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문제와 아기 예수님 탄생 (시편 68편)
(시 55:12, 개역)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시 55:13, 개역)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시 68: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시 68:2, 개역)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시 68:3, 개역)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시 68:4, 개역)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지어다』
(시 68:5, 개역)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시 68:6, 개역)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시 68:7,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셀라)』
(시 68:8, 개역)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시 68:9, 개역)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시 68:10, 개역)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시 68:11, 개역)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시 68:12, 개역)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
(시 68:13, 개역) 『너희가 양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
(시 68:14, 개역)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시 68:15, 개역)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
(시 68:16, 개역)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시 68:17, 개역)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시 68:18, 개역)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시 68:19, 개역)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 68:20, 개역)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시 68:21, 개역)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시 68:22, 개역)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시 68:23, 개역)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시 68:24, 개역)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시 68:25, 개역)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
(시 68:26, 개역)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시 68:27, 개역) 『거기는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와 스불론의 방백과 납달리의 방백이 있도다』
(시 68:28, 개역)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
(시 68:29, 개역)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시 68:30, 개역)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시 68:31, 개역)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 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시 68:32, 개역)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셀라)』
(시 68:33, 개역)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시 68:34, 개역)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시 68:35, 개역)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힘과 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지난 주에 어머니와 말씀을 나누면서 시편 54편 원수는 예수님이 갚는다를 살펴 봤는데
이 말씀을 나눈 후
주 중에 땅의 회복을 묻고 난 뒤에
제가 마침 시편 63편을 통해서 광야에서 나오는 이새의 줄기를 미리 조금 언급한 후
그 이후에 시편 68편을 보신 후에
저에게 시편 68편을 봐라 무시 무시하더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날 갑자기 말씀을 나누자 라고 하셔서
제목을 원수와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고
말씀을 나누고
오늘 시편 55편 배신 속에서 구원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에
제가 드디어 시편 68편을 보니
이렇게 언급된 것들이 다 하나로 연결이 되지 뭡니까?
먼저 크리스마스 날에 혹 틈새가 생기면 형님네가 왔을때에 나눌까 싶어 미리 준비를 했는데
틈이 생기지 않아 결국 포기했는데
어머니께서 찾아와서 나누자고 해서 미리 준비한 것을 나눌수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뭔고 하니
누가복음
(눅 1:71, 개역)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눅 1:74, 개역)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나타난 성령을 통한 기도였습니다.
크리스마스날 물론 성경의 아기 예수님 탄생과 무관한 서양의 동짓날이지만 말이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왜 아기여야만 했는가입니다.
성인으로 메시아가 구름타고 등장하면 얼마나 좋지 않습니까?
기다리던 메시아가 왔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아기로 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제가 어머니께 질문했습니다.
왜 아기로 와야 합니까?
어차피 3년 활동하다가 십자가에 죽으시러 왔다면
그냥 성인으로 나타나고 구름타고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왜 어른으로 나타나지 않고 아기로 태어나야 할까요?
1번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2번 그 어떤 자도 못 믿도록 하기 위해서
둘 줄에 하나 고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삐닥한 것 고르면 되겠지요.
2번입니다.
2번이 중요한게 아니라
사실상 원수 문제 때문입니다.
아기로 태어나지 않으면 원수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밝혀 지지 않습니다.
감추어졌고 숨어있는 원수를 무슨 수로 밝혀 냅니까?
에게 에게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어릴적 부터 봐 왔던 사람들이 있어야 하니까 말이죠.
문제는 아무도 이 원수 문제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 원수 문제 때문에 왔는데 말입니다.
특히하게도 마태복음은 이 원수라는 표현이 아닌
자기 백성을 저희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마 1:21, 개역)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꾸로 정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지난 시간의 시편 67편처럼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주를 송축하고 경외하는 것은 유대인이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거꾸로 모든 민족인 이방인이 주를 송축하고 경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싫어할까요?
즉 저희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은 이방인에게 해당 됩니다.
그리고 원수로부터 미워하는 자들로부터 구원하심은 오로지 유대인에게 해당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곧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복음증거에서는 원수와 미워하는 자로부터 건지시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이 구원하러오셨고
반대로 마태복음은 곧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복음증거에서는 원수의 손에서가 아닌 저희 죄, 자기 죄에서 건지시러 아기 예수님이 왔다는 겁니다.
정반대죠.
그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 역사를 보는 시선에서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본 겁니다.
그런데 거꾸로 이방인이 원수로부터 미워하는 자들로부터 구원하시고자 아기 예수님이 오시고
반대로 유대인에게는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아기 예수님이 오신다 라는 것은 바로 아기 예수님의 시선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원인에 따른 결과인 역사적 해석, 시간 순서상의 해석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결과에 따른 원인 없는 결과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런 시선이 시간을 초월해서 거슬러서 다윗에게 덮쳤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자랑꺼리가 되지 못하고 싫어하는 바가 되고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지혜로써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구원은 얻은 우리에게는 자랑꺼리가 노래와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고 했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어머니와 나눈 말씀인
시편 55편 배신 속에서의 구원 또한
원수에 대한 해석이 관건이 되는데
도대체 원수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먼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힘이 있는 권력의 모습으로 오시는 해방자,
곧 메시아 인줄 알았는데 아기로 오니까 너무 너무 힘이 없는 겁니다.
무능 하기 짝이 없는 거지요.
에이 무능한 아기로 부터 누가 구원받고자 합니까?
도로 구원해 줘야 할 아무것도 아닌, 아무런 힘도 없는 젖먹이인데!!!
그리고 제일 중요한 원수 문제인데
누가 원수 문제 해결해 달라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원수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것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아무도 원수 문제가 없거든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자기 죄 문제로 예수님이 아기 예수님으로 태어나 주세요 라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여 유대인은 로마 압제로부터 해방을 바라는
원수에게서 건져 달라고 하는데 유대인에게는 오히려 마태복음에서 자기 죄 저희 죄에서 건져달라고 아기 예수님이 구원하시러 왔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유대인 입장에서는 아기로 부터 건짐받는 놀림꺼리가 될 텐데
그 구원은 결국 거리끼는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조상처럼 유월절 어린양으로 부터 구원을 받았거든요.
결국 인간의 믿음이란 사실상 절대로 안믿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이라고 하잖아요.
누가 아기 한테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하는 자가 어디있겠습니까?
그저 초코렛 하나 더 팔아 먹을려고 빼빼로 데이와 같은 취지의 크리스마스가 아닙니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돈 때문에 선전하는 판국인데
교회도 마찬가지 돈이 더 들어오는 날로써 아기 예수님 탄생을 기념하지
원수 문제 해결해 주세요
저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저의 죄로 부터 건져주세요 라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바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이 직접 이 원수 문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아기 모습 즉 아무것도 아닌 힘없는 모습으로 태어나니까
갑자기 멀쩡하던 인간들이 마귀로 변해서
이 아기 예수님을 죽일려고 들썩 들썩 하면서
땅들이 요동하는 겁니다.
온 동네가 들썩 들썩 합니다.
관심도 없던 인간들이 성경구절까지 찾아내서 어디에 태어나는 것 까지 다 밝혀낼 정도입니다.
참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비밀은 커녕 허술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없던 원수를 새로 만들어서 원수를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그저 이 아기 예수님 하나 죽일려고 모든 인간들이 눈이 뻘개져서 온 동네가 들썩 들썩 하는 겁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전혀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였는데
정작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니까 다들 갑자기 돌변하여서
밤에 배를 채우지 못해서 굶주림에 잠을 못자는 짐승들처럼
갑자기 돌변하는데
이 모습이 바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 때문이다는 겁니다.
만약 성인으로 구름타고 나타났다면
절대로 돌변하지 않는 감추어진 모습입니다.
아기 예수님이어야만 그 숨겨진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것이 원수 문제 때문입니다.
그럼 원수는 누구입니까?
답이 너무 너무 간단하고 쉬워서 무시하는 겁니다.
원수는 과연 누구인가라고 묻는 자가 바로 원수 입니다.
왜 신학자들 성경박사들이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가 누구인가를 해석을 못하느냐 하면
그렇게 질문을 하는 자신은 정당하다고 본 겁니다.
자신을 빼놓고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는 누구지? 라는
의문을 가지는 자는 시편을 보는 자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정당하다고 본 것인데
의문을 가졌다는 이유로 나는 절대로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야
왜? 이렇게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가 누구인지를 연구하고 있으니까 !! 라는
이것이 도리어 원수이다는 증거 입니다.
저 율법을 어긴 나쁜놈을 네배가 갚도록 해라 라고
율법을 해석할 줄 아는 그 놈이 바로
그 놈이 바로 너다 너 라고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땅땅땅 율법으로 판결하는 자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자
본인 자체가 그 놈 바로 원수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묻는 그 묻는자가 원수가 아니고 누굽니까?
딴 사람 있나요? 누가 원수입니까?
딴 사람 있으면 자신있게 떳떳하게 그 사람이 원수 입니다 라고 말해 보세요!!
원수가 누구지? 라고 의문을 가지는 자가 원수 입니다.
이것이 명료한 자는 오히려 원수로 들통나는 것이 기쁠겁니다.
오늘 시편 55편 말씀을 나누면서
아주 특이하게도
다윗이 아주 아주 특이한 표현을 합니다. 정말 정말 특이한 표현입니다.
(시 55:12, 개역)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시 55:13, 개역)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시편에서 원수가 과연 누구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원수가 아닌데 원수이고
미워하는 자가 아닌데 미워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원수 인듯, 원수 아닌, 원수 같은 원수 ~~~~~~~~~~
원수면 참으면 그만이고
미워하는 자면 숨어버리듯 멀리하면 그만입니다. 가까이 하지 않으면 된다는 거죠.
그런데 참아도 안되는 관계이고
숨어버릴수 없는, 멀리할 수가 없는 관계이다는 겁니다.
즉 철거머리 처럼 딱 달라 붙어서 평생을 가는 관계가 바로 원수이다는 겁니다.
나의 동무이고 나의 친구이고 나와 가장 가까운 자인데
바로 압살롬이듯이 결국 자기 자식이다는 겁니다. 자시 분신이다는 거죠.
이것은 다윗의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그 개인의 경험을 훨씬 넘어서는
결국 예수님의 상황이 다윗에게 덮쳐졌는데
자기 백성이 예수님을 죽일려고 달려드는
원수의 모습처럼 들썩 들썩 거린다는 겁니다.
자기 피조물이 창조주를 죽일려고 달려드는 모습
이것을 다윗이 격는다는 것이 바로
원수에게서 구원하는 방식인 곧 배신 속에서의 구원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원수로부터 구원하시는 방식은
자기 자식으로부터 배신 당하는 상황에 놓여지는 겁니다.
다윗아 너도 원수 속에서 원수와 똑같은 사고방식에서 사는 구나
내가 아기 예수로 태어나서 너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마 라고
원수 속에서 건져내시는데, 구원하시는데
그 방식이 십자가 곧 요나의 표적 방식이
원수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원수 속에서 구원하는 방식이 원수 속에 집어 넣는 것이
원수 에게서 구원하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참 특이하죠.
누가 싫어했습니까? 요나 선지자가 싫어했잖습니까?
모든 민족이 주를 송축하고 주를 경외하는 것을 말입니다.
자기는 이스라엘 선지자로써 이스라엘을 회개시켜 돌이켜야 하는데
남의 민족이 회개해서 돌이켜 주를 송축하고 주를 경외하는 그 꼬라지를 못 보겠다는 겁니다.
요나 선지자 당사자가 이런 여호와의 긍휼에 의해 십자가에 의해 들통나야 하는 판국인
요나 선지자 또한 자기 죄에서 원수에게서 구원받아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박넝쿨로 굴복시키는 겁니다.
내가 무시했던 박넝쿨이, 닭의 세번 울음소리가 나를 원수인 나로 부터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이런 기적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전부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그런 기적을 달라고 아우성 치는 크리스마스만 노리는 겁니다.
결국 다윗은 누구의 운명을 말하기 위한 아바타 입니까?
다윗 개인의 구원은 없습니다.
처음 부터 예수님의 구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저희 죄에서 저들 원수에게서 저들 미워하는 자들로부터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원수 갚는 방법이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겁니다.
원수가 주르거든 먹을 것 주고
원수가 목마르거든 마실 것 주고
이 말도 안되는 소리가 드디어 말이 되는 겁니다.
지 자식이거든요,
자기를 죽일려고 따라잡다가 목마르니까
물을 주게 해서 계속해서 자기를 죽일수 있도록 목마름을 해결해 주라는 겁니다.
밤새도록 쫏아와서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어서 계속해서 자기를 죽일수 있도록
먹을 것을 주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도리어 십자가는 우리를 도리어 용서를 하시는 겁니다.
원수 인데!!!!
(마 5:43, 개역)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 개역)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6, 개역)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개역)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8, 개역)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우리 보고 지키라고 준게 아닙니다.
성화론자들이 그래서 위선자들이다는 겁니다.
결국 누가 원수 입니까?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우기는 우리 자신 아닙니까?
정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선민이라고 구원받은자 라고 우기고 싶다면
원수임이 매일 매일 들통나는 사건을 당해야 하는 겁니다.
결국 원수 사랑은 예수님 혼자만 하실수 있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수도 없을 뿐더러 원수 갚는 것 조차도 허락 되지 않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신다는 겁니다.
성경은 우리가 지킬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다고 하니까 억수로 좋아라 하는 자가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좋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를 처음부터 무시하는 의미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겨냥한 의미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오히려 무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이유로 안식의 주인을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역설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면 반드시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안식일 안 지키면 안식의 주인인 예수님을 안 미워하겠네요? 천만의 말씀
대표적인 의미이기에
모든 인간이 다 싫어한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 지키든 안지키든 상관없이 예수님을 그저 이유 없이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자꾸 이것을 안식일 지키기로 감출려고 한다는 대표성인데
안식일 안 지킨다고 안식의 주인을 안 미워할까요?
우리는 죄 아래 갇혀 있다는 의미인데!!!!
뭘 해도 다 죄이다는 겁니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누가 싫어할까요?
우리입니다.
저 세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 탕자를 금가락지 새신발 살찐 소를 잡아 잔치를 벌리는
그 예수님이 미운 겁니다.
내가 원수를 7번 용서 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이미 원수를 7에 70번 용서 했다고 하니까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 (영화 밀양)
이것이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모호한 나의 7번 용서가 거짓인줄 모르고
명료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7에 70번 용서를 오히려 거짓말로 취급하는 겁니다.
말로 표현했다간 들키니까
온 몸이 거짓말이야 라고 외치듯이 들썩 들썩 거린다는 겁니다.
즉 너의 자식에게 한번 당해 보라는 겁니다.
너의 분신 곧 너 자신에게 한번 당해 보라고
원수 속에 집어 넣는 겁니다.
원수도 아닌데 원수이고
미워하는 자도 아닌데 미워하는 자
나의 동무 나의 친구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부터
내가 가장 모든 나의 사랑을 퍼부은 나의 자식으로부터
내 자신으로 부터
쫏겨다니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에 처해 보면
아 맞구나 내가 하나님의 원수이구나
그래서 맏아들이 아닌 탕자를 용서하시는 분만이 진짜 원수를 사랑하시는 자이다 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원수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그것도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신을 매일 매일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나 같은 원수를 구원했다는 증거로써 말입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이것이 자랑스럽습니까?
아니면 쪽팔립니까?
쪽팔리면 박목사 말대로 보충물이 필요해서
자랑스럽지 못해서 가리우는 가리개가 필요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는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 토색치 않음을 내세우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고, 원수를 7번 용서했다는 것을
얼마나 자랑스럽지 못하면
거리끼는 부끄럼으로 여겨서 가리개로
그런 것을 내세우는 겁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런것들이 배설물임을 예수님의 원수 사랑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모호한 배설물 꺼리로 가릴수가 없습니다.
가릴수 없다면
그냥 차라리 즐기면 됩니다.
이 십자가가 나의 자랑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럼 오늘 시편 68편은 그야말로 원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시는 여호와를 자랑스러워 한다는 점입니다.
기쁘고 자랑스럽고 룰루 랄라 이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지
노래하고 노래하는 겁니다.
즉 출애굽의 그 구원사건처럼(왜 하필 출애굽입니까? 유월절 다 큰 양이 아닌 유월절 어린양 입니다.)
그리고 지금 다윗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는 겁니다. 이 무슨 이상한 해석을 다윗이 하고 있는 겁니까?
다윗은 원수로부터 건져 주시는 아기 예수님을 보고
얼마나 원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 주시는지
너무 너무 구체적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구원 문제로 끝나는게 아니라
다윗의 삶 전체에 계속해서 스며드는데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서 숨어있던 원수들이 들썩 들썩 하는 가운데
구원의 영광이 더 또렷하게 드러남을
다윗은 아주 신났어요 신났어
사울왕의 손에서 압살롬의 손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손에서
이들 원수로 부터
이들 미워하는 자들로 부터
구원하시는 아기 예수님의 구원을 본 겁니다.
지금 다윗은 쫏기는 중인데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데도
원수 아닌 자가 원수로
미워하는 자가 아닌 자가 미워하는 자로
나의 친구 나의 동료 나의 벗 나의 가장 가까운 자인
나의 자식이 원수로써 나의 목숨을 노리로 저렇게 달려드는 그 와중에도
지금 다윗은 아기 예수님의 등장을 보고서
이 원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왔다는 것에
마치 벌써 승리한 냥
그 전쟁승리의 노략품인 전리품인 선물을 미리 받고 미리 즐겁게 누리는냥
(시 68:18, 개역)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시 68:19, 개역)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기뻐한다는 겁니다.
얼마나 신이 났으면 노래를 불러요 노래를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십자가에서 죽음 당하심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하심이
전혀 전쟁의 승리처럼 안 보이는데
다들 도망쳐서 세 번 부인하면서까지 다들 흩어졌는데
예수님 자기 혼자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의 승리를 외칠때에
예수님 혼자 기뻐했듯이
지금 다윗 자기 혼자 딸랑 혼자 출애굽 구원사건이 지금 벌어졌다고 외치고
그 원수를 파헤치고 승리했다는 것을
지금 다윗 지 혼자 좋아라 하는 겁니다.
아무도 이 다윗이 말하는 예수님의 승리를 아무도 안 기뻐합니다.
물론 시편 67편 68편을 달달 외우지만
정작 예수님의 승리가 아닌
자기 승리가 되길 바랄 뿐이지
다윗이 말하는 예수님은 관심 없다는 겁니다.
노래 불러도 그저 노래일 뿐이지
사건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사건이 되었기에
자기 혼자 좋아라 이 구원사건을 기뻐하는 겁니다.
왜? 원수 문제를 비로소 해결했거든요.
얼마나 기쁠까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이런 의미에서 기뻐하는 자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눅 2:14, 개역)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만이 평화를 누리는 겁니다.
원수 문제를 해결했거든요.
입은 자만이 화평을 노래하는 겁니다.
다윗은 그래서 이스라엘이 부끄러워 하는
오늘날 교회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 십자가를
오히려 자랑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유일하게 원수 문제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죄에서 나를 건지시는 아기 예수님의 구원이거든요.
나의 원수가 아닌 원수
나의 죄가 아닌 죄 문제를 해결한 유일한 것이
내가 설정한 원수가 아닌 그런 원수 문제를 훨씬 뛰어넘는 아기 예수님의 원수
내가 설정한 죄 문제가 아닌 그런 죄 문제를 훨씬 뛰어넘는 죄의 권세에서 건지시는 아기 예수님,
유월절 어린양!!
바로
십자가의 원수를 용서한 피 흘리심이기 때문에 노래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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