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진노 속에서의 용서) (시편 102)

 

 

(2:6, 공동) 성서에 어떤 이가 이렇게 증언한 대목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잊지 않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돌보십니까? / 시편 8:4-6.

 

(1:9, 새번역) 주님께서는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님의 하나님께서는 주님께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셔서, 주님을 주님의 동료들 위에 높이 올리셨습니다" 하였습니다.

(1:10, 새번역)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태초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늘은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 102:25-27(칠십인역)

(1:11, 새번역) 그것들은 없어질지라도, 주님께서는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것들은 다 옷처럼 낡을 것이요,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옷처럼'이 없음

(1:12, 새번역)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두루마기처럼 말아 치우실 것이며, 그것들이 다 옷처럼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같으시고, 주님의 세월은 끝남이 없을 것입니다."

(1:13, 새번역) 그런데 하나님께서 천사 가운데서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 110:1(칠십인역)

(1:14, 새번역) 천사들은 모두 구원의 상속자가 될 사람들을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영들이 아닙니까?

 

 

 

천사와 하나님 사이에 인간이 낑겨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영적인 존재이지만

정작 인간은 육이기에

 

영 에서 배제된 자들인 겁니다.

 

사실 그 중간에 낑길 자격 조차도 없습니다.

육이 어딜 감히 거기에 낑겨있냐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낑겨 있다 말이죠.

뭔가 목에 탁 걸린것처럼 뱉어 낼려고 해도 안되고

삼킬려고 해도 안되는 그런 낑겨있음입니다.

 

그렇다면 저 영적존재에 비해서

인간은 항상 이 배제된 입장인 한계성에 늘 부딧히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결국 영원함의 입장에서는

늘 사라질 상황에 놓여진 겁니다. 없어짐 곧 누락 말이죠.

 

(102:25, 개역)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룰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102:26, 개역)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102:27, 개역)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시고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은바 되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 입니까?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물론 당연히 주님이 창조주이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땅도 하늘도 모두다 이 창조주를 위해서 동원이 되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영광받기 위해서 동원이 된다 말이죠.

 

그래서 그 다음 구절에 바로 역으로 반전이 되는 표현이 나옵니다.

땅의 기초를 두시고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은바 되었다고 해놓고서는

천지는 없어진다고 합니다.

옷과 같이 낡아진다고 합니다.

무엇이? 땅과 하늘이 말이죠.

그래서 옷이 낡아 새옷으로 바꾸어 갈아입듯이

바꾸시면 바뀌어진다는 겁니다.

 

예로 땅과 하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서

인간의 사고방식은 그 안에 갇혀서 생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럼 땅과 하늘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생각을 하면 되지 않느냐?

우주라는 하늘도 사실상 하늘이기에 못 벗어나는데

설사 벗어났다 칩시다.

그런데 마치 강요된 선택처럼 우주는 미지의 공간이라서 그런지

항상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외계인은 공포의 대상 적으로 보게 되는 거지요.

딱 한분만 봐도 그렇죠.

바로 예수님입니다.

 

인간은 한계점이 있는데 예수님은 영원한 분이다 보니

그 분이 외계인으로써 외부에서 오니까

내부인들은 감당이 안되고 공포를 느껴서

이 이질적인 존재를 죽여서

내부의 공동체를 유지할려고 한다 말이죠.

 

동물농장에 봤던가? 세상에 이런 일이 였던가?

고슴도치 새끼들을 한 우리에서 키우고 있는데

한 녀석이 털이 빠지게 되니까

외모상으로 졸지에 자기들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집단구타와 왕따로 인해서

적으로 간주된 모양을 한 그 고슴도치를 죽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세계뉴스를 보다가 나온 내용인데

일본의 원전사고로 인해

한 아이가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데

별명이 너는 방사능이야 이라는 별명을 얻어서

그 이질적인 존재를 괴롭히고

심지어 삥을 뜯어서

초등학생때부터 중 1 지금까지 천만원 넘게 돈을 뜯어냈다는 겁니다.

어차피 방사능인 놈은 나쁜놈이기에 돈을 뜯어내어도 된다는 식이다는 거죠.

 

http://v.media.daum.net/v/20161110102111570

 

 

그런데 웃끼는 것은 이질적인 것은 그 아이 이지

그 아이가 만진 돈은 방사능이 아닐까요?

그것도 왕따 시켜야지?

 

이것은 마치 마녀사냥처럼 결국 방사능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삥 뜯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왕따였다는 거죠.

 

벌거벗은 임금님인 그네언니도 문제이고

그를 꼭두각시처럼 다룬 순실이도 문제이고

검찰도 같은 공범이고

신천지 당도 역시 같은 공범이고

 

여기서 중요한 야당 또한 같은 공범이다는 거죠.

그 동안 방관했으니까 말입니다.

 

어치파 양쪽다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두 양쪽 다 백성들 등쳐먹는 거다 말이죠.

 

그럼 백성들은?

자기 배를 불려주는 대통령을 뽑겠다고 했으니 역시가 같은 유유상종이다는 겁니다.

트럼프가 당선되니까

댓글에 아이구 미국도 별수 없군 우리는 이미 쥐박이를 거쳐봐서 아는데

이제는 너희들 차례군 이라고 비꼬더라 말이죠.

아니 그래서 그네언니를 뽑았냐 말이죠.

 

지금 당장 배불리 먹여주는 자를 뽑는 것이

왕따 이지메 시키고 삥뜯는 일본 아이들처럼

역시나 똑같다 말이죠.

 

이 구조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헤어지고 낡아지고 바꾸면 바뀌임 당해야할 소외된 입장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해 아래 새것 없다 말이죠.

 

그럼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낡아지고 옷처럼 헤어지고

양말에 빵구멍이 난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쳐다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땅에 기초를 두시고 하늘을 손으로 지으신

천지를 없애 버리는 분의 취지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못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발람의 꾀를 부리는 자로 작용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속이듯이

서로가 서로를 속여서

누워서 침뱉기(오이디푸스) 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이런 구조에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거죠.

 

그 밑바닥에는 둘째사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공통분모는 둘째사망이다는 거죠.

 

앞의 글에서 이것을 바로 우리에게 영광 돌리지 마시고

우상에게 영광 돌리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오로지 주의 이름에만 영광 돌리소서 라고 말이죠.

 

김대식이라는 뇌과학자가 쓴 책 내용중에

트라우마를 다룬 내용이 있는데

그 양반이 트라우마는 죽을때까지 계속 반복이 되면서 떠오른다는 점이기에

골치아픈 것이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즉 해결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방법이 있습니다.

방금 우상에게 영광돌리지 말고 주의 이름만 영광돌리소서 라고 했잖아요

여성이 아이를 낳는 고통은 인간의 고통 지수에서 가장 높은 수치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얼마나 큰 트라우마가 되겠냐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싹 다 잊어버리는 것은

그 쭈굴쭈굴한 핏덩이를 안아보는 순간 그 고통을 다 싹다 잊어버린다 라고 합니다.

즉 창조자의 기쁨을 그 순간 여성은 누린다는 거죠.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누리는 기쁨입니다.

죽음 속에서 낳은 아이를 안아보는 기쁨

 

이것이 트라우마 보다 더 자극적인 더 큰 트라우마이기에 잊는 겁니다.

창조주의 기쁨 말이죠.

엽기 보다 더 엽기적인 말도 안되는 것을 누릴때에 곧 창조주의 기쁨을 누릴때에

잊는다 말이죠. 이것을 숭고함이라고 하던데

거룩함은 거룩함인데 엽기적인 거룩함 도저히 충격적이여서 잊어버릴수 없는 거룩함

고통 자체가 쾌락이 되는 쾌락 하니까 또 오해할텐데 프랑스 철학의 용어를 번역하다 보니 저렇게 밖에 표현 못하는데 바로 주이상스이다 라는 겁니다.

 

http://blog.aladin.co.kr/mramor/234347

 

구지 성경에서 찾자면 십자가라는 스캔들 불륜의 사랑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고

이방인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 말이죠.

불편한 십자가 라는 겁니다.

물론 철학의 한계점은 바로 원수가 없다는 겁니다.
원수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아니라 그냥 고생인 거죠.
기껏 원수를 찾아본들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 즉 대표적인 민족이나 국가의 원수이지
예수님의 원수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니 향유는 곧 영광이 아닙니다.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의 사고방식 또한 이들과 다를바 없습니다.
예수님의 원수가 없어요.
그러니 기껏 하는 것이 광화문에 모여서 시위를 하는 겁니다.
본향이 땡겨주지 않기 때문에
소망이 없기에
이 땅이 전부이기에
이 땅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기에 모든 것을 거는 겁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요즘 세상에 우상에게 영광 돌리는 자가 어디있냐 라고 하시겠지만

순실이 사건 보세요

사실상 순실이에게 세금까지 다 내어주고

간 쓸개 다 빼어주더라 말이죠

그네언니만 그런게 아닙니다.

대통령은 한국인의 대표성이니 사실상 국민 모두가 다 그렇게 한 겁니다.

 

무당에게 했잖아요 여러분이

그렇게 똑똑하다는 여러분이

미국인도 마찬가지로

거짓삯꾼에게 다 주잖아요.

 

안 그런 인간 있으면 나와 보세요

뭐 한국 기독교인은 안 그랬다고요? 웃끼지 마세요

다 그랬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란 마치 낡은 옷처럼 헤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새옷으로 바꾸어야 하듯이 바뀌는 조치를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뭔가 영원한 것 있다 싶어서 그것에 빠져 중독되어 있을때에

그것을 헤어지게 낡아지게 너덜너덜하게 만듬으로써

창조주가 만들었다는 조치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라꼬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자신을 보면서

주님의 조치

창조주의 조치인

죽고 사라지게 하는 조치

낡고 헤어지게 하는 조치를 통해서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천사보다 조금 더 못하지만

천사가 부러워 하는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냐? 천사가 부러워 할게 따로 있지 이런 것을 부러워 해?

뭘 그걸 부려워 해샀다냐~~~

 

마치 이것은 남자 보다 여성이 더 몇배나 부정한 존재로써
(아이 낳음, 월경 등등으로, 남자는 7일 여자는 14)

그런 부정한 여인을 더 긍휼히 여기시는, 더더욱 더욱 사랑하시는 것과 같다 말이죠.

 

그래서 누가복음 등등에서 남자를 고발하는데 있어서

무능한 어린아이와 부정한 이방인과 특히 이방인 여자

또 나약한 여인을 통해서 남자를 고발하더라 말이죠.

(한나의 기도, 마리아의 기도도 마찬가지)

 

그런데 천사는 미리 부러워 하는 겁니다.

남자들을 여성을 통해서 고발하는데 있어서

미리 나약한 인간이 이런 조치에 놓여져서 긍휼을 바라보는 그 모습을

오히려 부러워 한다는 거죠.

 

(2:1, 개역)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2:2, 개역)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2:3, 개역)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2:4, 개역)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2:5, 개역)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2:6, 개역)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2:7, 개역)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2:8, 개역)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2:9, 개역)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절에 [그러므로] 라고 2장이 시작하기 때문에 1장을 읽어보심이 좋습니다.

아무튼 천사보다 잠간 못하게 하심은

바로 죽음의 고난에 뛰어드셨다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말이죠.

이것은 천사를 위해 뛰어드심아 아니다는 겁니다.

바로 인간 때문에

그 놈의 사랑 때문에

자기 사랑이 물에 빠졌다고

죽음에 빠졌다고 죽음에 뛰어들었다는 겁니다.

천사들은 이것을 마치 신랑이 물에 빠진 신부를 구출하는 장면으로 본다 말이죠.

마치 아가서에서 술람미 여인을 그 섬머슴아 같은 여인을

손이 거칠어서 여성적인면의 구석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이 밤마다 찾아와서 창문을 열어다오 라는 노래를 부를때에

동네 처자들이 부러워 죽는다 말이죠.

배아파 하는 것처럼

천사들이 부러워 하는 겁니다.

 

여기에다가 모든 피조물 까지

이 고난에 참예하는데

 

(8:18, 개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8:19, 개역)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8:23,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8:24, 개역)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8:25, 개역)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8:26, 개역)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8:27, 개역)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8:28, 개역)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말이죠.

 

그들 모든 피조물들이

이 고난에 뛰어듬이 다른 피조물 때문에 뛰어듬이겠습니까?

아니면 인간 곧 신부에게 뛰어듬이겠습니까?

 

이들은 천사처럼 죄가 뭔지 모른다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 말이죠.

 

그럼 선악과 따먹은게 자랑이냐가 아니라

죄를 알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봄으로써 용서를 바란다는 겁니다.

용서를 바라는 이 모습을

이 신부의 모습을

사랑을 보았기 때문에 사랑을 바라는 이 모습을

저들은 오히려 주변의 코러스처럼 깔려있지

주인공의 사랑의 대상물은 아니다 말이죠.

주인공의 여자친구는 아니다 말이죠.

이 두 관계를 옆에서 합창하는 코러스를 부르는 자들이지

여자친구가 아니다 말이죠.

 

여자친구라는 아이돌 걸 그룹도 있던데

 

마찬가지로 천사가 이것을 부러워 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천사 보다 조금 못한 존재이지만

천사가 부러워 하는(많이 탕감받았기에 많이 사랑하는 이 둘의 관계를)

긍휼의 대상이다는 겁니다.

이 영광에 참예되었는데

그래서 영광의 관을 받는데

그래서 천사도 부려먹는데, 명령도 하는데

이 영광의 관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면루관도 반납하더라 말이죠.

 

오히려 주의 이름만 영광 받으소서

세세토록 영원토록 찬양받으소서 라고 영광을 반납한다 말이죠.

 

(1:5, 개역)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딤전 1:17, 개역)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벧전 1:25, 개역)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1:6, 개역)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18, 개역)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4:10, 개역)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4:11, 개역)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이거 뭐 사랑의 극치 아니냐 말이죠.

십자가의 용서가 온 우주에 감동 감화로 채우는거다 말이죠.

이것을 찬양토록 세움받은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듯이

인간이라는 성령의 전 곧 신부된 교회는 주의 이름을 찬양코자 세움받았다는 겁니다.

 

그럼 이것을 더더욱 보충하기 위해서 누가 동원이 된다?

네 맞습니다. 마귀입니다.

 

이 둘의 관계를 말하기 위한 보충물로써 동원이 되는 마귀다 말이죠.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서 마귀는 베드로를 잡을 수밖에 없는 보충물이였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말이죠.

어떤 누구도 끊을수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당당함과 뻔뻔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칼로서 기근으로써 적신으로써

높음으로써(39) 권세자들로써 사망으로써(38)

동원이 되는

오히려 더 밀착된 관계임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왜 이렇게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사람이 무엇이관대

천사 보다 못한대

? 생각해 주시느냐 말이죠.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천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죄 값을 치르시러 뛰어드심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도 아니라

 

오로지 천사 보다 못한 인간을 위해서 뛰어드심이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찬양을 천사 보다 못 불러요

티나터너의 영화에서 이 작은 나의 빛을 부르는 꼬마 티나터너가 교회에서 쫏겨나는 장면이 생각났는데요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ost This little light of mine

 

https://www.youtube.com/watch?v=jOehCtqJq7I



 

 

맞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른 보다 찬양 못 불러요

맞습니다 맞고요
악보 박자 음정 콩나물 전혀 모릅니다.

시끄럽다 말이죠.
지 멋대로 막 불러요 막 ~~~
어른들이 이런 막사는 자들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눈치도 없이 말이죠.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8:2, 개역)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그러나 이 어린아이의 찬양을 통해서 영광받으시는 겁니다.

이들이 잠잠하면 안 그러면 돌들이 찬양한다 말이죠.

 

어른의 입장에서는 어린아이의 찬양은 박자 음정 다 틀리는 삑사리이다 말이죠.

그런데 우짭니까 천사들이 부르는 정통 정식 정석 FM 제대로 부르는 찬양보다

 

이 삑사리의 찬양, 곧 음정 박자 다 틀리는 이 젖먹이의 찬양이 더 나은 찬양인데요 뭘

 

이 삑사리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그런데 이 미끼가 예수님의 원수를 잡아요 글쎄

주님이 이렇게 편파편애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마귀는 그 이유로 말려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 대세의 흐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아야 할 정도이다는 겁니다.

단절이지요 단절

 

성령을 무슨 놈의 개방과 연결시킬려고 하냐 말이죠(성화론자와 개혁주의자들의 주장)

성령은 단절입니다.
철저한 단절이다 말이죠.

목숨을 내어놓어야 한다 말이죠

죽었구나 생각하라 말이죠.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16:2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도대체 젖먹이가 무엇이관대

이 젖먹이의 찬양을 생각하시냐 말이죠

노래 잘 부르는 자들이 허허들판 깔려있는데

 

잉여점(미약하기 짝이 없는 무능한)에 꼿힌거다 말이죠.

사랑은 곧 아가서는

솔로몬 왕이 다른 여인도 아닌 오로지 그 섬 머슴아 같은 그 여인에게 꼿히는 겁니다.

이유 없어요

이유가 있으면 사랑이 아니다는 거죠.

 

찬양이란 그래서 원수를 잡는거다 말이죠

원수 못 잡는 찬양은 찬양이 아니무이다.

원수 못 잡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무이다.

 

광화문 집회 보세요 천만명이 모이든 백만명이 모이든

절대 원수 못 잡습니다.

개인의 원수는 원수도 아니무이다.

그런 기도 안 들어준다 말이죠.

하나님의 원수도 아닌

예수님의 원수를 잡아달라는 기도하는 자는 아무도 없어요.

 

며칠전에 어머니께서 한나의 기도도

마리아의 기도도 천지 다 원수에 대한 기도 뿐이더라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이 예수님의 원수에 대한 기도가 아니면

기도가 아니무이다.

 

긍휼을 베풀어 달라 라는 부르짖음이다 말이죠.

원수로부터 건져내달라는 부르짖음이다 말이죠.

 

이 무능한 자를 통해서 찬양하심은

바로 원수를 발등상 위에 놓기 위함이다 말이죠

그리고서는 주의 오른팔을 높이 드심이다 말입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머리를 (시편 110)

주의 뿔을 높이 드심(시편 112) 이다는 겁니다.

 

결국 시편 102편은

허무 가운데

탄식 가운데

광야 곧 죽음 가운데 집어넣으심은

 

그 허무도

그 광야도

그 죽음도

 

낡아 헤어지는 옷처럼 사라질 것들이다는 겁니다.

결국 상대적인 영원한 것과 대조키 위함인데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만 영원하다는 겁니다.

 

이 주의 이름만 영원하기에

찬양은 주의 이름만 영광돌리기 위함이고

여기에 노래 잘 부르는 자들이 아닌

삑사리 밖에 안되는 이 젖먹이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겠다는 겁니다.

 

천사 보다 못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통해서 영광받으시겠다는 겁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인자가 무엇이관대

그러니까 영광받으시겠다는 겁니다.

날때 부터 소경인 자들은 신학박사들이 연구대상 실험쥐 다루듯이 다루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누구 죄 때문에 저렇게 되었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하신 예수님이 죽은자를 살려 버리니까
도리어 살았다고 우기는 자들이 죽은자로 들통이 나더니 부랴 부랴
안절 부절 못하면서 상황이 뒤짚어 지는 겁니다.

그렇게 여유롭게 한가하게 신학연구 타령하는 놈들이
어떻게 하면 죽여버리지? 저 입을 막을까 라고 다급해 지더라 말이죠.

 

비록 우리의 몸은 원래 사라질 몸이지만

비록 뭘 해도 삑사리요

뭘 해도 죄 밖에 안나오는 몸이지만

이 몸으로

이 사라질 몸인 죄인이지만

낡고 헤어질 몸인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다면

이것 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있냐 말이죠.

그들이 욕하는 소경은 정작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데
정작 이 소경을 통해서 저들은 주의 이름을 저주하는 본색이 들통이 나는 겁니다.

 

맞습니다. 저 개 맞고요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긍휼로 찬양하지 않습니까?

 

나중에 늙어서 힘 없고

또 날때부터 소경

날 때부터 벙어리로 태어났다고 손 치더라도

 

이 삑사리 몸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수 있도록 하셨다는 그 자체가

오늘 시편 102편이

비록 바벨론 포로 되어 찬양을 못하는 장소에 배치된다 손 치더라도

오히려 바벨론 포로 전 보다 더 나은 찬양을 하고 있다는

그 감격에 사로잡혀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주의 끊을수 없는 사랑을 외치는 겁니다.

잃어버린 자를 되찾는 주의 이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노래 못 부른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음치들만 모아서 찬양자 삼으시는 겁니다.

삑사리들만 모아서 찬양자 삼으신다 말이죠.

세세토록 찬양케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 의인을 부르러 오신게 아닙니다.
 

(102:26, 개역)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102:27, 개역)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

(102:28, 개역)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누가 봐도 끊어진 단절된 자를 통해서
주 앞에서 굳게 서도록

불속에서라도

광야의 죽음 속에서라도

찬양케 하십니다.

비록 입이 없고 입술이 없이 태어났다 손치더라도
비록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다 손치더라도
새입술로 노래하도록 태어난 겁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하기 위해 태어난 겁니다.

이제 신부 베드로와 신랑 예수님 사이에
그 중간에 천사가 낑겨서 억수로 부러워 합니다.

인간이 중간에 낑겼는데 이제는 천사가 낑겨버린 겁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돌보아 주심)하시나이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 지요 ~~~~

 

(8:4, 개역)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144:3, 개역)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2:6, 개역)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주 예수 말씀이 온 세상 만민들

흉악한 죄에서 떠나라 하시니

이 말씀 듣고서 새생명 얻으라

이 기쁜 소식 전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영생의 복락과 천국에 갈길을

만백성 알도록 나가서 전하세

주 예수 말씀이 이 복음 전하라

우리게 부탁하셨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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