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심]에 소유당함 ;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
야고보서 질문입니다.. 이름 : 김풍호
2012-04-17 11:15:09
안녕하세요..
1.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가요?
2. 야고보서는 언약과 어떠한 연관성을 중심으로 봐야 하나요?
3. 야고보서를 맞닥뜨리면 드는 생각이 "권면대로 행동을 해야 될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사도니까.. 왠지 시키는데로 해야 될 것 같은 분위기가 흐르네요.. 왜 그런가요? 언약을 대하는 "나" 의 "비언약성" 때문인가요?
이근호 12-04-17 14:52
1. 그동안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말씀 성취의 자리를 '완성된 율법'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때, 성도에게 어떤 영향력이 제공되느냐 하는 겁니다.
2. 야고보서의 언약은, 구약 역사가 통채로 언약의 바탕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성취하시고 보여주신 언약의 본질이 구약 역사상 일어났던 일들이 사례로 삼고서 진가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3. 하늘의 은사가 발휘되면(약 1:17) 인간은 졸지에 자신을 '안개'로서 (약 4:14)로 규정받게 됩니다. 즉 자체적으로는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하늘의 은사가 율법 완성이라는 내용을 담고 성도에게 주어지게 되면 오로지 긍휼(=율법 완성)만 나타내는 도구가 됩니다.(약 2:10-13) 결론적으로 말해서, 야고보서의 특징은, 인간이 만들어야 될 교회는 없습니다. 단지 옛 이스라엘 역사처럼 '하나님의 혈통을 소지한 백성만 나타날 뿐입니다.(약 1:1)
김풍호 12-04-17 18:13
추가적으로 궁금한 것 질문드립니다..
1. 율법완성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때 "다이루었다"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2. 마태복음 5장 17~20절 대전강의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율법의 완성에 대해서 설명을하셨는데요. 강의 때 설명하신 "율법의 완성"과 답변에서 언급하신 "율법완성"은 같은 의미인지요?
이근호 12-04-17 19:55
1. 참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내부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본질이 외부로 만개하는데 첫째, 예수님 단독으로 아버지하고 창세 전에 언약하신 바가 있었는데 그것이 개인 자격으로 온전히 수행했다는 점이다. '다 이루심'입니다. 둘째, 다 이루심이 인간세계에 확산되는데 있어 미리 바닥에 깔아놓은 것이 율법입니다. 이 율법에 대해서 인간들의 성취도와 예수님의 성취성을 비교하면서 진행됩니다. 여기서 인간들이 성령을 통해서 느껴지는 바가 곧 '울법완성'입니다. 정리하면, 예수님 차원에서 "다 이루심"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율법완성'이 됩니다.
2. 같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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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심'에 소유당하기, 십자가에 소유당하기, 피흘림(긍휼,화목제물)에 소유당하기
다 이루심에 소유당함 ;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
2012년 4월 17일 화요일 오후 10:01:08 김대식
이 질문을 보고 한번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존 말코비치 ? 되기” 라는 영화의 첫장면을 보면
꼭두각시 인형을 위에서 인형사가 부지런히 손가락으로 움직여서
자신의 변이(거룩=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 레 11:45)로써
실을 타고서 내려온
거룩(율법의 완성=사랑=인형사 자신의 변신)은 인형에게서는 불가항력적인 다 이루심으로 작용합니다.
그 다 이루심으로써 인형(로보트? 기계 되기)은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사랑인고 하니
땅에서의 지독한 미움을 유발한다는 겁니다.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그럼 땅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고 하니
사랑이 아닌
독자적인 실없는 자발적 인형으로써
그 실체가 사랑(다 이루심=율법 완성)을 미워하는 모습이 비로소 나타나는 겁니다.
(서로 원수지간)
결국 사랑(율법의 완성)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때려죽어도 미움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법궤 뒤에 숨어서 법궤의 효력을 자기를 위해 이용함으로써
대중에서 먹히도록 하는 그야말로 마귀의 3가지 시험에 모든 유대인 모든 인간이 다 장악당함을 보여주고 그 배경을 깔고서 철저한 단절 속에서 인자가 등장, 믿음이 등장하는 겁니다.
(장대 높이 달려야 할 인자의 들리심)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
아브라함의 이삭 바치는 인신제사이고
기생라합의 거짓말입니다.
일부러 땅의 독자적인 인형들이 공격하기 쉬운 그야말로 거져먹는 부정함이지만
도리어 이 부정성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 미끼가 되어서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받기 위한 빌미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마귀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부정함입니다.
마귀를 끌어들이지 못하는 부정함 곧 막살기는 거짓입니다. 항상 마귀와 연관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주님 자신이 홀로 다 이루어 놓고서는(자작극) 우리에게 그 자유 곧 은혜를 나눠주시면서 누리라고 주심이 선하다 또는 옳다여김을 받았다. 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 은혜를 받음을 믿었다 라고 일방적으로 덮어씌우는 식입니다.)(막살기를 인간이 그것조차 흉내내는 것은 자기영광을 위한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피흘리심과 연관된 막살기는 때려죽어도 싫은 겁니다. 예수님의 자기 목숨내어주심과 짝이 되는 막살기 곧 죄인 중의 괴수 되기의 죄인됨은 의사만의 영광을 위하기에 악마는 싫은 겁니다.)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결국 예수님의 자작극이지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내 주께 곧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이지,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마 11:27))
인간(육의 소원) 쪽에서의 창작극(인간의 소원 곧 신념 믿음 행함)이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도리어 그 인간은(아브라함, 기생라합) 배제 당하는 식입니다.
(오히려 그 배제당함이 은혜이지요. 곧은 목 뿌러지는, 꺽어버리심이 아니면 누가 높이달릴 인자를 쳐다보겠습니까? 자기 믿음에 빠져 자신에게 미쳐있는 인간인데? 오죽하면 니 손으로 이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라고 했겠습니까? 니 믿음 가짜다 라는 것이죠. 나는 매일 매일 가짜입니다 라는 것을 그 십자가가 아니면 밝힐길이 없거든요? 내 손에 남이 아닌 내 손에 죽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매일 매일 예수님을 조작하는 다윗은 그 죄아래 가두는 율법에서 벗어날길이 없습니다. 자기숙제에 미쳐버릴테니까 말이죠. 자기숙제 바깥의 예수님의 숙제 때문에 너끈히 빼돌림을 당하는 겁니다. 세간 주제에 숙제하다니요? 그래서 주인결박하는 방법은 십자가 뿐입니다. 스캔들)
그러나 그 누락 당해도 상관없음이
이미 처음부터 주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후사로써 즉 약속을 배태시키기 위한 열매로써
주님이 우리 안에 약속을 심으신 겁니다.
그러니 때가 되면 약속을 임신한 우리가 그 열매를 내어놓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겁니다.
이것이 흔적 곧 기의 없는 기표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 뿐입니다.
열매는 쪼개는 길 외에는 심은 것을 꺼내는 방법이 없습니다.
쪼개어 죽여서 그 후사로 살리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인신제사가 아니라 사실상 실상은, 믿음은 이삭이 아닌 아브라함을 쪼개는 것이고
예수님이 죽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아담이 십자가에서 죽는 겁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도다.
인간이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손할례는 할례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성령의 일을 한다는 것은 단절을 스스로 단절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단절된 자신이 또 단절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지요.
자기부인을 스스로 못한다는 말입니다. 자기부인하는 자기가 또 새로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는 것이 회개입니다. 단절 할례 입니다.
인간 손을 떠난 문제가, 그 불가능함이 드디어 이루어진 겁니다.
우리들이야 예수님의 십자가 자작극에(처음부터 이것만 예정됨 그래서 다 이루심) 말려들 뿐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예수님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가놓고서는 모든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다 이루었도다 라고 하시니 그것이야 말로 실상 아닙니까? 믿음 아닙니까?)
그래서 쪼개는 겁니다. 후사 때문입니다. 약속을 심었거든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심었거든요.
하필이면 금기시 되는, 가장 부정적인, 율법이 가장 예민하게 민감해 하는
성적인 의미로써 그 경계선을 건드립니다.
(무반응하지 않는 인간들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시아버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임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말에 의해서 유다가 쪼개지는 겁니다. 이것이 가장 선한 위생학적 계보입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즉 선하다 옳다 믿음이다 라고 또렷하게 선명하게 흐릿함없이 합니다.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다윗은 쪼개지는 겁니다.
다윗이 꺽은 것이 아니라
꺽으신 뼈가 다윗을 꺽어버리는 겁니다. 나보다 강하신 겁니다. 그래서 주께만 범죄했는데 선하게 되었다고 하는 참으로 기가막히고 코가막히는 뻔뻔함을
가장 선한 위생적인 깨끗한 계보로 마태복음 1장에서 다윗을 누락시킴으로써 증거 되는 겁니다.
그러니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개 하기 싫어도 회개 합니다. 불가항력입니다. 일방통행입니다. 주께만 범죄했으니 선하게 되었다고 하니 회개 안하고는 못배기는 것이지요.
이 몸 뚱아리 자체가 약속을 담은 그릇으로써
다 이루심만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쪼개면 쪼갤수록 창세전에 심으신 그 십자가의 사랑을
도리어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더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물론 주님 홀로죠.
결국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야고보서의 행함은 그야말로 거짓입니다. 완전히 정반대로만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저들은 오히려 이 쪽이 정반대다 라고 말할것이고요.
이 부정성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인 십자가를
십자가가 벌려놓는 그 간격(모순)을 매울 길이 없습니다.
(막 15:37, 개역)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막 15:38, 개역)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말라꼬 매울려고 하는데? 확 더 쪼개어서 찢어버리시는데? 봉합할려고 하니 웃기는 겁니다.이 모순을 견딜수가 없는 겁니다. 죄수 복을 입고서 합격이라는 빨간 피 도장을 꽝꽝꽝 찍힌 옷을 입고 돌아다닐려고 하니 쪽팔려서 지 스스로가 하햫고 희고 깨끗하고 순결한 옷을 갈아 입고서 광명한 천사의 옷으로 미혹하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광명했으면 부러버 부러버 부러워 죽겠네
인간이 행하지 않으면 다 이루심이 마치 지장받거나 미흡하게 될까봐 미리 땡겨서 걱정하는 식입니다. 자기가 자기 손으로 빨래하고 세탁하고 자기를 스스로 불태우는, 스스로 옷을 찢어버리는 회개하는 식입니다.
(육체를 후패 곧 육이라는 옷을 찢으면 찢을수록 약속은 날마나 새롭습니다. 그러니 회개란 주님이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지, 우리의 행동을 우리 손으로 우찌 해 보겠다는 손할례 짖과 다를바 없는 회개는 거짓입니다. 기껏 목사에게 자신들에게 반항하면 그때서야 부랴 부랴 회개를 언급합니다만 회개 자체를 모르는 놈들의 말에 속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마 26:65, 개역)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주님이 주님에게 (믿음으로 믿음에) 말씀하셔서 스스로 이루시는 다 이루심에 우리는 이미완료됨으로써 통보받는 식입니다. 언놈이 끊겠습니까? 쉽게 끊어질 것 같으면 예수님이 또 십자가에 또 달려야 겠네요?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 통보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졸지에 우리 몸 구석 구석에 구멍이 뻥뻥 뚫히고
위에서 내려온 실이 묶여져서
위에서 움직이는대로 우리는 하기 싫어도 움직여야 만 하는 바 대로 움직입니다.
먼저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길 예수님의 운명대로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힘은 우리가 못 박힘입니다. 너 자아 라는 우상 곧 하나님을 못 박으라 라고 말이죠.)
이것을 다윗은 참으로 뻔뻔하게도
철저하게 우리야 장군을 죽일 계획을 철두철미하게 해 놓고서는
주께만 범죄 했다고
정직한 영이 없다고 비로소 율법 지키고자 한 자신이 악마임을 원수임을
주의 눈 앞에서 항상 범죄자 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실(정직한 영=성령)이 없으면서도 지킬려고, 행할려고, 그것도 율법을 가장 잘 지켰다고 우기는
이 거짓된 몸의 실상을 우리야 덕분에 발각 당하게 된 겁니다.
(우리야가 찢겨진게 아닙니다. 도리어 살아서 다윗이 제대로 아주 제대로 찢겨져 죽은 겁니다. 그러니 정직한 영이 없음을 비로소 실토 하는 거죠. 진작카지 !!. 그리고선 없다는 것이 명료해지니 비로소 달라고 긍휼을 요청하는 겁니다. 무능함을 비로소 드러내신 겁니다. 율법 앞에서 무능함이 드러났기에 율법 외에 한 의가 와서 율법을 다 이루어서 일방적으로 다 지킴의 세계에 무시험 합격으로 반칙 중의 반칙을 벌리는, 뒤로 빼돌려서 합격시키는, 그 부조리가 옳았음을, 믿음임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이 어리석은 지혜인 십자가라는 부정성 외에는 예정된게 없습니다.)
(고전 1: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래서 구멍 뚫힌 몸에 실로 꽁꽁 묵임 달림 당하고
참으로 뻔뻔하게도 용서 받았다고
여디디야의 실상 앞에서, 이 보다더 명료한 것이 없다 라는 실상인 믿음 앞에서
(회개도, 금식도, 눈물도, 기도도) 4종 세트의 달인 다윗 조차도
이 행하기는 소용없다고(그런 모호한 것들은 가라 꺼져라)
도리어 먹고 마시고 북치고 장구치고
막살기(부정성)를 당당히 고백(요청)합니다. 이미 받았기에 긍휼을 외친 겁니다.(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막살기(긍휼) 뿐입니다. 꼭 눈 시퍼렇게 떠있는 마귀의 코 앞에서 뻔뻔하게끔, 하필이면 하필이면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말입니다.)
나의 안막살기가 예수님의 죽음을 막을수 없다는 것
내가 약속을 믿어서 내 믿음으로(안막살기한 행함) 이삭의 제물됨을 막을길이 없다는 것
(오히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부정성-막살기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짝이 된다는 것,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이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당장 불태워 화형시켜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어리석은 물증 부정한 유물을 3가지 잡아놓고서는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이미 받았다고 확인차 당당하게 외칩니다. 이 물건의 주인이 이 아이의 아빠입니다. 땍쥐 할아버지가 뭐야? 아빠라고 불러야지, 넌 후사야, 긍휼이야. 비웃음이 아닌 웃음이야 라고 말이죠. 니가 원했잖아 !! 제가 언제예 ? 케보이 !!. 아이쿠 맞네예 맞네예 제가 처음부터 원했던 거네예. 주님은 항상 나 보다 옳습니다. 요나의 표적)
막을 길이 없다는 것(흘러 넘쳐흘러서 그 사랑에 떠밀려 밀려 버리는 것)
사탄아 너는 나를 너머뜨리는 구나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선악)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구나 라고 지적받음으로써
그 부정성(십자가=저주로 달려가기)이 곧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위에서 펼친 실달린 리모콘 조정이였다는 것을
그 자유(믿음)가 찾아왔었다는 것을
비로소 기뻐하는 겁니다.
가장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그 순간에(도저히 빠져나올길이 없는 화로다 나는 망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동시적으로 발생한 일방적인 용서(긍휼)로 인해
도리어 성령의 취함을 만킥함을(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다)
마귀보란 듯이 펼치신 (철저한 모순인 간격이 벌어진, 갈기 갈기 찢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뻔뻔하게 그 간격(표적)을 보란 듯이 구경꺼리 찌끄래기 쓰레기 더러운 옷을 마귀 코 앞에서, 아예 마귀랑 내기를 가위 바위 보, 마귀야 마귀야 욥 보다 선하고 옳고 깨끗하고 하얗코 순결한 자 없데이? 가장 추하게 찢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한영광 십자가)
(욥 1:8, 개역)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9, 개역)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이것이 바로 은혜 곧 희년의 완성(다 이루심=기업무르기)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습니까? (구멍 뻥뻥뻥 뚫어 실달기 완성)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수에 칠 가치가 없는 인생 곧 부정성의 인생에
유일한 싸움이 이 싸움 뿐입니다.
십자가를 못쳐다보도록 꾀는 세계와(악마의 세계)
그 와중에도 동시다발적으로 십자가를 더욱더 또렷히 명료하게 보이는
주님의 일하심(다 이루심)의 십자가 사랑(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시는 살아움직이심)
그 마당 터가 나의 육체가 아닐런지요? 찢겨짐이 이미 완료인 다 이루심입니다.
이미 넉넉한 승리가 아니다면 어찌 이 전쟁을 목격할 수 있겠습니까?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에 일부러 믿음(자기최면)을 만들어 조작하고, 그것도 모잘라서 행하려고 하겠지요. 안그러면 쪽팔린다고 하니 원 ~~~)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육의 행함)과 창(육의 믿음)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마귀보란 듯이)로 알게 하리라
전쟁(십자가 사랑의 질투)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마귀)를 우리 손(성도)에 붙이시리라』
마귀의 강퍅함이 아니면 여호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기에
우리는 그저 세간의 전리품처럼
누가 센가를, 결박 당하는 주인으로부터 그 차이를 아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새 주인이 졸지에 생겨버렸다는 것을
새 주인의
인형 되기 라는 새피조물 되기 만을 누릴 뿐임을 야고보서가 모호하지 않게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그야말로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믿음을 그대로 보여주지?
인간의 믿음을 보태달라거나? 행함을 보이라거나? 근육을 키우라거나? 믿음의 주체가 되라는 말로만 하지 않는 책임자의 의무를 다하라는 등등의 요즘 교회들의 앵벌이 수단이 전혀 아님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속아 넘어가는 것 보면
지옥을 더더욱 찾아서 들어가는 것 보면
신기하지 않나요?
주님의 은혜가 너무 너무 놀랍고
주의 구원이 살벌하기 짝이 없는
두렵고 떨리는
음부의 권세를 깔고서 등장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마귀의 등장은
나의 원수됨을 제대로 지적해 들통내어 주심이자
동시에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의 피 흘림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 말하면
다 이루심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미 처음부터 완료하신 십자가인데? 누가 꾀더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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