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약속 (시편 65편)
(시 65: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시 65:2, 개역)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 65:3, 개역)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 65:4, 개역)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 65:5, 개역)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시 65:6, 개역)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시 65:7, 개역)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시 65:8, 개역)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시 65:9, 개역)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시 65:10, 개역)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시 65:11, 개역) 『주의 은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시 65:12, 개역)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시 65:13, 개역)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많은 학자들이 시편 65편은 앞의 시편들과 다르게
슬픔이나 환란, 고난, 어려움을 당하는 모습이 전혀 없는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봅니다.
앞의 시편들도 앞부분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시작했는지 몰라도
항상 끝은 기쁨과 감사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65편은 오히려 더 무섭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약속이 인간을 바로 상대로 하지 않고
땅을 상대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정작 배제 됩니다.
물론 시편 65편과 구약 전체에서 그렇고
신약에서는 달라집니다.
구약은 일단 땅을 통해서 약속의 구현을 보게 되는 겁니다.
땅을 거치지 않고서 바로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약속의 땅에만 해당되지 이방나라의 땅과는 상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이 땅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 땅에서 어떻게 약속이 성취되는가를 봐야만 하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이 약속의 땅에 약속이 성취가 되면 땅은 이유없이 무조건 그 소출을 베품으로써
인간은 그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반대로 땅에 약속이 성취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인간이 선한일을 개인적으로 많이해도
그 땅에서 소출이 나지 않음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선함과 무관하게 저주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이 원리가 바로 창세기의 땅의 창조 원리이듯이
약속의 땅의 원리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촉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윗이 노래하는 겁니다.
바로 이 기준에 의해서 이 다윗의 정신에 의해 이사야서에서 새하늘과 새땅 개념도 이 노선을 따르는 겁니다.
(사 65:17, 개역)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 66:22,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마침 이것도 어머니의 느닷없는 질문 덕분에 알게 되었는데
지금 시편 53편까지 했는데 월요일에 갑자기 시편에는 땅을 회복한다는 말이 없네? 라고
어떤 근거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방금 시편 65편을 제가 읽었는데요 있더라구요
그래서 대화를 나눈 것이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듯이
찬양이 주체가 되어서 나를 붙잡는 것이지
내가 찬양을 부르는 주체가 아니듯이
땅이 나를 붙잡듯이
내가 땅을 경작해서 소출을 내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정작 앞의 시편내용들과 연관시켜서 다윗은 땅은 황무지가 되었다고 외쳐야 하는데
정작 오늘 시편 65편은 풍요롭다는 겁니다.
반대 아닙니까 반대
많은 학자들이 시편 65편은 밝은 느낌이다고 하잖아요
이것은 곧 다르게 말하면 이 약속의 성취 때문에
다윗은 죽어도 상관없는 죽음으로 몰리는 상황을 격게 된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누가 봐도 죽은자가 된 다윗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 안에서 산 자이다는 겁니다.
역설적이지요.
그렇기에 시편 65편은 약속의 땅에서의 약속성취로 인한 무조건적인 혜택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약속이 성취가 되는데?
그래 글쎄 다윗이 죽음이라는 웅덩이에 사울에게, 압살롬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등떠밀려서 빠져 죽었데!!
그럼 약속이 성취가 된게 아니라 실패 아냐?
아니래 그게 성취래
다윗이 정작 죽으니까 살더래
그 의인은 믿음으로 사니까
땅은 그 약속의 성취로 인해 땅이 베푸는 소출을 누린데 글쎄
그럼 약속은 땅이 아니라 인물과 연관되었고 인간과 연관된 것이지
왜 인간은 상대안하고 땅을 상대로 하느냐? 구약에서 말이죠.
여기서 다윗은 인간이 아니라 다윗 또한 땅의 소출로 인한 혜택을 입는자이지
죽는자는 아닙니다. 그 경험은 하겠지만 말이죠.
이제 이런 땅의 개념이 즉 공간이지요. 공간 속에 시간이 그 공간박스 안에 들어가있으니 같이 보면 되구요.
이 약속의 땅의 개념이 신약에서는 한 인물로 바뀌어지는데 그냥 바뀌는 것도 아니지요.
그 약속의 땅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제 시온이라는 땅은 약속의 성취가 되었기에
더 이상 시공간의 의미는 의미가 없어져 버리고
한 인물에게로 바뀌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년 ? 이천년? 동안 떠돌이(호모 사케르)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1940년대에
시온 곧 예루살렘이라는 공간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릴 이유가 없는데
그들은 한 인물 곧 예수님을 거부하니까
당연히 그 땅을 탈환하는데 집착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소위 시온니즘
구원받고 싶으면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아니 이미 선민(구원받은 백성)이니까 더 집착할 수 밖에 없지요.
다른 민족 같으면 벌써 다 잊어버릴텐데
끝까지 내려와 전수시켜서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메시아를 맞이하겠다는 겁니다.
쉰들러리스트 라는 영화는 먹혀들어도
그 반대되는 영화는 아예 제작 조차도 안되는 거죠.
그러니 땅의 회복은 의미 없지요.
예수님이 약속을 다 성취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 기도해야 기도받는다 라는 식이 되고
인간이 노래 불러야 찬양이 찬양답다 라는 식이 되는 거죠.
그런데 정작 이런 시편65편의 땅의 약속성취를 통해서
오히려 정반대로 이 약속의 땅에서 다 쫏아내버리는 겁니다.
방청소 하겠다고 다 쫏아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 당하는 거죠. 이스라엘 멸망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신나게 춤춥니다.
멸망당한게 그렇게 기쁜가요? 예레미야 선지자님
그럼 그럼 이제 방청소 끝나면 다시 들어온단다 표시해 놓아라
즉 멸망 자체가 구원이라는 겁니다.
죽음 자체가 말이죠.
오히려 약속의 땅에 계속 머물러 있는다고 해서
청소가 되냐 말이죠.
다윗은 계속 쫏겨다니게 되는데?
다윗은 개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성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행했던 짓이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와서 자신들이 격게 되는 식입니다.
그렇게 약속의 땅을 청결케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억울하게 여길것이 아니라
미래완료가 덮쳐서 나온 결과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 말입니다.
자신들의 미래인줄도 모르고 다윗을 괴롭혔던 겁니다.
다윗을 괴롭히는 것이 곧 자기 얼굴에 침뱉는 식인줄 몰랐던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손에 죽은자나 마찬가지였던 다윗이 살게 된 것은
구원이 이런식으로 죽음 속에서의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약속의 땅에서 쫏겨나는 것이 실패나 멸망으로 여기지 말고
다시 돌아옴으로써 약속의 땅의 소출을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이미 멸망인데 이게 무슨 구원입니까? 지금 저랑 말장난 하자는 겁니까?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차라리 나도 죽이세요
짜잔!! 7000 명 남겨 놨지롱!!
실제로 다시 바벨론 포로 70년 뒤에 돌아와 보니 허허벌판이라서
땅의 소출은커녕 나무 하나 없어서 성전(스룹바벨 성전) 짖는 것 조차도 어렵더라 말이죠.
그럼 그 땅의 소출이 뭐냐 말이죠.
약속의 땅의 양식이 뭐냐 말이죠.
시온이 시온니즘처럼 그 시온이냐 말이죠?
인간들이 해석해 낼줄 아는 그 땅의 이름의 시온
지도상의 그 시온이냐 말이죠.
이 시편65편은 다윗이 죽음 속에서 적은 겁니다.
이것은 계시입니다. 계시
묵시
땅의 이름 시온
지도상의 시온이
그 시온이 시온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렇게 적은적 없습니다.
참 이해가 안되지요.
제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간따나 말도 안되는데
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또 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발 딛고 있는 그 곳이 시온입니다.
미국에 살고 계신다구요? 미국이 시온입니다.
한국에? 한국이 시온입니다.
중국? 중국 시온
말 장난 같지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쟁탈하기 위해 1948년에 전쟁을 벌렸듯이
저번에도 언급했지요,
이슬람의 라마다 기간인가요?
거기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서 조금만 헛디디면 깔려 죽는 겁니다.
그게 무슨 성전입니까? 강도의 소굴이지.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구원받을려다가 깔려 죽어 지옥에 가는 판국인데
땅개념이 예수님의 약속성취로 인해 공중해체 되어버려서
지금 여러분이 어떤 장소에 있든지
그 장소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 선포되는 장소인 겁니다.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마 28:18, 개역)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개역)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마 28: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 16:15, 개역)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 16:16, 개역)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7, 개역)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8, 개역)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 16:19, 개역)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막 16:20, 개역)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눅 24:44, 개역)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45, 개역)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 24:46, 개역)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 24:47, 개역)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 24:48, 개역)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9, 개역)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눅 24:50,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눅 24:51, 개역)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눅 24:52, 개역)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눅 24:53, 개역)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약속 성취로 인해서 이렇게 분부하시는 겁니다.
그렇다고 모든 직장 모든 일들을 접어두고 전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증인이기에 이미 여려분이 있는 곳에 배치시켜서
주님이 증거하시고 있는 겁니다.
결국 시온(예루살렘)은 예수님과 연관된 의미입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유대인에게서는 시온(예루살렘)은 절대 예수님과 무관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시 정반대로 다윗은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시온(예루살렘)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니 육의 눈으로 해석할 줄 안다고 다 달려들다가 오히려 올무에 걸려 넘어지는 꼴입니다.
정작 문맹자가 더 정확하게 해석하게 되는 식이 되는 겁니다.
시온(예루살렘)이 붙들어 주어야지
자기가 시온(예루살렘)을 붙들어서 간다고 해서 되는게 아닙니다.
증거가 주체이지 내가 전도하는게 아닙니다.
증거가 나를 가지고서 단 한마디 말도 못하는 벙어리 일지라도
지금 살고 있는 그 장소에 배치시켜서 복음을 복음 스스로가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목격하는 목격자인 겁니다.
아 맞구나 말씀 스스로가 증거하는데
어떤 이는 온 유대에서
어떤 이는 사마리아에서
어떤 이는 땅끝에서(곧 죽음이지요)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 놓여져서 목격하고 있는 겁니다.
항상 주체는 바깥입니다. 내가 대상물로 삼을 자격이 전혀 없는
오히려 외부에 의해 나는 주물럭 주물럭 다루어 지는 겁니다.
이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란 오히려 역설적입니다.
그 사람이 가장 잘 할 줄 아는 재능을 가지고서 복음을 위해 씌여지는게 아닙니다.
정반대로 그 사람이 가장 할 줄 모르고 거기에 대해 전혀 재능실력도 늘지도 않는
그 기능을 뒤짚어 씌워서 복음을 위해 사용되니까
정작 본인이 놀라는 겁니다.
전혀 안 어울리니까 말이지요.
마치 최고의 겁쟁이가 최고의 용사로 불리어 지듯이 말입니다. 기드온
일자무식인 최종학력이 유치원도 다녀본적 없는 자가
최고의 학자들과 단판을 짖는 곳에 놓여지게 하는 것이 은사이다는 겁니다. 미가선지자
반대입니다. 역설적입니다.
그래야 복음을 외치는 그 현장이 살인현장으로 들추어지는 겁니다.
이 얼룩들을 제거하고 싶어서 본심을 드러내거든요.
노래 박치 몸치 인 삼치를 최고의 찬양자로 삼는 것이
은사가 주체가 된 의미입니다.
누가 복음의 증인을 뽑는데 즉 가수를 뽑는다 라고 예를 들면
노래 가장 못 부르고
음정 박자 다 틀리고
삑사리는 기본이고 몸도 안 따라주는 그런 자를 최고의 가수로 뽑아서
상금 주는 그런 KPOP 스타 오디션 프로그램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럼 사울왕 뽑았으면 됐지 왜 꼬불쳐서 뒤로 따로 다윗을 왜 뽑냐 말이죠.
전혀 왕 다움의 구석이 전혀 없는 자를 뽑는 겁니다. 어린아이
왕이라는 기능이 그렇게 다윗에게 덮친 겁니다.
그 은사! 참 제대로 다윗을 찍은게 맞았나요?
맞을 필요가 없이 이미 무조건 맞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로 사울왕은 평생을 이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데 허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제대로 뽑았다는 증거 아닙니까?
오늘 시편 65편에 나오는 땅은 이미 무조건 열매 맺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무조건 열매 맺는
땅의 소출이 풍성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열매가 안열리는가?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은 성전은 파괴 되는가?
그런데 왜 이스라엘은 멸망하는가?
그게 바로 무조건 열매가 30배 60배 100배로 열린 겁니다.
그게 바로 성전이 파괴 됨으로써 참성전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당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는 겁니다.
무슨 말 장난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죠.
오늘 시편 65편의 땅 하니까 생각나는게 씨뿌리는 비유인데
그 어떤 연결점도 없이 무조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결국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한 약속 성취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나만 남았나이다 난 쫄딱 망해 다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차라리 날 죽이세요 라는 그 탄식 속에서
그 어떤 연결점도 없이
7천명이 남았다는 겁니다.
그것도 이세벨에 절하지 않은 남은자입니다.
세상 풍파에 물들지 않은 자
엘리야가 그 7천이라는 숫자를 어떻게 인식했을까요?
과연 진짜로 남은자 7천명이 있는지 확인해 보자 라고 왜 안따졌을까요?
종말의 세계에서 즉 빛이 없는 어두운 세상 끝의 세계에서
어두운 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이 아니라
종말의 존재인 빛을 증거하는 자로써 빛의 사고방식에서
7천 이라는 의미는 숫자 개념이 아니다는 겁니다.
땅 시온을 성전 예루살렘을
지도상의 그 시온
지도상의 위치정보 GPS가 찍어주는 그 예루살렘이 아니다는 겁니다.
시온이든 예루살렘이든 종말의 의미입니다.
세상 끝에서 보는 사고방식으로 볼 때
시온은? 예루살렘은? 장소가 아니라
한 인물입니다. 인물
그럼 또 그 인물로 따지면
그 인물이 사는 곳에 가야 구원이 되는 겁니까?
시온은 구원의 문이니까 말이죠.
예루살렘은 구원의 문 아닙니까
그 인물이 있는 곳에 가야지만 되냐 말이죠.
내가 무슨 수로 갑니까
눈에 안 보이는데
눈에 보였으면 큰일 날겁니다.
간따나 차비도 없는데 무슨 수로 거기까지 가냐 말이죠.
간다고 떼구름처럼 몰려들어 압사 당해 죽는 라마다 보다 더 심각해 질 겁니다.
여기 저기서 예수님을 여기서 봤다는 둥 그 장소까지 검색해 내던데
눈에 안보이니 얼마나 참으로 다행이냐 말이죠.
종말의 특징입니다 인간의 그런 종교성 다 비켜갑니다.
인간의 믿음을 거부하는시는 것이 종말의 상황인데
그래서 오로지 성령으로만 일을 다 처리하시는데
그런 것들이 보여 봐요
남은자 7천명이라고 자처하면서 등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봐요
얼마나 골치 아파 집니까
오늘날 교회가 이런 짖을 하고 있으니
뭐 하긴 그렇게 이야기 안하면 돈을 못 버니까 말이죠. 강도의 소굴입니다.
30배 60배 100배 이것으로 또 사기치는 놈들 무지 많습니다.
아니 전부 다입니다.
씨뿌리는 비유가 졸지에 밭비유가 되어버려서
좋은 밭이 되자 라고 미친 듯이 사기를 치고
그 뻔한 구라에 넘어가서 먹혀드니까
더 증폭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기여이 만들어 냅니다. 100배로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다 이루셨다는 겁니다.
눈에 가시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 안에는 뭐든지 예가 되고 아니오 함이 없다는 완성 완료의 의미입니다.
그것 때문에 인간의 100배는 반드시 무너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니 실패하고 멸망하면 안되고 그렇게 되면 다른데로 또 눈길을 돌릴테니
그 속에서 푹 젖어서 속아넘어가도록
멸망이나 실패가 없도록 오히려 적극 장려토록 만드는 겁니다.
마귀를 강퍅케 해야 그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서 빛이 영광 받으니까 말이죠.
십자가가 30배 60배 100배의 다 이루었다는 완성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까지 다 내어주신 사랑이니까 말이지요.
자 그럼 인간의 상대하지 않고 약속의 땅만을 약속이 상대하니까
그 땅의 소출로 인해서 인간은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땅이 더 이상 소출을 내지 못하면 인간은 그 어떤 혜택도 누릴수 없는 거지요.
이것이 약속의 원리 또는 약속의 땅의 원리이듯이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다 이루심으로 인해
우리는 그 죄사함의 용서의 혜택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누리는
이것이 종말을 누리는 자의 삶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자랑스럽지 못하고
도리어 거리끼고 부끄럽게 여겨진다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혜택을 못 본다 라는 거지요.
구약은 약속의 성취를 약속의 땅을 통해서 봤는데
신약은 이 약속의 성취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본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윗은 예수님을 보고서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즉 약속의 땅이 있는 이상 무조건 30배 60배 100배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니 다윗이여 방금 전까지만 해도 쫏겨다니고
죽임을 당하는 입장이고
도망치는 입장인데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뭐 긍정적인 마인드는 좋아 보입니다만
너무 너무 앞 뒤가 안맞아 보여서 말이죠.
그런데 이 완성 때문에
이 결과 때문에
앞의 일들을 격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미래 완료가 말이죠.
오히려 이 결과를 말하기 위해
앞의 일들이 전혀 슬픔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쫏겨남도 없고 죽임당함도 없고 도망다님도 없다면
그건 원인 있는 결과가 된다는 거죠.
제가 말하는 것은 슬픔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 또한 원인 있는 결과입니다.
앞의 것이 전혀 무관하게 뒤의 결과가 이미 덮쳐져서 나타난 증상일 뿐이지
주체는 뒤에 있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앞에 있는 원인이 주체가 아니라.
원인은 없어요
성화론자가 들으면 화를 내겠지요.
즉 내가 남을 몇 번을 용서해야 합니까? 7번 입니까? 라고 할 때
용서의 의미를 나타낼려면 나는 몇 번이라는 것을 실행하냐 라는 문제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너가 용서를 다룰 생각말고
용서가 너를 다룰수 있도록 하라 라는 겁니다.
이건 더 말이 안되지요.
즉 7에 70번의 용서가 너를 다룰때에
나는 남 용서할 꼬라지가 못 된다는 겁니다.
도리어 7에 70번의 용서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진 겁니다.
그러니 숫자의 의미는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숫자에 얽매이다가 숫자를 넘어서는 관계에 그만 왜 숫자를 세웠던고 하는 회개라는 종말을 누리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의 처지인 겁니다.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인줄 모르게 되면
자꾸 자기자신이 뭘 해야 한다는 의식이 들어서
시온을 쟁취 탈환 한다든지
남을 7번 8번 9번 용서를 해야 한다든지
복음을 전도해야 한다든지 라는
그런 모호한 짖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죄인줄도 모르고 말이죠.
그러나 30배 60배 100백의 원리는
너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야 할 입장에 놓여진 처지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표적입니다.
과연 즐거워 하고 자랑할수 있냐 말이죠. 더 30배 60배 100배로 만들 수 있냐 말이죠.
오히려 부끄러워 하고 싫어하고 거리끼는 것으로 여긴다면
졸지에 돌짝밭, 길가. 가시밭이 되는 겁니다.
나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남을 7번 용서 8번 용서가 종말을 살아가는
끝을 사라가는 성도가 아니라
그것은 종교꾼이고요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매일 매일 7에 70번 490번 천번 만번 용서받아야만 할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는 자에게만이 십자가의 피용서가 자랑꺼리가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 종교꾼들은 아이고 아직도 너는 용서를 받냐
우리처럼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지
언제까지 죄인이 되어서 용서 받기만 할래?
용서를 주는 자가 되어야지
아직까지도 죄 죄 죄 아니 언제까지 죄인 죄인 그럴래??
성화가 되지 못하니까 그런거야 라고
놀림을 당하는데
이것이 바로 약속의 땅이 두 패로 가르는 의미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십자가로 갈라지는 거지요.
지금 시편에서 이 약속의 땅의 소출을 누리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
다윗은 정작 쫏겨남을 당하고
도망자 신세이고
하루에도 12번 이상 죽음이 오락가락 할 정도로 위기로 몰리는데
그 영혼은 이렇게 태평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있네요?
기가막히죠.
육은 쇠하는데 점점점 괴롭힘을 당하면 당할수록 속사람은 더욱더 새롭게 노래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울왕 쪽을 보세요
이 얼룩과 같은 다윗에게 꼿혀서
눈이 뒤짚어 진 겁니다.
잠도 못잡니다.
늑대처럼 배가 고파서 먹어도 먹어도 굶주림을 해결할 수가 없어서
아무리 피를 흘려도 만족함이 없이 어두운 지옥 그 자체의 모습입니다.
다윗을 도와준 사람 모조리 다 죽여도 안풀립니다.
안풀려
그런데 오히려 다윗은 저렇게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고
정작 사울왕은 점점 피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는 겁니다.
노래를 부를 려면 이런 노래를 불러야 진짜 아닙니까?
예수님이 부르시는 노래는 바로 이런 노래인 겁니다.
얼마나 풍성하고 즐겁고 그야말로 천국 아닙니까?
(시 65:10, 개역)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시 65:11, 개역) 『주의 은택으로 연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시 65:12, 개역)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시 65:13, 개역)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그러나 사울왕은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자나 깨나 다윗을 시기하고 죽일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결국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마저도 빼앗기는 방식이
십자가가 벌려놓는 사건인 겁니다.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3, 개역)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마 13:4, 개역)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마 13:5, 개역)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 13:6, 개역)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마 13:7, 개역)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마 13: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9,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 13:10, 개역)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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