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과 예수님의 죽음 (시편 87편)
시온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외치다 (너, 나 그리고 우리) (시편 87편)
야곱의 우물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시온)에서도 말고, 오로지 십자가의 죽음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남이라
(요 4:19,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요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시 87:1, 개역) 『[고라 자손의 시 곧 노래] 그 기지가 성산에 있음이여』
(시 87:2, 개역) 『여호와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보다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는도다』
(시 87:3, 개역) 『하나님의 성이여 너를 가리켜 영광스럽다 말하는도다(셀라)』
(시 87:4, 개역)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 87:5, 개역)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나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리로다』
(시 87:6, 개역)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셀라)』
(시 87:7, 개역)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는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 하리로다』
주님께서 시온이라는 특정한 공간을 자신이 거할 자리로 삼았다는 것은
선택은 여기 시온에서 온다는 겁니다.
(시 84:5, 개역)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 128:5,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시 134:3, 개역)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렘 51:10, 개역) 『여호와께서 우리 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렘 51:10, 새번역) 『주님께서 우리의 의로움을 밝혀 주셨으니, 어서 시온으로 가서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자.』
(슥 8:3,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슥 8:3, 새번역)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시온으로 돌아왔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살겠다. 예루살렘은 '성실한 도성'이라고 불리고, 나 만군의 주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누구도 자리를 마련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선택 받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주의 성실하심으로만 그 자리가 마련 되는데
(시 78:67, 개역)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시 78:68, 개역)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시 78:69, 개역)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시 78:70, 개역)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시 78:71, 개역)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시 78:72, 개역)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오직 다윗언약을 통해서만 선택받는데
다윗만 선택했다는 겁니다.
그 다윗가문 다윗언약에서 예수님이 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너와 나는 하나 다
너희는 신이다 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는
성령을
오직 다윗 언약으로 선택하신다는 거죠.
다윗 계통이 아닌 자는 일단 아니다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 혼자만 선택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혼자만 선택 받으면 끝내도 상관없는
천부당 만부당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혼자만(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구원받으심이 마땅합니다 를 증폭시키는
[우리] 라는 자들이 동원이 된다는 겁니다.
졸지에 태어나는 겁니다. 나타난다 또는 남이다 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시 87:4, 개역)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여기 [거기서] 곧 시온에서 태어나는 자들인,
이 [우리]에 해당되는 자들은
내가 그 [우리]에 속하고 싶어요 라고 해서 동원이 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저는 그 [우리]에 속할 자격이 애초부터 없습니다.
그저 긍휼만 바랄 뿐입니다 라고 하는 자들이다는 거죠.
그러면서 상대적인 난 저 우리에 속해야 마땅한 자입니다 라는 자들과
대조로써 동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그 [우리]가 바로 이 시온의 의미를 부각시키면서 성령에 의해 동원이 되는데
바로 이 시온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자 하기 때문에
결국 이 [우리] 라는 의미도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자 동원이 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고난 받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왜?
그렇지 않은자와의 충돌때문이다는 거죠,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을까요?
이 십자가의 죽음을 거부한 세계 때문이다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세상을 악하다고 했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하는게 아니라 나를 미워해서 너희를 미워한다는 거죠.
결국 시온은 신약에서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말한다 말이죠.
그 특정 공간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그 공간 그 빈터에서만 선택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26, 개역)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 11:25,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 11:26, 개역)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 11:27, 개역)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28, 개역)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롬 11:29, 개역)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30, 개역)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롬 11:31, 개역)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11:32, 개역)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3, 개역)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4, 개역)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롬 11:35, 개역)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히 12:22, 개역)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히 12:23, 개역)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히 12:24, 개역)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벧전 2:6, 개역)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계 14:1, 개역)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 14:2, 개역)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계 14:3, 개역)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그럼 우리는 이 시온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외치는 자로써 동원이 되는 [우리] 라는 개념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외치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외치는 자입니다.
교회에서 죽다 를 외치는 자가 아니라
그런 성전 뒷마당 골고다에서 죽는 예수님을 똑같이 흉내내는게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겁니다.
장소와 무관한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공간 시간 개념이 날라가 버리니까
사건 뿐이다는 거죠.
바로 십자가 사건 입니다.
그 [우리]에 해당되는 자가 바로
지난번 시편 87편 글에서
세상의 중심 시온에서 예수님을 외치다 (시편 87편)
http://crosslamb.tistory.com/1721
우물가의 여인을 언급했듯이 (밤에 몰래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와 대조된)
복음서에서는 바로 비싼 향유로 예수님을 발을 머리카락으로 씻은 마리아가 그러합니다.
즉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치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멀쩡히 살아계신 예수님을 미리 장사를 치르고 있으니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그저 눈에 보이는 그 비싼 향유를 아깝게 그냥 땅에 허비하는 것에
분노한 제자들과 특히 가룟유다가 대조적으로 이 여인의 믿음에 대조를 이루면서 기록이 됩니다.
(마 26:12, 개역)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막 14:8, 개역)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눅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요 11:2, 개역)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요 12:5, 개역)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즉 성경 전체가 바로 이런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또 한 예로 그 유명한 마태복음의 종말의 비유 3종 세트
1 충성된 종과 악한 종 비유,
2 슬기로운 다섯처녀 미련한 다섯처녀 비유.
3 양과 염소 비유
입니다.
의도적으로 충성된 종 되어야지 라고 해서 된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뒤에서 즉 미래에서 덮쳐져서 결과로 나타난 종말의 상황이다는 겁니다.
이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자 동원이 되고
다른 이들은 개인의 선택 개인구원을 말하고자 하는데 동원이 되기 때문에
반대를 위한 반대로 팔을 어긋맞게 펼쳐지는 시온을 말하고자 동원이 되더라 말이죠.
즉 충성된 종과 악한 종
한쪽 악한 종은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 졸지에 있고
다른 충성된 종은 개인의 영역이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누가 똑똑하냐 하면 악한 종이 똑똑하고
누가 미련하냐 하면 충성된 종이 미련 합니다.
그런데 이 우리에 누가 해당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데 있어서
미련하게 보이는 충성된 종이 해당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따져봐도
종말의 시선과는 안 맞습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덮쳐졌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역시나 슬기로운 다섯처녀와 미련한 다섯처녀 비유도 마찬가지인데
누가 봐도 누가 똑똑하냐 하면 미련한 다섯처녀라고 했던 처녀가 똑똑합니다.
아직 신랑이 오지도 않았는데 기름을 준비하는 것 보다
그때 오면 준비하는 겁니다.
요즘 시선으로 보면 아주 실용적이다 말이죠. 그게 합리적입니다.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결국 기다림과 기름 준비 등등은 이유 없는 결과이지
이유를 따져서
원인을 따져서 나오는 의미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종말은 그 어떤 연결점이 없는 단절로 되어 있기에
따라하기나 지키기 행하기 흉내내기가 일체 허용이 안된다는 점입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바로
슬기로운 다섯처녀라고 했던 여인들은 사실상 미련하다는 겁니다.
아직 신랑이 오지도 않았는데 왜 등불과 기름을 미리 준비를 하냐 말이죠.
그것 때문에 많은 시간들을 그 하나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말이죠.
맞습니다.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미래에서 덮쳐져 버리니까
미리 예수님을 장사 치르는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선택이 되었기에
신랑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마치 지금 함께 동행하는것처럼 행동했다는 겁니다.
신랑이 이미 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 또한 이유 없는 결과이지
이유 있는 결과로 만들어 낼수 없다는 겁니다.
그냥 막살았다는 거죠.
오히려 여기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화를 냈죠.
그렇게 할 짓 없냐 말이죠.
기다리는 동안에 가난한 자에게 비싼향유를 팔아서 나누어 주듯이
역시나 똑같이 가난한자를 위해서 이웃사랑실천을 해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얼마나 실용적으로 합리적인 사고방식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예수 안 이라는 우리에 함께 할수 없는 사고방식입니다.
시온에 부딧힐 돌에 부딧힌 겁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거리끼는 돌로 인해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종말의 사고방식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고자 하는 [우리]요 [예수 안]입니다.
교회에서 왜 죽나요?
교회는 나의 죽음을 말하는 장소가 되면 안됩니다
시온 곧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공터이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우리] 라는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죽는 나 는, 예수 안에 들어갈수 없는 자입니다.
구약에서 시온이라는 특정 공간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선택이 없습니다.
곧 신약에서는 십자가 외에는 구원이 없다 말이죠.
교회는 구원 공간이 아닙니다.
주님이 선택한 공간이 아니다 말이죠.
강도의 소굴에서 왜 죽나요
강도의 소굴에서 죽겠다는 그 놈이 강도 이다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사기를 치냐 말이죠.
예수님의 죽음이 아닌
자신의 죽음을 말하고 있으니 웃끼는 겁니다.
그 사람의 죽음은 나의 죄를 사할수 없다 말이죠.
그 어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는 죽음이 아니다 말이죠.
그 따위 죽음은 단 하나도 부딧히는 돌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번 금식했다는 둥,
교회에서 죽었다는 둥
사기를 치는 놈이다 말이죠.
왜 다윗 가문만이 시온에 해당되냐 말이죠.
그 시온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고
우리를 대신해서 피 흘리신 죽음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구약의 공간적인 의미가
신약에서는 하나의 사물이 된 겁니다.
십자가 라는 나무작대기가 아니라
십자가 라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사건이 되었다는 겁니다.
앞의 글에서 왕의 두 신체에서
왕 개인의 신체를 죽여버리면 왕이 죽을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그 왕의 의미가 우주적으로 더 퍼지는 겁니다.
주의 주가 되더라 말이죠. 왕의 왕이 되더라 말이죠.
그 이유가 왕은 사물이다 말이죠.
왕 자체가 사물 곧 사건이다는 겁니다.
왕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무한반복이다 말이죠.
즉 관계이요 [우리] 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 관계성을 끊어버릴려고 왕을 죽였는데
오히려 [우리] 라는 왕과의 관계가 증폭 확대가 되더라 말이죠.
그 죽음 때문에 [우리] 가 졸지에 생겨버린 겁니다.
즉 [우리] 곧 [예수 안] 말입니다.
(롬 3:24, 개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6:11,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어떤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는 겁니다.
어떤 놈이 십자가 마을은 왜?
단번의 제사로 단번에 해결했는데
왜 자꾸 십자가를 단회성이 아닌
무한반복을 외치냐 라고 짜증내는 말투로 목사가 그런 말을 하더 말이죠.
목사가 아니였다면 그려러니 하고 그냥 넘어갈라고 했는데
잘 모르니까 말이죠.
그런데 일반인이 아니라 목사 놈이 얼마나 공부를 안했으면 저럴까?
교인들 등쳐먹는 놈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 말이죠.
그런 교회는 강도의 소굴이다 말이죠.
왜 십자가를 무한반복으로 해야하느냐?
단번의 제사로 끝났는데
단회성인데 왜 여러번이냐 라고 말이죠.
말씀하시는 차원이 다른 의미인데
자기가 이해하는 방식에 끼워맞출려고 하다 보니까
무리수를 두는 겁니다.
왜 십자가의 죽음을 무한 반복으로 외치느냐 하면
그 단번에 끝난 것을 무한 반복하는 겁니다.
아니 그렇게 단회라고 하는 놈들은 왜 자꾸 예배와 제사를 드리냐 말이죠.
단번에 끝났는데
이제 드릴 필요도 없고
드릴 제사도 없는데 말이죠.
그러니 숫자로 손가락 세듯이 수의 의미로 생각한 겁니다.
참 무식한 목사죠.
단회라는 것은 이것 외에는 안 받겠다는 겁니다.
이것 외에는 시온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즉 이것 외에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는 거죠.
다른 말로 하면 왜 단회가 아니고 무한반복이냐
승리가 무한반복이다는 겁니다.
단 한번의 승리로 인해 그 승리의 소식이 무한반복으로 퍼져나가는 겁니다.
우주로 까지 말이죠.
그 목사는 숫자로 따지는 겁니다.
감사를 한번의 완성이라는 숫자로 본 겁니다.
관계 개념이 아니라 말이죠.
왜 관계의 개념을 숫자로 따지냐 말이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해서 한번 하나 로 그칩니까?
어제 하나면 오늘은 둘이 되는 겁니까?
관계가 둘이 되냐 말이죠?
감사를 공기를 한 번 마시고 치우냐 말이죠.
그렇다고 여러번 마시겠다고 손가락으로 새느냐 말이죠.
뭐뭐 로부터 벗어나서 뭐뭐로 안으로 들어왔다는 관계 개념인데
예수 밖에서 예수 안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인데
그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는 것인데
시공간이나 숫자로 따지겠다고 보니
이유 있는 단회성이 되어버린 겁니다.
이유 없는 단회성이 아니라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사도바울이 말했는데
아마 그 목사는 바울에게 십자가는 단회성으로 이미 끝났다 라고 자꾸 숫자를 따질 꺼다 말이죠.
이유 없고 원인 없는 사랑은
자꾸 이유 있고 원인 있는 사랑으로
이유 있는 십자가의 용서로 따지겠다는 겁니다.
말이 서로 안맞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그거 몰라서 십자가를 계속 주장하겠다고 하냐 말이죠.
교회에서 죽다를 외치는 놈과 똑같은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또 역시나 마찬가지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정작 양은 누가 봐도 염소 짓만 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막살아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너는 양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이유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와 같다 말이죠. 탕자이다 말이죠. 막사는 탕자
(시 87:4, 개역)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라합이 뭡니까? 애굽을 말합니다.
바벨론
블레셋
두로
구스
다들 한결같이 개같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이 구원 받을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 입니다. 단절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시온에 등록됩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받는 자로써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의로움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는 죄인이요. 탕자인데 말이죠.
그래서 이 불가능성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벌어졌다는 겁니다.
(시 87:6, 개역)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등록하실 때에는 그 수를 세시며 이 사람이 거기서 났다 하시리로다(셀라)』
이유 없어요 이유가 없어
아무리 그 원인을 따질수 조차 없을 정도로
십자가의 용서는 무조건 입니다. 조건이 없어요 없어!!
아니 왜 이러십니까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저를 떠나소서
저는 양 짓 한 적 없구요
염소 짓만 했어요.
아니다 너는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 주었고
목 마를때에 마실 것 주었고
굶주릴 때 먹을 것 주었다
아니 제가 언제예~~~~
전 그런 적 없어예~~~~
저는 예수님에게 그렇게 해 본적도 없는데예~~~~~
아니다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소자? 내 새끼? 내 새끼 한테 한게 그야 당연한데
왜 예수님한테 한 거랑 같다고 하십니까?
자 이렇게 일방적으로 편파해석
불법해석을 하셨다 말이죠.
부조리도 이런 부조리가 없다 말이죠.
원인 없으니까 말입니다.
일방적으로 탕자에게 살진소 새신발 금가락지를 뒤짚어 씌우는 편파 합격이다는 겁니다.
무시험 합격
반칙이지요.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남 돕기에 달인과 대조하기 위함입니다.
늘 아프리카 기아 난민을 돕고 이웃사랑실천을 밥먹듯이 하고
남을 위해서 굶어가면서 가난한 자를 위해서 일하는 자
즉 누가 봐도 저 사람들은 양일 거야
그럼 그럼 절대 저들은 염소 일리가 없어 라고 하는
마치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과 같다 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일방적으로 긍휼을 퍼붓는
그 십자가의 용서를
탕자에게 긍휼을 퍼붓는 그 사랑은 이상하게도 거부하는 겁니다.
함께 기뻐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단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 없는 맏아들과 같은,
누가 봐도 양으로 보이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셔서
시온의 시선으로
십자가의 죽음의 시선으로
종말의 종말의 시선으로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왜 먹을 것을 안 주었고
내가 목마를때에 마실 것을 안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때에 입을 것을 안 주었냐
아니 언제예 ~~~~
제가 그런 일에 전문가입니다.
진작 좀 말씀 하시지
지금이라도 당장 하겠습니다.
아니다 됐따
소자에게 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삐치셨어요
지금 당장 해드릴께요
성질도 급하셔
아니 됐다
이미 끝났다
헐 ~~~~~~~
이 무슨 심뽀 일까요?
아예 작정하고 뒤짚어 씌운다 말이죠.
시온에서 부딧히는 돌에 부딧힌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에서 소급해서 종말적으로 뒤짚어 씌우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갈라지는
곧 시온에서 갈라지는
양과 염소였다는 겁니다.
이런 시온이 아니면 양과 염소로 갈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선택 즉 구원은 시온에서 갈라지는 겁니다.
시온 중심이다는 겁니다.
즉 누구든지 인식하는 양과 염소의 구별법을 비켜가신다 말이죠.
그래야 시온은 아무나 못 들어간다 라는 단절성이 명확해 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시온에서 나타난 자인
시온에서 나온 자
곧 [우리] 라는 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고자 나타나는
인간이 의도해서 나온적이 없는 자들로 형성된
[예수 안] 이다는 겁니다.
예수 안이라는 의미는 특히 로마서에서 잘 나옵니다.
(롬 3:24, 개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6:11, 개역)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하나님이 마련한 구원의 공간 시온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고
거기서 잉태된 자, 곧 십자가의 죽음에서 태어난 자는
이 십자가의 죽음을 외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너희는 신이라 하지 않았느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 [우리] 라는 십자가의 죽음을 외치는 자들이
마치 예수님이
전혀 다른 [우리] 라는, 이미 기존의 [우리]라고 우기는 자들과 부딧히게 해서
십자가의 죽음 사건이 또 발생하는 겁니다.
사건의 무한반복이 되는 겁니다. 증폭이 되고 확장 된다 말이죠.
단회성에서 다회성이 아니라
그 하나의 사건을 무한반복
무한 도전 한다 말이죠
참! 무한 반복
교회에서 죽다는 시온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조직에서 조작한 사건을 사적으로 흉내내어 발생하는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 주체가 되어 벌어지는 사건이 발생하더라 말이죠.
그것이 기존의 [우리] 곧
십계명을 지키면서 세 번째 제 3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라
라는 이 말씀을 지키는 [우리]가 이미 형성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인한
곧 십자가의 영으로 인한 새롭게 생긴 [우리=탕자]와
제3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않는 계명을 지키는 [우리=맏아들]와 충돌하는 겁니다.
그래서 또 발생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죽음 사건이다는 거죠.
즉 이것도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이지
십자가에 달리는 유사하게 예수님의 죽음과 비슷한 죽음이 아니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이지 말입니다.
과연 스데반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입니까?
[예수 안에서]의 예수님의 죽음입니까?
만약 개인의 죽음이라면 억울함이 있겠죠.
그러나 성령께서 인도한 죽음이기에 감사함 뿐이다는 겁니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했다 말이죠.
그러니 이 [우리] 라는 개념을 스데반 개인이 죽는다고 해서 만들어 낼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일방적인 편파 해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혀 전혀 억울한게 없다 말이죠.
그런데 교회에서 죽다 라고 외친놈은 억울함을 넘어서
살인의지를 불태우더라 말이죠.
너무 너무 억울해서, 반드시 꺽어버리겠다고 설쳐대더라 말이죠.
그 살인의지로 교회에서 지금 대장질을 하고 있어요 ㅋㅋㅋ
성령께서 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영이 말이죠.
그러니 제 3계명을 지키고 있는 기존의 이미 있는 [우리]와 충돌 되는
새로운 그때 그때 발생한 [우리] 라는 겁니다.
항상 교회라는 새로운 의미가 있다면 기존의 인간의 손으로 조작한 교회 곧 성전이 있었다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식입니다.
(마 22:34, 개역)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마 22:35, 개역)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개역)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개역)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개역)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개역)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41, 개역)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개역)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개역)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개역)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그 비싼향유를 팔아서 가난한자 한테 왜 안나누어 주었냐고 화를 내는
큰 계명 두 개 중에 두 번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어겼다고
그것을 안 지켰다고 참람죄로 몰아세우는
그런 [우리]가 형성 되어 있는데
그 [우리]와 정면충돌케 만드는
새롭게 우발적으로 발생한 [우리] 라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시온에서 나온 자를 대조적으로 나타내시는 겁니다.
결국 이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진노의 그릇으로 동원되고
긍휼의 그릇으로써 동원이 되듯이
주님은 이 시온을 포기한 적이 없이
넉넉히 나타내신 겁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에서
주의 자녀들이 잉태되듯이
이들 [우리]는 곧 [예수 안]에 해당되는 자들은
사람의 뜻으로나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그 어떤 것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로써
이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요 1:9, 개역)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개역)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 1:14, 개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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