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무릎 꿇어라!! (시편 95편)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시 95: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 95:2, 개역)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 95:3, 개역)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시 95:4, 개역)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시 95:5, 개역)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시 95:6, 개역)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 95:7, 개역)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
(시 95:8, 개역)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시 95:9, 개역)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시 95:10, 개역)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시 95: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신약에서 시편 95편이 인용된 곳이 바로 히브리서 3장과 4장입니다.
그 내용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의 반대되는 의미는 마음이 완악 강퍅케 됨 이다는 겁니다.
왜? 안식에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천국에, 예수 안에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이 아닌,
살아있는 가운데서 약속의 땅에 곧 예수 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실제로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시편 95편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일만달란트 비유 말입니다.
용서의 왕 중의 왕인데
정작 용서 받은 자는 없는 비유 말입니다.
자크 데리다 말대로 예루살렘에 접근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처럼
안식에 들어간 자는 아무도 없었다입니다.
아무리 예루살렘이라는 실제 지도 상에 살고 있는 주민이다 할 지라도
예루살렘에 들어간 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시편 95편을 보자 마자 상하로 구분이 되면서
앞뒤 즉 위 아래 위 위 아래, 위 아래 위 위 아래 가 뒤바뀐게 아닌가 했습니다.
7절까지는 그야말로 기쁨의 노래입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그런데 8절부터 반전이 됩니다.
진노요 책망입니다.
그래서 처음 보자마자 느낀점은 그러했다는 겁니다. 바뀐 것 아닌가 하는
저 개인만의 생각이였습니다.
또 지난 시편 81편을 보면서 자꾸 몸에 배였던 가스펠이 생각났는데
지금 다시 떠오르지 않았지만
오늘 그 노래는 아니지만 비슷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무지 불렀으니 몸에 배였죠 뭐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사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미 4:2, 개역)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또 한 곡은 시편 95편의 7절을 인용해서 만든 곡이던데
(시 95:7, 개역)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
그의 손의 양이라 ~~~ 그의 손의 양이라
주님께 경배드리세
주님 앞에 나와 모두 무릎꿇고
주님께 경배드리세
주님 앞에 나와 모두 무릎 꿇고
그는 우리 하나님 우린 그의 기르시는 백성
그의 손의 양이라
그의 손의 양이라
바로 양과 목자의 관계성을 말하고 있는
무릎 꿇게 하는 경배의 대상이다는 겁니다.
양을 무릎 꿇게 하는 주 이시다는 겁니다.
즉 지난 시간에 누가 질문해서 흔적 곧 십자가의 흔적에 대해서 언급했듯이
무릎 꿇었다 즉 무릎에 흔적이 있다. 어떤 흔적?
십자가에게 항복 나는 이 십자가한테 졌습니다. 도저히 십자가를 못 이기겠습니다.
십자가가 나 보다 옳습니다. 나는 십자가에게 졌습니다. 항복의 흔적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유대인이 또는 마귀들이 역이용해서
그래 너 그 흔적이 있으니 부끄럽제? 부끄럽제?
우리가 너를 아주 아주 웃사스럽게 만들어 주마
예수도 우리가 마음껏 조롱하고 비방하고
하하하 성전을 사흘만에 짖는자여 라고 마음껏 조롱했듯이
아주 아주 저 부끄러운 십자가를 너에게 새겨서 아주 아주 부끄럽게 만들어 주마
그런데 정작 사도바울은 십자가는 너희들에게 그렇게 부끄러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자랑이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고
오히려 그 십자가의 흔적을 더 자랑하는 겁니다.
죄 수 복을 입은 채로 더 피를 더 과시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 즉 부끄러움이요
이방인인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미련한 짓이거든요.
그래서 인간들은 부끄러움을 빨리 제거 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오히려 그 부끄러움이 이제는 더더욱 자랑이다는 겁니다.
이런 영광이 따로 없다는 거죠.
이 영광! 서로 받고 싶어서 소망한다 말이죠. 부러워 죽어요.
하나님의 능력이거든요.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19,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 ㉩사 29:14(칠십인역)』
(사 29:14, 개역)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 처형 시켜서 너와 너의 주변인들에게 공포가 되도록 만들어주마!!
이것이 저들의 육체의 자랑꺼리이다는 겁니다. 곧 싫어하는 십자가다 말이죠.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 예수쟁이에게는
아니 공포이기는커녕 영광인걸 자랑인걸 ~~~~~ 고마워 빨리 십자가에 죽여줘 라고
십자가가 부끄러움이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 귀하디 귀한 자랑이다는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며느리 다말이 내밀었던 그 도장 도장끈 지팡이가
부끄러움의 증거물인 거리끼는 걸림돌이 아니라
도리어 시아버지 유다를 구원하는 영광이요 자랑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불 속에 집어넣은 그 며느리 다말이
도리어 불 바깥에서 타 죽고 있는 시아버지 유다를 살리는
구원의 증표이다는 겁니다.
아니 불 속에서 타 죽지
어떻게 불 바깥에서 타 죽죠?
글쎄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가 비밀인 이유입니다.
다니엘 세친구는 불 속에서는 정작 하나도 안 타죽고
오히려 불 바깥에서 불속으로 집어넣을려고 했던 자들이 도리어 타 죽으니
성경말씀은 도대체 믿으라는 소리인지
일부러 믿지 말라고 의도적으로 불가능한 소리만 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말이죠.
오늘 시편 95편이 그렇습니다.
아니 오라 라고 초청해 놓고서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 라는 식입니다.
오라 했잖아요
오라메 ! 아니 오라메 ~~~~
오라리 오라리 오라리요 ~~~ 내 사랑 오라리요 ~~~
왔는데
안돼 못 들어가 라고 하는 식 입니다.
이 모순 점 무슨 수로 푸시겠습니까?
일만달란트 탕감 했잖아요
즉 용서 했단 말이죠.
그런데 그 탕감받은자 결국은 용서 받았습니까? 결과적으로 말이죠
용서 못 받았지요. 용서 받기는 받았는데 다시 용서를 받지 못하게 되었잖아요.
그럼 결과적으로 용서 못받았으니
용서의 비유가 안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내용이
용서의 의미를 더더욱 풍성하게 하더라 말이죠.
괜히 그 일만달란트 용서 받은 자, 지만 손해예요
용서 받은자도 없이 용서의 의미는 더더욱 풍성해져서 용서의 왕 중의 왕으로써
비유가 더더욱 풍성해지더라 말이죠.
오라 해 놓고서는 왔는데 정작 아무도 못들어가더라 말이죠.
다 탈락
심지어 모세도 탈락
이 모순점! 해석할수 있는 사람 나와보라 말이죠.
성경전체는 이런 모순 밖에 없어요.
십자가로 부끄럽게 만들어 주마 라고 부끄럽게 만들줄 알았는데
부끄럽기는커녕 그 십자가의 흔적이 더더욱 자랑스럽게 되더라 말이죠
자 이런 입장에서
광야 40년은 하나님의 실수다
왜 쓸데 없이 15일 길을 괜히
뺑뺑이 돌려서
더더욱 원망할 수 밖에 없는
물없는 곳 양식 없는곳으로 인도해서
마음을 완악하게 목이 곧은 백성으로 만드시니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속임수가 아니냐
그 속임수에 넘어가서 그런거지
안 속였어봐 그랬다면
우리가 바로 가게 되었을 것 아니냐 말이죠.
괜히 주님이 우리를 원망하도록 유도해서,
괜히 진짜로 부인, 원망하도록 만드니까 그렇게 된거 아니냐 라는 겁니다.
왜 그런 하나 마나 한 짓을 하도록 했냐?
차라리 오라 하지 말던가?
오지를 말라 하던가 오라 해 놓고서는 못들어가 라고 하고 있으니
왜 의도적으로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는 물없는곳 양식없는 곳으로 인도하냐 말이죠.
우연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 사건 아니냐 말이죠.
철저한 계산아래서 펼쳐진 간계가 아니냐 말이죠.
속은 우리가 억울하지
그래놓고 왜 하나님이 더 억울하다는 식입니까?
자 이 모순점 무슨 수로 해결하시겠습니까?
제가 의도적으로 14번 원망을 10번 원망했다고 억지스럽게 맞추었다고 했지요.
이것은 애굽의 10가지 재앙과 대비한 겁니다.
결국 백성들 말이 맞아요.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애굽에서 죽이는거나
광야에서 죽이는거나 다를바 없었다 말이죠.
오죽 하면 애굽이 쫄딱 망한 것 보고도
나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외쳤겠습니까?
애굽보다 더 하니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자 이 모순점 어떻게 푸시겠어요.
제가 교회사람들을 통해서 특히 목사나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
하여튼 직분도 많아
소위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서 배우면서
이런 내용을 은근히 물어보면
너무 깊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 라는 식으로
억지로 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 누가한테 물어봅니까?
자꾸 물어보니 막 짜증을 내요!!
아니 억지가 아니라
무식한 나도 겨우 믿은지 얼마되지 않은 나도 이런 내용이 뻔히 보이는데
묻지도 못하냐 말이죠.
다들 물음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더라 말이죠.
답답한 놈이 우물 파는 거죠 뭐.
아니 목사 등등의 직분이 왜 있냐 말이죠.
아니 분명 저 뿐만 아니라 무지 많은 사람들이 물어봤을텐데
그럴 때 마다 다 저런식으로 회피하면
회피한다고 될 문제냐 말이죠.
회피가 안되는데!!!!
그냥 모르겠다고 하면 얼마나 좋아!!
딴사람에게 물어보게
또 그러면 시샘이 나서 딴사람 찾는다고 또 난리야!!
그럼 어쩌라고????
그래서 갑자기 그 질문 땜에 요주의 인물이 되어버렸넹 ㅋㅋㅋㅋ
그 답답함을 안다면
본인도 누구든지 붙잡아서 묻고 묻고 또 물어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아마 없었으니까 그렇겠죠 뭐
본인들도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는 소리를 들었길래
그대로 따라한거겠죠 뭐
어차피 기대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게 바로 악마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또렷한 현실이다는 겁니다.
구조죠
바로 이런 악마를 끌어당기기 위해서 주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 상대 안합니다.
인간 구원 안합니다.
인간이 구원을 원치 않으니까 말이죠.
인간은 악마로부터 건짐 받으면 저절로 구원이 되요
그래서 주님은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의 악마만을 상대로 하시는 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악마가 보이지 않으니까
인간은 구원이라는 탐욕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구원에 손해되는 일은 절대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 사적인 구원을 주님은 아주 아주 대 놓고 깨 부서버립니다.
그래서 오지마 못 들어가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니 자기가 오라 해 놓고서는 오지 말래
참나 더러버서 안 간다 치 피 흥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 곧 인간 마음의 완악함을 들추어내시는 이유입니다.
이거 안 들추어냄을 당하는 자 오지마 라고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 들켜 버렸습니다.
자 이제 다 들켜 버리니까
주님 참으로 주님의 능력이 크십니다 라고 나오는게 아니라
왜 나의 마음의 완악함을 끄집어내냐고
그래서 자기 발걸음으로 스스로 돌이키게 만드는 겁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내 속에 이런 암덩어리를 들추어내시다니요
저도 제가 왜 이랬는지 몰랐습니다.
알고보니 주님이 이래서 나를 물없는곳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해서
의도적으로 원망케 하셔서
이 암덩어리만을 상대하신 이유였군요 라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이게 내가 새롭게 태어난 날 1월 1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편 95편이 신년에 드리는 감사기도라고 합니다.
즉 보이지 않는 마귀를 끄집어 내지 않는 이상 구원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 원수를 파 한 날이 구원의 날 신년 새로운 해
새롭게 태어난 1월 1일이 되는 겁니다.
알고보니 그 원수가 애굽뿐만 아니라
나도 그 원수의 속성이 그대로 묻어있는채로
출애굽을 했으니
주님은 그것까지도 너끈히 해결하시고자
일부러 물없는곳 양식없는 곳으로 인도했다 말이죠.
원망 세 번 부인 받아낼려고
그래서 증거궤에 담아서
언약으로 삼아 언약궤 두껑 시은좌를 덮고서 자기 피를 뿌리는 겁니다.
다시는 허물로 삼지 않겠다 라고
우리가 바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인데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려고
이 광야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예수 너는 어떻게 할래 라고 시험하니까
주님은 그 증거물 법궤에 담아서 두껑 덮어서
다시는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땅에 쓱 쓰니까
마귀들이 드디어 놀래서 도망치는 겁니다.
이런 마귀들을 들추어내시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말이죠.
영화 내부자들 주인공 이병헌이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띠엄 띠엄 보지말라고
우리가 마귀를 띠엄 띠엄 보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더더욱 띠엄 띠엄 보는 겁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자꾸 어린아이처럼 부분 부분만 봅니다.
그런데 전체 얼굴을 보게 되면
내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이 마귀만을 상대로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때려죽었다 깨도 마귀를 못 보잖아요
그 안 보이는 마귀만을 상대하시는 주님의 특이한 행동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띠엄 띠엄 볼게 아니라
깊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멈춰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무조건 무릎 꿇어라입니다.
그는 나보다 무조건 옳다는 겁니다.
왜?
나는 뭘 해도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수 많고 수많은 나라 중에서 왜 하필이면 대한민국에 태어난 줄 알어?
모르잖아요
그럼 광야에 왜 비를 내리는 줄 아느냐 말이죠
모르잖아요
하여튼 아는게 없어요
그럼 무릎꿇어라 말이죠.
주님은 안다 말이죠.
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띠엄 띠엄
호구로 보냐 말이죠.
이용할 생각만 했지
이용 당해도 쌉니다 라고 나오지 않냐 말이죠.
어차피 이용 당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이 영광인줄 알아라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오로지 이용할 생각 뿐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아시고 벌리시는 일들입니다.
가능한 일 같으면 이용당하시겠지요.
그러나 불가능한 일들만 벌리시기 때무네
우리는 이용 당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일종의 형벌로써 죄수에게 이 놈은 죄수이다 라고
요즘으로 치면 전자팔찌를 채우는 겁니다.
얼마나 수치 스럽겠냐 말이죠
그래서 협박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을
전자팔찌 채우면 너는 인생 쪽팔려서 예수고 뭐고 아무것도 못 전해
라고 협박하니까
웃끼지 마라 죄수에게 십자가 표식으로 야는 예수쟁이니까
야랑 말 썩는 놈은 같이 왕따 시킬 거야 라고 협박하는데
오히려 우리에게는 영광이다.
저절로 마귀가 구별시켜 주니 고맙지 뭐
어딜 감히 그딴거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를 부리느냐
오히려 내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십니다 라고
마귀 보란 듯이 더 떳떳하게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죄수복 입은채로
죄수 표식 머리에 십자가로 도장 화저로 도장 찍듯이 찍어서
특별사면 이라고 빨간 피 도장을 찍힌 그 죄수복을 오히려 자랑한다 말이죠.
죄수복 벗으면 자랑할게 없어져 버려요.
그래서 광야에서 죽음의 죄수복을 입혀버리는 겁니다.
세 번 부인하다가 마귀에게 잡혀온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 버립니다.
자 그럼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자랑스러워 해야합니까?
죄수복 입은게 자랑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수복에 발린 피를 자랑하느냐 말이죠.
우리는 그게 싫은 겁니다.
왜 하필이면 의인의 의복에 피가 발려야 자랑하는데
피는 하필이면 죄수복에만 발려 있어요
말이 맞잖아요.
오히려 의인에게 피가 발릴 이유가 없잖아요.
의인의 의복에 특별사면이라는 빨간 도장이 찍히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고 수상하지
죄수 복에 특별사면 이라고 찍히잖아요.
누가 더 이상합니까?
하여튼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은 정말 이상한 이단들이며 마귀들입니다.
저들의 말은 말이 맞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말이 안되요
그러나 저들 말 마따나 처음부터 이 쪽은 말 안되는 소리만 해요 그런데 말이 되더라 말이죠.
용서 받았는데 왜 자꾸 죄인 죄인 하면서 죄수복을 입냐 오히려 용서를 무시하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방종의 원리를 꼬투리 잡아서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이 쪽은 죄수복이라는 꼬투리 잡을 것 뻔히 알면서도
죄수복이 중요한게 아니라
죄수복의 발린 피 때문에
피를 자랑하고파서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저들은 죄수복이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피를 자랑하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는 겁니다.
거룩한 행함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걸림돌이니 말이죠.
그러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죄수복이 전혀 거리끼지 않고서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하게 되는
고마운 십자가의 지혜가 되는 겁니다.
죄수복(죄인의 증거)이 전혀 껄끄럽지 않아요.
반대로 유대인과 오늘날 성화론자는 이것 보다 껄끄러운게 없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 됨을 자랑하는 자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 밖에 없습니다.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나의 죄수복(육체가 더러운) 입은 것에 신경쓰냐 말이죠.
신경 쓴다고 의문의 반복을 멈출 재간이 있기는 하냐 말이죠. 그것이 도리어 꾀는 겁니다.
또 속일려고 한다 말이죠. 막살면 안된다 라고 말이죠.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개역)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개역)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결과가 극과 극으로 두 패로 영원히 갈려지는 겁니다.
이것이 그만 성경 전체를 보는 시선차이로 간극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버린 돌이어야만, 나의 머릿돌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버리지 않은 돌은 절대로 나의 머릿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거리끼는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를 유대인들은 결코 받아들일수 없을 뿐더러
자랑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부끄러워 할 수 밖에 없는 거리끼는 겁니다.
저들은 버린 돌 사건(십자가 사건)은 이미 삭제 되었다 이제 없다
머릿돌만 외치면 된다는 겁니다.
부활만 외치면 된다는 식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놓치는가 하면
이 간극이라는 구멍을 자꾸 채워넣을려고 불안 불안해 한다는 겁니다.
빈자리 그대로 있는 것을 견디질 못해서
(즉 모순 되기에 이 모순을 없애고자 한다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그래서 악마들입니다.)
의로운 행동을 해서라도 채워넣어서
간극과 모순점과 거리끼는 것을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비정상적이고 부정적이기에
거룩으로 교체하고야 말겠다는 겁니다.
천만의 말씀 이것이 십자가의 흔적인데
왜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이 흔적을 지울려고 하냐 말이죠.
그 모순점, 그 간극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자랑이다 말이죠.
예수님을 띠엄 띠엄 보고 있고
자기 의만 생각하고 있는 거다 말이죠.
어딜 감히 꾀냐 말이죠.
(히 3:7, 새번역) 『그러므로 성령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 ㉡시 95:7-11(칠십인역)』
(히 3:15, 새번역)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반역하던 때와 같이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 ㉣시 95:7; 8』
(히 4:3, 새번역) 『그러나 그 말씀을 믿은 우리는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것과 같이,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일을 끝마치셨으므로, 그때부터 안식이 있어온 것입니다. / ㉠시 95:11』
(히 4:5, 새번역) 『또 이 곳에서는 다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 ㉢시 95:11』
(히 4:7, 새번역)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어떤 날을 정하시고, 이미 인용한 말씀대로, 오랜 뒤에 다윗을 통하여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시 95:7; 8』
시편 95편이 인용된 신약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그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지음 받았고
너는 그 예수님으로부터 건짐 받은 자이기에
지으시는 창조주요
지음받은 피조물의 관계임을
이 관계성을
광야에서 나타내신바
여기에서 반드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지음받지 않는 것들을 도출해서 이 둘을 갈라놓는 것이다는 겁니다.
청함을 받은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라는
청함받은자와 택함받은자의 대조를 도출해내는데 있어서
안식에 들어가는 자와 안식에 못들어가는 자를 가려낸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원망할만한 곳으로 인도 한다 말이죠.
둘다 원망했지만 그 원망이 들추어짐으로써
한 쪽은 더더욱 완악 강퍅해 지고
다른 한 쪽은 더더욱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두 패로 갈라진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둘다 강도 맞아요
나쁜짓 했어요
그래서 오죽하면 죽이겠습니까?
얼마나 나빳으면
그런데 그 십자가의 처형 죽음에
예수님이 뛰어들줄 예상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쪽은 감히 나 같은 놈 하나 건지실려고 여기까지 끝까지 챙기고자 오셨나요 라고 묻는 물음이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죽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쪽 강도는 그 말이 오히려 완악하게 만드는 부채질이 되어 버려서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도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느냐
자기도 못 구하는 판국에 무슨 남을 구원해 라고
완악함을 발산하는 겁니다.
평생을 자기를 구원하고자 하는 삶이 이 강도의 삶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버린 돌이 나의 머릿돌이 됨을 한 쪽은 말도 안되게 덮쳐져서 보게 되었고
다른 한 쪽은 여전히 여전히 죽어가면서 까지도 그 완악함 그대로 머릿돌 웃끼시네 라고 하는 겁니다.
때려죽어도 창조주가 아니다
나를 지은 분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 나를 이 꼬라지로 만들겠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한 쪽 강도는 나를 만드신 분이시기에 여기에까지 오지 않았느냐 라는 시선입니다.
이 시차적 관점을 좁힐 마음이 주님은 추호도 없이
오히려 더더욱 풍성하게 되었고
다른 한 쪽은 더더욱 빼앗기게 된 겁니다.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간극 그대로
모순 그대도
이율배반
이성의 간지 그대로
십자가의 흔적을 증거하고 계시는 겁니다.
(히 3:1, 개역)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2, 개역)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히 3:3, 개역)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히 3:4, 개역)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 3:5, 개역)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히 3:6, 개역)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히 3:7, 개역)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히 3:8, 개역)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히 3:9, 개역)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히 3: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히 3:11, 개역)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히 3:12,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히 3:13, 개역)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 3:14, 개역)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 3:15, 개역)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히 3:16, 개역)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히 3:17, 개역)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히 3:18, 개역)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히 3:19, 개역)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4:1, 개역)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 4:2, 개역)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히 4:3, 개역)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히 4:4, 개역)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히 4:5, 개역)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히 4:6, 개역)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히 4:7, 개역)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히 4:8, 개역)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히 4:9, 개역)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히 4:10, 개역)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 4:11,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3, 개역)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4, 개역)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5, 개역)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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