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원수 갚기 (시편 7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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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73:17, 개역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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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 개역)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73:2, 개역)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73:3, 개역)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73:4, 개역)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73:5, 개역)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73:6, 개역)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3:7, 개역)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73:8, 개역)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73:9, 개역)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73:10, 개역)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73:11, 개역)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73:12, 개역)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73:13, 개역)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73:14, 개역)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73:15, 개역)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73:16, 개역)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73:18, 개역)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73:19, 개역)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73:20, 개역)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73:21, 개역)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73:22, 개역)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73:23, 개역)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73:24, 개역)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73:25, 개역)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73:26, 개역)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73:27, 개역)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73:28, 개역)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지난 시간에 지혜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가 가난한자에게만 베풀어지는 기능인데
지혜자의 지혜를 도움 받아야 하는 가난한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의 내용을 sns에서는 제목을 달리 달았는데요

바로 [메시아는 없다] 라고 말입니다.

 

메시아가 없기 때문에 인간들이 자기 멋대로 설정한 가난한자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직접 지혜자가 와서 직접 가난한 자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데

참 놀라운 반응은 아무도 지혜자가 설정한 가난한자를 다들 거부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가난한자를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낼수 없다는 뜻에서

불가능한 가난한 자를 말하니까

다들 거부하는 겁니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불가능한 제사를 드린자를 말입니다.

고로 똑같이 메시아도 죽여버립니다.

그래놓고서는 또 다시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즉 기다린다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난한자이다 라는 것이지요.

 

오늘 아삽의 시 곧 찬양자의 시에서 이렇게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왜 악인이 흥하냐 라는 겁니다.

그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니까

실족할 정도로 마음이 심난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미끄러지고 자빠질 정도로 악인의 형통함에 낙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73:2, 개역)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73:3, 개역)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들은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외칩니다.

즉 저들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보호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즉 이스라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합니다.

 

(73:11, 개역)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하나님이 알긴 뭘 알아? 하나님이 지식이 있긴 있어???

라는 말을 막 합니다.

 

그러니 이 말을 들은 시편 73편의 시를 적은 찬양자는 기가막히고 코가 막히는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마음이 심난하고 아픕니다.
찬양자 자신은 정작 죄악에서 늘 벗어나고자 했던 그 거룩을 향한 그 마음이
무용지물이 될 정도로 헛된것처럼 보일정도로
저들의 악함에 아무런 쓸모짝도 없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을 정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악함에 대한 흥함과 번성이 언제 하루아침에 망하게 되는고 하니

바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비로소 저들이 망하는 그 원리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즉 그 동안에 왜 악이 번성하고 흥하고 거기에 대한 징벌이 없이

오히려 그 악인으로 인한 의인들의 죽음이 왜 벌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이

 

하나님의 성소 곧 거룩한 성전에 들어갈때에 그 의문들이 다 풀렸다는 겁니다.

 

어떻게 풀렸을까요?

 

악인의 형통으로 찬양자가 미끄러지고 실족할 정도로 심했는데

정작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때에

악인들이 미끄러져서 하루 아침에 다 멸하더라 라는 겁니다.

 

결국 악인들의 번성은 이 거룩한 성전을 말하기 위한 부정적 보충물로써 작용했던 겁니다.

 

이것을 찬양자가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언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시편 100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00:4, 개역)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즉 우리는 몰랐던 겁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가난한 자 에 대한 설정도 우리 멋대로 엉터리고

거기에 따른 기능인 지혜도 우리 멋대로 설정했고

고로 메시아도 엉터리로 설정했고

왕 개념도 엉터리고

기도도

성전도

거룩도

찬양도

교회도

성령도

십자가도

이웃개념도 순 엉터리였던 겁니다.

십일조? 십일조 빼 먹으면 안되죠
십일조도 순 엉터리 설정입니다.
문자로 해석하지 말라고 해놓고서는
온전한 십일조 라는 말라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사기를 치는 겁니다.

제 블로그 검색 순위 1위 가 [십일조 내야 하나요?] 입니다.

심지어 죄도 엉터리 설정이고
고로 악인도 엉터리로 설정하는 겁니다.
악이 뭔지를 모릅니다.

그러는 너는 아냐?
저도 모릅니다.

제가 악을 알고 규정해 버리면
그건 더 이상 악이 아니지요!!
인간에게 규정 당하는 악이면 그게 어디 악이겠습니까?
아무도 악을 규정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로만 밝히시는 겁니다.
인간은 그런 악을 죄를, 알수가 없어서 그 공백을 자기 멋대로 채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순 자기들 멋대로 설정한 개념입니다.
인간들이 믿을수 있도록
납득이 가는 것들만 모아 모아서 개념을 만듭니다. 그게 교리이지 무엇이겠습니까?

가능성으로 부여한 의미들로만 가득채운 겁니다.

안 믿겨지는 것들은 다 빼버렸고
인간들에게 불리한 것들 다 빼버린채로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인 다수가 받을수 있는 구원을 개발해 낸 겁니다.

 

뭐 하나 제대로 된 의미를 단 하나도 아는게 없이 엉터리로 설정해 놓은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 대한 악인도 사실은 엉터리로 설정할 가능성이 100% 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뭘 해도 엉터리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늘 오해를 하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언제 다 제대로 보일수가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때에 비로소 제대로 보인다는 겁니다.

 

문제는 성전에 대해서도 엉터리로 설정할테니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점이 문제인거죠.

 

하나님의 성소는 우리가 우리 발걸음으로 찾아 들어가는 그런 성소가 아닙니다.

 

즉 건물이 아니다는 겁니다. 공간도 아니구요.

 

그 문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면

그 문이 나에게 뚜벅 뚜벅 걸어 올때에 그 문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문이 바로 예수님이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발 걸음으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심으로써 죄인인 나를 영접해 주심이다는 겁니다.

이 관계는 결국 감사함의 관계가 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당위 이다는 거죠.

 

존재와 존재가 만나서 그 결과로 감사가 발생한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이전의 당위가 이미 감사라는 결과로 등장해서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감사 때문에 증상으로써 우리는 안들어가고는 못배기는 문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내가 들어간 적도 없이 문이 스스륵 다가와서 나를 통과해 버리고서는 내 보고 들어갔다고 해 버리는 겁니다.

 

괜히 말을 어렵게 했는데

악인은 하나님을 찾아서 들어갈려고 하는 자들이 악인이요 음녀이고

의인은 자기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거룩한 문이 찾아와서

그 문이 나를 스캔하듯이 통과함으로써 들어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악인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쭐꾸덕 미끄러지는 판대기에 넘어진다는 겁니다.
악인이 언제 결정 나느냐?
하나님의 성소의 등장입니다.
인간의 성전의 등장이 아니라, 그것은 백날 해도 거룩하지 않거든요.
진짜 거룩한 성전이신 예수님의 찾아오심으로 악인은 모조리 실족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두 패로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그 미끄러운 판대기를 하나님의 성전 되신 예수님이 만들었다는 겁니다.
십자가요.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사신 그 삼일의 간극이 바로 미끄러운 판대기 입니다.

 

오늘 식사 중에 어머니께서 욥기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욥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모든 사람이 특히 욥의 세친구가 모든 사람들의 대변인으로써

모든 인간의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는데

 

욥아 너가 지금 벌 받고 있다는 것은

너는 잘못한 일을 한 죄를 지었고

그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서 벌받고 있고

그 벌로 인해 회개를 하라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라는

 

모든 인간 곧 불교를 믿어도 유대교신자도 천주교도도 유교 도교 이슬람교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의식을 대변하면서

하나님 곧 신을 언급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이 놀라운 점은 그게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우와 여기에 욥은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1. 죄를 지었고 2. 저주가 내려졌고 3. 벌을 받았고 4. 회개를 하라 라는

 

이런 인간들의 신관에 욥은 끝까지 거부합니다.

뭔지는 몰라도 이것은 아니다는 겁니다.

 

1 죄를 지은적 없고,

2 그래서 저주가 온게 아니고

3 그래서 벌 받는게 아니고

4 그래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다들 회개 하라고 권유하는 가운데

욥은 회개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죄를 지었어야 회개를 하니 마니 할 것 아니냐 말이죠.


죄지음 이라는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 회개 해야한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지금 욥은 원인이 없는데 어떻게 회개를 하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저들은 너가 저주 받고 있잖아

벌을 받고 있잖아

그러니 죄 지은게 맞다

너가 너 자신이 모르는 가운데 서도 죄를 지을수도 있으니

일단 벌 받는 입장에서 무조건 회개하는 것이 회복을 위한 빠른 길이다 라는 겁니다.

 

언뜻 회복을 위해서는 그런 방법을 취하는 것이 빠른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욥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회복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즉 죄 곧 악에 대한 시선이 서로 다릅니다.
욥도 전에는 그렇게 대충 봤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른 시선이 덮쳐진 겁니다.

 

친구들이 도와주겠다는 방식들이

욥이 보기에는 다 의문의 짖이다는 겁니다.

이미 기존의 그런 방식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 모호하고 의문의 흐릿한 방식으로 땜빵 때우듯이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악의 깊이 차원이 다른데?
그렇게 회개 해서 해결 될 차원이 아닌 겁니다.
전혀 다른 의미가 벌어졌다는 겁니다.
개인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직접 묻습니다.

주여 당신이 저에게 원하는 것이 뭡니까? 케보이

도대체 원하는게 뭔가요?

내 목숨을 원하면 가져가시던가요? 그런데 그게 아니다는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그럼 도대체 뭘 원하시는 겁니까?

 

자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소되신

거룩한 성전 되신 예수님이 직접 찾아온 사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 찾아간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만나러 오신, 예수님이 찾아낸 사람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저들의 종교성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의 신앙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이도 저도 안되니 자살하자? 자살해도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렇게 쉬울 것 같으면 자살하면 다 풀리게?

자살해서 해결될 것 같으면 백번 천번도 자살하겠다 말이죠.

그런 차원이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욥에게 덮쳐졌기 때문에

욥의 세친구 수준에서는 해결할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들은 마치 모든 인간의 종교성 모든 인간의 신개념처럼

굿을 한다든지, 작두를 타서 아픈 몸 문제를 해결한다든지,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한다든지, 착한 일을 많이 한다든지,

회개를 한다는 든지, 이웃사랑 실천을 한다든지,

십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등등 그런 차원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 종교생활, 신앙생활로 해결 된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모조리 인간 쪽에서 신을 찾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신정론 입니다.

즉 인간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 육의 한계입니다.
신정론 즉 신을 왜 찾는고 하니
악에 대한 충돌 때문입니다.
과연 신은 선한가?
왜 신은 악을 허용하는가?
왜 악을 방치하는가? 신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현대인들이 부딧히는 문제로 인한
해결방법 찾기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쪽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직접 해결할 문제이다는 겁니다.
진짜 거룩이 내려 오셔야 하는 문제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비로소 갈라져서 또렷한 분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서로 썩여있어서 또렷하게 갈라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고

물에 물 탄 듯 뒤범벅 되어 있는 혼란을

 

제대로 갈라서 또렷하게 분리 구별 구분 시키는

거룩의 등장만이 이 모든 문제를 하루 아침에 종식 시킨다는 겁니다.

그 거룩의 등장 때문에

되도 않는 비거룩들이 활개를 치는 현상이 보충물로써 작용함으로써

낙심까지 다다르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연기를 하는 것이다 라고 어머니께 말했지요.

연기를 무지 무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연기의 신]인 성령이 임해서

어떻게해서든 대본대로 완성하시는 겁니다.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말입니다.

 

밤새도록 피부를 끍어대는 연기

 

에라이 너를 그렇게 만든 하나님이나 욕하고 차라리 죽어라 라고 욕하는 아내에게

무능하게 욕먹는 연기

 

자 욥을 보세요 오늘 시편 73편의 찬양자의 심정과 같지 않습니까?

 

왜 악인이 이렇게 잘먹고 잘살고 형통하고 배부르게 살다가 죽을때 마저도 고통없이 죽냐 말이죠.

어떻게 하나님을 비웃어도 저렇게 잘 사는 일이 있을 수 있냐 말이죠.

저들 악인의 말대로 하나님이 뭘 알기는 아냐? 하나님이 있기는 있냐?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어디있느뇨

그런 말로써 끝까지 따라와서 괴롭히고 있으니

 

실족하고 미끄러져 낙망할 정도이다 라고 합니다.

 

저런 자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런 소리 안듣고
피하거나 도망치면 될 것 아니냐

 

그게 가능했다면 벌써 했지요.

양사방으로 깔아놔서리

벗어날수가 없는 갇혀있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어디를 가도 저런 놈들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그렇게 그렇게 변동되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강하게 튼튼한 바위처럼 계속 되어져 낙심할 정도로 그 어떤 변화도 없을 정도였는데

 

어느날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저들이 멸하더라 말이죠.

 

그것이 언제인고 하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라는 겁니다.

 

인간이 거룩을 아무리 실천해도 안되던데

거룩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수가 없는데

그 불가능성이
어떻게 원인이 없이 이루어졌는가 보니

거룩이 우리 쪽으로 올때에 거짓말처럼 다 사라지더라 말이죠.

 

마치 거짓선지자들이 평강이다 평강이다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 라고 했을 때

그런 거짓선지자들의 말에 다들 넘어갈때는

악인이 형통함으로 악이 멸망할 기미를 보이지 않더니만

 

거룩의 성전이 오게 되니까

거짓말처럼 그렇게 형통하던 거짓선지자의 번성이 하루 아침에 다 사라져 버린 겁니다.

 

갑자기 이런 노래가 생각나네요 조금 개사를 하면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지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그 선지자 지금 어디있냐 말이죠?

인간을 변호해주고 인간을 도와주던 그 선지자 지금 어디에?

 

마치 꿈처럼 하루아침에 다 사라져 버렸다 라는 겁니다.

 

(73:20, 개역)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누가?? 악인 곧 거짓선지자 말이죠.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을 변호해 주던

평안하다 평안하다 라고 했던 그 거짓선지자 말이죠.

 

인간의 말을 절대로 들어주지 않던 그 참선지자는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얼 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 씨구 씨구 들어간다.

바벨론 포로 전에는 눈물만 흘렸던 예레미야 선지자 거지 각설이가

포로 되어 갈때는 그리 많던 거짓선지자 다 사라지고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각설이 예레미야가 춤추면서 좋아라 하면서

포로 잡혀 가는 것이 뭐 그리 좋다고 춤추고 노래부르면서

표시해놔라 돌아올 때 그 표시를 보고 돌와 들어오게 될테니 라는 겁니다.

 

완죤 신냤죠 뭐

 

찐빵이 쪼개지니까 비로소 깨닫게 되었더라 라는 겁니다.

미끄러지는 판대기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악인이 미끄러진다는 것을

 

마귀들은 미치거든요.

아무도 자기를 건드릴자가 없다고 기고만장할때에

악의 관영이 무르익을때에

고름이 익어야 다 익어야 그때 비로소 짜내듯이

 

마귀들은 이 하나님의 빈보좌의 비어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앉게 되지요.

앉자 마자 쭐꾸덕 미끄러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빈보좌는 빈공백으로써 끊임없이 분절되기 때문에 비어있는 겁니다.

 

예수님 자기자신의 분절입니다. 이 분절을 완성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성전으로써, 그 문으로써 들어오심입니다.

3일의 간극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 문이 나에게 들이닥쳐서

들어가버리겠끔 스캔해 버린 겁니다.

통과해 버린 겁니다.

나는 들어간적도 없는데
들어간 결과만이 덩그라니 남아버린 겁니다.
문이 나를 스캔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게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어버린 겁니다.

말씀이 주체요

나는 대상물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입니다.

 

그러니 마귀는 괜히 쓸데없이 그 빈보좌를 앉아버린 겁니다.

안 앉고는 못배깁니다.

 

에스더서에 기록된 대로 왕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놓칠수가 없거든요.

왕의 지팡이와 왕의 망토를 거절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기여이 에스더를 잡아야 하는 공로를 세워야 하는 겁니다.

 

욥을 잡아야 하는 공로를 세워야 하는 것이 마귀가 하나님의 지혜에 걸려든 겁니다.

 

여기에 죽으면 죽으리라가 바로 문제해결의 답이 되는 겁니다.

인간 중에는 두 번 못 죽거든요.

한번 밖에 못 죽어요

두 번 죽는 인간이 없습니다.

 

즉 죽어도 안죽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죽어도 안 죽는 분만이 거룩이다는 겁니다.

그 거룩이 등장할 때까지는

쪼매 참아라 말이죠.

악인이 자기 꾀에 도취되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연기를 하면 됩니다.

 

이것이 가위 바위 보 게임에서 늦게 내면 된다는 겁니다.

 

그 연기를 통해서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그 증상으로써 연기를 누리자 말이죠.

주의 병에 눈물을 담는 신나는 주의 책에 기록되는 것을 즐기자 말이죠.

 

아삽도 욥처럼 연기를 하는 겁니다.

연기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습니다.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을 말하기 위해서

미끄러지는 척

실족하는 척 연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야 마귀가 속지요.

우리 연기 때문에 속는게 아니라

거룩의 등장을 새까맣게 잊도록 하니까 말입니다.

 

마귀는 백날 설쳐봐야

예수님의 보충물 밖에 안됩니다.

 

어두움은 오로지 빛을 더더욱 빛나도록 하기 위한 보충물입니다.

자신들의 어두움을 더욱더 캄캄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어두움의 관영함, 확장, 번성, 번영이

 

오히려 빛을 더더욱 또렷하게 만든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겁니다.

 

죽으면 죽음이라는 사망권세가 멸하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언제? 거룩의 등장,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때에 말입니다.

곧 거룩한 참성전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 쪽으로 오심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 쪽으로 오신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십자가를 다 이루신다는 겁니다.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로 내어주실 때 말입니다.

 

이게 거룩이예요.

 

자기 마음을 정해서 자기 죄를 씻는 것이 거룩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상대적인 악의 관영 때문에

이거 해서 뭐하겠노 라는 헛되다 라고 낙망만 할 뿐이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성화 곧 거룩한 행실이 악의 관영을 막던가요?

악의 문제를 해결하던가요?

자기 혼자만 깨끗하면 그만인가요? 그 자체가 악한 마음 아닙니까?

 

여러분이 손 씻듯이 죄악을 씻는 것을 악을 키우기 위함이다 라고 즐길줄 모르지요?

악을 더더욱 번영시키기 위해서 성화하는 자가 없잖아요

그 반대로 성화론을 지킬려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시편 73편 찬양자는

 

사실상 자신의 거룩을 위한 죄씻기가 마귀를 키운 결과 밖에 안되었다는 겁니다.

마귀의 세력을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그런 번성한 마귀를 자신의 거룩을 드러내기 위한 보충물로 이용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런 주님의 작전을 몰랐던 겁니다.

알면 안되지요.

 

그래서 마귀가 번영하도록 매일 매일 죄 씻는 일에 빠져서 낙망케 되는 일에 빠지도록 하는 겁니다.

 

그런 일을 안하는게 아니라

아무리 거룩하게 살아도 무용지물에게 만들어 버리고

오히려 악의 번영에 기겁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손 땔 것 아니겠습니까?

눈물 흘려도

기도를 해도

금식을 해도

회개를 해도

 

이 죽은 아이를 살릴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는 눈물 기도 금식 회개를 하지 않는 겁니다.

손때 버리는 겁니다.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춤추고 막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대로 바톤을 이어주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 되기 전에는 그렇게 우시더니만

이제는 오히려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춤추고 막 노래 부르십니까 예레미야여?

 

눈물 회개 기도 금식이 아이를 살릴수 없듯이

눈물 회개 기도 금식이 이스라엘을 살릴수 없다는 겁니다.

눈물 회개 기도 금식이 거룩을 살릴수 없다는 겁니다.

거룩이 도리어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죽은 아이가 도리어 다윗을 살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다윗을 살리는 겁니다.

화목제물이 된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술먹고 춤추고 노래부르고 신나게 즐거워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정작 포로되어 죽은거나 마찬가지인데

이제야 이스라엘이 살았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런 모습으로 온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이미 완성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본 것이

바로 참선지자들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편을 들 필요도 없고

인간의 말을 일체 들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주의 책에 기록도 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비로소 깨닫게 될까요?

 

거룩의 완성 때문입니다.

우리는 백날 해도 거룩을 단 한 개도 이룰수가 없습니다.

에스겔은 거룩한 성전의 완성을 말하는 겁니다.

거룩한 제사를 통한 거룩의 유지를 이스라엘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망해야지요

그런데 망했는데

다윗은 율법을 네 배라 갚아라 해놓고서는

정작 그 범인이 바로 너야 라고 지적을 받고서는

 

내 쪽에서의 거룩을 모조리 실패케 만들어 버립니다.

죄인이니까 이제 심판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거룩이 이미 완성이 되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 거룩이 임하여

거룩한 제사와 거룩한 성전이 완성되는 겁니다.

이미 말입니다.

 

왜 우리는 거룩 실패라는 과정을 왜 걱여야만 하나요?

어차피 용서해 주실꺼면 처음부터 주시지 말이죠.

그런데 처음부터 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려죽어도 모른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창세전에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처음부터 줬는데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구지 개입해서 이룬 거룩만을 기뻐하겠다는

바로 이 엉터리 거룩을 거쳐야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인 없는 결과인데

자꾸 원인 있는 결과를 추구할려는 이 악마성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제가 얼마전에 과부의 기도에 대해 글을 올렸는데

사실은 그 뒤에 이야기가 더 있었고

그것을 어머니와 그때 나누면서 어떻게 원수를 갚는가 까지 다 설명했습니다만

글로써는 반정도만을 적었습니다.

 

기존의 기도 개념이 엉터리이다는 것까지도 감당이 안될텐데

뒤까지 적어? 말어? 했는데

오늘 시편 73편을 통해서 보니

! 여기에 나오네!!!

그래서 그 뒤의 내용까지 지금 적어보면 이렇습니다.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과부는 자신의 원통함을 호소합니다.

 

여기서 기도는 대부분 소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 곧 과부의 기도는 원수 갚기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입니다.

그때 시편 58편을 나누면서 했던 내용이다고 했습니다.

의인의 기도 라고 치고는 너무 무시무시한 기도입니다.

악인은 아예 애초부터 태어날때부터 햇빛한번 못 비추임 받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거 기독교인 중에 이런 기도 하는자 봤나요?

다들 겁나서 못합니다.

 

자기에게 원수가 생기면 또 몰라
할수도 있겠지만
그 원수는 인간의 원수라서
사실상 그런 원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왠만한 원수가 아니면

그런 독하게 저주를 퍼붓는 식의 기도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기도란 이게 진짜 기도이다는 겁니다.

소원 개념으로써의 기도가 아닌

원수 문제 해결해 달라는 기도 말입니다.

 

이것이 한나의 기도요

마리아의 기도 아닙니까?

세상에! 연약한 여자로써 저런 기도 하는 자 봤습니까?

한국 교회 여자들 백날 들따 보세요

이런 기도 하는 여자를 본적이 없어요.
한국교회 여자들은 다 종교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과부는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십니다.


그것도 안들어줄줄 뻔한 불의한 재판관에게 귀찮게 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쉽게 표현을 이렇게 어머니께 했습니다.

 

과부 되신 예수님이

불의한 재판관인 김대식의 멱살을 잡고

나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멱살을 흔들어 대는 겁니다.

이런 모션을 보여줘야 어머니께서 눈 똥그랗게 귀 기울여서 들으셔서 기억에 오래 남더라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성경 볼 때 마다 자꾸 그 생각이 나서

지금 선지서 부분을 보시던데

혼자서 우와 우와 자꾸 감탄을 하시는 겁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우리의 멱살을 잡고서

원수 갚아 달라고 자꾸 흔들어 대면서 귀찮게 귀찮게 하시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라는 식으로 귀찮게 했잖아요
그거 다 엉터리이지만

거꾸로 이다는 겁니다. 놀라운 탄식으로 우리의 멱살을 잡고
예수님 자기 원수를 갚아달라고 흔들어댑니다.

 

우리는! 아니 내 원수도 아니고
남의 원수인 예수님의 원수를

그것도 주님의 원수는 눈에 보여야 뭐 우찌 할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지
시도라도 하던가 하지

눈에 보이는 법은 없고
마귀 원수가 우리 보다 훨씬 강한데? 무슨 수로?

무슨 수로 이 불가능한 요구를 들어줘야 합니까?

집요하게 귀찮게 자꾸 자꾸 멱살 잡고 원수 갚아 달라는 그 기도 요청을 어떻게 들어 주느냐 말이죠.

 

그 기도 안 들어줬다간 내가 못 견딜정도이니까 말입니다.

 

제가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원수 갚아달라는 이 문제는

사실상 예수님의 자작극이다는 겁니다.

 

결국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예수님이 이미 원수를 갚은 그 결과로써 다가오시는

내 멱살을 잡고 흔드심이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되었는가?

난 한 적도 없는데 말이죠.

 

이것이 가위 바위 보 늦게 내는 방법이기도 한데

 

그것이 바로 마귀에게 잡혀 오는 겁니다.

마귀는 신났습니다. 예수님의 원수인 예수님을 세번 모른다고 배신한 베드로를 잡아 왔으니까 말입니다.

이미 위에서도 말했듯이

하만에게 에스더가 잡혀 오는 겁니다.

 

지금 시편에서 다윗을 집요하게 따라잡는 저들의 공격이

이미 용서 받은 밧세바 사건을 저들을 끝까지 걸고 넘어지는 겁니다.

그래야 그 빈 왕좌에 자기들이 앉을 수 있으니까

꼬투리를 끝까지 잡는 겁니다.

그래서 센터 중앙에서 벗어나 자꾸 땅끝으로 내 몰리는 겁니다.

그래야 비어있는 중앙에서 권력을 차지해 왕좌에 앉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저들이 미끄려지는 방식입니다.

 

베드로는 마귀에게 잡혀 오는 것이

바로 베드로가 마귀를 잡는 것입니다.

 

분명히 베드로는 마귀에게 잡혀왔는데

예수님이 일방적인 편파 해석을 합니다.

 

분명 구약에서 모세는 실패했음을 남이 아닌 성경말씀이 세세히 적었습니다.

애굽왕 바로왕이 무서워서 도망쳤다고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 와서 히브리서에서 반칙을 합니다.

바로왕을 무서워 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성경 본인이 그래 적어 놓고 성경 본인이 그래 적은 것을 역설적으로 반대로 적습니다.

이 모순점 우에 해석하실래요?

해석 하기는커녕 그냥 누려야 할 판국입니다.

이 모순이 나를 구원하니까 말입니다.

 

분명 베드로가 마귀에게 잡혀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드디어 예수 나의 기도

과부처럼 집요하게 귀찮게 원수 갚아 달라는 나 예수의 기도를 베드로 너가 들어주었구나 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니 제가 언제요? 주님의 기도를 들어주기는커녕 제가 마귀에게 지금 잡혀 왔다니깐요?

그래!! 잡아 왔구나

 

아니 잡혀 왔어요

 

그래 잡아 왔구나 라고

 

서로 대화가 다릅니다.

 

이것 마저도 기가막힌 연기 곧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이다는 겁니다.

 

그제서야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들어 왔음을 비로소 깨닫는 겁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원수 문제를
그래서 손 때버려서 잊어버린 원수문제를
어차피 안될껏 관심 끊어버린 원수문제를
예수님만이 집요하게 요구하셨는데
그것이 한순간에 우연히 해결이 되어버린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입니다.
 

내 쪽에서 행한게 일체 없고

나는 실패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아니 실패만 했을 뿐입니다.
성공한적 아예 없습니다.

그 실패한 나를 덮썩 물고서

마귀는 의기 양양하게 예수님께 다가올때에

마귀는 베드로 미끼를 괜히 무는 바람에

예수님에게 낙였는 줄 모르고

베드로 잡았다고 예수님의 수제자 라는

가장 은혜 받은자 욥을 잡았다고

가장 사랑 받은자 베드로를 잡았다고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예수님의 원수를 잡아왔다고 좋아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온 마귀가 한순간에 쭐꾸덕 미끄러지는 겁니다.

하만이 자기 무덤에 스스로 들어오게 된 겁니다.
 

자기 쪽의 해석을 들고 오는 바람에

예수님에게 제대로 낚여 버린 겁니다.

 

주님이 좋아라 죽습니다.

 

나의 원수를 갚았다고 말입니다.

 

이제 왜 우리에게 왜 원수 갚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원수입니다.

 

집요하게 시편에서

또 과부는 집요하게 원수 갚아달라고 요구 합니다.

 

이 전쟁

이 싸움의 문제를 계속해서 언급합니다.

 

시편 73편에서도 계속해서 그 이전의 시편들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사건인

출애굽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그 전쟁

그 싸움을 다시 재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원수가 생겨나야 되지요.


그래서 지금 출애굽 사건이 벌어졌다고
다윗 혼자
찬양자 혼자 떠들고 자꾸 그 구원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 입니다.
그래야 원수 문제도 같이 부각이 되니까 말입니다.

지금 현대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종교꾼들은 이제 십자가도 지나갔고 부활이 왔으니 부활을 언급해야 한다고 우길때에
성령을 받은자는 자꾸 출애굽의 그 구원사건을 계속 상기시키는 겁니다.

아니 실제로 지금 벌어지는 사건이다고 말입니다.

자기 혼자만 떠들어 대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다 라고 말입니다.
 

아무도 자기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이다고 생각 할수 조차도 없는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의 가장 정 중앙에 있는 자를

일부러 다윗을 얼룩으로 만들어서 땅끝으로 내몰아버림으로써

마귀라는 원수가 가시화 되면서

다윗이라는 미끼를 덮썩 물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일을, 이 사건을 누가 일으킨 겁니까?

거룩이 일으킨 겁니다.

하나님의 성소가 일으킨 겁니다.

 

이것이 인간 쪽에서의 거룩 제사가 차단되고 단절시키심과 동시에

그 실패로 인해 원수에게 사로잡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실패가 도리어 미끼를 덮썩 물게 되는

거룩이 다가오심의 상황의 증상이라는 겁니다.

 

악인은 그래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미끄러지는 겁니다.

 

우리는 그럼 잘나서 성소에 들어온 겁니까?

들어와서 잘나서 안미끄러지는 겁니까?

아니지요?

 

(1:1, 개역)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2, 개역)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3, 개역)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1:4, 개역)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5, 개역)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1:6, 개역)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기에 해당 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이 노래하고 있지만

다윗 조차도 실패했고 안되는 겁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의인의 길에 들어가지 못한 실패한 자이만

결과적으로 이미 들어오게 된 것은

의인의 회중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내 거룩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거룩인 겁니다.

 

진짜 거룩만이 원수 문제를 해결하고자 기도하지

인간은 이런 기도 하지도 않을뿐더러

원수도 없고

억울한 일도 없고

그저 몸 하나 편하게 살다 가면 그만이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하도 하도 말씀이 귀찮게 협박공갈을 하니까

불안한 마음에 천국 보험 귀찮아서도 들 뿐이지

사실은 천국도 지옥도 다 귀찮은 겁니다.

귀차나 ism 니즘

 

ism 이 맞나 싶어서 검새해 보니

현상유지 편향 이라는 무기력증이다고 하던데

그저 현상유지 이다는 겁니다. 그게 제일 편하거든요.

 

졸지에 원수가 생겨버리면

천하의 게으름뱅이도 갑자기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망쳐야지요 피해야지요 하루도 편한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과부처럼

집요하게 우리의 멱살을 잡고서

불의한 재판관인 나에게 귀찮게 합니다.

안들어 줬다간 계속 괴롭힐 것 같아서 어떻게 하긴 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소 되신 예수님이 벌리시는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이지요.

 

이 십자가 사건을 매일 매일 우리 속에 터트리시는 겁니다.

 

원수 문제 해결하지 않고서는

감사란 없다는 겁니다.

 

왜 시편에 이런 내용이 기록이 된 겁니까?

찬양이란 결국 이 원수 문제해결 때문에 나오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 얻으리로다

감사드려

 

이것이 역순으로 터트리시는 겁니다.

 

(50:23, 개역)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바로 이 노래를 부르게 하기 위해서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신 겁니다. 이미 승리한 노래를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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