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의 말만 들으라 (시편 101편)
(마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개역)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눅 9:35, 개역)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시 101:1, 개역) 『[다윗의 시] 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시 101:2, 개역) 『내가 완전한 길에 주의하오리니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3, 개역)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서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시 101:4, 개역)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시 101:5, 개역)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시 101:6, 개역)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시 101:7, 개역)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시 101:8, 개역)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
(마 3:10, 개역)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마 3:11, 개역)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마 3:12, 개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 3:13,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신대』
(마 3:14, 개역)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 3:1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 3:16, 개역)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개역)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4: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1:11, 개역)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 9:7, 개역)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12:6, 개역)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눅 3:22, 개역)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 20:13, 개역) 『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인간의 해석의 한계점이 뭔고 하니
자기 기준에서 해석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기준으로 하면 될 것 아니냐 라는 것 자체도
이미 자기자신을 포함해서 이기 때문에 이미 시작 자체가 오류인 겁니다.
즉 해석이 가능하다고 해석에 참여한다는 자체가 이미 틀려먹은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정반대로 해석당하는 입장에 늘 놓여져 있다는 겁니다.
왜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서두로 꺼내는고 하니
구약 전체는 바로 다윗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다윗이 오늘 시편 101편에서 구약의 전체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데
바로 인자와 공의입니다.
(시 101:1, 개역) 『[다윗의 시] 내가 인자와 공의를 찬송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즉 구약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를 찬양하는 자로 세움을 받은 자는 다윗이다는 겁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겁니다.
사울은 미워하고 다윗은 사랑했다는 겁니다.
인자 곧 인애와 자비 라는 사랑과 공의 즉 정의죠.
왜 인간은 해석을 하는 일에 배제가 되는고 하니
인간은 이 정의를 곧 공의요 법이지요.
이 법을 놀랍게도 놀랍게도 인애와 자비로 연결시킬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럼 인간의 정의는 뭐냐?
인간의 정의는 항상 사랑을 배제하는 식으로써 정의를 생각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랑도 자기기준의 사랑일테니 말이죠.
그 대표적인 예가 이웃사랑이라고 하니까 자기 기준에서의 이웃설정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기본적으로 이웃에서 배제되는 것이 원수 입니다.
원수는 이웃사랑에서 당연히 배제가 되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이웃을 대상물로 설정한 자체가 이미 원수이다는 겁니다.
이웃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원수 말이죠.
그런 원수인 나를 이웃 대하듯이 대하시는 분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랑을 확정하시는 겁니다.
다른 사랑은 없다는 거죠.
고로 인간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사랑일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냥 쉽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의에는 갈급해 있습니다.
사랑은 없는채 정의는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시편 101편은 왕의 대관식때 왕이 선언하는 선서에 해당된다고 하더군요.
자 이런 왕의 한계는 이런 왕의 취임식때 선서를 해도
못 지킨다는 점입니다.
그럼 행하면 되지 않느냐??
행해도 실천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일 뿐이니까 말이죠.
또 실천해서 지켜버리면 더 골치 아파 집니다.
그 육의 자랑을 막을 길이 없을 테니까 말이죠.
즉 사랑은 지켜서 완성해서 사랑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그것은 법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써 사랑이다는 겁니다.
행하면 사랑으로 취급해 줄께가 아니라
그것과 무관하게 사랑으로 왔다는 겁니다.
시편 101편은 왕이 이런 선서를 함으로써
인자와 공의를 실현하겠노라고 땅에서 선언을 하지만
예수님은 왕의 취임식도 아닌
그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면서
하늘 자체가 열려서
하늘이 외치는 겁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고 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다윗의 말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 조차도 저분을 바라보세요 라고 하는 몽학선생 역할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속에 있는 그 언약의 정신을 누가 완성했는가?
다윗이 아닌 누가? 예수님이 완성한 채로 오시는 겁니다.
그러니 땅에서 선서 하는게 아니라
이러 이러한 왕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는 선서가 아니라
아예 하늘에서 그냥 일방적으로 선언을 하는 겁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다 라고
앞으로 이런 아들이 되도록 이런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가 아니라
이미 사랑 그 자체요 기쁨 그 자체로써
오히려 하나님이 아들 예수가 이렇다 라고
사랑 그 자체이다고
기쁨 그 자체이다고 선언을 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신약에서 선포 되어 진다면
인간이 해석해서 알아낸 것과
해석 자체가 인간을 해석해 들어가는 것과는 천지차이 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세례요한이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이 안된다고
나는 망해야 하고 그는 흥해야 마땅하다고
그 앞에서 나 라는 존재는 마땅히 천부당 만부당 망해야 함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도대체 이런 해석을 하는 자가 어디있겠습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는 해석이 뛰어나서 입니까?
아니면 아예 해석 자체를 손 놓아버릴 정도로
뻔데가 앞에서 주름 잡는 것이 건방진줄 알아서 입니까?
딴게 회개가 아니라 이게 회개입니다.
회개 자체를 손 놓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를 포기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아 죽었구나 이지요.
아 죽었구나를 빨리 외쳐야 살수 있다가 아니라
그 분 앞에서 진짜 아무리 봐도 살 가망이 전혀 없구나를 아는 것이 회개이다는 겁니다.
회개를 하면 살수 있다가 아니라 말이죠.
가능성이 전혀 없구나를 아는 것이 회개이다는 겁니다.
아 나는 이제 죽었구나
불가능하구나
이 불가능성을 오히려 신나게 외치면서 누리는 겁니다.
난 죽었네 난 죽었네 아 신난다 라고 말이죠.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중에 여호와의 영광 봐 버렸구나
나는 이제 불에 타 버려 잿더미 안개로 돌아가겠구나. 난 이제 끝났구나.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어딜 그 앞에서 해석하겠다고 달려들 수 있겠냐 말이죠
지금 불에 타다 버린 재가 되는 판국인데 말입니다.
너의 본질은 재다 는 겁니다.
재 주제에
흙 주제에
뭐 여호와를 해석하겠다고?
뭐 여호와의 이름인 예수님을 해석하겠다고?
지음 받은 자가 도리어 지으신 자를 해석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웃끼냐 말이죠.
(눅 11:53, 개역)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함 따져 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 자체가 안된 입장에서
정의는 목말라 미치다 보니
그만 법과 법의 틈 사이를 노리게 되는 겁니다.
사랑은 없는 채 말이죠.
그래서 제 3 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라는 말씀과
너희는 신이라 라는 시편의 말씀과
이 두 말씀 중에 자신이 지키는 것을 가지고서 우선순위로 해서
예수님을 참람죄로 몰아 세운 겁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즉 이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남을 회개하라고 외칠수 있는 외적인 모양새는 누구든지 갖출수 있다는 거죠.
즉 거짓선지자 조차도 말입니다.
그러니 세례요한 본인도 거짓선지자에 해당될 뿐이다 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나는 매일 매일 거짓일 수 밖에 없지만
진짜 선지자
진짜 베기는 따로 있는데
그 분은 물이 아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겁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자 봤습니까?
물을 통과케 하는 것은 침례교에서도 흉내내고
인생의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상은 모든 종교에 다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무슨 수로 세례를 줄수 있나요
즉 이 말은 도리어 성령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가능성이 아닌 단절에 놓인 입장이고 성령이 더 큰데
작은 내가 그 성령으로부터 다루어져야 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여기에다가 더 더 더 불가능한 것은
그 큰 성령을 작은 내가 무슨 수로 주냐 말이죠.
거기에다가 불 까정 원플러스 원으로 더 추가해서 말이죠.
하여튼 성경말씀은 가능한게 단 하나도 없어요
모조리 불가능한 소리만 하고
말 되는 소리가 단 하나도 없다 말이죠.
그런데 말되는 소리로 바꾸는 놈들은 재주도 좋아
무조건 돈으로 다 바꿔치기 할 정도니 말이죠.
돈만 바라보면 다 가능성으로 바뀌나봐 ~~~~
믿음이 너무 좋은거 아니냐 말이죠.
이런 삯꾼 목사들은 하여튼 이런 부분에 더 도가 티였다 말이죠.
악령을 받아서 그런거지 그들 본인들이 그런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는 겁니다.
불을 어떻게 다루냐 말이죠.
재가 되어야 할 판국인데 말입니다.
오히려 불에 의해 타버림을 당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진짜 정의는 곧 공의는
나에게 해석 당하는 공의가 아니라
나를 불태우는 공의이다는 겁니다.
어떤 나?
바로 원수 같은 나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사랑이냐 하면
사랑을 완성해서 사랑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신가 하면
그 앞에서
나는 원수로 들통나기 때문에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정의를 실천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러다 보니 예수가 가장 나쁜 놈이 되고 말았어요
모든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자가 예수가 되고 말았다 말이죠.
왜? 참람죄 이거든
그래서 죽였다 말이죠.
자 이렇게 모든 인간은 원수 임이 밝혀 진 겁니다.
사랑도 없지요.
오히려 사랑에게 말려들어서 원수로 밝혀진 겁니다.
공의도 없지요.
법을 말씀을 지키고자 더 나은 말씀을 죽이는 겁니다.
더 나은 말씀을 지킨 자를 죽인 겁니다.
법과 법의 틈 사이를 노려서
자신이 마치 법을 지킨 공의로운 자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죽였다 말이죠.
바로 이것이 다윗의 원수됨입니다.
뭐 ~~
율법으로 4배나 갚도록 하라고?
그 범죄자가 그 원수가 바로 너야 너 ~~~~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법과 법 사이의
말씀과 말씀 사이의 틈을 노린 다윗의 원수성을 까발리는
사랑을 펼치는 겁니다.
그 사랑 앞에서 원수로 들통난 다윗은
비로소 사랑과 정의가
인간 왕에게서 오는게 아니라
하늘에서 왔다 라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그래서 땅에서 믄 짓을 해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노래 부르고
막 살게 됩니다.
오로지 하늘의 용서로만 살게 되더라 말이죠.
그때부터 숨어있던 악마의 실체가 비로소 드러나는 겁니다.
이 감사로 이 용서로 사는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세력들 말입니다.
이 감사를 거부하고
감사를 훼방하는 원수 말입니다.
자 이렇게 됨으로써
이 원수는
다윗 개인의 원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다윗 본인도 원수로써 용서함을 받았으니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원수들은
이 다윗을 용서했다는 그 자비에 대한 거부이다는 겁니다.
이 베드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이 베드로를 용서한 십자가의 용서에 대한 적개심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개인의 원수가 아닌
하나님의 원수가 졸지에 그 내막을 들추어내고야 말았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는 악마의 세력을
예수님은 광야에서 세 번 시험받음으로써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원수 다윗을 용서했으면 용서한 거다 말이죠.
그런데 그것에 대한 힐문이요, 이유를 따지는 겁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죄값을 치렀고
단번에 죄 사했다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다른 정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용서만이 모든 기준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꾀냐 말이죠.
그런데 다른 이유로 따지고 힐문한다는 자체가
원수 다윗에 대한 것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흘리심에 대한 반기이다는 겁니다.
내가 죽도록 미운 다윗을 왜 용서하냐 라는 겁니다.
그것도 예수님 본인이 독생자로써 피 흘려 죽으시면서 까지 말이죠.
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냐 라는 겁니다.
나 한테는 안 그러면서 왜 저 미운 다윗에게는 왜 그러느냐 라는 겁니다.
자기 목숨까지 버리가면서 말이죠.
금가락지 살진소 새신발을 자기목숨을 팔아서 입히느냐 라는 겁니다.
이것이 악마의 발악입니다.
맏아들의 발악이다는 겁니다.
모든 마귀의 활동은 여기에 그 이유가 있는 겁니다.
이 이유
이 원인
이 잃어버린 원인을 복음은 고수하는 겁니다.
최근에 기독언론사이트에 청소년성추행 목사 사건땜에 간만에 들어갔는데
다른 기사에 이런 제목이 있더군요,
복음 사망
개콘에서 뭐뭐 해서 사망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었는데
복음이 사망할 리가 있겠습니까?
얼마나 사람에게 기대를 했으면 복음사망이라고 말하겠냐 말이죠.
본인들이 악마이면서 악마에게 기대를 걸다가 실망하게 되니
복음사망이라는 표현을 쓰는 겁니다.
정의를 갈급해 하면서 갈구했다는 티를 낸 거죠.
그러니 외식의 달인들이였지
정의를 갈급한 적도 없다니깐요.
정의를 진짜로 갈급해 한다면
아무 흠도 없는 나를
복음 잘 믿고 있고
말씀 잘 지키고 있고
내가 봐도 내가 기특하기 짝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다고 여기는 나를
한순간에 원수로 만드시는 그 사랑을 만나야
진짜 사랑이라면 나를 원수로 들통낼줄 아는 그게 진짜 사랑이기에
그 사랑을 만나야
정의가 실현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정의는 안 보고
자꾸 상상하면서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둥
사이버 세상에 타인만을 본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기대를 가진적처럼 남에게도 기대를 한다 말이죠.
그러니 그 상상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런 상상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허구의 세계에 빠져사는 겁니다.
즉 자기에게 빠져 살면서 자기에게서 못 벗어난다 말이죠.
이런 정신병자들이 세상도 아닌 한국교회 전체가 다 그렇다는 겁니다.
벌써 교회라는 환각 속에 갇혀 못 벗어나니 말입니다.
그렇게 성추행 당하고 강간당해도 또 가요 또가
다윗을 원수로 만들어 주고파서 일까요?
정작 가해자는 우리요 피해자는 예수님일 뿐인데!!
늘 예수님을 강간하더라 말이죠.
그것도 말씀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지킬 말씀이란 인간에게 없다니깐요.
지키면 지킬수록 말씀을 강간하고
예수님을 강간한다니깐
이렇게 자극적인 말을 해야 들을까 말까 할 정도인데
그래도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우기는 놈들 보면
그 눈빛들이 다 정신병자 같더라 말이죠.
피해자는 물론 없지마는
피해자든 가해자든
우리는 예수님의 피 용서로만 기뻐하지
말씀을 지켜서도 아니다는 겁니다.
왕의 취임식에서 선서를 한다고 해서 지킬 이 땅의 왕은 없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원수로써 그 원수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왕이다 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겁니다.
나 다윗 같은 이런 죄인도
이런 원수도 주님이 용서하십니까 라고
오냐 용서하마
이것이 복음이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복음사망이 어디있냐 말이죠.
참 다행스럽게도 교리 사망이겠지요.
방어막(교리)이 무너졌다고 슬퍼할게 아니라
도리어 기뻐해야지요.
나의 원수성이 이제 제대로 복음으로 인해서 들추어니까 말입니다.
쓸데 없이 교리를 붙잡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죠.
복음이 얼마나 든든한줄도 모르고 교리따위를 붙잡고 있으니 말이죠.
주여 당신 도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와 우짤래!!
그래서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로써 바울이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뭘해도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였다는 원수로 들통나는 겁니다.
무엇에 의해?
십자가의 사랑에 의해
자 그럼 우리는 이 정의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외치는 겁니다.
당신과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원수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삼일만에 다시 살리셔서 우리들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 주가 되게 하셨다
즉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말만 들으라
주의 말만 들으라 라는 것을
마귀는 제일 싫어한다는 겁니다.
이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만 외치면 되는 겁니다.
교회 확장
교인 가정의 축복
교리가 사망하지 않도록
그딴거 외칠 필요가 없이
단 하나만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 말이죠.
밝히 보이는 것은 십자가의 용서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만이 외치는 것이
아니 외치고는 못배길 정도로 또렷하다 말이죠.
원수를 이긴 왕의 십자가의 승리이다는 겁니다.
곧 나의 죄, 나의 원수됨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분은
예수님 뿐이기에
예수님 외에는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 말만 들으면 됩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만 원인 없는 이유 없는 사랑만 외치시니 말이죠.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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