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얼굴을 돌리지 마옵소서 (시편 85편)
(요 10:11,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개역)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3, 개역)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6, 개역)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 10:17,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개역)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요 10:19, 개역)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요 10:20, 개역)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요 10:21, 개역)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요 10:22, 개역)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요 10:23, 개역)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요 10:24, 개역)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요 10:2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요 10:26, 개역)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10:27, 개역)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요 10:28, 개역)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9, 개역)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30, 개역)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요 10:31, 개역)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요 10:3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요 10:33, 개역)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 10:3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 10:35, 개역)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 10:36, 개역)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요 10:37, 개역)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요 10:38, 개역)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요 10:39, 개역)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시 13: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시 22:24, 개역)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 24:6, 개역)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시 27:8, 개역)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시 27:9, 개역)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시 30:7, 개역)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시 31:16, 개역)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 42:11, 개역)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3:5, 개역)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4:15, 개역)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시 44:24, 개역)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69:17, 개역)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88:14, 개역)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시 102:2, 개역)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 105:4, 개역)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시 132:10, 개역)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
(시 143:7, 개역) 『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
주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부어지니까
그것을 비웃는 이방나라들까지 이스라엘을 조롱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라는 신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까지 버린 판국이니
이방나라는 마음껏 이스라엘을 삼켜도 상관 없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삼켰죠 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못 박아 죽였죠 뭐 !!!
어 그런데 삼켜 잡아먹었는데
오히려 잡아먹힌 쪽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나라가 되는 판국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새끼를 까고 뱀의 뱃속에서 뱀을 잡아먹고 나온 이스라엘이
이 시편 85편을 노래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의 진노에서 돌이켜 달라고 할 정도로 참혹한 현실이였는데
갑자기 뒷부분에서는 신나게 노래 부르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이 처음부분과 뒷부분의 간극을 매울 길이 없을 정도로
그 빈공간인 모순의 간극을 그대로 둔채로
앞과 뒤가 모순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라는 식이 되어버리는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이유 없는 결과이다 말이죠.
이유 없이 합격
무시험 합격
도대체 어떻게 긍휼과 진리가 만나게 되었으며
도대체 어떻게 공의와 화평이 입맞추게 되었는가?
백날 그 이유와 원인을 백날 찾아봐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가
아무리 그 원인과 이유를 따져봐도 알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원인 없는 결과로써 용서하신 것이고
그냥 이유없이 무조건 사랑하신바 된 긍휼이다는 겁니다.
만약 이유가 있는 긍휼과 진리의 만남이라면
사실상 그것은 만남이 아니다는 거죠.
이유가 없어야 긍휼과 진리의 만남이 만남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즉 진리가 상대방에게 진리 자신의 불쌍히여기심을 덮어씌워서 만나는 만남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나게 된 자가 바로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고 했던
예수님 본인의 입으로 넌 아냐 라고 했던 그 개같은 이방여자가 바로 넌 내가 찾던 자야 라고
너가 진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인
진리 되신 예수님이 그렇게 찾고 찾고 찾았던 잃어버린 양이였다는 겁니다.
고로 상대적인 이스라엘의 99마리 양은 필요가 없게 된 겁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공의와 화평이 입맞춤을 하겠습니까?
그 어떤 인간도 의로운자가 없는데 말이죠.
의인은 없나도 하나도 없다 말이죠.
(롬 3:9, 개역)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롬 3:10, 개역)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개역)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개역)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3, 개역)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개역)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5, 개역)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 3:16, 개역)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개역)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 3:18, 개역)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19,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개역)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1, 개역)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개역)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개역)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개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5, 개역)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개역)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27, 개역)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8, 개역)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위의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는 것과 같습니다.
화평되신 예수님이 공의를 뒤로 몰래 뒤짚워 씌워서
졸지에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는 가운데
공의를 입은 자가 졸지에 생기는 겁니다.
혈통도 아닌 육정으로도 아닌 사람의 뜻으로도 아닌
하나님께로 난 자 말입니다.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빌 3:9, 개역)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런 반칙이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요.
그러나 이 반칙이 아니였다면 어찌되었을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무도 천국 못 가는거죠 뭐 !!
그러니 너무 너무 기뻐서 발에 입맞추고 난리도 아닙니다 아녀
바로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럼 상대적인 자는 누굽니까?
아이고 저 아까운 비싼 향유
그냥 땅에 다 쏟아서 다 허비해 버리고 말았네
저 돈으로 차라리 가난한 자에게 줬으면 됬을걸
우와 저 여자가 왜 이렇게 밉지 라고 했던
제자들이였습니다.
바로 롬 3장에서는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 이에 해당 된다 말이죠.
그래서 율법 외에 한 의를 주셨다는
율법의 방식이 아닌
율법 외에 한 의를 따르는 방식이 바로 이 향유를 부은 싸가지 없는 마리아였고
반대로 율법을 따르는 방식이 바로 제자들과 유대인들이였다는 겁니다.
자
누가 이 화평과 입맞춤을 할까요?
화평 곧 평화는 막힌 담을 헐어야 입맞추게 됩니다.
율법을 헐어버리지 않는 자는 도저히 입 맞출수가 없어요.
(엡 2:8, 개역)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개역)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10, 개역)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1, 개역)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엡 2:12, 개역)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 2:13, 개역)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도리어 율법을 따르는 자는
말씀을 지키는 자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이웃과 담을 쌓는 자요.
율법을 통해서 막힌 담을 더욱더 더 많이 만드는 자요
말씀을 어기는 자이다는 겁니다.
이런 역설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겁니다.
어머니께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마침 예수님이 너희는 신이라 하지 않았더냐 라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하나 속에 집어 넣었습니다.
어떠한 막힌 담이 없어요 없어
그런데 자기들 스스로가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막힌 담을 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고 하고
거리두기를 해서
타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 되지도 않는
그 모호하고 흐릿하고 의문의 관계 앞에서
시기가 날 정도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라는 이 친밀감에
그만 팩 돌아버려서 예수님을 참람죄로 몰아 붙이더라 말이죠.
십자가에 처형하는 세가지 죄목 중에서 하나였다는 겁니다.
얼마나 법 적입니까?
과연 이게 법일까요?
사실상 법은 깡패들의 불법이 법이 된 겁니다.
자신들의 죄악을 가리기 위한 합리성을 그 핑계거리로 가리운 것이 법이다는 거죠.
율법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도 없는 마귀들이
사랑을 다 죽여버리고서는
율법을 가지고 담을 쌓는 겁니다.
마치 가인이 자신의 죄악과 죄책감과 어두움을 가리우기 위해서
에녹성이라는 막힌 담을 더욱더 곤고히 세우는 것처럼
주변에 사랑은 빼고 영웅들로만 다 채우는 겁니다.
자기자신의 보디가드로 영웅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런 바벨탑이 그만 오늘날 기독교가 되고 말았어요.
아니 사실상 유대교가 그랬다 말이죠.
주의 진노에서 돌이키소서 라고 했잖아요.
이 말은 주의 얼굴을 돌이키지 마옵소서 라고 했다 말이죠.
얼굴은 심판이자 곧 전체입니다. 부분 부분이 아니라
전체 이다 말이죠.
그 얼굴을 돌리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애원하고 시편 85편을 달달 외우고 했어도
정작 예수님이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시니까
다들 얼굴을 돌리는 겁니다.
아니 얼굴을 돌리지 말아달라고 해 놓고서는
막상 예수님이 자신의 얼굴을 나타내시니까 즉 주의 오른손을 나타내시니까
도리어 이쪽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 싫다고 얼굴을 돌려 버리는 겁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입니까?
얼굴 돌리지 말라고 해 놓고서는
자기들이 얼굴 돌리는 겁니다.
얼굴 좀 자주 봅시다 라고 인사해놓고서는
정작 얼굴을 돌리면서 벌벌벌 떨더라 말이죠.
인사말이 갑자기 다들 똑같은 인사말을 해요 글쎄
그런데 그래놓고 얼굴을 돌려버리는 모습 또한 다들 똑같애
왜냐하면 얼굴 보기 싫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태양빛에 그을려서 새까맣게 타버리니까
아름다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만한 풍채도 없고
한마디로 말해서 저주 받은 얼굴이라서
다들 얼굴을 돌려 버리는 겁니다.
워낙 흉찍한 얼굴이라서 말이죠.
이것이 우리의 시선이 어린아이와 같은 부분 부분을 보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장성한 어른이 되면
전체를 보게 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됩니다.
얼굴에는 심판 곧 진노가 보입니다.
왜 그 얼굴이 심판받았고 진노를 받았으며
싫어버린바 된 새까맣게 타 버린 얼굴이 되었냐 말이죠.
그것은 지옥의 불 속에서 타고 있는 나를 건지실려다가 대신 타버린 얼굴이다는 겁니다.
장성한 자라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면
바로 이 얼굴을 자랑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얼굴을 돌려버리고
싫어버린바 되었다고 마주대하지 않겠다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부분을 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얼굴 곧 심판
얼굴 곧 전체를 본다는 것은
바로 오늘 시편 85편처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찬양처럼
왜 긍휼과 진리가 만나게 되었고
왜 공의와 화평이 입맞추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부르는 찬양입니다.
포로 되기 전에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전체를 볼 줄 모르기 때문에
이 찬양을 부를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체를 보게 되니
왜 마귀 곧 이방인의 나라를 끌어당기면서 까지
주의 주 되심을 나타내시는지
주의 얼굴인 심판을 이 땅에 왜 부으시는지를 알게하시니
이제 장성한 자가 되어서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가 되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보이는데 감히 누가 꾀냐고
이 심판을 증거하는 겁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사랑이 제일인 이유는
바로 아버지의 매라는 사랑이
전체 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볼때에
마귀가 왜 사랑에 반박하면서 말려드는 이유를
어린아이일 적에는 몰랐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하면 안되었고
에봇이라는 제사장 옷을 더럽히면 안되었는데
정작 기드온 사건에서
또는 스가랴 서에서의 대제사장 여호수아 사건에서
오히려 사랑 보다
이유 없는 사랑보다
무조건적인 원인 없는 사랑 보다
눈에 보이는 에봇을 가지고서 원인을 따지고 이유를 따져서
이 이유없는 사랑을 공격하게 되는
올무에 걸려들게 되더라 말이죠.
졸지에 에봇이 우상숭배가 되고 말았다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사랑은 마귀까지 끌어당겨서
그 숨은 마귀만을 상대로 하는 겁니다.
인간은 이 무조건적인 사랑의 일하심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선물을 받는 반칙을 누리느냐
아니면 이유와 원인을 따지는 마귀와 동조하여서 법을 따지느냐
이렇게 나누어지는 겁니다.
즉 이유 없는 사랑의 용서를 누리느냐? 아니면 이유 없는 미움인, 원인 따지기냐 로 말이죠.
(시 85:12, 개역)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
(시 85:13, 개역) 『의가 주의 앞에 앞서 행하며 주의 종적으로 길을 삼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곧 성령입니다.
구약에서는 그냥 땅이 아닌 약속의 땅입니다.
일을 해서 그 일한 만큼의 댓가로 오는 땅의 열매가 아니라
아무것도 심은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열매가 구약의 약속의 땅입니다.
바로 긍휼 곧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진리와의 만남이고
공의와 화평의 입맞춤 곧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남으로써 화평케 하심이다는 겁니다.
곧 신약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봄이다는 겁니다.
너희는 신이다 라는 나와 너 라는 담이 없는 하나 됨
그 친밀감의 하나된 관계
곧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하나됨이라는
막힌 담을 허물어진 그 관계를
도리어 저들은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었기에
참람죄로 몰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전체 얼굴은 바로 이런 인간의 가면을 제대로 벗겨주고
사랑은 그 벗겨진 얼굴을 대신 질고를 짐으로써 고쳐주시는
죽이셨다가 살리시는 이 말도 안되는 간극에
마귀가 이 사랑을
이 친밀성의 용서를 시기하여 말려드는
이 모든 전체를 보여주시는 얼굴이다는 겁니다.
이제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하여 보는 겁니다.
허물도 감출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 생얼로써
있는 모습 그대로
허물 많은 그 모습 그대로
이 십자가의 용서를 찬양케 하시는 겁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으며
아무것도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십자가의 용서로 기뻐하라
그 어떤 누구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 없기에
이 피 흘리신 예수님만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시잖습니까 라고
뻔뻔스럽게 외치며 노래하는 겁니다.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인자하심이 후하신 예수님의 선하심 (시편 86편) (1) | 2016.07.24 |
---|---|
보좌와 땅의 요동 (시편 99편) (0) | 2016.07.22 |
야 야 야! 십자가(새노래)가 어때서 ~~~ (시편 98편) (0) | 2016.07.16 |
이유 없는 무화과 나무 저주 (시편 84편) (0) | 2016.07.11 |
악을 사랑하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원수 속에서의 찬양 (시편 97편) (0) | 2016.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