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의 이름에 영광 돌리소서 (시편 115편)
(시 115:1, 개역)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옵소서』
(시 115:2, 개역)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시 115:3, 개역)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 115:4, 개역)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시 115:5, 개역)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시 115:6, 개역)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시 115:7, 개역)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시 115:8, 개역)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 115:9, 개역)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 115:10, 개역)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 115:11, 개역)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시 115:12, 개역)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시 115:13, 개역)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 115:14,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시 115:15, 개역)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시 115:16, 개역)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시 115:17, 개역)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시 115:18, 개역)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뭐뭐 ~~ 아니요, 뭐뭐 ~~ 옳습니다. 라는 표현들이 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시는 이유는
비언약을 거쳐서
그것 아니고, 이겁니다 라고
그 차이성을 강조하는 겁니다.
비언약 아니요 언약이 옳습니다 라고 말이죠.
물론 여기에 전제가 깔린 것은
대부분 뭐뭐 아니다 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맞다 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뭐뭐 아니다 라고 언급하시는 이유입니다.
즉 우리 자신이 이 뭐 뭐 아니오 에 다 속했기에 거기에 빼내시고 구출하시겠다는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은 자이기에 그 차이로 그 속에서 빼내시고자 함이다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뭐뭐 아니요 뭐뭐 이겁니다. 라고 하면
이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서로의 소욕이 달라서 위협적인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오죽하면 그거 아니다 라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말씀하시냐 말이죠.
그리고 기여이 빼내겠다는 겁니다.
빼내주심으로 인해 빠져나온자리에서 보니 그 이전의 자리가 지옥이였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즉 누가 하나 죽어야 할 정도이다는 거죠.
충돌이 되는 겁니다. 곧 전쟁이지요. 평화란 없게 되는 겁니다.
누가 하나 끝장이 나야 끝나는 겁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목숨을 걸었다면
우리도 목숨이 걸릴 정도의 상황에 놓여지는 겁니다.
맞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반복입니다.
그럼 오늘 영광을 주의 이름에 돌리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뭐뭐 에게는 돌리지 말라 라는 겁니다.
거기에 해당되는 것은
우리에게 돌리지 말라 라고 나오기도 하고요
또 우상에게 돌리지 말라 라고 나옵니다.
방금 위에서 언급했듯이
즉 우리에게 돌리고 있다가 대세이고
우상에게 돌리고 있다가 대세이기에
이것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곧 죽음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만약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우상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저들은 죽여버리겠다는 것이 공론화 될 정도로 사회를 구성해 놓았다는 겁니다.
남들이 예 할 때 혼자 아니요 라고 외치면
흐름을 깨뜨리고 소통이 단절이 되고
소동이 발생케 되는 겁니다.
사회를 구성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 마다 소동이 발생하는 이유는
모두가 같은 흐름 속에서 있는데
혼자 딸랑 그 흐름을 따르지 않고
모두가 같은 시선으로 소통하는 가운데
혼자 딸랑 그 소통을 단절 시키고
모두가 평화롭게 서로가 지내는 가운데
혼자 딸랑 소동을 일으켜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어지럽게 만드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눈에는 모조리 우상이요 엉뚱한 곳에 영광을 돌리고 있음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내막이 드러나기를
그 흐름과 고요함과 소통을 주도하고 있는 바리새인과의 충돌을 통해서
왜 이들과 소통이 안되고
흐름을 단절 시키고
평화를 깨뜨리는 사건들을 통해서 그 차이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리새인은 우상숭배자이다는 거죠.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인간의 손에 놀아나는 하나님
마치 여행가면 조그마한 신의 조각품처럼 다루어지는 그런 하나님
제가 통곡의 벽에 유대인 여성들도 기도할수 있게 해 달라고 여성권위를 대변하는 다큐를 보면서
바로 그런 것이 인간의 손에 놀아나는 하나님이다는 거죠.
장난감처럼 말입니다.
수공예품 관광상품
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더라 말이죠
이것은 놀랍게도 이방나라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우상을 배격하는 이스라엘 보고 외치는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절대로 우상조각 하나 세우지 않는
천주교의 마리아상을 비판하면서
그 어떤 우상조각하나 만들지 않는 개신교 교회 보고 하는 소리와 같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오히려 우상숭배하는 이방나라 사람들 보다 더 심하니까 말이죠.
물론 겉으로는 완벽하게 우상 타파 하지요
당연합니다.
자 우상 타파하고 우상 조각 다 부서버리는 자이면
우상숭배자가 아닐까요?
(시 115:4, 개역)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시 115:5, 개역)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시 115:6, 개역)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시 115:7, 개역)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시 115:8, 개역)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그것을 예수님이 기가막히게 지적하시는 겁니다.
우상숭배자는 딴게 아니라
예수님과 연결 되지 않는 자가 모조리 다 우상숭배자이다는 겁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입으로 말하셨고
문둥병자 만지시고
물위를 발로 걸으시고
포도주를 먹고 마시고
오죽하면 바리새인들이 별명을 붙여줄 정도이다 말이죠.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하늘 위에만 그냥 그대로 있기를 바랬지
직접 내려오시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이 들통이 나는 겁니다.
이것이 그들이 우상숭배자인 이유입니다.
아니 구름타고 오신다메? 이 예언된 문자를 소유했는데
그것을 비켜서 와 버리니까
아무도 영접못하게끔 짐승 밥통에서 태어나면
구름타고 와버리면 모두다 영접하고
어떤 이도 반발하는 자가 없는데
짐슴 밥통에서 오시면 반발하는 세력을 의도적으로 들추어내시는 방식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물론 이 시편 뒤에 선지서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공중분해 해체된 이후에
묵시문학이 발달이 되다 보니
누가 내려온다는 예언 때문에
급히 수정해서 그 분이 이 땅에 온다는 그 문자를 다시 신체에 박아버리기 시작했지만
사실상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해체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원치 않았다 말이죠.
그래야 자신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고
하나님 따위는 성막이나 성전에 가두어서
늙은 노인네 취급하듯이
이레에 한 번 손에 돈 쥐여주면
송아지 잡아서 제물 바쳐주면
마치 돼지코에 오만원짜리 몇장 박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그 지위를 누리면 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졸지에 주는 것 안 받아먹고 직접 내려와 버리면
골치아픈 것이 제사제도가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말이죠.
이 제사제도만으로도 자신들의 위상을 유지할수 있는데
직접 내려와 버리면 쓸데 없어진다 말이죠.
동시에 자신의 가치도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못드리면 뭐 먹고 사냐 말이죠.
직업이 날라가 백수가 되는데
즉 가인이 제사드리면 그 제사 받고 떨어져라 말이죠.
제사때에 거지 밥 주듯이 주는
제물 바치면 된다 말이죠.
이렇게 편하고 편한 제사제도가 있는데
졸지에 직접 내려와버리면
제사제도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말이죠.
바로 이것이 직접 내려오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자들에게서는 사랑은 그야말로 골칫덩어리가 되는 겁니다.
스캔들은 법의 위상 보다 더 위에 있으니
법으로는 다스릴수가 없다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우상이란 인간 쪽에서 법 지키듯이 자꾸 바치고 드리고 주는 겁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사랑은 그 반대입니다.
주님 쪽에서 직접 내려와서
뭘 주시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라 라고 말이죠.
법 지키는 자들은 다 도망쳐 버릴 정도입니다.
왜? 우상숭배자임이 탄로가 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이 있다는 것이고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만지고 발로 이동하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같이 먹고 마시고 한다는 겁니다.
결국 제사와 번제의 정반대인 인애와 자비이다는 겁니다.
직접 내려오실 정도로 소통하고 만지고 함께 먹고 대화하고 한다 말이죠.
이 직접 내려온 분이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우상을 타파했다는 그것을 과시할줄만 알았지
그것으로 인정받고 그것으로 명분을 세웠는데
예수님 앞에서는 모조리 다 우상숭배자로 들통이 난 겁니다.
사랑이 없기는 매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사랑이 없으면 우상입니다. 쇼윈도우 부부이다 말이죠.
전남편 율법과 이혼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죠.
자본주의의 원리를 보면 이와 똑같은 상황인 겁니다.
예로 안식일날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버립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식일 지키기 라는 우상숭배자들은
졸지에 안식일날 헌금 들어오는 장사를 망쳐버린다고
안식일날만 골라서 병고치시는 예수님을 가만히 두고 볼수가 없다 말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성수예배라고 주일지키라고 협박공갈치는 목사들이 억수로 많아요
제가 아는 젊은 분이 직장에서 주일까지 회사에 나오라고 하다 보니
어쩔수 없이 자주 주일을 빠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젊은 부목사가 그런 회사 때려치우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 젊은 목사는 제도권의 위의 지도자들에게 보고 배운 것으로 가르치더라 말이죠.
얼마나 무지 하냐 말이죠.
왜 그럼 너는 주일날 왜 일하느냐 말이죠.
너도 주일날 일하지 않고 그 교회회사 때려치워라 말이죠.
우상숭배 안한다고 난리 치는 놈들이다 말이죠.
이슬람 근본주의가 자본주의를 타도하자 라고 구호를 외치지만
정작 자본주의의 본부가 그 이슬람 근본주의 지도자들이 되는 겁니다.
우상숭배 본부가
사단의 왕좌인 본부가
우상타파 라고 외치는 정의사제를 외치는 자들이 본부이다 말이죠.
바로 그런 자들에게서 우상 보다 더 우상적인
이단 보다 더 이단적이지 못하면
그들의 가면의 뒤를 못 본다 말이죠.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는 방향성을 우상 타도 라고 정해줍니다.
그 명령어 자체가
이미 우상숭배를 타도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우상숭배자가 되도록
아예 우상본부가 되도록 한다 말이죠.
그 수뇌부들이 그렇게 모인 자본으로 자본주의자들보다 더 자본주의를 추구하게 된다 말이죠.
유대인들이 우상타파로 결속해서 하나의 이념으로 뭉치게 되었는데
그래서 모은 그 전리품이 그 잉여품이 이들 지도자들에게 침투하게 되니
백날 백성들이 우상타파 하면서 이방나라와 전쟁을 해서 우상의 손모가지 발모가지 목모가지 백날 짤라본들
이스라엘 수뇌부들은 정작 우상숭배에 빠져있다 말이죠.
솔로몬 왕도 그랬다 말이죠.
구약 이스라엘 역사가 그러합니다.
우상을 타파하면 할수록 정작 수뇌부들이 이 우상숭배에 빠져 더욱더 집착토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개혁 혁신을 외치면 외칠수록
대통령은 더더욱 무당을 찾는다 말이죠.
바로 이런 것들이 우상숭배이다는 겁니다.
의문의 것을 반복하는 것 말입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의 이조를 하고
이런 것들을 내세운다는 자체가
과거의 산물이고 의문의 것이며
누군가는 희생을 치렀기에 나올수 있는 배부른 소리이다는 거죠.
남들은 세상풍파에 시달려서 십의 이조 할 여유가 없어요
십의 일도 못하는 판국에 십의 이조는 무슨수로 말이죠.
결국 십의 이조를 할 정도였다면
강한 십의 이조는 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이다 말이죠.
뒤로 누구 돈 훔치고 희생물로 삼았다는 것이 된다 말이죠.
이레에 두 번 금식할 정도면 정말 정말 배부른 놈 아니냐 말이죠.
정말 정말 두 번 금식이 배고픈게 아니라
배불러 터져서 금식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증거이거든요.
그러니 이들에게 오히려 세상풍파에 시달려 사는 자들이
우상숭배자로 몰리고
신앙생활 똑바로 하지 않는다고 정죄 당하고 있다 말이죠.
정죄하는 위치에 서 있는 자들이 정작 우상숭배자인데 말이죠.
이런 역설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 그래서 직접 내려오시니까
입으로 말을 하시고
발로 걷고 손으로 만지고 하니까
그 역설적인 모습의 실체가 드러나더라 말이죠.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대표적인 자가 사도바울이지요.
강력한 다짐을 한 사람은 다 해당됩니다.
율법 네 배나 갚으라(다윗)
절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죽으시는 곳에 같이 죽겠습니다(베드로)
이단 타파, 우상 타파의 최전방에 나서서
예수쟁이 다 몰아 죽이겠다고 나서다가
본인이 정작 입도 없고 눈도 없고 손도 없고 발도 없는 자였음이 들통나더라 말이죠.
우상숭배자였다는 사단의 회 였다 말이죠.
자기가 막 움직이니까 살아 있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에게 꽝 하고 부딧히게 되니까
입이고 뭐고 다 날라가 버리더라 말이죠.
당신 누구요??????
나는 니가 핍박하는 말씀이다.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결국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이 말씀에 꽝 하고 부딧혀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가 찔려 쪼개어지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즉 자신이 우상임을 들통내는 좌우의 날선 예리한 검을 만났다는 거죠.
그러니 우상숭배가 단순히 돌삐로 나무조각으로 만든 것에 절하지 않고
그런 것 부수었다고 우상타파가 아니라
그것은 과거의 행위일 뿐이다 말이죠.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물리쳤습니다. 하늘에서 마귀가 떨어져요 ~~~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썩 물러가라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앞의 글 계시록 버가모교회에서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 버가모 교회를 아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즉 운동력이 있는 것은 주님과 주님의 오른팔에 있는 버가모 교회이고
그 나머지는 모조리 사단의 왕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사단의 자리에 버가모 교회를 투입 안하실 이유가 없는 거죠.
좌우의 날선 검을 왜 가지셨겠습니까?
써 먹을려고
운동력이 있음을 보여주실려고 말이죠.
이것이 또렷한 바요
그 외에는 흐릿하고 모호한 의문의 반복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미래를 만나야 해요
시간이 아니라
인물입니다. 미래완료의 인물을 만나 꽝 하고 부딧혔을때에
이 관계성을 우상 아닌 하나님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만 사람에게 영광돌리지 않고
주의 이름에
이 이름에 영광돌린다 말이죠.
계시록에 나오는 24장로처럼 면류관을 도로 반납한다 말이죠.
그 얼마나 영광스러우냐 말이죠.
부자청년이 왜 반납을 하지 못할까요?
주신이도 여호와요 취할이도 여호와이니
나는 허상이고 주님이 실상이니까 반납하는데
졸지에 어릴적부터 지켜온 율법 지킴이 졸지에 우상숭배가 되니까
자신의 허상을 보게하는 율법의 취지를 정작 놓쳐버린거다 말이죠.
24 장로는
인물을 만나 버렸기 때문에 영광을 반납하는데
부자청년은 아무리 쳐다봐도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킨 나 밖에 없는 겁니다.
외부인이 보일수가 없어요.
오로지 우상 밖에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교회마저도
그런 교회에 다닌다고 우기는 나 자신 마저도
우상으로 허구로 봐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 앞에서는 다 허구이니
영광을 나에게 돌릴 이유가 전혀 없다 말이죠.
오로지 주의 이름에 돌리는 것이 또렷하기 때문에 마땅하고
허구는 의문의 반복일 뿐이니 허상에게 돌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마침 재원씨가 질문을 했는데
마귀는 자신의 확정된 심판을 아는데
그 미래 말고
시간과 역사 속에서 벌어질 일들을 아느냐 라고 물었는데
제가 모른다고 했습니다.
미래나 앎은 인물과의 관련된 관계개념이다 말이죠.
알았다 칩시다. 그러나 속 알맹이는 역시나 모르는 겁니다.
우상은 겉모양은 완벽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속은 전혀 모르는 소외된 입장이다 말이죠.
그러니 광명한 천사이지요.
안식일 지키기 라는 껍데기는 완벽할 정도입니다.
물론 그래봤자 엉터리이지만
그런 그 엉터리는 실상이 오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다 속아넘어갈 정도로 위협적입니다.
그런데 안식의 주인이 속 알맹이를 외치니까
이 안식일 지키기의 달인들이 껍데기였다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즉 안식일 지키기가 우상숭배자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는 것이
안식의 주인이
곧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 좌우의 날선 검으로 찔러 쪼개어 보니
땅콩 껍데기는 무지 무지 좋은데
까보니까
완전 썩었고 알맹이는 없는 빈껍데기였다는 거죠.
땅콩 까서 먹다가 그런 것을 보면 얼마나 우리가 우상숭배자인지를 ~~~
우리의 모습을 지적해 주는 것을 보게 된다 말이죠.
왜? 우리는 영광을 자꾸 우리 자신에게 돌리고프기 때문입니다.
실상이 안보이기 때문에
우상만 주변에 깔려 있기에 말이죠.
그래서 죽음으로 다가오는 사건이 벌어져야만 하는 겁니다.
실상을 보라는 거죠.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실상인 부활로써의 십자가의 죽음이
또렷한 실상이니 말이죠.
내가 살아있고 그 살아있는 나에게 영광을 돌리고픈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한 우상을 자기투사로써 영광돌리고픈
이런 당연하고도 세상의 이치에
정반대가 되는 그건 허상이라고
죽은 것이라고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이 또렷한 현실이라고 영광을 돌리겠다는 겁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십자가의 죽음
주의 이름
존재도 아닌데 이름 뿐인데
정작 우상이라는 존재 앞에 모든 것을 다 빼주는
간 쓸개 다 빼주어서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에
허구 보다 더 허구 같은 아무것도 아닌 이 이름
무슨 놈의 힘이 되기를 하나
능력이 있기를 하나
그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이 이름에
영광 돌리겠다고 하니
그런 자를 가만히 두겠냐 말이죠.
세상은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그래서 기껏 쓰는 무기가 존재를 없애 버리는 존재의 힘을 보여주는 죽음이다 말이죠.
그러니 존재는 말려드는 겁니다.
이름에 말이죠.
좌우에 어떤 날 선 검보다 예리하여 찔려 쪼개는 겁니다.
존재로 승부를 걸겠다고 하는 것은 누워서 침뱉은 격이다 말이죠.
존재를 없애 버리니까
오히려 이름이 또렷하게 살아남더라 말이죠.
십자가에 못 박아 하나님의 저주로써 예수 라는 존재를 없애버리니까
괜히 죽였어
오히려 이름이 더 살아 움직여서 이 이름을 막을 길이 없는 겁니다.
자기들이 아무것도 아니다고 여겼던 그 이름을 막지를 못해요 못해
그러니 차라리 애시당초 존재로 볼게 아니라
허상으로 따질게 아니라
해봤자 의문의 반복잉께
차라리 이름에 항복하자 말이죠.
어차피 막지를 못하는 이름잉께
그 이름 앞에 무릎 꿇자 말입니다.
찬양이란 그 이름에 무릎 꿇는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 동안 엉뚱한 우상이나 인간에게 무릎 꿇었기에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찬양을 하고
그들이 보기 싫어하는 그 이름에 무릎 꿇는 것을 그들 보란 듯이 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회개입니다.
존재는 아무리 많아야 일만 군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 이름]은 일부러 더 나은 일만 군사 라써 이만 군사이다 말이죠.
상대적으로 더 나은 것이기에 약올리는 식입니다. 약을 바짝 올려 시기케 한다 말이죠.
(눅 14:31, 개역)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즉 이말은 저쪽이 일만 군사이고 이쪽이 이만 군사이다가 아닙니다.
이 쪽이 일만 군사 보다 훨씬 적은 딸랑 300명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만 군사라고 우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존재 VS 존재 인, 일만 VS 이만 아니라
존재 VS 이름 인, 일만 VS 더 나은 300명이다는 겁니다.
존재가 이름한테 지는 겁니다.
존재 일만명이 이만 군사에게 지는 것을 억울해 하겠습니까?
딸랑 300명에게 지는 것을 억울해 하겠습니까?
자손대대로 놀림깜은 어느 것이겠습니까?
찬양은 그럼 이 둘 중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그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분명 존재로 따지면 분명히 적은데
믿음으로
이름으로 따져서 보면 훨씬 배로 많은 겁니다.
이만 군사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300명 군사를 뽑을때에 그것도 세 번에 걸쳐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를 뽑은 겁니다.
내가 무시했던 닭이 나를 대신해서 우는 겁니다.
우는 자가 복 있거든요,
과연 누가 우상의 존재에서 벗어난 시선으로 그 이름에 영광돌릴수 있겠습니까?
역시나 다윗은 곧 찬양자는
바로 이 보호자 싸움
이름 전쟁
구원전쟁
십자가전쟁
출애굽전쟁을 하자 라는 식입니다.
애굽이 그 당시 최강대국이다 말이죠.
상대적인 이스라엘은 최약소국이다 말이죠.
이 둘을 싸움 붙이면
이것은 보나 마나 뻔하다 말이죠.
그런데 이런 보나 마나 뻔한 존재의 싸움에
이름 전쟁이 개입이 되니까
오히려 최강대국이 쨉도 안되는 겁니다.
초전박살이 나도 너무 너무 박살이 나더라 말이죠.
이것이 찬양 전쟁입니다
저들은 죽으면 찬양을 하지 못하나
왜? 존재전쟁 우상전쟁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우상에게 영광을 돌리는
전쟁승리를 사람과 우상이 차지하는 전쟁이지만
우리는 이름 전쟁 이기 때문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영원히 찬양할 수밖에 없는
주의 이름에 영광 돌리는 전쟁을 하는 겁니다.
이제 그 출애굽전쟁이
십자가의 전쟁으로 더 나은 전쟁으로 우리에게서 매일 매일 벌어지는 겁니다.
이미 승리한 전쟁을 넉넉히 누릴 수밖에 없도록 말이죠.
이 찬양을 멈출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부르는
주의 이름 찬양입니다.
천국에 가면 딴거 안합니다.
오로지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그 영광을 지금 이 땅에서 찬양하면서 주의 이름에 영광 돌리는
천국을 미리 누리는 겁니다.
(창 29:35, 새번역) 『그가 또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는 속으로 "이제야말로 내가 주님을 ㉣찬양하겠다" 하면서, 아이 이름을 유다라고 하였다. 레아의 출산이 그쳤다. / ㉣히, '오다'』
(창 49:8, 새번역) 『㉠유다야, 너의 형제들이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너는 원수의 멱살을 잡을 것이다. 너의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 ㉠유다라는 이름은 '찬양'에서 유래함』
(룻 4:14, 새번역)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삼하 22:50,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 뭇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대상 16:10, 새번역)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대상 16:35, 새번역) 『너희는 부르짖어라. "우리 구원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여러 나라에 흩어진 우리를 모아서 건져주십시오. 주님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해주십시오."』
(대상 29:13, 새번역) 『우리 하나님, 우리가 지금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찬양합니다.』
(느 9:5, 새번역)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가 외쳤다."모두 일어나서, 주 너희의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은 찬양을 받아 마땅합니다. 어떠한 찬양이나 송축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다 기릴 수가 없습니다.』
(욥 1:21, 새번역) 『이렇게 말하였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 ㉥또는 '떠날 것입니다'』
(시 18:49,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 뭇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시 22:22, 새번역) 『주님의 이름을 나의 백성에게 전하고, 예배 드리는 회중 한가운데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시 30:4, 새번역) 『주님을 믿는 성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라.』
(시 44:8, 새번역) 『우리는 언제나 우리 하나님만 자랑합니다. 주님의 이름만 끊임없이 찬양하렵니다. (셀라)』
(시 45:17, 새번역) 『내가 사람들로 하여금 임금님의 이름을 대대로 기억하게 하겠사오니, 그들이 임금님을 길이길이 찬양할 것입니다.』
(시 52:9, 새번역)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 앞에서, 선하신 주님의 이름을 우러러 기리렵니다.』
(시 63:4, 새번역)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내가 손을 들어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렵니다.』
(시 66:2, 새번역) 『그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하여라.』
(시 66:4, 새번역) 『온 땅이 주님께 경배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하여라. (셀라)』
(시 68:4, 새번역)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그의 이름을 노래하여라. ㉠광야에서 구름 수레를 타고 오시는 분에게, 소리 높여 노래하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 앞에서 크게 기뻐하여라. / ㉠또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에게'』
(시 69:30, 새번역) 『그 때에, 나는 노래를 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련다. 감사의 노래로 그의 위대하심을 알리련다.』
(시 89:12, 새번역) 『자폰 산과 아마누스 산을 주님이 창조하셨으니, 다볼 산과 헤르몬 산이 주님의 이름을 크게 찬양합니다.』
(시 99:3, 새번역) 『만백성아, 그 크고 두려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거룩하시다!』
(시 100:4, 새번역)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시 102:12, 새번역) 『그러나 주님, 주님은 영원히 보좌에서 다스리시며, 주님의 이름은 대대로 찬양을 받을 것입니다.』
(시 102:21, 새번역) 『시온에서 주님의 이름이 널리 퍼지고, 예루살렘에서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 울려 퍼질 때에,』
(시 105:3, 새번역)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을 찾는 이들은 기뻐하여라.』
(시 106:47, 새번역) 『주, 우리의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여러 나라에 흩어진 우리를 모아 주십시오. 주님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십시오.』
(시 113:1, 새번역) 『㉠할렐루야.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 ㉠또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시 113:2, 새번역) 『지금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 것이다.』
(시 113:3, 새번역)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 것이다.』
(시 122:4, 새번역) 『모든 지파들, 주님의 지파들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에 따라 그리로 올라가는구나.』
(시 140:13, 새번역) 『분명히 의인은 주님의 이름에 찬양을 돌리고, 정직한 사람은 주님 앞에서 살 것입니다.』
(시 142:7, 새번역) 『내 영혼을 감옥에서 끌어내 주셔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내게 넘치는 은혜를 베푸시니, 의인들이 나를 감싸 줄 것입니다.』
(시 145:21, 새번역) 『나는 내 입으로 주님을 찬양하련다. 육체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영원히 찬송하여라.』
(시 148:5, 새번역) 『너희가 주님의 명을 따라서 창조되었으니, 너희는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시 148:13, 새번역) 『모두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 이름만이 홀로 높고 높다. 그 위엄이 땅과 하늘에 가득하다.』
(시 149:3, 새번역) 『춤을 추면서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소구 치고 수금을 타면서 노래하여라.』
(사 24:15, 새번역) 『동쪽에서는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바다의 모든 섬에서는 사람들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것이다.』
(사 25:1, 새번역) 『주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고, 예전에 세우신 계획대로 신실하고 진실하게 이루셨습니다.』
(사 42:8, 새번역) 『나는 주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렘 7:30, 새번역) 『"나 주의 말이다. 참으로 유다 백성은, 내가 보기에 악한 일들을 하였다. 그들은, 나의 이름을 찬양하려고 세운 성전 안에다가, 자기들이 섬기는 역겨운 것들을 세워 놓아서 성전을 더럽혔다.』
(렘 13:11, 새번역) 『띠가 사람의 허리에 동여지듯이, 내가 이스라엘의 온 백성과 유다의 온 백성을 나에게 단단히 동여매어서, 그들이 내 백성이 되게 하고, 내 이름을 빛내게 하고, 나를 찬양하게 하고, 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렘 32:34, 새번역) 『오히려 그들은, 내 이름을 찬양하려고 세운 성전 안에 자기들이 섬기는 역겨운 것들을 세워 놓아서, 성전을 더럽혔다.』
(렘 33:9, 새번역) 『그러면 세상 만민이 내가 예루살렘에서 베푼 모든 복된 일들을 듣게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나에게 기쁨과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이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도성에 베풀어 준 모든 복된 일과 평화를 듣고, 온 세계가 놀라며 떨 것이다.』
(욜 2:26, 새번역) 『이제 너희가 마음껏 먹고, 배부를 것이다.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의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찬양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마 21:9, 새번역)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 ㉣시 118:26 ㉤'구하여 주십시오!'를 뜻하는 히브리어였으나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막 11:9, 새번역)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 ㉠시 118:25; 26 ㉡'구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여기에는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요 12:13, 새번역)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 ㉢'구원하여 주십시오!' 라는 뜻을 지닌 말로서 찬양에서 쓰임 ㉣시 118:25; 26』
(행 19:17, 새번역) 『이 일이 에베소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에게 알려지니, 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였다.』
(롬 15:9, 새번역)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삼하 22:50; 시 18:49』
(계 15:4, 새번역) 『㉡주님, 누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주님 앞으로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정의로운 행동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 ㉡렘 10:7』
마귀는 자기의 확정된미래를 아는데 확정된 미래말고 시간, 역사적으로도 되어질일을 아나요?
마귀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보충물로만 작용되는
피조물입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미래라는 것은 시간 개념이 아니라
미래는 관계개념으로 보시면
당연히 마귀는 시간이나 역사나 묵시나 모조리 다 소외된 입장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시간 공간 역사 묵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과거의 산물로써만 공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심판의 주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심판 하지도 못하는 마귀에게
이미 죽기를 무서워 깡패가 겁주니까 죽였뿐다 ~~ 라는 겁주기에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하는 겁니다.
그럼 왕노릇은 안죽는다는게 아니라
죽어도 상관없는 왕이 이 사망의 권세로(수건을 벗을 수 없는 유대인처럼 완악한)
죽여버리겠다는 겁주기에 그거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심각한게 없다고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는 겁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겁먹은 자에게
7천명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런 7천명은 오로지 주의 피의 관계로써만 보여주시는
마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독자적일수가 없기에
모르도록 하신 분에 의해서만 움직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3가지 시험은 결국 실질적으로 쥔 것이 아니라
껍데기만을 쥐고서 허상을 흔들어 대는 겁니다.
진짜 실상은 예수님이 쥐시지만 정작 그런 것으로 묻고 따지지 않습니다.
일체 묻지 않고 오히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미래완료만을 물으십니다.
상한심령만 부어주시는 겁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만 부어주시는 겁니다.
마귀가 도저히 누리지 못하는 것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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