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히 이긴 찬양 (미래를 걷는 찬양) (시편 66)

 


(
15:21, 개역)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66:1, 개역) [, 영장으로 한 노래]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66:2, 개역)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66:3, 개역)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66:4, 개역)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

(66:5, 개역)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66:6, 개역)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

(66:7, 개역)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셀라)

(66:8, 개역)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

(66:9, 개역)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66:10, 개역)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66:11, 개역)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66:12, 개역)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66:13, 개역) 내가 번제를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니

(66:14, 개역) 이는 내 입술이 발한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66:15, 개역) 내가 수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셀라)

(66:16, 개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

(66:17, 개역) 내가 내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66:18, 개역)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66:19, 개역)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66:20, 개역)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찬양은 단순히 노래의 의미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찬양은 사건 그 자체입니다.

 

찬양을 다른말로 하면 승전가입니다.

즉 승리한 전쟁의 찬가입니다.

 

곧 찬양은 전쟁이다는 거죠. 그래서 사건입니다.

 

그럼 다른 민족과 즉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노래와의 차이점이 뭡니까?

다른 민족 곧 과거의 민족 개념은 곧 종교 개념이요 곧 신의 개념입니다.

그 민족은 곧 그 민족의 신과 결부가 된 셈입니다.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노래와 다른 민족 다른 종교의 노래와는 차이가 뭐냐 말이죠. 같은 노래 아닙니까?

 

어떤 찬양 작곡가는 불교의 찬불가를 짖는 것 까지 도와 줬다고도 하던데

음악가 이다면 어떤 종교에서 다른 종교에까지

자신의 음악성을 넓혀도 상관이 없듯이

그런 의미의 음악이 찬양입니까?

 

도대체 다른 모든 종교 민족의 노래와 뭐가 다르냐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여호와를 찬양하기 위해 세운 이유는

 

곧 전쟁 개념 때문입니다.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이미 승리했기에 찬양을 위해 세운 겁니다.

이것은 심지어 이스라엘 조차도 감당할줄 몰라서 망할 정도였는데

 

찬양이란 이미 승리했기에 그 미래의 승리를 미리 앞당겨서 부르는

승리의 찬가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승리도 아니고 승리의 찬가가 아닌
십자가 라는 구체적인 [다 이루었다]의 찬양입니다.
 

즉 앞으로 이길 것이다 라는 모호함이 일체 없다는 겁니다.
앞으로 이길 테니 우리 이 노래를 불러서 좀더 힘내고 기운차리자 라는 취지의 노래가 아니다는 겁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성화론자들의 말장난이 일체 없는 찬양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아니라 마귀사상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모호한 소리만 하고 삶도 모호합니다.

그렇게 과시하는 성화의 삶을 뜯어보면 이건뭐 주님의 삶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삶을 닮지 못해서 안달이 난 모습입니다.

 

맨날 저 죄인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그 뻔한 말 외에는 할 줄 모르는 삶이다는 거죠.

 

곧 이것이 저들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라는 겁니다. 모호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도 차이가 납니다.

찬양이 달라요 달라

 

왜냐하면 저들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라멕의 노래와 같습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다는 노래입니다.


저 더럽고 부정한 세리와 같지 않은 나 라는 주체를 위해
하나님이 도와줌에 대한 감사이니까
저들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자기노래인 겁니다. 신을 향하여 말이죠.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찬양이 주체가 된 노래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의 승리찬가입니다.

곧 십자가의 완성만을 노래한다는 겁니다.

또렷한 것은 이것 밖에 없거든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마치 저들이 저 세리와 같지않다고 할때에

임마누엘과 같은 의미처럼
그렇게 말하는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라고 나오는 찬양이다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이지요.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하는 그 부정성에 더 나은 부정성으로써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은 다르다 라고
저들의 간극벌리기(왕따시키기)에 더 나은 간극벌리기(왕따시키기)로써 말입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은 붙잡아 본들 다 낡고 사라질 것들인 모호하고 흐릿한 것들입니다.
뭐 하나 밝히 보여주는 것이 없이 꼬리에 꼬리는 무는 의문의 것들 뿐입니다.

썩은 동앗줄(부정한)을 잡은 줄도 모르고 그들의 시선에서 더 나은 부정한 십자가를 증거하니까
영원히 걸림돌이 되는 거리끼는 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용서 만큼은 명료하고 또렷한 겁니다. 구원의 능력입니다.

바로 이것이 미래완료이기에 또 찬양이기에

이 십자가의 승리만을, 다 이루심만을 노래하는 겁니다.

 

미래를 미리 앞당겨 부르는 것이지요.

 

다른 민족의 종교는 심지어 성화론도 다른 신의 종교입니다.

그들의 노래는 과거를 원인으로 해서 현재를 노래부르고 미래를 희망하면서 부르지만

 

복음은 정반대의 순서입니다.


미래에서 찬양이 주체가 되어 아예 미래에서 현재로 쳐들어와서 안착하고 주관한다는 겁니다.
사건 곧 전쟁이지요. 전쟁에는 반드시 승리자가 있고 또 반드시 패배자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다른 종교에서 노래 부른다고 승자와 패자가 갈려지지 않거든요.
 

이렇게 우리가 여사로 여기는 찬양 하나 조차도

계시의 의미를 찬양 스스로가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찬양에 휘말리는 겁니다.

 

바로 다윗은 찬양이 미래에서 걸어와서 휘말리게 함으로써

미래완료의 승리를 노래 안 부르고는 못배기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 승리는 십자가만의 승리이거든요.

 

그렇기에 세상 끝이라는 종말에서 지난 시간에 끌여당겼듯이

미래완료의 승리의 찬가인 십자가의 승리가 다윗을 끌여당겨서

지금 오늘 시편 66편을 찬양하는 겁니다.

 

 

자 그럼 시편 66편을 살펴 보면

처음부터 이상한 조짐의 기운이 감돕니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은 이 상황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이 벌리는 전쟁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무슨 소리냐구요?

 

지금 쫏겨다니는 도망자 신세는 다윗 자기 혼자 뿐입니다.

나머지 이스라엘 전체는 이 도망자 다윗을 죽이고자 쫏는 추격자 입장이구요.

 

이런 단 한명의 개인의 처지를

다윗은 뭘 믿고 아주 아주 일을 크게 크게 확장 시켜서

심지어 하나님 이름의 거룩한 전쟁이였던

출애굽의 구원사건으로 확대 확장 시켜서 보느냐 말이죠.


마치 한나의 찬양과 마리아의 찬양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개인에게 벌어진 일을 하늘에 까지 확대하여서 우주전쟁으로써 폭격요청을 하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의 충돌이 아닌 악한권세와 예수님의 전쟁으로 본다는 것이
아주 아주 특이하단 말이죠.
 

보세요

 

(66:1, 개역) [, 영장으로 한 노래]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발할지어다

(66:2, 개역)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

(66:3, 개역) 하나님께 고하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66:4, 개역)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할지어다(셀라)

(66:5, 개역) 와서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보라 인생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

(66:6, 개역)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도보로 강을 통과하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인하여 기뻐하였도다

(시 66:7, 개역) 『저가 그 능으로 영원히 치리하시며 눈으로 열방을 감찰하시나니 거역하는 자는 자고하지 말지어다(셀라)』


(시 66:8, 개역)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송축 소리로 들리게 할지어다』

(시 66:9, 개역)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 66:10, 개역)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시 66:11, 개역)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으며』

(시 66:12, 개역)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편 66편 1-12절까지 분명 출애굽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윗은 지금 현재 그 출애굽때의 전쟁이 다시 반복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이미 승리한 채로 말입니다.

 

참 이상한 시선이지요. 특이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왜 다윗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을 왜 출애굽의 구원사건과 연관 시켜서 보는

아주 아주 특이한 해석을 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전체가 지금 다른 민족과 싸우는 전쟁에서

그런 과거의 출애굽의 여호와의 구원사건을 기억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재도 무한반복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여호와의 구원사건이다는 겁니다.

 

곧 과거가 아니라 미래완료 사건입니다.

즉 출애굽사건을 거론한다는 말은 과거를 반복하는게 아니라
그 출애굽사건 또한 십자가 사건이라는 미래가 덮쳐서 발생한 것이기에
지금 미래의 사건을 끄집어내어서 반복한다는 겁니다.

반복이라는 개념이 과거를 원인으로 삼아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사건의 반복이란 미래가 계속적으로 덮쳐져서 발생하는 겁니다.
결국 과거가 고정된게 아니라 미래가 고정된 겁니다.
십자가로 고정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로 말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물론 세상사람은 어쩔수 없지만
교인들은 세상사람보다 더 못할 정도로 착각하는게
십자가 사건이 지금 현재 2015년의 기준으로해서

2000년 전의 과거 일로 취급한다는 겁니다. 특히 성화론자들은 더 심하죠.
아닙니다. 지금 현재 2015년 에서도 십자가 사건은 미래사건입니다.

미래가 덮쳐져서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을 믿게 되었지

역사 시간으로 역사책 보듯이 십자가를 알게 된게 아닙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성화론자들을 만나보면 공통된 사고방식을 보게 됩니다.
그럼 그들의 미래는 뭐냐? 성화가 아니라
성화가 된 자기자신인 셈이지요. 얼마나 모호합니까?
그 의문을 완료로 바꾸어 본들 또렷해질까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고 있는 마귀들의 유혹인거지요.
저들은 시험에 빠진 겁니다.


다윗이 그렇게 특이하게 출애굽사건을 미래에서 덮쳐져서 반복하는 것은 

다시 십자가 사건에서 예수님이 그 상황을 출애굽사건과 연관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자꾸 예수님은 자신을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높이 구리놋뱀을 높이 단 것 같이

인자도 달려야 한다고 자꾸 자꾸 제자들에게 말씀 하십니다.

출애굽과 광야사건을 연관시켜서 말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제물 사건인 십자가사건을 반복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출유대인 출이스라엘 출세상입니다.

출애굽사건 자체가 미래의 십자가사건이 덮쳐져서 발생했듯이 말입니다.
물론 그 십자가 사건은 역사속의 AD 33년 쯤의 그 사건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 없는 묵시의 사건으로써 역사 속에서는 수시로 언제 어디서 마구 마구 터지는
불쑥 불쑥 돌출되는 사건입니다.
정 시간적으로 따지면 성경에 나타난 모든 사건이 십자가 사건으로써 그 시대를 일일히 나열하면 됩니다.
결국 역사 속에 안 나타난 적이 없다는 거죠.
신약에서는 특히 더 합니다. 구약처럼 총칼 전쟁이 하나 없어도 그 영적전쟁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지금 다윗이 지금 현재 출애굽하듯이 출이스라엘로써

이미 완료된 입십자가를 선언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탈당 하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철수 말입니다.

인간들이야 맨날 탈당한다고 철수한다고 해도 안 철수 노 철수인 제자리 뛰기이지만

다윗이 탈당 탈이스라엘을 외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완료적인 의미이다는 그럴 이유가 없겠지만

모호한 존재이기에

또 완료가 안 나타났으면 몰라도 미래완료의 찬양 곧 십자가의 승리의 찬가가 울려퍼져버린 이상

그 찬양을 들어버린 이상 이스라엘을 철수 안하고 배기겠습니까?

당장이라고 철수해 버리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을 철수해 버린 상황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참 재미있게도

새이스라엘 입당이라고 합니다.

새이스라엘이란 십자가가 낳은 자식이거든요.

 

마치 옛언약이라는 구약과 새언약이라는 신약의 표현처럼

말 한 단어 새 뉴 이것만 붙일 뿐이지

그게 뭐가 새롭냐 말 언어 단어 한 글자 붙인 것 뿐이잖아 라고

할 뿐이겠지만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전쟁의 결과로써 생겨난

차이요 간극이요 커다란 갭이다 라는 겁니다.

 

결국 찬양이라는 사건이 덮쳐져서 미래의 십자가의 승리를 보게 된 입장에서

이렇게 두 패로 갈라지는 시선으로써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거시적인 두 민족의 전쟁으로써의 그 출애굽전쟁이

지금 다윗에게는 미시적으로 딸랑 다윗 개인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바로 새이스라엘과 육적이스라엘 곧 애굽이 된 이스라엘과 갈라서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는 겁니다.

 

무엇이 또렷하고 명료한 전쟁승리냐 라는 거죠.

 

저 모호하고 흐릿한 애굽화된 이스라엘에 남을 것이냐?

 

아니면 다윗 딸랑 한 명에게 덮쳐진 여호와의 이름이 펼치는 구원사건으로 출이스라엘 할 것인가?

 

백이면 백 편한 쪽으로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모든 백성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에게 솔로몬 죽음 이후의 등장하는 참선지자들이 바로 이 다윗이 본 미래완료를 쫏아서 이스라엘을 괴롭히자는 자로써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물론 그것을 막아서는 거짓선지자의 등장도 나타나구요.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거짓선지자가 언제 사라지느냐

이스라엘 멸망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참선지자는 이스라엘 멸망 이후에도 지독스럽게 따라 다니지만 말이죠.

 

바로 이렇게 새것과 옛것으로 나누어 지는 그 한 가운데에

찬양이 그 중간 사이에 있는 겁니다.

 

마치 경계선에 놓여진 이 찬양을

누가 기뻐하고

누가 무시하느냐

로 갈라지도록 유도하는 듯이

 

찬양은 그 경계선 사이에서 사람들을 배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분류작업이지요.

 

그러니 찬양은 우리 입술로 노래 부르는 차원을 넘어서서

찬양이 사람들을 분류작업을 하는 겁니다.

양계장에서 병아리 감별사처럼 숫컷 암컷을 분류하잖아요.

계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숫컷은 필요가 없기에 때문에 분류하듯이

 

찬양이가 감별사가 되어서 분류작업을 하는 겁니다.

애굽과 같은 이스라엘은 저쪽

십자가의 승리의 찬가가 덮쳐진 찬양자 새이스라엘은 출이스라엘로써 이쪽

 

자 그럼 출애굽하고서 이 위대한 광경을 목격한 목격자 들이

이 어머 어머하고 위대한 여호와의 구원에 대해 노래를 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미리암의 추임새까지 말입니다.

 

(15:1, 개역)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15:2, 개역)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15:3, 개역)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15:4, 개역)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그 택한 장관이 홍해에 잠겼고

(15:5, 개역) 큰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에 내렸도다

(15:6, 개역)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15:7, 개역)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 같이 사르니이다

(15:8, 개역)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15:9, 개역) 대적의 말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15:10, 개역)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15:11, 개역)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15:12, 개역)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15:13, 개역)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5:14, 개역)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15, 개역)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5:16, 개역)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 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15:17, 개역)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5:18, 개역)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15:19, 개역)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로 그들 위에 돌이켜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육지로 행한지라

(15:20, 개역)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15:21, 개역)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

 

 

그야말로 놀라운 싱크로율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찬양이 시편 66편 같습니다.

 

문제는 출애굽 때의 그 놀라운 광경이

지금 다윗의 눈에는 하나도 펼쳐지지 않는데

왜 이런 노래를 부르냐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대로 이스라엘이 갈라지는 겁니다.

 

아니 진짜 이스라엘 왕이라면 갈라지지 않도록

통합 통합 해야 문제가 되지 않는 문제인지 되지 않잖아요

그런데 자꾸 일부러 문제를 만들어서 더 갈라지게 한다면 통합은커녕 갈라지는 것는

기능사실화 된다는 것 아닙니까?

문제 많은 문제인 아닙니까? 이게 무슨 왕입니까?

그런데 그게 진짜 이스라엘 왕 맞습니다.

 

십자가의 완료된 승리를 봐 버렸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에게는 미련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이 십자가의 승리를 볼 것인가로

도발하고 있습니다.

 

이 완료된 승리를 믿을래?

아니면 모호한 너희 개인의 구원 곧 사람의 구원은 헛됨을 믿을래?

 

이것을 도리어 제시하는 자가 이스라엘 왕이다는 거죠.

이스라엘 왕 본인 조차도 사람의 구원 곧 다윗 개인의 구원이 헛됨을 외치고서

십자가의 예수님의 구원을 노래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 예수님의 구원 보다 명료한 구원있으면 나와 보라 말이죠.

 

이것 안 쳐다 보는 놈

병아리 감별사처럼

십자가의 승리의 찬가인 찬양이가 감별해 분류작업을 하는 겁니다.

그 분류작업에 의해 통과된 이스라엘 왕 다윗 조차도

이 감별 분류작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가짜 왕과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분류작업을 거부하고

반발하면서 통합 통합을 외치지만 정작 분열은 저들이 조장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야권통합을 백날 외쳐본들 분열을 조장하는 놈들이 더 앞에서는 통합을 외치면서

책임을 뒤짚어 씌우는 식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인간에게 기대 또는 가능성으로 본다는 자체가

완료를 무시하고 미완료 모호함 흐릿한 의문의 것을 사랑한다는 증거인 겁니다.

우상이란 약속을 못지키는 흐릿한 것들이거든요.

 

엄연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꾀고 있는 겁니다.

 

이 출애굽의 구원사건은

이 십자가의 피흘리심 사건은

 

바로 전쟁 개념으로써

반드시 원수들의 복종이 명료하다는 겁니다.

 

원수가 무릎꿇지 않는다면 졸지에 모호하다는 겁니다.

 

어머니와 시편 54편으로 어제 예배를 같이 드리면서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다고 했는데

 

악을 선으로 갚아라

원수가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줄 것이며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라고 합니다.

어머니 이 말도 안되는 것을 무슨 수로 합니까 라고 했는데

 

소위 착한 짖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착한 짖이면 원수를 아예 갚을 생각하지 말고 잊으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반드시 원수를 갚기는 갚는데 너가 하지 말고 내가 하겠다 라는 뜻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원수를 너가 갚아본들 모호하고 뿌리를 못 뽑는다는 겁니다.

명료하지 않다는 거죠.

그리고 원수란 주님의 원수이지 내 원수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렇기 떄문에 내가 원수 갚지 너는 가만히 있고 반드시 원수를 갚는 분의 일하심을 보라는 겁니다.

 

이건 뭐 착한 짖이 아니라 더 못땐 것을 보고 기억하라는 식입니다.

 

결국 원수가 목마르면 마실 것 주라는 것을 어떻게 어머니에게 설명했는고 하니

곧 있으면 주님이 너에게 손을 대시면 너는 목마를테니

지금 나의 재산이든 뭐든 다 빼앗가 본들 더 갈증만 나고

나는 빼앗겨도 상관없이 주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는 겁니다.

결국 나 개인의 재산을 빼앗은게 아니라 주님의 것을 빼앗은 것이기에 매를 더 번 셈이다 말이죠

그러니 물 좀 마셔라 왜? 곧 있으면 목마를 때 더 갈증타게 만드는 꼴이니가 말이지요.

 

이것이 머리에 숯불을 얻은 것처럼 얼굴이 불그락 불그락 해서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끼면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을 바라볼 것이고

불그락 불그락 해서 오히려 더 열받게끔 하게 되면

더 화딱지 나게끔 속터지게끔 하는

 

악을 선으로 이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주의 선하심이 악 보다 더 강하다는 겁니다.

 

십자가 상에서 주여 저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을 그들은 알지 못하나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자가 하나님의 성전을 허물어라 3일 만에 짖겠다고 하질않나

자기가 하나님 이다 하질 않나. 그야말로 하나님의 원수가 따로 없으니

원수 갚겠다고 나서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저들의 원수됨에 원수 갚지 않습니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주여 저들의 죄악을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 조차도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겨버립니다. 안 갚는게 아니라.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고후 5:19, 개역)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7:60, 개역)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안 갚고 없는 일로 취급하는게 아니라

반드시 이기긴 이기는대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겁니다.

그 선함이 바로 착한 일이 아닌 차카게 살자가 아닌

원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선한 일이다는 겁니다.

? 내가 악을 뿌릴 못 뽑지만 모호하지만

주님은 명료하게 뽑으니까 모조리 확실하게 말입니다.

 

그러니 악이 더 열받죠

머리가 화끈 화끈 하죠.

 

우리가 덤벼들기를 바라는데 자꾸 예수님한테 일러 바치니까 말입니다.

 

원수는 그렇게 이기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원수가 복종한다고 했습니다.

복종 곧 주님 품으로 온다는 뜻이 아니라

무릎 꿇어서 패배한다는 뜻입니다.

 

곧 승리란 이런 원수들의 무릎꿇음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승리입니다.

찬가입니다. 승리의 찬가인 노래입니다.

승리하지도 않았는데

원수가 무릎 꿇지도 않았는데 찬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미리 찬양을 부르고 들어가는 전쟁이 바로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

곧 출애굽 구원 사건 곧 십자가의 구원사건이듯이

 

이 원수를 통해서 주님은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때의 여호와의 구원사건을 말하는 겁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지금 언급하는 것도

그 구원 사건이 지금 이 순간 벌어졌다는 겁니다.

 

어디 큰 전쟁이 벌어졌나요?

네 안 벌어졌지만 벌어졌습니다.

이건 또 믄 말

전쟁이 없다고 해놓고서는 전쟁이 있다니
마치 요즘 벌어지고 있는 테러처럼 전쟁은 없는데

죽어나가는 자들이 발생하듯이 말입니다. 파리테리나 911 테러처럼 말입니다.

칼 싸움은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전쟁은 출애굽 보다 더 심각하게 벌어진 겁니다.

곳곳이 지뢰밭이 되어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겁니다.

출이스라엘 할 상황일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출교회 출기독교 할 상황입니다.

물론 기독교 라는 것 자체가 매일 매일 출기독교 한다는 의미니까 말입니다.

 

끊임없이 그리스도에게로 도망치는 겁니다. 피난처는

기독교가 아니라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니까 말입니다.

 

그 사건이 다윗이 외친다는 것은

 

지금 이스라엘이 아직까지는 두 패로 나누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얼룩과 같은 다윗을 제거함으로써 통합을 이룰려는 사울왕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

오히려 본격적으로 두 패로 갈라져서

아예 이스라엘 자체가 없어지도록 하는 그 분류작업에

찬양이 그 중간경계에 놓여진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없어져도 이상하게 이스라엘은 더 생생하게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겁니다.

그 이미 완료된 새이스라엘이 예수 안에서 명료하게 있기 때문에

흐릿하고 모호한 이스라엘을 가차없이 갈라버리는 겁니다.

 

다윗은 이 찬양이 바로 미래에서 와서 완료를 외치고 있는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은 이 찬양에 따라 여호와를 찬양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찬양자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없어졌어도

새이스라엘로써 찬양자로써 여호와의 구원을

그 십자가의 구원 사건을 온 땅에서 주의 이름을 노래 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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