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성전으로 깨다 : 반대를 위한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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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61, 개역)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마 27:40, 개역)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막 14:58, 개역)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막 15:29, 개역)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요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들뢰즈를 깰려면 들뢰즈로 깨라 라는 말이 있다.
마치 성화론을 깰려면 성화론으로 깨듯이
바닥의 바닥이라는 의미가 이런 의미이다.
(인간의 제사:가인 제사를 깰려면 n-1(가인-1, 가인의 동생, 가인의 빠롤인 더 나은 제사로 깨듯이)
비가시화의 참성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가시화된 성전을 쪼개보면 안다.
인간을 깨기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것이다. 그것이 인자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모든 인간은 못 박힌 것이다.
(고후 5:14, 개역)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개역)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5: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8, 개역)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 5:19, 개역)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어제 교회가는 길에 버스에서 읽어볼 꺼리를 찾다가 아무거나 손에 집어들고서 집을 나섰다.
프린트한 기호체제였다. 처음에 읽었을때는 무지 어려웠는데 다시 보니 전 보다는 쉽게 쉽게 이해가 되었다. 믄말인지 도통 몰랐는데 아 그게 이런 의미였구나 했다.
어 그런데 어제 오전 설교에 이 내용이 그대로 나오지 않던가?
이런 우연이?
차 타고 오면서 방금 봤던 부분인데 하하하
끄적 끄적 메모해서 적었던
제사장의 속임수 이미지 (미끄러지기 위한 속임수형상)
그리고 탈기호(언어나 문자가 랑그화 되지 못하고 쭐꾸덕 미끄러져 빠롤화 되는, 부정화)
탈지층(공간 = 예루살렘)
더군다나 이 장의 본제목 타이틀이 BC 기원전 587년, AD 기원후 70년 가 아닌가?
성전파괴 이다.
이번 설교가 참으로 우연찮게 가지고간 프린트물에서 읽었던 부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왜 죄인에게만 의사 구원자가 필요한지를
구원자 자신의 영광을 어떤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를 겨냥한 활동임을
그래서 성도는 주님이 직접 준비하신 기가막힌 포획장치로써
모든 자의 지혜를 꺽는 어리석은(빠롤 : 미끄러지는) 지혜 곧 십자가의 지혜로써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써만 활동하시는 말씀(빠롤)을 나누면서 함께 기뻐했다.
과연 주님의 피 보다 센 것이 어디 있는지?
뭐 예루살렘? 백트럭이나 데리고 와보라 과연 누가센가?
주님의 피가 옳았음을 위해서 모든 것은 동원이 되어야 한다.
충돌 당해야할 가루가 되기 위해서
(마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 21:34, 개역)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마 21:35, 개역)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마 21:36,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마 21:37, 개역)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마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마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마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마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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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원전 587년, 기원후 70년 : 몇 가지 기호체제에 관하여
새로운 체제
우리는 특정한 표현의 모든 [종류의] 형식화(formalisation)를, 최소한 그 표현이 언어적인(linguistique) 한에서 기호체제(régime de signes)라고 부른다. 하나의 기호체제가 하나의 기호계(une sémiotique)를 이룬다. 하지만 기호적인 것을 그 자체로 다루는 것은 어려워보인다. 사실 언제나 내용의 형식이 있으며, 동시에 이와 분리할 수 없지만 독립적인 표현의 형식이 있다. 그리고 이 두 형식은 원칙적으로 언어적이라고 할 수 없는 하나의 배치로 소급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현의 형식이 마치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조차 표현형식에는 그 나름의 다양성이 있으며, 이 형식들의 그 나름의 혼합이 있으며, 그리하여 ‘기표’의 형태[형식]이나 체제에 유난스런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기표적인(signifiante; 의미화하는) 기호이론(la sémiotique)를 기호학(sémiologie)라고 부르는데, 이 기호학은 많은 다른 기호이론 가운데 유일한 것도,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다.*1) 이로부터 화용론으로 돌아갈 필요성이 나오는데, 화용론에서는 언어활동이 그 자체만으로 보편성을 갖지 않으며, 기표적인 형식화도, 기화학이나 일반적 메타언어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우선은 기호체제라는 동일한 이름으로 언어학적 전제의 부적절성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기표적 체제에 대한 연구다.
기호의 기표적 체제(의미화하는 기호)는 하나의 단순한 일반 공식을 갖는다. 즉 기호는 [다른] 기호로 소급되며, 오직 [다른] 기호로 무한히 소급될 뿐이다.*2) 결국은 이것이 바로 기호에 대한 관념이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는 이유인 셈인데, 왜냐하면 기호가 지시하는 사물의 상태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 전체(entité)에 관한 기호의 관계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위 기표의 연쇄를 정의해주는 기호와 기호의 형식적 관계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의미화(signifiance)의 무한성이 기호를 대체했다. 외시(外示; dénotation)--이는 지시와 의미작용의 총체인데--가 이미 함축(connotation)의 일부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전적으로 기표적 기호 체제 속에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지표(indices)를, 즉 지시가능한 것을 구성하는 사물의 영토적 상태를 특별히 다루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이콘(icônes)을, 즉 나름대로 의미가능한 것을 구성하는 재영토화작용을 특별히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기호는 이미 상대적인 탈영토화의 높은 정도에 이른 셈이고, 그리하여 그것은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 끊임없이 소급되는 상징(symbole)으로만 간주된다. 기표는 기호로 넘쳐흐르는 기호다. [그 중] 어떤 기호들은 기호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같은 기호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무정형의 대기적(大氣的) 연속체 위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물망을 형성하기 위하여 그 기호가 다른 어떤 기호로 소급되는가를, 그 기호에 다른 어떤 기호들이 부착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그 경우 ‘기의‘의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대기적 연속체지만, 그것은 단지 매개체 내지 벽으로 작용할 뿐인 기표 아래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그 속에서 모든 내용은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해체당해 버린다. 내용의 대기화 혹은 세속화. 따라서 [모든] 내용은 추상화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묘사한 바 있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즉 세계는 기표가 무엇을 뜻하는 지도 모르는 채 기표에 의해 시작되었고, 기의는 알려지지 않은 채 주어져 있다.1) 당신 부인이 당신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오늘 아침 관리인이 손가락을 깍지낀 채 세금고지서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당신은 개똥을 밟았고, 인도 위에서 당신은 조그만 두 개의 나무조각이 시계바늘처럼 겹쳐지는 것을 보았다. 당신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당신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속닥거렸다. 이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이는 언제나 기표일 뿐이다. 기호로 소급되는 기호는 이상한 무능력, 불확실함에 사로잡히지만, 능력을 갖는 것은 [기호의] 연쇄를 만들어내는 기표다. 편집증 환자는 미끄러지는 대기 속에서 그를 모든 방향으로부터 공격하는 탈영토화된 [이러한 기표적] 기호의 무능력에 참여한다. 하지만 그는 대기 속으로 퍼져있는 그물망의 주인이라도 되는양, 위풍당당한 분노의 감정으로 기표의 초권력(surpouvoir)에 접근한다. 편집증적인 전제적 체제(régime; 정권)는 선언한다: 그들은 나를 공격하고 나를 질식시키지만, 나는 그들의 의도를 예견하고, 그것을 앞지르며, 그것을 항상 알고 있어서, 나의 무능력 속에서도 그러한 권력을 갖고 있으니, “내가 그것을 가지리라.”
이같은 체제에서는 아무 것도 끝나지 않는다. 이는 그것 [자체]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무한한 채무를 진 비극적 체제로서, 여기서 사람들은 채무자인 동시에 채권자다. 하나의 기호는 그것이 거쳐가는 다른 기호로 소급되며, 그것은 또한 기호에서 기호로 옮겨가면서 그것이 다른 것으로 지나갈 수 있도록 배웅해준다. 그것은 “순환적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기호들은 단지 무한한 그물망을 만들 뿐만 아니라, 기호의 그물망 자체가 무한히 순환한다. 언표는 그 대상보다 오래 살아남으며, 이름은 그 소유자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다른 기호를 통과하든, 일정 기간 동안 보존되든 간에, 기호는 사물의 상태보다, 그것의 기의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기호는 짐승이나 시체처럼 튀어올라와 연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차지하며, 새로운 상태나 새로운 기의에 투여되며, 거기로부터 다시 빠져나온다.2) 영원회귀의 인상. 부유하고 미끄러지는 언표의 체제, 유예된 이름의 체제, 동정을 살피며 다시 연쇄에 의해 앞으로 밀려나가기를 기다리는 기호의 체제가 있는 것이다. 탈영토화된 기호 자체에 대한 잉여로서 기표는 죽음의 세계요 공포의 세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호의 이러한 순환성보다는 차라리 그 원환이나 연쇄의 복수성이다. 기호는 단지 동일한 원환 상의 다른 기호로 소급될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원환이나 다른 나선환의 기호로 소급된다. 로버트 로위(Robert Lowie)는 부인에게 배신당했을 때 크로우 족과 호피 족이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는가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해주고 있다(크로우 족은 유목적인 사냥꾼인 반면, 호피 족은 제국적인 전통을 갖는 정착민이다). “부인이 배신했을 때 크로우 인디언은 그녀의 얼굴에 깊은 칼자국을 만들어버리는 반면, 동일한 불행의 희생자가 된 호피 족은 침착함을 잃지 않은 채 은거하여, 가뭄과 기근이 그 마을을 덮치길 기도한다.” 어느 쪽이 편집증이며, 전제주의적 요소 내지 기표적 체제인지, 또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던 ‘광신’(狂信; la bigoterie)인지 알 수 있다. “사실 호피 족에게는 [기표의 연쇄처럼]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 재앙, 집 안에서의 사건 하나가 우주의 체계와 관련되어 있으며, 거기서 각각의 수위(水位)는 다양한 상응성에 의해 결합되어 있다. 평면 위의 격동은 다른 수위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격동의 투영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고 도덕적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 된다.”3)
호피 족은 하나의 원에서 다른 원으로, 하나의 기호에서 두개의 나선 상에 있는 다른 기호로 건너뛴다. 마을이나 도시에서 출발해 다시 그리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비약은 전-기표적인(présignifiants) 의례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당성을 결정하는 모든 제국적 관료제에 의해서 규칙이 된다.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비약하지 않으며 규칙없이 비약하지도 않는다. 비약은 규제될 뿐 아니라 금지되기도 한다. 가장 외부의 원환을 벗어나서는 안되며, 가장 중심에 있는 원환에 근접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원환들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것에서 야기된다. 모든 기호들이 다른 기호 중 하나로 소급되는 것은 그것이 탈영토화되고 의미화의 중심을 향해 진행되며 대기적 연속체 속에 분배될 때뿐이지만, 그것은 발생지(사원, 궁전, 집, 길, 마을, 처녀지 등)를 증명하는 상이한 탈영토화 속도를 가지며, 원환들의 구별을 유지하거나 대기적 연속체 내에 문턱을 만드는(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집 안에서의 사건과 사회적 재앙) 차이적(différentiels; 미분적) 관계를 갖는다. 나아가 이 문턱들과 원환들은 경우에 따라 상이하게 분할된다. 체계 내에서는 하나의 근본적인 속임수가 있다. 하나의 원환에서 다른 것으로 건너뛰는 것, 언제나 장면을 바꾸는 것, 다른 식으로 행하는 것은 그 의미화의 중심에 자리잡은 전제군주의 편집증적 작동에 화답하면서 주체로서 사기꾼이 히스테릭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기표적 체제가 모든 부분에서 방사되는 기호들을 원환으로 조직하는 임무만을 떠맡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원환이나 나선의 확장을 보장해야 하며, 체제에 고유한 엔트로피를 정복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원환이 펼쳐지고 낡은 원환이 재양육될 수 있도록 기표를 재공급해야 한다. 따라서 의미화에 복무하는 이차적인 메카니즘이 필요하다. 주석(interprétence) 내지 해석(interprétation)이 바로 그것이다. 이 경우 기의는 새로운 면모를 획득한다. 그것은 내용없이 주어진 무정형의 연속체--기호의 그물망이 그 위로 올가미를 던지던--가 되기를 중단한다. 그리하여 적합하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된 기의의 배당분을 기호 내지 일군의 기호들에 상응시키게 된다. 기호로 소급되곤 하던 기호의 결합적(syntagmatique) 축에다가, 그처럼 형식화된 기호가 적합한 기의를 재단해내는 계열적(paradigmatique) 축이*3) 덧붙여진다(따라서 거기서도 여전히 내용이 추상되지만 새로운 측면에서 그렇게 된다). 해석해주는 사제, 예언자는 [기표연쇄라는] 전제적-신의 관료의 일종이다. 이리하여 사제의 속임수라는 새로운 양상의 속임수가 나타난다. 해석은 무한히 계속되고,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해석이 아닌 어떤 해석자도 만나지 못한다. 기의는 기표를 끊임없이 다시 제공하며, 기표를 계속하여 보충하고 생산한다. 형식은 언제나 기표로부터 연원한다. 종국적 기의는 잉여성 속에 있는, 혹은 ‘남아도는’ 기표 그 자체다. 기표를 생산함으로써 해석과 소통을 피하려고 하는 시도는 전혀 쓰잘데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해석의 소통이야말로 기표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복무하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런 식으로는 생산에 대한 관념을 갱신할 수 없다. 해석은 의미화에 종속되며 그 점에서 기의가 그 나름대로 기표를 재부여하지 않는다면 기표는 어떠한 기의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분석적 사제들의 발견이었다(이는 모든 다른 사제나 모든 다른 예언자들이 자신의 시대에 행했던 것이기지만 말이다). 사실 극단적인 경우라면 더 이상 해석할 것이 없을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가장 훌륭한 해석, 가장 진중한 해석, 가장 근본적인 해석은 두드러지게 의미심장한 침묵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지만, 더 많이 혹은 더 훌륭하게 해석하며, 지옥의 원환에서 다른 것으로 건너뛰려는 주체를 위해 해석을 제공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의미화와 해석은 지구와 피부의, 다시 말해 인간의 두 가지 질병이며, 근본적인 신경증이다.
의미화의 중심에 대해, 기표 그 자체에 대해 말할 것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수한 원리만큼이나 순수한 추상이며, 다시 말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핍이든 과잉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호가 다른 기호로 무한히 소급된다고 말하는 것이나 기호의 무한한 전체(ensemble)가 지고(至高)한(majeur) 기표로*4) 소급된다고 말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기표의 이러한 순수한 형식적 잉여성(redondance)은 특수한 표현적 실체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이 표현적 실체에 대해 안면성(visagéité)이란*5)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언어활동은 언제나 안면성이란 특징을 수반할 뿐만 아니라, 얼굴[표정]은 잉여성의 총체를 응결시킨다. 얼굴은 기표적 기호를 방사하고 수신하며 풀어주고 재포획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 신체를 이룬다. 그것은 탈영토화된 기호들이 걸려 있는, 의미화의 중심 신체로서, 그 탈영토화의 극한을 표시한다. 목소리가 나오는 곳은 얼굴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제국적 글쓰기 기계의 근본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글이 책과 같은 특징이 아니라 구두적인(oral) 특징을 갖는 것이다. 얼굴은 기표적 체제에 고유한 아이콘이며, 체계에 내재적인 재영토화다. 기표는 얼굴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기표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표정[얼굴]이며, 해석할 것을 제공하는 것도 표정이고, 해석이 그 실체에 기표를 다시 부여할 때에도 변하는 것은, 그리고 그 특징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표정이다. 봐라,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기표는 언제나 안면화된다. 안면성은 이 모든 의미화 및 해석의 총체 위에 물질적으로 군림한다(심리학자들은 아기와 어머니의 얼굴 간의 관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썼으며, 사회학자들은 매스 미디어나 공공성에서 얼굴의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을 쓴 바 있다). 신-전제군주는 결코 그의 표정[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하나의 얼굴을, 혹은 동일하지만 다양한 얼굴을 만들어냈다. 가면은 얼굴을 감추지 않는다. 가면은 얼굴이다. 사제는 신의 표정[얼굴]을 관리한다. 전제군주에게 모든 것은 공적인 것이며, 공적인 모든 것은 표정에 의해 [행해진]다. 거짓말, 속임수는 기표적 체제의 근본적인 일부를 이루지만, 결코 비밀은 아니다.4) 반대로 얼굴[표정]이 지워질 때, 얼굴의 특질이 사라질 때 우리는 분명히 다른 체제에 들어선 것이고, 동물-되기, 지하에서 분자화-되기, 기표적 체제의 한계를 넘어선 야밤의 탈영토화 등이 작동하는 또 다른 소리없고 지각불가능한 무한 지대(zone)로 들어선 것이다. 전제군주나 신은 그의 신체 전체기도 한 자신의 태양 얼굴을 기표의 신체로서 휘두른다. 그는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무엇을 했길래, 그의 표정이 저렇게 바뀌었지? [혹은] 나는 그의 사진을 앞에 두고 있는데, 그것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같다...스트린드베리(Strindberg)는 표정의 감시, 기표의 초코드화, 모든 방향[의미; sens]으로의 방사, 국지화되지 않은 편재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결국 전제군주나 신의 얼굴 내지 신체는 그 반-신체(contre-corps)로서 사형당한 자의 신체를, 혹은 배제된 자의 신체를 갖는다. 이 두 가지 신체가 소통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전제군주의 신체가 굴욕과 형벌 혹은 추방과 배제의 시련에 굴복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극단에 죄인의 신체를 위치지울 수 있다. 이 또한 자신의 법적인 규칙(statut)을 가지며 나름의 제의(祭儀)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주권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최대한의 권력을 기초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벌받아야 할 자를 표시하는 최소한의 권력을 코드화하기 위해서다. 정치적 장의 가장 어두운 지역에서 죄인은 왕에 대칭적이면서 반대되는 형상(figure)을 그린다.”5) 사형수는 무엇보다 우선 그의 얼굴[표정]을 잃은 사람이며,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재와도 같은 분자화-되기, 동물-되기 속으로 들어선 사람이다. 하지만 사형수는 종국적인 말이 결코 아니며, 반대로 배제를 향해 내딛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 오이디푸스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사형선고를 하고는 떠나버린다. 제전(祭典)과 속죄양의 동물-되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첫 번째 속죄양은 희생되지만 두 번째 속죄양은 불모의 사막으로 추방된다. 기표적 체제에서 속죄양은 기호의 체계에 대해 엔트로피가 다시 상승하는 새로운 형식을 표상한다. 그것은 주어진 시기에 ‘나쁜’ 모든 것을, 다시 말해 기표적 체제에 저항한 모든 것을, 상이한 원환을 가로질러 기호에서 기호로 소급되는 과정을 회피한 모든 것을 대표한다. 그것은 자신의 중심에서 기표를 보충할 줄 모르는 모든 것을 떠맡으며, 나아가 가장 외부의 원환을 벗어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결국,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표적 체제가 견딜 수 없는 탈주선을, 다시 말해 이러한 체제가 봉쇄하거나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규정할 수 있는 절대적 탈영토화--이는 기표적 기호의 탈영토화를(그것이 이미 얼마나 강력한 것이든 간에) 넘어서기 때문인데--를 구현한다. 탈주선은 의미화 원환의 접선이며, 기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저주에 의해 엄습당할 것이다. 속죄양의 항문이 전제군주나 신의 얼굴과 대립된다. 체계를 탈주시킬 위험이 있는 모든 것을 죽이거나 탈주시킬 것이다. 기표의 초과분을 넘어서는 모든 것이나 그 초과분 아래를 지나가는 모든 것에는 부정적 가치가 각인될 것이다. 당신은 오직 양의 엉덩이와 신의 얼굴 사이에서, 혹은 마술사와 사제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완전한 체계는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사원의 기표적 중심에 자리잡은 신-전제군주의 편집증적인 얼굴과 신체, 그 사원에서 기의를 언제나 기표로 보충하는 해석적 사제들, 빽빽한 원환을 이루며 한 원환에서 다른 것으로 건너뛰는 히스테릭한 외부적 군중(foule), 중심에서 방사되며 사제에 의해 선택되고 취급되고 장식된, [동시에] 원환을 가로질러 사막을 향해 필사적으로 탈주하는 얼굴없는 우울한 속죄양. 이는 제국적 전제체제 뿐만 아니라, 중심화되고 위계적이며 수목적이고 예속적인 모든 집단(정당, 문학운동, 정신분석학회, 가족, 부부...)을 묘사하기에는 너무도 개략적인 그림이다. 사진, 안면성, 잉여성, 의미화와 해석은 모든 곳에 개입한다. 기표의 슬픈 세계, 항상 현재적인 기능을 갖는 기표의 의고주의(擬古主義, archaïsme), 그것의 모든 측면을 함축하는 기표에 본질적인 속임수, 기표의 심오한 어릿광대짓. 기표는 모든 국가장치 내에서 그러하듯이 집안일의 모든 장면에 군림한다.
1)Lévi-Strauss, “Introdution à l'oeubvre de Marcel Mauss”, Sociologie et anthropologie, PUF, pp.48-49(레비스트로스는 이 텍스트의 딧부분에서 기의가 갖는 다른 측면을 구별해 언급한다). 대기적 연속체의 이러한 일차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Binswanger와 d'Arieti의 정신병리학적 서술을 참조.
2) Lévi-Strauss, La pensée sauvauge, Plon, pp.278 이하 (두가지 경우의 분석)을 참조.
3) Lévi-Strauss, Préface à Soleil Hopi, Plon, p.vi
4) 예컨대 반투 족의 신화에서 최초의 국가 창시자는 그의 얼굴을 보여주며, 공적으로 먹고 마신다. 반면 전사인 사냥꾼은 비밀의 기술을 발명하고, 가리개 뒤에 숨어서 먹는다. Luc de Heusch, Le roi ivre ou l'origine de l'Etat, Gallimard, pp.20-25. Heusch는 두번째 계기에서 더욱 ‘세련된’ 문명의 증거를 보지만, 우리에게는 차라리 또 다른 기호계가, 공공 노동보다는 전쟁이 더 중요하게 보인다.
5)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p.33
*1) 이에 대해서는 제 4고원의 역주 *?) 참조. *2) 라캉은 이를 두고 “기의 위로 기표의 미끄러짐”이라고 말한 바 있고, 데리다 역시 “기표의 무한 연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소쉬르 이래 기표적인 기호학을 축으로 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러한 기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의미가 형성된다고 보며, 이런 점에서 의미란 그러한 기호들의 상호적인 소급을 뜻하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산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 에서 의미를 지시(désignation)나 표명(maniféstation)으로 보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더불어 기호 상호 간의 이러한 의미작용을 통해 정의하려는 입장을 비판한다. 즉 기호 상호 간의 이러한 소급은 조건지어진 것(의미가 정의되어야 할 기호)과 조건짓는 것(의미를 정의하는 기호) 간의 무한소급을 피할 수 없다는 역설에 봉착한다는 것이다(Logique du sens, p.30). 이러한 악순환을 중지시키기 위해 다른 기호를 조건짓지만 다른 기호에 의해 조건지어지지 않는 무엇을, 결국 기호 외적인 어떤 것(신체적인 것)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미는 명제로 표현된 사물의 속성”이란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호 외적인 무엇(잉여성)이 의미화하는(기표적인) 기호계에서도 결정적인 것이라고 본다. 한편 굳이 바교하자면 라캉은 그러한 ‘부동의 동자’를 ‘남근’(Phallus)이라는 기표, 아니 좀더 근본적으로는 objet petit (a) 내지 실재계라고 보는 셈이고, 데리다는 차연(différance)--의미를 낳는 차이화 운동 그 자체--라고 보는 셈이다. 다만 라캉의 실재계는 말할 수 없는 무엇이란 점에서 기표로 드러나기에는 너무 은밀하고, 데리다의 차연은 기호들 사이에 있다는, 아니 기호들 사이 자체라는 점에서 기표적 기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3) 결합축과 계열축은 구조언어학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전자는 문장이 만들어지는 통사적 배열을, 후자는 각 단어와 교환될 수 있는 다른 단어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나는 밥을 먹는다 --- 결합축(syntagme)
너 빵 마신다
그 술 씹는다
계열축(paradigme)
*4) 예를 들면 라캉이 말하는 남근(Phallus, Φ)이 그렇다(J. Lacan, “Signification of Phallus”; “Subversion of the Subject and the Dialectics of Desire”, Ecrit: A Selection).
*5) visage는 얼굴과 표정이란 뜻이 동시에 있다. 저자들에 의하면 얼굴은 머리로부터 탈영토화된 것이어서, 표정을 통해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때론 얼굴로, 때론 표정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얼굴을 돌린다”와 같은 표현이 있어서, visage는 대개 표정보다는 얼굴(안면)로, visagéité는 표정성보다는 안면성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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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아래 사이트에서 천의 고원 1, 2 를 다운 받으시면 됩니다.
http://blog.daum.net/saintj/13404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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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어진 십자가 복음 이름 : 이근호
2012-01-08 13:23:23
누가복음 18:31-34 감추어진 십자가 복음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 유대인들이나 사람들은 잘 이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난 경험 속에 역사가 담겨있다고 본 것입니다. 마치 군대를 막 제대한 예비군이 조금 전까지 소속되어 있는 자기 부대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경험해 본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활동과 활약에 의해서 유지되는 부대였기 때문입니다. 눈 올 때, 자신이 연병장의 그 많던 눈들을 치우던 그 부대를 자신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그 경험도 자기와 함께 의미 있게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 군대가 자신을 보고서 “모르는 자”로 취급한다면 얼마나 황당한 사태이겠습니까. 이처럼 유대인들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역사의 영속성을 믿고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한 나라라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이들을 모른다고 내치는 사건을 예수님을 보내셔서 일으키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해온 ‘숨어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아는 바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 과거 이스라엘과 현재 유다나라가 오로지 자신들의 이해와 애씀으로 지탱해 온 나라라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믿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입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합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가정과 교회와 나라가 결코 ‘숨어 있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자신이 애써서 가꾸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생각을 달리하십니다. 인간들은 계속해서 ‘숨어 있는 이스라엘’에 무지몽매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메시아를 보내주어도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이어줄 그런 인물로 포함시키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사람들 손에 죽게 됩니다. 정작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분이 역사 중심의 현실관으로 인하여 이단취급 당하는 것, 이것 수난의 흔적으로서 ‘숨어있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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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강-눅18장 31절-34절(감추어진 십자가복음)1201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8장 31절에서 3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27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8:31-34
“예수께서 열 두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이 감추어 놓았는데 인간이 무슨 수로 말씀을 깨달아서 구원을 받겠습니까? 우리는 교회를 수십 년 다니면서도 내 쪽에서 구원을 얻어내겠다는 그 심보가 변함이 없어요. 왜 그렇게 성경을 수십 년 안 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식으로 구원되지 못하도록 하는 곳이 하늘나라고 천국이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감추어놓은 비밀을, 자기만 아시는 그 비밀을 따로 선택된 사람에게만 알려줘서 선택된 사람으로 하여금 ‘아, 이런 것도 있었네. 이런 식으로 구원받네.’ 깜짝 놀라는 식으로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돌릴 때 그 때 그 사람은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게 되면 오직 그것으로 오직 주님의 영광만 돌리는 나라,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다른 코스가 없어요. 다른 길이 없어요.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했지만 사실 정답은 뭐냐, 길은 없어요. 왜냐, 감추어 놓았기 때문에 그래요. 길이 감추어졌기에 인간은 모르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감추어놓은 길을 대체해서 인간 쪽에서 점점 더 알아가고 그 알게 된 논리에 계속 덧붙여서 아는 논리 더하기 아는 논리, 진리에 진리를 덧붙여서 인간 쪽에서 납득되는 식으로 천국 도달했다는 사기를 치는 그 현장이 바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묻습니다. 교회로 구원받나, 복음으로 구원받나, 성경 펴놓고 한 번 보자는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답답한지 모르겠어요. 교회가 재미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재미있게 살 입장이 못 됩니다. 죄짓고 나서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되고 여자들은 고통 속에 있어야 되고, 그게 뭐가 재미있는데요? 순간적으로야 재미를 만끽하지만 또 다시 그것이 시들해지고 시시하고 그래서 또 다른 재미를 찾아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돌변할지 본인도 장담을 못해요. 어디로 어떻게 빠질지.
아침에 인터넷뉴스를 보니 미국의 한 신부가 카지노에서 공금 7억을 날렸답니다. 성당 신부가 가지고 있는 공금이 누구 돈이겠습니까? 교인들이 헌금한 돈이겠지요. 성당이 무슨 생산 단체도 아니잖아요. 신부보고 “당신은 왜 카지노를 갔습니까?” 그 사람의 답변은 하나밖에 없어요. “재미있으니까”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신부만 그럴까요? 모든 인간은 새로운 재미를 창출하면서 살아갑니다. 제발 나로 하여금 재미있고 즐겁게 해 달라. 『호모루덴스』라는 책에 보면 “인간은 처음부터 즐거움과 게임을 위해서 산다.” 하지요.
사람이 게임할 때 괴롭지만 게임에서 승리할 때의 기쁨은 그 게임에 투자하는 괴로움을 거치지 아니하면 승리라는 희열을 만끽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힘들고 어렵더라도 경쟁과 승부의 세계, 투쟁의 세계에서 승리를 했다는 그 즐거움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게임은 무효가 됩니다. 아, 이거 미칩니다. 무언가 얻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서, 남에게 기죽지 않았다는 그것을 자기자신의 삶의 보람과 꿈으로 여기고 매진했는데 그 게임이 무효가 되어버리고 승리가 무효가 되고 승리의 면류관이 다 무효가 되고 그 영광의 트로피가 다 쓸데없는 트로피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그 소리에 기겁을 할 거예요. 언젠가 한국하고 어느 나라하고 축구를 했는데 박주영이 한골 넣고 또 다른 선수가 한 골 넣고 2대 0으로 이겼습니다. 그런데 세계축구협회에서 그 시합을 무효로 처리했습니다. 왜냐, 교체선수가 규정 이상으로 너무 많이 들어갔다고 해서 무효처리 해버리니까 박주영이 한 골 넣은 그것도 같이 무효 처리되고 말았어요. 게임의 룰에 위반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인생이 자체적으로 승리를 만끽하고 이기고자 하는 이 모든 게임, 누가 잘 났나 못났나 하는 이 모든 게임이 하나님 보기에 다 무효가 되는 거예요.
그냥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냥 자기 재미를 위해서 살아 온 거예요. 나 이정도 된다, 날마다 그것 확인 차 몸부림 쳐 본 겁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우리 가운데 잘 난 사람이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문벌 좋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똑똑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바보 같은 것, 문벌도 없는 것, 재주도 없는 것, 돈도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세상 가장 없는 자와 함께 있었다는 말이지요.
바로 그것이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책도 많이 보고 늘 끼고 살던데, 늘 차에 두고 살고, 그런데 대체 뭘 보고 있는지, 어떤 대목을 보고 있는지, 왜 교회 와서 기도하기를 ‘주님이여, 이번 게임에서 승리케 하시고 이번 전쟁판에서 내가 승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대체 어느 구절에 근거해서 그것을 할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다른 사람 다 떨어져도 우리 애는 대학 합격하게 해주시고 다른 사람 다 탈락해도 나는 승진되게 해주시고.’ 그런 기도는 어느 대목에 근거해서 그렇게 했느냐는 말이지요.
시편 4편에 이런 말씀 나오지요. 이런 말씀 전하면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부끄러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7절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지금 말을 하면서도 염치가 없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함”이란 현대어로 번역하면 돈이 팍팍 들어오는 것을 말하거든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갑자기 집안에 돈이 팍팍 들어오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주께서 주신 기쁨이 오게 되면 돈이 얼마가 있느냐, 하는 것을 따질 겨를도 없이 기쁩니다.’ 라는 거예요.
이 말씀과 방금 제가 이야기했던 ‘있는 자를 통해서 없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무식한 자들 통해서 똑똑한 자들 부끄럽게 하셔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려 함이라.’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함을 자랑하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용서하고 영생주기 위해서 이미 모든 것을 확정지어서……, 그것은 이미 게임이 다 끝난 이야기입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하지 않아도 이미 끝나서 확정되어 버린 이 구원의 기쁨은 내가 경쟁판에 뛰어들지 않더라도, 내가 탈락하더라도, 내 자식이 시험에 불합격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인하여 얻는 기쁨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이미 주어진 거예요.
누가 나를 정죄합니까? 주께서 날 위해 돌아가셨는데. 심판주가 날 살리기 위해서 '널 책임지고 살려낼게.’ 했는데 어떤 마귀가 ‘어느 성경은 어겼고, 어느 성경은 안 지켰고, 어느 성경은 네가 위반했으니 못난 놈이라고 누가 우리를 힐문하고 누가 우리를 정죄합니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성경을 보면서 기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기쁨이 아닐까요? 다른 기쁨이 뭐가 있습니까? 다른 기쁨이. 촌스러운 기쁨 말고, 이 땅에서부터 하늘나라 사람답게 놀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어떤 사람을 볼 때에도 누가 지나갈 때도 ‘저 사람이 천국 갈 사람인가?’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저를 마주하는 사람은 ‘내가 이 정도 하면 교회 봉사했다 할 만 하지요?’ 나는 저 사람이 천국 갈 사람인가, 하고 보고 있는데 그 사람은 ‘아, 목사님 되십니까? 나는 기존교회에서 이렇게 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자기가 그 교회에서 이 정도로 쓸모 있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거예요. 얼마나 목사들이 사기를 쳤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교회충성 봉사하는 사람이 천국에 합격 될 사람이냐 하는 소리지요.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질문하기를 ‘그렇게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죄가 된다면 교회 봉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답변 안 달려고 하다가 참았어요.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봉사하는 것과 교회 봉사하는 것이 다릅니다. 천국은 이미 주께서 주신 기쁨이 넘쳐서 교회 그까짓 것은 없어도 괜찮아요. 지금 소고기가 비싼 이유가 뭡니까? 유통단계가 7단계니 10단계니 너무 많아서 그런 것 아닙니까? 요즘 송아지 한 마리 산지에서 만원인데 삼겹살 반근 값밖에 안 되잖아요. 삼겹살 한 근이 2만원이니까요.
유통단계가 문제거든요. 말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말씀을 감춰 두었어요. 감추어두었기에 아무도 몰라요. 주님의 숨바꼭질 게임에서 주님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어떤 신학과 과학과 철학, 어떤 노력, 헌신, 봉사로도 찾지 못합니다. 그렇게 감추어두었는데 색출이라 할까, 자기백성을 색출하는데 성령으로 택한 백성에게만 줘버리면 유통단계가 일원화되면서 모든 단계가 끝나버려요.
산지에서 송아지 한 마리가 만원 같으면 정육점에 가서 “국거리 두 근, 불고기감 다섯 근 합이 얼마입니까?” “250원입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유통단계가 싹없어져 버리면 그렇게 나와야 된다고요. 유통단계가 많다는 것은 중간에 커미션 먹는 인간들이 많다는 소리에요. 그 커미션 먹는 인간들이 목사들이라니까요. 천국에 보내 줄 테니 돈 내라는 인간들. ‘목사님, 저 십자가 피로 구원받았어요.’라는 기쁨이 나와야 할 텐데 그따위 것이 유통되다 보니까 ‘내가 이 교회 안다니고 저 교회 다니면 교회 봉사한 그것을 알아주겠습니까?’ 교회 봉사 하고 안 하고를 가지고 성도를 측정하는 거예요.
분위기가 이미 지옥분위기로 끝나버렸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저만 좀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필요 없다.” 아무도 몰라요. 예수님만 아시고 하나님만 아니고 아무도 모르는 것, 심지어 열두 제자도 같이 다니면서도 아무도 몰라요. 드디어 주께서 어디를 가야 그것이 공개되느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그 감추고 감추인 그것이 공개됩니다. 그것은 교회 세우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든 중간 유통단계를 다 끊어 버리고 예수님과 그 사람, 그 사람과 예수님을 직접 연결시키는 거예요. 요한 일서 2장 27절에 보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직접 너희를 가르치는데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말이냐. 내 성령, 주님의 영이 직접 너희를 가르치리라.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모여야지 시발점으로 모이면 안 됩니다. 결과적으로 모여져야 돼요. 결과적으로 모일 때 그 교회 구성원들의 연결점은 오직 인간이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해야 돼요.
그것을 저는 천국에서만 통하는 통용어, 천국통용어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세상 문자로는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세상언어로는 통할 수 없는 것. 지난 수요일에 훈민정음 서문 좀 외웠다가 쿠사리 실컷 먹었어요.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서 서로 사맛디 아니할쌔’ 이것 외우다가 자랑하나, 하고 혼났어요. 앞으로 주의해야 돼요. 천국통용어의 핵심내용은 ‘인간이 인간의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가 기본 전제로 깔려 있어야 돼요. 왜 할 수 없었는가? 몰랐으니까, 아예 무지하니까.
“하나님, 저 어떻게 구원해요?” 주께서는 “너는 모르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요?” “몰라도 돼.” “그러면 저하고 이야기 안 해요?” “다른 분하고 이야기 할거야.” 예수 그리스도하고 하나님하고 모든 일이 다 끝나야, 완료되어야 그 완료된 이후에 우리한테 통보하는 식으로 구원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시험 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 구원될 거냐, 구원 안 될거냐 하는 것은 저쪽에서 심사해서 심사결과를 통보해주면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통보된 그 과정 속에만 우리가 지금 이끌림 받은 거예요.
통보를 받고 나니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중간의 유통단계를 다 제거해버리고 주님과 그 사람 사이에서는 “네가 뭐 한 것이 있나?” 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가 뭘 좀 하데?” “주님이 하신 일 외에 다 죄입니다.” “그렇지?” 그 이야기만 주고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 유통단계에 검은 악마의 손길이 파고 들어갑니다. 목사이름으로 파고 들어와서 뭐라고 하느냐, 주께서 인정한 적도 없는 악마의 종이 치고 들어와서 하는 말이 “어이, 너 구원 받았어, 안 받았어?” 그러면 성도는 “저 구원 받았는데요?”
그러면 그쪽에서 이런 소리가 대번에 나옵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나와야지.” 자기가 왜 남의 삶까지 관리하려 하는데? 너나 잘하세요. 너나! 남의 삶을 목사 네가 왜 관여하느냐 그 말이지요. “성도의 삶이 나와야지.” 그렇게 하거든요. “성령에 합당한 삶이 나와야지.” 그런다고요. “누구세요? 어느 도매상에서 나왔습니까?” 유통단계를 다 끊어내서 이미 없는데. 사람이 사람을 관리하겠다고요? 무슨 자격으로 그따위 발상을 합니까? 자기가 뭔데 남의 신앙에 왜 개입해요? 그렇게 건방진 것이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먹힌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 사람이 성도가 아니고 성도가 아닌 사람한테는 다 먹혀요. “목사님, 성도의 삶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옵소서. 저는 신학을 전공 안하고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성도의 삶이 뭔지만 가르쳐 주시면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하겠습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은혜 받은 대로 헌금해야 되고 은혜 받은 대로 …….” 이게 뭡니까? 무슨 게임이 그런 게임이 있어요. 누가 성과가 더 좋고 누구는 나쁘고, 이것은 성령 받지 않으면 그런 목사가 오기 전부터 본인부터 이미 그런 시선으로 자기를 본다는 것을 알아서 본인이 자료준비를 먼저 하고 있어요.
그런 게 필요 없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성깔을 가지고 교회 와서 나도 목사 장로 앞에서 이만큼 훌륭한 신자임을 티내는 즐거움과 재미를 붙들고 구원받으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이것은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성령 안 받은 이상 다 그래요. 세상의 포도주와 세상의 재물로 인하여 즐거워할 사람 같으면 그것을 즐거워했다가 나중에 죽었을 때 생각하면 찝찝하니까 이 즐거움에 죽어서 천당 가는 즐거움을 보태겠다고 생각을 먹는다면 꼭 그러한 악마의 종들이 주위에 자꾸 옵니다. 그래서 그 악마의 종으로부터 칭찬받고 싶어 하고 “훌륭하십니다. 이 시대의 빛이고 소금입니다.”라는 소리를 본인이 듣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들이 익히 아는 겁니다. 그 방법 말고, 우리 유통단계를 뺍시다. 구원을 공짜로 먹을 수 있는데 왜 돈을 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에 값없이 구원되었다고 하는데 왜 그것을 돈 주고 사야 된다는 말입니까? 평소에 더러운 마귀적인 버릇이 들어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미국의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이 근호 목사는 헌금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좀 많이 널리널리 퍼졌으면 좋겠어요. 돈 좋아하는 사람들 우리 교회로 좀 오게.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은 우리가 몰라도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두 분간의 심사 가운데서 이미 확정되었어요.
“창세전에 예정된 자 맞아요?” “맞아 맞아. 그런데 쟤는 아니야.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아니야.” 이러한 주님과 주님사이의 의견은 감히 피조물 된 우리 입장에서는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내 운명에 대해서 내가 손댈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용해주셔야 됩니다.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괴로워집니다. 이것은 마귀의 놀림감이 돼요. 마귀가 채찍질 하면서 “좀 더 열심히 해야지.” 한다고요. 그런 것은 세상 수능시험 칠 때, 세상 시험 칠 때, 돈벌이 할 때나 그렇게 하세요.
교회에서도 그런 짓 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구원받을 때는 그런 방식을 안 합니다. 익히 그것은 인간들이 아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그 구원의 핵심은 뭐냐, 핵심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친히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가면서 우수수 낙엽 떨어지듯이 다 떨어지지요. 주변에서 얼씬 거리면서 ‘주님, 도와드릴까요?’ 하던 인간들 다 떨어져버려요. 주님 홀로 예루살렘에 가심으로 홀로 남는데 거기서 능욕을 받아요. 32절에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 하고 죽일 것이니.”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 겨냥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마귀가 다른 사람은 시시하게 여기지만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뭐가 나오는지도 알아요. 모든 유통단계를 다 없앤다는 사실도 알아요. 그 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받는 것도 알아요. 그것이 악마의 세계가 궤멸되는 최후의 무기가 되는 것도 알아요. 악마는 자기의 전부를 다 바쳐서 진검승부에 들어갑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입을 막고 없애버리는 쪽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죽지? 그 사람 죽는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렇게 여기는데 이것이 상관이 있다는 것을 마귀가 알아요. 일반인들은 몰라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죽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 살아 있는 사람 바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다가 죽으면 마을 뒷산의 공동묘지에 가잖아요. 죽은 자들끼리 모여주세요, 이런 식으로 그쪽으로 보내지 살아 있는 시장통이나 공회당에서 죽은 자 운구하면 재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살아 있는 그 가운데서 죽음을 바깥에 세우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그 한복판에 자신의 죽음을 끌어오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 그대로 하면 예루살렘은 성경말씀이 그대로 응해야만 예루살렘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되어 있어요. 어떤 진가냐, 예루살렘의 수많은 사람이 죽고 태어나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 구원을 완성하고 심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그 분에 의해서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데 그 벌어진 일은 어떤 다른 사람도 아무도 모르게 되어 있는데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그 일이 벌어질 때 그 벌어진 일을 근거로 해서 사람은 천국과 지옥, 지옥과 천국으로 갈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루살렘의 죽음은 특수한 죽음인데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평소에 기대했던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살아야 돼.’라는 그 삶 말고 부활이라는, 죽음조차 이기지 못하고 영원한 영생이 보장되는 새로운 생명은 다른 사람은 죽어도 그것이 안 나타나는데 말씀이 응했던 분이 돌아가셔야 비로소 영원한 생명이 비로소 나타나는 거예요. 본문에 보면 “저희가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계를, 자기를 채찍질 한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누가 나를 모독하고 누가 내 옆에 배치되어 있고 심지어 예루살렘 들어갈 때 탈 나귀가 어떤 종류의 나귀인지 다 아시고 그래서 주께서 친히 준비하신 나귀타고 가신 거예요. 가면서 무화과나무가 어떤 식으로 저주받는다는 것도 파노라마처럼 다 알고 계시는 겁니다. 알고 계신다는 말은 성도에게 어떤 위로가 되느냐,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인 것을 네가 믿으라, 그 말입니다.
이란이 핵개발 하는 것도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연평도 앞 바다에서 화물선 폭발하는 것도 십자가를 위해. 화물선 폭발해서 죽은 선원들의 유족들은 교회 가서 “아이고, 하나님, 내가 신앙생활 잘하는데 내 남편을 왜 죽게 합니까?”라고 탄식을 하더라도 그것도 복음을 위해서, 어떤 사람이 우리를 능욕하고 기분 나쁘게 하는 그것도 기분 나쁘지만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위해서, 이미 말씀이 다 응했다는 그 사실을 통고받기 위해서.
세상 모든 일이 복음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복음이라는 그 우산 아래서, 복음 안에서 이미 우리는 보호를 받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나오는 유명한 노래가 남진이 불렀던 둥지, 둥지를 틀어라. 주님께서는 둥지를 만들어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이미 심판주가 너를 의인이라고 판정을 내린 상황, 우리가 의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에 의인일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만약에 완벽한 죄인이 아니고 조금이라도 의가 나온다면 그 의인은 주님의 의와 충돌을 일으켜서 천국에 못갑니다.
그래서 다 빼버려요. 우리 의, 내 행함, 내가 말씀 지킨 의는 다 빼버려요. 철저하게 순수하게 죄인 되게 만드는 그 능력이 우리를 죽음의 공로만 돌릴 수 있는 재료로서 계속해서 생산되는 거예요. “주님 최고입니다. 주님 최고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이것이 다 복음을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게 주님에게만 공로를 다 돌리는 여건들이 조성되는 그것이 둥지를 트는 거예요. 세상에서도 둥지를 틀어요. 세상에서는 자기만 살면 되는 둥지를 틀어요. 결국 둥지 싸움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둥지하고 성도의 둥지가 달라요. 세상의 둥지는 소유로 만들어요. ‘나는 이것을 가졌다. 나는 저것을 가졌다. 이것까지는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유로 만들지만 예수님의 둥지는 소유가 사라지고 시간이 등장합니다. “때가 되매 주께서 구름타고 오실 것이다.” 성도를 감싸는 것은 성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고 시간입니다. 모든 소유는 시간으로 해체되어 버리고 주님의 때를 따라 오시는 그 시간이 성도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인간의 혈육, 혈육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육, 육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인간의 신체, 인간의 몸, 인간의 몸은 인간 몸을 위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시간이 흐릅니다. 시간이 죽 흘러가는데 자기 몸에서 흘러가는 시간에 자기가 담고 싶은 것은 담고 버리고 싶은 것은 버리는 자신의 판단력이 동원되어서 자기에게 유리하고 자기를 빛낼 사건들만 모아서 담아버리면 그것이 역사가 되어버려요. 그것을 제가 어느 글에 장바구니라고 했어요. 물건 고르듯이 자기를 옹호하고 변호할 만한 것은 다 담아요.
역사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용어로 바꾸면 나의 신앙경력이 됩니다. ‘내가 과거에 교회를 몇 군데 세우고 어디서 어떻게 봉사를 하고 …….’ 이러한 신앙경력이 되어버립니다. 자기의 시간이라는 것은 내 영광을 위해서 시간들이 자기 몸에서 퍼져 나갑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몸의 중심이 되는 거지요. 그 신앙의 경력을 그 사람들은 두 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또는 은혜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또는 은혜로 나는 이런 신앙경력을 가지게 되었기에 이것을 하나님 앞에 내 밀면 천국에 합격시켜 준다, 이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라고 언급을 하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 말고 다른 생각 할 것이 있습니까? 다들 그렇게 살아가잖아요.’라고 하는데 지금부터 그 생각 말고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쨌든 인간은 신앙의 경력인데 은혜로 한다, 이것을 멋들어지게 포장을 하지요. 그런데 제가 쓴 글에 보면 그 장바구니를 발로 걷어차 보자는 겁니다. 발작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할 때 그 살아왔다는 것은 신앙경력이 있고 그 신앙경력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꽉 차 있는, 그런 멋진 인간으로 살아간다고 하지요.
그런데 나이 한 50되어서 어느 바닷가에 놀러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고등학교 2학년 때 17대 1로 싸웠던……, 흔히 17:1이라고 하면 나 하나에 상대방 17을 연상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상대방은 하나인데 잔챙이들 속에 하나로 자신이 포함되었던, 그래서 상대방이 자신을 찌질이라고 놀렸던 바로 그 친구가 “어이, 찌질이! 인물 훤하네. 요새도 찌질이로 노나?” 할 때 “쉿, 마누라 듣는다.” “에이, 그 찌질이 맞네. 나한테 만 날 얻어맞고 돈 빼앗기고 울던 그 찌질이.” “쉿! 쉿!” 왜 이러는가? 자기가 자기역사를 꾸밀 때 뭘 빼놓았느냐, 남에게 자기위신에 손해난다 싶은 것은 다 빼놓은 거예요.
50대 아주머니가 청소부 이력서 내라고 하면 ‘수물 두 살에 처음 이혼했고 42살에 두 번째 이혼했고 …….’ 그런 것을 씁니까? 그 찌질한 것을 왜 써요. 좋은 것만 쓰지요. ‘내 아들이 의사지만 제 일이 하고 싶어서…….’ 이런 것 쓰잖아요. 자기 둘째 아들 사기 쳐서 구치소에 있다는 식의 내용은 안 들어갑니다. 인간의 역사란 전부 다 선별적으로 자기가 심판하는 판단주로서 자기만의 역사와 시간을 씁니다. 그렇게 판을 짜놓고 거기에 누구보고, 예수보고 마중 나오라고요?
이것은 횡포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시간이라는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을 때만 시간이 되는 거예요. 이번 수련회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 봉창이 중국의 한 공원에서 도시락폭탄을 던져서 중국의 장개석이 ‘야, 한국 민족이 살아 있네.’ 해서 자금을 대줘서 상해임시정부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이봉창이 얼마나 좋습니까? 안 그랬으면 임시정부 만들지도 못했을 거예요. 안중근이가 이토오히로부미 쏘아 죽이니까 그때부터 안중근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중국공산당에 가담을 하게 되었어요. 중국공산당에서 반겨줬으니까요. ‘야, 이제 보니 민족성 살아 있구나.’
그 중에 한 사람이 김일성이고 그래서 중국과 북한은 혈맹으로 맺은 나라입니다. 6.25전쟁 때 중국군대가 압록강 넘어서 내려왔어요. 그러니 중국과 북한을 혈맹이라 하는 거예요. 이런 것이 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상의 모든 역사라는 것, 현재 자신은 우수한 역사와시간의 흐름의 뭉치고 뭉쳐서 오늘날 빛나는 내가 되었다, 전부 다 자기에게로 환원되고 자기에게로 쏠리는 역사, 그런 사고방식 말고 다른 것이 뭐가 있습니까? 있어도 없는 거예요. 자기 몸 위주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말이 통용되지도 않고 천국의 말이 이해도 안됩니다.
그저 교회의 말은 이해가 돼요. 교회라는 것은 누구 자존심을 위한, 나의 괜찮은 요소 속에 채택될 수 있는 역사로서 교회다님이 성립되거든요. 그 역사라는 날 위한 시간의 판대기, 그것을 주님께서는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시간 가지고 바꿔치기 해버립니다. 예수님이 몸에서 나온다는 말은 예수님의 능력 받으심에서 나온 거예요. 그것도 예루살렘이라는 곳에서. 예루살렘에서 말씀대로 응해서 능욕 받으시고 수모를 당하시는 겁니다.
그 능욕과 수모를 당할 때 누가 능욕시키고 누가 예수님보고 수모를 퍼 넣었습니까? 자기만의 역사를 고집하고 자기만의 역사를 주장했던 반 복음적 해석을 갖고 있던 그 인물들이 주변에 포진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 잘남 위주의 역사로 한다면,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도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뺨을 치고 욕설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왜, 나의 역사를 감히 예수라는 존재가 모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그런 겁니다. 십자가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라는 식의 이 순신 장군의 죽음 같은 죽음과는 격이 달라요. 이것은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사건이에요.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하지요. 이 자기목숨까지 미워하라는 이것이 뭐냐하면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해도 순서상 일단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해요.
내가 나부터 사랑하게 되면 나의 시간대, 나의 역사대가 출발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웃을 사랑할 때 어떤 이웃을 사랑하느냐, 이 훌륭하고 건전한 내가 나를 더 훌륭하고 빛낼 만한 인물로 누구를 만나서 역사 속에 ‘나는 누구를 안다’ 혹은 ‘누구를 만났다’는 소리를 기입할 수 있는가를 판별해서 만나요. 그렇다면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 사랑이라는 연장선 속에서 그 사람은 내 사랑 속에 포함될 수 있다 싶어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겁니다.
여자가 남자와 만나서 결혼할 때도 남자를 사랑하지 않아요. 왜, 언제 봤다고? 나이 서른이 다 될 동안 그 사람을 언제 봤다고? 다만 저 남자 같으면 내가 지금 한 창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 사랑에 폐해가 안 될 사람이고 내 사랑을 더욱 빛낼 만한 멋있는 남자라고 생각을 해서 집어넣습니다. 집어넣다가 남자가 자기 본색을 드러내면 ‘나가’ 해서 나가리 되어버리지요. ‘너는 앞으로 나보고 사귀었다 소리 하지 마라.’ 왜, 내 역사에 오점을 남겼잖아요. 인간이란 무엇이냐, 간단한 문제에요.
일단은 자기사랑이고 자기 사랑하는 그 능력이 누가 자기 힘으로 극복이 됩니까? 극복하려고 하면 어떤 우스운 꼴에 들어가게 되느냐, 주의 말씀에 ‘나를 사랑하려거든 자기를 미워하라’고 했으니까 ‘그래, 내 잘난 역사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주지.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 그 정도로 나는 예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나를 미워해요. 나를 미워하면서 나를 미워했다는 그 업적이 그대로 나에게 훈장처럼 붙여서 내가 나를 미워한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 나는 나까지 미워할 수 있는 질 좋은 나로, 우수한 나로 다시 도로 돌아옵니다.
다시 돌아왔는데 그 우수한 나가 말씀을 더욱 실천에 옮기려면 그렇게 괜찮은 나를 또 다시 미워해야 돼요. 미워해서 거기서 나오는 곱빼기 성과를 다시 내 것으로 삼아야 나는 전보다 더 질 좋고 우수한 나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수련회 마지막 시간에 ‘왕복운동’이라고 했어요. 미쳤어요.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인간은 거기에 갇혀 있어요. 꼭 다람쥐 체바퀴 돌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을 못 벗어납니다.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육신이 자기를 미워해 봤자 자기를 미워했다는 그 놀라운 성과를 도로 자기 것으로 가져오기에 인간은 자기를 미워하면서도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사랑이 우선이고 내 사랑을 키우기 위해서 남까지 사랑하고 하나님까지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미움 받으라는 거예요. 남한테 미움 받으면 너는 너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남이 누구냐,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저주받았잖아요,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말고 그 저주가 너의 역사, 찬란한 역사를 박살내면 그 박살내는 군화발이 바로 십자가에요.
그러면 내 속에는 내가 나의 사랑이 아니라 나를 너무나 사랑하사 나에게 주님의 저주를 안겨주신 주님의 몸으로부터 새로운 시간이 등장하면서 나의 고유의 시간은 없고 주님의 고유의 시간에 합류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어렵습니다. 내 몸의 역사가 아니라 주님의 자기 몸의 지체를 만드는 그 몸의 시간에 의해서 우리는 일천구백 몇 년도에 어떤 사람은 천 팔백 몇 년도에 태어났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몸으로서.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그렇게 태어난 몸으로서 또 따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지요.
십자가에서 강도도 예수님의 자기 몸 안으로 흡수해서 당겼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내 손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주님의 몸에, 주님의 시간대에 흡수 통합되면 그것을 세례라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성령이 올 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은 나 좋으라고 시도했던 어설프기 짝이 없는 종교적인 위선이었고 몸짓이었어요. 그것을 주의 말씀은 ‘그런 짓 안 해도 되거든’ 이라는 기쁜 소식, ‘구태여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되거든. 이미 너는 구원받았거든. 이제는 구원받은 그 기쁨이 네가 갖고 있는 소유물, 포도주와 곡식의 풍부함보다 더 하다’ 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어설퍼도 됩니까?” “어설퍼도 되거든!” “남들이 욕하는데요.” “욕먹어도 괜찮거든.” 왜, 주님도 능욕한 세상인데, 선지자도 함몰시킨 세상인데 예수님께 구원받은 백성을 세상이 그냥 둘 수가 없지요. ‘저것은 행함도 이야기하지 않고 막산다고 하더라.’ 온갖 이야기를 다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그런 능욕을 받거든 성령이 여러분 위에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인간들, 오직 그것만 몰두해서 그것을 나의 새로운 역사로 전개시키는 인간들의 부지런함, 하지만 그런 게임에서 승자가 없음을 알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숨어 있는 비밀, 이미 예수님만 승자이고 그리스도의 혜택을 입고 효과를 보는 자만이 영생에 이른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의 돈보다도 우리의 재산보다도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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