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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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무엇인가?
YouTube공간을 통해서 말씀을, 복음을 전하게 되어서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지 않는다 했는데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공간을 넘어서서 제한받지 않고 누구나 말씀을 접하게 되어서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유튜브동영상 공간을 통해 복음에 대해서 전하고자 합니다. 복음이 뭐냐? 이것부터 말씀 드려야겠죠. 복음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이 신약에 와서 성취가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복음이라는 말자체가 기쁜 소식인데 그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다 이루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사람이 신을 향하여 뭔가 더 행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행하신 것 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충분히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고 천국에 자기백성을 데려가는데 아무런 모자람이나 지장이 없다는 그런 점에서 기쁜 소식입니다. 그동안 구약에서 사람들은 십계명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선에서 지켜서 구원받고자 많은 아이디어를 끄집어 내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속에 갖고 있는 갖가지 경건함과 거룩함과 고상함과 성실함과 열심과 자기 절제 자기 노력 이런 것을 총 집대성해서 거기다 다 집어 넣었겠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전혀 하나님을기쁘게 하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킬수 있기 때문에 준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위하여 하나님이 따로 준비된 어떤 한 분이 계시다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기쁜 소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이 따로 또 준비한 한 몸이 계셔요. 한 몸이 계시는데 그 말씀이 그 몸을 위하여 화살표로 가는 것처럼 그 분을 향하여 모든 것이 집중되어서 인간이 지키지 못하는 그 모든 말씀을 그 분이 홀로 다 지켰다는 그 사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8장에 보면 말씀을 다 지켰을 경우에 따라오는 그 보상이라는 것이 엄청납니다. 축복이죠. 그런데 그 축복이라는 약속 이면에는 하나라도 어기면 축복은 커녕 무서운 저주가 따른다는 그 내용도 신명기 28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씀을 대할 때는 마치 벼랑길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하죠. 다 지키느냐 아니면 하나라도 어겨서 저주받는냐 하는 그 좁은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늘 두려움과 떨림으로 지킨다고 지켰지만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되면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앞에 실패할 수 밖에 없고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 나라는 필히 망해야 했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입니다. 주의 말씀을 주님이 원하는 그러한 수준까지 지켜내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 있는 유대인이나 오늘날 우리 자신 인간이나 다 같은 아담의 족속입니다. 그들의 실력이나 우리 실력이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의 실력 범주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이 되게 하고 구원에 이를 정도로 그러한 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통해서 밝혀 진 바에 의해서 우리도 똑같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유대인으로서 절망하게 이르게 되죠. 이러한 절망감에 대해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어 절망을 주는 이유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로마서 3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입을 막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풀이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것은 율법이 오기 전 부터 인간은 저주 아래 푹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불 밑에, 큰 이불이 우리를 누르면 우리는 답답한 가운데 이불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어서 저주 있게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오기 전 부터 이미 우리는 죄 아래 저주 아래 하나의 심판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도 모르고 하나님에게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했고 축복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만큼 말씀을 지켜 줄 테니까 우리가 원하는 축복을 해달라 그런 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인간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사도들을 통해서 기쁜 소식, 복음이라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마태=기쁜 소식. 마가=기쁜 소식. 누가=기쁜 소식. 요한=기쁜 소식. 그리고 로마서 1장에 보면 "복음이 나타났으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구약 전체가 구약은 복음을 준비하는 단계라면 신약은 복음이 이미 왔다는 것,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이 뭐냐? 복음은 인간이 저주 아래 있어서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싶고 그것을 기쁘게 하고 싶어도 인간보다 죄가 힘이 더 세니까. 인간보다 악마의 힘이 더 세니까.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누르고 있으니까. 우리는 거기서 필연적으로 말씀을 위배하는 쪽으로 우리는 악한 열매를 토해 낼 수 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드러나면서, 그걸 드러내시면서 모든 율법은 다 이루신 분이 따로 계시고 그 이루심을 믿는 자에게는 그 분이 이루었던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로 전환되는 그러한 소식으로서 사도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출발점이 인간에게서 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저 높은 곳에 신이 계시고 그리고 여기 인간이 있고. 자, 우리가 뭘 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슬람 교도, 무슬림이라면 뭘 해야 합니까? 우리가 힌두교 교인들이라면 뭘 해야 합니까? 우리가 불교 신자라면 뭘 해야 합니까? 항상 그런 종교에서는 우리가 뭘 해야 한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뭘 해야 됩니까? 가 되지만 우리 복음에서는, 기독교에서는 누구를 의지해야 하고 믿어야 됩니까? 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그 믿음 조차도, 우리의 믿음은 인정하지 않고, 그 믿음 조차도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믿음을 선물이라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따로 줍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안에서 내가 행함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내는 믿음과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집어 넣어 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한 그 믿음. 이 두개의 믿음이 우리 내부에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가 해 낼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 우리가 행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믿음. 흔히 말하는 믿음 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뭔가 색다르고 전혀 우리가 행함으로 만들어 낼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선물로 주어진, 그것을 은혜라고 하는데 선물로 주어진 믿음 두 개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상당히 뭔가 불안정하고 우리 안에 갈등을 일으키니까 뭐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는데 사실은 그 자체가 완성입니다.
오늘 설교 내용은 바로 그 점에 대해서 언급을 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1절부터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라고 되있고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3절이 중요한데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단순히 장차 어떤 메시야가 오실텐데 이 메시야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어떤 모습으로 사람들과 이렇게 접촉이 되는가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미리 예언한 대목입니다. 이 메시야와 우리들과의 만남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어떤 정황으로 만나겠다는 것을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한 점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메시야가 나타나기만 하면 우리는 대환영 하겠습니다. 왜? 우리보다 뛰어나고 월등한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니까. 우리가 얼마나 그 분을 흠모하고 아! 저는 저런 메시야 같은분을 그동안 고대했습니다 라고 쌍수 들어서 환영할 만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옛날에 그렇게 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 그렇게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 분은 멸시를 받아서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 앞에 매 맞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을 메시야가 온 그 당시 사람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일어 난다는 겁니다. 이게 말씀대로 되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되면 우리가 메시야를 접할 때 우리의 인상과 느낌은 우리에 의해서 예수님이 싫어버린 바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나타날 때는 우리가 대환영할 마음 자세가 단단히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보다 700년 전에 어떤 선지자가 나타났는데 그 선지자 이름은 이사야 입니다. 그 이사야가 미리 예언하기를 메시야가 나타나게 되면 그 메시야와 그 당시 사람들과 오늘날 우리들도 포함됩니다. 메시야와 사람의 만남은 이러이러한 형태로 이러한 상황에로 되어 있어야 그래야 옳다는 그 내용을 미리 앞당겨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하면 그 분은 흠모할 만한 없을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고 더 나아가서 그 메시야라고 자처하는 당신은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도 싸다 라는 느낌으로 우리에게 등장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변경될 수 없는 확실한 예언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생기죠.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면서 일반 교인들이나 일반 사람들이 설교자한테 묻습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당신 종교의 교주를 왜 꼭 믿어야 됩니까? 그 이유를 대보세요." 라고 했을 때 교회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이러이러한 점이 좋고 이러한 점은 복을 받고 죽어서 천국가고 가정도 화평하고 예수 믿어서 잘 된 이런 경우가 있으니까 당신도 예수를 믿지 않는 것보다 예수를 믿은 것이 이 정도로 당신의 인생에 이익이고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내세까지 보장됩니다." 라고 이야기 하더라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계산기를 튕겨 보면서 아! 예수 믿지 않는 것 보다 예수 믿는 것이 자기 취직이나 결혼이나 가정 화평이나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나한테 유리하겠다 라는 계산이 섰으면 예. 목사님 제가 손 들고 예수를 믿겠습니다. 헌금하고 교회다니고. 그래서 교회는 부흥이 되고. 그런 식으로 교회가 하는 그것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 하나의 모델로서 이미 정착이 되어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과연 성경이 그러하냐 이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은, 절대로 세상의 모든 현실은 말씀 안에서만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 바깥에서는 절대로 이탈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오늘 본문 이샤야 53장에서의 말씀은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너희가 가짜 예수 말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교회가 지어낸 사람들을 꼬시기 위한, 모집하기 위한, 사람들에게 공을 받을 수 있는, 환영받을 수 있는 그런 예수 말고. 진짜 우리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보낼 진짜 예수님이 나타나게 되면 구원받을 자와 그리고 우리를 구원할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은 어떤 식의 만남이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벌 주는 것은 너무나 합당한 조치입니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 벌 받아도 싸고 당연합니다. 왜? 당신은 이단이니까." 또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당신은 귀신중에 대장이니까." 라는 평을 우리 입에서 외칠 수 밖에 없는 그런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이익을 노리고 있는데 예수 안 믿을 때보다 믿고 난 뒤에 어떤 수익이나 어떤 보탬과 행복의 추가를 원하고 있는데 실제로 예수님이 왔을 때는 실망감과 절망감과 괜히 믿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 다시 당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 절대로 당신을 믿으면 성을 간다는 것. 이런 식으로 배척받고 핍박받는 그런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그렇다면 "그 예수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 라고 반문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 한 것이 그겁니다.
우리 쪽에서 생각하고 따져서 납득이 되서 믿는 그 예수는, 그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우리 행함에서 만들어 낸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받게 하는 믿음은 선물로 와야 되거든요. 우리의 행함으로 만든 믿음은 소용 없습니다. 그것은 방해만 될 뿐입니다. 성령의 선물로 온 믿음은 그 믿음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면 이사야 53장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내용이 담긴 채 믿음이 와버리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싫어버린 바 된 분으로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등장하게 되고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환영하는 정도가 아니고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너무나 낯설고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그러한 실존 인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이사야 53장 4절의 말씀처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 다음에 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다른 예수, 다른 어떤 메시야를 그리워 하면서 진짜 오신 메시야는 우리 손으로 핍박을 하며 우리를 향하여 우리 대신 징벌을 받고 우리 대신 형벌을 받고 우리 대신 고난을 받고 우리 대신 찔림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요 죄인중의 괴수 입장에서 아무 행한 것도 없이 그냥 그 분의 긍휼과 자비와 피의 공로로만 그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러니까 믿음도 선물이요 성령도 선물이요 더 나아가서 천국가고 영생 얻는다는 것도 백프로 오직 선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오늘 이사야 53장에 있는 그 내용입니다. 우리는 예수믿고 실망해야 됩니다. 예수 믿고 좌절해야 되고 은근히 노렸던 그 모든 것이 다 와해되고 다 깨어져야 됩니다. 그런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잠재되어 있는 악마의 시선이 진짜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를 갈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예수를 가지고 모여봤자 지옥으로 향하는 집단이 될 뿐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찾아 오시면 우리가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우리 속에 들고 있는 우리의 희망과 비전이라는 것, 꿈이라는 것, 야망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한 원인 제공자로서 가해자로서 우리는 여기에 노출 될 뿐이고. 그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죄 지은 것 밖에 없는 우리를 주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행함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헌금이나 기도나 전도나 어떤 것도 근거로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피의 공로로만,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우리를 자신의 "의"속에 집어 넣어서 구원케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한 진짜 복음입니다.
녹취: 송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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