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의 살과 피를 꺼내먹어요!! (시편 114편)
차돌에서 샘물을 꺼내먹어요!! 땅이여 너는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시 114:1, 개역)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시 114:2, 개역)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시 114:3, 개역)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시 114:4, 개역) 『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 같이 뛰었도다』
(시 114:5, 개역)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시 114:6, 개역) 『너희 산들아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 같이 뛰놂은 어찜인고』
(시 114:7, 개역)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시 114:8, 개역)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요 6:55, 개역)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56, 개역)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요 6:57, 개역)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요 6:58, 개역)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 6:59, 개역)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요 6:60, 개역)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1, 개역)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근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2, 개역)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요 6:63, 개역)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4, 개역)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요 6:65, 개역)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요 6:66, 개역)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 6:67, 개역)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요 6:69, 개역)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요 6:7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요 6:71, 개역)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차돌 바위가 무슨 냉장고 입니까? 정수기입니까? 샘물을 꺼내먹게???
사람이 무슨 요리 음식입니까? 사람을 먹으라니요? 살과 피를 꺼내먹게??
그런데 성경은 너무 너무 과격합니다.
왜냐하면 실상과 실상을 부딧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실상끼리 맞짱 뜨자는 식입니다.
당연히 허상과 그림자는 뒤로 물러나 배제되는 식입니다.
만약 인자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예수님)와 상관도 없을 뿐더러
천국도 못가는 지옥가는 자가 된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일방적인 선포가 어디있겠습니까? 여러분 ~~~~
아마 철학자들은 샤머니즘이라고 공격할 겁니다.
또 종교꾼(유대인)들은 이단이라고 공격할 겁니다.
결국 이단이 될까봐? 이질적인 존재가 될까봐? 왕따 당할까봐?
무리에서 이탈된 자가 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공격하는 겁니다.
이단이 되는게 문제가 아니라
이단이 아닌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제발 이단이 되자 말이죠.
그것도 이단 중의 이단이 되자 말이죠.
죄인 중의 괴수 말입니다.
충분히 이단 중의 이단이 안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인줄 모르는 겁니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지 않고
완악한 마음으로 정통이나 우려먹으면서 수건을 벗지 않는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바로 원수갚기요 한풀이 원한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를 한다 말이죠.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그런 원수갚기 한풀이는 성경에 없습니다.
인간의 믿음을 거부하시는 이유입니다.
오죽하면 선물이 아니면 안되는 겁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믿음은 원한을 풀어주고자 주는게 아니다 말이죠.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는 겁니다.
여지껏 정통이라고 우기는 것도 사실상 다 이단들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악의 뿌리이니까 말이죠.
(딤전 3:3, 개역)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딤전 6:10, 개역)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후 3:2, 개역)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히 13:5, 개역)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성경에서 돈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그 정도로 돈이 인간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성경 스스로가 인정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돈을 다루는게 아니라
돈이 사람을 가지고 노는 주체이다는 겁니다. 주인.
나는 정통교단에 속했다 라고 우겨본들 무슨 소용이냐 말이죠.
그 정통교단의 머리 위에 돈이 그들을 쥐락 펴락 하고 있는데 ~~~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못 섬긴다 라고
돈이라는 재물 자체를 하나님과 동격으로
성경 스스로가 인정하는 겁니다.
인간에게서의 돈을 하나님과 같은 위상에 있다고 성경은 보는 겁니다.
(마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 정도로 겸하여 섬기지 않는다는게 아니라
모든 인간은 결국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어딜 속일려고 드느냐 라는 거죠.
우리 속을 훤히 손바닥 보듯이 다 아신다 말이죠.
우물안의 사정을, 그 바닥이 어떤 바닥인지를 다 아신다 말이죠.
의도적으로 가두어 놓았는데 누가 벗어날 수 있느냐 라는 겁니다.
율법이 가입된 것이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듯이 말이죠.
결국 역사 속에서 정통이라고 우기는 것들도 돈에 다 넘어졌고
후발주자인 신흥세력도 결국 정통이 정통이라서 부러운게 아니라
돈을 사랑한 정통을 따라잡고서 나타나는 겁니다.
돈 많이 소유하는 것을 부러워해서 나타나는 신흥세력이다는 겁니다.
정통이라고 우기는 자들이 거렁뱅이 이고 상거지 이다면
전혀 전혀 관심조차도 없을 텐데 말이죠.
바로 오늘 정통이라고 우기는 종교집단과 다르게
그들이 절대로 외칠수 없는
외쳤다가는 돈 다 떨어지는 장사 말아먹는 외침을 복음은 외치는 겁니다.
복음은 유일하게 인자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꺼내 먹어요 ~~~ 라고 외치는 겁니다.
바위에서 샘물을 꺼내먹으라고 합니다.
항상 성경은 상대적인 의미가 없으면 이해하기 힘듭니다.
최고의 고리대업자 불의한 청지기 요셉이라고 하니까
그런 요셉을 따라할려는 자들이 있는데
따라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상대적인 자칭 빛의 자녀라고 우기는 자들의 상대적인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결국 종말때에 심판때에
그때만 불의한 청지기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막상 필요할때에 써먹을 수 없는 기능이다면
헛똑똑이였던 것이 들통나듯이
팔을 어긋맞게 해서
인간의 지혜와 믿음이 어리석었고 거짓임을 들통내고자
임의로 그 순간 우연히 세우는 의미로써의 불의한 청지기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따라할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한 불가능성의 의미인 겁니다.
그 불가능성이 덮치는 겁니다.
그러니 요셉의 고리대업은 오로지 7년 흉년을 대비하는 모습으로써 7년 풍년때 하는 특이성 이였던 겁니다.
그래서 불의함(십자가)이란 어디까지나 남을 살리기 위한 겁니다.
그 불의함이 종말때에 물에빠진 나를 살리겠다는 것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완악한 자세를 고수한다는 겁니다.
유대인은 나는 저 불의한 것에 의해 구원이라는 건짐을 받기 싫타 라는 거죠.
오로지 정결함으로 구원받고 싶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믿음으로써 원수갚기라는 적개심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신앙은 복수심입니다.
성화되겠다고 하는 것도 사실상 한풀이 원한풀기 원수갚기이다는 거죠.
그러다가 박살이 난 것이 바로 시아버지 유다 아니겠습니까?
너가 더럽다고 본 것이 니 보다 깨끗하다는 겁니다. 적어도 니 보다
그러니 너나 잘하세요 라는 거죠.
한마디로 남을 살리고자 너 때문에 대신 죄를 뒤짚어 썼다는 겁니다.
그 부조리 곧 거짓말 곧 부정성이 너를 건진다는 거죠.
나를 살리는 십자가라는 저주 이다는 겁니다.
나를 살리는 인자의 살과 피 이다는 겁니다.
이 인자의 살과 피를 냉장고에서 꺼내 먹듯이 초코렛처럼 꺼내먹으라 라는 겁니다.
나는 그 정도로 나쁜놈 아닙니다 라는 자는
이 거리끼는 이 십자가가 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는 거죠.
그러나 나야 말로 가망없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는 자는
이 인자의 살과 피를 감사함으로 꺼내먹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아주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불가능한 요청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불가능성 처럼
앞의 글에서 여자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음으로 구원이 된다는 것은
아이 낳으면 다 구원되는게 아니라
다말이 낳은 아이를 통해서
시아버지 유다는 요셉을 시험을 통과하는 겁니다.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희생제물로 삼음으로써 그 피로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여자 자기 혼자 딸랑 구원이 아니라, 아이 낳는게 구원의 조건이라는게 아니라,
주변인들을, 그 죽은자들을 살리는 구원자의 역할을 보여주더라 말이죠.
그러니 잉태치 못한 자는 바로 예수님이고
그 여인이 아이를 낳음으로써 그 아이가 담보물에 되는데 있어서
그 아이도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의 행동도 여기에 맞게 조건을 갖출려고 하면 안되는 겁니다.
그냥 이렇게 주님이 잉태치 못한 여인이 되셨고
주님이 그런 잉태치 못한 여인이 되어서 낳은 아이가 되셔가지고
그 요셉의 시험을 통과케 하는 그 십자가의 다이루심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숙제인냥 행동하겠다는 것은
곧 인간의 모든 행동은 복수심의 발로요 자기 원수에 대한 한풀이로써의 적개심이다는 겁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안 도와주면 같은 원수로 취급해서 적개심을 품겠다는 것이
인간의 모든 행동이자 믿음이다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그런식으로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대한 기특하기 짝이 없는 마음가짐에
예수님이 안도와준다고 살인의지를 불태워서 은 30냥에 팔아 넘긴 이유다 말이죠.
자 오늘 시편 114편에서 그렇게 인자의 살과 피를 꺼내먹은 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자를 통해서
이 인자의 살과 피를 꺼내먹은 자를 기준으로 해서
심판을 구체화 하시겠다는 것이 시편 114편입니다.
다윗언약이지요.
자 이렇게 심판을 구체화 하시겠다는 말은 동시에
구원을 구체화 하시겠다는 것이고,
이 심판과 구원이 구체화 되면
무엇이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도망치는 것들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참선지자들은 이 기준에 의해서
도망치는 것과 노래하는 것들을
이 대조적인 것을 두 패로 나누기 위해
넘기움을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성향을 좋아하고
미래를 꿈꾸며 행복을 소망하는 그 이스라엘 백성 한 가운데서
이런 것들이 아예 거부된 채로 이스라엘을 무조건 두 패로 나누어버리니
얼마나 삐닥하게 보겠냐 말이죠.
그러나 이것이 실상입니다.
도망치는 것과 찬양하는 것을 드러내는 구원 말이죠.
바벨론 포로 때에 거짓선지자들은 다 사라지고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찬양을 합니다.
다시 돌아온다고 표시해 두라고
잃어버린 자를 되찾는 이 십자가의 지혜가 펼쳐졌다고 좋아라 합니다.
그 전에 우리는 몰랐습니다.
인자의 살과 피는 우리가 싫어해서 오히려 멀리 멀리 두고자했었고
부자청년 처럼 등 돌려 떠나버릴려고 했다 말이죠.
우리도 귀히 여기지 않아서 극과 극으로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심판 속에서는 비로소
우리에게 가까이 했던 그렇게 애지중지 했던 모든 것들은 오히려 다 도망치고
오히려 내가 멀리했던 인자의 살과 피는 나를 맞이하러 가까이 다가와 나를 영접하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인자의 살과 피가
나는 그것을 먹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나쁜놈이 아니요
식인종도 아니요. 죄인도 아닌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할 줄 아는
성화 될려고 노력하는 자 이다 라고 우겨서
이 인자의 살과 피를 멀리했다 말이죠.
그렇게 멀리하고자 했던 그 사람이
오늘 시편 114편에 나온 이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해체시키고자 공중분해코자 기준으로 삼은
바로 다윗 이라는 자입니다.
다윗도 이 인자의 살과 피를 멀리했습니다.
나는 적어도 왕으로써 이스라엘 왕으로써
죄 지은 자에게 율법을 네 배나 갚으라 라고 판결을 내릴줄 아는
지극히 상식이 있는
지극히 양심이 살아 있는 자라고 여겼다 말이죠.
지극히 의를 추구할줄 아는 자라고 여겼다 말이죠. 시아버지 유다와 똑같습니다.
그러니 이 인자의 살과 피는 나 다윗과 상관이 없다고 봤다 말이죠.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더 이상 환자가 아니기에
인자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할 정도로
나쁜 놈 중에 나쁜놈이 아니다고
약골도 아니요 아주 아주 건강한자라고 자부했다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모든 인간들은 병자요 죄인이요 죽은자 라는 겁니다.
물에 빠진자이다는 겁니다. 누가 가서 건져주지 않으면 안되는 환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몸의 피를 완전하게 갈아버리지 않으면 다시 살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찢으셨다가 다시 꿰메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호 6: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새번역)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그 일에 걸려든 자가
그 사건에 말려든 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은 이제야
이스라엘 해체라는 심판기준이 되어서
참선지자들은 이 다윗의 고백을 기준으로 해서 해체순을 밟게 됩니다.
이사한다 말이죠. 이동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의문의 반복(번제와 제사)가 아닌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써 완료된 이스라엘의 이미완성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그러나 육의 이스라엘은
인자의 살과 피도 안 먹지요.
그 썩어빠진 땅에서 그대로 살겠다고 우기지요.
그래서 이동 시키는 겁니다.
바벨론으로 말이죠.
그리고 다시 되찾아서 예수 안으로 집어넣고자 말이지요.
여기서 유대인들은 끝까지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고서는
내가 저주한 저 예수의 살과 피를 먹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티는 자가 있는 겁니다.
그들의 눈에는 바로 이것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들이 거꾸로 귀히 여기는 그 땅과 바다 그리고 요단강이 멀리 멀리 도망치는 것을 못 보는 겁니다.
예수 그까잇꺼 죽이는데 십자가에 매달아서
나무에 달린 자 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으니 마땅히 죽여야지
그게 뭐가 힘드냐 라고 자신만만했다 말이죠.
그런데 정작 우리가 귀히 여기지 않았던 이 예수님(야곱의 하나님) 앞에
오히려 우리가 벌벌 떨고
이것 없으면 죽습니다. 못삽니다 라고 애지중지 했던
땅과 바다와 요단강이
오히려 우리는 하나도 벌벌 떤적 없이 마땅히 당당했었는데
땅과 바다와 요단강은 예수님 앞에서 벌벌벌 사시나무 떨 듯이 벌벌벌 떨고 있더라 말이죠.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니까
그 빛의 눈부심이 얼마나 심했으면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가 벌벌 떨면서
타죽을까봐 싶어서 여섯날개로 햋빛차단하듯이
철저하게 가리고자 발버둥도 이런 발버둥이 없을 정도로 벌벌 떨더라 말이죠.
그 정도로 구원사건은 두려움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뭔가 도망치는 존재들이 막 생기더라 말이죠.
(빌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는 예수님을 호구로 봤는데
거꾸로 돈 땅 바다 요단강 이런 것들을 갖추어야
사람 취급받고 인간의 가치를 높이고
그거 없으면 벌벌 떨었는데
이들 돈 땅 바다 요단강이 예수님이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도망을 친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서 살며 발을 디딜 곳이 어디며
마실 물은 어떻게 구할수 있으며
요단강을 건넌 선민이라는 자부심은 다 날라가버린 상태에서
곧 죽음의 사막인 광야에서 무슨 수로 사느냐 말이죠
사막 자체가 광야 자체가 살수 없는 땅인데
살기 좋은 땅은(애굽) 예수님을 보고서 도망쳐 버리고
바다는 예수님을 보고서 벌벌 떨고
요단강은 예수님을 보고서 여섯 날개를 꽁꽁 가리우고 있으니
이건 살라는 말인지! 죽으라는 소리인지?
우리가 산다 라는 조건에 맞았던 것이 도망쳐 버리면
남은 것은 이제 죽었구나 라는 조건에 맞는 것들만 남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실상이다는 겁니다.
모든 것의 바닥을 뜯어보니 둘째사망이라는 실상이 있다고 했지요.
이것을 다윗은 격었던 겁니다.
잃어버림을 격은 겁니다.
그 놈을 당장 능지처참하여 율법의 4배나 갚도록 하여라 ~~~~
니가 그놈이야 라고 나단선지자가 외친 말에 한방 맞아 띵 해지니까
실상을 보게 된 겁니다.
한꺼플 벗겨 바닥을 뜯어보니
아니 뜯김을 당하게 되니
왜 이런 실상을 정작 못 보고
내가 그 놈인데
난 그놈이 아니야 라고 살아왔다는
난 그놈이 아니야 라고 나를 가려주던 돈 땅 바다 요단강이 다 도망쳐 버리니까
혼자 남아서 빨가벗겨진 채로 예수님과 독대케 되었다 말이죠.
나를 가려주던 무화과나뭇잎은 어디로 갔냐 말이죠?
그 어설프기 짝이 없는 무화과 나뭇잎이 가려줌으로써
의기 양양했던 모든 것들이
졸지에 후 부니까 날라가 버려서
나의 수치가 홀라당 다 벗겨져 들통이 났을때에
누가 나를 가려주겠냐 말이죠.
최순실 도대체 어디갔냐 말이죠 ~~~~
네가 만약 외로울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 여러분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너의 눈물이 되리 ~~~ 여러분
이라고 외치던 그 땅과 바다와 요단강이 위로는커녕 눈물이 되어주기는커녕
다 도망쳐 버리더라 말이죠.
거짓선지자들이 그렇게 사람의 편에 서서 인간의 편에서 인간을 좋게하는 소리를 그렇게 해놓구서는
절대로 망할리가 없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라고
저 삐딱한 부정한 소리만 하는 참선지자 보다
우리의 편에서 좋은 소리만 하는 거짓선지자가 다 도망쳐 버리더라 말이죠.
순실아 어디갔니 ~~~
땅과 바다와 요단강 오뎅끼 데스까 여러분 어디 가셨나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너, 땅과 바다와 요단강입니다.
이제 난 누구의 가슴에 안겨서 아픔을 얘기해야 하는가 너무 힘들다고 말하고 싶지만 들어줄 너는 없는데
나 애굽 땅에서 나왔고 (땅이 벌벌 떨었고)
나 홍해 바다를 건넜고 (바다가 도망쳤으며)
나 요단강을 건너온 (요단강이 물러났으며)
나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 맞잖아 라는 것이
나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 충분하잖아 라는 것이
도망쳐 버리는 겁니다.
예수님 앞에서 벌벌벌 떨면서 어디로 도망을 쳤는지 사라지고 없다 말이죠.
오히려 그런 경험들이 오히려 수건을 벗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예수님의 살과 피 라는 실상을 먹는데 있어서
그림자인 주제에 물러나지 않고
버티고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고
도망치지 않는 겁니다.
도망쳐야 할 것은 도망치지 않고
벗겨져야 하는데 안 벗겨지고
정작 실상을 먹어야 함에도 먹지 않고
마이다스 손이라는 동화에 나오는 마이다스 왕처럼
먹지 않고 굶어 죽는 겁니다.
만지는 것 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되니 복의 사람이 된줄
세가지 메시아 조건에 맞아 복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저주인줄 모르는 겁니다.
최순실 사건 보세요
자기가 자기를 찌르는 것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상징계(법)에서 벗어날수가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이디푸스에서 못 벗어나요 자기가 자기 눈을 찌르는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드는 법의 세계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그림자는 도망치고
실상인 인자의 살과 피가 등장했다면
우리는 이 인자의 살과 피를 꺼내먹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말이죠.
심판에서 말이죠.
출애굽할때에 괜히 유월절 어린양을 급히 먹어라, 허리에 띠 띠고 먹어라, 신발 신고 먹은게 아닙니다.
이 유월절 어린양을 광야에서 반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 만한 곳만 골라서 가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의미를 무한반복하고자 말이죠.
그래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자 이제 다윗때는 광야에서 벗어나 이미 정착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에게 다윗은 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 발림 사건을 반복하는 겁니다.
다윗 자체가 성전이 되었기에
다윗 자체가 하나님의 영토이기 때문에
그 거룩성 곧 차이성 때문에
매일 매일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성소인 겁니다.
주의 거하시는 집이다는 겁니다. (다윗의 가문)
사람의 손으로 성전 지을 생각하지 말고
너 자체를 성소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괜히 성전 지은 것이 너 자체를 성소만든분과의 충돌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 성전을 헐라 ~~~
(요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다윗이 그래서 완악한 수건이 벗겨진 겁니다.
주님이 다시 3일만에 세운 성전 때문에 말이죠.
나는 율법의 4배나 갚아야 할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이기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이스라엘 왕이기는커녕
도둑놈 중에 상도둑놈이고
살인자 중에 1급 살인자 임을
모친의 태중에서 마땅히 백번 만번 죽었 었었었었었어야 할 자였다는 것을
3일 만에 다시 세운 성전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인자의 살과 피를 제발 먹게 해 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나 같은 이런 나쁜놈도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다시 살아났다고
너도 묵으라꼬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이 권하는 노래
예수님의 살과 피를 꺼내 먹어요 ~~~~
과연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 되는데
나 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데 ~~~~
다윗을 보세요
누구의 운명을 복선으로 미리 깔아놓은 운명 같지 않냐 말이죠.
나의 과거도 미래도 다 사라지고
내가 저질렀던 죄도
좋았던 과거의 소중히 여겼던 추억도
모조리 다 사라지는데
오로지 남은 것은 주님의 살과 피 밖에 없는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뿐이데
과연 먹을 수 있겠습니까?
아침에는 되찾고 밤에는 잃어버림을 당하고 또 다시 아침에는 되찾고 저녁에는 잃어버리는
이 십자가 사건을 무한 반복하는데 ~~~
오로지 피훌리심만 남기고자 말이죠.
당연히 미련이 남고 아직까지 배부르면 먹을수 없겠지요.
그래서 탈탈탈 털리도록 빈주머니로 만드는 겁니다.
빈 공간에서 배 고파봐야 인자의 살과 피를 먹을테니 말이죠.
그 완악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자들이 유대인들 아닙니까?
참 아이러니 한 것은
무신자가 제일 많은 민족이 역설적이게도 유대민족입니다.
그렇다고 신앙 있는 자는 그러면 옳으냐?
그 역시나 완악한 마음으로써 할례치 않은
수건을 벗지 않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를 거부한채
손할례만을 주장한다 말이죠.
재미있는 다큐를 봤는데
유대인 여성이 이스라엘 땅 통곡의 벽에서 자기들도 기도하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수 있도록 해 달라고
지금까지 법적인 투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보니 그동안 봐왔던 통곡의 벽에서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여성을 못 봤다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겨우 겨우 법의 승낙을 받아서 여성이 기도를 하는데
남자 와 여자의 구분을 짖는 칸막이를 설치해 놓고서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하더라 말이죠.
그 모습을 보니 참 유대인들 보면 사단의 회가 따로 없다 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오늘날 한국교회 조차도 이들을 따라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말이죠.
유교 보다 몇백배나 강한 규례들로 자기들 몸에 칭칭 감았다 말이죠.
저 통곡의 벽을 확 허물어 버려야 하는데 말이죠.
강도의 소굴이 따로 없다 말이죠.
기도하는 것 조차도 관광사업이라서 수입이 되니까 하는 겁니다.
배 고파 보세요 통곡의 벽에 아무도 안 옵니다.
다 배부르니까 통곡의 벽에 가는 겁니다.
임금 삼는 이유는 요나의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불러서 임금삼는거다 말이죠.
예수님이 도망쳐도 막 따라와서 기여이 따라잡는다 말이죠.
그들을 등 돌리게 하는 것이 바로 인자의 살과 피 입니다.
(요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 6:26,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여성이 오히려 그 똥떵어리에 안가는 것을 좋아라 해야 할 판국인데
유대여성은 남녀 불평등이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어디 유대인 뿐이겠습니까?
모든 종교가 다 그러합니다.
완악하기 짝이 없는 사단의 회입니다.
성질이 괘퍅해서 완악이 아니라
수건을 벗지 않는 고집 때문이다는 겁니다.
사라질 영광이 자신의 가치를 높여주기 때문에
모세가 얼굴의 광채로 인해 수건을 벗지 않은 겁니다.
나의 가치를 높여주는 이 광채를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심뽀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행동은 복수심이요 적개심인 겁니다.
인간의 믿음도 복수심이다는 거죠.
인간 그 자체의 모든 활동이나
모든 인간의 종교는 사단의 회인 것이 드러나더라 말이죠.
쓸데없이 칸막이 치고서 자신의 완악함을 자랑이나 하고서 말이죠.
똥떵어리 바른게 그렇게 자랑 스러울까 말이죠?
대한민국의 돈이란 돈은 다 먹었다고 자부하던 최씨 일가가
한 방에 훅 가는 겁니다.
그네 언니 몸에 빨때를 꼿아서 마음껏 빨아 먹었다 말이죠. 흡혈귀가 따로 없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단물 빨아 먹듯이 나의 가치를 높여주는 자를 뽑아먹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땅도 바다도 요단강도 벌벌 떨어 도망치는 몸이 아닌
엉뚱한 자의 몸에 빨때를 꼿았다 말이죠.
예수님의 몸에 빨때를 꼿아야 하는데 말이죠.
뭐 ~~~~~~ 우리가 뭐 식인종이냐? 왜 너는 삐딱한 부정적인 소리만 하냐?
나는 흡혈귀가 아니무이다?
나는 식인종이 아니무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왔던 자들에게
인자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소리를 듣고서는 다 등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나를 위한 긍정적인 기적은 등 돌릴 이유가 없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그 삐딱한 소리는
아무리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했던 자들도 다 등돌리고 돌아서도록 만드시는
나를 위한 긍정적인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삐딱한 부정적인 것이다 말이죠.
심판 속에 안들어가 보니까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등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복음은 인자의 살과 피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온 자들에게 등돌리고 돌아서게 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이 인자의 살과 피 앞에서
졸지에 기적이 도망을 쳐 버리는 겁니다.
땅과 바다와 요단강이 다 도망을 치는 겁니다.
벌벌 떨면서 말이죠.
진짜로 벌벌 떨어야 할 나는
무엇을 보고 벌벌 떨어야 합니까?
율법의 4배나 갚으라 라고 외치는 나의 당당한 모습을 못되는 것을 보고?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는 나의 모습?
그것은 냄새나는 썩은 것들입니다.
썩은 동앗줄에 빨때를 꼿아서 뭐하게요?
똑같은 얼음공주가 되고 싶어서?
도망치는 땅과 바다와 요단강이 되고 싶어서?
여기에 상대적으로 도망치지 않고 기뻐 뛰노는 것들이 있습니다.
(시 114:3, 개역)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시 114:4, 개역) 『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 같이 뛰었도다』
(시 114:5, 개역)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시 114:6, 개역) 『너희 산들아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 같이 뛰놂은 어찜인고』
산들과 작은 산들이 수양처럼 어린양처럼 기뻐 뛰 논다 말이죠.
노아때에 홍수가 내려 땅과 바다와 요단강이 다 잠겨버리니까 다 물러가고 도망쳐 버리더라 말이죠.
그러나 산들과 작은산들은 출렁이는 물결에 의해서 수양처럼 어린양처럼 뛰 놀더라 말이죠.
그 정도로 심판도 확실한 심판일 뿐만 아니라
구원도 기쁘기 짝이 없는 명료하고 밝히 보이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벌어졌었고
바벨론에서도 벌어졌었다 말이죠.
이것을 무한반복하는 곧 심판과 구원을 무한반복으로써의 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누가? 부르짖는 자 다윗이 말이죠.
이 다윗의 노래에, 다윗의 부르짖음에 예수님은 응답하시는 겁니다.
참선지자는 이 다윗의 부르짖음의 노선에서 활동하는 겁니다.
(시 114:1, 새번역)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야곱의 집안이 다른 언어를 쓰는 민족에게서 떠나올 때에,』
(시 114:2, 새번역) 『유다는 주님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니 어설프기 짝이 없는 손할례로 할례했다고 우기지 말라는 겁니다.
유다 스스로가 나는 주님의 성소가 될 거야 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바벨론 포로로 잃어버린자 되었다가
다시 귀한으로 되찾은 바 되었을때에
이런 거시적인 할례
마음판의 할례 앞에서 되도 않는 손할례로 자기가 자기를 손대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라왔어도
인자의 살과 피 앞에서는 도망치는 것과 뭐가 다르냐 말이죠.
주님이 직접 나를 성소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내가 성소되고자 조건 갖추기 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직접 나를 예수님 자신의 영토로 삼겠다는 겁니다.
지배하고 다스리고 충만케 하겠다는 겁니다.
그 속에 다윗은 놓여지게 됨을 당함으로써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곱하기 3번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 또한 상대적입니까?
누고 보랍시고?
우리가 못 보는 존재
늘 우리는 그거 없이는 못산다고 우겼는데
정작 주의 살과 피를 먹게 되니
그것이 제일 먼저 도망치더라 말이죠?
누구 입니까? 마귀죠.
유대인들은 마귀에게 잠식 당해서
예수님을 세가지로 유혹합니다.
돌을 떡덩이 되게 하라 즉 경제문제 돈 문제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천사가 두손으로 받쳐 상하지 않게 하라 즉 종교문제 사랑받는 자
복받는 자 구원된 선민으로 만들어라
온 찬하 만국을 다 주겠으니 절하라 즉 정치 문제 나에게 반항하는 자 없도록 무릎꿇게 하는
권력을 달라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달라 라는 겁니다.
유대인은 모든 인간의 대표성이다 말이죠.
무슨 수로 이 세가지의 완악한 수건을 벗을 수 있겠냐 말이죠.
하나라도 부족하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 인데
죽는 것으로 끝나면 참 좋겠지만
저주를 받았다는 둥 그것으로 가족까지 함께 다 몰아가는데
무슨 수로 이런 판대기를 엎을수 있겠냐 말이죠.
모든 인간은 이렇게 마귀에게 잠식되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마귀를 상대로써 일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런 마귀에게 잠식 당한 우리에게
주님의 살과 피를 꺼내먹으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등돌리고 멀리해서 도망칠꺼냐 말이죠.
그렇게도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는 잘도 잘도 따라와 놓고서 말이죠.
왜 제자들 너희들도 가지 왜 남았으냐?
복음은 우리를 등 떠멀어 버립니다.
그 정도로 자신만만 하다는 겁니다.
복음이 말이죠.
주님의 살과 피가 말이죠.
아쉬울게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다 도망쳐 멀리 가버려라
나는 하나 아쉬울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왜 이 주님의 살과 피를 싫어하는고 하니
물론 마귀 때문인데
마귀가 이런 것을 심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땅과 바다와 요단강이 벌벌 떨면서 도망치는 모습을 절대 추호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벌써 왔느냐 라고 무덤가에 사는 귀신들린 청년에게서 귀신들이 외치는 소리에
예수님은 돼지떼 속으로 집어넣자 집단으로 물속으로 들어가 떼죽음을 보여주니까
당연히 땅과 바다와 요단강 없이는 못산다고 벌벌 떨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쫏아내버리는 겁니다.
(마 8:30, 개역)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마 8:31, 개역)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마 8:32, 개역)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마 8:33, 개역)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마 8:34, 개역)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예수님을 못 보도록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참선지자도 그렇게 하고
마귀도 실상을 못 보도록 했다 말이죠.
그럼 누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수 있느냐 말이죠.
간따나 불가능한데 더 더 더 불가능하도록 이중중첩으로 첩첩으로 불가능하게 했으니 말이죠.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는 겁니다.
너의 밑바닥을 뜯어보라 말이죠.
실상이 드러나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마귀에게 잠식 당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런 애굽에 포로된 자를
어떻게 구원사건을 벌리셨는지를 보라 라는 겁니다.
다윗은 출애굽의 구원사건을 다시 제발 벌려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교회 안에서 출애굽을 부르짖는다 말이죠. 다윗이 말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매일 매일 두 조각이 나는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과연 그것을 교회가 원할까요? 아니면 그런 요청기도를 하는 다윗을 쫏아낼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쫏겨나고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건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만 살수 있다고
다시 십자가 사건을 벌려달라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허상이 아닌
실상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기뻐하는 자가 바로 진짜 교회이다는 거죠.
즉 상대적인 가짜교회를 염두해서 대비된 의미로서 말입니다.
땅 곧 애굽 땅도 벌벌 떨고
바다 곧 홍해도 도망치고
요단강 곧 물을 물러나도록 하게 하는
나를 성전 삼으신
나를 영토 삼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다시 매일 매일 터트려 달라고 말이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그의 머리를 드시는 사건
그의 구원의 뿔을 드셔서
모든 허상들을 구멍을 뻥뻥 뚫어버리는
오로지 실상만 보게 하는
이 십자가의 살과 피 라는 실상만 보게 해달라고
다윗처럼 이 시편 114편 노래를 꺼내먹어요.
다윗처럼 이 인자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도록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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