다 라는 임마누엘 형상, 버림 받는 형상, 싫어버린바 된 형상, 열심히 특심인 엘리야의 형상을 깨뜨리는 7천명 남기는 장난꾸러기 형상 곧 감사의 형상, 육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형상운동에 무조건 반대하는 장난치는 형상, 삑사리 형상 등등
(이런 형상이란 상대적인 형상에 반발하는 형상이다. 기존의 것에 전제한 것을 염두한 것이다. 곧 인간의 형상인 하나님 형상이다. 저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바알세불 형상이다. 그런 이미 그들의 손에 장악된 성전 곧 하나님의 얼굴을 전제로 하고, 여기에 임마누엘로써 깨뜨리고자 침투한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예수님의 얼굴이다. 싫어버린바 된 얼굴 )
이것이 십자가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나를 늘 배신 하는 그 그리스도의 형상 만이 옳다.
나라는 자기 자신을 늘 배신 때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 속에서 이루신다.
나 라는 내 속에 나라는 박스상자(그릇)에 늘 배신하고 속였고 원망했던 것을
가득 채운다. 내가 내 스스로 인정하는 군주이미지(신의 얼굴, 신을 닮은 얼굴)를 채우는 그 꼴을 못 보신다.
도리어 배신 했던 것들만 가득 채운다.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로만
예수님을 부인했던 배신했던 것들만 골라 골라 골라서 까가득 채워서
너가 나를 사랑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사랑했음을
행함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주님의 이미지가 비로소 덮친다.
비로소 선악이미지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명의 형상이 모든 법을 배신하면서 외친다.
이것이 다윗 언약이다. 새언약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사오니 주께서 정결케 하셨음이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죄 와 피의 결합이다.
죄수 복과 그리스도의 옷의 콜라주 포개짐이다. 덧입혀짐이다.
(사 1:18,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군주이미지가 비로소 벗겨진다. 그 내막들을 속속히 들추어진다.
그 들추어진 내용 하나 하나를 죄수복을 입고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외치는 것이다.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 배신의 형상이야 말로
얼굴과 얼굴을 맛대어 보는 샬롬 형상이다. 뭔가 전제된 형상을 깨뜨렸다는 것이다.
내 얼굴을 깨뜨리는 주의 얼굴이야 말로
간밤에 주를 보고도 안 타 죽는 배신의 형상 죄인의 형상만이
얼굴과 얼굴을 맛대어 보는
부분적이고 희미한 것들이 다 사라지는 완료의 형상이다. 사랑이다.
(고전 13:4, 개역)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개역)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6, 개역)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 13:7, 개역)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8, 개역)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9, 개역)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고전 13:10, 개역)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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