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좌와 땅의 요동 (시편 99편)
(마 10:28, 개역)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시 99:1, 개역)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시 99: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광대하시고 모든 민족 위에 높으시도다』
(시 99:3, 개역)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4, 개역) 『왕의 능력은 공의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께서 공평을 견고히 세우시고 야곱 중에서 공과 의를 행하시나이다』
(시 99:5, 개역)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6, 개역) 『그 제사장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요 그 이름을 부르는 자 중에는 사무엘이라 저희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시 99:7, 개역)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에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니 저희가 그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
(시 99:8, 개역)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저희에게 응답하셨고 저희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저희를 사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9:9, 개역)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땅이 흔들리고 요동한다는 말은 곧 주께서 보좌에 앉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말이 그렇지 우리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땅이 흔들리는 그 판 위에서 우리는 정신없게 그 흔들림을 당하는 입장이다 보니
당장은 주님께서 보좌에 앉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주께서 광풍을 일으키시니까
제자들은 아무리 풍부한 어부생활로인한 경험이 있어도
아 이 광풍은 우리가 죽게된 거나 마찬가지이구나 할 정도로 위협적이라서
아무리 예수님이 보좌에 앉았다고 해도
우리는 잠들고 계신 주님을 당장이라도 깨워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또 잔소리 듣게 되죠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말이죠.
아무리 광풍이 일어나도 우리도 함께 예수님 옆에서 잠자면 된다고 하겠지만
믿음의 영이신 성령을 선물로 받지 못한 이상
육의 한계에 부딧힐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런 지적을 받게 되는 육의 한계를 부딧히지 않고서
성령을 선물로 받아 버려서
광풍을 꾸짖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서 큰 파도를 잠잠케 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 사건에서는 또 역시나 잔소리 라는 지적을 받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이상은 어차피 지적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지
믿음으로 광풍을 꾸짖어 잠잠케 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오 너는 믿음 있는 자 구나 라는 칭찬을 듣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으로 사기를 치는 놈들이 한 둘이가 아니다는 겁니다.
자꾸 칭찬 듣는 자가 되라는 식으로 설교하는 놈들이 워낙 많다보니
거기에 다 속아 넘어가서 간 쓸개 다 빼주고서는 후회 하더라 말이죠.
어떤 놈은 자꾸 속지 말라고 그렇게 눈치를 줘도
오히려 그 놈이 한 수 가르쳐주겠다고
그래야 칭찬 받는 놈이 된다고 하다가
결국 속아 넘어가 귀신들린 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안 그런 놈이 없을 정도로 속아 넘어간다 말이죠.
결국 그 다음 사건에서는 칭찬은커녕 정죄를 당하게 되니
당신 시킨대로 했는데 왜 날 속이냐 라고
때린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서 평생 살인의지를 불태워 버리는 겁니다.
항상 그 다음 사건에서는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물리쳤나이다.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썩 물러가라
하늘에서 귀신이 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 라고
또 책망을 듣게 되는 이것이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는 겁니다.
내가 귀신을 물리치는 자로써의 관계가 아니라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늘 흔들리고 또 흔들리고 또또 흔들려야 합니다.
사건의 연속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면 누가 이 빈보좌에 앉는 줄 모르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으면 자꾸 왜 주의 보좌가 비어 있지 라는 쓸데 없는 생각이
바로 마귀가 늘 호시탐탐 그 자리를 탐하고 있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아무도 비어 있다고 의식 자체를 하지 않고 다들 자기 할 일 하기 바쁜데
지 혼자 할 짓이 없으니 늘 비워 있는 보좌를 의식케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발등상이 등장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의 발등상에 놓여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 성전도 사실상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본인이 성전이신데요 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교회 곧 성전은 일종의 미끼입니다.
모든 곳이 주의 발등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이라는 특정 공간을 마련하라는 것은
주의 오른팔이라는 긍휼과 상대적인 심판의 대상인 미움받는 악마가 이 한자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곧 주의 발등상은 일종의 재판마당터입니다.
재판장이라는 심판의 터에서는
판사 라는 인물이 있어야 하고
또 재판에서 피고를 변호하는 변호사가 있어야 하고
그 피고를 잡아서 죄를 추궁하는 검사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죄인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즉 여기서 일단 의인은 없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귀나 하나님이나 동일하게 공통된 의견으로써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발등상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원인 없는 결과는
판사가 지혜로왔다 라는 겁니다.
멍청하지 않고 지혜롭게 하니까 지혜로왔다가 아니라
판사 자체가 지혜 이다는 겁니다.
지혜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증폭 시키고자 동원이 되는 것이 바로
변호사요 검사요 피고 죄인이다는 겁니다.
의인은 없기 때문에 죄인을 원수된 마귀가 잡아오는 겁니다.
지혜 그 자체이신 주님을 돕는다는 취지로 말이죠.
그런데 지혜는 누구의 도움 자체가 필요없는 지혜 그 자체이다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지혜에 의해 말려들어서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이 누구인가를 찾아내는데 있어서
정작 마귀는 이 발등상 위에 원수를 잡아 왔다고 죄인을 잡아 오는 입장이고
변호사이신 예수님은 우편에서 그 죄인에게 십자가의 용서라는 원인 없는 결과인 피긍휼을 보여주고
여기에 반발하는 마귀는 시킨대로 원수 잡아 왔는데 왜 용서하느냐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죄인이 잡혀와 줘야
마귀에게 죄인이 잡혀줘야 마귀는 자신의 원수됨을 이 죄인에게 뒤짚어 씌우는데
정작 그 죄인을 용서해 버리니까
마귀가 자신의 가면으로 삼고자 했던 그 가면이 도리어 미끼를 덮썩 물어버린 결과가 된 겁니다.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맏아들은 오히려 살인의지를 불태우게 되는 식이다는 겁니다.
하만 지도 몰랐겄지잉
죽으면 죽으리라가 나올줄을
십자가의 표적이 나올줄을
탕자에게 금가락지 살진소 새신발이 나올줄을 몰랐것지잉
그러니 이것은
변호사 예수님의 변호실력도 아니요
(오히려 마귀에게 죽임 당하는, 독생자를 원수에게 내어주신바 된 겁니다.)
검사 마귀의 초정밀 밀까부듯이 조사하는 범인잡는 실력도 아니요
죄인이 용서 받는 구원도 목적이 아니라
판사 자신의 지혜를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보충물들이
이 한 자리 곧 발등상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 지혜이다는 겁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원수에게 내어주사
화목제로 삼으신 것 말입니다.
예수님이 졸지에 제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또한 제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야
즉 우편에 앉아 계셔야
그 오른손으로 우리는 건지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죄용서 하셨다 말이죠.
이것이 지혜라는 인물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즉 변호를 기똥차게 잘해서 구원시키는게 아니라
변호할 생각은 안하고 대신 벌을 받아 버림으로써
단번에 재판이 끝나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곧 심판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얼굴이다는 겁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봄으로써 게임 오바가 된 겁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변호를 하게 되면
부분으로 하나 하나 한명 한명 일일이 예수님의 변호 실력에 의해
우리의 구원이 좌우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이 일괄처리하는 것이 바로
대신 벌 받으마
죄 값 치르마 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재판장 되신 아버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나 예수의 하나 됨이다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함이지
예수님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함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다 라는 말에서
풍기는 뉘앙스에서 어긋나는게 아니라
마귀 들으랍시고 하시는 이야기인 겁니다.
즉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러나 아버지와 마귀는 하나가 아니다
또 예수님과 마귀는 하나가 아니다 라는 뜻이다는 거죠.
그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심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 라는 겁니다.
옳소이다 옳았습니다.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이것은 아버지 영광을 위함이지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지혜이지
인간의 실력으로 인한게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게 아니다는 겁니다.
보좌와 그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도구들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 재판에서
그 시골 촌 구석에서 그냥 흔하디 흔하게 일어나는 일들이
파 묻혀 버려도 아무 상관 없는 그 변두리의 사건이
즉 연자맷돌을 달아서 바다에 빠뜨려 죽여도
쥐도 새도 모르게 티가 하나도 안나는 그 넓고 넓은 바다와 같은 악의 세계에서
연자맷돌에 달려 죽어도 상관 없는 그 소자를
왕의 자리에 까지
주의 발등상에 까지
저 촌구석 지방에서 수도 서울로 승화시켜서
왕의 지혜를 펼치는 가장 중앙 중의 중앙의 자리에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주의 주 되심인
주라는 기능
원수와 싸워 이겼다는 그 기능인 주 기능을 펼치심이다는 겁니다.
소자의 세계를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시는 세계인 십자가의 용서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이 시편 99편이 대관식에 씌였다고 하는데
대관식은 원수를 이긴 자에게만 왕으로 임명하는
주 라고 주로 임명하는 예식이다 말이죠.
왕 취임식
주 취임식
그러니 주의 보좌에 누가 앉냐 말이죠.
원수를 이기는 자 아닙니까
그러니 땅이 요동하는 겁니다.
나타나면 모두 모두 벌벌벌 떠네
이게 왜 기쁘냐 말이죠 땅이 요동하는데
우리들을 위해서만 힘을 쓰는 착한 이 라는 어릴적 만화 주제곡이 있습니다만
인간구원을 위함이 아닌
주의 십자가의 용서를 위해서 힘쓰기 때문에 덜덜덜 떠는 땅이 요동하는
왕이 보좌에 앉는 취임식이다는 겁니다. 대관식
제일 정 중앙의 왕의 자리에 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이 왕의 지혜를 말하기 위해서 보충물로써 동원이 되는 이유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난 이후에는
자신들이 그렇게 풍랑을 당하든 뭐를 당하든 그렇게 식겁을 했던 사건들을
이제는 본인들이 막 즐기게 되는 입장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마치 무화과 나무를 이유 없이 저주를 해서 말라 죽게 해 버렸듯이
이제는 아나리아 삽비라 부부를 바로 즉사 시켜버리더라 말이죠.
성령을 속였다고 말이죠.
좀 잘못 된 것을 타일러서 왜 잘못되었는지 차근 차근 알려주면 알될까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알려주는 겁니다. 즉사 시키는 것이 말이죠.
에이 그건 알려주는게 아니잖아요.
아뇨 그게 알려주는 겁니다.
아니 베드로 자기는 그런 실수를 오히려 수천번도 더 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잔소리 들어놓고서는
이 부부는 단 한 번의 실수에 그만 즉사 당해 버리니
얼마나 이것이 부조리하냐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행하고 지키는 일인 육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믿음의 일이라는 사실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켜서가 아니라
누리는 입장에서 이기 때문에
지키는 식으로 아나리아 삽비라 즉사사건을 흉내내는
지키는 식의 사기치는 목사들 말을 들으면 안됩니다.
이걸로 햡박 공갈쳐서 돈 삥 뜯는 목사들이 한 둘이가 아닙니다.
너거들은 좋은 집에 살면서
교회 꼬라지는 이래서야 되냐 라고 건축헌금을 강요하는 놈들 말입니다.
정작 베드로에게 아무리 따져본들 전혀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정 따지고 싶으면 성령에게 따지라고 베드로가 말한다 말이죠.
아니 그 전에 또 베드로부터 즉사 당할까봐 다들 겁나서 못 물어본다 말이죠.
그러니 무화과 나무 저주의 즉사가 괜히 하나 마나 한 일로 벌어진게 아니다는 겁니다.
또 여기서 주의할 점이 이것을 또 삯꾼목자들이 무지 부흥회때
헌금 내라고 강조할 때 써먹는다 말이죠.
그때 작정 헌금 자꾸 강요하잖아요
그럼 천억 내겠다고 작정헌금 하세요
그래놓고 안내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또 성령을 속였다고 아나리아 삽비라 부부 사건으로 공갈협박 할껍니다.
그것에 기 죽을 것 같으면 아예 시도하지 마시고요
아 이것이 사랑이 아닌 속임수다 싶으면
사랑으로써 어딜 감히 성령을 속여서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드냐고 말할 수 있는 사랑이 있다고 여기시면 그렇게 하세요
절대 이길려고 할게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이렇게 큰데 왜 사랑이 아니라 돈에 미쳐있냐고 라고 사랑을 말하고픈 용기가 넘쳐나거든 하세요
안 그러면 평생 꼬투리 잡아서 괴롭힘을 당하게 될테니
믿음있는 척 하지 마시고요
쫏겨날 각오를 하시라 말이죠.
단 한번의 복음이라고 외치고 싶다면
교회 나올 각오를 하고 외치시면 됩니다.
어차피 저런 인간들은 아비가 마귀니까, 들을 생각조차 없도록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왜 제가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 하는고 하니
교회가 내 죄를 대신 해서 십자가를 진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는 어차피 강도의 소굴입니다.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등쳐먹을 뿐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기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 이런 강도의 소굴을 마저도 주님의 지혜를 말하고자 하는 보충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저들이 없으면 지옥이 꽉꽉 채워지지를 않는다 말이죠.
꽉꽊
어디서 많이 듣던 광고 멘트인데
꽉 꽉
주님이 천국도 주님이 직접 꽉꽉 열심히 채우시듯이
지옥도 꽉꽉 채우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보좌
그 빈보좌, 빈공터에서 벌어지는
빈공백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성전은 곧 교회는 빈공터입니다.
십자가는 빈공터입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된다는 둥 그딴거 없습니다.
아무리 들따봐도 아무것도 없다 말이죠
그러니 헛물캐고 뭔가 유익이 있다 싶어서 다가갔다가는
쭐꾸덕 미끄러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아무것도 없어요.
결국 아나리아 삽비라 사건은 빈공터이다는 의미인 겁니다.
전체 판대기로
얼굴 전체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부분 부분으로 보면
빈공터로 보지 않게 되면
자꾸 의문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흉내내는 놈 까지 나오게 됩니다.
성령이라는 그 분이 직접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가지
베드로가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즉사시킨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성령이 직접 이끌어간다는 전체그림으로 보시면 됩니다.
개인 개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나온 사건이 아닌 셈이지요.
결국 아무것도 없는 빈공터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따로 의미를 두고 사적인 공간을 마련함에 있어서
성령은 다시 원점인 빈공터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의미를 두면 둘수록 자기유익이라는 올무에 시험들고 말려든다 말이죠.
주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에 말려들어서 시험 들지 말이지 말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원수에게 내어주신 화목제 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사적인 공간을 마련하냐 말이죠.
아니리아 삽비라 부부는 개인적인 사적인 영역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성령을 개인이 소유할수 있다고 본 거죠.
대상물로 본 겁니다.
그것이 역으로 성령에 의한 소유이기에 다시 빈공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개인적인 구원이라는 둥
성화가 될수 있다는 둥
구원의 조건이 되었다는 둥
그런게 아예 없다니깐요.
주님과 주님의 관계에서 끝나버린 일이지
나 라는 것과 연관되어서 벌어진 것이 없다 말이죠.
그럼 난 뭐냐 말이죠.
아니 그런데 난 뭐냐 난 뭐가 되냐 라고 따지는 그 나 라는 것이 없다니깐요.
나 라는 개인의 영역 따위가
성령 안에는
예수 안에는 없기 때문에
나 는 뭐가 되냐 라고 따지는 나 라는 것이 뭐 있기는 있어야 따지죠.
그러니 성화론, 개인구원 이런게 없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라는 빈공터,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과연 노래할수 있냐 말이죠.
텅텅 비어 있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는데
과연 노래할수 있냐 말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돈이 된다든지
금이 된다든지
은이 된다든지
그런데 없다 말이죠.
사랑은 사랑이지
돈도 안되고 금도 안되고 아무것도 안된다 말이죠.
바로 그 아무것도 안되는 이 사랑을 외칠수 있냐 말이죠.
그것도 목숨 걸고 말이죠.
돈 안되면 모조리 다 죽여버리겠다 쪼뽀 쪼뻐
금 안되면 모조리 다 죽여버리겠다 쭤뻐 쭤뻐
이런 악의 세계에
연자맷돌에 달아서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세계인데
아무것도 안되는
아무 유익이 안되는 사랑을 외칠수 있냐 말이죠.
소자의 긍휼의 세계를 외칠수 있냐 말이죠.
옳소이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 곧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이 어린아이에게만 나타내는
소자의 세계
긍휼의 세계를
돈도 안되는데 과연 외칠수가 있냐 말이죠.
사랑 외치기만 해 봐라 다 죽여버리겠다 라고 외치는 악의 세계에서 말이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너희를 신이라 하지 않았느냐 라고 외치기만 해 봐라 참람죄로 못 박아 죽이겠다 라는 악의 세계에 말이죠.
교회도 악의 세계입니다.
돈 되는 말만 해야 먹혀들고 살수 있어요.
돈 안되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하면 쥐도새도 모르고 죽임을 당하는 곳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이야기 했다간 돈 안되기 때문에 죽임 당한다니깐요.
바로 이것이 원수와 싸워 이기시는 주께서 발등상에 원수를 들추어내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성전이라는 공터에서 말입니다.
이 빈공터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자가 원수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것이 주가
원수를 이기는 주가
오른팔이 벌린 사건, 곧 원수를 이긴 사건이다는 겁니다.
원수가 주의 발 앞에서 발등상에서 즉 온천하에 패배하는 굴욕당함을 만방에 드러난다 말이죠.
자 이렇게 되면 누가 원수의 말을 듣겠냐 말이죠.
너 원수는 주의 발등상에서 너의 죄악에 만방에 드러났다고 오히려 굴욕을 당하게 되는 꼴이된다 말이죠.
에스더에서 하만이 그렇게 죽으면 죽으리라에 걸려들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왜 주가 되시는 겁니까?
마귀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이길 필요가 없습니다.
또 인간의 원수 또한 이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것들은 사적인 영역입니다.
계시의 영역, 말씀의 영역, 묵시의 영역에서는
오로지 마귀만을 상대로 하심으로써 주가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의 주 되심은 오로지 나에게는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다는 겁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 만에 살리셔서 주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외침인데
이 주를 심판 주로 모시는 자에게만
구원의 주로 보이는 겁니다.
그 주의 이름이 심판으로 보이는 자에게만 구원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은
결국 마귀 원수를 예수님만이 이겼고
우리는 그 마귀원수에게 갇힌자였고
그렇게 갇힌 우리가 포로됨에서 자유케 되었다는 것은
심판의 주를 만났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모르면
왜 무화과 나무를 저주했는지를 알길이 없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왜 우리 보고 너희는 신이라 하지 않았느냐 라는 시편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시편을 대상물로만 봤지. 성령을 소유하고 싶어서 아나리아 삽비라 처럼 대상물로만 봤지
본인이 시편의 대상물로, 성령의 대상물로 못 본 겁니다.
그렇게 되면 참람죄로 몰아버리게 되는 겁니다.
나의 주가 되십니다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참람죄로 몰아가게 된다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컷지 말라 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멋대로 인용을 예수님이 하니까
감히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컷는 것을 용서치 못하는 겁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 제 3계명을 어기고 있으니까 말이죠.
하나 어기면 다 어겼으니 참람죄로 몰 수 밖에요.
(출 20:7, 개역)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신 5:11, 개역)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결국 그들은 성경적인 입장에서 참람죄로 몰아붙인 겁니다. 성경박사이니까 말이죠.
절대 성경 바깥의 의미로 예수님을 상대한게 아니다는 겁니다.
우리들 또한 이런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못 벗어나는 짓을 똑같이 매일 하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대표성으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사건은 남한테 적용할 입장이 아닌
성경의 모든 사건은 결국 내가 당하는 입장에서의 사건 뿐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심판의 주로 보여야
나의 구원의 주이시다는 겁니다.
구원의 주이시다는 것은
주님 혼자 원수를 이기신 제대로 주 되심이시니
주님 혼자 구원 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누락 되어도 상관 없고
가장 중요하다는 애지중지 하는 나 라는 자아는 천부당 만부당 누락이 마땅히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심판의 주를 제대로 본 자인 성도인 성령의 사람이다는 겁니다.
너희는 신이다를 지키는게 아니라 누리는 자 이다는 겁니다.
땅이 흔들리고 풍랑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예수님께서 주로써 보좌에 계신다는 뜻이기에
오히려 육체를 죽이는 자를 두려워 할게 아니라
영혼을 죽이시는 자를 더 두려워해야하는
주 이시다는 겁니다.
광풍 보다 더 두려운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거든요.
(마 10:28, 개역)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 10:29, 개역)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10:30, 개역)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마 10:31, 개역)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32,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 개역)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40, 개역)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10:41, 개역)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개역)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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