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공평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 들려줄 새노래는 없노라 (시편 96)

 

열방(이방나라)과 새노래(요나의 표적)


(
96:1, 개역)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96:2, 개역)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96:3, 개역)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96:4, 개역)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96:5, 개역)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96:6, 개역)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음이 그 성소에 있도다

(96:7, 개역)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96:8, 개역)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96:9, 개역)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96:10, 개역)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찌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


(롬 15:11, 개역)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롬 15:11, 새번역) 『또 ㉤"모든 이방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백성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였습니다. / ㉤시 117:1』


(마 11:25,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 ㉠또는 '찬양합니다'』


(마 21:15, 새번역)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일과, 또 성전 뜰에서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 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화가 나서 / ㉧'구하여 주십시오!'를 뜻하는 히브리어였으나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 21:16, 새번역)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이들이 무어라 하는지 듣고 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다' 하신 말씀을,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 ㉨시 8:2(칠십인역)』


(눅 10:21,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영' ㉢또는 '찬양합니다'』


(롬 14:11,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 ㉥사 49:18; 45:23(칠십인역)』


(롬 15:9, 개역)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15:9, 새번역)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삼하 22:50; 시 18:49』


(딤전 6:15, 새번역) 『정한 때가 오면,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계 15:4, 새번역) 『㉡주님, 누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 앞으로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정의로운 행동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 ㉡렘 10:7』

(계 19:5, 새번역) 『그 때에 그 보좌로부터 음성이 울려왔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아, 작은 자들과 큰 자들아,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계 5:13, 새번역)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시편 96편을 처음 보자마자 가장 평범하고 특이사항이 보이지 않으니까
내용을 파악하기가 오히려 어려워 집니다
.
그저 시편의 다른 내용 편들의 반복처럼 보이더라 말이죠.


그런데 마침 어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질문을 하시기 전에 푸하하하 라고 먼저 한참을 웃으십니다.

그러면 제가 왜 왜 왜 또 무엇을 봤나요

 

아니 요나가 하나님한테 대드는데 있어서

아니 시킨대로 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느냐 라고 따진다는 겁니다.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시위를 한다 말이죠

 

그게 왜 웃끼는데요?

 

우리 꼬라지가 늘 이렇다고 하시더라 말이죠.

그래놓고 언제그랬냐 듯이 또 뭘 자꾸 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니

참으로 자기자신이 뻔뻔스럽다고 막 웃으시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 이야기가 오늘 가장 평범하게 특이점이 없어 보이는 시편 96편 내용을 보는데 있어서

막막함을 깨뜨려주는 힌트가 되었습니다.

특이점이 보이더라 말이죠.

 

안보이면 기존의 다른 사람의 설교랑 별 다를바 없을 것 아니냐 말이죠.

사람을 구원해 줄려고 아등바등 발을 동동 구르는 그 안쓰러움 마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내었다는 티를 팍팍 낼 것 아니냐 말이죠.

그래야 사람들에게 인정 받을 것 아니겠습니까?

나 목사 맞잖아 라고 말이죠.

 

그러나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우연히 소 뒷걸음하다가 우연하게 발견한 특이점으로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주장은 거리끼게 하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서로가 달려들어서 굴러들어온 돌을 뽑아버리겠다고 다들 달려들 것 아니냐 말이죠.

시샘 가득한 완악한 마음 때문에 말이죠.

사랑이란 바로 이런 시기심을 들추어내지 않고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시기 보다 더 시기(질투)적인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8:6, 새번역)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 또는 '주님의 불길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던 참람죄냐 너희는 신이다 이냐 라는 내용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언어로 표현하는 내용이 

기분나쁜 말이든 아니면 기분 좋은 내용이든 상관없이

우리의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표현하신다는 겁니다.

 

거기에 우리의 반응은 내 구원받냐 못받냐라는 탐욕을 훨씬 뛰어넘어서서

일단 날 구원해 주실려는 의향이 없이 발언하시는데다가 엎친데덮친격으로

오히려 나의 악마성을 일부러 새롭게 만들어가시면서까지

부추기는 식으로 표현한다는 자체에서

이미 벌써 기분 나빠서

부딪히는 돌에 부딪히게 한다는 겁니다.

 

버린돌이 머릿돌이 되는 방식인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즉 머릿돌이 되셨다 또는 머릿돌이 등장했다 라는 자체가

누구에게는 꽝하고 부딪혀서 가루가 되었다는 겁니다. 


헉.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벧전 2:7, 개역)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개역)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4, 개역)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벧전 2:5, 개역)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 2:6, 개역)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벧전 2:7, 개역)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벧전 2:8, 개역)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9, 개역)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10, 개역)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공평이다는 겁니다.

특이하죠.
꽝 하고 부딪혔다 라는 것이 공평이다는 겁니다.

 

보통 기존의 목사들이 말하는 공평이란 불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은 사랑(십자가의 피용서)이 없는 이유인 겁니다.
십자가의 사랑 말입니다.


공평은 불공평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사랑은 없습니다
.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공평은 거짓이다는 겁니다.

평강이다 평강이다 하나 평강이 없는 겁니다.
거짓선지자의 주장과 동일하다는 겁니다.
모든 종교가 평화를 외치지 않으면 생존을 못합니다. 그런 종교는 사라지는 겁니다.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이다는 겁니다.
그 어떤 종교도 모조리 다 거짓인 이유입니다.

(렘 6:14, 개역)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렘 8:11, 개역)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겔 13:10, 개역)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결국 종교적인 용어는 항상 긍정적이며 인간을 위한 말을 합니다.
그래야 자기가 먹고 살수 있다 말이죠.
자기라는 존재가 의미가 있게 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주님의 공평하심은 곧 선하심은 우리에게는 불의함으로 불공평함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것이 인간이 주장하는 공평보다 더 나은 공평이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악한농부비유에서 주인이 품꾼들의 삯을 계산할때 잘 나타났습니다.

(마 20:1, 개역)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마 20:2, 개역)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마 20:7, 개역)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마 20:8, 개역)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마 20:9, 개역)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마 20:10, 개역)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마 20:11, 개역)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마 20:12, 개역)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 20:13, 개역)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 20:14, 개역)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 20:15, 개역)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6,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의도적으로 나중된 자를 먼저 되게 하고 먼저 된 자를 나중되게 하시는 선하심이다는 겁니다.
이 결과가 먼저 덮쳐져서 원인 없이 선하심을 나타내니까
정작 마귀들은 원인을 따지고자 주님을 악하다고 하는 겁니다. 결과를 거부하는 겁니다.
무조건적인 무시험 합격, 불법적인 편파합격을 말입니다.

그것이 먼저된자에게는 반드시 불공평하게 작용이 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 주님의 불공평이 공평 보다 더 더 더 더 나은 공평이 되는 겁니다.

놀고있는 자인 나중된 자를 먼저 되게 하셨으니 말입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의 빛 되신 예수님이 비추어졌데요 글쎄 ! ~~~~~~)


왜냐하면 십자가의 용서라는 불공평함 보다 더 공평한 것이 세상에 어디있냐 말이죠.

그래서 삐닥한 소리요 부정적인 언어로써 증거되는 겁니다. 

더더욱 모순적이게 편파편애요 편파적인 용서인 그 불공평함이 바로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참선지자는 삐딱하고 부정적인 말만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꼬시냐고 말이죠.

 

에이 그런게 어디있냐?

아마 불공평하면 아마 주님 혼자 스스로 독박 쓰게 될걸?

무지 손해가 이만 저만 한게 아닐걸?
우리 같으면 절대로 그런 어리석인 짓을 하지 않을꺼야 ~~~

 

그런데 주님의 공의와 정의가 축소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증폭이 됩니다.

너무 너무 풍성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님의 편파 용서가 말이죠. 불법적인 용서가 말입니다.

주님의 공평함(머릿돌 되심)은 주님의 불공평함(버린돌 되심) 때문에

오히려 더 증폭이 된다 말이죠

무시험 합격이니 이것 보다 대박이 어디있겠습니까? 

한 쪽 강도 보세요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잖아요 

이 얼마나 불법적인 무시험합격입니까?.

오히려 우리 인간의 공평함과 정의는 정작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버린돌 취급했고
아무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싫어버린바 된 얼굴이였다 말이죠.

 

여기에 누가 그 간극에 끼여들어야 하는가 하면 바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듯이 선지자가 낑기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선지자는 그 틈에서 나오는 자이지
존재에서 나오는게 아닙니다.

빈터인 빈공간인 십자가에서 도출되지

이스라엘이라는 존재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말이죠.
이스라엘 자체가 그 빈공간인 십자가에서 나왔거든요.

이스라엘 자체가 존재않는 비존재인데 말입니다.
비존재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어디에서든지 있다 말이죠.

다른 말로 너희는 신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꾸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이스라엘이다 라고 자꾸 우기기 때문에 참람죄로 몰아버리는 겁니다. 

그런 이스라엘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이지

개같은 이방인의 선지자는 되기 싫다 라는 겁니다.

자꾸 자기의 존재를 우기는 겁니다. 비존재성을 무시하고 말이죠.


공평한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되고 싶지

불의한, 불공평한 개같은 니느웨 의 선지자가 되기 싫다는 겁니다.

저런 먼저 된자 나중되고 나중된자 먼저 되게하는 선지자는 되기 싫다는 겁니다.

아마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래서 삯꾼들인 이유인 겁니다.


즉 건강한자 의인이 되고 싶지

환자 죄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시킨대로 니느웨 빨리 후딱 망해버리라고 3일 길을 하루만에 후딱 돌아 버립니다.

이럴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돌이켜 회개시킬 선지자 기능이어야지 왜 이단 개같은 이방인에게 귀한 진주를 던지냐 말이죠.

 

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이지 개같은 이방인의 선지자가 아닙니다. 아니라니깐요!!

 

그런데 웃끼는 것은 요나를 선지자로 삼은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그 여호와 하나님께 부당하다고

왜 이런 일을 시키냐고

난 이스라엘 선지자 이다고 시위를 벌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이 없다니깐요. 요나가 생각한 그런 이스라엘은 인간이 조작한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아무리 봐도 부정해 보이는 저 니느웨가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누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하느냐 돌들로 아브라함 자손 만들겠다 하시는 겁니다.

 

엘리야도 똑같았습니다.

나는 더러운 죄인과 상종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가 되기 싫다는 겁니다.

사마리아 구역을 삥 둘러 가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을 행함으로 지키겠다는 심뽀인 완악함이요 강퍅함이다는 겁니다.

거룩은 행함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지

행함이라는 육이 아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거짓선지자 됨의 강퍅함을 완악함을 거쳐서 

주님은 요나를 열방의 선지자로 삼으시는 겁니다.


즉 요나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실상 주님 자신이 열방의 주이시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만 흘리는 피가 아닙니다.

이방인에게도 흘리는 피 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지혜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는 겁니다.

어리석은 십자가가 말입니다.

불의하고 불공평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부정한 십자가가 말입니다.

 

이스라엘 땅이여 주를 찬양하라가 아닙니다.

온 땅이여 주를 찬양하라입니다.

 

(96:1, 개역)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96:2, 개역)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지어다

(96:3, 개역)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96:4, 개역)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96:5, 개역)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이스라엘만 구원의 날을 날마다 선포하는게 아닙니다.

만민이 선포하는 겁니다.


이스라엘만 경험했던 그 출애굽사건을 노래하는게 아닙니다.

이제는 만방이 출애굽사건을 격도록 해서 노래하는 겁니다.

유대인이 자기만의 경험이라고 여겼던 것이 남들도

그것도 원수같은 이방인이 체험케 된다면

이거 용납할수 있을까요?

못합니다 때려죽어도 못한다 말이죠.

그러나 벌써 벌어졌습니다. 이미 완성으로써 말입니다.

이방인 자신들에게 들이닥쳤던 그 천국의 침노 사건을 경험케 되는 겁니다.

이방 모든 나라가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이스라엘의 신만 되지 않겠다는 겁니다.

만방의 모든 신을 꺽는 열방중에, 온 만민중에 선포되는 여호와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재판관 자리가

너희는 신이다는 자리가

오히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는 자리가 되고 만 겁니다.

그런다고 실패했다고 주님이 손해 보십니까?

주님의 일하심이 축소되던가요

오히려 이방으로 더 확대됩니다.

이스라엘도 제대로 못하는 판국에

왜 이방나라까지 더 크게 확대하시는 것일까요?


이렇듯 같은 하늘인데 왜 땅에서는 구분이 있냐 말이죠.

땅도 주님이 지으셨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이방까지 확대하시는 이유는

인간 구원해주고파서 안달이 나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 용서인 긍휼을 오히려 주님이 확대시키시는 겁니다.

거기에 반드시 동원이 되는 것이 마귀이니

죄가 가득한 곳에 은혜가 더하듯

이 은혜를 거침없이 퍼트리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했다고 축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귀만 상대하는 겁니다.

헛된 우상이 세워지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은

요나는

마치 반석을 두 번 치는 모세처럼

얼굴에 광채나는 것을 감추고자 수건을 벗어버리지 않는 완악함을 보이게 됩니다.

그 수건 주님이 직접 벗겨주시지 않으면 요나는 그 상황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엘리야도 내 열심히 특심이다고 나만 남았다고 수건을 벗을려고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7천명을 남겨놓지 않았다면 그는 그 완악함에서 수건을 벗지 못하고
1 대 800명으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싸워 이겼다는 그 기념비 그 수건을 평생 못 벗고 그 육의 자랑에 빠져 못벗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남은자 7천명이 그 수건을 벗기는 겁니다. 숫자 7천이 아니라 바로 남은자 예수님이 엘리야의 수건을 벗겨버린 겁니다.

안그러면 그 지옥에서 그 완악함에서 못 벗어나 지옥갈뻔 했다 말이죠.

휴 ~~~~~~~

허걱 ~~~

아찔 아찔 했다 말이죠.

 

(고후 3:5, 개역)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7, 개역)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개역)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개역)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 3:10, 개역)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 3:11, 개역)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2, 개역)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개역)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왜 벗지 않을까요?

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이지

개같은 이방인의 선지자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우물가의 여인에게 다가가지 않고

유대인처럼

바리새인처럼

사마리아 구역을 삥 둘러서 가는 것과 같이 된다 말이죠.

 

그게 무슨 특이점이겠습니까?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죽은 가지 버린 가지였던 자들이

재판관이 되었을때에

강도만난자를 피해가는 것은 전혀 전혀 특이한 사항이 아니다는 겁니다.

내가 이웃 삼을만 해서 이웃삼아 이웃사랑실천하는 것은 전혀 특이하지 않기에

사건이 되지도 않고 미움털 박히지도 않습니다. 거리끼는 십자가가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오죽 특이했으면 사마리아 여인이 더 놀랩니다.

아니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그런 유대인을 만난적이 없는데

말도 걸어온 유대인이 없는데 

왜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말을 거냐 말이죠.

그런 유대인이 없었는데 ~~~~

 

여기 있다는 겁니다.

요나는 이런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지 않을텐데

이 예수는 그런 요나로 만드는데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는 요나로 만드는 이 예수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얼굴을 돌리는 것이 아닌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게 하는 예수님이 말이죠.

 

거기에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놀란데 더 놀라게 하는 말씀은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오히려 물을 거꾸로 그 분에게 물좀 주세요 라고 할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4:9, 개역)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4:1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지금 물을! 어느 누구 지역에 누가 쥐고 있습니까?

당연히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 동네 여인 쥐고 있습니다.

오죽 하면 가스펠 제목에 우물가의 여인이겠습니까?

 

그래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누가? 예수님이

누구에게? 우물가의 여인에게

 

얼마나 정상적입니까?

그런데 이것을 그림을 찢어버려야 그 찢어진 틈에서 간극이 벌어져

제대로 된 현실이 보입니다.

끝에서 거꾸로 시간이 흐르는 겁니다. 벤자민 시간은 거꾸로 간다 처럼

이 정상적이다 라고 하는 그림을 찢으면

갈라지겠지요. 갈라지면 그 틈에서 나오는 그림이 새롭게 전개 됩니다.

비정상적인 그림이 새롭게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제 물을 달라 라는 그림이 바뀌게 됩니다.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누구인줄 너가 알았다면 너는 그 누구에게 도리어 물을 달라고 할 것이다.

 

물 좀 주세요 라는 그림으로 말이죠.


물 좀 주세요 

누가? 우물가의 여인이

누구에게? 예수님에게

그것도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님에게 물을 달라고 하게 된다 말이죠.

 

언어문법 다 파괴되죠.

언어가 소통이 될려면 언어와 언어가 연결이 되어서 네트워크를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소경이거나 귀머거리거나 벙어리가 주체가 되면

(시 8:2, 개역)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마 21:16, 새번역)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이들이 무어라 하는지 듣고 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다' 하신 말씀을,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 ㉨시 8:2(칠십인역)』

특히 젖먹이가 주체가 되면
모든 언어는 단절이 되어 버립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방언이 되어버리는 거죠.
이 단절로써만 대화하시겠다는 겁니다.
즉 젖먹이를 통해서만 전쟁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찬양대가 바로 이스라엘 144,000의 군대 아닙니까!!

믿음의 전쟁은,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은, 영적전쟁은 바로 젖먹이 전쟁입니다.

젖먹이 보다 강한자는 없거든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십자가 보다, 어리석은 미련한 하나님의 지혜보다 강한 지혜는 없거든요.

그래서 대화를 할려면 언어로 해야지

벙어리를 통역관으로 세워서 대화를 하시겠다는 겁니다.

젖먹이를 옹알 옹알 하는 젖먹이를 통해서만 대화를 하시겠다는 겁니다.
언어를 단절시켜서 대화 한다고 하니 그게 말이 되냐 말이죠.

 

정작 목마른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물가의 여인이다는 겁니다.

뒤짚어 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물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뭔가 뒤바뀐 것 아닙니까?

 

뒤바껴도 한 참 뒤바뀝니다. 더 나아갑니다.

아예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런 인체 구조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오늘 목 축이면 그 다음에 또 목마릅니다.

물 한번 마셨다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도 문법 파괴인데 왜 이거는 문법파괴이다고 따지는 놈이 없죠?

예수님이 믿음이다 라고 하니까 그건 문법파괴야 그렇게 잘 따지는 마귀들이 말이죠. 육 들이 말이죠.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행위를 의지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믿음은 행위가 하는 행위에 반대만을 추구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말입니다.

행위가 믿음을 자꾸 추구할려고 하면 할 수록

정작 믿음은 반대로 안믿는 길로만 가는 겁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해 달라는 저런 뻔뻔스러운 말을 소위 자칭 믿는자들에게서는 나올수 없는 표현입니다.

왜? 너무 뻔뻔스럽거든요. 한마디로 참람죄이거든요. 


그런데 이 여인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선물 받았습니다.

부러워 해도 모자랄 판국에 시샘을 하니까 참람죄라고 몰아붙이는 그 버릇이 또 나오는 겁니다.

 

아무튼 그 여인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마셨습니다.

부러워해야 하는 판국에

과연 목마른지 안마른지 갈증이 그 이후에

그 구원 이후에 조사하겠다는 놈들이 천지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했으니까

과연 구원 이후에 다시는 죄 짓는지 죄 안짓는지 조사하겠다는 정신병자들이 한둘이가 아니다 말이죠.

 

그게 구원 그 후라는 타이틀로 유행하는 짓이다는 겁니다.

행위를 기여이 따지겠다는 겁니다.

무슨 놈의 정신병자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막살면 안된데 글쎄 ~~~~

그러면서 막 살고 있더라 말이죠.

막 살지 않은 인생이 없는데 말이죠.

 

이 간극 곧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간극

 

그거 해결 되면 안되요

그거 해결 되면 또 의문의 죽이는 것이 또 반복 돼

마침이 없어

밑빠진 장독대라

완료가 없으니 맨날 미완료야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래

ㅋㅋㅋㅋㅋ


원인 없는 결과가 감사함이지
원인 있는 결과는 완악함이다는 겁니다. 강퍅하기 짝이 없이 자꾸 시험한다 말이죠.

 

수건을 벗지 않는 완악함 때문이다는 겁니다.

물론 수건 벗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직접 벗겨주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수건이 딴게 아니라 자기를 원인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말이죠.

없는 자아를 자꾸 붙드는 식입니다. 


(고후 3:7, 개역)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개역)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7, 새번역) 『돌판에다 문자로 새긴 율법을 선포할 때에도, 광채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그 광채 때문에, 비록 곧 사라질 것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에도 이러한 영광이 따랐는데,』


(고후 3:13, 새번역)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을 썼지만, 그와 같은 일은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고후 3:14, 새번역)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수건을 쓴 상태에서 공평함과 정의로움은

이미 시편 85편을 인용한 요 10장과 또 요나의 사건을 통해서 다 박살이 났습니다.

 

이 박살난 증거

이 요나의 표적을 가지고서 주님은 공평함과 정의를 말씀하십니다.

수건 쓴 상태에서 즉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지 않은 상태에서의 공평과 정의는

내가 정의롭고 내가 공의를 행해야 할 입장이지만

 

수건을 벗은 상태에서 보니 즉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상태에서의 공평과 정의는

불의한 나를 불공평하게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는 얼굴로써 마주바라봐 주시는 얼굴이다는 겁니다.

 

이게 왜 이럴까요?

내가 정의롭고 내가 공의를 행할때에 나의 얼굴은 정작 새까맣게 타버린 얼굴에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아름다운 풍채도 없고 고운 모양도 없고 싫어버린바 된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는 나랏님도 해결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고아 과부 나그네 출신이지만

이제 재판관이 되어서는 해결 못하기 때문에 고개를 돌려 버리고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낼 수밖에 없다 말이죠.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강도만난자에게서 얼굴을 돌려 버리는 겁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더라 말이죠.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되신 예수님

곧 진짜 이웃은 거룩을 어겨서라도, 불법을 행해서라도, 안식일을 거스르면서까지, 

수건을 벗고 강도만난자에게 얼굴을 마주보면서 긍휼을 베풀더라 말이죠.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겁니다. 막살면 안되거든요.

그런자들끼리 모여서 만든 교회가 강도의 소굴이다는 겁니다.

정작 예수님은 막살아서라도 죄인의 친구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면서까지 죄인에게 자신의 얼굴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시는 겁니다.

강도만난 나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수건을 벗기게 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그 다 타버린 얼굴이 누구때문입니까?

불의한 나 때문이요 불평만 해대는 나 때문 아니냐 말이죠.

이 불의를 자랑하는 겁니다.

이 불공평을 외치는 겁니다.

수건을 벗기셔서 말이죠.

 

수건을 주님이 벗기시지 않으면

우리는 심심하면 예수님을 참람죄로 시도때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겁니다.

이게 괜히 수건을 쓴 유대인입니다. 요나입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수건을 쓰지 않았던 개같은 이방인은

영생수 곧 영원히 목마르지 않음을 얻었습니다.

유대인도 얻지 못한 영생수를 말입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곧 영생 곧 영원히 사는 삶도 얻었습니다.

뭐 한게 있습니까? 뭘 행하기라도 했던가요?

전혀 없습니다.

행하기는커녕 거꾸로 불의한 것 뿐입니다.

남편 데리고 오라고 하니 5 플러스 원

무슨놈의 마트 이벤트 상품도 아니고 말이죠.

그 어떤 머슴아도 채워줄수 없는

도리어 이용해 먹고 도망치는 머슴아들 뿐이다는 겁니다.

책임져주지 않는 남편이 무슨 놈의 남편이겠습니까?

전남편 율법은 책임지는게 아니라

첫아담들처럼 이용해 먹고 도리어 책임을 뒤짚어 씌우는 놈들 뿐이다는 겁니다.

마지막 아담이 새남편이 책임쳐주마 하고 오셨다 말이죠.

 

이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공평이요 공의이다는 겁니다.

그 간극에서 잃어버린 고리에서 나오는 것이 진짜 공의이지

인간들이 주장하는 정의와 공평은 사실상 허구입니다.

우상이다는 겁니다.

 

그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 빨리 깨어져야만 하기에

요나의 이스라엘의 선지자개념이 깨지도록 하시는 겁니다.

너는 열방의 선지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열방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나는 이스라엘을 돌이켜 회개시킬려고

안타까움으로 구원해 줄려고 안달한 거짓선지자가 되는게 아니라

이제는 아예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치고 다니는 겁니다.

회개케 해서 돌이키게 하는게 아니라

빨리 망했뿌라 그게 구원이다 라는 참선지자의 외침에 동참케 되는 겁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전체를 봐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부분만을 봐버려서

완악하게 수건도 벗지 않고

그저 이스라엘만 구원

이스라엘만 구원을 외치는 거짓선지자에서

이제 열방의 주님을 외치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니였다면 그도 거짓선지자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수건 못 벗습니다. 완악함과 강퍅함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사도바울 보세요

절대로 거짓선지자의 자리에서 못 벗어날뻔 했다 말이죠.

구원의 뿔이신 예수님과 꽝 하고 충돌 안했으면

구멍이 뻥뻥 뚫히지 않았다면 그는 수건을 못 벗는 겁니다.

 

광채나는 얼굴로 어떻게 수준 낮은 인간들과 어울리겠습니까?

먹기를 탐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며 포도주는 즐기는 술꾼이 되겠습니까?

절대로 열방의 사도

이방인의 사도가 되지 못했다 말이죠.

 

절대로 너희는 신이다 라는 성령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완악함과 강퍅함으로 수건을 벗지 않고

예수님을 참람죄로 몰아붙이는 짓만 했다 말이죠.

 

자기들끼리만 이웃설정해서 그 이웃에게만 주님을 전하는게 무슨 놈의 사랑이겠습니까?

 

만민에게 즉 도저히 이웃으로 삼을수 없는 개같은 이방원수에게 까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증거하는 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요구하더라 말이죠.

그런 요구에 오히려 요나가 들어줄려고 성질급하게 행동할려고 할때에

주님은 요나를 꺽어버리시는 겁니다.

수건을 벗기시는 섬김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것이 공평입니다.

 

요나의 불공평하다고 따지는 그 공평이다는 겁니다.

이 불공평이 아니였다면 요나는 평생 강퍅함 속에서 못 벗어나서

니느웨 지역을 비켜서 삥 둘러서 가는 바리새인과 다를바 없는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들어주는 거짓선지자일뿐이다는 겁니다.

 

이게 공평입니다.

나를 찢었다가 다시 싸매시는

이것이 공평이다는 겁니다.

안 찢고 안찢었으니까 싸맬필요도 없는

그것이 공평이 아니라

찢어버리시고 다시 싸매시는

그야말로 불공평 그 자체가 진짜 공평이다는 겁니다.

 

왜 독생자를 버리셨냐 말이죠.

그게 사랑 맞냐 말이죠.

그런데 그게 진짜 사랑 맞습니다.

버리셨다가 되찾으시니까 말입니다.

이 간극

이 잃어버린 고리에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 나오는 겁니다.

가장 불의한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는데 있어서 할말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누가 믿었으리요

불의한 나를 건질려고 생판 죄없는 독생자를 버리시더라 말이죠.

원수들에게 넘기더라 말이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이냐 말이죠.

나는 그럴 가치가 없다 말이죠.

독생자 예수와 맞바꿀 정도의 그런 가치가 어디 한 구석이라도 있기는 하냐 말이죠.

이런 불의가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세상천지에 이런 불공평함은 없습니다.

 

이 불의한 십자가가

나의 최고의 자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모순된 간극 좁힐수 있는 사람 나와보세요!

더 놀라운 것은 마귀도 못한다는 겁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했다는 증거가 십자가 아닙니까?

 

자 그렇다면 사랑은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마귀도 못하니까 말이죠.

기껏 내 목숨 취하겠죠.

그런다고 사랑이

이 요나의 표적이 축소되거나 취소 되기나 할까요?

 

자 이렇게 때문에 찬양하지 않고 배길소냐 말이죠

몸이 건지러워 죽습니다.

내가 찬양하는게 아니라 찬양이 나를 노래부르기 때문에

내 속에 바람을 집어 넣는 바람에 나는 으악 이라고 뱉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소리가 바로 시편 96편입니다.

 

찬양이는 나를 나팔로 삼아서 바람을 불어놓고

나는 나팔로써 소리를 뿜어내는데

 

으아악악아악 ~~~~~~~~

 

리얼사운드

 

찬양을 했는데 으아악 과연 누가 찬양을 하는데 으악 하겠습니까?

으 악

아니 누가 신나서 찬양을 하는데 노래 부르는데 으 악하겠습니까?

 

사람마다 찬양소리가 다른데요

요나 선지자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미리 먼저 찬양 불러놓고 그 내용이 뒤에서 나온 사건이

하루만에 니느웨 다 돌아 뺑뺑이 도는 겁니다.

그 노래가 큰물고기 입 속에서 누가 시를 짓느냐 라고 어머니께서 웃으셨던 겁니다.)

 

먼저 요나는 이렇습니다.

 

(2:1, 개역)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2, 개역)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이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3, 개역)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2:4, 개역)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2:5, 개역)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2:6, 개역)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7, 개역)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2:8, 개역)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2:9, 개역)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2:10, 개역)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구원은 여호와께로 라는 겁니다.

나를 버리셨는데 나를 도로 찾으셨다는 겁니다.

 

그럼 베드로 경우는 이렇습니다.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하십니다 라는 찬양가삿말입니다.

 

다윗의 찬양 경우는 이렇습니다. 리얼사운드

 

내가 이스라엘 왕으로서 그 놈을 당장 율법의 4배나 갚도록 하겠다

그 놈이 너여 너라꼬 너랑께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모든 주님의 사람의 찬양이 바로 이 간극인 요나의 표적을 찬양하는 겁니다.

좁히기는 커녕 더 자랑하고 더 기뻐찬양하는 겁니다.

 

오 특이점 또 발견했습니다.

바로 새노래입니다.

즉 이전 노래와의 차이점으로써의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5:19, 개역)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5:20, 개역)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5:21, 개역)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5:22, 개역)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5:23, 개역)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5:24, 개역)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5:25, 개역)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5:26, 개역)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5:27, 개역)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5:28, 개역)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5:29, 개역)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5:30, 개역)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5:31, 개역)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5:32, 개역)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5:33, 개역)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3:16, 개역)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3:17, 개역)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결국 새 노래란 새언약으로써 옛언약과의 차이로써

완악하게 된 강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옛언약과의 백성과의 구별 분리로써

수건을 벗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새언약입니다.

 

피차 복종하라 라는 겁니다.

아니 도찐 개찐인데 피차 거기서 거기인데

오히려 복종하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도찐개찐 거기서 거기 이기 때문에

서로 피차 복종하라 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남편이 아무리 허물이 많아도

아내가 아무리 허물이 많아도

그 허물을 다 덮은 분이 바로 남편의 머리이신 예수님이고

아내의 머리이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서로 피차 잘난 것 하나 없어도

죄인 중의 괴수이여도 각자의 머리 되신 예수님 때문에

허물 많은 남편과 아내를 서로 피차 복종하면서

머리되신 예수님을 나타내어라 라는 겁니다.

 

상대방이 대단한 사람이라서 복종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나 니느웨 안갈래와 같다 말이죠.

사마리아 지역 더러운 개같은 이방인 구역이라고 삥둘러 가는 것과 같다 말이죠.

강도만난 자가 피를 흘려 부정한 자가 되니 부정탄다고 제사장 레위인이 그냥 지나치는 것과 같다 말이죠.

난 이스라엘 선지자이지 나는 니느웨 선지자 안할래 라는 겁니다.

수건을 벗지 않겠다는 겁니다. 완악하겠다는 겁니다.

 

죄인의 친구이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예수님을 비꼬면서 별명지어주는 것과 같다는 거죠. 그 정도의 남의 별명 짖는 재미에 그 위치를 과시하는 겁니다.

 

그러나 백날 살펴본들 도찐개찐 거기서 거기 이기 때문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 피차 서로 복종하는 겁니다.

이것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는 주님께 찬양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몸에 배인 가스펠이 또 생각나네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서 화답해

진정으로 노래해 왕되신 우리주

우리주께 찬양 우리주께 경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해

 

가사를 하나 수정하면 를 하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피차 복종해 ㅋㅋㅋ

 

사마리아인을 피해서 삥 둘러 다니기에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는 겁니다.

더러운 것과는 상종할 수 없다 말이죠.

복종은커녕 돌삐를 들어서 쳐 죽이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말이죠.

 

(8:8, 개역)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8:13, 개역)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9:15, 개역)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2:24, 개역)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언약을 세운다 했지요.

그런데 부딪히는 돌을 시온에 둔다고 했습니다.

 

버린돌과 머릿돌이 같은 돌입니다.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은 같은 돌인 머릿돌입니다.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9:33, 새번역)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8:14; 28:16(칠십인역) 또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 돌을 자랑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과거에 유대인이라는 둥

먼저 된자 라는 둥

과거에 잘 믿었다는 둥

다 소용없습니다.

원가지도 짤리는 판국인데

얼마나 띠엄 띠엄 봤으면 수건을 벗지 않겠습니까?

 

아직 덜 당해봐서 그런 겁니다.

 

거치는 반석과 부딪히는 돌에 우리가 뿌셔져서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이 머릿돌 되신 예수님이 나를 지옥불에서 건지시고자

대신 얼굴이 새카맣게 다 타버린 예수님을

이 요나의 표적을 외치는 것이 바로 진짜 공평이요 진짜 정의입니다.

 

안 그런 표적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공평이다는 겁니다. 정의이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조작한 공평과 정의와 새노래는

이 간극(불의한 십자가, 불공평한 요나의 표적)을 무시하는 가짜 정의!

가짜 공평함이기 때문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 속아 넘어갈 자가 있겠냐 말이죠.

 

정작 당사자 본인이 베드로처럼 세 번부인하게 함으써 찬양케 만드시는 그 모순이

오히려 나 보다 더 옳으셨다를 외치케 함으로써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막살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으로써

이 모순의 간극으로써

세 번 부인해놓고서도

제가 주님을 사랑한줄 주님이 더 잘아시잖습니다.

나 보다 더 공평하시지 않습니까 라는

주님의 불공평한 낮아지심 때문에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사실을

 

찬양하는 겁니다.

 

우리가 고개를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

 

멀리서 탕자가 돌아오는 것을 먼저 발견하고 달려가 먼저 껴안고 먼저 입맞추었다는 사실

 

우리는 입 맞출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고 말입니다.

이 간극(모순된 간극으로써의 사건)을 찬양하는 공평(불공평한 요나의 표적)하심입니다.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15:20, 새번역)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15:21, 개역)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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