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없으며 (시편 53편)
(롬 3:10, 개역)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개역)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개역)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3, 개역)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개역)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5, 개역)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 3:16, 개역)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개역)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 3:18, 개역)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시 53:1, 개역)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에 맞춘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53:2, 개역)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 53:3, 개역) 『각기 물러나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 53:4, 개역)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시 53:5, 개역)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하여 진 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시 53:6, 개역)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성경말씀은 선언이며 선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실천 행함의 여부로 바꾸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역시나 인간의 말씀실천으로 인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완성으로써 선포하고 쳐들어오는 방식입니다.
그 침략에 승복의 증상이 나타날 뿐이지
내가 죄를 인정해서 승복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은 처음부터 거리끼는 겁니다.
인간 하고 안 맞다 라는 거죠.
그렇다고 주님이 손해냐 말이죠
또 그렇다고 인간이 주님에게 맞출수가 과연 있냐 말이죠.
못 맞추기 때문에 포기하면 또 방종하게 된다고
목사들은 본인들이 불안한 마음을 심어서 불안감을 유발케 하고
또 맞출려고 하면 왠지 목사들에게 속아넘어가는 기분입니다.
왜냐하면 이 놈들도 안 맞추기는 마찬가지이거든요
강요된 선택으로써 결국 돈을 노리더라 말이죠.
안 그런 놈이 없습니다.
오늘 제목처럼 하나도 없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럼 제가 처음에 언급했듯이
성경말씀은 결과적으로 선언하는 겁니다.
하나도 없다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꼭 토를 답니다.
아닙니다 단 한 명이라도 있을 겁니다.
전부 다, 모두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이죠.
그래서 찾고 찾고 찾아냅니다.
찾아낸 꼬라지가
이런 자는 옳지 않느냐 라고 주장합니다.
틀렸습니다.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이 아니라 성경말씀의 선언 선포 땅땅땅 결정난 이야기입니다.
(시 53:2, 개역)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 53:3, 개역) 『각기 물러나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이 찾아내는게 아니라
주님이 직접 찾아봤다니깐요.
없다고 나오는 겁니다. 없음
없어요
그렇다면 저나 여러분 자신도 아니다 라는 것을 알고
이 말씀을 보고 기뻐해야 합니다.
어 우찌 알았지? 하나도 없는 줄!!!
하나도 없다네?
우와 기쁘다 이래 되어야 합니다.
단 한 명이라고 생기면 기쁜게 아니라
단 하나도 없다 라고 선언하는 그 성경말씀을 보고 기뻐하라는 겁니다.
얼마나 제대로 말씀하는지
인간은 그래로 있다고 자꾸 우기니까 사기치는 것이 들통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자신이나. 또는 타인들의 그 거짓부렁에 안 속게 되니까 말이죠.
이렇게 증거했어도
인간은 자기자신에게 여전히 미련을 두고 절대로 포기 하지 않습니다.
그 목사들만 그렇겠습니까? 우리자신도 여전합니다.
절대로 포기 하지 않고 그래도 있습니다 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종교사기꾼들은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거짓선지자들이지요.
무조건 인간 안에서 찾아 볼려고 가능성과 희망, 긍정, 평강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단절을 말합니다.
그래야 외부, 바깥이 의미가 있습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남을 7번 용서하기 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행함)
그 바깥인 7천명의 남은자. 7에 70번의 용서받기 의 세계를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은혜)
그러나 여기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아브라함 사건을 통해서도 보게 됩니다.
의인 10명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 멸망시키기 않겠습니까?
그래 안 멸망할게
아무리 손가락 세어도 없거든요.
그럼 5명?
그래 안 멸망할게
그럼 셋? 둘?하나?
놀랍게도 아브라함 자기자신도 의인에 속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의인이 있냐 없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지역만 소돔과 고모라이다 라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소돔이요
교회 전체가 고모라 이다는 증거입니다.
왜? 의인이 없으니까 말이죠.
만들어 낼수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말이죠.
이런 단절을 분명히 하고자
율법 외에 한 의를 갈망하는 겁니다.
다른 것들은 쳐다볼 이유가 없습니다.
오로지 율법 바깥의 한 의만 쳐다보면 됩니다.
(롬 3:19,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개역)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개역)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개역)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법으로 따져서
행함으로 따져서 나오는 문제는 손때고
율법 외에 (율법 바깥)
제사 외에 (제사 바깥)
번제 외에 (번제 바깥)
안식일 외에 (안식일 또는 주일성수 바깥)
한 의를 보자는 취지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도 없게 하신 겁니다.
하셨다니깐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마귀는 계속 이 의문을 계속 붙잡도록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라도 있을 겁니다 라고 말이죠.
이것은 율법 외에, 율법 바깥에서의 한 의를 거부하고
기여이 율법 속에서 찾자 라는 겁니다.
제사 속에서 찾고 (제사 안에서)
안식일 속에서 찾고 (안식일 안에서)
번제 속에서 찾고 (번제 안에서)
교회, 성전 속에서 찾고 (교회를 개혁 하면 된다고 우깁니다.)
율법 속에서 찾자고 (율법 안에서) 주장하는 겁니다.
이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 속에서 찾자 라는 것이 마귀의 주장이고
성경말씀의 주장은 하나님을 믿는 자는 단 하나도 없다 라고 합니다.
하나도 없음
지금도 과거도 앞으로도 없습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역설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대상물이 하나님이 될 수 없거든요.
하나님의 이름의 대상물이 졸지에 죄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기쁜 이유는 없어서 기쁜게 아니라
없는데도 불구하고 봤거든요.
의를 봤어요 율법 바깥에서 말이죠.
볼수 없음에도 봤거든요.
들을수 없음에도 들었거든요.
왜 볼수 없느냐? 율법 안에서만 찾았거든요. 소경이면서 말씀을 읽을 줄 안다고 우겼거든요.
귀머거리 이면서 듣고 있다고 우겼거든요.
그런데 율법 바깥에서 졸지에 봤거든요. 소경임이 선언되었고 진짜 소경인데 눈을 고쳐주시니 보게 되더라 말이죠.
율법이 아닌 율법 외에 한 의가 나의 눈을 고치더라 말이죠.
율법 안이 아니면 부정하거든요. 거룩이 없거든요. 그런데 율법으로 안 고치고 율법 바깥의 의로 고치더라 말이죠.
율법으로 율법을 완성한게 아니라 율법 외에 한 의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이루더라 말이죠.
말이 안되죠.
네 맞습니다.
말이 안되는데도 말이 되더라 말이죠.
뭘 봤는데????
율법 외에 한 의를 봤거든요.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면 말이 더더더 안되겠끔
못 알아먹도록 설명하시는 것이 역으로
율법과 연관 된 자는 다 지옥 보내버리고 유대인이지요
그런 유대인 보는 앞에서 일부러
율법과 무관한 이방인을 구원하더라 말이죠
보란 듯이 유대인 코 앞에서
이런 방식으로 율법 외에 한 의를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 외에 한 의를 보게됨을 당하니까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왜 10명 5명 점점 줄어야 하느냐 하면
그 손가락 세기해서 찾지 말고
손가락 없음에서 봐버린 겁니다.
손가락이 없는데 봐버린 겁니다.
손가락 바깥에서
숫자 바깥에서
수의 법칙 바깥에서
의를 보게 됨을 당하는 겁니다.
기뻐하심을 입은 자 처럼 말입니다.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
한 의!!!!
한 의라고 하니까 한 개 라는 손가락으로 세는 한 개의 의미입니까?
아니지요.
엄청나더라 말이죠. 수를 세는 손가락(계산기)이 무의미해져 버린 겁니다.
이때까지 살다가 죽은 자의 손가락
지금 살아있는 자의 손가락
앞으로 태어나 살다 죽을 자의 손가락
즉 모든 인간의 손가락을 다 덮고도 남을 한 의가
손가락 세는 수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 한 의가 나타났으니
손가락 세다가 갑자기 손을 뒤로 감춰버리는 겁니다.
부끄러워서
셀수도 없는데 세고 있으니 말이죠.
전에는 그 손가락으로 타인을 정죄를 했습니다.
돌삐도 들었구요
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자를 돌로 쳐 죽였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그 손을 뒤로 감추어야 하는 겁니다.
감히 한 의 앞에서는 그 손모가지를 짤라야 할 판국임을 직시했거든요.
인간은 자기가 똑똑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이고
자기가 선하고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악한 겁니다.
자기가 더럽지 않고 깨끗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며
자기가 강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포로되어 갇힌 줄도 모르는 겁니다.
왜?
하나도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수에 칠 가치도 없는데 왜 의지하냐 말이죠.
즉 성경말씀은 아예 선언을 했습니다.
인생 의지 말라고
그럼 어찌하란 말이냐?
인생을 의지 하지 말라고 한 그 말씀을 의지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곡해가 발생합니다. 왜곡 말입니다.
그럼 말씀을 의지하는 나는 그럼 옳겠네 라고 나옵니다.
인생을 의지 하지 말라고 한 그 말씀을 의지했다고 우깁니다.
땡 틀렸습니다.
왜 틀렸는가? 결국은 자기에게로 회귀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의지한게 아니라
인생을 더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 말씀을 의지하기 때문에 더 인생을 의지하게 되는 꼴이 되는 겁니다.
말씀을 의지했다고 하고서는 자기에게 회귀한 것이니 뫼비우스 띠에 말려든 겁니다.
왜냐하면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한 그 말씀을 의지했는데
그 말씀이 인간이 되어서 나타나니까
죽여버린 겁니다.
이것이 보통 대반전의 역설이 아닙니다.
내 쪽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율법 외에 한 의 라고 말씀하시는 그 성경말씀을 우리는 대충 대충 보더라 말이죠.
그럼 대충 대충 안보고 심각하게 보면 되겠네?
아니요
심각하게 볼 자가
하나도 없다 라는 겁니다.
하나도 없으면
자꾸 단절 시키면
포기하지 뭐?
아뇨? 포기도 안되요
포기하는 나는 그럼 옳잖아 라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럼 우짜란 말이냐?
그러니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갇혔다는 겁니다.
괜히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라고 한게 아닙니다.
말씀을 가장 많이 지켰다고 자부하던 사람의 외침입니다.
가짜 였다고
그런데 원인 없이 결과가 덮쳐진 것은 율법 외에 한 의가
나를 대신해서 질고를 졌기에
그 십자가의 피로 다 이룬 겁니다.
이 피는 관계성입니다. 매일 매일 피 바르겠다고 쳐들어 오는 관계성
끝까지 사랑 즉 간섭하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으로부터 계속 핀잔을 받고 지적을 받고 간섭을 받는 그 관계성이다는 겁니다.
오늘 시편 53편이 왜 중요한고 하니?
이 관계성을 주님 쪽에서 맺고자 오겠다는 겁니다.
즉 신앙이란 믿음이란 대상물로 삼아서 믿는
자기 혼자만의 게임이 아니다는 겁니다.
종교놀이가 아니다는 거죠.
우리 인간 쪽의 신앙은 백날해도 종교놀이입니다. 곤고한 짖만 하는 겁니다.
다들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물로 삼아요
즉 장난감으로 삼는 겁니다.
종교놀이 말이죠.
여자 아이들이 인형에게 말을 걸고
남자 아이들이 로봇에게 액션을 가미 시키듯이 부우우웅 미사일 발사 ~~~
성인 남녀도 마찬가지
결국 자기가 가지고 노는 겁니다. 대상물로 삼아서 가지고 논 겁니다.
그렇기 떄문에 성경말씀이 이미 선언, 이미 완료된 결과로 못 보는 겁니다.
가지고 놀아야 하기 때문에 늘 행함으로만 보는 겁니다.
그럼 뭐냐?
신앙이란
믿음이란
예수님이 나를 대상화 하는 겁니다.
이것을 관계 라고 합니다. 관계성
좀 다른 말로 주님이 나를 가지고 놀아야 합니다.
그 이전에는 마귀가 나를 가지고 놀았듯이
이것이 출 뭐뭐로 부터 탈출 해서, 바깥으로 튀어나와
입 뭐뭐로 다시 입성 하는 겁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 안
이게 말이 안되는 이유는 일단 현대인에게는 나를 가지고 놀도록 허용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마귀가 나를 가지고 놀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성화론자 개혁론자 그리고 교인들 다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가 마귀한테 꽉 잡혀 있는 겁니다.
마귀한테 잡혀 있다는 인식을 깨닫도록 마귀가 내버려 두겠냐 말이죠.
마귀가 멍청이 입니까? 그것을 허용하게??
그것을 인식하는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선민들 조차도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데 그것을 인정할 리가 없잖아요.
그것만 인정해도 기적 중의 기적이게요?
예수님이 눈을 새롭게 고쳐 주지 않는 이상은 도저히 못 빠져나오도록 가두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대상화 하는 겁니다. 강한 것에게는 동질화 하고 약하고 악한 것에서는 거리두기 차별화 하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대상화 했다고 해서
관계성이 맺어집니까?
관계성이란 과연 사랑이냐, 사랑 맞냐 라는 겁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지 않으면
그것도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희생
그것도 거룩한 의로써 말입니다.
거룩한 의가 없으니 하나도 없는 셈이고
모든 허물을 7번이 아닌 7개의 허물이 아닌
7에 70의 모든 허물을 모두 다 덮는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하고
그리고 남의 허물 때문에 대신 죽는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기꺼이 내어주심입니다.
억지로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하나도 없는 겁니다.
누가 자기 장난감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종교놀이 하다가 그 종교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 값없이 기꺼이 말입니다. 다 보상을 노리고 더 큰 보상이 있다고 하니까 목숨 내놓지 않습니까?
즉 사랑이 없는 겁니다. 모조리 법 법 법을 따지는 행함이였던 겁니다.
자 그럼 간단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라고 시인하면 됩니다.
이것이 상한심령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직한 영이 없습니다 라고 시인하면 됩니다.
이것이 인애와 자비를 구하는 모습입니다.
사랑이 없다 라는 것은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존재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야할 판국이지
율법을 좀 지켰다고(물론 단 하나도 지킨 자도 없지만)
율법을 쥐고서 정죄하기 바쁜겁니다.
괜히 율법을 알아가지고 말이죠.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입니다.
정죄 받아도 마땅한 입장인 죄인의 자리일 뿐이지
정죄할 수 있는 자리에 놓여진게 아닙니다.
누가 정죄를 할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용서를 받냐 못받냐 라는 심판에 놓여진 판국에
심판하겠다고 누가 나설수 있냐 말이죠.
누구인데요? 10명
5명?
찾아보세요 과연 누가 있는지?
세 명 ? 두 명?
하나도 없습니다.
놀랍게도 시편 40편을 거쳐서 50편 1,2,3, 53편을 살펴보는 가운데
자꾸 구원자가 누구냐 라는 요점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정죄하는자가 아닙니다.
율법을 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에서 건져준 자가 누구냐 라는 관점으로 자꾸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시편이니까 모세오경에서는 애굽으로 부터일터인데
다윗은 구원자가 누구냐 라고 자꾸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로부터 건지실 자 누구냐 ?
누가 너를 이스라엘로부터 구원할 구원자이냐 라고 묻는 겁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로부터 너를 구원할 자가 누구냐 라고 말이죠.
참 이상하지요?
우리가 인간인데 너를 인간으로부터 건지실 자가 누구냐 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마귀자식인데
너를 마귀로부터 건지실 자가 누구냐 라고 계속 묻는 겁니다.
즉 한 개인의 구원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 구조 판대기 전체를 언급하시는 겁니다.
개인 구원은 없거든요.
집단 구원입니다.
오로지 성령의 전인 성령이 임한 자들을 구원하시는데
문제는 구원이란 어디로부터 탈출해서 다시 어디로 들어가는 겁니다.
문제를 어디로부터 탈출을 해야 하는데
즉 갇혀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갇힌적도 없는데 어떻게 구원이 성사 되느냐 말이죠.
갇힌 적이 없는 자에게 구원이란 하나의 보너스일 뿐입니다.
월급 원래 받는데 그 월급에 보너스 상품일 뿐인 겁니다.
이것이 악마들의 구원론 아닙니까?
(시 53:6, 개역)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아니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데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딜갇혔나요? 구원받게?
다윗 당시에 이스라엘이 다른나라 다른 민족으로부터 압제 또는 치리를 받는 예속국가 이던가요?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겁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 당사자가 포로되었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사울왕의 세력인 사울왕의 사고방식으로 쫘악 깔린 이스라엘로부터
결국 이스라엘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겁니다.
두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는 사울왕 사고방식입니다. 사실상 전부 다 죠.
또 다른 하나는 다윗의 정신입니다. 딸랑 다윗 하나입니다.
이 다윗 하나 건지는 구원사건을 벌리는 것이
그래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포함해서 85명이 죽어나가야 하고
예수님 하나 건지기 위해서
2살 밑으로 어린아기가 헤롯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오늘날도 역시나 반복이 됩니다.
십자가를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십자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왜?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용서 받은자는 없는채 부재인채
용서의 초과잉성을 더더욱 확장 되는
일만달란트의 비유인 용서의 비밀처럼
(시 53:6, 개역)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구원받는자가 있든 말든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구원자가 시온에서 떳고
이스라엘 속에서 떳고
교회 속에서 떳다 라는 것은
구원자가 떳다 라는 사실로 언약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구원받은자가 생기느냐 안생기느냐 라는 것은
오히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즉 이스라엘 속에서 다윗을 구원하고
교회 속에서 성도를 구원하는 식으로
구원자가 있다는 것으로써 구원사건은
단 하나도 없이도
구원 자체는 빛을 발하는 영광이 되는 겁니다.
단 하나도 없어도 주님 손해 보시는 것 하나 없이
구원자의 구원을 높이시는 겁니다.
그 구원하심을 더더욱 확장 확대 무한반복의 구원사건으로 벌리시는 겁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가 발생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도 없어도
구원자가 떳다는 그 자체로써 구원사건이 더더욱 영광스럽게 빛나는 것을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로 영광스럽거든요.
아무도 구원 못 받아도 구원자는 너무 너무 영광스러운 겁니다.
즉 구원자가 떳으면 이미 다 이룬 겁니다.
마치 지난 시간처럼 안식일을 지키는자가 없는데 어떻게 완성 되느냐 라고 따지는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에
안식의 주인이 떳으면 이미 안식을 누릴수 있는 안식의 완성이요
오히려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서는 안식의 완성을 보기는커녕
모호한 안식만 챗바퀴 돌 듯이 의문의 안식만 맴돌뿐입니다.
즉 누구냐 라는 문제이기에
그 누구가 왔으면 끝난 겁니다.
이렇듯 구원자가 떳으면
이스라엘이 아무리 쫄딱 망해도
구원이 이미 다 또렷하게 완성이 된 겁니다.
(시편 53편은 시편 14편과 같이 반복이 됩니다. 그 정도로 구원받은자가 아닌 구원자가 떳으면 게임오바 이다는 겁니다. 다시 한번 시편 14편의 내용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http://crosslamb.tistory.com/1600
옳지 않은 예수님 (시편 1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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