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는 감사, 원인 없는 즐거움 (시편 100편)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 행복
(시 100:1, 개역) 『[감사의 시]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시 100:2, 개역)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시 100:3, 개역)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 100:4, 개역)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시 100:5, 개역)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로 미치리로다』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이유 없는 감사, 원인 없는 즐거움 이라고 제목을 다니까
왠지 삐딱한 느낌이 든다 말이죠.
분명히 하나 하나 따지면 초과잉적인 긍정적인 의미인데도 불구하고
뭐 하나를 거쳐야 하니까 말입니다.
즉 부정적으로 [뭐뭐 없다] 라고, 자꾸 ~~ 없다 고 하니 말입니다.
뭐 뭐 아니요 를 거쳐서 감사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란 즉 막 살아라 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상대적인 의미이다는 겁니다.
곧 [절대로 막 살면 안된다]는 의미를 거쳐야 하니까 말입니다.
[제대로 살아라 가 아니요] 라는 의미를 거치는 겁니다.
그 상대적인 것은 바로 이유 있는 감사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먹혀들고
보편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에 그것을 상대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죠.
결국 이유 없는 감사는
예외 중의 예외
특별 중의 특별 조치
불가능 중의 불가능이다는 겁니다.
감사란 우리가 흔히 하는 의미의 감사가 아닙니다.
친숙한 의미의 감사를 생각할게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도 친숙한 감사를 낯설게 보자 말이죠.
친숙한 감사는 불편하지 않다 말이죠.
우리는 조건에 맞아야 감사를 하겠다는 심뽀 뿐입니다.
안그러면 이해가 안되고, 설명이 안되니까 말이죠.
졸지에 불편한 감사요. 낯설은 감사가 된다 말이죠.
보통 특별함이 아니기에,
특이함 중의 특이함이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은 이해 되는 것만 골라서 믿을려고 하고
설명 가능한 것만 골라서 믿는다 말이죠.
그래야 부담이 안가거든요.
그것이 자기유익에 맞다 말이죠.
너무 부담스러운 특별 조치를 싫어할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안그러면 안믿을꺼야 라는 고집이 졸지에 종교신앙이 되고 만겁니다.
믿을 수 있는 것만 달라는 겁니다.
믿을 가능성 있는 것만 믿겠다는 거죠.
그러니 종교는 마약이지요.
바로 이것에 대한 반대의 의미이다는 겁니다. 부정적이지요.
그러나 이해가 안되어야 그게 진짜 감사이고
설명이 안되어야 그것이 진짜 즐거움이다는 겁니다.
가능한 것은 육의 세계이고
불가능한 것은 믿음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낯설고, 불가능하기 때문에 믿음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란 종말의 종말의 의미로써 감사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 없는 감사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감사인 겁니다.
불가능한 감사이다는 겁니다.
즉 성경 말씀에 그 어디에도 이유 있는 감사란 없다는 겁니다.
원인 있는 결과란 없다는 겁니다.
모조리 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 불가능한 감사가 덮쳤다는 겁니다.
이유 없어요.
이유 몰라요.
갑자기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면 딱이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저번에 말했던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는게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어나가는 것이다 라고 말이죠.
이것을 더 쉽게 표현하면 바로
편지다 라는 겁니다. 편지
성경 말씀은 모조리 편지입니다.
연애 편지
내 쪽에서는 쓴적이 없다는 겁니다.
외부에서 온 겁니다.
즉 사랑하는 자가 나를 향해 일방적으로 날리는 편지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 편지를 읽는게 아니라
이미 사랑하는 자가 나를 읽었다는 겁니다.
편지는 사랑의 결과물이니까 말이죠.
내가 읽어야 나에 의해서 좌우 되는 편지가 아니라
일방적인 사랑이 나를 이미 읽어 버렸다는 의미에서 편지이다는 겁니다.
즉 관계망 네트워크입니다.
이것이 그의 양 이라고 표현된 의미 입니다.
양은 절대로 독자적일수 없다는 겁니다.
그가 길러줄때만 그때만 양이다는 거죠.
철저한 단절의 의미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바로 악마의 세계인 거죠.
그 관계망을 깨껫다는 취지인 겁니다.
소위 왕의 두 신체 라는 개념이 있는데
마귀는 왕을 죽이면 그 관계망도 사라진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왕의 신체를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왕은 안 죽는 겁니다.
신체는 왕과 함께 했기에 그 왕의 신체를 죽이면 왕도 죽는줄 알았는데
사실은 왕은 신체와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관계망을 더 확산시키는 십자가의 지혜를 건드린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괜히 건드린 겁니다.
예수라는 존재를 죽였으면 예수는 이제 없는데
왕은 이제 없는데
오히려 왕의 의미는 더욱더 또렷해 지더라 말이죠.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이라서 오히려 벌통을 건드린 셈이라
이 주의 이름을 더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어버린 겁니다.
주의 주 되심을 만들어준 꼴이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더 또렷해 지더라 말이죠.
그것도 인간의 손으로 짖지 않은 한 이레 라는 성전을 더 보여준 꼴이다는 거죠.
흐릿하게 만들려고 그 관계망을 끊고자 죽였는데
왕이 죽으니 오히려 왕과의 관계망을 더욱더 선명하게 또렷하게 되더라 말이죠.
밟으면 밟을수록 말입니다.
끊어버리면 끊어질줄 알았는데 더욱더 연결이 되더라 말이죠.
누가 끊으리요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언 놈이????
(롬 8:10, 개역)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개역)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 8:12,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3, 개역)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4, 개역)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개역)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6, 개역)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7, 개역)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개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9, 개역)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롬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롬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3,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 8:24, 개역)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롬 8:25, 개역)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7, 개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8,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9, 개역)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개역)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1, 개역)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롬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 당사자가 바로 사도바울 아니였습니까?
예수 쟁이들 다 잡아 죽이겠다고 말이죠.
그러니 편지는 반드시 그 목적지에 도착한다 말이죠.
아무리 중간에 도둑맞은 편지 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편지 자체가 이미 원인 없는 결과이니까 말이죠.
나무 자체가 이미 원인 없는 결과이다 말이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많은 과실을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요 15:5, 개역)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아무 것도 못한다고 이거 완전 스토커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관계에 대한 확정을 말하고 있으니
이 보다 더 또렷한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죠.
이것은 지난 시간의
주의 선하심이 바로 마귀를 상대로 하듯이
똑같이 감사란 마귀를 겨냥한 의미이기에
부정의 부정이다는 겁니다.
마귀라는 부정적인 존재에게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로써의 감사이다는 겁니다.
마귀가 하는 일을 모조리 부정하는 의미에서 감사라 말이죠.
이것이 앞부분(시편 73편)에서 살펴봤는데
http://crosslamb.tistory.com/1687
시편기자가 악의 세력이 너무 너무 번성하다 보니
졸지에 실족할 정도가 되어
자신이 매일 매일 주 앞에서 손을 씻고 하는 거룩들이 무슨 소용이 있냐 라는
한탄까지 나올정도였는데
그런 악의 관영이 한순간에 일소에 말소가 될 정도로
한꺼번에 그 문제가 처리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성전에 들어가니까
비로소 왜 이런 악들의 번성이 다 해결이 되어버릴 정도로
주의 성전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시 73:2, 개역)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시 73:3, 개역)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시 73:12, 개역)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시 73:13, 개역)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시 73:18, 개역)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시 73:19, 개역)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오늘 시편 100편에서
(시 100:4, 개역)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는 정작 그 감사함이
사실상 그 어떤 일치성이 없는 상태이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고
다 없고 없는데
그것이 오히려 감사가 더더욱 넘치는 이유가
감사가 덮쳐서 나온 결과들이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열매 없고 우리에 양떼가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거죠.
그러니 감사가 발생시킨 일들을 누림으로써
그 문에 들어가게 되는데
사실상 이것도 순서가 바뀐 거죠.
하여튼 우리들의 의식하는 시간의 순서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 문이라는 주님의 문 되심 자체가
감사 그 자체가 되니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오히려 원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오히려 감사가 된다 말이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분명 원망했습니다.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그런데 7천명을 남겨놨다는 소리에 감사를 외칩니다.
7천명은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이기 때문에
7천명 때문에 원망이라는 오해의 경과를 거친거다 말이죠.
처음부터 7천명이 벌린 자작극이였다는 겁니다.
요나도 마찬가지
다윗의 여디디야 × 3도 마찬가지
베드로의 꼬끼오 × 3도 마찬가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원인 없는 결과를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것들이였다 말이죠.
문이든 감사든 그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서 나오는 의미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것은 오히려 마귀세계 악의 세계에서 따지는 의미이니까 말이죠.
문이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걸음걸이로 걸어서 문을 통과하는게 아니라
다리 없는 자는 어쩌라고?
정반대로 문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스캔하듯이 쫘아악 통과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감사가 아니 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무조건 무조건이야 짜짜라 짜라짜라 짠짠짠.
이것을 이름이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과의 관계망을 주의 이름이 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한게 아니라
우리가 할 줄 안다고 설쳐대서 겨우 관계를 형성했다고 우기는 것은
하나님이지 하나님의 이름은 아니다 말이죠.
인간이 자신의 열심으로 이룬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를 맺은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 쪽에서 불가능합니다.
주님 쪽에서 이루시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이 이루셔서 맺은 관계가
이유 없는 사랑 용서 감사이다는 겁니다.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맺어버린 주의 성실하심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유를 따지는 마귀의 세계에서는 문이 어떻게 인물이 되냐 라는 겁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될수 있냐 말이죠.
될수 있다는 것으로 따지는게 아닙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이런 이유를 따지는 악의 세계에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이니
불가능한 소리만을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 마귀들의 세계는 가능한 것만 들고 나와야만 하는 겁니다.
그럼 믿음의 세계는 더더욱 말 안되는 소리만 한다는 거죠.
그러니 감사가 먼저 있고
그 감사가 원인 없는 결과로써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게 하고
포도 열매 없게 만들고
감람나무 잎이 마르게 하고
외양간 송아지 등등 없게 했는데
여호와로 즐거워 하는 그 기쁨을 누리게 되더라 말이죠.
분명 나만 남았는데
안 기쁜데
7천명 때문에 졸지에 안 기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울다가 웃으면 털 나듯이 말이죠.
가능한 소리가 단 하나라도 있으면 오히려 이것은 감사가 안된다는 겁니다.
감사 자체가 제일 뒤에 나오는게 아니라
믿음의 세계에서는 감사 제일 앞에 등장한다 말이죠.
그러니 이유 없이 무조건 감사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감사이다는 겁니다.
그럼 끝이 감사면 다 감사이다는 겁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으니까 말이죠.
결국 이런 감사이어야만이
마귀가 발악하면서 치를 떠는 감사인게 되는 겁니다.
이런 감사가 아니면
마귀를 상대로 하지 않은 감사가 아니면
주의 선하심이 아니면
인간 자기가 자기 기쁨을 구하는 것 밖에 안되는 거죠.
누구랑 어제 만나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교회가 교리나 어떤 신학을 형성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유 없는 교회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못 미더워서 교리나 교회제도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고 말이죠.
그렇게 만들고서는 자기의 꾀가 자기를 발목잡는 올무가 되어버렸다고 말입니다.
심지어 교회 운영 조차도 마치 공중의 새를 도대체 누가 먹여 살리기에
저렇게 날고 있지?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데 말야! 라고
원인 없는 결과로 이유가 없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교회가 성령이 아닌, 원인 없는 결과인 주의 영이 아닌
사람의 손에 의해서 좌우되는 교회운영이 되다 보니
졸지에 이유가 너무 너무 많게 되더라 말이죠.
교회란 이유 없이 된 겁니다.
그 어떤 연결 고리가 없는, 단절로써,
불가능성으로 되었고 앞으로 그렇게 나아간다 말이죠.
마치 잠언서에 나오는 메뚜기였던가요?
분명 지도자가 없어요
그런데 누가 시킨냥
쫙쫙 하나도 흐트럼없이 군대처럼 하나로 움직인다 말이죠.
공중의 나는 새 처럼 말입니다.
그 어떤 연결 고리도 없는데. 단절인데 말이죠.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잠 30:24, 개역)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잠 30:25, 개역)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잠 30:26, 개역)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잠 30:27, 개역)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잠 30:28, 개역) 『손에 잡힐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교회가 된 이유가 왜 그리 많은지
이것은 강도의 소굴이 따로 없게 되어버린 겁니다.
교회 자체가 말 안되는 소리를 해야 하는데
말 되는 소리를 하게 되니
돈이 들어오니까
이제는 불가능이 아니라
단절이 아니라
가능성을 외치고 있고
개방을 외치고 있더라 말이죠.
돈이 되니 말이죠.
그 어떤 누구도 이상하다 도대체 교회를 누가 운영하지
아무도 운영하는자가 없는데
공중의 새처럼 누가 먹이시고 기르시는 것처럼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교회를 누려야 할 판국인데
너무 너무 이유들이 많아져 버린 것이 교회가 되어버린 겁니다.
거꾸로
교회가 솔로몬의 옷을 추구하다 보니
천년 만년 의문의 죽이는 모호한 것을 반복만 할 뿐이다는 거죠.
강도의 소굴이 따로 없다 말이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아니라
거꾸로
심심하면 유혹을 이겨야 한다고 교회가 설쳐대고 있어요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음부의 세계가 설쳐대어야 하는데
교회가 유혹을 이길려고 난리법석이야 ~~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이길려고 설쳐댄적 없어요
정반대로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길려고 설쳐댔지
발람 선지자가 이스라엘 이길려고 설쳐댔지
이스라엘은 그냥 가만이 있었을 뿐이였다 말이죠.
발람 지 혼자 이스라엘 저주 하겠다고 아무리 외쳐도
정작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난리였다 말이죠.
언제 이스라엘이 발람을 이길려고 했냐 말이죠.
아무 짖도 안했다 말이죠.
그런데 왜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은 발람을 이겨야 한다고 할까요?
유혹을 이겨야 한다고 할까요?
가만히 있으면 이미 이긴 것을 누릴텐데 말이죠.
교회 자체가 음부의 권세가 되어버린 마귀 본부가 된 겁니다.
교회 자체가 돈이랑 아예 일치가 되어버렸다 말이죠.
우상이, 자본이 되어 돈을 섬기더라 말이죠.
(마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발(이유 없는 결과)적인 교회로써 봐야하는 시선이
졸지에 자본의 가치로써 매겨지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과연 얼마짜리 교회이며
얼마짜리 예수이며
얼마짜릴 하나님이냐 로 매겨지는 겁니다.
이유를 따져서 그런거다 말이죠.
그러니 제일 우선시 되는 돈이 곧 교회가 되다 보니
돈에 거슬리는 것들은 다 거부대상이 되는 겁니다.
제 친구가 바로 집 앞의 교회를 다니다가
이제는 아예 안나간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아니 왜?
교묘하게 처음에는 그냥 설교를 하다가
설교의 모든 결론이 결국 돈으로 빠지더라 라고
그러니 이제는 갈 교회가 없다 라고 하더군요.
10년? 한 20년 전만 해도
교리를 따지고
교파를 따졌던 것도
이제는 다 지나간 과거일뿐
다들 교파와 상관없이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돈 돈 돈
오로지 돈 이야기 밖에 없다 말이죠.
장로교든
합동 통합 무엇이든
시대의 흐름 앞에서
그들 또한 이 흐름을 벗어날수가 없게 된 겁니다.
예정론 따지고 하던 시절은 이제 다 지나갔습니다.
교회 유지는 오로지 돈 밖에 없으니 말이죠.
예정론은
칼빈주의는
루터의 개혁주의는
핑계꺼리로 나올 뿐이다 말이죠.
지금의 죄의 흐름은 달라졌다 말이죠.
구조적으로 연결되어서 판대기로 나타난다 말이죠.
개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말입니다.
10, 20년 전만 해도 씨도 안먹히는 곳이 많았어요 돈 이야기 하면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거의 다 넘어가서 돈 이야기가 먹혀들더라 말이죠.
젊은 사람은 좀 덜하겠지?
점점 더 빨라 지더라 말이죠.
늙은 선지자 젊은 선지자 사건이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듯이
어쩔수 없는 흐름이더라 말이죠.
그럼 끝까지 버티고 이기자?
장사 없습니다 돈 앞에서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처음부터 마귀를 겨냥한 감사이다 말이죠.
교회 자체도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손에 좌우되는 처음부터 없었다 말이죠.
손대면 댈수록 강도의 소굴이 될 뿐이지
그렇다고 손 안대면 깨끗해지겠네
천만의 말씀이지요
시대의 흐름에 다 때 묻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럼 어쩌란 말이냐
아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
그냥 교회는 잊어버리고 기대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상태로 다니면 사람은 의욕이 없어지겠죠 뭐
그런데 어쩔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안 받으시고 거부하시니까요.
그래서 찬양자가 성소에 들어갔더니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안 캅띠까
다니엘의 70이레가 뭐냐하면
7이레 62이레 그리고 1이레 인데
이건 뭐 히틀러가 몇 년도에 몇 이레냐 이런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7이레는 성전 건설 허락 기간이다 말이죠.
함 해보라 말이죠 성전 지어봐 말이죠.
그리고 성전을 다 지어놓으면
62 이레는 그 성전을 다 뿌수는 의미이다 말이죠.
지으라 해 놓고서는 지으니까 뿌쌋뿌리고
시편 73편에서 성소에 들어가게 되니까 알게 되었는데
74편에서는 그 성전을 파괴해 버리는 겁니다.
순서와 상관 없다 말이죠
성소에 들어가서 비로소 알게 된 원인 없는 결과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지어지는 성전은 모조리 다 파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전 뿌수는 기간이 바로 62 이레다 말이죠.
그럼 한 이레는 뭐냐?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성전이 있는데 그 성전이 바로 한 이레이다는 겁니다.
그럼 참선지자는 무조건 성전 파괴를 외칠 수밖에 없고
거짓선지자는 성전수호를 외칠 수밖에 없는데
아니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그 이유가 바로 참선지자는 이미 한 이레의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완성된 성전을 봐 버렸기 때문이다 말이죠.
기존의 것들을 누락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빈공터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악들이 왜 이렇게 성전을 뿌쑤냐 말이죠.
지으면 뿌수고
주님이 지으라 해서 지어놓으면 또 뿌수고
뭘 해도 뿌숴버린다 말이죠.
뭘해도 죄 밖에 안되도록 만들어 버리더라 말이죠.
그런데 안 뿌셔지는 완성된 성전이 있는데
이 성전에 들어가니까
그렇게 성전을 뿌셔 뿌셔 대던 악의 관영이 한순간에 진멸해 버리더라 말이죠.
그러니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라는 그 불가능한 노래가
왜 말도 안되어야만 하는 소리를 외쳐야했던가를 이제 알게 되는 겁니다.
마귀는 성전을 뿌쑤다 뿌쑤다 그만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려 부렸어
미끼를 확 물어 분 것이여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너 왜 나를 세 번 부인했냐고 따지도 묻지도 않는데
이것이 믿음의 세계인데
마귀 지가 뭔데
베드로 라는 미끼를 확 물어버렸냐 말이죠.
예수님도 안 묻는 것을 따지냐 말이죠.
마귀는 이유를 따지다가
원인은 따지다가
그래서 베드로를 확 물어 버린 겁니다.
괜히 물어 버린 거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려 버린 겁니다.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감사
이유 없는 감사는
처음부터 누구를 겨냥한 주님의 선하심입니까?
이 주의 선하심을 거부하는 자를 겨냥한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였습니다.
주의 감사를 누가 거부하냐 말이죠.
이유 있는 감사를 따지는자
원인 있는 감사를 따지는자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해 주심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자
이들이 그만 확 물어버린 겁니다.
주의 이름이라는 관계망을
훼방할려다가 도리어 말려든겁니다.
십의 이조를 드렸다고 이유를 따져서 감사요
이레에 두 번 금식 했다고 원인을 따져서 감사를 하고 있으니 말이죠.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세계에 말려드는 악마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정작 세리는 주의 이름이라는 긍휼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말이죠.
주의 이름 앞에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칠 뿐인데 말입니다.
저절로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할려고 설쳐대다가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되는 꼴이 되었던 겁니다.
우리는 악마의 세계 라고 딱 들으면 어떻게 해서든 피할려고만 했지
그 뒤는 관심이 없었다 말이죠.
그런데 감사는, 곧 주의 이름은 이 악마의 세계를 들추어내심으로써
왜 감사인지를 나타내시더라 말입니다.
그러니 인애와 자비는
곧 사랑은 반드시 죽음 같이 강하며
시기와 질투를 한다는 겁니다.
왜 부정적으로 표현했을까요?
오히려 그 저런 부정을 끌어들임으로써 더 죽음 보다 더 죽음같고
시기 보다 더 시기하고
질투 보다 더 질투하는
부정의 부정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감사를 위한 보충물로써
악의 세계는 동원이 되는 겁니다. 아무 아주 적극적으로 말이죠.
이유가 없어야
원인이 없어야
마귀는 그 빈공터를 빈보좌를 앉다가 쭐꾸덕 미끄러지는 겁니다.
이렇게 마귀를 상대로 했기에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이유를 따지고
원인을 따지고
조건을 갖추는
그런 악마의 세계에서
정작 선물은
주의 이름은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님 쪽에서 피흘려서
일방적으로 감사를 뒤짚어 씌워서
거룩을 뒤짚어 씌워서
즐거움을 뒤짚어 씌워서
7천명의 세계를 누리게 하시는 겁니다.
이 7천명의 남은자 세계를
이 7에 70번의 용서의 세계를
막 즐기는 것으로써 시편 100편은 우리에게 편지로 도착한 겁니다.
마음껏 누리시길 ~~~~
우리는 주의 이름 때문에
뭘 해도 감사 밖에 누릴 것이 없습니다.
(고전 10:30, 개역)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빌 4:6, 개역)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골 3:16, 개역)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 4:2, 개역)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살전 3:9, 개역)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딤전 4:3, 개역)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4, 개역)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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