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라는 그물 vs 십자가라는 포획장치로서의 그물 (실족케 하는 복음)
시간 공간 이라는 그물 구조 해체 ( 육체 해체 )
2012년 7월 2일 월요일 오전 9:35:17 김대식
흔히들 세상은 모조리 다 하나님을 믿는 자를 실족케 하는 유혹하는 것들 뿐이다고 세상을 핑계로 삼는다.
하지만 정작 신약의 예수님의 등장으로인한 새언약에서의 시점에서는 그 반대가 된다.
자 이렇게 되면 핑계치 못하게 된다.
즉 그 모든 것이 핑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믿음이 핑계요 행함이 핑계의 원천이 된 것이다.
하나님 뒤에 숨어서 피할곳을 삼아 자신을 살리는 구실을 마련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그 버릇과 습관(반복)에 따라서 새언약 되신 예수님 뒤에 숨어버리겠지만
예수님은 융통성이 없어서 도리어 예수님이야 말로 없던일마저 뒤짚어 씌워서 실족케 만들어 버린다.
숨기 좋은 피난처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배신때려서 마귀에게 고자질한다.
내가 너를 숨겨주지 않는데 니가 왜 나를 피난처로 삼을려고 하느냐 라는 식이다.
정 피난처로 삼고프다면 마귀를 거쳐서 피난처로 삼으라 하신다.
그 죽음을 거치고 그 저주를 거치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그물을 거쳐서의 피난처이다.
피난처이기는 커녕 도루묵 그물에 말려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얼굴을 한 마귀의 얼굴을 예수님이 창조한 것이다. 얼굴은 풍경이요 바탕이다. 곧 구조다.
나를 위한 예수란 없다는 뜻이다.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유대인들이 창작했듯이 그 유전이 이제는 소용없단다.
실족케 하는 복음인 것이다.
거리끼게 하는 십자가이다.
도저히 유대인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연관성이나 일치성을 찾아볼수가 없다.
조금의 연관성은커녕 아무리 정통신학에서 해석해 본들 마귀라는 결론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신실하고 뼈속까지 친여호와 친믿음 남은자 신앙 오직 믿음일수록 더욱 더 거리끼는 것이 십자가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이기 때문이다.
(갈 3: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유대인은 자신들의 선조와 조상의 유전에 따라서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았던 독특한 구약 이스라엘 만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키워왔다.
그것이 묵시문학으로까지 발전하여 계시가 멈춘상태에서마저도 위로안을 삼을수 있었다.
기억하고 기억하고 또 말씀을 되내이는 반복을 습관화 하면서
몇백년 동안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뚝 끊겨도 버틸수가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끝까지 기다릴수 있는 자신감마저도 형성하였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예수님 앞에서는 믿음이 아닌 행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살인의지로 표출케 된다.
즉 다른 민족과는 다르게 독특한 시공간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반복화 하여도
정작 예수님이 몰고온 시공간 앞에서는 거짓으로 판명이 되는 것이다.
실족케 된다.
그들만의 독특한 시공간관은 오히려 다른 민족에게는 포획장치로써 작용이 되어 다들 낚이게 되는(요즘 젊은 세대의 표현대로) 거리끼게 되는 것이 되는데
이 포획성을 발휘하던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이 도리어 예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 앞에서 포획당하게 되는 그물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소위 말려들게 되었다 라는 그 기준이 십자가이다.
그들이 과거에 할례라는 약속 개념이
그 약속이라는 홈파기 라는 흔적(표적 싸인이) 다른 민족들에게는 웃사꺼리가 되는 비방받는 것이 된다.
(물론 성인식의 의식으로써의 할례는 오히려 남자 답게 되었다는 소년에서 남자로 인정해 주는 표식이지만, 이스라엘의 할례는 그 반대이다. 남근의 부재이다. 이 남근에 대한 부재성이 없다면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치 못하고, 설사 치른다 하더라도 그 무조건 승리하게되어 있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은 무조건 지도록 되어 있다. 힘의 우열로써의 전쟁승패가 좌우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전쟁 치르기 이전에, 할례를 행했냐 할례를 행하지 않았느냐로 좌우 되는 것이다. 즉 행함의 차단이다. 인간 개입의 단절성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남근의 폭력성(시스템 바벨탑 쌓기의 하나님과 같이 되기, 선악과) 보다, 더 폭력적인 것이 남근의 부재성(빈터)이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남근이 다 짤린자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게 된다. 골리앗이라는 거대 남근을, 남근이 없는 어린아이 다윗이 쓰러뜨린다. 장애아동 젖먹이가 슈퍼영웅 거인 골리앗을 단지 여호와의 이름 여호와의 죽음 여호와의 저주 곧 십자가인 할례 단절 차단 짤림 버림 잃어버림 쓴잔 고난의 잔이라는 요나의 표적만으로, 아무것도 일 한 것이 없도록, 오로지 피 만으로 이기듯이, 이미 전조로써 어린아이라는 그 부정성이, 그 부재성이, 남근의 부재성이, 남근의 폭력성 보다 더 나은 폭력성으로, 더 강한 침노로 승리하는 것이다. 곧 젖먹이 전쟁이다. 여자의 후손 전쟁이다. 사랑은 죽음이라는 폭력보다 더 강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과성의 원인에 따른 결과이다. 힘이 있어야 승리하는 인과법칙이다. 그러나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 원인 없는 결과이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반드시 죽음 저주를 거쳐서 부재성으로써의 부정성으로써의 죽음을 거쳐서 언약을 완성한다. [다 이루었다]. (요 19:30, 개역)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갈수 없기 때문이다. 힘의 차단이요 단절이다.)
이런 약속 스스로 벌리시는 전쟁의 전조로써 이미 전쟁의 승패를 미리 좌우 시킴으로써 그런 얼토당토 않는 경험의 특이하게 격은 육체가 바로 이스라엘 유대인이라는 육체로써 이 육적 할례관은 시공간을 독특하게 인식하는 육체를 유전하게 되었다. 그 시공간이라는 포획장치인 육체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곧 이방민족과의 차이성을 두는데 있어서 거리벌리기를 했음에 그 버룻이 그 습관이 예수님 앞에서 까지 하게 된다.
할례의 그림자가(십자가 곧 하나님의 저주도 지지 않아 죽어 제물이 되지도 않는 주제에),
할례(십자가)의 실체 앞에서,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게 된다.
그들의 시공간 의식인 그 독특한 차이 차별나는 신체의 홈을 파면서 까지 인식케 된
포획장치로써의 시공간이라는 그물은, 묵시운동을 통해서 하나님나라 운동까지 전개 되는
기적 표적을 추구한다. 곧 메시아 신앙이다. 이것을 마귀가 깔아 놓았다.
예수님은 그 마귀가 깔아놓은 메시아 신앙을 통해서
(그 배경, 그 바탕, 그 여호와의 얼굴, 하나님의 얼굴을 한 유대인의 얼굴을 배경으로 깔고)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시공간이라는 거리끼게 하는 육적 할례의 포획장치를 통해서 곧 기적이라는 악한세대라는 그들만의 특이한 보편성과 차이나는 기적, 신앙 에,
그 기적 보다 더 나은 표적,
곧 요나의 표적 앞에서 도리어 포획당한다. 십자가의 저주에 말려들게 된다.
말려듬으로써 피의 기능을 보게 된다.
불뱀에게 물리게 됨으로써 나무 위에 높이 달린 인자의 기능을 보게 된다.
그 이전의 기적은 그림자로써 실체의 전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작 참고 참아서 겨우 겨우 힘겹게 지키고 지키고 사수하고 사수하면서 믿고 믿어온 붙들고 붙들은 그림자는 실체 앞에서는 벗어버려야 하는데 오히려 꼴에 그림자 값을 한다고 실체 앞에서 도리어 그림자 주제에 더더욱 실체가 오니까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면서 실체노릇을 하게 된다.
실체가 비로서 옴으로써 누락 되어야 할 것이
실체가 비로소 옴으로써 진짜 노릇을 한다.
실체가 오지 않으면 누락되면 안된다. 그림자는 실체의 전조로써 반드시 그 전조의 노릇을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작 실체가 오니 실체노릇을 하니
실체가 기가막혀서 누락시켜버린다. 그런다고 누락되는 육적 할례가 아니다.
오히려 더더욱 완고하다.
완고하면 할수록 더더욱 십자가의 저주는 명료하다.
악마의 실체는 더더욱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다.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이유는
십자가라는 피 라는 실체가 있기에 누락 되어도 상관 없는
사랑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믿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누락 될 수가 없다.
버림 받을 수 없다 반드시 구원받아야 한다. 선택받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마귀가 심은 메시아 신앙이라는 그 정치성을 맹렬하게 뿜어낸다 유감없이 발휘한다.
다윗의 율법 지키는 이미지 관리하는 왕으로 남기 위해 우리야 장군 죽이기,
모세의 모래 파묻은 살인과 바위 두 번치기, 엘리야의 내 열심히 특심이니 내만 남았나이다. 사도바울의 스데반 집사 죽이기, 베드로의 말고의 귀 짜르기, 남들은 다 버려도 난 안 버리겠다는 꼬끼오 다짐 (지젝은 이런 정치야 말로 인간으로써의 가장 하급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뿐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정치적인 구조 곧 선악의 구조, 죽음의 구조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왜 정치적이지 않으면 안되는가? [신체 없는 기관 133p 전후쯤] / 마귀는 광야의 세가지 시험에서 이 정치성을 가장 최고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예수님마저도 시험한다. 구약의 신앙관을 종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곧 인간의 믿음이라는 살인본능이다.)
이런 인간의 믿음 곧 가인의 제사는 포획장치로써 예수님마저도 그런 정치성에 끌어들일려는 기적을 요구했으나
더 나은 제사인 예수님의 믿음은 그 보다 차이나게 십자가라는 포획장치에 모조리 못 박아 버린다.
그리고서는 명료하게 할례의 참의미를 드러낸다. 모조리 다 십자가에서 죽어라 그 선악의 신체를 못 박으리라.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의 피 앞에서 거리끼게 되는 걸림돌을 만나게 되었다.
평생 따라다니는 닭 울음 꼬끼오
이 울음이 반갑고 고맙고 요나의 표적처럼 기쁘지 아니하면
딴 기적을 바라고 전혀 그 닭 울음이 기쁘지 않고 귀찮고 평생 따라다니는 걸림돌이 되는
실족케 하는 십자가가 된다.
아부의 왕처럼
십자가의 피흘리심의 죽음 앞에서 그 저주 앞에서
나는 뼈가 없다.
나는 신체없는 기관이다.
암요
그럼요
당연하죠
별말씀을
믿음을 툭 놔 버린다. 신앙도 행함도 나도 자아도 하나님도 예수님도 십자가도 툭 놔 버린다. 선악을 툭 놔 버린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일한 것도 없는데 (롬 4장) 십자가의 저주가 감사하게도 할례하듯이 내 육체를 매일 매일 꼬끼오라는 닭울음으로 짤라낸다. 나를 짤라내고 툭 놔버리는 매일 매일 울어주는 닭울음이 늘 대기하고 있다. 늘 비웃었던 약속이였는데, 웃음이라는 이삭이 늘 대기하고 있다. 웃음아 웃음아 이삭아 이삭아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비웃었는지 아니? 그 증거가 십자가 란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우리를 꼬시랴?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어 이상하다. 짤렸는데 또 살아나서 은혜받도록 해 주신다. 그리고 또 짤린다.
또 살려주신다. 또 죽이신다. 그러다가 또 살려주신다. 이런 차이(사랑)의 반복(증식 특이성)만이 십자가라는 홈파기의 피 샘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 흘러 넘친다. 무한반복이요 무한증식이며 영원생명의 과잉이다.
암요 암요 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도 쌉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저주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요 그럼요 당연히 십자가는 저보고 지옥가라고 합니다. 그럼요 그럼요 지옥가야죠
당연하죠. 죽어야 함이 당연하죠. 짤려야 당연하죠. 저는 마귀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별말씀을, 고맙죠. 나도 이 지긋 지긋한 죄를 이 악마의 구조를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십자가가 실행해 주시니 고맙죠. 나는 못하는데요 뭘, 싫키는요 실족하기는요! 별말씀을
십자가가 아니면 이 악마의 세계임을 내가 악마임을 모든 인간이 악마임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어머니 태속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으니 (시 51:5, 개역)
벌써 짤려야 했는데 그동안 살려주신것만 해도 어딘데요? 누락되어야죠 누락, 별말씀을.
십자가가 몰고온 예수님 나라라는 시공간은 침노한다. 곧 죽음이다.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다.
유대인(모든 인간)의 하나님 나라의 시공간은 악한세대의 기적처럼 요나의 표적을 거부한다. 오로지 구원을 베풀고자 환장한 하나님이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무능한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환장한 예수님이다.
그것을 다 이루었다.
인간의 시간과 공간은 누락된다. 예루살렘 교회는 누락된다.
그림자는 비로소 사라진다.
그 누락되는 카페트를 깔고서
예수님이라는 실체는 이미 다 이룬채로 십자가의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형성한다.
새술은 새부대에
그리고 십자가에서 형성된 새시간 새공간 앞에서 왜 이전 것을 지나가고 불타 없어져야 하는지
명백하게 보여준다.
우리의 육체는 불타 없어짐으로써 그 실체를 보여주는 영광에 놓여있다.
누락됨으로써 십자가의 새창조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예수님은 내 운명
십자가는 내 운명
암요
그럼요
당연하죠
별말씀을 이 얼마나 과분한 영광인가
싫어도 할수 없다
이 십자가의 사랑(십자가의 저주)을 받기로 작정이 된 종말인간으로
십자가의 모태에서 태어났으니 별수 없다.
차이나기 싫어도 어쩔수 없다.
이 빼도 박도 못하는 뼛속까지 친십자가인 피사랑 앞에서
철저하게 소모품으로써 이용 당하는 버림받는 자로써의 은혜의 선물인 까닭이다.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5, 개역)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갈 5:26, 개역)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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